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도 내재도
최근에 와서 보그뿐 아니라 점점 많은 철학자나 신학자들이 초자연주의적 유신론도 아니고 내재주의적 범신론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무신론도 아닌, 제3 혹은 제4의 입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입장은 이들이 새로 만들어낸 입장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에서도 예로부터 계속되어 왔지만, 그 동안 유신론의 극성에 압도되어 일반인 보기에는 뒷전 차지나 하는 신관쯤으로 취급되어 왔다.
이렇게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강조하는 신관을 영어로 panentheism이라 하는데, 한국말로 '범재신론'(汎在新論)이라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초월만 강조하는 유신론이나 내재만 강조하는 범신론의 일방성을 극복하여 신의 초월도 내재도 동시에 다 강조하는 신관으로서 전문적인 용어를 쓰면, '양극적 유신론'(dipolar theism)이라 하기도 하고, 초자연주의적 신관과 대비시켜 '자연주의적 유신론'(naturalist theism)이라 하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용어는 '변증법적 유신관'(dialectical theism)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 맥쿼리(John Macquarrie)가 제창한 말인데, 뜻이 분명하고 오해의 소지를 덜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훌륭하지만, 단 너무 길다고 하는 단점 때문에 계속 쓰기가 곤란하다. 여기서는 19세기 독일 철학자 크라우스(Karl Kraus)가 만들어낸 이후 일반적으로 써내려 오던 '범재신론'이란 용어를 그대로 쓴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범재신론이 용어상 범신론과 비슷하다고 하여 이와 혼동하거나 엇비슷한 것으로 오해하면 큰일이라는 것이다. 범재신론은 초자연주의적 신관과 완전히 다를 뿐 아니라 범신론과도 그 못지 않게 다른 입장이다. 또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강조한다고 해서 반쯤은 초월적이고 반쯤은 내재적인 신을 생각하는 신관이라 오해해도 곤란하다. 완전히 초월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내재라고 하는 신 특유의 변증법적 역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범재신론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알아보고 싶으면, 위에 말한 맥쿼리 교수가 그의 기포드 강연을 기초로 하여 쓴 『신성의 탐구』(In Search of Deity, 1985)라는 책을 읽어볼 수 있다. 나도 한 때 '신의 문제'라는 과목을 가르치면서 교재를 사용했지만, 범재신론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 이런 생각들을 가졌던 사람의 대표자들은 누구고, 그들의 생각이 각각 어떠했던가, 그것이 유신론이나 범신론과 어떻게 다른가, 세계 여러 종교에서는 그런 생각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하는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것으로 범재신론에 관한 책으로서는 가장 잘 된 책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서설이 좀 길어졌지만, 이제 이 신관이 어떤 것인가 간략하게 살펴보자. 우선 말 그대로 '모든 것(汎, pan)이 하나님신(神, theos) 안에(두) 있다(在)'는 생각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범신론에서는 모든 것이 곧 신이다. 신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그대로 신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데 반해 범재신론은 우리와 하나님, 혹은 세상과 하나님을 분간한다. 분간은 하지만 물론 유신론처럼 하나님과 우리, 혹은 하나님과 세상이 동떨어진 개별적 존재로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신은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존재를 합한 것이 신이 아니다. 신은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에게 이런 말들이 낯선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낯설다고 해서 그대로 '범신론'으로 취급해버리면 곤란하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초자연적 신관과 다른 신관, 자기들이 이해하기 곤란한 신관이면 모두 도매금으로 "범시론이다!" 하고 일거에 배격하고 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번 범재신론의 신관은 보그 교수의 경우에서도 보듯 그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도달한 신관으로서 함부로 정죄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신에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적극적으로'우리가 모르던 신', 정확히 말해서 우리의 낡은 신관에 왜곡되게 비치던 하나님을 눈을 닦고 다시 보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일이다. (편자주: 마커스 보그의 '새로 만난 하느님' 2장 '왜 범재신론인가?'(65-96)를 보라)
그 뿐 아니다. 보그에 의하면 이런 범재신론은 성경에 일부 나타난 신관이기도 하다. 물론 성경 전체를 통해 '저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신관이 지배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이런 것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를 그만 두기만 하면, 성경에서도 결국 하나님이 저 위에도 계시고 동시에 여기에도 계신다는 단서들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구체적인 성구를 하나하나 들추어내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한 번만이라도 가만히 생각해 보라. 인간이 하나님의 그 엄청난 신비스러우심, 더할 수 없이 큰 두려움과 떨림의 대상이면서도 동시에 우리를 사로잡는 힘, 루돌프 옷토(Rudolf Otto)가 말한 대로, 그 '떨리면서도 끌리는 신비'(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를 말로 표현하려고 할 때 '초월'이라는 용어 이상 더 적절한 말이 무엇이었겠는가? 이런 말을 공간적으로 표현한 것이 '저 너머'이고 시간적으로 표현한 것이 '영원'이다. 우리가 신을 이야기할 때 이렇게 '초월'이라는 말, 혹은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은 신과의 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느낄 수밖에 없는 심리적 거리감, 신의 무한한 신비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생각해서 신과 우리, 신과 세계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존재론적 간극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좀 전문적인 용어를 쓰면, 신의 심리적 초월(psychological transcendence) 내지 인식론적 초월(epistemological transcendence)을 존재론적 초월(ontological transcendence)로 오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보그가 거친 신관의 변천은 어느 의미에서 신앙이 성숙하면서 거치는 과정과 같다. 많은 경우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유신론적 신관에서 다음 단계를 발견하지 못하면 신에 대한 생각 자체를 구만하거나 무신론, 이신론으로 끝나고 만다. 보그의 경우 유신론을 뛰어넘어 새로운 신관을 갖게 되면서 신앙의 돌파구 내지는 도약대를 발견한 셈이다. 우리 중에 보그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제 종래까지의 신관에서 의미를 찾기 힘든 경우, 신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방법, 실감있게 체험할 수 있는 길은 결국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 스스로 그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그와 하나됨을 경험하는 일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예수님이야말로 이런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시고 이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분이라고 믿는다. 그러기에 그의 가르침에 귀기울이고 그가 하신 일에 주목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게서 이제 예수님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로 한다.
참고사항: 이 편 서두에서 바빌론에 포로되어 갔던 유대인이 그들의 포로 경험을 통해 그 때까지 자기들의 신은 자기 만족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었던 부족신관이 얼마나 허황했던가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그래서 그들은 참담한 심정을 가누지 못하고 "보편신"이라는 새로운 신관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후 2천 몇 백 년이 지나 독일 나치 정권에 희생된 현대 유대인도 그와 비슷한 체험을 했다. 현대 유대인은 그들의 비참한 대량 학살(영어로 Holocaust, 히브리어로 Shoa) 경험을 통해 종래까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초자연적 유일신관이 여지없이 흔드리는 참담한 심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심정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이가 바로 198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루마니아 출생 유대계 미국인 엘리 위젤(Elie Wiesel, 1928- )이다. 그는 『Night』라는 그의 유명한 자전적 소설에서 그 참담함을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나는 수용소에서의 첫날 밤, 일곱 번씩 일곱 번 저주받고 일곱 번씩 일곱 번 봉인된 채 나의 삶을 기나긴 악몽으로 바꾸어 놓은 그 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인육이 타서 올라오는 그 연기를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그들의 몸이 그 무심한 창공 아래서 연기 다발로 변하는 것을 목격한 그 어린아이들의 작은 얼굴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나의 믿음을 영원히 소멸해버린 그 불길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나의 하나님을 살해하고 나의 영혼을 죽이고 나의 꿈을 티끌로 바꾸어버린 그 순간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내가 비록 저주를 받아 하나님 자신만큼 오래 살게 된다 하더라도 이런 일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결코"
상상을 초월하는 수용소의 역경 속에서도 아직 산에 대한 믿음을 지키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비열한 본성을 다스리고 우리 속에 있는 사탄을 죽일 수 있는가 알아보시려는 것이다.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우리를 이렇게 극심하게 벌주시는 것은 그가 우리를 더욱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다."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위젤에게 결정적인 순간이 온다. 어느 날 수용소에 있던 발전소가 폭발되었다. 게슈타포가 수사한 결과 세 명의 용의자가 검거되었다. 일벌백계 원칙에 따라 수용소 사람이 다 보는 앞에서 세 명이 교수형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슬픈 눈을 가진 천사" 처럼 아름다운 어린 소년이었다. 밧줄이 목에 감기고 발 밑에 놓였던 의자가 없어지자 어른들은 "자유 만세!"를 외친 후 금방 죽어 혀를 빼물었다. 그러나 그 소년은 체중이 너무 가벼웠기 때문에 금방 죽지를 못하고 대롱대롱 매달려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밧줄은 30분 이상 움직였고, 수용소에 있던 모든 이가 생사를 오가면서 죽어가는 그 아름다운 소년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벌어지는 이 처참한 광경을 보면서 누군가 외친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위젤은 자기 속에서 저절로 나오는 소리를 듣는다. "그가 어디 계시냐고" 그는 여기 계시다. 여기 이 교수대에 매달려 처형되고 있다."("Where is He? Here He is - He is hanging here on this gallows..."62)
물론 위젤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무신론자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통해 그가 천진난만하게 가지고 있던 전통적 유일신관이 영원히 무너져 버리게 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 신은 그에게서 죽어버렸던 것이다.
참고로, 현재 서구 사회에서 유대인 중에 불교인이나 불교 쪽으로 기울어진 사람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많은데, 유대인의 이런 특수한 경험 때문에 초자연적 신관을 강요하지 않는 불교를 선호하는 것이 아닐까 보는 견해가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에서
첫댓글 누가 신학을 삶과는 상관없는 공허한 탁상공론이라 하는가.
우리가 마주 대하는 신학의 용어 하나하나 속에는 본질적으로는 '엘릴 위젤'이 겪은 것과 같은
참담한 아픔과 절망을 딛고 그 속에서 솟아난 영혼의 절규와 같은 것들이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지옥의 나락에서 한 줄기 광명의 빛을 볼 수 있는 것
우리가 절망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은
고통속에 몸부림쳤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온 몸과 영혼으로 깨우치고 보여준 큰 깨달음 덕분이다.
우리들의 뜻있는 삶을 위해서
이곳에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는
새로운 깨달음으로서의 신학용어 내지 사건들을 소개할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