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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내 친구, 원숭이 똥꼬
- 은유시인 -
1.
“원숭이 똥꼬 빠알개~ 빨간 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는 건 빠나나, 빠나나는 길어~ 긴 것은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른 것은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은 것은 백두산,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당시에 우린, 콧물이나 찔찔 흘리고 다녔을 철부지였다. 그리고 우린,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 졸업할 때까지 6년간 내리 같은 학년 친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한 녀석만을 집단으로 따돌리고 괴롭혔다.
그 괴상망측한 생김새도 그렇지만 더욱이 그 구질구질한 차림새 때문에 녀석을 마치 썩은 짐승의 사체에 파고들어 게걸스런 식탐에 몰입해있는 구더기들만큼이나 혐오했고, 그에 대한 까닭모를 증오심만 키워갔다.
우린, 서로에게 뒤질세라 경쟁적으로 녀석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했는데 그 때문에 녀석의 온몸은 늘 퍼렇게 멍들어있거나 부르트고 찢긴 상처들로 그득했다.
녀석을 학대함으로써 얻어지는 쾌감은 그 어떤 놀이에서도 맛볼 수 없는, 즉 절대 권력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열락(悅樂), 그 자체였다.
그런 집단적 가학행위가 6년 동안 계속 지속되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누구도 나서서 말리려드는 사람도 없었겠지만, 녀석이 워낙 용케 잘 버텨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녀석을 괴롭히는 재미로 학교를 다녔다면, 녀석은 우리한테 괴롭힘을 당하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학교에 다니는 듯했다. 보통 애들의 경우 그 정도로 집단 괴롭힘을 당할 정도라면 대개가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서라도 결석을 밥 먹듯이 해댈 텐데, 의외로 녀석은 6년간 결석은커녕 단 한 번의 지각조차 한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더욱 묘한 것이 녀석은 또래의 어린애답지 않게 초인적 인내심을 지녔던지 우리가 괴롭히고 놀려댈수록 아프다거나 찡그리기는커녕 오히려 즐겁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오히려 독이 오를 수밖에 없는 우리는 녀석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거나 비명을 지르게 하려고 온갖 악랄하다는 방법은 죄다 동원하길 마다하지 않았다.
비록 철부지들이었지만 그때부터 이미 우리 가슴 한 켠에는 저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을 질시하고 괴롭히려드는 악마적 근성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이름은 배천석이고 나이는 오십 하나다. 남들은 지천명이면 일가를 이룬다지만 내 지나온 궤적이 내 뜻과는 달리 얼토당토않게 엇나갔기에 지금은 왠지 헛살아왔다는 자괴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산다.
아직 장가를 못 갔으니 처자식이 있을 리 없고, 그래 처자식이 없다는 건 지금의 내 처지로 보아 그나마 다행이랄 수 있겠다. 다른 건 모두 내 고집과 내 선택으로 주어진 운명이려니 참을 수 있겠지만, 괜한 여자들과의 스캔들로 말미암아 내가 치룬 대가가 지나치리만큼 혹독하여 결국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 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진지러지고 누워있다가도 벌떡 솟구칠 지경이다.
내 인생에 무턱대고 끼어든 그 몰상식한 년들로 말미암아 지금의 내 꼬락서니가 이게 뭔가. 제법 지녔던 돈도 모두 털려 무일푼이 되었고, 알량한 직장마저 잃었다. 그뿐인가, 그중 한 계집애의 삼촌인가 뭔가 하는 새파랗게 젊은 놈은 본디 직업이 사람 잡는 백정인진 몰라도 하여튼 날 개 패듯이 무지막지하게 패댄 때문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된 데다, 어처구니없게도 전과자란 낙인까지 찍혔다.
내게 있어 아주 사소한, 그것도 찰나의 실수로 불거진 일이었지만 그로인한 불운은 흡사 줄줄이 무너지는 도미노처럼 겹겹이 나를 덮쳤던 것이다.
오래전에 저질러졌던 일이고 이미 지난날의 일이라 치부하려해도 억울하고 울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기론 마찬가지이다.
‘다른 이들은 더 몹쓸 짓을 예사로 저지르고도 멀쩡하기만 한데, 하필 왜 나만 그런 혹독한 일들을 일방적으로 당해야만했을까’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봐도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한동안은 깃털같이 가벼운 원인제공에 비해 태산같이 엄청난 결과를 형벌로 받아들이기엔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아, 이건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처럼 여겨지기까지 했다.
‘생전의 부모님 말씀을 거역하고 그리도 불효막심했던…, 그 죄과야, 죄과….’
내게 한꺼번에 들이닥친 불행들을 달리 표현할 수 없어 동화속의 청개구리처럼 부모님 뜻을 부단히 꺾어드린 그 업보라 여기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체념과 분노가 교차하여 쌍곡선을 이루었다.
‘어쨌든 지난 일은 잊고 어떻게든 살아야한다’
헌데 아무리 머리를 감싸 쥐고 이런저런 궁리를 해본들 무슨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고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살길이 막막하게 여겨질 뿐이다. 오십 줄의 나이도 적잖은 나이지만 성치 않은 몸으로 뭘 어찌해볼 것인가.
비럭질이라면 모를까, 내 자신이 벌써 내 의지와는 달리 누가 보기에도 그저 별 볼일 없는, 그야말로 내가 가장 혐오해왔던 그런 인간형, 즉 ‘인간아, 왜 사니?’라는 빈정거림이나 당해도 쌀 그런 놈으로 전락한 것이다.
‘수중에 돈이라도 좀 있다면…, 이렇게 무료하게 시간 죽이지 않고 얼마든지 재미있는 것들을 쫓아다니며 즐길 수 있을 텐데….’
돈이 있을 땐 그다지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막상 돈이 없고 보면, 하고 싶고 먹고 싶고 갖고 싶은 것들이 그리 많아지는 법이다.
최근 들어 더욱 할일이 없어져 바깥출입을 일체 끊고 골방거사신세가 될 수밖에 없는 내가 마지못해 오래도록 구들장과 벗하며 공상과 궁리에 골몰하길 어언 이골이 날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세월의 걷잡을 수 없는 속도를 인식하고 그에 대한 초조감이 절정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 비례하여 돈에 대한 의존도도 더욱 높아진다.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날이 많아질수록 돈 때문에 이런 일 저런 일에 치이고 당하는 경우가 늘게 마련이며, 결국 수중에 쥔 돈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여기게 된다.
아, 그렇듯 돈에 아득바득하는 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인간세상이 얼마나 삭막하고 또 서글픈 것인가.
자연계 수천억 종의 생명체 중에 가장 진화했다는 인간을 일컬어 고등동물이라 한다면, 인간이 약육강식의 동물세계와 다른 것은 의지력과 분별력이란 이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는 이유로 약한 자의 것을 탐하려들지 않고, 오히려 없는 자를 위해 남아도는 것을 공평하게 나누어 쓸 줄 아는 지혜만큼은 당연히 지녀야할 것이다. 그렇다면 분수에 넘쳐 주체치 못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반대로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도 또한 없을 것이다.
만약에 인간들이 다른 짐승과 같아 욕심 없이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에만 만족할 수 있다면, 인간세상이야말로 지금과 같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아등바등하는 지옥이 아니라 천국과 다를 바 없지 않겠는가.
이러한 생각은 내가 뭐 심오한 철학자나 잘난척하는 사상가 흉내를 내고자함이 아니요, 뭘 어찌해보려 해도 해볼 수 없는 무기력함에서 나오는 세상을 향한 나름의 핏대 올리기와 다를 바 없다.
즉, 나 같은 사람은 라면으로 때우는 끼니조차 감지덕지해야하는 반면에 돈은 얼마든지 있어도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기 힘들다고 엄살떨며 ‘오늘은 뭘 먹는다지?’ 따위의 행복한 고민을 하는 부류들이 우리 사회에 함께 공존하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나온, 그렇다하여 새로울 게 없는 지극히 평범한 논리인 것이다.
세상을 달리 바꿀 수 있는 능력이라도 갖췄다면 모를까, 이런 유토피아적 세계를 궁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유치할뿐더러 전혀 가당찮은 과대망상에 속하리라.
돈도 없고 할 일마저 없으니 별별 생각들이 자꾸 떠오른다. 뭘 하고 싶어도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할 수 없다면 그것 또한 자유를 속박 당한 것과 다를 바 없으리라.
‘땅을 소유한 자들이 모두 단합하여 어느 날 갑자기 제 땅이라며 울타리를 쳐서 남들의 통행을 가로막는다면 우리나라처럼 땅이 비좁은 나라는 어찌될까?’
‘남북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남한의 재벌들이나 부자들은 있는 돈 모두 긁어가지고 남의 나라로 튈까?’
현실은 어떻든 간에 궁리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될 수 있다. 궁리는 어디까지나 궁리로서 끝나겠지만, 내게 있어 내 생각을 정리한 엄연한 이론의 정립이다.
상당한 자유를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속박당한 나로서는 자유를 속박하는 것들에 대해 골몰하지 않을 수 없다.
다수의 인간을 더욱 옴짝달싹 못하게 속박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만든 사회체제에서 기인한다. 사회체제는 종교주의체제나 왕권주의체제를 거쳐 사상이데올로기가 싹 튼 이래 대개 소수보다 다수의 번영을 구가한다는 명목으로 발달하고 진화해왔다. 그런데 가장 발달하고 진화한 체제, 즉 돈만 있으면 최고라는 무한경쟁주의체제인 자본주의경제체제가 걸핏하면 빨갱이로 몰릴까봐 전전긍긍했던 과거 독재시절의 사상이데올로기보다 절대다수의 못사는 서민들에겐 더 무서운 구속력과 살상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결국 많이 가진 자일수록 지배계급의 상층부에 오르고 못 가진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에 의해 행동의 속박은 물론 생사여탈권마저 볼모로 잡힌 채 노예나 다를 바 없는 하층민으로 전락하는 세상, 다시 말해 가진 돈의 액수만큼만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것이 요즘과 같은 금권만능시대의 현실이다.
세상이 그러하니 당연히 애 어른 할 것 없이 당장 믿는 구석이 있어야 비로소 세상 살맛을 느낄 수 있는 속물로 변했다. 그것이 돈이든 직업이든 든든한 백그라운드든 말이다. 그래야 마음이 느긋해져 누구를 대하든 떳떳해지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조차 갖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늙고 골병들어 쇠약한데다 모아 둔 돈도 없고 또 당장 벌이도 시원찮고 의지할 데도 마땅찮다면,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죽지 못해 억지로 살아가야하는 진짜 고약한 심정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뭘 어찌해보려 해도 어찌해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비로소 느끼게 된 것은 세상일이란 게 참으로 불공평하여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서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해 헐벗는 인간들이 있는가 하면 별다른 재능 없이도 수월하게 잘 먹고 잘사는 인간들이 너무 많더라는 것이다.
“세상, 참 불공평해!”
한동안은 절대 공정치 못한 세상에 대해 막연한 저주를 퍼붓거나 간악하기 그지없는 인류의 멸종을 기원함으로서 그나마 솟구치려는 울분을 삭혔다.
먹고사는데 전혀 걱정 없었던 때야 지지리 궁상들을 보면 ‘왜 저리 사나?’ 싶었는데, 내 자신이 당장의 끼니부터 걱정해야할 처지고 보니 ‘돈 되는 짓은 뭐든 해야겠다’는 오기마저 절로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돈 되는 짓거리들을 떠올려 실행에 옮기려 해도 마땅한 게 없었다. 현실은 어떻든 티브이에서 보면 ‘억’ 소리가 나게 잘만 해먹던데 그건 들켜서 티브이에 난 얘기일터, 들키지 않고 잘해먹은 많은 놈들의 수법은 도통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은행을 털어야겠다는 구상도 여러 번 해봤지만 어디까지나 상상만으로 즐길 일이지 그렇다고 그 삼중 사중 겹겹이 쳐진 방어막을 어찌 단신으로 뚫는다지. 커녕 남의 집을 월담하여 이 구석 저 구석 뒤져가며 도둑질하는 짓거리조차 뱃장이 좋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짓거리이니 전혀 가당찮다.
생면부지의 사람 목에 칼을 들이대고 하는 강도짓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 짓은 범법이기에 앞서 간이 떨려서 아무나 할 수 없는 짓이다. 만약에 그런 짓을 하고 잡혀도 아무 뒤탈이 없다면 돈이 필요할 때마다 힘 좀 쓸 줄 아는 인간들은 너도나도 얼마든지 뛰어들 수 있을 만큼 쉬운 짓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잡히면 그런 망신은 차치하고라도 감옥에 가야한다는데 떨려서 어찌 그런 짓을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머리를 아무리 굴려본들 그간 떠올린 수많은 나쁜 짓들 가운데 그 어느 한 가지라도 저지를만한 뱃장조차 지니지 못한 내 자신에게 ‘피식!’ 콧방귀만 나왔다.
그런데 분명히 크나큰 범죄행위로서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아야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법에 의해 철저히 보호받는 합법적 도둑질이나 강도짓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대개 권력기관의 비호를 받는 인간들이 흔히 공적기금을 제 돈처럼 꺼내 쓰고 공적자금을 아무 거리낌 없이 탕진하거나, 온갖 특혜나 이권개입으로 한몫 단단히 챙기는 범죄행각이 그것이다.
흔히 그런 자금이나 기금 등을 ‘눈먼 돈’이라 하여 오히려 그런 돈을 갖다 쓰지 못하는 인간들을 얼간이라 비웃기까지 하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고서는 저지를 수 없는 행위인 것이다. 아마 한탕주의가 그런 못된 짓을 예사로이 저지르는 사람들로부터 나온 것이리라.
사기꾼들로서는 그 짓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짓이 아니라며 우쭐댈는지 모르겠지만, 그처럼 믿음과 신뢰를 저버리는 사기행각이야말로 신용사회를 붕괴시키는 가장 악질적 범죄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사회에 사기꾼들이 얼마나 넘쳐났고 설쳐댔기에 사람이 사람을 믿으려하지 않고 심지어 처자식까지 믿으려하지 않겠는가.
이렇듯 허구한 날 두 평 남짓 골방에만 틀어박혀 하는 짓이라곤 헛된 망상이나 하거나 쉽게 돈 벌 수 있는 궁리나 하고, 유선방송채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영화나 다큐 등을 들여다보거나 아무 때고 졸음 오면 늘어지게 잠만 자고, 시장기를 느끼면 그때마다 라면 끓여 허겁지겁 먹는 게 내가 지난 2년 가까이 살아온 생활패턴이자 무료한 시간을 죽이는 일에 속했다.
“응, 왔어? 어여 온나.”
오후 서너 시쯤 되면 미술 배운답시고 하나 둘씩 찾아오는 애들 말고는 근래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엊그젠 뭘 그렸지?”
마지못해 물어보면 애들은 스케치북을 펼쳐 그리다만 그림을 가리킨다. 그러면 ‘마저 완성하라’고 지시한다. 혹 ‘이제부터는 뭘 그리면 되겠냐?’고 물어오면 대충 이것을 그려보라 저것을 그려보라 이르기만 하면 되니 미술을 배우겠다는 애들만 많다면 돈벌이치곤 제법 수월하기는 했다.
그래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굶주리지 않고 이렇게라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은 미술지도를 받으러오는 동네 코흘리개 꼬마녀석들 덕분이다. 그런데 이 짓도 계속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정식학원도 아니요 야매로 조그만 방구석에 이젤 몇 개와 간단한 화구가 시설의 전부이니 어느 학부모인들 이런 허름한 방구석 하나 달랑인 곳을 교습소랍시고 애를 보내려하겠는가.
그나마도 내가 어엿한 홍익미대 출신이요, 비록 전문대학이지만 대학교수 출신이었기에…, 실은 부교수까지 하다 쫓겨났지만 학부모들 대부분은 강사니 조교수니 부교수니 교수니 하는 직위까지는 잘 모르는 눈치였고 그저 대학 강단에 서왔었노라 하면 대번에 교수님인 줄 알아 모시더라…, 그런 경력과 비교적 싼 맛에 애들을 보내왔던 것이다.
사실 하루도 예외 없이 되풀이되는 이 짓이 지겨워 웬만하면 밖으로 싸돌아다니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특별히 오갈 데도 없다. 그렇다고 나잇살 처먹었음직한 인간이 할 짓 없이 이리저리 배회하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영락없이 쫄딱 망했거나 명퇴로 쫓겨나 더 이상 오갈 데 없는 구제불능의 무능력한 인간이라 광고하며 다니는 것 같아 문밖출입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아니, 여긴 어쩐 일이야?”
“죽었나, 살았나, 궁금해서 찾아왔지.”
“전화라도 하고선 찾아오지 그랬어.”
“전화하면 뭘 하니? 받지도 않더구먼.”
언젠가 별로 친하지도 아무 도움도 되지 않던 껑충한 친구 녀석 하나가 내 있는 구석진 곳을 어찌 알고 물어물어 찾아왔다며, 그것도 살림이라고 방구석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내 사는 꼴이 같잖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그런 녀석이 전혀 반가울리 없다.
“그러게 돈 있을 때 옆구리에 얼만가는 꽉 움켜쥐고 있었어야지.”
남의 일이라고 말은 쉽게 내뱉었다. 녀석은 무턱대고 근처 포장마차로 끌고 가 돼지족발과 소주 한잔 사서 안기더니 그렇게 어렵사리 찾아왔다는 이유를 밝히기는커녕 뻔한 헛소리만 지껄여대며 속만 잔뜩 긁어놓고 갔다.
‘원래 쪼매 가진 놈이 그나마 쥐뿔도 없는 놈을 대하면 기고만장해진다.’라는 말이 하나도 그른 게 없다.
녀석이 다녀간 뒤로 한동안 마음이 심란했다. 지지리 궁상을 목격하고 갔으니 가뜩이나 말 많은 녀석은 필요이상으로 떠버리고 다닐 것이다.
근래 들어 더욱 심화된 불경기 탓도 있지만 이곳 산동네가 워낙 없이 사는 동네라 눈치만은 그 어디보다 빠삭하다. 처음에는 내가 홍익미대를 나왔네 대학교수였었네 하는 것들이 제법 먹혀들어 ‘우리 아, 잘 부탁합니다.’라며 황송스레 머리를 조아리던 학부모들도 내 사는 꼬락서니에다 애들 지도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에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엄마가요, 이제부턴 미술공부 그만하고요, 대신 영어공부하라 캤어요.”
“응,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뭐”
“우리집 딴 데로 이사 가요. 그래서 낼부텀 못 나올 거예요.”
“……!”
비록 애들을 통해 듣기 좋은 말로 내게 전한다지만 실제론 그런 학부모들이 애들을 하나 둘 빼내어 정식미술학원에 보낼 것은 뻔하다. 결국 내게서 배우겠다는 애들의 숫자가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고, 수입도 그만큼 비례하여 줄어들었다. 이젠 생계에 대한 막막함이 절정에 이르렀는지 무거운 추로 짓눌린 듯 가슴이 갑갑하고 별별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애들을 악착스레 붙잡으려하거나 당장 미술교습을 때려치우지 못하는 것은 학원 강사만도 못한 대접을 받아가며 맘에 내키지 않는 아르바이트를 계속할 마음도 없지만, 달리 취직이 된다거나 돈 벌이가 될 만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미적미적 마지못해 오는 애들 상대로 푼돈이나마 벌어야 호구지책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원래부터 숫자개념이나 계산능력이 웬만한 사람들보다 턱없이 뒤져있다. 그렇지만 남들과의 이해득실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도 잘만 살아왔던 것이다. 돈 역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란 식으로 살아왔던 것인데 그것도 수중에 돈이 어느 정도 있을 때의 일이다.
그렇듯 돈 계산이라면 으레 골머리를 앓던 내가 딴엔 진지하게 계산해본 바로는 돈을 아무리 절약해서 쓰려 해도 한 달을 버티려면 최소한 70만원은 있어야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큰돈이라 할 수 없지만 지금의 내 처지론 결코 적은 금액도 아니다.
한번 따져보자. 제일먼저 1순위로 지불해야할 것이 방값이다. 집주인이란 할망구가 어찌나 변덕스럽고 지독한 성깔을 지녔던지 월 10만원씩인 방값을 하루라도 늦게 내면 그런 난리가 없다. 평소엔 ‘교수님, 교수님’ 하며 간 쓸개마저 다 빼줄듯이 곰살궂게 대하다가도 방값이 늦어지는 순간부터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태도가 돌변하길, ‘당장 방 빼!’라며 종일 입에 담지 못할 악다구니를 퍼붓는 것이다. 그러니 더러워서라도 방값은 제때 맞춰줘야 하는 것이다.
참, 할망구는 2년 계약기간 만료되는 3개월 후엔 보증금을 백만 원 더 얹어주던가, 아님 월세를 5만원이나 더 올려줘야 할 거란 다짐을 벌써부터 하고 난리다.
전기료와 수도료, 가스료는 2순위다. 그중 하나라도 끊기면 생활자체가 엉망이 되니 제때 내야한다. 아껴 써도 10만원 돈이다. 그리고 전화료니 유선방송수신료니 신문구독료니 해서 대략 5만원 돈이 들고, 아무리 라면값이 싸다하여 또 즐긴다하여 라면만 줄곧 먹어대는 것도 역시 작게 잡아 15만원 돈이다. 뿐만 아니라 애당초 끊을 마음이 없어 계속 피워대는 담배값도 하루 세 갑씩 해서 15만원 돈이요, 아무리 아껴 먹는다지만 하루 소주 한 병과 안주 몇 쪽 삼키다보면 그것 역시 15만 원 돈이다.
그러니 70만원이란 금액은 옷값이며 이발료며 목욕료며 등등의 언필칭 고급문화 향유비용까지는 포함되지 않더라도 매달 그 정도의 수입이 보장되어야 남한테 구걸하지 않고 최소한의 호구지책을 유지할 수 있는 금액이라 할 것이다.
2001년 11월 17일 학장교도소를 갓 출소하여 바깥세상의 문턱을 막 디뎠을 때, 유난스레 혹독한 겨울한파가 때 이르게 몰아쳤다. 먼저 눈길을 끈 거리의 가로수들은 무성했을 잎사귀들을 모두 떨쳐내고 앙상한 가지를 세찬 바람에 담금질하고 있었고, 오가는 사람들 또한 두터운 옷깃을 바짝 여미고 바삐 제 갈 길만 재촉하고 있었다.
마치 세상 것들 모두가 의도적으로 내게 등을 돌리고 있는 듯 느껴졌고, 그로인해 남의 집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 쓰디쓴 배신감을 꾸역꾸역 게워내듯 헛구역질만 토해냈다.
그런 한랭한 기운 못잖게 당장 갈 데조차 마땅찮던 내가 느낀 것은 썰렁하게 움츠러드는 삶의 욕구였다. 어쩌면 교도소 안이 바깥세상보다 나에 대한 일련의 온정이라도 남아있어 더 아늑하게 여겨졌고, 따라서 다시 교도소로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도 부지중 솟구쳤다. 그토록 들어가기 싫었던 교도소인데도 말이다.
그때 문득 교도소 안에서 네 번인가 대면한 적이 있던 오중스님의 설법이 떠올랐다.
“세상일은 반드시 인과응보에 의해 굴러가고 유지되는 게야.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에 있겠나. 그런데 중생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허물들을 모두 다 남의 탓으로만 돌리려는 게야. 우선 마음을 비워야 돼. 욕망도 증오도 그 어떠한 세속적 감정도 비워내야 하는 게야. 바닷가에 숱하게 널려있는 몽돌을 봐. 오랜 세월 파도에 깎이고 저거들끼리 부딪혀가면서 닳고 닳아 둥글고 뺀질뺀질해졌잖아. 자연에 순응하고 저거들끼리 어울려 다툼 없이 살고 얼마나 이뻐. 그런 몽돌이 되어야지.”
지극히 지당하고 평범한 훈계다. 닳고 닳은 몽돌이나 당할 만큼 당해온 나나 어쩜 비슷한 처지이니 세상에 나가본들 무서울 게 뭐가 있겠는가, 라는 생각에 출옥을 손꼽아 기다려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처음 방 한 칸 얻을 돈도 없어 무조건 싼 데만 찾아 부산 영도구 동삼동의 외진 산동네로 쫓겨 들어오다시피 들어올 때만해도 어찌 알음으로 미술 배우겠노라 찾던 애들이 많을 땐 스무 명도 넘었다. 그런데 차츰 떨어져나가고 일주일에 2일 하루 두 시간씩 가르쳐서 월 10만원 받던 것을 8만원으로 깎아줘도 이젠 미술 배우겠다는 애들이 고작 대여섯을 넘지 않는다. 그러니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아야할지 여간 걱정스러운 게 아니다.
나이나 적고 힘이라도 쓸 수 있다면 그까짓 노가다인들 마다하겠나만, 나이 오십이 넘은 놈을 그것도 디스크로 허리까지 꾸부정한 놈을 써주겠다는 놈이 하나도 없으니 아직까지 왕성한 동물적 욕구와 소화력을 지닌 나로서는 앞으로 살아 갈 일이 까마득히 여겨졌다.
그런데 8월20일 낮 12시20분쯤이던가, 평소습관대로 라면 한 개를 끓여 쟁반에 받쳐놓고 먹으면서 무심코 돌린 뉴스전문채널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이 언뜻 보이는 것이다. 이건 또 뭔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봤더니, 아, 그 옛날… 봉달이란 놈이 아닌가. 맞아, 원숭이! 바로 그 원숭이 똥꼬였다.
“똥꼬가 어쩐 일로 텔레비전뉴스에 다 나오고?”
순간 채널은 다른 뉴스로 바뀌면서 화면 가득히 대규모아파트 신축공사현장이 채워지며 여성아나운서 멘트가 흘러나왔다.
“이번 정부가 아파트분양가 공개원칙을 철회함으로서 정부는 일방적으로 건설업자 편을 든다는 시민단체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문득 똥꼬 녀석을 한번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그래도 제법 먹고 살만 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녀석 같으면 좀 도와 달라하여도 그리 큰 흉은 되지 않을 것이다.
‘고향에서 고물상을 한다고 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녀석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였으니, 햇수로도 족히 십삼 년이 지난 듯했다.
***
아버지는 내가 자신이 원하던 동국대학교 한의과대학에 지원하지 않고 내 멋대로 홍익대학 서양화과를 지원한 것에 대해 크게 진노했으며, 그 이후 아예 부자지간의 정을 끊고 살자하셨다.
난 어머니를 통해 조금씩 보내오는 돈과 미술대학지망생들을 가르치며 받는 아르바이트수입으로 겨우겨우 홍익미대를 어렵게 졸업할 수 있었다.
남들은 비록 함양이란 시골구석이지만 한의원을 하는 부잣집 외아들인 내가 뭐가 아쉬울 게 있어 아르바이트까지 해가며 궁상을 떨었을까 의아해 하겠지만, 아버지의 뜻이 워낙 완고하고 나 역시 내 뜻을 절대 굽히려들지 않았기에 부자지간의 알력은 남의 시선으로 느끼기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때문에 중간에 끼인 어머니의 마음고생 또한 여간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계속 서울에 눌러앉아 그림그리기에 열중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앓아오던 신부전증의 악화로 자리에 눕게 되어 결국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까지 2대째 50년 넘게 운영해오던 한의원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는 소식을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었다.
“너거 아부지가 많이 아픈가 보드라. 요즘 부쩍 수척해지셨어. 하긴 혈압도 많이 높아지고, 거 머시기냐 혈액투석도 이틀 걸러 한번씩 받아야 되니 오죽 하것냐. 그러니 니도 한번은 집에 다녀가야 안 되것냐. 아부지가 아무리 모질게 대했기로 니까지 아부지한테 맞서서 그리 냉담해서야 쓰것냐.”
“아부지한테 얼굴 디민다 캐서 뭐 별반 달라질게 있어야지. 오히려 아부지 화만 돋구는 셈이여. 그러니 엄만 날 억지로 아부지 앞에 끓어앉히려 하덜 마러.”
나는 대학졸업 후에도 계속 아틀리에에 처박혀 오로지 돈도 안 되는 그림만 죽어라 그려댔다. 한동안 머리며 양손이며 이고 들 수 있는 양껏 밑반찬과 옷가지를 부지런히 장만하여 나르던 어머니도 어디고 취직해서 일할 생각은 않고 돼지우리보다 못한 지저분한 골방에 틀어박혀 밤낮이 뒤바뀐 채 전혀 쓸 데 없는 그림 나부랭이를 붙들고 씨름하는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내게 적잖이 실망감을 드러내었다.
“보래이, 니 말이다. 백날 그림만 잔뜩 그리고 있음 그게 밥벌이가 되겠나 그렇다고 살림밑천이 되겠나 말이다. 그러지 말고 지금부텀이라도 한의사 공부하는 게 어떻겠노?”
“엄마, 한의사 되는 게 말처럼 쉬운 줄 알어? 그리고 난 한의사 죽어도 되기 싫어. 그러니 그딴 소리 할려거든 푸딱 내려가서 다신 나타나지 마소.”
“참 모질구마. 니 성질머리하곤… 부자가 어찌 그리 똑 닮았냐?”
나는 국전(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입상하여 화가로서 인정을 받기 전까지는 이 아틀리에에서 한 발짝도 뗄 수 없다며 국전에만 입상하면 그땐 얼마든지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아무리 설득해도 어머니의 눈엔 영 철딱서니 없는 짓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아이고! 이게 뭐여? 이 냄시…, 문이라도 활짝 열어놓지 몬하고…. 이게 사람 사는 집구석이냐? 돼지우리도 이보다는 낫것다.”
문을 열고 내 아틀리에를 들어설 때마다 어머니는 매번 똑같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말이 좋아 아틀리에지 실은 서너 평 남짓한 반 지하골방이 아니던가. 어둡고 습한 골방은 장마철뿐만 아니라 한겨울에도 천정 곳곳에서 똥물처럼 걸쭉한 탁액이 계속 새어나왔다. 따라서 장판 밑은 물론 천정 일부와 한쪽 벽면은 곰팡이가 겹겹이 눌러 붙어있어 곰팡이 냄새만으로도 코를 움켜쥘 지경이었다.
게다가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의 부패한 냄새와 구석마다 쌓여있는 묵은 옷가지에서도 특유의 노린내가 물씬 풍겨 그 모든 냄새가 뒤섞여 마치 송장 썩는 냄새와 다를 바 없었다. 그뿐인가, 방안풍경은 쓰레기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생전 치우지 않아 오히려 쓰레기 아닌 것을 찾기가 더 힘들 것처럼 보였다.
“하이고, 께불러 빠져 갖곤…. 아예 큼지막한 다라이 하나 놔둘 테니 쪼매 귀찮더라도 쓰레기덜을 다라이에 모아두던가.”
“다 쓰레기처럼 보이지만 쓰레기 아닌 것두 많수. 그라고 아무렇게나 놔둔 거 같아도 다 내 필요에 의해 제자리에 놔둔 거여.”
제멋대로 굴러다니는 화구와 물감, 팔레트들…. 빈 소주병들과 라면봉지, 몇 개씩이나 되는 재떨이는 물론 빈 그릇마다 수북하게 쌓인 담배꽁초들…. 그러니 어머니의 ‘돼지우리보다 못하다.’란 표현은 당연하다할 것이다.
처음엔 어머니의 극성스런 성화에 못 이겨 두 번인가 새로 도배하면서 대청소란 것도 해봤지만 두어 달만 지나면 매 한가지였다.
그렇게 그림그리기에만 몰두해오길 내가 서른 둘 되던 1985년 2월 초 구정을 불과 일주일 남겨둔 어느 날인가, 오랜 신장투석과 장기간의 투병으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아버지는 안방 한쪽 벽면에 붉은 색 매직으로 내게 유서란 것을 남기고는 기어이 허망하게 돌아가셨다.
遺 書
내 唯一한 血肉 裵千奭 보아라
내 뜻을 네가 따르지 않았다하여
내 너를 子息으로 여기지 않았다만
父母의 本心이 어디 子息을 싸워 이길 수 있다더냐
그러나 내 아비로서 마지막으로 네게 請하건대
부디 홀로 있을 네 母親에겐
不孝를 걷어라
아버지의 벽면유서는 내게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검붉은 매직으로 정서하듯 또박또박 써내려간 유서 한 자 한 자마다 아버지의 원망이 잔뜩 서려있는 섬뜩한 칼날이 되어 가슴을 후벼 팠다.
십년 넘도록 아버지와 담을 쌓고 살아온 것에 대한 죄책감은 물론, 그동안 대체 뭘 하고 지냈던가 생각할수록 내 자신이 한심스럽고 후회가 막심했다.
- 제2회에서 계속 이어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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