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답사에는 사전지식이 꼭 필요하다.
답사지역에 대한 아무 정보도 없이 막연하게 유적지에 도착했다면, 시력이 나쁜 사람이 안경을 갖고 오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즉 그곳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것들을 전혀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려순감옥...
만약 려순감옥에 대한 자료를 제대로 이해하고 감옥을 답사한다면, 그 한 곳에서 1900년대 초기 한-중-일-러가 서로 뒤엉켜 일으킨 '그 잔인하고 가슴아픈 역사'를 온전하게 느껴볼 수 있다.
려순감옥을 제대로 느껴보기 위해 관련 역사사실 일부를 더듬어보자! 려순감옥을 보려면 꼭 알아야할 사실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조선왕조의 못난 왕실관료들은 청에 군대를 요청한다. 조선왕조는 청의 군대를 끌여들여서 농민전쟁을 진압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제국주의 침략에 나선 열강들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형성한 국제정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외세를 끌어들여 동학도들을 학살하면서라도 그 부패하고 나약한 왕조를 유지해보려는 조선왕조의 못난 지배층들...
그렇지 않아도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 장악을 노리던 청은 조선왕조의 요청을 받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한반도에 군대를 들여놓았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도 들어오고... 이러한 외세의 개입을 통해 한반도는 식민지화의 단계로 급속히 넘어가게 된다. 조선왕조가 자초한 외세개입이 결국 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거의 모든 국가의 멸망 원인은 우선은 그 내부의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만약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조선왕조가 청의 군대를 요청하지 않았다면?...
역사에서 이런 가정은 불필요하다고?? 그렇지만은 않다. 이런 가정을 통해 우리는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중국학계에서도 이런 가정과 반성을 통해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고 있다.
예를 들면 중국학자 周一良은 그의 논문인「東學黨 - 朝鮮的反封建反帝鬪爭」(『歷史敎學』創刊號, 1951年1月)에서 "동학의 반봉건 및 반제(反帝) 투쟁으로서의 성격을 부각시키면서, 만청(滿淸) 정부가 조선의 봉건통치계급을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인민(朝鮮人民)의 투쟁을 진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제국주의자를 돕는 역할을 했고, 그 과정에서 중국 및 아시아에서의 일제 침략이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고 규정한다. 동학은 한국 및 중국을 넘어 아시아의 근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라고 보고 있다(임찬경, 「『단군교포명서』의 고구려 인식」,『국학연구』제13집, 2009. 이 논문에서 재인용).
조선왕조의 요청을 빌미로 한반도에 들어온 청과 일본의 군대에 의해 동학의 개혁과 반제의 희망은 잔인하게 짓밟혀지고, 그에 뒤이어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청과 일본은 한반도를 무대로 국제전쟁을 일으켰으니 그것이 바로 청일전쟁이다. 누가 이기든 조선왕조는 그 전쟁에서 이긴 자의 손에 꼼짝없이 움켜쥐키게 되고 만 상황이었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청은 이 전쟁의 패배로 국력의 저열함을 다시 노출시키면서 급속히 열강의 각축장으로 되어갔고, 또한 청은 일본에
대만과 요동반도를 할양해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일제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려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의 소위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는 다시 중국에 반환되었는데, 이때 주도적 역할을 한 러시아가 결국 1898년에 요동반도를 '조차'하게 된다.
요동반도...
1898년에 러시아에 '조차'된 이 땅은 중국 동북지역 즉 만주를 장악하려는 각 열강에게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그 땅을 오래도록 장악하지 못하였다.
만주와 한반도의 이권을 독차지하기 위해 일본은 1904년에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그해 2월 6일 최후통첩을 통해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2월 8일 인천에서 러시아 군함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군대를 상륙시켰으며, 2월 23일 한국정부를 협박하여 한일의정서를 체결시켰다.
한일의정서는 한국을 일제의 러일전쟁에 협력시키는 전략적 의미의 협정이기도 했지만, 한국정부를 완전하게 일제의 통제 아래에 두려는 목적이 협정으로 구체화된 것으로서 결국 이는 한국 식민지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한국을 군사적으로 완전하게 독점한 일본은 이를 기반으로 군사력을 집중시키며 러시아를 공격하여 마침내 1905년 러시아가 패배를 인정하고 요동반도를 내놓고 본국으로 물러가게 만들었다. 이로서 1905년 러시아로부터 만주 남부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넘겨받은 일제는 관동군을 통해 중국 동북지역에서의 지배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하게 되었고, 1931년에 이르면 9.18사변이란 만주전역에 대한 침략전쟁을 일으켜 불과 5개월만에 만주전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면서 1932년 3월에 만주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워 만주에 대한 실질적 지배자가 되었다.
1931년 9.18사변 이후 만주를 침략하여 점령한 일본의 세력판도(위 사진의 붉은 색 부분)
려순감옥은 이러한 일제의 만주 침략 과정 속에서 생겨났고, 생겨난 이후 식민지통치기구로서 일제의 만주침략을 위해 악용되었다. 일제의 만주침략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려순감옥에 갇혔으며 그곳에서 고통받고 처형되었다.
려순감옥은 처음에 러시아에 의해 건설되었다.
러시아는 1902년에 건축을 시작했는데, 러일전쟁으로 중단하고 말았다. 전쟁 기간에는 러시아군의 야전병원과 기병병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05년 일본이 요동반도를 점령한 이후 일제는 만주 침략을 위한 침략기구로서, 침략에 저항하는 반제 세력을 가두고 탄압할 감옥을 세우려 했다. 이에 일본은 감옥서( 監獄署)를 설립하고 려순에 본 감옥, 대련에 분(分) 감옥, 금주에 출장소(임시구류소)를 각각 설치하였다. 이때 러시아가 완성하지 못한 감옥건물공사를 확대 시공하여 1907년에 완공하고 '관동도독부감옥서(關東都督府監獄署)'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이 바로 려순감옥이다.
려순감옥은 부지 2.75만㎡, 감방 253개와 지하감방 4개, 그리고 15개 부설공장을 가진 대규모로 동시에 2000여명의 수감이 가능한 규모이다.
감옥의 모양은 서울에 있던 서대문형무소(1908년 신축)와 매우 유사하다.
려순감옥에는 중국의 애국지사와 한국·일본·러시아·이집트·터키·독일 등 국가의 반(反)파시즘 투사들이 옥고를 치른 곳이다. 려순감옥하면 우선 안중근 의사(1909.10.26 저격, 11.3 수감, 1910.3.26 10:00 32세로 순국)와 신채호 선생님(1928.5 대만에서 체포, 1930.4 수감, 1936.2.21 병사 희생) 등을 떠올리게 된다....
1949년 해방 후에 장기간 방기되어 있다가 1971년 7월에 진열관으로 개관되었다.
일본 식민통치기관의 변화에 따라 감옥의 명칭도 따라서 변화했는데 關東都督府監獄署(1907년), 關東廳監獄(1920년 8월), 關東廳刑務所(1926년 10월), 關東刑務所(1934년 12월), 旅順刑務所(1939년 1월) 등으로 불리어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