기대 반,걱정 반 그리고 그보다 더 큰 호기심으로 잡은 37박 38일의 캐나다 여행일정 중엔 두 개의 산을 오르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그 중 하나가 부가부(Bugaboo)트레킹이었는데,복잡한 장비와 전문적 등반기술 없이도 도달할 수 있었던 보웰(Vowell)빙하의 '살갗'에 대한 특별한 경험과 그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은 그곳에 쌓여 있던 만년설 만큼이나 오랜 시간 동안 신비롭게 내 가슴에 남을 것이다.
95년 7월 13일(목) 오전 6시. 시간을 절약하려고 라면과 김치로 아침 식사를 했다. 현지인들이 김치 냄새에 워낙 민감한 반응들을 보여 베란다의 식탁에 나가 식사를 했다. 사실 나도 그들의 비릿한 냄새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오전 8시 30분, 이틀간 머물렀던 A.C.C(Alpaine club of Canada)를 나와 수퍼마켓에서 식량과 간식을 구입한 뒤 부가부를 향해 떠났다. 알버타주에서 브리티시 컬럼비아주로 진입하면서 시차를 수정, 27세인 나는 1시간 젊어졌다. 주변의 빽빽한 숲과 거대한 산 때문에 시속120km이상으로 달려도 전혀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손이 닿을 듯이 가까와보이는 데도 접근하려면 의외로 시간이 걸리고, 다가서고 나서야 비로소 크기를 알 수 있게 하는 산들-. 빤히 보이는 피사체에 대해 거리의 환산이 아닌 크기의 환산을 한다는 것은 참 생경스러운 감각의 발동이다.
길가에 널려 있는 다람쥐의 주검들과 수시로 튀어나오는 야크떼-. 그야말로 '동물 반 사람 반'인 곳이다.
몸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약을 사 먹었는데,코프시럽을 달라는 말을 기침 나오는 약 달라는 말로 착각이라도 한 것인지,약을 먹어도 기침은 점점 심해진다. 이러다 정말 고국으로 후송되는 것이나 아닌 지 모르겠다.
브리스코(Brisco)진입 후 약에 취해 잠을 자다 깨어나보니 차는 환상방황을 하고 있다. 결국 1시간 30분만에 제 길을 찾았다. 2년만에 다시 찾아온 이 곳에 벌목을 위해 새로이 만들어진 길들이 본래의 길보다 훨씬 넓고 여러 갈래로 나 있었기 때문이다.
숲 사이로는 흔히 사슴이 발견되고 진한 숲 냄새가 머리를 어지럽힌다. 오후 2시 20분경 주차장에 도착, 온 몸에 모기약을 뿌리고 2박 3일치의 식량과 장비만을 챙겼다.
이 곳에서는 다람쥐들이 타이어를 물어 뜯는 일이 흔하다. 때문에 차바퀴를 철망으로 둘러싸고 나무와 돌로 고정시켰다. 저 위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오후 3시 10분경 주차장을 출발하여 잘 닦여진 트레일(오솔길)을 올랐다. 이 나라 사람들은 좀체로 철근이나 콘크리트로 구조물을 만들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그 곳의 돌과 나무를 이용해 인간이 자연에 개입한 흔적을 최대한 줄인다.
주차장에서 1시간쯤 걸었을 때 거대한 부가부빙하는 파르스름한 속살을 내보이며 우리를 맞이했다.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 만년설을 밟으며, 더군다나 모기까지 쫓고 있으니 정말 우습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곰보다 더 끔찍하게 여겨지는 모기떼에 쫓겨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카인대피소(Kain hut)에 도착하니 오후 5시 30분. 관리인이 없어 우리는 셀프 피(Self fee)봉투에 야영 내용을 적어 넣고 잔돈이 없어 15캐나다 달러(한화 약9000원)를 넣어서 집전함에 넣었다.
40여분을 걷자 애플비 캠프장(Applebee campground)이다. 이 곳에 텐트를 치고 누룽지를 끓여 간단히 저녁 식사를 했다. 내일을 위해 일찍 쉬고자 콘텍트렌즈를 빼려고 보니 아차차, 약 주머니를 차에 두고 왔다.식염수와 비상약,감기약까지 들어 있는데... 이 텐트 저 텐트로 식염수를 얻으러 다녔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모두 시력이 좋다. 그리고 그 좋은 눈으로 날 가엾다는 듯이 바라본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눈이 마를 때마다 하품을 자주 하는 수밖에...
밤 10시가 넘자 갑자기 하늘이 시뻘개진다. 그러더니 서서히 그 빛의 근원체가 드러난다. 달이다. 우리 나라에서 본 달의 대여섯 배쯤 되는 빨간 달. 처음엔 잠도 안 잤는데 해가 뜨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정말 아름다운 순간이다. 결국 자연의 아름다움을 완성시키는 건 빛이다.
7월 14일(금).텐트 밖이 훤해서 눈을 떴으나 아직 새벽 4시다. 밖엔 계속 비가 내리고 있다. 다시 잠을 청했으나 난생 처음 겪는 백야현상 탓에 30분 간격으로 잠이 깬다.
오전 7시 15분에 기상, 아침 식사를 하고 장비를 챙겼으나 계속 비가 오락가락해서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지만 급기야 우박이 쏟아지며 네 사람 모두 텐트 속으로 불러들인다.
이 곳의 클라이머들은 '거지패션(beggar look)'을 즐기는 것 같다. 물론 산에서 옷을 곱게 입기 어렵고 때마다 새 옷을 살 순 없는 일인 데다 옷 살 돈이면 장비를 사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몰라도 이들은 거의 반바지나 다름 없을 정도로 심하게 해진 기ㅐㄴ 바지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깔의 천으로 떡지덕지 꿰멘 옷들고ㅡ 아주 고급스런 윈드자켓을 잘 매치시켜 입는다. 이 곳에서는 이것이 아에 '산쟁이 패션'으로 정착한 듯하다.
오늘 예정이 그리 먼 길도 아니고 특별히 할 일도 없어 다시 잠을 자고나니 오후 1시. 이제 비가 그쳤다. 아예 점심까지 먹고 오후 2시경 출발했다. 하이킹이라고는 하지만 중등산화에 스패츠, 그리고 아이젠을 착용해야 할 만큼 눈이 깊거나 단단히 크러스트 된 곳도 있다. 캠프에서 보웰빙하까지는 크레센트(Crescent)빙하를 건너야 하며, 약 1시간 30분쯤 소요된다.
스노우패치 스파이어(Snowpatch spire)와 부가부 스파이어 사이의 안부로 오르는 길은 경사 60도, 높이 200m쯤의 설벽이다. 피켈이나 알파인스톡을 사용하면 보다 안전하고, 오르는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 유난히 단단히 얼어붙었거나 스텝이 불안정하지 않은 경우엔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아도 좋으나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배낭에 넣어갈 필요는 있다. 만약 동계등반 경험이 있다면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보웰빙하에 도달하니 오후 3시 30분. 눈부신 빙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헉, 하는 소리가 절로 날 정도로 찬 바람이 폐부로 들어오는 느낌이다. 이 눈들은 어떤 마음으로 날 바라볼까? 이 대자연에서 난 그저 한 낱 먼지 같은 존재일 뿐이다.그런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면서 공연히 서럽다.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은 싸늘하다. 다행이도 오후 기상이 좋은 편이다. 윈드자켓으로 충분히 방풍이 된다.하지만 아무리 따스한 날씨라도 온통 눈으로 덮여 있으니 장갑이 없으면 정말 곤란하다. 어떤 경우엔 강렬한 태양의 반사광이나 반사열에 의해 잠깐 새에 설맹이 되거나 화상을 입을 수도 있으므로 고글과 자외선 차단크림 정도는 준비해 가는 게 좋다.
열심히 '증명사진'을 찍고 간식을 하고 오후 4시 40분부터 하강을 시작했다. 시간 여유가 있었으면 보웰빙하를 건너 호저스파이어 매시프(Howser spire massif)서편도 구경했을 것이다. 보웰빙하를 횡단하는 데 1시간 정도면 된다지만 이날은 밤새 내린 신설로 왕복 3시간 정도는 소요될 것 같았다.
하산은 글리세이딩을 하거나 조심스레 걸어내려가도 되지만 로프하강이 훨씬 빠르고 안전하다. 20m쯤 걸어내려간 후 기존 볼트에 60m 로프를 걸고 2피치 하강했다. 그러고 나니 다시 60m쯤 남았다.이 구간은 능력있는 사람은 폼나게 글리세이딩 하면 되지만 자신 없는 사람은 그냥 얌전히 주저앉으면 바닥까지 간다. 적당히 비명만 지르면 영락없는 놀이동산 눈썰매장이 된다. 나는 비닐로 된 비료포대가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살그머니 주저앉았다. 주의할 점은 두 눈을 크게 뜨고 간간히 돌덩이들이 나타날 때마다 두 다리와 양팔(피켈 또는 스톡)을 이용해 급커브를 틀거나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무게중심을 반드시 뒤에 두고 쏟아지듯 미끄러져 내려가야 하며, 몸이 앞으로 쏠려 굴러 내려가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 덧바지도 입지 않은 채 60m를 엉덩이 썰매로 흘러내리고 나니 바지 엉덩이 근처가 흠뻑 젖어 버렸다.
오후 4시 50분, 선명하고 커다란 무지개가 마치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처럼 우리 앞에 걸려 있다. 캠프장으로 돌아오니 5시 30분. 다람쥐의 기습으로부터 식량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식량걸이대에 젖은 바지를 널어놓고 장비 정리를 하는데 흥부네 가족처럼 기운 옷을 입은 청년 한 명이 오더니 이것저것 물어본다.
외국인이 인상적인 건 어쩌면 노란곱슬머리보다 노랗고 긴 속눈썹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는 담배 한 대를 원한다. 그의 담배도 나의 식염수처럼 주차장에 있을까? 담배가 넉넉했던 선배님께서 반 갑이나 남은 걸 다 주셨는데 그 청년은 못 믿겠다는듯, 한 개비만 빼고 다시 돌려준다. "우린 또 있으니까 다 가져가라"고 다시 주니까 반신반의 하며 황송한 표정으로 어정쩡 담배를 받는다. 가만 보니까 어제 주차장에서 우리 옆에서 짐을 꾸리던 사람이다. 남아공에서 왔다는 그 청년은 세수도 안 한 내게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남긴채 치렁치렁 긴 머리칼을 날리며 간다. 캐나다가 담배 값이 비싸긴 비싸구나 싶었다.
저녁식사로 수제비를 큰 코펠에 하나 가득 끓여 먹고 있는데 레인저(공원관리인)가 올라왔다. 그는 우리가 흘린 젤리를 주워들며 음식을 다람쥐에게 주지 말라고 한다. 야생동물들이 인간이 주는 먹이를 먹음으로써 야성을 잃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우리 옆에 앉아 어디서 왔느냐,어디를 다녀왔느냐는 등의 일정을 묻더니 돌아갔다. 그 후 다시 와서는 어제 우리가 납부한 셀프피 봉투에서 1달러를 꺼내 주는 것이다. 셈에는 정말 철저한 사람들이다. '아무도 없는데 뭘...'하고 적당히 했더라면 국제적 망신을 당했으리라.
이 날은 구름이 너무 두꺼워 달을 보기 어렵겠다 싶었다. 옆 텐트 독일인의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힘든 등반을 했던걸까?
7월 15일(토).오전 6시경 일어나니 텐트마다 비어 있다. 햇볕은 따끔거리고 바람은 차고 투명하다. 열흘 전 캐나다에서 머물기 시작한 이래 제일 좋은 날씨다. 부가부의 클라이머들이 그래서 오늘은 새벽같이 등반을 떠났던가 보다. 비가 구직구질 내리던 이틀간은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고 낮잠까지 자면서 꼼짝을 않고 힘을 비축하더니...
그들은 '또 자 클라이머'일망정 '술 퍼 클라이머'들은 아닌 게 확실하다.
이 곳 애플비캠프장에는 예쁜 화장실이 하나 있다. 92년 7월에 산악인 두 명이 손수 지었다는 아담하고 귀여운 이 화장실에 앉으면 창문으로 부가부스파이어가 보인다. 화장실창이 그대로 액자틀이 되고 부가부 침봉이 그 안에 쑥 들어와 실감나는 그림이 된다. 정말 정확한 구도다.
아침 식사를 하고 짐을 정리하여 오전 7시 40분에 캠프를 떠났다. 만년설과 빙하와 여러 봉우리를 뒤로 하고 하산해 주차장에서 짐을 재정리 했다. 언제쯤 다시 부가부를 볼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