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24년간의 회사 생활을 마치던 2006년도를 보내면서 감회를 적어보았던 것 입니다.
길었던 한 해 매일매일을 간단간단하게 일지 형태로 적는 습관을 아직도 행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의 일지를 총정리라는 이름으로 정리를 해 둔다면 한 해가 의미있는 한 해로 거듭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때는 한진이라는 골리앗에 대적하여 약하지만 현명한 다윗의 심정으로 승부를 걸고자 시도를 하여 미약하나마 승리의 기쁨을 느껴 보았고,
또 한 때는 지방선거 경선의 비공식 운동원으로 경북지역의 여러 곳을 다니며 자신과의 싸움을 벌리면서 선거운동에도 좀 관여하면서 패배한 장수와 아픔을 함께 하였으며 그 후에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군수선거와 교육위원 선거에도 조금 참여하였었다.
연전연패의 결과는 선거와는 애당초 운세가 미치지 못했음을 선거결과를 보면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경선이 끝나고 4월말 후보자로부터 수고했다는 전화를 받았고 그 후 8월초 후보자의 자택을 찾아가 환담한 바 있으며 또 그 1주일후에는 작은형과 함께 하는 후보자 내외분과의 오찬을 포항 앞 바다가 보이는 흥해의 <해뜨는 집>에서 하면서 무보수 비공식 운동원으로서의 보람을 느끼며 한 여름의 이벤트를 연출하였었다.
2월말 어느날에는 우대봉님과 함께 국채보상공원에서 거행된 황우석 박사 지지 모임에 참여하여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감동에 젖어 보기도 하였다.
3월말에는 복현동에 있는 텃밭에 진출하여 그 곳 형님들과의 인연을 맺으면서 삶의 궤적에 많은 변화가 주어지면서 영광스럽게도 가톨릭에 귀의하여 마침내 11월에는 영세를 받는 성과를 이룩하였다. 지난 여름 복현텃밭에서 형님들과 함께 개도 잡아먹고 술도 많이 먹으면서 그 분들을 통하여 나이를 먹어가며 살아가는 순리의 길을 배우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자주 갔던 술집으로는 통통집, 여원숯불갈비에 예천상회 등이 있었고 가끔씩 갔던 대왕노래방은 복현동에서는 유명한 노래방 이었다.
또 형님들이 다니는 복현성당의 멤버들 중 몇 명과도 함께 술잔을 기울였는데 세례명으로는 요아킴,방지거,도밍고,마르코,미카엘등 나보다는 몇 살위의 분들이었고 부부동반으로 해서도 한 번 파티를 했다.
경호형님과 우대봉님 두 분의 적극적인 권유로 매일 저녁에 1시간- 2시간씩 걷기 운동을 하면서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어떨 때는 밤 11시에도 욱수골을 걸었고 또 어떨 때는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데도 우산을 들고 걷기 운동을 마치 보약처럼 생각하면서 했다.
4월초부터 현경엄마와 함께 알아보기 시작한 가게자리는 대구시 전역을 돌아보며 벼룩시장과 교차로를 정독하면서 문구점,수퍼,편의점 등을 심도있게 알아 보았다.
6월에는 성당의 예비자들과 함께 사회복지시설인 애망원에 가서 어버이로부터 버림받은 중증 장애우들에게 봉사하는 맛을 느껴 보았으며, 재취업을 위한 활동으로는 몇몇 사람들의 권유로 동부그룹의 경력사원 시험에 응시하여 한진에 있다가 그리로 간 최시영 상무를 면담한 바 있으며, 복현동 형님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산격성당 신협에 이력서를 내고 최종 면접까지 하였으며 교차로를 보고서 범물동의 어느 학원 부원장 대우 자리에 응모하였으나 세 군데 모두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한진을 그만 두는 과정에서 한 소리를 했기 때문에 한진에서 자리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나 애당초 한진과 관련있는 일을 하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고 우선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경산대리점을 맡아 보라고 적극 권유했고 대구지점장이 직접 경산대리점을 맡아 주면 적극 지원해 주겠노라는 언약까지 하였으나 최종적으로 <노> 를 했다.
국가는 실업급여를 주면서 교육을 시켜주는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여러 번의 교육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내 인생의 후반전은 결정되지 않았다.> <미소를 지어라.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등등 좋은 말이 참 많았다.
신 지점장이 맡고 있는 택배 영업소와의 인연 또한 2006년 한 해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처음에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지원해 주는 형태로 이루어졌고 시간이 가면서 개인적으로는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비싼 가게세의 일부라도 충당할 목적으로 또한,운동 삼아 해 왔고 앞으로 할 수 있는데 까지는 해 볼 생각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2월,
다른 대안들이 모두 무산이 되고 가능성 또한 없고 민중이가 수능을 마친 상황에서 더 이상 생업을 개시 않을 수가 없는 시점에 문구점을 얻었다. 어쩌면 막다른 골목인지도 모르겠다.12월 한 달은 정말 바쁜 달이었다. 문구점 오픈은 현경엄마의 공이 90%라면 나의 공은 10%도 되지 않을 정도로 현경엄마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가게를 준비하면서 오십이 넘어서야 아버님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아버님의 인생을 거울삼아 민중이를 서울로 보내되 우리는 올라가지 않고 대구에서 터전을 잡고 계속 있기로 결정하였다. 아버님께서는 75년도 인천에서 약국을 개업하셨다. 큰형이 삼성에 입사하기 전이었고 작은형은 외무부에 근무중이었으며 나는 재수의 길로 접어든 시점이었고 흥식은 고등학생이었다. 이 4형제나 되는 수를 건사하는 것도 큰 일이어서 우리는 삼양동에 살았고 어머님은 우리들 뒷바라지에만 매진하셨다.그렇게 되니 당연히 바깥 일은 아버님 몫이었다. 약국을 개업하시면서 전적으로 혼자 도맡아 준비하시면서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저는 이제야 확실히 알았습니다. 가게를 준비하면서 힘들게 시간을 보내면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웬만큼 컸고 거기에다 현경엄마가 8년의 가게 경력을 밑천으로 해서 나와 함께 힘을 합쳐서 일을 진행해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혼자서 가게 오픈 준비를 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닌 것이다. 당시를 회상하면 약국 밑천도 많이 부족하여 백부님이 받은 고향 땅 보상금중 일부 보조를 받았던 기억이 나며, 개업후에도 자금이 부족하여 백부님 보증으로 대출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아버님은 인천에서 삼양동까지 2주에 한 번 정도 오셨는데 힘 든 내색이나 어머님이나 자식들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학업에만 더욱 정진할 것을 적극 권유 하셨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수양이 무척 부족하나 보다. 부족한 수양을 메우기 위하여 계속 노력할 것이며 아버님의 훌륭했던 인품을 배워 나가야겠다.
그렇게 하여 2006년은 물이 흘러가듯이 흘러가 버렸다.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마음은 무척이나 설레이고 있다. 왜냐하면 새해는 나의 제2의 인생의 원년이 되기 때문이며 원년이 잘 진행되어야 모든 일들이 수월하게 풀려나가기 때문이다. 현경엄마와 힘을 합하 여 열성을 다해 가게를 운영해 나갈 것이다.
구랍 말일 주일미사에서 나는 영성체 후에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께 간구하였다.
첫째는 민중이가 서울로 가서 적응을 잘 해 나가고 서울 아이들과 잘 어울려 성공적인 서울 생활이 되도록 도와 주소서.
둘째는 작은형이 내년에 좋은 나라에 대사로 부임받아 훌륭한 외교관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