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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교회 소개 (교단 : 기독교한국침례회)
“침례교회는 기독교의 많은 교파중의 하나이며, 기독교 역사상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교회입니다.”
침례교회는 신앙의 모본을 역사적인 전통에서가 아니라 신구약 성경 특히 신약성서에서 찾으며 그 교훈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핍박을 받고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종교 개혁때까지 약 5,000만명).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천로역정의 존 번연,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윌리암 케리(인도 선교사), 세계적 설교자 찰스 스펼전-이상 영국인, 미국 헌법의 초석이 된 로저 윌리암스, 하바드 대학의 초대 총장 헨리 둔스터,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래이엄목사, 전 미국 대통령인 지미 카터 이상 미국인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침례교회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Expo74 전도대회에 빌리 그래이엄 목사 통역으로 널리 알려진 수원중앙교회 원로목사이며, 극동방송, 아세아 방송국 사장인 김장환 목사(BWA 세계침례교총회장 역임), 강남중앙교회 김충기원로목사, 서울중앙교회 오관석목사,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 연세중앙교회 윤석전목사, 대전 대흥교회 안종만목사, 삼호교회 안종대목사, 방송매체로 널리 알져진 중문교회 장경동목사, 여의도침례교회 한기만목사, 그리고 총회장을 역임하고 2005년 BWA 부총재로 취임된 한명국 목사 등이 계십니다.
침례교회의 시작
침례교회의 시작이 언제부터이냐...?
이것에 대한 질문은 침례교회 교회사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는 문제이다.
신약성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침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회개의 침례를 베풀던 시기를 신약교회인 침례교회의 출발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중세 가톨릭 교회의 내부 개혁세력인 루터나 칼빈의 개혁교회운동에 비견해 외부 개혁세력의 중심이었던 재침례교파에서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근거에 의하면, 기독교회사에 "침례교회"란 이름이 정식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644년쯤 영국침례교회로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유럽대륙 내에서 활동하던 재침례파 중 일원인 네덜란드의 재침례파 성도들이 영국으로 건너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침례교도의 영적인 선조는 신약성서 시대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다. 교회사에서는 감추어져 있는 신약성서적 표준과 모범을 이어온 일단의 무리와 종교개혁 시대 상당한 개혁 세력을 구축하며 역사 속에 등장했던 재침례파에서 그 영적 계승을 볼 수 있지만 침례교도란 공식 이름의 발단은 이때부터라고 보는 견해가 정설이다.
신앙의 모본과 최고 권위로서 신약성서의 재발견은, 영국 국교회로부터 남녀 신자들을 이끌어내 신약성서의 원리들을 보존하는 것으로 그 일맥의 혈통을 특징지은 사람들의 대열에 가담하게 한 것이다.
특히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개인적 신앙고백에 의한 "믿는 자에게 베푸는 침례"를 강조하는 부분과 의식의 방법에서 "침(수)례"가 두드러지게 강조되므로 당시 박해자들(로마 가톨릭은 물론 영국 국교회, 당시 개혁파인 루터교, 장로교 등)로부터 ‘침례교도’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마치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이 신약시대 안디옥에서 믿는자들을 일컬었던 것처럼, 그 근원과 시작이 어떠하든지 침례교도란 이름을 갖게 된 신약성서적 기독교인들은 처음부터 혹심한 박해를 받으며 자라왔다.
초기 박해의 시기 영국 침례교도들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많이 알려진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을 비롯해 불후의 명설교자 스펄전 목사, 최초로 해외 선교의 횃불을 든 윌리엄 케리 등을 들 수 있다.
유럽대륙 어두운 교회 역사 속에서 발아하기 시작한 신약성서적 모본을 실천하고자 하는 신약교회는 영국에서 잎을 내어 침례교회로 모습을 드러냈고, 당시 종교의 자유를 찾아 건너온 청교도들과 함께 미국에서 정착해 대각성 부흥운동 등을 거치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일약 세계적 대교단으로 성장하였다.
초기 식민지 미국에서도 침례교회는 박해를 받으며 성장했다. 대표적 박해의 사례로, 하버드대학교 초대 총장인 헨리 둔스터는 말씀을 연구하면서 유아세례가 비성서적이라고 판단하여 이를 거부한다는 이유만으로 총장직에서 면직되고 그 식민지에서 추방되기도 했다.
그러나 양심의 자유와 정교분리의 정신으로 제퍼슨의 초기 미국 헌법의 기초를 이루는데 지대한 영향을 준 침례교회는 미국의 건국과 더불어 박해에서 벗어나 무한히 성장할 수 있었다.
현재 미국남침례회는 단일 교파로는 개신교 중 세계에서 제일 큰 교파이며 가장 많은 해외 선교사를 파송한 교단이 되었다. 독자들이 익히 아는 바 지난 세기 세계적인 전도자로 명성을 날렸던 빌리 그레엄 목사나, 대통령 재직중 교회학교 교사직을 버릴 수 없다고 하여 유명한 일화를 남겼고 대통령 퇴임 후 더 활발한 활동을 하는 카터 집사 등이 훌륭한 침례교인들이다.
현재 전세계 침례교도의 통계는 침례교세계연맹(BWA)에 가입한 교회수 15만8,384개, 침례교인 4,2315,140명, 등록 교인은 1억5,000만명을 넘는다.
한국침례교회전래(현 기독교한국침례회)
초대선교사-말콤.C 펜윅(Malcom C.Fenwick:1865~1935)
1889년 12월 8일, 카나다로부터 내한한 말콤.C 펜윅 선교사와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1900년대 초기 한국 침례교회는 함경남도 원산을 중심으로 주로 북쪽 지역에 복음을 전파했으며 멀리 만주, 시베리아 북간도까지 침례교회를 세웠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때는 동아기독교 시대이니만큼 "침례교회"라는 명칭을 쓰지 않았습니다)
남쪽에서는 장로교, 감리교가 먼저 선교지역을 구분하여 선교하였기 때문에 남의 터위에 교회를 세우지않는 성경말씀대로 다른 교파의 선교지역 외에서 전도하다보니 시골이나 낙도 등 외진 곳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강경교회, 칠산교회를 비롯하여 공주교회(현, 꿈의 교회)는 100년의 역사가 지났고, 울릉도에는 침례교회가 가장 많음)
침례교회의 급격한 부흥은 6.25동란 이후 미국 남침례교회의 지원에 힘입어 놀라웁게 성장했고, 현재 교세는 107개 지방회와 2,600여교회, 침례신학대학교를 비롯한 12개 기관, 침례회 부흥사회 등 5개 단체에 약 60여만명의 교인들을, 약 3.300여명의 목회자가 섬기고 있습니다. (침례교 총회 통계 참조)
* 주의
한국침례교회가 복음적인 교회로 알려지고 부흥하다보니 "침례교회"란 명칭을 가진 사이비 이단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이 침례를 주며 복음을 강조하지만 신앙인의 윤리적인 면이나 주장하는 바가 조금 다른 면이 있음을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상세한 것은 "목회와 신학" 에서 정동섭원장(전, 침신대 교수)의 기고한 글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 기독교복음침례회(속칭 권신찬, 유병언파), 예수복음침례회(속칭 박옥수파), 대한예수교침례회(속칭 이복철파/일명 이요한파) 등 구원파가 있으니 주의를 요하시기 바랍니다.
침례교회의 변천사
< 펜윅과 초기의 한국 선교 > 1889~1905
1889년에 26세의 젊은 나이로 선교정신이 충만한 캐나다의 독립 선교사 말콤 C. 펜윅이 한국 땅에 발을 디딘 이래로 시작된 한국의 침례교회는 백년이 조금 넘는 역사 속에서 여덟번이나 교단의 명칭을 바꾸어야 하는 수난을 겪었고,비록 교단 분열의 쓰라림을 경험하기는 했으나 분열을 스스로 치유하는 지혜를 터득하며 2,400여 교회를 지닌 단일교단으로 꾸준히 성장해 왔다.
23세 되던 1886년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중생을 체험한 청년 펜윅은 아무런 교단이나 선교회의 도움도 없이, 더구나 가족조차도 반대하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 대한 선교소명을 실천에 옮겼다.
1889년부터 1893년 까지 황해도 송천에 자리잡고 한국어를 익히며 전도하던 펜윅은 1893년 도미하여 3년 동안 미국 보스턴의 클라랜돈가 침례교회를 담임하던 고든(A.J Gorden) 목사 밑에서 신학과 선교훈련을 받았다. 고든 목사는 철저한 근본주의자로서 진화론과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성전의 무오성과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신봉하던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가까운 재림을 믿었으므로 선교에도 열심을 보인 사람이었다.
펜윅은 고든 목사의 영향아래 침례교로 전향하였다. 펜윅 선교사가 가르친 내용들은 대부분 고든 목사의 신학사상과 유사했다. 성경읽기를 무엇보다도 강조하였고, 진화론을 가르치는 세속교육을 반대하였으며, 지상 천년왕국에 대한 소망을 한국의 침례교인들에게 심어주었다. 펜윅은 1896년에 다시 한국에 돌아와 함경도 원산을 중심으로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그런데 한국에는 1895년에 침례교 선교사들이 들어와 충남 공주·강경을 중심으로 선교의 열매를 맺고 있었다. 이들은 펜윅의 영향으로 클라랜돈가 침례교회에 구성된 「엘라 씽 기념선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었다. 그러나 엘라 씽 선교회는 1900년에 한국 선교사역을 철수하며 1901년에 펜윅에게 모든 것을 인계하였다. 이로써 펜윅은 북쪽의 원산, 남쪽의 공주· 강경을 중심으로한 침례교 선교사역의 유일한 지도자가 되었다.
<대한기독교회 > 1906~1920
전도자들과 개척된 교회수가 늘어나자 펜윅은 1906년 강경에서 전 사역자를 소집하여 대회를 열고 「대한기독교회」를 조직하였다. 총회에 해당되는 「대화회」와 지방회에 해당하는「당회」 를 구성하고 펜윅 자신이 감독이 되어 중앙집권적인 감독정체 체제를 구축했다.
직분의 명칭도 아홉 가지 이상이나 되는 복잡한 직급제를 형성했다. 「대한 기독교회」는 약간의 노잣돈을 가지고 「만민 좋은 기별」이라는 쪽 복음을 전파하던 전도인들의 공헌으로 급속한 국내 전도의 열매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만주, 간도 및 시베리아선교의 대과업을 성취했다.
펜윅은 신약성서를 침례교입장에서 번역하여 1919년에는 「원산번역」 이라고 불리는 신약성서를 출간했고, 1905년에는 공주에, 1907년에는 원산에 각각 성서학원을 설치하여 전도인들을 훈련했다. 또한 「복음찬미」라는 찬송가책을 출간하여 찬송가 수를 계속 늘려가며 찬송으로 복음을 가르쳤다.
<동아기독교회 > 1921~1932
「3·1 운동」이후 교회 탄압을 시작한 일제는 「대한」이라는 명칭이 합당치 않다고 하여 교단의 명칭 개정을 강요 했다. 1921년 「대한기독교회」는 「동아기독교회」로 개칭했다. 동북아를 선교대상으로 삼고 복음화한다는 교단의 의지가 포함된 명칭이었다. 「동아기독교회」시대는 일제의 탄압정책과 아울러 만주에 일어난 공산주의자 들의 만행으로 인해 많은 순교자가 나온 기간이었다.
1921년에는 일본 헌병에게 독립군 첩자로 오인된 손상렬 목사가 순교했고, 1925년에는 만주 길림성에서 전도하던 6인의 침례교 전도자들(김상준 교사, 안성찬, 이창희, 박문기, 김이주, 윤학영)이 공산당원에게 순교당했다.
특히 몽고에 30여 개 교회를 개척하며 몽고족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던 이현태 교사는 1928년경 몽고토족의 습격을 받아 순교하였다. 1932년에는 만주 종성동 교회에서 시무하시던 김영국 감노와 김영진 목사 형제분이 공산당원에 의해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문을 당하고 장렬히 순교하였다.
펜윅 선교사는 1925년부터 「편공부」라고 불렸는데 이런 일제 탄압속에서도 「달편지」를 매달 발간하여 각 교회에 발송하며 신앙을 지도했다. 1926년에는 성도의 자녀들이 일제의 세속교육을 받는 것이 합당치 않다 하여 학교교육 폐쇄 지시를 내렸다.
<동아기독대 > 1933~1939
1933년에 「교회」라는 명칭이 세속화 되었다고 느낀 편공부는 교단의 명칭 을 「동아기독교회」에서 「동아기독대」로 바꾸었다. 「대」라는 명칭은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양무리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일제는 한국민족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나 「동아기독대」는 「달편지」 를 통해 신사참배에 절대 참여치 말 것을 시달했다.
이로 인해 1935년에 5명의 지도자들이 원산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 기간에는 편공부 내외를 사별해야 하는 슬픔을 겪어야 했는데,
1933년에는 편공부의 부인 하인즈 여사가 타계했고, 1935년에는 편공부 자신도 46년의 찬란한 선교업적을 남기고 72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펜윅의 신학사상, 교회관 및 전인적인 지도력 등은 오늘날 재 검토의 여지가 있다손치더라도, 그의 열정, 헌신, 강직한 신앙 및 도전적인 개척정신은 침례교 후손들이 길이 본받을 점이라 하겠다.
<동아기독교 > 1940~1948
1940년에는 「동아기독대」라는 명칭이 천황군대에 저항감을 준다고 느낀 일본은 다시 교단 명칭의 개정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교단은 「동아기독교」라고 다시 개칭했다.
이 시기에는 세 가지 특이한 사건이 있었다. 일본은 만주를 점령하고 1941년에 만주에 있는 6개교파의 교회들을 「만주기독교총회」라는 연합교단으로 형성했다. 이로 인해 만주지방의 1백여 침례교회는 형식상 한국의 교단과 분리되게 되었다.
또한 일정은 소위 「원산사건」이라 불리는 「동아기독교」탄압을 감행했는 데 1941년에는 침례교 신약전서 6,500부의 복음찬미 500부를 소각했고, 1942년에는 「동아기독교」의 지도자 32인을 함흥형무소에 투옥시키고 온갖 고문과 구타를 하였다.
급기야 1944년에는 지방법원인 함흥재판소가 동아기독교의 해체명령을 내렸고, 이로 인해 15개월 동안 한국 침례교는 교단 없는 교단이 되었다. 일제하의 한국 침례교는 성서중심의 교육, 절대 타협치 않는 불굴의 신앙, 순교를 각오한 선교정신을 그 특징으로 하였다.
1941년 당시의 동아기독교는 한국 전역에 1백여 교회, 만주에 1백여 교회, 시베리아에 47개 교회, 몽고에 수십 개의 교회에 이르는 교세를 지니고 있었다.
1945년 해방의 기쁨조차도 침례교단의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미약했다. 교단해체의 상처가 15개월이나 지속되었고, 더구나 38선 분열로 인해 북쪽의 기지를 송두리째 상실한 한국의 침례 교회는 꺼져가는 심지와 다를 바 없었다. 심지어 타 교단에 귀속되자는 견해도 대두되었다.
그러나 1946년 남한의 22인의 침례교 지도자들은 「교단재건회의」를 개최했고,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났다. 1946년 강경에서 개최된 36차 「대화회」에서 '감목정체'를 '회중정체'로 바꾸고 교회 직분도 대폭 변경시켰다. '안사'를 '목사'로, '감로'를 '장로'로, '통장'은 '권사'로, '총장'과 '반장'은 '집사'로 개칭했고, '교사'직은 그대로 두었다. 「대화회」도 「총회」로 개칭했다.
1947년에는 이러한 변화에 반발하여 경북 예천의 일부교회들이 불만을 품고 별도의 대화회를 열고 「대한기독교회」라는 명칭으로 분립해 나갔다. 비록 10개에 불과했으나 동아기독교의 교세를 더욱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대한기독교침례회 > 1949~1951
1948년 총회에서는 미국 남침례교회와의 제휴를 추진키로 논의했다.
1949년 39회 총회가 강경에서 열렸을 때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바꾸고 신앙노선을 분명히 밝혔다. 1949년 미국 남침례교 해외선교부 동양총무인 카슨(Cauthen) 박사가 내한하여 동아기독교가 남침례교와 다른 바 없는 신앙과 행습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1950년 존 애버내티(John A. Abernathy) 선교사 부처가 내한함으로 본격적인 남침례교 선교시대가 열렸다.
1951년 충남부여에서 개최된 41차 총회에서 교회 직분을 '목사'와 '집사'로 축소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선교사들의 활동은 활발해져서 1951년 의료 선교, 구호 선교, 고아원 선교를 시작하면서 침례교회가 놀라운 확장을 하였다.
<대한 기독교 침례회 연맹 > 1952~1958
1953년에는 대전에 「침례회 성경학원」을 개원했다. 1954년 성경학원은 문교부로부터 「침례회 신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또 같은 해에 현재 교회진흥원으로 발전된 「침례교출판사」가 세워졌다. 남침례교의 선교로 인해 침례교세는 급상승했고, 이로 인해 타 교단에서 많은 교역자들이 침례교를 전입했다.
그러자 동아기독교 후계를 자처하는 「주류파」와 타 교단에서 들어온 「전입파」, 신학교를 졸업한 「신학교파」 및 「선교사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분열의 조짐을 보였다.
<분열 총회 시대 > 1959~1967
선교사들이 총회의 전도부장이던 안대벽 목사를 불신임한 것을 계기로 총회와 선교부는 대립했고, 급기야 1959년에는 「주류파」를 중심으로한 대전총회가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총회 분열로 인해 감정싸움과 불미스러운 일이 계속되던 중 1963년에 문교부가 개입하여 재산분할 문제를 해결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에 포항측은 「한국기독교침례회」라고 교단 명칭을 정했고, 대전측은 「기독교한국침례회」로 정했다. 이 분열은 1968년 초기까지 계속되었으나, 신학교를 졸업한 「신진파」들의 등장으로 인해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1968년 4월 역사적인 합동총회를 개최했다. 분열을 극복하고 합동을 이룬 역사는 침례교의 상처이면서도 자랑이 아닐 수 없다.
<한국침례회 연맹 > 1968~1975
합동총회는 「한국침례교연맹」으로 개칭했다. 분열 기간에 침례교회 지도자들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자립정신을 고취했으며, 침례교 부흥의 영적기틀을 다졌다. 이 기간에 선교부도 여러가지 기관 사업을 육성함으로써 한국 침례교 성장에 큰 공헌을 하였다.
<기독교한국침례회 > 1976년~ 현재
교단 명칭은 「기독교한국침례회」로 개칭되어 웅대한 도약의 시기로 돌입하게 되었다. 한국침례교회는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기에 이르는 "침례교의 계절"이 라고 불리는 10여년 동안 그 이전의 역사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던 활기찬 교회성장과 교단 발전의 부흥을 가져왔다.
1976년 제65차 총회에서 교단의 명칭이 「기독교한국침례회」로 개칭된 이후 변혁의 모습은 그 동안 영력을 잃고 믿음이 냉각되었던 교회들이 성령부흥운동 을 통하여 영력을 되찾고, 경제적으로도 자급자립하려는 의식의 변화에서 나타났다.
대표적인 부흥사(김충기·오관석·고승혁·지덕·김장환 목사 등)들의 부흥회를 통해 교단 내외적으로 부흥하는 교단이 되었다. 특히 당시 총회와 선교회가 화합적 협동관계로 개선되면서 한미합동사업으로 함께 추진하던 한미전도집회는 목회자들이 교회를 개척하고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에 교단의 부흥을 가져오게 하는 큰 구심점이 되었다.
이로써 지금까지의 교권쟁취를 위한 교단 정치는 완전히 불식되고 오직 복음전도와 신앙훈련을 통한 교회 성장에만 총회와 선교회가 매진 함으로써 침례교회 본연의 교회 생활과 교단 생활의 기틀을 잡은 것이다.
1980년 수도침례신학교의 설립, 1982년 전국남전도 연합회 설립, 1987년 해외 선교회 설립과 침례병원, 국내선교회, 여선교연합회, 침례회신문사 등의 각종 기관을 통한 활발한 선교활동은 침례교가 더 큰 부흥의 시기를 맞이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잠실 올림핌 주경기장에서 열린 1989년 침례교회 선교 100주년 대회와 1990년 16차 침례교 세계대회 한국 개최는 국내는 물론 해외 모든 사람들에게 한국 침례교의 성장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999년 5월5일에는 침례교회 110주년 행사를 같은 장소에서 10만 성도가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렀고,
2000년 1월8일 호주 멜버른에서 개최된 제18차 침례교 세계대회에서 전세계 115개국 201개 총회 및 연맹이 가입되어 있는 침례교세계연맹(BWA) 총재로 한국의 김장환(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목사가 선출돼 세계 속의 한국 침례교회의 위상을 드러내고 있다.
침례회 총회 본부도 반세기 동자동 시대의 막을 내리고, 구로구 오류동으로 이전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와 같이 한국의 침례교회는 1889년 펜윅선교사가 이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지 11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 뿐 만 아니라 세계의 선교에 크게 공헌하는 교단으로 성장하였다. 이것은 끊임없이 교단이 자기성찰과 개혁을 이루고 철저히 성경의 원리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이제는 한국 침례교회가 이 사회를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시킬 제2의 부흥기에 있으며, 또 다른 형제 국가인 북한 선교에 힘을 실어야 할 때가 되었다.
2006년 현재, 기독교한국침례회 산하에서는 11개 기관이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106개 지방회, 2,531여 교회, 3,308명의 목회자, 68만의 침례교인이 소속되어 있다.
침례교회의 이상과 주장
1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설하였고 친히 머리가 되시며 그 입법자이시다 (마 16:18, 골 1:18).
2 교회의 교리와 생활에 대한 유일하고 권위있는 표준은 성경뿐이다 (딤후 3:16).
3 교회의 의식은 침례와 주의 만찬으로서 상징적 기념일뿐 구원의 조건은 아니다 (고전 11:24,25).
4 교회의 직분은 목사와 집사로서 이들은 교회를 섬기는 이들이다 (행 20:17,28, 빌 1:1).
5 교회의 정체는 민주정치로서 행정만 할 뿐 입법은 하지 않는다 (마 20:25~27).
6 교회의 회원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들의 모임으로 구성된다 (롬 3:19).
7 교회 회원의 의무는 신앙고백으로 침례를 받고 신약성서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벧전 4:10).
8 모든 교회는 행정적으로 독립적이나 복음 전도 사업은 협동한다 (마 28:19,20).
9 교회와 국가는 상호 분리되어 있다 (롬 13:1~7).
10 신앙의 자유는 절대적이다 (마 22:21).
1. 신앙과 생활의 최고 권위로서의 성경
2. 교회와 국가의 분리
3.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얻는 구원
4. 민주적 자치체로서의 교회
5. 개교회 주의
6. 신자의 제사장 직분
7. 모든 신자의 전도적 사명
8. 청지기로서의 삶
9. 침례와 주의 만찬
10. 침례교회의 직분
I. 침례교인의 정신
- 침례교인은 주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합니다.
- 침례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 사업에 적극 참여합니다.
- 침례교인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선교 사업을 완수합니다.
- 침례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청지기 직분을 수행할 줄 압니다.
- 침례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진리를 고수하고 신앙적 불의를 용납하지않습니다.
- 침례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유하나 서로 협동할 줄 압니다.
II. 침례교회의 특성
침례교회가 강조하는 교리와 고수하는 특수성이 성서적이라는 면에서, 침례교의 특성은 곧 신약성서의 교리에 따른다는 것이다.
침례교인은 무엇보다도 신앙과 생활의 최고 권위로서 성서를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 침례교회의 가장 큰 특색이다.
1. 신앙과 생활의 최고 권위로서의 성경(딤후 3:16)
-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라는 사실과 성경 66권은 과오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 성경은 생활의 지침서이며, 그 안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있다고 믿는다.
- 성경은 읽어야 하며 공부해야 하고 묵상해야 하며 가르치고 전파해야 하며 그 교훈에 따라 살아야 한다.
- 성경을 전통이나 신조, 이 세상의 어떤 인물의 교훈이나 저서와 비교하지 않고 인간생활에 절대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
- 성경은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되고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해석해야 된다고 믿는다.
2. 교회와 국가의 분리 (롬 13:1-7; 마 22:21)
국가는 하나님꼐서 세우신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의 법률을 지키고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어 서로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3.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얻는 구원 (엡 2:8,9)
구원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얻는 것이며,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다. 중생없이는구원도 없다 (요 3:3).
중생은 우리의 새사람이 되게 하며 (고후 5:17) 값없이 얻는 산물이다(롬 6:23). 중생을 통한 구원은 취소될 수 없다(롬 8:35-39).
4. 민주적 자치체로서의 교회(마 20:25-27; 행 1:15-22; 행 6:2-6)
- 중생한 교인의 회원권 : 교회의 구성원은 침례받은 회원들이다.
- 모든 회원의 동등한 권리 : 모든 회원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 자치체로서의 교회 : 민주적 다수결의 원칙에 의하여 교회사업을 의논하고 결정해 나간다.
5. 개교회 주의
개교회는 민주적 방식으로 말씀과 성령님의 지도를 따라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그러나 지방회나 총회를 통하여 서로 협동하고 연합사업에 참여해야 한다.
6. 신자의 제사장 직분 (롬 3:19; 행 13:39; 히 4:16; 벧전 2:9)
각 신자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각각 책임과 능력을 가진 존재다.
각 사람은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교제하여 기도하며 은혜의 보좌 앞에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7. 모든 신자의 전도적 사명 (행 1:8; 마 29:19-20)
성경은 모든 신자가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땅 끝까지 나가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제자로 삼고 침례를 주어야 할 사명이 있다.
8. 청지기로서의 삶 (벧전 4:10; 눅 16:1-10)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뿐만 아니라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생활, 즉 선으로 모셔야 한다.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생활, 즉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선한 청지기가 될 때 기쁜 마음으로 헌신과 봉사와 헌금과 십일조가 나올 것이다.
9. 침례와 주의 만찬
1) 침례
- 침례의 방법과 의미
침례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밥티스마'로 물 속에 잠긴다는 뜻이 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은 온 몸을 물 속에 잠그는 의식으로서 침례를 받아야 한다.
침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행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행위로서, 물속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나타내고 물속에서 나오는 것은 새 생명을 얻는 것,
즉 새로운 신분으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한다. (롬 6:3-11; 롬 2:12)
- 침례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사람이다.
- 침례의 목적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이다. 주님은 전도하라는 명령과 가르치라는 명령 못지 않게 침례를 주라고 명령하셨다 (마 28:19-20).
그러나 침례가 구원의 요건은 될 수 없다.
- 침례의 시기
침례받는 데는 일정한 기간이 필요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생활의 주인으로 모셔들인 성도는 언제라도 침례받을 수 있다.
2) 주의 만찬
- 주의 만찬의 의미
주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하신 몸과 흘리신 보혈을 기념하는 뜻으로 행한다(고전 11:24-25).
그러므로 주의 만찬 자체에는 신비한 능력이 없다.
- 주의 만찬의 대상
중생하고 침례받은 성도라야 한다. 중생한 자라 할지라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성도는 삼가하는 것이 좋
다(고전 11:27-29).
- 주의 만찬의 목적
주의 만찬의 목적은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으로서 침례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하
는 마음으로 행한다. 성도는 이 의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고 다른 성도들과 더불어 끊임없이 교제하며
새로운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10. 침례교회의 직분
1) 목사
목사는 장로 또는 감독이라고 불리운다.
목사와 장로와 감독은 한가지 직분의 각각 다른 기능을 설명하는 말이다(행 7:18).
즉, 장로는 경험이 많고 존경받을 만한 연장자를 뜻하며 감독은 교회 전체를 맡아서 돌보는 사람이며 목사는 목자를 의미하는 말로서 주의 성도들에게 영의 양식을 공급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직분을 말한다.
우리는 이 세가지 명칭이 각각 다른 직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직분을 설명하는 다른 명칭이라는 것을 알
아야 한다.
즉 경험과 지도력이 있는 사람(장로)이 교회를 다스리고(감독) 양떼를 먹이고 인도한다는(목사)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침례교회는 장로와 감독을 따로 두지 않는다.
2) 집사
집사 직분의 유래는 사도행전(6:1-6)에 있다.
예루살렘 교회는 최초로 일곱 집사를 선출하여 기도하고 안수하였다.
집사를 선출할 때 자격은;
- 성령이 충만한 사람
- 지혜가 충만한 사람
- 그리고 칭찬듣는 사람이며,
더 자세한 집사의 자격은 디모데 전서 3장 8절에서 12절에 있다.
3) 호칭장로(안수집사)
최근 2009년 총회에서 안수를 장로 호칭으로 부를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기독교한국침례회는
성경을 중심으로 하여, 많은 부분에 반대의 여론이 거세다.
유럽, 미국등은 호칭 장로제도를 거부하고 있다.
여성 목사 안수제도, 장로 호칭제도등은 개교회마다 받아들이는 부분이
상당히 조심스럽게 보고되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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