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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파 서민호
박병섭
1. 새로이 부각된 월파의 활동
“이 사건[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사건이게 만들어준 당시의 고(故) 신익희 국회의장, 고 서민호 의원 등의 협조와 역대 당해 국회의원들, 특히 고 김동영 의원의 협조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두 분의 현역 국회의원의 독립운동과도 같은 활동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2004년 3월 「거창, 산청 사건 등에 관한 보상법」이 통과되었을 때 경상대 강희근 교수가 경남의 한 지역신문에 쓴 글이다. 최근 세칭 ‘과거사 통합법’이 제정되어 여순사건도 진실 규명 단계에 들어가 있는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규명의 선구자로 월파의 업적이 새삼 확인된 것이다.
월파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 이후의 독재 정권기를 거치면서 비타협적으로 살아온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민족과 외세가 충돌할 때는 민족의 편에 섰으며, 좌와 우가 대립할 때는 우편에 섰다. 정치 권력이 민을 저버릴 때는 민의 편에 서서 독재와 저항했다.
2001년에 들어서 그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룬 것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되어 당초 일산 신세계공원묘지에 안장되었던 그의 유해가 2004년 10월 13일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93으로 이장되었다. 그의 묘비명은 아직도 그의 삶이 온전히 규명되지 못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묘비는 이렇게 시작한다. “
일제의 한글 말살 정책에 항거하여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 고문과 악형에 끝까지 굴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과 자유 민주주의 수호자로서 선봉에서 조국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치셨으니, 이제 조국의 품에 편히 잠드소서.
”
그의 삶에서 중요한 해방 이후의 행적은 언급조차 없으니 안타까울 일이다. 그의 삶의 자취를 그가 남긴 글과 옛 신문기사, 지역 주민의 증언을 통해 복원해 본다. .
2. 벌교포 초기 유지였던 월파의 선친, 서화일
월파의 선친은 서화일(徐和日 1860-1933)로서 벌교가 전성기를 누리던 1930년대 벌교의 대표적인 유지였다. 채동선의 선친인 채중현(蔡重鉉 1876-1947), 소설 태백산백 속의 현부자의 모델인 박사윤(朴士胤 1878-1958)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다. 서화일은 본디 고흥 점암 출신으로 고흥 동강 노동산 아래로 이주했다. 벌교에서 상업이 발달하자 벌교에서 모시베 장사, 간척 사업 등으로 돈을 모아 대지주로 성장하였는데 그의 땅은 고흥과 보성은 물론 순천에도 있었다. 1930년말 그가 가진 땅은 282정보로 최재학 다음이었다. 사업 수완도 좋아서 남선무역과 벌교수산, 벌교번영토지(주)를 운영하였다. 지역의 행사에 많은 기부를 하였으며, 그는 임종을 맞아 고흥과 벌교의 사회 단체와 학교에 많은 금품을 희사하여 조선 사회에 감동을 주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흰옷 입은 조문객이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와 유둔리 일대를 가득 메워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묘소에는 정만조가 짓고, 오세창이 쓴 묘비가, 제각 앞에는 정만조가 짓고 윤용구가 쓴 기효비가 있다. ‘현부자집’ 정원 같은 진귀한 수목이 가득한 정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메꿔져서 그 자취를 찾기 어렵다.
3. 출생과 일제 강점기의 항일 운동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에서 월파가 태어난 것은 1903년이었다. 그의 부친 서화일은 3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이순례 여사 사이에 둘째(전체 형제간으로 하면 3째)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의 꿈에 지붕 위에 둥근 달이 떨어지는 것을 치마폭에 받았다는 태몽에 따라 그의 호를 월파(月坡)라고 했다 한다.
넉넉한 집안이었기에 그의 어린 시절의 삶은 풍요로웠다. 6세 때 말타기를 했고, 8세 때는 벌교남교의 전신인 사립 유신학교에 다니다가 11세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이곳에서 ‘금화심상소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한 후 일본중학에 다니다가 14세 되던 해 어머니가 병환으로 돌아와야 했다. 국내 진학으로 방향을 바꿔 중앙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보성고보에 편입하여 졸업을 하게 되었다.
의협심이 강했던 월파는 이 시기에 일본인 학생과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으며, <반도목탁지> 사건으로 1년간 정학을 당했으며, 3․1 운동을 위한 지하조직인 전국학생대회의 운동본부장으로 활약하다 1919년 4월에 하숙집에서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또한 순천 출신으로 무만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던 정태인 목사의 딸인 이화여고보 2학년 정희련과 결혼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은 그를 다시 외국 유학에 오르게 했다. 1922년 보성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 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벨리아 대학 부속고등학교에서 어학을 익힌 다음, 오하이오 주에 있는 웨슬리언 대학 정치역사학과 3학년에 편입하여 졸업을 하고, 뉴욕에 있는 콜롬비아 대학 대학원에 진학하여 정치사회학을 전공하였다. 우리 민족에 대한 구국 방안을 고민하던 월파는 여기에서 덴마크의 농민고등학교와 협동조합 운동을 연구하였는데, 이는 뒷날 ‘송명학교’ 인수 계기가 되었다.
미국에서 월파는 빗자루 만드는 공장, 중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일을 하여 학비를 벌기도 하였다. 그의 의협심은 미국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났는데 중국인 주방장이 0000 사람들을 인종차별하자 격분하여 싸움을 하여 영업 방해죄로 구류 처분을 받은 적도 있었다. 월파를 더욱 분노케 한 것은 동포 사회의 대립과 분열이었다. 안창호의 국민회와 이승만의 동지회가 독립 운동 방략 차이로 주도권 쟁탈을 벌이는 것에 대해 실망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장덕수, 김도연, 김양수, 윤치영 ,이승만과 교유를 맺었다.
고국에 돌아온 서민호를 맞은 것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있던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였다. ‘고급 지식인’ 서민호에겐 어느 자리도 주어지지 않아 한 동안 실의에 빠졌다. 그러다가 1932년 부친의 별세로 남선무역주식회사와 4천2백석에 해당되는 대토지를 유산으로 상속받게 되었다. 그는 벌교의 새로운 실력자로서 떠올라 벌교에 있는 지식인 그룹의 일인들과도 절친한 관계를 만들었다. 그의 집은 인양회가 펴낸 추억의 문집에도 표시될 정도였는데 여기에는 그가 운영하던 남선무역주식회사의 건물도 함께 있었다. 이 시기에 월파는 송광사에서 운영하던 사립 송명학교가 운영난에 빠지자 이를 인수하여 덴마크식 농민학교로 키워보려고 했다. 월파는
4. 해방 공간애선 우파의 모습을 보이다.
드디어 기다리던 해방이 왔다. 8월 17일 월파는 벌교에서 읍민들과 축하 행렬을 펼쳤다. 한편으론 해방 정국에서 전국적으로 확산되던 건국준비위원회의 벌교지부를 만들었다. 징병에서 돌아온 장병들을 중심으로 특보대를 조직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도망가는 일본인들을 조사하여 맥아더 포고령에 따라 1천원 이상의 반출을 막았다. 8월 19일 광주에서 위수사령관 고바다케 소장, 다카하시 대좌, 법원장, 검찰장, 경무부장, 내부부장 등이 50여명의 군인과 함께 벌교지서에 내려와 일본인에 대해 편의 제공을 요구하였으나 월파는 포고령을 들어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던 여운형이 중도 좌파적 민족주의자로 분류되고 있다. 그렇지만 벌교건준을 맡은 월파는 해방 공간에서 극우파의 면모를 보였다. 극도의 탄압에 불만을 가진 좌익계에게 붙잡혀 광주에서 감옥살이를 하던 중 9월에 미군이 진주하자 풀려나기도 했다. 뛰어난 영어 구사와 좌익 척결 능력은 미군정의 신임을 얻기에 충분했다. 1946년 10월 광주시장에 임명되었다가 능력을 인정받아 1년만에 도지사로 취임해서도 좌익 계열에 대한 배척을 늦추지 않았다. 광주지역의 유지였던 최영옥, 이은상 등이 안재홍 민정장관에게 월파가 지나치게 독선적이고 우편향이어서 도민의 반발이 크다고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미군정 당국은 월파를 강원도지사로 전출시켰으나 월파는 이를 거절하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월파는 시장과 도지사를 맡으면서 특유의 추진력을 발휘하였다. 광주시장으로 있을 때는 제1수원지 확장, 학강국교 신축, 시청사 신축 등을 급속히 추진하여 ‘폭군 시장’의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당시 민립 대학 방식으로 ‘조선대학설립동지회’가 활동하자 회원과 회비를 모집하고, 박철웅을 운수과장으로 발령하여 행정 기관이 보유하고 있던 운송 장비를 지원하여 건설 장비, 현물 회비 등의 수송을 도왔다.
5. 이승만의 최대 정적이 되어
본디 월파는 이승만과 미국에서부터 친분 관계가 있었지만, 의협심이 강했던 월파로서는 권위의식이 강한 이승만과는 상극일 수밖에 없었다. 제헌의회에는 진출하지 못했던 월파는 1950년 5월에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때 고흥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내무분과위원장으로 있던 중 맞은 6.25 전쟁은 월파를 이승만의 정적으로 만들었다.
1950년 6월 27일 새벽 서울 사수를 결의한 국회도 모르게 대통령은 혼자서 피신하여 국회의 반발을 샀다. 6.25 전쟁 중의 최대 실정은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학살 사건이었는데 이것을 철저히 규명하려고 했던 이가 월파였다. 전쟁 중 병력 충원을 위해서 17세에서 40세에 이르는 장정을 국민 방위군에 편입하였는데 ,이들에게 배정된 막대한 국고와 물자를 유용하여 1천여명이 넘는 이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 국민방위군 사건이었다.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다가 영양 부족으로 추위에 못이겨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방위군 부상자 2명으로부터 제보를 받은 월파는 참혹한 진상을 파헤쳐 김윤근을 비롯한 4명을 처단하게 만들었다. 공비를 소통한다고 거창군 신원면 주민 570명을 뒷골짜기로 끌고 가서 집단 총살하고 불태우고, 그 옆에 있는 산을 폭파시켜 시체를 묻어버린 사건이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었다. 한때 교편을 잡은 바 있던 당시 소령으로부터 이 정보를 제공받은 월파는 제보자가 귀로 중 군용 트럭에 충돌하여 죽게 되자 이 사건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월파는 국회에서 사실을 폭로하고, 조사단을 구성할 것을 제의하여 많은 논의 끝에 성사시켰다. 당시 군부는 조사단의 차량에 총격을 가하고, 증언자들의 증언을 왜곡하는 등으로 방해를 했다. 우여곡절 끝에 관련자에게 유죄가 선고되었으나 이승만은 1년만에 모두를 석방하여 많은 의혹을 남겼다.
이승만은 1952년 임기가 끝나가자 재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국회에서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자신을 지지해 줄 정당으로 자유당을 만들고, 땃벌때․백골단․민중자결단 등이 국회를 위협했다. 월파에게도 위협과 회유가 잇따랐지만 여기에 넘어갈 월파가 아니었다. 이승만은 국회를 압박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민의를 동원하기 위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미뤄왔던 지방선거를 실시하고자 했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억압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치루는 지방선거에 적극 대응하고자 월파는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지방 순회에 나섰다.
운명의 날, 1952년 4월 24일. 부산에서 여수를 거쳐 월파는 순천 영동의 평화관 별관(*지금은 헐려 주차장이 되어 있다)에서 순천의 유지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환담이 오가면서 9시가 되었을 무렵, 부산에서 미행해 왔던 서창선이 방을 엿보며 , 월파를 찾았고, 월파가 나섰을 때는 그의 총구가 월파를 겨누고 있었다. 월파는 생명의 위협 앞에 갖고 있던 권총으로 응사하였고, 서창선은 죽고 말았다. 사건 현장에 있던 이를 통해 수사 당국에 신고를 하고, 이튿날 광주지검 순천에 자진 출두하였다. 사건을 접한 국회가 정당 방위로 규정하고 석방 결의안을 의결했지만 굴러 들어온 기회를 놓칠 이승만이 아니었다.
1952년 4월 25일에서 1960년 4월 29일까지 만 8년 5일 동안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구속→국회 의결에 따른 석방(51.5.19)→계엄령 선포로 재수감(51.5.21)→고등군법회의의 사형 선고,국회의원 130명 재심리 청원서 제출(7.1)→군법회의, 8년 징역 선고(8.1)→군법회의 7차 사형 선고(53.5.6)→검찰, 배임과 업무 횡령 추가(7.26)→부산지법, 살인․업무 횡령은 무죄, 배임은 징역10월, 집행유예 2년 선고. 검사 항소(10.20)→대구고법, 배임 10월,집행유예 2년, 살인은 면소,업무횡령 무죄 선고. 대법에 상고(54.4.22)→ 대법원,원심 파기 판결(55.1.16)→대구고법, 배임 징역 10월,살인 면소, 업무횡령 선고. 대법에 항고(5.24) →대법원, 상고 기각 최종 판결. 영남 고등군법회의의 징역 8년 확정(9.16)→출소(60.4.29)
이승만 정부의 정치적 보복이었다. 미결 구류 생활만 4년 3개월 21일이 되었다. 부산 형무소 1년 7개월(마산 헌병대 잠시 이감), 대구 형무소 3년, 대전 형무소 3년 6개월. 부인은 이감될 때마다 숙소를 옮겨가며 한 달에 한번 있는 면회를 하였다. 이승만에 대한 사무치는 적개심은 손녀와 손자의 이름을 이승만을 다스려라는 뜻에서 치리(治李), 치승(治承), 치만(治晩)으로 하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월파는 체념 속에서도 교정 행정의 현 주소를 생생히 체험할 수 있었다. 형무소 시설의 문제점, 간수들의 횡포와 부패, 교화 시책의 모순과 불합리를 본 월파는 출옥 후 국회 법사위원이 되어서 교도 행정의 개선을 위해서 노력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전 형무소에서 4․19를 맞아 출감할 때까지 『나의 옥중기』를 쓰면서 이 정권의 몰락을 기다렸다.
6. 4월혁명의 감격을 맛보다
월파를 감옥에 넣은 이승만은 비상계엄까지 선포하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정치파동(52.5.26)을 일으킨 후 ‘발췌 개헌안’을 경찰의 삼엄한 포위 속에 기립 투표로 통과 시켜 2차 집권을 하였다. 이어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여 3차 집권을 하였다. 민의를 거스르고 4차 집권을 기도하던 이승만은 결국 3.15 부정 선거로 촉발된 4월 혁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옥중의 월파는 부정 선거와 김주열의 죽음을 보면서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예언하고 있었다.
1960년 4월 27일 국회의 석방 결의가 있은 후 29일 대전형무소에서 풀려났다. 30일 오후 2시 40분 200여명의 환영 인파가 서울역에 운집하여 월파를 환영하였다. “그렇게도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도 많은 피를 흘렸으니 .....”라며 눈물을 흘렸다. 며칠 뒤에는 감옥에서 노역으로 번 돈 6964환을 4․19 위문금으로 언론사에 맡겼다. 5월 19일 열린 ‘4.19 순국학도위령제’에선 ‘암흑에 빠진 이 나라를 구출한 전국 학생들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애도사를 발표하였다. 순천, 고흥, 광주, 전주 등 전국적으로 복권 청원서가 답지하는 가운데 6월 25일 월파 등 6명의 정치범에 대한 사면이 이뤄져 7월에 실시된 제5대 민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큰 표로 당선되었다. 8일 열린 민의원 회의에서 국회의장에 곽상훈 부의장에 이영준, 서민호가 선출되었다. 월파는 감옥을 나오면서부터 ‘한국판 몽테크리스트 백작’이 된 ‘4월 혁명의 양지’가 되었다.
민의원 부의장으로서 4월 혁명의 정신을 구현코자 했다. 우선 자유당 치하에서 국가에 과오를 남긴 사람들을 신상필벌의 원칙에 따라 공민권을 제한하는 법률을 윤형남 주도윤 의원과 함께 제안하여 통과를 시켰다. 1961년 3월말에는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단을 이끌고 미국을 방문하여 세계 각국의 대표들을 대하면서 우리 외교의 방향과 민족 통일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월파는 각 정파간의 알력과 분규, 일부 몰지각한 정객의 소행, 학생들의 조급한 정치․사회 참여 방식에 절망해야 했다. 월파의 역량이 채 발휘되기도 전에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 그의 꿈은 꺾여야 했다.
7. 군소 혁신계 정당의 지도자로 통일 운동의 선구자가 되다
군부 쿠데타 이후 월파의 정치적 행로는 고난의 연장이었다. ‘정치활동 정화법’으로 이듬해까지 묶여 있으면서 5.16에 대한 지지를 결코 할 수는 없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군사혁명의 방식을 동조‘할 수는 없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랬다. 박정권 하에서 월파는 다수당에 들어가지 않고 , 혁신계 정당의 지도자로 자신의 정체를 삼았다. 통일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으로 반공법에 얽혀 또 다시 수난을 겪어야 했다.
월파가 사회주의를 접한 것은 일본 유학 때였다. 대학 야구선수였던 그는 정경과 교수이며 야구부장이었던 아베 이소[安部磯雄]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다. 아베 교수는 교수직을 그만 두고 민주사회주의 정당인 사회대중당의 초대위원장이었다. 초반에는 질서의 회복을 위해 보수 진영에 가담했으나, 국가의 틀이 갖춰진 상황에서 자신의 본뜻은 민주사회주의를 지향한 것이었다.
지나친 분파주의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때도 동포 사회의 단합을 위해 애를 썼던 그였다. 2대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도, 5대 국회의원이었을 때도 무소속이었다. 그러다가 2공화국(장면 내각) 마지막에야 민주당 구파에서 갈라진 신민당에 입당하였다. 1963년에는 자유민주당에 김도연과 함께 영입되어 최고위원에 취임하고 같은 해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이 아닌 서울 용산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지역구에서 6명, 전국구에서 3명 등 9명으로는 원내교섭단체의 구성이 불가능하여 군소정당의 합당을 추진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1964년 11월 26일 제1야당인 민정당(民正黨)에 흡수 ·통합되었다.
1965년 5월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하며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월파는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기 위하여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여 오던 중 정화암을 중심으로 한 혁신계 인사들과 민주사회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민주사회당 준비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1년이 못되어 정화암 세력이 이탈할 움직임을 보이자 독자적으로 1966년 5월 9일 민주사회당(가칭) 창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6월 3일의 통일 문제와 월남파병 비판 발언 때문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7월 11일에 구속되어 88일마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전면 통일에 앞서 부분 통일을 위해 서신 교류․기자 교류․체육인 교류․ 친척 방문 등을 해야 한다는 것, 김일성과 직접 담판을 할 수 있다는 것, 월남 파병은 미국의 대리 전쟁이라고 한 것을 문제삼은 것이다. 1966년 12월 22일 民主社會黨 창당대회에서 代最高委員에 선출되었다. 창당 과정에 있던 통일 사회당과 통합을 꾀하였으나 이루지 못했다. 1967년 3월 9일 당의 이름을 ‘대중당’으로 고쳤다. 여기에서 월파는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으며, 대통령 후보로 지명받았다. 강령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당의 기본 이념으로 삼고 근로 대중의 권익을 대변하는 대중적인 국민 정당임을 밝혔다.
월파는 1967년 5월 3일에 있을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였다가 선거일을 5일 앞둔 4월 28일 사최, 신민당과 같이 공명선거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5월 8일 월파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다시 구속되었다가 그달 27일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북한을 현실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 국방비를 줄이기 위해 남북 군축을 제의하겠다는 내용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고흥에서 옥중 출마하여 당선됨으로써 대중당은 유일한 제3당의 의석을 갖게 되었다. 1969년 박정권이 삼선개헌을 추진하자 여기에 반대하며 국민투표 거부 운동을 펼쳤다. 통일에 대한 관심은 이어져 69년에는 통일문제연구 자문위원에 위촉됐고, 70년 10월에는 ‘내가 집권한다면 김일성과 국제기구를 통한 직접 면담으로 대결하겠다“는 발언으로 기소됐으나 결국 무죄로 풀려났다. 월파는 1971년 4월 27일에 있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대중당의 후보 지명을 받았으나 야당 통합을 위해 신민당에 입당함으로써 대중당은 구심을 잃었다. 이후 대중당은 이몽(1971년 5월 1일)과 이동화(1972년 7월 6일)가 권한 대행을 맡고 있다가 10월 유신으로 소멸되고 말았다.
월파는 신민당 후보로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선거에 고흥에서 출마했으나 신형식에게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1973년 1월 20일 정계은퇴 성명을 발표 후 사재를 털어 통일연구협의회를 창설, 회장으로 활약 중이었다.
8. 큰 별은 지고....
서거 한 해전인 월파는 전남일보 지면에 <그때 그 이야기> 시리즈의 하나로 <이 정권과의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50회에 걸쳐 회고록을 연재하였다. 월파는 격정적인 면모를 지닌 정치인이었지만, 놀라운 기억력과 세심한 감수성을 지닌 문필가의 면모를 함께 보여주었다. 마치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기나 한 듯이 그는 출생에서부터 최근의 심경을 담담하게 밝혔다. 남은 여생을 조국 통일에 대한 일념으로 연구 노력하고자 했던 그는 회고록 연재를 끝낸 3달 뒤 아버님이 묻힌 고흥 동강의 선산이 아니라 통일로가 보이는 일영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1974년 1월 24일, 71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월파 서거 소식은 경향의 지면을 도배했다. ‘항일 반독재의 풍운아’, ‘그 투혼 어디두고’ 추도사도 넘쳤다.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동강의 자택, 광주 금남로 1가의 국민운동 전남지부에 빈소가 차려졌다. 영결식은 28일 상오 11시 시내 신촌 전화국 광장에서 사회장으로 거행되었다.
일제 식민통치기에 이은 분단 독재 정권하에서 월파는 치열하게 살았다. 승마와 야구,축구,사격을 잘한 만능 체육인에다, 트럼펫을 멋지게 부를 줄 알았던 월파. 어두었던 우리 민족사는 그를 항일과 반독재, 통일 운동의 전면에 서도록 했다. 대중 조직가이긴 보다는 지사적인 기개가 넘쳤던 탓일까. 힘든 시대 견디면서 가족들에게 너무나 큰 피해를 준 탓일까. 벌교의 집은 진즉 헐렸고, 동강의 제각은 폐허가 되어 가고 있다. 그에 관한 학술 논문은 아직 1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글의 보존, 민주주의의 발달, 겨레의 통일 과정을 탐색할 때 그의 이름은 뚜렷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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