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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弓裔, ?~918] | |||||||
성은 김.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또는 제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아마도 정권다툼에서 회생되어 지방으로 몰려난 것으로 여겨진다. 어려서 세달사(世達寺:興敎寺)의 승려(僧號는 善宗)가 되었다가 신라가 쇠약하여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891년(진성여왕5) 죽주(竹州:현 永同)의 산적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가 892년에 북원(北原)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었다. 그 후 양길의 부하를 거느리고 강원·경기·황해 일대를 공략하여 많은 군사를 모으는 데 성공하자, 군도(群盜)를 배경으로 세력기반을 굳혔다. 898년(효공왕 2) 양길을 타도하고 송악(松岳:현 개성)을 근거로 자립하여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고, 다시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개칭하고, 도읍을 철원(鐵圓)으로 옮기고 연호를 무태(武泰)에서 성책(聖冊)으로 고쳤다. 911년에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개칭하면서 연호도 수덕만세(水德萬歲)로 고쳤으며, 914년에 다시 연호를 정개(政開)라 개칭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 일컫게 하고, 투항한 신라인을 모조리 죽이는 등 전제군주로서 횡포가 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자신은 미륵불(彌勒佛), 두 아들은 보살(菩薩:靑光菩薩·神光菩薩)이라고 칭하는 등, 백성을 괴롭히고 많은 신하를 희생시키며 호탕방일한 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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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슬픈 운명을 맞은 궁궐은 우리역사에서 어디일까. 국가의 흥망성쇄와 함께했던 궁궐은 차기 정권에 의하거나 외적의 침입으로 사라지거나 파괴됐으니 저마다 사연이 많을 것이다. 필자가 꼽는 `비운의 궁'은 태봉국 궁예도성이다. 한 민족이 동족 상잔의 6.25전쟁을 맞으면서 만든 군사분계선이 이 도성을 동강냈기 때문이다. 역사란 승자의 논리라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궁예왕의 대한 견해는 여기서 논외로 하자. 현재 궁예도성은 남측도, 북측도 접근할 수 없는 비무장지대에 놓여있다. 그 성 주변은 지뢰밭이다. 이런 궁예왕의 도읍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실물 모형이 400분의 1로 축소돼 철원군청 현관에 설치됐다. 궁예도성은 내성과 외성 등 3중성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희미한 성곽성태는 인공위성 사진을 기초로 했다고 한다. 재현과정에 참여한 손영식 문화재위원(명지대교수)는 400~500년대 뒤에 완성된 서울 성곽에 버금갈 정도의 규모를 갖춘 의미있는 도성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1973년 궁예도성의 남문에 있는 군부대에서 중대장 생활을 했으니 1천년의 시공을 두고 궁예왕의 도읍지를 바라본 셈이다. 도성내 건물은 일제시대 유적조사자료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와 조선고적도보에 등장한 석탑과 귀부 등을 참조하고 건물은 고구려의 안학궁, 발해 상경 용천부, 신라 왕경 등을 모델로 해서 재현했다. 가장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이 가운데를 가로 지르고 있는 군사분계선이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고 남북한 역사학자들의 발길마저 차단하는 레드 테이프다. 역사학자들은 이 정확한 궁예도성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남북 사학자들의 학술연구와 공동발굴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궁예왕의 대동방국의 꿈은 후세들의 전쟁으로 아직 규모조차 파악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 이 모형도를 보며 남북한 사학자들이 궁예도성 발굴작업을 하다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 장면을 꿈꾸어 본다. 반복과 질시, 갈등과 대립으로 50년을 살아온 남북한이 이제는 지뢰밭에 묻혀 있는 궁예도성을 발굴하며 근.현대 들어 기를 펴지 못한 대동방국의 꿈을 실현함이 어떤가. | |||
후삼국의 분열과 포천-궁예의 활동과 관련하여
진성여왕 3년 원종과 애노의 난 이후 50여 년 동안은 극심한 내란기였다. 이를 수습하여 정권을 수립하고 신라에 대항하려는 움직임이 옛 고구려와 백제지역에서 일어났으니, 그들이 바로 궁예와 견훤이었다. 그들은 비록 신라 계통 출신으로서 고구려나 백제의 전통과는 관계가 없었으나, 그들의 세력지에 팽배하였던 반신라적 고구려 백제의 회복이라는 움직임을 이용하여 각각 고구려와 백제의 계승을 표방하고, 대소 반란세력을 규합하여 마침내는 백제와 태봉을 건국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농민반란의 와중에서 새로이 성장한 궁예가 패강진지방의 호족 왕건 부자와 평산 박씨의 귀부를 받아들인 것은 궁예가 철원에 도읍할 무렵인 896년 경이었다. 그 후 2년이 채 못되어 궁예는 패강진 지역과 한산주 관내 30여 성을 차지 하였다. 이로써 우리 포천 지역도 완전히 궁예의 세력권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특히 궁예가 도읍하였던 철원은 우리 포천 지방과 지리적으로 이웃해 있고, 우리 포천시내에 궁예와 관련됨직한 유물, 유적들이 많이 분포하고, 궁예의 행적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보이고 있어서, 궁예의 세력 성장과 활동 및 몰락과정은 매우 주목된다고 할 것이다.
궁예의 행적은 {삼국사기} 궁예전과 {고려사} 등에 많이 전하고 있는데, 궁예는 일찍이 신라 국왕의 서자였다고 한다. 특히 그의 출생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설이 함께 전하고 있다.
(궁예는) 신라인이다. 성은 김씨인데, 돌아가신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誼靖)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빈어(嬪御)로서 그 성명은 아지 못한다. 혹은 이르기를, 제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 한다. 5월 5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그 때 집 위에 흰 빛이 있어 긴 무지개가 하늘까지 뻗쳤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 아이는 중오일(重午日)에 태어났고 태어나면서 이가 있으며, 또한 광염(光焰)이 이상하므로, 장래에 국가에 이롭지 못할까 두려우니 마땅히 기르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중사(中使)에게 그 집에 가서 (아이를) 죽이도록 명하였다. 사자가 강보 중에서 아이를 취하여 누각 아래로 던지니, 유모가 몰래 받다가 잘못하여 눈 하나를 찔렀다. 안고 도망하여 힘써 길렀다({삼국사기} 권 50, 열전 10, 궁예).
곧 궁예는 신라 제47대 헌안왕의 서자라는 설과 48대 경문왕의 서자라는 설이 함께 전하고 있으며, 태어날 때의 여러가지 징조가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하다고 하여 유모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논자들도 궁예의 출신에 대하여 헌안왕의 서자라는 설과 경문왕의 서자라는 설, 그리고 중앙의 진골귀족출신이라는 정도로 절충하는 설로 나뉘어 있는 실정이다. 먼저 헌안왕 서자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헌안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둘이 있었다고 하였으므로, 만일 궁예가 헌안왕의 서자였다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했지만, 헌안왕의 사위였던 응렴(膺廉, 경문왕)이 왕위를 계승했던 것은 응렴의 아버지인 계명(啓明)의 힘에 의해서였다는 것이다. 즉 계명은 문성왕 때에 시중과 상대등을 역임하면서 의정(誼靖, 헌안왕)을 즉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연유로 응렴이 헌안왕의 사위가 될 수 있었고, 결국 응렴을 즉위시키기 위하여 궁예를 제거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들고 있다. 반면에 경문왕 서자설은, 경문왕의 경우 정비(正妃)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고, 정비와 심한 정치적 갈등이 있었던 또다른 왕비가 있었다는 점에서, 후비에서 태어난 서자 출신인 궁예는 왕비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하여 제거된 것이라고 보았다. 절충설의 경우는 {삼국사기}와 {고려사}의 궁예 관련 기사들이 고려 태조 왕건 중심으로 서술되었다는 점을 주목하고, 견훤이나 왕건이 그 자신들의 가계를 중고시대 신라 왕실과 관련된 것처럼 꾸민 데 대해, 유독 궁예의 경우는 앞 시대의 신라왕과 직접 관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궁예가 유력한 가문 곧 진골귀족 출신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아무튼 궁예는 중앙의 어떤 정치적 요인으로 인하여 숨어살게 된 왕족이었다고 할 수 있는 바, 그는 나이 10여 세에 이르러 세달사(世達寺)에 들어가 출가하였다.
그는 후일 승려 생활을 그만둘 때 까지 세달사에서 생활하였는데, 세달사는 고려시대의 흥교사(興敎寺)로서 지금의 영월지방에 있었다. 이 절은 의상의 법손인 신림(神琳)이 주석하였던 곳으로서, 화엄종에 소속된 절이었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 3, 탑상(塔像), 낙산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조에는 이 절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전하고 있다.
옛날 신라 때에 세달사(世達寺) [지금의 興敎寺이다]의 장사(莊舍)가 명주(溟州) 날이군(捺李郡)[안찰컨대 지리지에는 명주에 날이군이 없고 오직 날생군(捺生郡)만이 있다. 본래 날생군은 지금의 영월(寧月)이다. 또한 우수주(牛首州) 영현으로 날령군(捺靈郡)이 있는데 본래 날이군(捺已郡)으로 지금의 강주(剛州)이다. 우수주는 지금의 춘주(春州)이다. 지금 날이군(捺李郡)이라 말하고 있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본사에서 승려 조신(調信)을 지장(知莊)으로 삼아 보내니, 조신이 장상(莊上)에 이르러 태수 김흔공(金昕公)의 딸을 보고 매우 혹하여 낙산(洛山) 대비(大悲) 전에 나아가 몰래 행(幸)하기를 기도하였다. (조신이 홀연히 꿈에) 명주 해현령(蟹縣嶺)을 지나는데 15살 먹은 큰 아이가 굶어 죽으니 통곡하며 길가에 묻었다. 꿈을 깨어 해현의 아이를 묻은 곳에 가서 파보니 석미륵(石彌勒)이 나왔다. 깨끗이 씻어 가까운 절에 봉안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장사의 직임을 면하고 자신의 재산을 내놓아 정토사(淨土寺)를 창건하고 백업(白業)을 닦았다.
위의 기사는 세달사의 조신이란 승려에 관한 일화로서, 그 가운데에는 839년 장보고의 청해진 군사를 방어하다가 패하여 소백산에 은거했다가 849년에 병사한 김흔과 관련된 부분이 있어, 대체로 830, 840년대의 사실로서 인정된다. 이는 궁예가 출가하기 50여년 전의 일로서, 세달사의 사상적 계통과 아울러 궁예의 사상적 바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세달사 승려인 조신이 낙산사 대비전에 나아가 기도를 하였고, 결국 석미륵과의 인연으로 깨달음이 있어 정토사를 창건하였다는 데에서, 세달사는 낙산사 미륵불 정토사상과 모종의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낙산사는 의상이 창건한 화엄종의 사찰이었으며, 의상의 법손인 신림(神琳)은 세달사의 승려였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 당시에 세달사가 화엄종 소속의 사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세달사 승려인 조신이 미륵불과 관련을 맺고 있고, 또 세달사 승려 출신인 궁예가 스스로를 미륵불(彌勒佛)이라 일컬으면서 큰 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 둘째 아들을 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 칭하였던 것은, 당시 세달사를 둘러싼 이 지역의 불교 신앙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특히 세달사가 영월지방에 있으면서도 신앙적인 면에 있어서는 낙산사의 소재지인 명주(溟州)지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위의 조신 설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거니와, 명주지방는 일찍이 진표(眞表)가 법상종(法相宗)을 폈던 곳이었다.
그런데 진표가 폈다는 법상종은, 일찍이 태현(太賢)이 중앙 진골귀족을 대상으로 한 법상종과 구별되는 것이었다. 곧 진표는 교학 중심의 태현의 법상종과는 달리 토착신앙과도 습합되기 쉬운 점찰법(占察法)과 참회의 실천을 그 내용으로 하였고, 법상종의 설주(說主)인 미륵을 주존불로 삼았었다. 이 무렵의 미륵신앙은 중고기의 하생신앙(下生信仰)과는 달리 도솔천에 왕생을 원하는 상생신앙(上生信仰)으로서, 이미 중대 초부터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신앙이 일반 민간에게 널리 유포된 결과로 보여진다. 이러한 관념은 태현의 법상종에서는 아미타불을 내세불로 내세우게 하였고, 진표의 법상종에서는 석가와 미륵 사이에 부처가 없는 세계(無佛世界)의 보살로서 지장보살이 상정되었다. 특히 지장보살은 말법시대에 6도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성격을 가지므로, 이러한 신앙의 형태는 실천적 신앙인 진표의 점찰법과 함께 당시에 중앙으로부터 소외되고 기근에 시달리던 민중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따라서 진표계의 법상종은 금산사(金山寺) 속리산 명주 등지를 중심으로 전파되어 통일신라의 중심지인 삼국시대 옛 신라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에 퍼져 신앙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진표 스스로가 백제가 망한 100여 년 뒤에도 '백제인'으로 자처했을 정도로 반신라적 성향이 강했거니와, 당시를 말법시대로 인식한 진표계 법상종이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포교의 대상으로 하였다는 것은 주목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표의 신앙형태나 정치적 성향, 그리고 그 포교 지역 등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신앙은 현실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고 현실보다는 내세에 관심을 두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비록 진표 이후 신라 지방사회에 폭넓게 선종이 융성하였다고 하지만, 명주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서의 진표계의 신앙형태는 매우 뿌리깊게 작용한 듯하며, 그러한 신앙의 단편을 위의 조신의 일화와 궁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 포천지방에 있는 미륵불상과 이와 관련된 전설은 그러한 신앙의 내력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곧 군내면 구읍리 청성산 서남단에 있는 2m 크기의 석불 입상은 신라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서, 아마도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읍내의 반월성을 쌓을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는 얼굴이 거의 마모되었지만 마을에서는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어, 신라 말엽의 미륵신앙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여겨진다. 또한 군내면 구읍리 600-1에 있는 미륵불상에는 '신라시대 어느날 밤 갑자기 미륵불 남녀 한 쌍이 옥계천을 중심으로 솟아났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어서, 세달사의 승려 조신이 해현령에서 석미륵을 찾았다는 설화와 유사하다. 이 미륵불상은 현재 여미륵불만이 남아 있으며, 한말에 명성황후가 3년간 불공차 다녀 갔다고 전한다.
한편 그 정확한 시기는 알수 없으나 미륵신앙과 관련한 전설도 상당수 전하고 있다. 곧 이동면 연곡 4리의 뒷둔지(後屯地)에는 벌판 가운데 수목이 우거진 숲의 땅 속에 미륵이 묻혀 있다는 전설이 있어서, 한때 이 미륵을 파서 세우려고 하자 마을의 옛 노인들이 이것을 파서 세우면 마을 아낙네들이 바람이 난다고 만류함으로써 발국작업이 중단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현재 포천 종합고등학교 뒤에 있는 마을인 군내면 하성북리 백석동(白石洞)의 지명과 관련된 전설은, 구읍리 미륵불의 조성과 관련된 것이다. 곧 이 마을 뒤에 있는 백석을 깎아 구읍리에 있는 미륵불 머리를 씌웠는데, 백석 마을 사람들이 자기 마을의 흰돌을 가져 간다고 시비를 걸면서 그 흰돌을 제 위치에 다시 가져다 놓았다. 그랬더니 다시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흰돌이 다시 미륵불 머리에 씌워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은 흰돌 곧 백석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이처럼 우리 포천 지역에 미륵불과 관련된 전설이 광범위하게 널려 있는 것은, 우리 포천 지방이 궁예의 근거지였던 철원과 인접해 있다는 점과 신라 말엽에 진표계의 미륵신앙이 강원도 북쪽의 명주지방을 비롯하여 우리 지방에까지 일반 백성층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유포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궁예는 이러한 신앙적 배경하에서 후일 반신라의 기치를 세우면서 스스로를 미륵불로 자처할 수 있었고, 진표가 그러했듯이 당시 지방에 만연해 있던 반신라적 기운과 현실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던 지방민의 많은 호응을 얻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특히 왕족이었던 궁예의 출신 배경은 명주 등지의 호족들을 쉽게 규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작용하였고, 중앙 정부에 의해 가혹한 부세로 착취당하던 이 지역 농민들로 하여금 미륵신앙에 바탕을 둔 궁예의 기치 아래 쉽게 결집케 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궁예가 지방의 세력자로서 장군이 되기까지에 대하여 {삼국사기} 궁예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궁예가) 일찍이 재(齋) 올리는 데 나아가 행렬에 들었는데, 까마귀들이 무엇을 물어다가 그의 발우 안에 떨어뜨렸다. 주워 보니 상아로 만든 점치는 가지에 임금 '왕(王)'자가 써 있었다. 비밀히 간직하여 말하지 않고 매우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신라 말년에 정치가 문란하고 백성들이 흩어지고, 왕기(王畿) 밖의 주현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내속하는 것이 반반씩이었으며, 원근 도적의 무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개미떼처럼 모이는 것을 보았다. 선종(善宗, 弓裔)은 어지러운 틈을 타서 무리를 모으면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하고, 진성여왕 즉위 5년 대순(大順) 2년 신해(891)에 죽주(竹州, 竹山)의 도적 우두머리 기훤(箕萱)에게 귀의하였으나 기훤이 업신여기며 대우하지 아니하였다. 선종이 우울하여 스스로 안정하지 못하고 비밀히 기훤의 휘하인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결탁하여 친구가 되었다. 경복(景福) 원년 임자(892)에 [선종이] 북원(北原, 原州)의 적 양길(梁吉)에게로 가니, 양길이 잘 대우하여 일을 맡기었다.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주면서 동쪽으로 가서 공략하게 하니, 이에 그는 치악산 석남사(石南寺)에 나아가 머무르면서 주천(酒川, 原城) 나성(奈城, 寧越) 울오(鬱烏) 어진(御珍) 등의 현성(縣城)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받았다. 건령(乾寧) 원년(894)에 명주(溟州, 江陵)로 들어가니 군사가 3,500이나 되었다. 이를 14개 부대로 나누어 금대(金大) 검모(黔毛) 흔장(昕長) 귀평(貴平) 장일(張一) 등으로 사상[舍上은 部長이다]을 삼고, 군사들과 고통을 달게 감내하며 힘든 일을 함께 하였으며, 주고 빼앗는 데에 있어서도 공평하게 하며 사사로이 하지 아니하니, 무리들이 마음으로 경외하며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위의 기사에서 궁예는 세달사의 승려로 있으면서도 이미 세속의 정치에 관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 도참적인 내용, 곧 까마귀가 임금 '왕'자가 쓰인 점치는 가지를 물어다 주었다는 것은, 일찍이 이 지역에 만연한 진표의 법상종에서 점찰법을 강조하였던 사실과 관련될 듯하다. 곧 진표의 경우 망신참회(亡身懺悔)에 의하여 미륵과 지장보살로부터 계(戒)와 점찰간자(占察簡子)를 받은 사실이 있는데, 이 지역에 유포된 이러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궁예 또한 그러한 일화에 대비한 결과가 까마귀의 일화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아무튼 이러한 일화는 궁예가 승려 생활을 하면서 신라사회의 모순과 당시의 혼란한 사회적 상황을 보면서 자신의 출신과 관련하여 뜻을 키워갔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궁예는 진성여왕 5년(891) 환속하여 기훤에 귀의하였지만 기훤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물론 궁예가 기훤의 주목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궁예의 세력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위의 기사에 보듯이 궁예는 자신의 뜻을 키우기 위해 거의 홀홀 단신과 같은 처지에서 기훤에 의지하였고, 기훤의 휘하에서 자신과 뜻을 같이 할 만한 원회(元會) 신훤(申煊) 등과 같은 지기를 모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듬해에 궁예가 양길에게 투탁하였을 때에 이들 새로이 모은 지기들과 그들의 휘하는 궁예와 행동을 같이 하였을 것이고, 이에 대하여 양길의 환대는 당연한 것이었다.
궁예는 양길의 휘하에서 그가 잘 알고 있었던 지역에 대한 공략 책임을 맡게 되었고, 결국 진성여왕 8년(894) 장군으로 추대되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행적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군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바가 있었으니, 모든 일에 있어서 고락을 함께 하면서 공평무사했다는 점이다. 이는 신라의 정치적 혼란과 과도한 부세, 그리고 옛 고구려 지역민에 대한 차별 등에 대해 반발을 갖고 있는 이 지역 출신인 군졸들의 마음을 안위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특히 궁예는 신분에 있어서도 왕실과 연결되었고 사상적으로는 지역민과 동일하였기 때문에 어느 초적의 무리들과는 다른 정치적 이념을 제시할 수 있는 존재였다. 이는 신라 중앙귀족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있는 호족들의 세력을 규합할 수 있는 배경으로 작용하였고, 결국 제주(堤州) 지역의 귀평(貴平), 영월의 김주원(金周元)계 후손, 김순식(金順式)으로 대표되는 명주 세력 등을 비롯하여 895년에 투항한 패서도의 평산박씨세력, 896년에 귀복한 송악의 왕건 부자, 효공왕 4년(900)에 귀부한 청주세력, 904년에 내항한 공주(公州) 지방의 홍기(弘奇) 등의 세력을 규합할 수 있었다.
특히 895년 궁예가 저족(猪足, 麟蹄) 성천(川, 華川) 부약(夫若, 金化) 금성(金城, 金化郡 金城面) 철원 등을 점령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곧 강원도 북변 일대를 격파한 궁예가 이제 철원을 점령함으로써 한강 북쪽 지역으로 눈을 돌리게 되자, 패서[패강진] 지역의 무리들이 항복해왔던 것이다. 이로써 개국하여 국호를 고려(高麗)라 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는 바, 892년에 이미 완산주에 도읍하고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정권과 함께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궁예의 고려 건국은 철원과 패서지방을 점령함으로써 한강유역으로의 진출 거점 지역을 확보하면서부터이거니와, 국호를 고려라 칭한 것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자처한 것으로서, 이 지역 고구려 유민들의 호응을 기대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건국한 이듬해인 896년에는 송악(개성)의 왕건 부자가 투항하였다. 궁예는 그를 철원군 태수에 임명하여 패강진 일대의 공략을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해에 승령(僧嶺, 연천군 삭녕)과 임강(臨江, 장단)을 공략하였는데, 이 무렵에 우리 포천 지역도 궁예의 지배하에 들어 가 그 이듬해의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의 공격을 위한 교두보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우리 포천시와 철원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위치한 명성산(鳴聲山)에는 왕건이 궁예에게 항복했다는 '항서(降書)받골'이 있어서, 이 곳에서 궁예가 왕건 부자로부터 투항의 서한을 받았던 것이 현재의 지명에까지 남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또한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산 734에 위치한 반월성(半月城)에 대하여 {문화유적총람}에는 "신라 48대 경문왕의 왕자 궁예가 태봉국(泰封國)을 건립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여 남으로 신라, 서남으로 견훤의 후백제와 대치하여 자웅을 겨룰 때 그 부장(副將)이 축성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석축성으로서 최대 높이가 10여 m로 복원되나 전장(全長) 1km 가량으로 대부분 붕괴되고 300m정도는 일부 허물어진 채 석축이 잔존하며 산정(山頂0에는 직경 300m 정도의 공지(空地)가 남아 있고 그 상부에 200평 정도의 분지가 있다. 성중에 있었다고 전하는 3개의 우물중 현재는 1개소의 유지만 남아 있다"라고 하여,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한 뒤에 이곳에 반월성을 쌓았다는 전승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앞에서 살폈듯이 이를 백제 초기의 성지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구읍리의 미륵불과의 관련이나 남창동(南倉洞) 등에 얽힌 전승 등으로 보아 궁예와의 관련설이 옳을 듯하다. 이 성은 해발 284.6m의 산봉우리를 감싸서 쌓은 포요형(包腰形)의 석축성으로서, 둘레는 1,063m이며 면적만도 37,205 평방m에 달한다. 물론 이 성은 한동안 쓰이지 않다가 조선 광해군 10년(1618)에 개축하여 주진(主鎭)을 삼았다가 인조 때에 다시 수축하였다고 한다. 정상부의 봉우리는 장대지로 추정되는데 이곳으로부터 남벽쪽으로 경사면에 흙계단을 만들어 장대지를 보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사면은 가파르고 서벽 밖으로는 포천천이 흐르고 있어 자연 해자를 겸하고 있다. 서벽 안에는 봉화대가 있는데, 강원도 철원부 적골산봉수(適骨山烽燧)-영군면 중군봉수(中軍烽燧)-며로곡(老谷, 老峰烽燧)봉수-성동리산성-독산봉수(禿山烽燧)-반월성-잉읍첩(仍邑帖, 仍邑峴)봉수-양주 대이산봉수(大伊山烽燧) 등으로 연결된다.
반월성에 얽힌 전설과 함께 관인면 초과 2리에 있는 남창동에도 궁예와 관련한 전승도 있다. 지금은 흔적을 찾기 어려우나 본래 이 곳에는 '궁예왕이 군량미를 저장하기 위하여 큰 창고를 지었다고 하며, 실제로는 남창뿐 아니라 北倉, 司倉도 있었다'는 전승이 있어서, 궁예 정권이 패서도와 한강유역을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우리 포천시 지역에 반월성과 함께 이들 군창지를 조성하였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898년 양주(楊州)와 견주(見州)를 비롯한 패서도와 한산주 관내 30여 성을 공략한 궁예는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고, 북원의 양길의 침입을 물리치고 그 이듬해에는 광주(廣州) 국원(國原, 忠州) 당성(唐城) 청주(靑州, 淸州) 괴양(槐壤) 등지를 정복하였으며,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年號)를 무태(武泰)라 하였다. 이 해에 패강진의 10개 군현이 항복해 왔으며, 상주를 중심으로 한 30개 현을 정벌하자 공주의 홍기가 항복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중부 지역은 공주-상주-죽령을 경계로 신라 및 견훤의 후백제와 대치하게 되었다.
이제 남쪽의 강역을 확장한 궁예는 905년에 다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다.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정치적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곧 철원에 도읍을 옮기기 바로 전년도에는 스스로 투항하여 친궁예적 성격을 띤 청주의 인호를 집단으로 사민하였던 바, 이들 청주인의 세력을 새로이 국도에 안치함으로써 궁예의 정권하에서 세력을 키워오던 이들을 견제하고 전제왕권을 수립하고자 한 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로써 청주인들은 궁예의 정권 하에서 문신과 무신, 군인 등으로 크게 활약하였고, 후일 왕건과 궁예의 대결과정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국도를 철원으로 옮긴 905년 이후로 후삼국간의 전쟁은 궁예와 견훤의 전쟁이 중심이 되었다. 궁예는 왕건으로 하여금 후백제의 배후지역인 서남해안을 공격하게 하여 나주 광주 진도 등지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견훤의 중국과의 통로를 차단하였다고 하지만, 대내적으로는 반신라적 호족세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궁예가 과도하게 전제적 왕권을 추구함으로써 이에 반발하는 세력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913년 왕건이 시중(侍中)에 보임된 직후에 일어난 이른바 아지태(阿志泰) 사건은 새로운 민심의 수습자로서 왕건이 등장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아지태 사건은, 청주인 아지태가 같은 청주인인 입전(笠全) 신방(辛方) 관서(寬舒) 등을 궁예에게 참소하여 모함한 사건으로서 수년동안 유사가 해결하지 못했던 것인데 왕건이 그 진위를 밝혀 아지태를 처벌한 사건이다. 여기에서 아지태는 궁예의 측근세력으로 입전 등은 왕건의 세력으로 이해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군대의 장교들과 종실의 훈현(勳賢)들, 그리고 유학의 무리들이 왕건을 따르게 되므로 왕건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 하여 다시 외방에 뜻을 두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아지태 사건 이후 궁예는 많은 정적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는 궁예가 전제적 왕권을 수립하고자 하는 의도로 풀이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하는 것과 사치를 극한 거둥,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간언한 자의 처단 등을 들면서, 그의 부인 강씨(康氏)를 죽인 이후로는 '의심이 많고 화를 잘내니, 여러 보좌관과 장수 관리로부터 아래로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주륙되는 자가 자주 있으며, 부양(斧壤) 철원 일대의 사람들이 그 해독을 견디지 못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물론 {삼국사기}의 이러한 서술 태도는 왕건의 고려 건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으로서 궁예의 가혹하고 부도덕한 측면을 과장한 부분이 없지 않겠지만, 점차 민심이 궁예로부터 떠나고 있었던 사실을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이와 같은 민심의 이반은 918년 철원의 시전에 [고경참문(古鏡讖文)]이 나돌게 되면서 극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궁예전에는 그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상인 왕창근(王昌瑾)이란 자가 당나라에서 와서 철원 시전에 살고 있었다. 정명(貞明) 4년 무인(918)에 시중에 모양이 괴이하게 크며 모발이 모두 흰 사람 하나가 나타났는데, 옛날 의관을 입고 왼손에는 자기로 된 사발을 가지고 오른손에는 고경(古鏡)을 들고 와서 왕창근에게 이르기를 "거울을 살 수 있는가"라고 하므로 창근이 곧 쌀로서 바꾸었다. 그 사람은 쌀을 거리의 걸아(乞兒)들에게 나누어주고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였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에 걸었는데 해가 거울에 비치자 거기에 가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읽어보니 고시(古詩)같은 것으로서 대략 이러한 것이었다. "상제가 아들을 진마(辰馬) 땅에 내려 보내니, 먼저 닭을 잡고 뒤에 오리를 때린다. 사년(巳年)중에는 두 용(龍)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몸을 청목중(靑木中)에 감추고, 하나는 형상을 흑금동(黑金東)에 나타냈도다." 왕창근이 처음에는 문구가 있는 것을 몰랐다가 이것을 자세히 보고는 보통 일이 아니라 하고 드디어 왕[궁예]에게 고하였다.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창근과 함께 그 거울 주인을 찾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오직 발풍사 불당에 있는 진성소상(鎭星塑像)이 그 사람과 같았다. 왕이 오랫 동안 이상함을 탄식하다가 문인 송함홍(宋含弘) 백탁(白卓) 허원(許原) 등을 명하여 풀이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서로 이르기를, "상제가 아들을 진마(辰馬)에 내려 보냈다는 것은 진한 마한을 말함이요, 두 마리 용이 나타나 하나는 몸을 청목(靑木)에 감추고 하나는 흑금(黑金)에 나타냈다고 하였는데, 청목은 소나무이니 송악군인(松岳郡人)으로서 용(龍)으로 이름한 이의 손자 곧 지금의 파진찬 시중(왕건)을 말함인가. 흑금은 철이니 지금의 도읍인 철원을 말함이다. 지금 임금이 여기서 일어났다가 나중에 여기서 멸망한다는 참언이다. 먼저 닭을 잡고 후에 오리를 친다는 것은 파진찬 시중이 먼저 계림을 얻고 나중에 압록강을 거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함홍 등이 서로 말하기를, "지금 임금의 포학하고 어지러움이 이와 같은데, 우리들이 사실대로 말한다면 우리들만이 젓갈이 될 뿐 아니라, 파진찬 또한 반드시 화를 당할 것이다"라 하고, 이에 말을 적당히 꾸며서 (왕에게) 고하였다. 왕은 갈수록 흉악 포학한 짓을 마음대로 하여, 신하들은 떨며 두려워 하여 몸둘 바를 몰라 했다.
당시에 이러한 고경 참문이 나타나게 된 것에 대하여는 왕건을 중심으로 혁명파 인물이 조작한 것, 또는 강원도 통천군에 있는 발풍사를 중심으로 궁예의 학정에 반발하고 왕건을 추대하려는 움직임의 반영 등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는 바야흐로 왕건과 궁예의 대결이 임박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결국 같은 해에 장군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이 왕건을 옹위하여 정변을 일으켰던 것이다. 당시의 정변에 대하여 {삼국사기} 궁예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부인 유씨도 여러 장수들의 의논을 듣고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바치매, 여러 장수들이 태조를 부축하여 호위하고 문 밖으로 나오며 앞에서 외치게 하기를,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전후로 달려와 따르는 자가 얼마인지 모르며, 또 먼저 궁성문으로 가서 떠들며 기다리는 자가 역시 1만여 명이었다. 왕이 이에 어찌할 바를 몰라 이미 사복 차림으로 도망해서 산림중으로 들어갔다가 얼마 아니하여 부양(斧壤, 平康)민들에게 해를 입었다.
위의 기사에서 왕건의 정변은 아무런 무력 충돌 없이 성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궁예의 정권 내에는 상당수의 친궁예세력이 온전해 있었고, 또한 철원에 인근해 있는 우리 포천 지역에는 당시에 궁예가 왕건의 군대와 접전을 벌였다는 전승이 많이 전하고 있어, 정변에 따른 양 세력의 접전을 예상할 수 있을 듯하다. 왕건의 정변을 반대한 청주 출신의 능달(能達)과 견금(堅金), 그리고 정변 이후에도 여전히 귀부하지 않은 명주의 김순식 등은 친궁예세력으로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특히 왕건이 정변을 성공한 당해년도 9월에는 청주 출신 순군리(巡軍吏) 임춘길(林春吉)이 철원의 배총규(裵悤規), 계천(季川)인 강길(康吉) 아차(阿次), 매곡(昧谷)인 경종(景琮) 등과 더불어 왕건에 반발하여 청주로 도망가려 하다가 발각되어 처벌된 사례가 있었으며, 그 다음달에 다시 청주지방에서 왕건에 반발하여 진선(陳宣) 선장(宣長) 형제가 모반을 일으키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들 청주 세력은 일찍이 철원을 궁예의 도읍으로 삼을 때에 사민되어 왕경인이 되었으며, 그 후 궁예의 정권에서 문무관리와 요직을 누렸던 이들이었다. 이들 세력의 동향에 대한 기록은 잘 보이지는 않는데, 물론 이는 고려시대의 사서들이 왕건을 중심으로 서술한 까닭이라 할 수 있으며, 위의 {삼국사기} 기사에 보이는 정변의 과정은 상당한 윤색이 있는 기사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포천 지역에는 당시 정변의 과정에서 궁예의 군대와 왕건의 군대가 대치하고 접전을 벌였던 전승이 많이 전하고 있다. 곧 {문화유적총람}에는 포천시 영중면 성동리에 있는 성동리산성에 대하여 "후삼국 시대에 궁예왕이 그 부장이었던 왕건에게 쫓길 때 하루 저녁을 숙영하기 위하여 쌓은 성이라 전하는데 북강(北江, 現 漢灘江)에서 이 성까지 백성과 군졸들이 일렬로 서서 손에서 손으로 돌을 전달해서 쌓았다 전하며 높이 2-4m, 둘레 2km의 석성의 일부가 유존할 뿐 전체 규모는 확실히 알 수 없이 붕괴 멸실되었다"라고 전하고 있어, 성동리산성이 궁예와 모종의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 또한 영북면 산정리에 위치한 산정호수의 수원이며 철원과 접경을 이루는 해발 922.6m의 명성산(鳴聲山)에 얽힌 전설이나 각종 지명들에 얽힌 이야기는 왕건의 정변에 따른 당시의 정황을 어느정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곧 왕건의 정변으로 인하여 궁예는 부하 군졸들과 밤중에 궁성을 빠져 나와 명성산에 은거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려 이 산에 성을 쌓았는데, 왕건과 대결하다 왕건군이 명성산 뒤쪽을 포위하자, 궁예군은 명성산 앞 절벽에 떨어져 죽고 궁예는 북쪽으로 간신히 도망하여 부양(斧壤, 지금의 平康)에 이르렀으나 얼마 후 그 곳 백성들에게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런데 이 때 도망하지 못한 궁예의 군사와 그 일족들은 온 산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하며 그 후에도 산중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하여 이 산을 울음산 곧 명성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궁예의 참담한 이야기가 서린 이 산에는, 궁예가 왕건에게 패하여 철원 북방으로 패주하여 갈 때에 왕건 군사로부터 급습을 받아 싸우게 되었다는 '야전(野戰)골', 궁예가 지금의 산정호수 좌우로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망원대(望遠臺)를 올리고 봉화를 올렸다는 '망봉(望峰)', 궁예왕이 왕건의 군사에게 ?기어 은신하던 곳으로서 2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자연동굴로 명성산 상봉에 위치한 '궁예왕굴', 琉??동리의 이름으로서 파주골(坡州洞)은 궁예가 왕건의 군대에 패하여 도망하였다고 하여 패주동(敗走洞, 가는골)이라 하던 것이 그 음이 변하여 파주골이 되었다는 전설과 이동면 장암 3리의 여우고개는 궁예의 군사가 왕건 군사에게 패하여 명성산에 피난하고 있을 때 왕건군사들이 궁예군사를 여우처럼 엿보았다고 해서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 이동면 도평 3리의 도마치(道馬峙)는 궁예가 왕건과의 명성산 전투에서 패하여 도망할 때 이곳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산길이 너무 험난하여 이곳에서 말을 내려 끌며갔다고 하여 도마치라 부르게 되었다는 등등의 전설이 있다.
이처럼 우리 포천 지역 특히 명성산 일대에 얽힌 궁예 관련 전설은 위의 {삼국사기} 기사에서 궁예가 도망하였다는 산림중이란 곳이 명성산이 아닌가 추측케 할 정도이며, 궁예 세력의 최후 항전지가 이 곳 명성산 일대가 아니었는가 짐작케 한다. 특히 이곳 지명에 얽힌 전설은 오히려 왕건을 적대시하고 궁예를 옹호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어서, 철원과 이웃한 우리 포천지역의 궁예와의 친연성을 짐작하게 한다.
궁예가 신라를 적대시한 세가지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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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원통의 당이 30개 였으나 현재 15개만 남아있다 |
▲ 진흙을 이겨 이토록 큰 사천왕상을 만들 수 있는 정성이 놀랍다 |
▲ 소박한 것이 주는 감동이 무엇인가를 통째로 보여 주는 대웅전 |
▲ 병해대사와 임꺽정 일곱두령. 벽화 밑에 그들의 이름이 써있다. |
▲ 병해대사의 칠장마를 탄 꺽정 |
▲ 궁예도 명부전의 한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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