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서면 보생리 337(만선동)번지 만곡사는 하음봉씨(河陰奉氏) 사우이며 전남문화재자료 제98호이다. 1791년(정조 15년) 묵헌 봉여해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설단했다가 2년 뒤 사우를 창건하였다. 1862년(철종 13년) 봉유례와 봉즙, 봉단의를 추배하였으며 1868년(고종 5년) 대동훼철 되었다. 1962년 향촌유림의 발의로 중건하여 묵헌 봉여해, 충정공 박팽년, 송탄 봉단의를 배향하였다.
봉여해(1419∼1456)의 호는 묵헌이며 병조판서를 역임한 풍애의 아들로 박팽년의 아버지인 한석당 박중림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그의 사위가 되었다. 사옹원 별좌 등을 역임하였으며 박팽년 등 사육신과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처형당했으나 1804년(순조 4년 6월) 단종조 충신으로 복위되었다.
봉단의(1538∼1592)의 호는 송탄이며 묵헌의 고손이다. 하서 김인후에게 수학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영광군에 속했던 현 삼계면 봉정사에서 의병을 일으켜 도별장 생원 이웅종, 추사 강항, 삼종질인 종익·진익 등과 함께 영광군을 수호하였다.
박팽년(1417∼1456)의 본관은 순천, 호는 취금헌, 시호는 충정이다. 한석당의 큰아들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관찰사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집현전 학사로 활동하였다.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1456년(세조 2년) 단종 복위운동을 추진했다가 실패하여 부친과 오형제, 세아들까지 3대가 멸문의 화를 입었다.
삼서면 보생리 337(만선동)번지 만곡사는 하음봉씨(河陰奉氏) 사우이며 전남문화재자료 제98호이다. 1791년(정조 15년) 묵헌 봉여해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설단했다가 2년 뒤 사우를 창건하였다. 1862년(철종 13년) 봉유례와 봉즙, 봉단의를 추배하였으며 1868년(고종 5년) 대동훼철 되었다. 1962년 향촌유림의 발의로 중건하여 묵헌 봉여해, 충정공 박팽년, 송탄 봉단의를 배향하였다.
봉여해(1419∼1456)의 호는 묵헌이며 병조판서를 역임한 풍애의 아들로 박팽년의 아버지인 한석당 박중림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그의 사위가 되었다. 사옹원 별좌 등을 역임하였으며 박팽년 등 사육신과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처형당했으나 1804년(순조 4년 6월) 단종조 충신으로 복위되었다.
봉단의(1538∼1592)의 호는 송탄이며 묵헌의 고손이다. 하서 김인후에게 수학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영광군에 속했던 현 삼계면 봉정사에서 의병을 일으켜 도별장 생원 이웅종, 추사 강항, 삼종질인 종익·진익 등과 함께 영광군을 수호하였다.
박팽년(1417∼1456)의 본관은 순천, 호는 취금헌, 시호는 충정이다. 한석당의 큰아들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관찰사 형조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집현전 학사로 활동하였다.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1456년(세조 2년) 단종 복위운동을 추진했다가 실패하여 부친과 오형제, 세아들까지 3대가 멸문의 화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