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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
(사진설명) 충북 진천에 있는 김유신 태실
김유신 (1) 김유신은 어디 사람일까
삼국사기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김유신은 서울(필자주: 경주. 이하 괄호 안의 주석은 필자가 붙인 것임) 사람이다. 12대 선조 수로왕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는 후한 건무 18년 임인에 구봉(김해 구지봉)에 올라 가락의 9촌을 바라보고 마침내 그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가야라 했는데. 후에 금관국이라 고쳤다. 그 자손이 계승하여 9대손 구해 혹은 구차휴에 이르렀다. 구해는 유신에게 증조가 된다.’
이 표현으로 보면 김유신의 선조들은 금관가야의 왕족이니 그의 조상들은 당연히 대대로 김해에서 살았다. 그렇다면 김유신의 조상들의 고향은 김해이고, 김유신 본인의 고향은 충북 진천이다. 보통은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 하니 김유신의 고향은 진천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히 김유신의 고향이 경주가 아닐까 하고 지레짐작을 하는 것은 잘못된 지식이다.
여기서 필자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진다. 왜 김부식은 김유신을 서울(경주) 사람이라고 했을까.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기록하기를 (김유신 아닌) 다른 사람들은 모두 태어난 곳을 가리켜 어디 사람이라고 했다. 예를 들면 흑치상지는 백제의 서부 사람, 계백은 백제 사람, 솔거는 신라 사람, 장보고는 신라 사람, 을파소는 고구려 사람 식으로 나라 이름을 말하거나, 아니면 강수는 중원경의 사량부 사람, 최치원은 신라 서울의 사량부 사람, 죽죽은 신라의 대야주(합천군) 사람 식으로 출신지를 말했는데 유독 김유신만은 ‘서울 사람’이라고 했다. 김부식은 왜 그렇게 기록했을까.
김부식은 그의 조상으로 보면 가야 사람 혹은 김해 사람이다. 그런데 김부식의 증조부 때인 구해왕 시절에 이미 금관가야가 멸망했으므로 그를 가야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태어난 곳, 즉 진천 사람이라고 하는 게 당연하고, 그게 상식적이다. 게다가 김유신은 진천에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계속 거기서 살다가 15세 정도의 나이에 서울인 경주로 온 것으로 보인다. 그만하면 김유신은 진천 사람이다. 그런데도 김부식은 그를 가리켜 진천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서울 사람이라고 했다.
물론 을지문덕을 고구려 사람이라고 하듯이 김유신을 신라사람이라고 기록하기는 마땅찮았을 듯하다. 그가 신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보고가 신라 사람인 줄을 모르는 사람은 또 어디에 있나? 그렇게 보면 김유신을 신라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서울 사람이라고 한 것도 꼭 납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김부식은 김유신을 신라 사람으로 기록하지도 않고, 진천 사람이라고 표현하지도 않고 서울 사람이라고 적었다.
사실 김유신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의 기록이 없다. 뿐만 아니라 17세에 깊은 산속에 들어가 무예를 연마했다는 기록만 있지 나이 34세가 될 때까지에 대해서도 기록이 없다. 그 유명한 김유신이 그 나이가 되도록 나라에 큰 공도 세우지 못하고 그냥 있는 둥 없는 둥 살았다는 것인가. 그래서 김유신을 서울 사람이라고 한 것일까.
죽은 김부식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삼국사기는 김유신을 서울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과연 김부식은 어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까. 지금도 우리 국민들의 대부분은 김유신이 진천 출생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김해 사람 아니면 경주 사람으로 인식할 뿐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김유신을 찾아나서는 여행길에서 어디부터 가보는 것이 좋을까. 태어나서 10대까지 거주한 진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경주, 아니면 그의 조상들의 고향 김해 중 어디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을까.
필자는 김유신을 찾아떠나는 이 여행을 김해에서부터 출발하려고 한다. 뿌리를 찾자는 것이다. 아마 지하의 김유신도 필자의 생각에 동의할 듯하다. 왜냐하면 김유신 본인도 비록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겠지만(드러내면 역적이 된다) 증조부 때 나라가 망하지 않았으면 자신도 왕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 법도 하기 때문이다. 김유신 본인도 아마 그런 생각을 조금은 가졌을 테고, 경주에 살면서도 남몰래, 종종 김해의 구지봉에 올라 덧없이 망한 조상들의 나라 금관가야를 그리워했을 법하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일단 필자는 김해로 간다.
(사진 설명) 본래 바다였으나 지금은 들판이 된 김해 평야 김유신 (2) 김유신의 선조는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 낙동강은 한 줄기가 아니다. 그래서 모래삼각지가 있다. 부산에서 보면 서쪽으로 갈라진 낙동강이 바로 서낙동강이다. 그 서낙동강을 끼고 김해가 있다. 김해는 쇠[金]와 바다[海]가 뭉친 이름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 보면 김해에서는 쇠가 많이 생산되어 덩이쇠(철정)를 돈처럼 쓰고, 한, 예, 왜, 낙랑과 대방군에 수출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김해 일대에서 쇠가 많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 김해에서 삼랑진으로 올라가는 국도를 타고 30분 정도 달리면 도로변에 생철리(生鐵里)라는 마을이 나타나는데 생철리라는 이름은 철이 생산되는 마을이라는 뜻이니, 이 역시 김해 지역이 철 생산지로 유명했음을 증언해준다(합천의 ‘야로’도 철을 가공하던 곳이라는 뜻의 지명이다). 생철리는 무척산 줄기 바로 아래에 붙어 있다. 무척산은 사람에게 저절로 올라보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무척’ 아름다운 절경과 정감 있는 등산로를 간직한 산이다. 그리고 무척산 줄기는 모은사라는 신비로운 절을 품고 있다. 생철리를 출발하여 100미터만 가면 모은사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나온다. 길은 한 사람만이 간신히 걸을 수 있을 만큼 좁고 꼬불꼬불하고 가파르다. 그래서 스님이 드실 곡물 등도 사람이 지고 오르지 못해 마치 광주 무등산 정상에 놓인 하늘 철길 같은 레일을 타고 오르는 수레를 이용해 실어 나른다. 어쨌거나 모은사 오르는 길은 사람이 등정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은 나무를 부여잡아야 하고, 오금이 저린 순간도 제공해주는 산길이다. 특히 여름철에는 산안개가 자욱하고, 길 둘레를 에워싸고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낭자하여 온통 사람의 마음을 조여 온다.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김수영).” 그렇다고 김해에서 생철리, 무척산, 모은사를 먼저 들르는 여정을 필자가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그저 김해에 온 여행자라면 아무래도 장유사를 먼저 가야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수로왕릉, 김해박물관, 허왕후릉, 구지봉부터 찾아가는 것은 너무 평범하고, 눈으로 볼 수도 없는 패총을 수소문하는 일은 허망할 뿐이다. 일단 장유계곡은 여름철의 유명한 피서지이고, 이런저런 식당들이 즐비한 곳이라 인근까지만 가면 누구에게든 물어서 찾아갈 수가 있다. 장유사는 일단 장유계곡에 들어간 뒤 묻는 게 좋다는 말이다. 차량은 장유사 바로 앞까지 올라간다. 그 대신 길이 좁으니 내려오는 차량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아주 천천히 승용차를 몰아야 한다. 하여튼 하늘을 쳐다보며 뒤로 자빠지듯이 한참 오르막을 운전하면 장유사에 닿는다. 장유사는 본래 왕후사였는데, 뒷날 새로 절을 지으면서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을 기려 그렇게 작명했다. 절 뒤에 장유화상의 사리탑이 있다. 그런데 필자가 이곳에 가려는 것은 절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장유사는 김수로왕이 허황옥을 맞아 신방을 차린 곳이니, 김해까지 와서 어찌 찾아가보지 않고 그냥 돌아갈 수 있으랴. 수로가 토착세력의 압력을 물리치고 허황옥을 기다렸다가 마침내 세기의 국제결혼(기록에 의하면 허황옥은 인도에서 왔다. 설혹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도 중국에 이주해 살던 인도계 처녀일 가능성은 높다)을 성사시킨 장소이자, 왕후를 위해 임시궁궐을 세운 곳이고, 왕과 왕후가 신혼의 밀월을 보낸 명소가 바로 장유사인데, 어찌 장유계곡에서 닭백숙만 뜯고 돌아온단 말인가. 나도 이곳에서, 기다리던 신부 허황옥이 배에서 내려 자신을 찾아오는 광경을 한번 뜨겁게 바라보리라. 그러나 장유사에서는 전혀 바다가 보이지 않고, 무성하게 자란 나무숲들 사이로 간신히 고개를 내밀고 힘들여 눈길을 던져도 그저 김해평야 넓은 들판만 보이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쨌든 필자는 지금 장유사에 왔다. 장유사는 대구에서 구마고속도로를 타고 마산을 지나 부산으로 가다가 거의 김해 시내에 당도할 무렵의 지점에 있다. 수로왕과 허왕후가 신방을 꾸린 장소에 왔으니 나는 지금 김유신이 태어나게 되는 최초의 근거지에 도착한 것이다.
(사진 설명) 김수로왕과 허황옥이 혼례를 치른 장유암 김유신 (3) 김해의 명소는 왕릉과 왕비릉 김해는 쇠와 바다의 땅이다. 쇠가 많이 생산되는 김해를 기반으로 한 덕분에 금관가야가 한때의 강국으로 군림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김해의 ‘金금’과 금관가야의 ‘금金’은 같은 글자이다), 평야 한복판에 위치한 금관가야의 김해가 어떻게 자기 이름 안에 바다[海]를 거느렸으며, 무역강국 해상강국의 이름을 드높였는지는 통 헤아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책을 더 들여다보면 김해평야는 조선 후반 이후 서낙동강에서 올라오는 흙을 모아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조평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대동여지도’에도 김해는 바다에 닿아 있다. 실제로 김해평야는 일제 때 조성되었다. 허황옥은 (당시에는 바다와 강이 마주치는 지점이었지만 지금은 부산과 김해를 잇는 다리가 놓인) 서낙동강 장낙나루에 배를 대었고(필자는 지금 허황옥이 배를 댄 곳이 진해 망산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로 찾아온 수로왕의 신하들에게 나를 맞이할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느냐고 불호령을 내린 다음, 수로왕이 왕과 왕후의 신혼의식을 치를 수 있을 정도의 궁궐(행재소)을 장유사 자리에 신축하였음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바다를 떠나 행재소로 출발하였다. 자존심 드높은 신부다운 당당한 태도여! 이런 신부를 맞이하는 형국이었으니 어찌 하늘이 내린 수로왕이라 한들 들판을 가로질러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허황옥을 산중턱에서 바라보며 가슴 두근거리지 않았으리. 김해 시내로 들어간다. 김해 시내에는 볼거리가 많다. 비록 신라에 망하기는 했지만 한때 대단한 왕국이 있던 땅이니 이만한 역사적 볼거리가 산재해 있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물론 경주에 비하면 상대도 되지 않지만(세계적으로도 희귀한 경우인 신라는 가야가 멸망한 이후에도 400년은 더 존재했던 나라이니 그 차이는 당연하다. 필자가 여기서 신라를 두고 ‘세계적으로 희귀한’ 나라라고 말하는 것은 건국 이후 천년이나 망하지 않고 존재했던 나라는 세계적으로 거의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부산에 비하면 옛날 유적들이 엄청나게 많다. 이 말은 부산은 금관가야가 한창 번창하고 신라가 흥성하기 시작하던 무렵에는 그저 시골이었다는 뜻이다. 고구려는 지금의 평안도, 백제는 전라도, 신라는 경북, 가야는 경남을 기반으로 건국되고 융성하고 언젠가는 결국 멸망했지만 그 어느 나라도 부산을 근거로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김해 시내에는 무엇보다도 수로왕릉이 있다. 수로왕릉 바로 옆 언덕은 그가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올랐던 구지봉이다. 그 인근에는 수로왕의 아내였던 허황후의 능도 있다. 수로왕비릉에는 허황옥이 인도에서 가지고 왔다고 전해지는 신기한 돌(파사탑)도 있다. 사실 여부는 알기 어렵지만 어쨌든 그 돌은 자연과학적 정밀조사 결과 우리나라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 하니, 과연 허황옥과 김수로왕이 국제결혼을 한 건 틀림없는 사실인 듯하다. 아득한 옛날에 무슨 국제결혼을 했을까 하고 의심할 필요는 없다. 지금도 경주 괘릉에 가면 외국인들이 왕릉을 지키고 있다. 물론 실제 사람이 아니라 왕릉 길목에 세워져 있는 돌로 만든 조각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아무리 보아도 우리나라 사람의 형상이 아닌 아라비아인 계통의 얼굴과 복장을 하고 있다. 얼마나 외국인들의 출입이 많았으면 왕릉 앞을 지키는 사람 형상의 돌 조각을 만들면서 그들의 모습을 새겼을까. 한때 우리 나라 사람들이 히딩크 동상을 세운다고 법석을 떤 적도 있음을 생각해보면 알 일이다. 어쨌든 김해 시내에서는 수로왕릉, 구지봉, 수로왕비릉, 김해 국립박물관을 보고, 약간 외곽으로 나와서는 장유암과 모은사를 보고, 근래 세워진 클레이아크를 관람한다. 흙과 건축의 조화를 현대적으로 보여주는 클레이아크는 대구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니 놓칠 수 없다. 물론 클레이아크 앞에 김유신의 동상이 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김유신을 찾아떠나는 여행이기로서니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김해까지 가서 클레이아크를 좀 관람하기로서니 못할 짓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도 다 장군과 그의 조상들의 음덕 덕분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 감사를 드리면 김유신도 흐뭇해하지 않겠는가.
(사진 설명) 왕비릉. 오른쪽 건물에 신비한 돌(파사탑)이 보관되어 있다. 김유신 (4) 김유신 생가가 있는 진천 태령산 김유신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혹은 구해)왕의 증손자이다. 구형왕의 아들인 무력은 진흥왕을 도와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운다. 무력은 진흥왕이 한강 하류 서해안 일대를 통치하기 위해 553년 새로 설치한 신주(新州)의 군주(軍主)가 된다. 무력은 빼앗긴 땅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해 온 백제군을 크게 물리치는데 이 과정에서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하고 백제-가야-왜의 연합군 2만 9600명을 참살한다. 구형왕의 손자이자 무력의 아들인 서현 또한 여러 전쟁에서 큰 업적을 거둬 금관가야 왕족이 신라에서도 명문가로 자리잡는 데 한몫을 하는 대장군인데, 젊은 시절에 만노군(충북 진천) 태수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김유신은 서현의 아들이다. 김유신은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금관가야의 수도인 김해일까, 신라의 수도인 경주일까, 아버지 서현이 태수로 있었던 진천일까? 김유신은 595년 충북 진천군의 태령산 아래에서 태어난다. 당연히 태령산 기슭에 가면 김유신 생가를 볼 수 있다. 흔히 김유신이 경주 아니면 김해 출생인 것으로 짐작하지만 그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만노군 태수로 있을 때 유신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김유신 생가는 집 바로 뒤에 제법 높고 좌우로 길게 펼쳐지는 산자락을 두르고 있다. 태령산(높이 461.8m)이다. 유신의 태가 묻힌 산이라 하여 그 이름이 태령산이 되었다. 김유신 생가에서 출발하는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정상까지 가는 데 약 30분 걸린다. 김유신의 태실이 있는 곳이 가장 높은 정상이다. 진천은 충북 땅이니 영남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성격에 조금 어긋난다. 이 글이 ‘영남 역사기행’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김유신을 찾아떠나는 여행이니 비록 영남 지방은 아닐지라도 장군의 태생지를 빼놓기도 좀 뭣하다. 어쨌든 장군이 태어나 15세까지 자란 땅이니 진천 태령산 아래로 한번 발길을 옮겨보자. 아무려면 장군의 태실이 있는 땅이고, 김유신 본인도 평생 그리워하며 살아간 출생지이니 우리가 한번 찾아가보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는가. 삼국사기에 보면 김유신이 김해도 아니고 경주도 아닌 진천에서 태어나게 된 연유가 기록된 부분이 있다.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이 처음에 길에서 갈문왕 입종의 아들인 숙흘종의 딸 만명을 보고는 속으로 좋아하여 눈짓하여 중매를 거치지 않고 부부 관계를 맺었다. 서현이 만노군태수가 되어 함께 가려고 하니 숙흘종이 그제야 딸이 서현과 야합했음을 알고 미워하여 딴집에 가두어놓고 사람을 시켜 이를 지키게 했는데, 갑자기 벼락이 집 문을 치니 지키던 사람이 놀라 정신이 혼란해졌으므로, 만명이 구멍으로 빠져 나가서 드디어 서현과 만노군으로 갔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역사책이니 사실을 기록했겠지만 그래도 적나라하게 표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가야왕의 후손인 서현과 신라왕의 조카인 만명이 연애를 한 모양이다. 물론 부모나 어떤 어른이 중간에 소개를 해서 두 청춘남녀가 만난 것은 아니다(삼국사기에 ‘처음에 길에서 만났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정통 성골의 처녀인 만명과 멸망한 나라의 왕손 서현 사이에는 엄청난 신분 차이가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대통령의 딸과 이민온 외국인 출신 고급 공무원의 아들쯤 되겠다. 당연히 두 사람의 결혼에는 엄청난 브레이크가 걸렸다. 삼국사기는 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발령이 난 후에야 만명의 아버지 숙흘종이 두 사람의 연애를 알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둘을 떼어놓으려고 숙흘종이 압력을 행사하여 서현을 변방으로 내쫓았을 터이다. 만노군(진천)이라면 지금 생각에는 김천과 서울의 중간 지점이지만 당시는 위로는 고구려요 아래로는 백제와 맞닿은 최전선 전방지대(지금의 DMZ)이다. 숙흘종은 딸은 집에 가두고 서현은 변방으로 내쫒은 다음 두 다리를 뻗고 편안하게 잠을 주무셨겠지만 그렇게 연애가 끝나버린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삼국사기는 벼락이 쳐서 만명이 갇힌 방문이 부서지는 바람에 서현이 그녀를 만노군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집을 부수고 그녀를 보쌈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 결과 김유신은 지금의 충북 진천 태령산 아래에서 출생하게 된다. 당시 만노군 군수의 관사가 바로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태령산 정상에는 김유신의 태가 묻힌 태실이 있고, 산 아래 생가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곳엔 서현장군과 어린 김유신이 물을 마신 우물(연보정)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인근에는 장군을 제사지내는 길상사(절 아님)가 있다.
(사진 설명) 태령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김유신 생가. 아래 사진은 김유신이 15세까지 김유신 (5) 김유신의 칼에 두 동강난 바위 김유신은 17세 때 중악(中嶽)으로 들어간다. 중악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분분한 의견들을 내놓고 있지만 경주 건천 단석산이라는 설이 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다. 단석산은 이름 그대로 김유신이 칼로 바위[석石]를 자른[단斷] 산이다. 단석산 곳곳에는 칼로 벤 듯이 한가운데가 직선으로 쫙 갈라진 바위들이 분포해 있고, 중턱에는 김유신이 수련을 했다는 석굴로 보이는 거대 기암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쳐 있다. 국보 199호인 마애불상군이 새겨져 있는 이 기암을 사람들은 흔히 상인암이라 부르는데, 높이가 8m, 깊이가 10m에 이르며, 입구 한쪽만 터져 있고 삼면이 절벽 바위로 돼 있다. 삼국사기는 한쪽이 3m 정도 트여 그리로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이 디귿자 형태의 석굴에서 삼한통일을 기원하며 정신수련 중이던 김유신이 난승(難勝)이라는 도사를 만나 병법과 검술에 득도를 하게 되고, 그로부터 신검을 얻어 바위를 칼로 쪼개는 것으로 전한다. 삼국사기를 읽어보자. ‘건복 33년 신미(611년)에 공이 나이 열일곱이었는데 고구려, 백제, 말갈이 신라의 강토를 침범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보고 강개하여 외적을 평정할 뜻을 가지고 중악의 돌굴로 들어가 재계하고는 하늘에 아뢰어 맹세했다. “적국이 무도하여 승냥이와 범이 되어 우리 강토를 침략하니 거의 편안한 해가 없습니다. 저는 한낱 보잘것없는 신하입니다만, 재주와 힘을 헤아리지 않고 화란을 없애려고 마음먹고 있사오니 오직 하느님은 이를 살피셔서 손을 제게 빌려주옵소서.” 나흘이 지나서 갑자기 한 노인이 갈포옷을 입고와서 말했다. “이곳에는 독한 벌레와 사나운 짐승이 많으므로 두려워할 곳인데 귀한 소년이 와서 홀로 있으니 무슨 까닭인가?” 유신이 대답했다. “장자(어르신)께서는 어디서 오셨으며 존명(귀하신 성함)은 누구시온지 알고 싶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나는 거주하는 곳도 없으며, 가고 그침을 인연에 따라 한다. 이름은 난승이다.” (중략) 그대는 나이가 어리면서도 삼국을 통일하려는 마음을 가졌으니 어찌 장하지 않으랴? (난승이 비법을 전해주면서) 이 비법은 부디 함부로 남에게 전하지 말라. 만약 불의한 일에 이를 쓴다면 도리어 그 앙화를 받을 것이다.” 말을 마치자 작별하고 2리쯤 가다가 뒤따라 쳐다보았으나 (난승은) 보이지 않고 다만 산 위에 빛이 있는데 찬란하여 5색 광채와 같았다.’ 대구에서 경주로 가다가 건천 IC에서 내려 청도 운문댐 쪽으로 들어서면 길 왼편에 ‘단석산 마애불상군 국보 199호’이라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산 정상에 올라가보면 김유신 장군이 칼을 휘둘러 단숨에 두 동강을 내어버린 바위가 지금도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진 채 그대로 남아 있다. 물론 김유신이 단석산 정상에서 칼을 휘두르면서 천지신명께 올린 기도는 “내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으면 이 바위가 단칼에 반 토막 나게 해주시고, 그렇지 못할 양이면 칼이 부러지게 해주사이다”이다. 정상 거의 접근한 지점에는 신선사가 있으며, 신선사 오른쪽에 국보인 마애(바위 절벽에 새겨진)불상이 있다. 그런가 하면 대구에서 예비군훈련장을 넘어 와촌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불굴사에도 역시 김유신이 어릴 때 도를 닦고 무예를 연마했다는 석굴이 있다. 불굴사 바로 뒤편에 있는데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기암절벽 중간쯤에는 굴 사이로 굽이굽이 길 이어져 있고, 굴 속에는 ‘해동(우리나라)제일 약수’라는 글자까지 새겨진 샘이 있다. 허공에 솟은 이 거대한 천연석 동굴 안에는 천지신명이 만든 조화인지 졸졸졸 약수가 흐른다. 이 약수를 마시고 김유신이 무예를 연마했고, 그 후 원효가 또 다시 이곳에서 수련을 했다고 전한다. 단석산도 정상까지 오르는 데 한 시간 남짓 걸리고, 불굴사는 특히 대구에서 가까우니 두 곳 다 직접 답사를 해보고 장군의 기개를 되새겨볼 일이다. 특히 어린 자녀들과 함께 두 산을 한번 올라본다면 교육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으리라.
(사진 설명) 단석산 상인암의 미륵장륙상 김유신 (6) 백제의 서울에 남은 당나라의 흔적 660년, 김유신은 상대등이 된다. 상대등이라면 귀족회의 의장(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이 해 6월 21일 김유신은 백제 공략을 위한 구체적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서해의 덕적도로 간다. 7월 9일 김유신 부대는 황산벌에서 계백과 마주치고, 이윽고 7월 18일 의자왕은 백기를 든다. 동악 석굴에 들어가 삼한통일을 염원하는 기도를 올렸던 김유신의 소망이 마침내 그 결실을 맺는 첫 순간이다. 소정방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에 불을 지른다. 불길은 1주일을 두고 줄기차게 타올라 도무지 그칠 줄을 몰랐다고 한다. 이 와중에 정림사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고, 5층석탑만 시커멓게 그을음 덩어리로 남았다. 소정방은 탑에 자신이 백제를 평정했노라는 내용의 글자를 새겨 넣었고, 그 탓에 후세 사람들은 한때 이 탑의 이름을 ‘평제탑’이라 부르면서 소정방이 세운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소정방은 사비성 언덕에 진을 구축하고 호시탐탐 신라를 공격할 기회를 노린다. 진작에 당나라의 그같은 내심을 꿰뚫어본 신라는 당군에 맞먹는 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 땅에 와 있었다. 그러므로 김유신은 거리낌없이 무열왕에게 건의한다. “나라의 어려움을 당하여 어찌 스스로를 돌볼 계획을 세우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는 결심을 하소서.” 당과 일전을 하자는 주장이다. 물론 유신의 이 말은 신라가 당과 전쟁을 불사할 태세를 다 갖추고 있음을 소정방에게 알리려는 계획된 발언이다. 밤낮으로 암약하는 간첩들이 자신의 말을 즉각 당군에게 옮겨준다는 사실을 유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을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 사람은 이미 백제를 멸망시키고는 사비성의 언덕에 진을 치고 신라를 침공하려고 몰래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우리 임금이 이를 알고 여러 신하들을 불러 계책을 물으니 다미공이 앞으로 나와서 아뢰었다. “우리 나라 백성을 시켜 백제 사람으로 거짓 꾸며서 그 복장을 입혀 도적질을 하는 것처럼 한다면 당나라 사람이 반드시 이를 칠 것이니 이 때를 타서 그들과 싸우면 뜻대로 될 것입니다.” (중략) 왕이 말했다. “당나라 군사가 우리를 위해서 적국을 멸망시켰는데 도리어 그들과 서로 싸운다면 하늘이 루리를 돕겠소?” 유신이 아뢰었다.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제 다리를 밟으면 주인을 물게 되니 어찌 국난을 당하고서도 자신을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대왕은 이를 허락해 주십시오.” 당나라 사람들은 우리 나라에 방비가 있음을 정탐해 알고 신라를 치지 못하고 백제왕과 신하 93명, 군사 2만 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9월 3일에 사비에서 배를 타고 돌아가고, 낭장 유인원 등을 남겨 백제 땅을 지키게 했다.’ 소정방은 신라와 일전을 겨루어 최종 승리를 쟁취할 자신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의자왕을 사로잡았고, 백제의 항복을 받았으니 더 이상 자신의 공로가 커질 것도 없다. 백제 부흥군도 만만하지 않고, 신라를 항복시킬 가능성은 더욱 없다. 소정방은 의자왕을 비롯한 포로 2만여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간다. 그것이 자신의 공을 황제에게 최대한 신나게 보고할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머리를 굴렸을 터이다. 백제의 멸망을 구슬프게 증언하고 있는 정림사 5층석탑은 부여 시내 한복판에 있다. 매표소 바로 앞에는 ‘백제초등학교’가 있다. 소정방과 일전을 겨루려던 김유신이 죽은 지 1335년이나 지났고(673년 사망), 백제가 망한 지는 그보다 더 오래 되었지만(660년 멸망), 백제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상상한다. 비록 백제를 멸망시켰지만 소정방이 지른 불에 시커멓게 그을리고 있는 정림사지 5층석탑을 보면서 장군은 자주 독립의 열망과 함께 비운을 느꼈으리라. 부여가 비록 영남은 아니지만 필자는 이 곳에서도 김유신 장군의 마음을 다시 한번 헤아려본다. (사진 설명) 불에 그을린 채 남아 있는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김유신 (7) 김유신이 살던 경주 집터 김유신과 그의 아우 흠순은 성정이 매우 달랐던 것 같다. 형과 마찬가지로 신라의 대장군이었던 김흠순의 성정을 짐작하게 해주는 일화로는 다음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본래 술을 아주 좋아했다. 안방 다락에 향기로운 술을 넣어두고 수시로 꺼내어 마시곤 했는데, 하루는 부인에게 술을 꺼내어오라고 했다. 그런데 한참 시간이 지나도 부인이 다락에서 내려오지를 않았다. 흠순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다락 위로 올라가 보았는데 부인이 졸도를 하여 기절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술 향기를 맡고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큰 구렁이가 한 마리 다락 안에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보고 부인은 그만 기절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 흠순은 술을 끊고 평생 금주를 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이에 비하면 김유신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한번 읽어본다. ‘왕이 (김유신을) 상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백제의 가혜성, 성열성, 동화성 등 일곱 성을 치게 했더니 크게 승리했다. 때문에 가혜의 나룻길을 개통시켰다. 을사년(645년) 정월에 왕을 미처 뵙기 전에 국경을 지키는 벼슬아치가 백제의 대군이 와서 우리의 매리포성을 침공한다고 급히 보고하니, 왕이 또 유신을 상주장군에 임명하여 백제군을 막게 했다. 유신이 명령을 듣고 출발하니 처자도 만나보지 못했으며 백제 군사를 맞아 쳐서 이를 패주시키고 머리 2천 개를 베었다. 3월에 유신이 왕궁에 복명하고 아직 집에 돌아가기 전에 또 백제 군사가 그 국경에 나와서 둔치고 군사를 크게 일으켜 우리 나라로 쳐들어오려 한다고 급히 알리니 왕이 유신에게 말했다. “제발 공은 수고로움을 꺼리지 말고 빨리 가서 적군이 이르기 전에 방비해주기 바라오.” 유신이 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군사를 훈련시켜 병기를 갖추어 서쪽을 향하여 떠났다. 이때 집사람들은 모두 문밖으로 나와서 유신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유신은 문 앞을 지나면서 돌아보지 않고 갔다. 한 50걸음쯤 이르러 말을 멈추고 시중하는 사람을 집에 보내어 물을 가지고 오게 하여 이를 마시며 말했다. “우리 집의 물은 아직 옛맛 그대로구나.” 이에 여러 군사가 모두 말했다. “대장군께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시는데 우리들이 어찌 가족을 이별했다고 한탄하겠는가?” 국경에 이르니 백제 군사가 우리 군사의 방비를 보고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물러갔다. 대왕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여 그 작위를 올려주고 상을 내렸다.’ 그렇다고 김유신을 인정미 없는 매몰찬 사람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다만 공과 사를 정확하게 구분하고, 지금 할 일과 다음에 할 일을 분명하게 가릴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옳겠다. 대장군인 자신은 집에 들어가 가족을 만나고 돌아와놓고 부하 장졸들에게는 집에 들르지 말고 전장터로 가자고 해서야 명령이 서지 않는다는 것을 장군은 익히 알고 솔선수범을 했다는 말이다. 고금의 지도자들은 이 대목에서 김유신을 고스란히 본받아야 할 것이다. 김유신은 경주에 살았다. 장군의 집은 반월성 인근에 있다. 아니, 집은 없고 다만 우물(재매정)과 터만 남아 있다. 당시 장군의 집은 금입택(金入宅)이라 불렸다고 한다. 금으로 만든 집이라는 뜻일 게다. 문무왕이 그의 공을 기려 신라 역사에 전무후무한 태대서발한이라는 벼슬과 5백호의 식읍(5백 집의 세금을 거두어쓸 수 있는 권한)을 내리고, 궁전에 오를 때에도 추창(허리를 굽혀 절함)을 하지 않도록 허락했다니 그만한 부귀영화는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장군의 집터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한 일인데, 하물며 장군이 집앞을 지나가며 떠오라고 했던 물맛까지 한번 본다면 금상첨화이리라. 그러나 지금 그 우물의 물까지 떠마시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니 잠깐 참으시라.
(사진 설명) 김유신이 살던 경주 집터 김유신 (8) 김유신도 밟아보지 못한 평양땅 삼국사기 중 김유신 장군이 평양으로 향하는 부분을 한번 읽어본다. ‘(이하 괄호 안은 필자주: 당나라 장군 소정방의 식량 원조를 요구받은 김유신은) 임술년(662년) 정월 2일에 칠중하(임진강)에 이르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배에 먼저 오르지 못했다. (한 달 이상 내린 궂은비가 눈보라로 변해 동상자가 속출하는 지경이었으므로 임진강 안으로 들어가려는 장졸이 없었다.) 유신이 말했다. “그대들이 만약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이곳까지 왔는가?” 마침내 (나이 68세의 노장) 김유신이 먼저 배에 올라 강을 건너니 여러 장수들과 군사들이 서로 뒤따라 강을 건넜다. 고구려의 국경에 들어가자 고구려 사람(군대)이 큰길에 기다리고 있을 것을 염려하여 마침내 험하고 좁은 길로 해서 갔다. 산양에 이르러 유신이 여러 장수와 군사에게 말했다. “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우리 국경을 침공하고 우리 인민을 살해했으며, 혹은 장정을 사로잡아가서 죽이기도 하고 혹은 어린 소년을 포로로 하여 종으로 부린 지가 오래되었으니 원통하지 않느냐? (중략) 나는 마음에 맹세하고 하늘에 아뢰었으므로 하늘의 도움이 있기를 바라고 있는데,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한지는 모르는 까닭으로 말하는 것이다. 만약 적을 겁내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갈 것이요, 적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사로잡힘을 면할 수 있으랴. 마땅히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서로 돕는다면 모두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바이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말했다. “장군의 명령을 받들어 감히 살기를 탐내는 마음을 가지지 않겠습니다.” 이에 북을 치며 행진하여 평양으로 향했다.’ 662년 1월, 쌀 4천 섬과 벼 2만2천 섬을 실은 수레 2천 대와 군사들을 이끌고 임진강에 도착한 김유신이 강을 건너 평양으로 진격하는 대목이다. 평양으로 가는 곳곳에서 고구려 군대를 물리치며 이윽고 김유신은 대동강이 지척인 곳까지 이른다. 평양성과의 거리는 3만6천 보(약 50km) 정도. 오랫동안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었지만 추위와 굶주림에 못 이겨 죽음 직전까지 몰렸던 소정방 군은 김유신 부대의 지원에 힘입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게 되고, 당나라로 철수하는 데 성공한다. 결국 이 전쟁 뒤인 668년 5월 연개소문이 죽고 고구려는 내분을 겪다가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물리치지 못한 채 그해 10월 멸망한다. 이 전쟁의 대총관은 김유신이었다. 그러나 74세의 고령에다 와병 중이었던 김유신은 이 전쟁에서 직접 칼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다만 전쟁이 끝난 후 논공행상을 하면서 문무왕이 “그는 나가면 장수의 일을 하였고, 들어서는 재상의 일을 하였으니 그의 공적이 매우 크다. 만일 공의 한 가문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신라의 흥망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공언하며 태대각간의 벼슬을 내린 데서도 확인되듯이 김유신은 일통삼한(세 나라를 하나로 통일)의 최고 영웅이었다. 삼국사기는 김유신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신라에서 유신을 대우한 것을 보면 친근하여 막힘이 없었으며, 나랏일을 위임하여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의 계획은 시행되었고 그의 말을 들어주어, 그의 말이 쓰이지 않음을 원망하지 않게 했으니 임금과 신하가 잘 만났다고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유신은 그의 뜻대로 일을 행하여 당나라와 계책을 같이 하여 삼국을 통합하여 한 집안으로 만들고 공명으로 한평생을 마칠 수 있었다. (중략) 사대부들이 그를 알고 있는 것은 그럴 수 있겠지만 꼴 베는 아이와 소 먹이는 아이들까지도 또한 그를 알고 있으니, 그 사람된 품이 반드시 보통사람보다 다른 점이 있었을 것이다.’
(사진 설명) 낙조가 지는 임진강의 저녁 풍경(왼쪽)과 김유신 (9) 김유신의 무덤은 ‘왕릉’ 673년 7월 1일, 김유신은 79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김유신이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자 문무왕은 그를 집으로 찾아가 문병한다. 왕이 신하의 집을 찾아가 문안을 한다는 것 자체도 대단한 파격이지만, 문무왕과 김유신이 나눈 대화가 더욱 대단하다. 삼국사기의 관련 부분을 한번 읽어보자. ‘(문무왕 13년 봄에 이상한 별이 나타나고 지진이 발생했다. 왕이 이를 근심했다. 유신이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지금의 재변은 나쁜 운이 저에게 있을 뿐 국가의 재앙은 아닙니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했다. 그러자 문무왕은 “만약 그렇다면 과인이 매우 근심하는 바요.”하면서 종교 의식을 집행하는 관리들에게 명하여 재앙을 물리칠 기도를 하라고 명했다. 그후 10여 일만에 유신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대왕이 친히 와서 위문하니 유신이 아뢰었다. 이상 괄호 안의 문장은 필자의 주임. 아래도 마찬가지임.) “오늘 이후에는 용안을 다시 뵈올 수 없겠습니다.” 대왕은 물면서 말했다. “과인에게 경이 있는 것은 마치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은데, 만약 경이 세상을 떠난다면 인민은 어찌되며 사직(나라의 운명)은 어찌 되겠소?” 유신이 대답했다. “신은 어리석고 불초한 사람이온데 어찌 국가에 이익됨이 있었겠습니까? 다행히도 밝으신 임금님께서 쓰실 때 의심하지 않고 일을 맡기실 때 의심하지 않으신 까닭으로, 밝은 임금님을 섬겨 조그마한 공을 이루어 삼한이 한 집안이 되었고, 백성이 두 마음이 없게 되었으니, 비록 태평한 세상에는 이르지 못했사오나 또한 소란한 세상이 약간 편하게는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선대를 계승한 임금들은 처음에는 정사를 잘못하는 이가 없었으나 끝까지 잘하는 이가 드물므로, 여러 대의 공적을 하루아침에 망쳐버리게 되니 매우 원통한 일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성공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아시고, 창업을 지킴이 또한 어렵다는 것을 생각하셔서 소인을 멀리하시고 군자를 가까이하시어 위에서는 조정을 화목하게 하고 아래에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셔서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기업(나라의 터전)이 무궁하게 전한다면 신은 죽더라도 또한 유감이 없겠습니다.” 왕은 물면서 이 말을 받아들였다.’ 임금과 신하의 사이가 이와 같았으니 내분으로 저절로 곪아간 백제와 고구려가 어찌 신라를 이길 수 있었으랴.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은 크게 애통해 하며 채색 비단 2천 필, 벼 2천섬을 부의로 보내 장례에 보태게 하고 군악대 100명을 보내 식을 엄숙히 치르도록 한다. 김유신이 죽은 지 162년 뒤인 835년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에 봉한다. 신하로서 왕의 지위를 얻은 이는 우리 역사상 김유신 단 한 사람뿐이니 이는 신라인들이 그의 업적을 어떻게 평가했는지에 대한 상징이다. 진천 태령산 아래에서 태어나 단석산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수련을 하였고, 부여 사비성을 무너뜨려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대동강까지 직접 진격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멸망의 마지막 전쟁시 대총관을 맡은 김유신은 일통삼한을 이룸으로써 민족사의 결정적 시기를 훌륭하게 헤쳐낸 민족의 위인이었다는 말이다. 살아서는 당대 최대의 명장에 최고위 관리였고, 죽어서는 왕으로 추앙받은 김유신의 묘는 경주 금산원에 있다(무덤이 있는 곳의 산 이름이 금산이다). 경주 고속버스 터미널 건너편 산자락에 조성된 흥무 공원이 바로 김유신의 묘지 일대이다. 실제로 김유신의 묘소는 가보면 이게 과연 장군의 무덤인가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무열왕 김춘추의 묘역보다도 넓고 웅장하며, 그 어느 왕의 것보다도 크고 화려하다. 그만큼 신라는 김유신을 인정했던 것이다. 김유신의 묘는 둘레에 호석(지키는 돌)이 있는 게 특이하다. 호석은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등 십이지신상이다. 대개의 경우 능을 지키는 수호신은 갑옷을 입은 조각들로 새겨지는데, 김유신 묘의 십이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다. 무장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온화한 느낌을 준다. (사진 설명) 김유신의 무덤 김유신 (10) 먼 먼 통일의 꿈 ‘원원사(遠願寺)’ 김유신은 이미 나이 17세에 통일을 꿈꾸며 중악이라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홀로 무예를 연마한다. 그의 통일 염원은 삼국사기 등 곳곳에 기록으로 남아 있지만, 불교 국가였던 신라의 대장군답게 불교 유적으로 우리에게 남겨준 것도 있다. 원원사 관련 유적이 바로 그것이다. 원(遠, 멀 원)원(願, 소원 원)사(寺, 절 사)이니, 원원사라면 먼 소원을 비는 절이라는 뜻이다. ‘먼 소원’이라면 ‘가까운 소원’은 무엇인가. 이를 단순히 멀고 가깝다 수준의 거리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그 의미를 깨칠 수 없다. 거리 개념이 아니라 시간 개념이라는 말이다. 이는 ‘멀다’를 ‘먼 곳’ 같은 표현에 쓰면 거리가 멀다는 뜻이 되지만, ‘먼 뒷날’ 같은 데 사용하면 시간적으로 멀다는 의미가 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원원사는 통일 이후에 창건된 절이다. 지금은 절은 남아 있지 않고 그 터만 커다란 소나무들 사이에 쓸쓸히 자리하고 있을 뿐이지만, 아직도 8세기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여겨지는 탑은 쌍둥이처럼 나란히 서 있다. 이 절은 김유신 등이 통일된 신라의 번영을 염원하며 창건하였다. 통일을 기원한 것이 아니라 통일신라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였다는 말이다. 통일은 하였으되 아직 당나라와의 싸움이 남아 있고, 왜구의 창궐도 또한 크게 걱정이 되던 시기였으니 신라 사람들은 진정한 평화가 구축되는 완전한 통일을 염원하였을 것이며, 그 염원을 모아 김유신은 다른 장수들, 승려들과 함께 원원사를 창건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원원사의 위치가 잘 나타내어 준다. 원원사는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중간에 있다. 원원사는 동해를 건너 쳐들어오는 적을 지키기 위해 쌓은 관문산성이 그리 멀지 않은 지점에 서 있다. 바다를 건너 온 적이 서울(경주)로 쳐들어오는 길목을 원원사는 막고 있다. 당나라를 물리치고 왜구를 막아내면 이제 진정한 통일이다. 김유신은 그것을 염원하고 통일신라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며 사찰을 창간하였던 것이다. 괘릉에서 울산 쪽으로 조금 남하하면 모화역이 나온다. 원원사 들어가는 길은 모화역 가기 조금 전에 왼편으로 난 굴다리 안으로 들어가야 나타난다(위는 철길이다). 물론 굴다리 입구에 원원사 가는 길이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그러나 그 이정표는 너무 작아서 세심하게 살피지 않으면 발견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김유신은 그토록 통일신라의 번영과 평화를 염원하였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는 원원사 가는 길은 그저 미로처럼 되고 만 것일까. 그나저나 굴다리에서 원원사 주차장까지는 그저 10여 분 차를 몰고 들어가면 당도하는데, 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다시 10여분 나무그늘 아래를 걸으면 원원사 터와, 그 바로 뒤에 신라 때의 석축처럼 보이는 고색창연한 돌계단 위에 서 있는 두 개의 삼층석탑인 쌍탑을 만나게 된다. (사진 설명) 원원사지에 남아 있는 삼층 석탑 (쌍탑)
물을 떠마신 우물 연보정(생가에서 태령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 위치)
작은배 한 척이 외롭게 떠 있는 대동강의 새벽 풍경(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