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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순 전남대 명예교수
입력 2010.07.02 09:01
호수 2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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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별’ 모임 친구 8명과 출가 전 단체사진… 상해 요릿집에서 송별회
파도가 거친 바닷가에서 나고 자라서 靑山에 대해 늘 동경해
朴光淳
⊙ 1935년 출생. 목포상고, 전남대 경제과 졸업. 전남대 경제학과 석ㆍ박사. 전남대 경영대학원장,
교무처장, 대학원 원장, 경제사학회장 역임. 용봉학술상, 황조근정훈장 수상.
⊙ 現 전남대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법정 스님이 정혜원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는 모습.
뒷줄 왼쪽이 법정, 뒷줄 오른쪽이 박광순 교수
내가 법정(法頂)을 만난 것이 중학교 1학년 때니 한 주갑(周甲)이 넘은 셈이다. 우리는 친구로서 좋아했고, 동문수학(同門修學)하는 학우로서 서로 격려하고 책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매일 어울려 지냈지만, 나는 그가 출가한 이후에 외경(畏敬)하는 마음으로 그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낸 세월이 63년이다. 그가 출가했던 1955년에 눈이 많이 와서 애초에 계획했던 강원도로 가지 못했는데, 그가 입적한 올해에도 눈이 많이 내렸다. 그의 마지막 소망이었던 오두막의 넓적 바위 위에서 다비(茶毘)마저 할 수 없게 됐다.
그는 아무래도 눈과 인연이 많은가 보다. 그래서 평생을 눈처럼 깨끗하고 소박하고 온유하게 살다간 것이 아닐까. 사람들은 그의 많은 글 중에서 ‘무소유’를 좋아하지만, 나는 ‘설해목’을 더 좋아한다. ‘무소유’가 그의 간소하고 청빈한 생(生)의 면목을 대변한다면 ‘설해목’은 그의 강한 듯 부드러운 면모를 잘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14일 저녁, 서울에서 ‘스님이 위독하시다’는 급보를 받았다. 때마침 설 귀경 때여서 표를 구하기 어려웠다. 초사흗날인 지난 2월 16일에 병원을 찾았다. 법정의 손을 잡으니 온기가 느껴졌지만, 하체는 장작개비처럼 말라 뼈만 앙상했다.
“면목이 없네.”
만감이 교차해 말문이 막힌 나와 내자에게, 그가 말문을 열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오랜 병고(病苦)에 시달린 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내가 면목이 없어야 하는데, 왜 그는 그런 표현을 썼을까. 그 추운 날에 먼길을 오게 해서 미안하다는 뜻이었을까. 그가 지향하는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이루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는 뜻일까. 출가 후 법정의 어머니와의 전갈을 나의 내자가 맡아 했는데, 그 부분이 면목없다는 뜻일까. 이제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게 됐다.
사실 그가 출가한 이후에 우리에게 가장 난감한 것은 언어였다. 법정과 내가 둘이 있을 때에는 편하게 말을 놓았다. 나는 법정의 속가 이름인 박재철을 줄여, 철이로 불러왔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경우에는 서로 깍듯한 경어를 사용했다. 그때마다 느꼈던 부자연스러움과 별안간에 타인이 된 듯한 아쉬움이란 말로 할 수 없었다.
법정, 문학서와 철학서를 유독 좋아해
나는 1947년 목포시 용당동의 목포상업고등학교에서 법정을 처음 만났다. 법정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을 쉰 다음에 중학교에 진학했기 때문에 나보다 한 살이 많았다. ‘목포상업’은 1950년 학제 개편(중학교와 고등학교의 분리)으로 인해 ‘목포상과 초급대학’으로 승격됐다. 상업학교 4학년을 마친 학생들의 대부분이 초급대학으로 진학했는데, 나와 철이도 1951년에 초급대학으로 갔다. ‘목포초급 상과대학’은 훗날 ‘전남대 상과대학’의 모태가 돼 금년에 60주년을 맞았다.
초급대학의 교과 편성은 대학의 예과와 비슷했는데, 우리는 논리학, 철학개론, 윤리학개론, 문학개론은 물론이고, ‘채근담’과 같은 고전을 배웠다. 영어, 독일어, 불어와 같은 외국어를 배운 것은 물론이다. 일본어는 당시 대학생이라면 기초가 있었던 터라, 교양서적을 읽는 데 큰 곤란을 느끼지 못했다.
우리가 한창 독서에 열을 올린 시기는 6ㆍ25의 전화(戰禍)가 채 가시지 않은 시절이어서 책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우리는 일어로 된 ‘학생총서(河合榮次郞 編)’를 비롯해 철학, 문학, 역사, 위인전 등을 즐겨 읽었는데, 법정은 특히 문학서와 철학서를 탐독했다. 법정의 뛰어난 문장력과 깊이 사색하는 습관은 이미 이때에 다듬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는 명색이 대학생이다 보니 전시하(戰時下)에도 자유롭게 읽고 싶은 책을 읽고, 극장이나 술집을 출입하는 데 제약이 없었다. 그것을 뒷받침할 돈이 없는 것이 늘 문제였다.
대학시절, 축성암, 대둔사 등을 자주 찾아
법정 스님의 대학교 시절인 1952년 8월 여름방학 때. 흑산도 진리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맨 오른쪽이 법정스님.
우리는 1953년 전남대 상대에 진학했다. 그 전 해(1952)에 목포상과대학은 광주에 있는 의과대학, 농과대학, 대성대학 등과 합쳐져 종합대학인 국립전남대학교로 승격됐다. 자유로운 시간이 많았는데,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절간 나들이로 썼다. 주말에 가장 자주 찾은 곳은 목포항의 건너편 영암 용당리에 있었던 축성암(속칭 ‘가재절’)이었고, 방학 중에는 해남 대둔사와 영암 도갑사를 찾곤 했다. 축성암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우리의 마음을 늘 푸르게 만들었고 목포항의 뱃고동 소리는 항구의 정취를 만끽게 했다. 지금은 현대중공업 삼호조선소가 그 자리에 들어서 암자는 물론 그 위치마저 찾을 수 없지만 그 곁의 황도(黃島) 정상에 세워진 현대호텔에 올라 달라진 목포항의 모습을 바라보면 “산천의구 옛 시인의 허사”라는 노산의 시구를 실감할 수 있다.
법정과 나는 산사뿐 아니라 바다를 좋아했다. 특히 흑산도와 홍도(紅島)를 여러 차례 놀러 다녔다. 철이는 이 시기에 ‘푸른 별’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은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서 여수회(如水會)로 이름을 바꾸고 친목을 다져왔는데, 우리와 밤낮으로 어울렸던 이 멤버 중에 흑산도(정확히는 多物島)와 홍도 출신이 있었다. 현지에서의 침식(寢食)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고, 그들이 늘 앞장서니 잔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선박의 현대화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던 당시로서 흑산ㆍ홍도행은 매우 어려운 뱃길이었다.
1950년대 초의 홍도는 참으로 아름답고 고요한 청정지역이었다. 물밑 수십 미터 아래 조약돌이 수놓은 모자이크를 보지 않고서 ‘맑다’는 낱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언어의 남용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법정이 훗날 지향한 ‘맑고 향기롭게’의 ‘맑고’는 그때 머리와 가슴에 새겨진 이미지가 작용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대학교 2학년 때까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런대로 대학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3학년에 올라가면서, 법정이 갑자기 휴학을 선언했다. 학자금 조달의 어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우리 ‘푸른 별’ 친구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법정이 3학년 1학기를 등록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법정은 우리의 도움을 완강히 거부했다. 한 학기만 쉬고, 다음 신학기에는 반드시 복학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우리 멤버들은 그의 휴학 결정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말릴 수가 없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 휴학 중에 문제가 발생하고 만다.
1955년 8~11월은 불교계에선 미증유의 대격동기다. 1954년 5월 21일, 이승만 대통령의 ‘왜색 중 추방을 요지로 하는 불교정화에 관한 담화문’ 발표를 계기로 시작된 정화 운동이 1년여 동안이나 지지부진하다가 1955년 8월에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전국승려(비구ㆍ비구니)대회’가 열렸고, 1955년 초가을 무렵에는 불교계의 정화 바람이 목포 지방에 미치기 시작했다.
목포지역의 정화운동본부는 측후동의 ‘정혜원’이었다. 정화운동의 큰 어려움이 인력부족이었다. 승려는 물론 그분들을 뒷바라지할 일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당시 목포지역의 신도회장을 알고 지냈는데, 그분의 권유로 법정은 정혜원에서 잡무를 맡게 됐다.
평소 술 즐겼던 법정, 친구들과의 송별연에선 자제
법정 스님의 중학교 시절. 목포 상업학교 뜰에서 친구들과 함께. 뒷줄 오른쪽이 법정 스님이다.
법정은 처음엔 일종의 아르바이트로 생각하고 응했다고 한다. 그러나 하루 이틀 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의 생각은 차츰 달라졌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법정이 매일 스님들을 대하게 되니 그쪽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마침내 출가(出家)를 결심한 것이다.
1955년 11월의 어느 날, 법정은 슬그머니 나에게 출가의 뜻을 알려 왔다. 그가 정혜원에 입주하게 되면서 예전처럼 자주 만날 수 없는 것만도 안타까웠는데, 이제는 출가하겠다니 그야말로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말려보고 달래보고, 혼자서 안되어 친구들이 함께 나섰으나, 법정의 마음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우리의 어설픈 설득이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가 이 정도인데, 오랜 세월 동안 오직 아들 하나만을 믿고 홀로 살아온 어머니의 애통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러 날 동안 침식을 끊었다고 들었다.
1955년 11월 25일, 서울에 있는 두 명의 친구를 내려오게 해서 여덟 친구가 사진관으로 가 이별 사진을 찍었다. 늘 가던 상해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송별연을 가졌다. 평소에는 술을 즐겼던 법정이었지만, 이날은 한사코 자제했다. 취한 얼굴로 정혜원으로 돌아가기 민망한 탓도 있었겠지만, 행여 취하면 마음이 흔들릴까 걱정한 것으로 짐작한다. 주인공은 제쳐 두고 우리 객(客)만이 취해서 끝내는 울음보를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고 며칠 후, 법정은 새벽 기차를 타고 오대산을 향해 서울로 떠났다. 그의 행장이란 자그마한 책 보따리 하나. 그 안에는 치약과 칫솔, 양말과 내의, 그리고 애독하던 책 몇 권뿐이었다. 보자기는 내가 쓰던 것이 자신의 것보다 약간 크다고 해서 이별의 정표로 내주었었다. 당시 우리 형편으론 여행가방 같은 것은 엄두도 못 내는 시절이었다.
법정은 일찍부터 산과 바다, 곧 자연을 좋아하고 사랑했지만, 특히 청산에서 살기를 무엇보다도 염원했다. 훗날 법정의 자연주의(?)적 사상은 아마 이 무렵에 씨가 내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가 출가하게 된 데에는 산중한거(山中閑居)를 오래도록 하나의 이상적인 삶으로 생각해 온 그 꿈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법정이 만년을 강원도 깊은 산속 오두막에서 지냈기 때문에 바다와는 연이 먼 사람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그가 태어난 곳은 ‘전라 우수영’ 충무공이 대첩을 거둔 울돌목 지척이다. 행정적으로는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인데, 지금은 선두리(先頭里)로 쓰지만 본래는 뱃머리, 즉 선두리(船頭里)라 적을 만큼 바로 바닷가이다.
나는 학생시절 법정을 따라 우수영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그의 생가는 길갓 집으로 앞에는 도로가 바다를 따라 남에서 북으로 뻗쳐 있고, 길의 서쪽은 바닷물이 출렁대는 방벽이었다. 방안에 앉아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그가 학생시절 에밀 졸라의 ‘해조음’을 좋아하고, 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자주 외웠던 것은 모두 이와 같은 성장환경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법정은 학생시절에 귀향하면 ‘종선(從船)’의 노를 저으며 숙부를 도와드렸다고 한다. 종선이란 접안 시설의 미비로 직접 부두에 댈 수 없어 바다 중간에 떠 있는 여객선에 손님을 날라주고, 하선(下船)하는 손님을 싣고 오는 작은 배다. 바람이 세 파도가 거친 날이면 보통 힘들고 위험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수영 주변에는 큰 산이 없다. 그 반작용(?)으로 법정은 청산을 그리워하게 됐고, 학창시절에 자신의 호를 ‘청산(靑山)’이라 지은 적도 있다.
입적 반 년 전, 서귀포의 범섬에서 지내
법정 스님의 출가 한 달 전,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1953년 11월 25일, 앞줄 오른쪽이 법정 스님이다.
법정이 수류산방(水流山房)에서 내게 보낸 편지 속에 “말이 씨가 되었다”고 적어 보낸 적이 있다. 출가 후 그가 처음으로 몸소 마련한 절(佛日庵)집 옆 벽에 ‘청산별곡’을 전각한 목판을 걸어두게 된 것도 모두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지난 49재에 가보니 지금도 그 목판은 주인 떠난 집을 혼자서 지키고 있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그가 입적하기 전 약 6개월을 서귀포의 범섬 앞 법화리에서 지냈다고 들었다. 치유를 위한 주변의 권유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그의 뿌리 깊은 바다에 대한 향수도 서귀포 행에 한몫한 게 아니었을까. 그는 바닷가에서 나서 바닷가에서 생의 마지막 시간들을 보낸 셈이다. 내심 바다가 싫어서 중간의 삶을 산속에서 보냈지만, 말년은 처음 그곳에서 지낸 셈이다.
그와 나의 관계를 아는 사람이면 왜 그가 출가하게 되었는지를 물어온다. 내가 아는 한 그의 출가에 가십거리는 없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의 장래에 대한 번민, 그리고 그의 깊은 자연 사랑이 어울리어 내린 결단이었으리라 나는 믿고 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차츰 도로가 정비, 확장돼 육운(陸運)이 발달하면서 연안을 운행하던 여객선사업은 사양의 길로 접어든다. 법정가(法頂家)의 경제적 어려움은 여기에 기인한 것이었다. 설령 어려움 속에서 지방대학을 졸업한다고 하더라도 장래가 밝은 것도 아니다. 1950년대 중반의 우리나라는 문자 그대로 저개발국이어서 실업은 구조적인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학업 지속은 주변에 고통만을 더해 줄 뿐이다. 또 다행히 어딘가 취직이 되더라도 구름처럼 물처럼 자유로움을 좋아하는 체질로 보아 거기에 적응해서 안주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들을 놓고 그는 묻고 스스로 대답을 거듭했을 것이다. 훗날 길상사처럼 멋진 절간을 지어 놓고도 한사코 강원도 산골의 오막살이를 좋아한 것을 보면 그의 이러한 체질과 성품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청산에 살어리랏다’를 외우며, 젊은 시절부터 자신의 아호를 청산(靑山)이라 지은 내 친구 재철. 자신의 소망을 이루는 길은 오로지 출가뿐이라 작심했을 것임은 그의 행적을 들여다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운수행각(雲水行脚) 속에서 무엇인가를 얻자!’ 마침내 그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청산, 그리고 수류화개(水流花開)하는 산방만이 그에게는 가장 아늑한 보금자리라 확신했을 것임을 그가 남긴 수많은 글의 행간 속에서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정 많지만, 매서운 결단력
법정은 정이 많은 반면 칼날처럼 매서운 결단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결론을 얻었으니 단행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그는 1955년 오대산을 향하는 서울행 기차를 목포역에서 타게 된 것이다. 나는 그 후에도 목포에 가면 그날 북행열차로 떠나던 그의 모습을 그리며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속에 아쉬움을 달래왔다. 그러나 영원히 떠난 지금 그 작은 기대마저 가질 수 없게 되었으니 오직 안타깝고 슬플 뿐이다.
나는 그때 법정이 만일 출가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본다. 그가 세간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적어도 오늘의 법정대종사, 우리 사회의 큰 스승의 한 분은 탄생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맑고 향기로운 글과 말을 들으며 위안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큰 스승의 탄생을 울며 말리던 내 몽매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이제 법정은 한 줌의 재가 되어 그가 손수 심은 후박나무의 거름이 되었으니, 그토록 염원하던 청산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오직 명복을 빌 따름이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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