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점이자 우리가 성경을 보는데 있어서도 이런 오류를 범할 수 있는데 너무나 주인공 중심으로 지나치게 유명인사만을 강조하는데 있다. 이에 대해 필자는 호남신학대학교 역사신학교수인 차종순 교수가 말한바와 같이 중앙 중심적 역사에서 탈피해 지역주의, 즉 각 지역의 역사를 종합하는 종합적인 역사가 쓰여져야겠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이제껏 뛰어난 인물(주기철, 손양원...)중심적 역사만 쓰여졌다. 그러나 이제 우리 한국교회사에 숨어있는, 드러나지 않는 인재(나중에 드러날지도 모르지만)를 발굴하는 차원에서 연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숨어있는 역사, 자료에 의해 확실히 검증된 살아있는 역사를 쓰고자 한다. 이 글은 임동호 목사를 중심으로 쓰여질 것이며 그에 맞물려 몇 교회의 역사를 말할 것이다. 특별히 생명교회에 더욱 중점을 둔다.1970년에서 1990년 이 시대의 교회의 문제점과 이 시대 교회의 분위기는 어떠했으며 목사의 위치는 어디였나?를 다룰 것이다. 또한 각종 사회적인 문제들도 언급하고자 한다.
아주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기록할 것과 그러나 개인적인 주장과 느낌, 또한 나의 가치관을 전혀 배제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 길지 않는 시간이지만 세월이 빨리지나 10년 20년후에는 중요한 자료와 어떤 것으로도 살수 없는 소중한 역사의 한 면을 차지할 것으로 인식하고 성실하게 준비할 것이다.
Ⅱ. 본론
1. 임동호 목사의 출생배경
임동호 목사는 1955년 7월 29일 생으로 전라남도 순창군 복흥면 화양리 34 번지에서 4남 2녀중 5째로 태어났다. 평범한 농촌 한 가정에서 태어난 임동 호 목사는 어렸을 때부터 산에 가서 땔감나무를 하고 소풀을 먹이면서 그렇 게 평범하게 자라났다. 그러다가 동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복흥중학교를 입 학하게 되었다. 이는 중학교를 다니면서 2학년 3학년때 실장을 하게 되었고, 거기에다 전체 급장, 학생회장까지 하게 되면서 그때부터 벌써 지도자로써 자질을 갖추어 갔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때 윤여섭 사회선생님으로부터 수업시간에 기독교에 대해 얘기를 듣고 교회에 나가기로 다짐을 한다. 간곡 한 어떤 간청도 아니였는데 갈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그 면에 있는 영주 교회(현재는 복흥중앙교회로 교회이름이 바뀜)장년예배에 참석하게 된다. 그때의 성도 수는 약20명 정도 되었다. 처음 드리는 예배 느낌은 그냥 별 느낌 없이 드렸다. 그래서 1971년 11월11일 첫 교회 출석을 하고 계속 교회를 다녀 72년11월12일 학습을 받고 73년 11월 13일 미국선교사 인도아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게 된다. 이는 그 당시 성경책을 사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 자신의 생일날 부모님께서 닭잡아준다고 하니까 그 값을 돈으로 달라하여 성경책을 구입하게 된다. 그렇게 그는 영주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2년이 지나 복흥 중학교를 2회로 졸업했다.
2. 고등학교 시험을 합격하지만...
고등학교 입학을 위해 정읍고등학교 시험을 봐서 합격은 했으나 집안형편이 여의치 않아 1년을 쉬게 된다. 학교를 가고 싶은 그 욕구를 억누르고 고향에서 다시 일년간 농촌 일을 도우며 살아간다. 그 기간에 임동호 목사는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73년 순창군 복흥면 '어은리 교회' 부흥집회에 참석한다. 이때 부흥강사는 용문산 신학교를 나온 추기환 전도사였다. 용문산 신학교가 지금은 이단으로 규정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용문산 신학교 출신들을 중심으로 성령운동이 활동하게 일어났었다. 빌레그레함 전도집회나 엑스폴로(성령폭발운동)도 모두 이 70년대에 활발하게 일어났었다. 아무튼 임동호 목사는 여기서 주님을 만나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 콧물을 흘리며 또한 자신의 지난날의 모든 죄를 회개한다. 그래서 그 집회에서 3일간 철야기도를 하는데, 철야기도에 대한 어떠한 배경지식이 없었기에 철야기도는 꼬박 날을 세야되는줄 알고 3일동안 잠을 단 한숨도 자지 않고 기도만 했다는 것이다. 그때의 부흥집회를 참석하려면 쌀 싸가지고가서 밥을 그곳에서 해 먹으면서 참석했었을 때였다. 그러나 이는 다행히도 그곳의 어느 친절한 집사님 가정에서 베품을 받았다. 이 집회 후에 임동호 목사는 그의 삶이 변화되어갔다. 그 기간이 물론 고등학교를 다녀야 할 시기인데도 가정형편 때문에 못 가니 한편으론 '우리 가정은 왜 가난할까','나는 왜 고등학교를 합격해놓고도 못 가나' 하고 열등감도 느꼈을 것이고 원망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렸다. 재미있었던 건 그는 이때부터 예배 아닌 예배를 인도하게 된다. 그 당시 영주교회에는 이식로 전도사가 시무하고 있었는데, 이 전도사는 그에게 주일학교 교사를 하게 했고, 열심히, 성실하게 하는 그를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권찰이라는 직분을 주었다. (그 당시 남자에게도 권찰 직분이 주어졌고, 연령은 확실치 않음) 그런데 임동호 목사가 살고 있는 화양리 마을에서 영주교회까지의 거리는 15리 약 4Km정도 였다. 이 거리는 걸어서 가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렇기에 그 마을에서 다니는 성도들이 교회가는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자 이 이전도사는 주일낮 예배만 교회로 오고 그 외에 수요일, 주일밤 예배는 그 곳에서 모여서 예배드리라고 했다. 그래서 그 인도를 임동호 목사가 하게 된 것이다.
당시 김금순 집사 집에서 대 여섯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이 전도사는 평상시 성실하고 신앙생활한지는 몇 년되지 않았지만 말 구사 능력이나 기도 생활하는 것을 봐도 그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실제로 임동호 목사는 실장도 해보고 전체 회장도 해 본 경험도 있고 해서 그리고 또 웅변대회에서 거의 일등을 했기에 남앞에서 말하는게 떨리거나 자신없어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때부터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3. 나도 고등학교 간다.
74년 장성에 농업고등학교에 드디어 입학하게 된다. 진학학교에 가고 싶었으나 가정형편상 그것은 안되고 일단 실업고등학교라도 들어가야겠다는 마음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임동호 목사에게는 이것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거처는 큰 형님댁에서 있게 되었고 교회는 '장성읍 교회'를 다녔었다.
이때도 임동호 목사는 학생회장과 실장 또한 목소리가 좋다고 해서 조회때 구령을 붙이는 분대장도 했었었다. 이때부터 신앙의 훈련을 해 나간다. 새벽예배는 거의 빠지지 않고 나가 기도하고, 밤에도 교회당에 나가 기도하고, 새벽예배후에도 집 뒷동산에 올라가 기도하고 발성연습을 끊임없이 했다.
여기에 관한 에피소드는 친구하고 산에 올라가 주여! 소리를 외치니까 동네사람들이 불났다는 소리인줄 알고 불끈다고 소동이 일어난적도 있었다.
임동호 목사는 철저히 기도하는 삶을 살아갔다. 그리고 또한 '하루에 성경10장씩 읽기' 이 계획을 세우고 거의 어긴 적이 없었다. 심지어 시험 보는 날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 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꼭 10장씩 읽었었다. 그래서 그는 영성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날로 자라났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건은 장성농업고등학교 3학년때 군대를 가게 된 것이다. 그는 그때 나이가 보통 다른 학생보다 3살이 많았었다. 군대 영장이 나왔는데 연기할 줄도 모르고 무조건 군대가야 되는 줄만 알고 가게 되었다. 임동호 목사는 군대를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 당시 순창인 그 고향이 취약지역이라 해서 방위병 근무를 1년하고 다시 장성농업고등학교 3학년으로 들어오게 된다.
4. 전기불이 꺼져도 설교는 계속하리.
1976년 6월에 군에 입대하고, 77년 7월에 제대하고 77년 9월에 3학년 2학기로 복학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또 한가지 주목할 사건은 출석하고 있는 '장성읍 교회'에는 당시 당회장 목사님, 전도사님, 장로님 네 분이 계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날 당회장 목사님이 그에게 주일밤 설교를 하라는 것이었다. 이제 고3학생에게, 그것도 장로님과 전도사님이 계시는데도. 또한 당회장 신경택 목사는 설교를 잘한다고 소문이 난 목사였다. 그런데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서 강단에 올라 정식으로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설교를 두시간 동안이나, 전기 불이 나가도 계속해서 설교한 것이다. 나중에 신경택 목사가 와서 " 그 정도 분량이면 나는 삼일을 하겠네"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5. 드디어 신학도가 되는가?
1978년 3월에 드디어 전라남도 광주에 있는 호남신학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확신에 찬 사명과 소명을 받고 선지동산에 올라왔지만 신학생과 신학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 모두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이 올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그의 눈에 비쳐지는 모습들은 말과 행실이 너무 다르게 행동했고, 술과 담배는 물론, 그 외에도 예상치도 못한 것들을 보고 잠시 방황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렇다. 그는 그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말과 행실이 거의 일치한다. 그렇기에 말에 대해 신중성을 기한다.
광주 거주지는 학교 기숙사였다. 그 시절 또한 어려워 어쩔 때는 사과 하나를 반으로 쪼개어 반은 아침에 반은 저녁에 먹기도 했다. 그의 이런 배고픔과 아픔과 고난의 광야길이 있었기에 나중에 자기처럼 어렵고 배고파하는 자에게 베풀고 손 내밀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배고픔 속에서도 공부와 기도와 말씀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배움에 대한 욕심이 남달리 많았던 그는 '배워야 남을 가르치고 인도할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했고 기도 또한 학교에서 가장 기도 많이 한다는 신학생으로까지 알려질 정도로 기도하는 자였다. 항상 그의 삶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는 삶이었다. 계속 그는 그 기도를 쉬지 않았다. 누구보다 더 주님께 사랑 받겠다는 거룩한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6. 아니 이곳도 교회입니까
신학교 1학년때 광주에 있는 총광교회에서 교사로만 봉사를 하다가 1978년 12월에 선배의 권유로 영광에 있는 덕산중앙교회로 사역을 나가게 왼다. 조금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그러나 지금까지 기도해 왔기에 열심히 해야겠다는 부푼 마음에 교회에 처음 갔는데 '아니 이곳도 교회입니까'라는 말이 나올 정도 였다. 교회 교인은 3명, 할아버지 한분, 그 할아버지의 며느리 박순식 집사, 또 다른 한사람 겨우 세사람 교회 왔다가 그냥 찬송 몇곡 부르고 돌아가는 게 고작이었다. 본래는 이 교회가 30명 정도까지 부흥을 했는데 교회가 문닫기 직전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 원인은 첫째는 그 지역이 원불교 세력이 강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정씨 집안의 촌이었다. 그리고 셋째로 가장 직접적 요인인데 그 교회 귀신들린 사람이 한 사람 들어왔는데 그 사람이 병을 못 고치고 죽어버리자 교인들이 시험에 들어 교 회에 나오지 않게 된 것이다. 그때는 교회 다니면 그저 복 받는다고 하니까 교회 나오 고 헌금을 하는데도 복을 받는다는 이유로 신앙생활을 하는 기복 신앙이 강했었다. 그 당시 사택은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식사는 집사님집에서 가끔 먹고 사례비는 일주일에 800원 주는 게 전부였다. 교회를 보고 실망 은 되었지만 그것도 잠시. 찬송가 355장 '복 음 들고 어디든지 가오리라' 라는 말씀에 위 로를 얻고 다시 일어선다. 새벽기도도 없었으 나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밤에도 기도회를 갖게 되었다. 이때 지금까지 했던 것 중에 가장 긴 15일간의 금식기도도 하게 된다. 심 방 또한 열심이었다. 믿다가 낙심된 자를 심 방하기 시작했다. 한번 가도 안 오고 두 번 가도 안나와도 나올 때까지 40∼50번까지도 가서 결국 교회로 나오게 된다. 그때도 심방 은 어려웠지만 지금은 더 어렵다. 그래도 그 때는 정이 있어 교회는 나오지 않아도 집에 찾아가면 식사나 그것도 안되면 냉수 한 그 릇이라도 대접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심방 받 는 가정이 시간을 정해서 오라 하면 오고 가 라 하면 가야 하는 그런 실정이다.
그 곳에서 육신의 고통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의약도 그리 발달되지 못한 터라 설사 된다고 해도 형편상 병원에는 못 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한참 유행이던 악성 피부병에 걸려 잠자기 전에도 30분 이상씩을 꼭 긁어야 잠을 이룰 수 있는 정도로 욥을 연상케 하는 고통도 당하게 된다. 여기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성도 중에 한 분이 전도사님 양복을 해주었는데 그 분이 주일날이면 주일 성수는 하지 않고 매주 낚시만 하러가니까 양복을 갖다 주면서 "주일도 지키지 못하면서 양복을 사주면 무슨 필요가 있나 이런 양복은 나는 안 입겠다" 라고 하니까 그가 다시 교회를 빠지지 않고 다니게 된 것이다. 그만큼 그는 철저히 신앙의 사람이었다.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 우선,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7. 나의 반쪽이 여기에 있을 줄이야
영광에서 2년 5개월 정도 있다가 1981.5월에 나오게 된다. 그래서 장성에 있는 장성옥천교회로 부임 받게 된다. 이때 성도 수는 30여명정도 시골 아주 아담한 그리고 평화스러운 교회였다. 이곳에서 현재의 사모인 그 교회성도 김수묘 집사의 딸인 고광옥 사모를 만나게 된다. 그 당시 노금례 집사가 정식으로 소개하고 얼마 있다가 약혼 사진을 찍었는데 그 당시 당회장인 사창교회 최성진 목사에게 보고했더니 정식으로 다시 해야 된다고 해서 최성진 목사인도로 사창교회에서 약혼 예배를 1981년 12월에 드리게 된다. 이 교회의 아름다웠던 모습들은 전도사의 사례비가 부족하면 재직들이 각출을 해서 지급해주는 사랑이 많은 교회였다. 그는 어디를 가나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았었다. 그건 그가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만들어 주셨던 것이다.
8. 서울땅을 밟아 보다니
1982년 2월에 호남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82년 3월에 서울 장로 신학대학원 목연과에 3학년으로 편입하게 된다. 서울 땅은 거의 가보지 못했던 터라 너무나 환경이 달랐다. 그러나 그는 환경에 좌우되지 않고 더 열심히 공부했기에 그곳에서도 장학생으로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수요일이면 서울에서 살고 있었던 고광옥 사모를 만나 서울의 여러 교회들을 탐방하면서 보고 배우고 또한 연애까지 일석다조의 효과를 누렸다. 그러다가 결혼을 약속하고 임동호 목사는 82년 9월에 보성군에 있는 문덕교회로 사역지를 옮긴다. 그 당시 같은 교회에서 사역자와 그 교회 자매가 만나 결혼하는 것을 인정해주지 못하는 아픔 때문에 또 여러 가지 여건 때문에 보성으로 향한다.
9. 평안과 사랑이 있는 곳
1982년 9월 보성 문덕 교회로 부임 받고, 부임한지 한달 후인 82년 10원 25일 결혼을 장성읍교회에서 양승억 목사의 주례로 식을 올린다.
그래서 보성문덕교회의 사택에서 신혼을
보내게 된다. 이들 부부는 이곳이 가장
평안하고 은혜스러운 교회였었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니까 이제는 더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교회를 이끌어 갔다.
그래서 교회는 점차 부흥했다. 교인들도
이들 부부에게 사랑을 베풀었고 주일날
만나면 다들 너무나 좋아했었다. 그렇게
1년 3개월이 지났는데 호남신학대학교를
같이 다녔던 박광순·노성식 전도사가
전라남도 강진에서 보성까지 찾아온 것이다.
이 두분이 와서 그들이 다니는 강진 반석
교회로 가자고 간청한 것이였다. 그러나
임동호 목사는 거부를 했다. 계속 간청을
하나 거절을 하자 그러면 헌신예배 한번
드리러 가자해서 간청에 못 이겨 며칠 후에
강진반석교회로 헌신예배를 드리러 간다. 그때는 김정규 목사가 떠나고 자리가 비어있는상태였다. 설교를 듣고 이 반석교회에서는 더욱 오라고 한 것이였다. 그러나 또 문덕 교회 교인들을 보면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달간 기도하고 강진으로 가기로 결심을 했다. 나중에 문덕교회 성도들이 그 사실을 알고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철야기도까지 하면서.. 그만큼 그들에게 이들 부부는 필요로 하는 사람 이였고, 이들 또한 그들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 했었다. 계속 그렇게 하다가 강진으로 가는 날짜보다 한 달이나 지연됐다. 결국 그곳에서 떠나 강진을 바라보며 이삿짐을 꾸렸다. (그때의 문덕교회는 현재 주암댐공사로 인해 수몰지역에 속해 버렸다.)
10. 꿈에 그리던 목사 안수
강진 반석교회는 1977년 6월 강흥준 전도사(현 광주 한결교회 담임목사)가 설립했고 6년후에 김정규 목사 부임 그리고 84년 1월에 임동호 목사가 부임한다. 당시의 주로 활동한 사람은 김주흥 집사, 김주철 집사 그 집안이 있었고 장로로는 침례교에서 안수를 받았다고 하는데 정확한 근거는 없고, 다시 피택되어 정식으로 장로가 된 김종수 장로 한사람이 있었다. 당시 반석교회는 장흥, 강진, 영암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에서는 가장 컸고, 목포노회에서도 15인승차량 구입을 가장 먼저 한 교회였다.
임동호 목사는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반석 어린이 선교원을 시작했고, 낙원 선교회와 찬양단 조직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므로 더 발전 부흥시켜 나갔다. 그 다음해인 1984년 2월 26일 드디어 꿈에 그리던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목사가 되어서도 그의 열정은 변함이 없었다. 어떤 성도보다 더 봉사하기, 누구보다 더 많이 헌금하기, 누구보다 더 기도하기, 섬기기, 그런 거룩한 욕심은 그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학문적으로도 남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실력을 갖추어 나갔고, 또한 취미 생활로도 서예를 했는데 굉장히 수준급으로 잘 썼었다.
이런 임동호 목사는 교회뿐 아니라 그 지역 교역자들에게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장흥, 강진, 영암 이 세군의 교역자 회의 회장을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지내게 된다. 그러나 그는 회장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낮은 자의 모습 속에 있었다.
군 연합 부활절 예배 때였다. 당시 임동호 목사는 회장이였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듯이 회장은 앞에 나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앉아있어야 하고 또 순서에 한마디 하는 게 일반적 상식이다. 그런데 그는 맨 뒤에 서서 의자를 정리하고, 장리를 정돈하는 섬김의 모습을 보였다. 보이려고 한 것도 아니요,그곳에서만이 아니라 항상 언제나 그의 삶이 섬김의 삶 자체였다.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자가 바로 그의 이런 모습 속에서 진정으로 존경의 마음이 싹틀 것이다.
'총회장 한다고 몇억씩 쓰는 교계의 현실을 보며, 진정 위신과 경력을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직분을 맡는 이런 모습이 한국교회의 지도자 상이 아닐까 하고 당시의 청년들은 말했다. 후에 그가 강진을 떠난다고 할 때 어떤 교역자들은 '정말 아까운 인재가 강진에서 떠나구나' 라고 까지 했다.
11. 사회와 이웃을 무시한 교회는 있을수 없다.
그는 교회의 문제뿐 아니라 사회적인 참여도 적극적이었다.
1980년대 5·18사건이 일어나고 전두환 정권이 드러서면서 민주화의 탈을 쓰고 실제로는 독재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때에 강진읍교회(대한기독교장로회) 김영진 장로(현 농수산물 위원장)를 중심으로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을 펴는 TV시청 거부를 위한 '독재정권 TV 시청거부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었다. 또한 그는 믿지 않은 동네 주의사람에게도 칭찬과 명성을 들었다. 그들도 그가 떠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임동호 목사가 안 떠난다면 교회를 나가려고 했는데" 라고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 집에 찾아오는 거지나 행인들에게도 항상 후히 대접을 했었다. 그러니 자동적으로 거지나 행인들, 또 정말 이상한 사람들까지 상습적으로 그의 집을 들렸다. 그때마다 임동호 목사는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어떤 사람은 며칠이고 묵어가기도 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와서 좀 도와달라는 소리에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준 적도 있었다. 고광옥 사모가 자식들 필요한 물건을 사줄 돈이니 나중에 돕자는 제의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일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정성껏 도와줬다. 그는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할줄아는 헌신자였다.
12. 두차례의 위기
교회는 계속 발전되고 부흥하는 단계였었다. 그런던중 김주철집사와 약간의 갈등이 생긴다. 김주철 집사도 사람자체로는 좋은 사람이였으나 임동호 목사에게 조금 반대하는 편에 서서 다른 성도들까지 조금 선동했었다. 그가 반대한 결정적인 이유는 임동호 목사가 부임하기 전부터 몇 년동안 주일학교 부장을 역임하고 있었는데 임동호 목사가 그래도 신학을 배우는 신학생이 낫겠다는 판단으로 박광순 신학생에게 부장을 맡겼다. 그때부터 보이지 않는 갈등을 보이더니 결국 그 교회를 떠나 광주로 이사가게 된 것이다. (현 광주 강흥준 목사가 시무하는 한결 교회 출석) 그후로 교회가 평안하고 안정을 되찾자 더 부흥이 되어 교회예배당이 부족할 정도로 부흥이 됐었다. 처음 부임할 때 150명에서 약 300명 정도로 부흥됐다. 농촌리에서 이렇게 성장한 것은 놀라운 성장이였다. 그러다 몇 년후에 김종수 장로와 갈등이 생기게 된다. 그전까지는 임동화 목사가 존경할 정도로 너무나 잘했던 김장로가 변하게 된 이유는 장로들 모임에 참석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듣고 목사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현재도 이런 문제가 많다. 건전한 모임을 벗어나 자신과 남까지 파멸시키는 이런 모임은 없어져야 한다. 그런 모임은 엄격히 말하면 악을 가르치는 모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임동호 목사를 견제하게 된 직접적 요인은 당시 목포노회 시찰장이였던 임동호목사는 노회 운동회를 마치고 상품으로 나온 비누를 모두에게 하나씩 나눠주게 했다. 모두 나누고도 몇 개가 남자 특별히 수고한 사람에게 더 주었는데 김 장로에게는 주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때부터 사사건건 트집잡고 따지고 걸고 넘어졌었다. 가장 임동호 목사편에 섰던 자가 가장 적대시하는 자로 돌변한 것이다. 세숫비누 한 개 때문에. 이런 일은 나중에도 똑같이 일어난다. 10년정도 지났을 때 교회를 옮겨야겠다는 강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임동호 목사 그는 언제나 성령의 인도대로 살아가는 자였다.
13. 학문의 길은 역시 끝이 없구나
1973년 2월에 서울 장로신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1988년 강진반석교회에서 시무하면서 광주에 있는 광주대 행정학과에 입학해서 10여년 이상 차이나는 젊은 사람들과 같이 공부를 하게 된다. 처음 입학할 때 배우고자 하는 열정은 강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세대차이가 나서 어떻게 적응할까 하는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과에 4명의 목사가 입학해 있어 그들과 함께 잘 적응해 나갔다. 4년이 지나 92년 2월 광주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92년 3월에 또 다시 전남대 행정 대학원에 입학한다. 당시 광주 대학원은 없었다. 그래서 전남대 대학원을 선택했으나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광주대를 졸업해서 전남대 대학원을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배우고자 하는 열정은 어떤 것으로도 막을수가 없었다. 그렇게 2년을 다니고 1년만 더 다니면 석사학위를 받게 되는데 그때 교회 분위기가 좋지 못했다. 그리고 수요일 예배와 모든 수업이 겹쳐져 수요예배를 빠지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배움도 중요하고 학위도 중요하지만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교회를, 주님이 맡기신 양들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석사학위를 눈앞에 두고 졸업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배움에 있어서도 최선을 다하는 자였다.
14. 이제 반석교회를 떠나야겠다.
1994년 반석교회에 온지 10여년. 이제 강진반석교회를 떠나야 한다는 강한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어느날 평소 신임을 받고 있던 순천 세광교회의 손세진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손목사의 제안은 '전라북도 남원에 있는 교회로 가 볼 생각이 없느냐?' '교회는 반석교회 정도이고 그 교회 목사와 서로 옮기자'라는 제안이었다. 임동호 목사는 쉽게 대답할 수 없어 기도해 보기로 했다. 몇일후 손세진 목사는 강진반석교회의 임동호 목사와 남원 영광교회의 안종례 목사를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장소는 광주직할시 운암동에 있는 다방에서 만나 비록 긴 얘기는 안 했지만 가기로 마음을 먹고 결정하게 되었다. 임동호 목사는 그 전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10여년 동안 있어서 변화도 되었는데 더 이상의 어떤 변화는 기대할 수 없는 것 같다. 또한 김종수 장로까지 저러니 내가 더 있어서는 나에게도, 교회에도, 그리고 김종수 장로에게 어느 누구에게도 유익이 안되겠구나. 이젠 내가 여길 떠나고 또다른 새로운 목회자가 와서 변화를 시켜야겠구나. 내가 떠나자' 이런 생각과 기도 끝에 결정을 하게 되었다. 그때 결정하기까지 임동호 목사는 남원 영광교회에 관해서 어떤 배경지식도 없었다. 안종례 목사가 그 교회에서 13년 동안 있었다고 들어서 자신과 똑 같은 마음으로 교회를 옮기는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드디어 1993년 12월에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에 있는 영광 교회로 부임을 받는다.
15. 변함없는 열정으로
영광교회로 와서 첫예배도 드리기 전날에
여관에서 김호곤 장로를 비롯한 십여명의
교인들이 이들 부부를 불렀다. 그리고
"우리는 이 교회에서 나간다."라고 말하는
것이였다. 그 이유는 다른 장로들이 안종례
목사를 쫓아냈으니 우리는 더 이상 비인격
적이고 비 신앙적인 장로들과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밖에도 다른
배경을 듣게된다. 그리고 새로 온 임동호
목사도 장로들이 데려왔기에 똑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이들의 얘기를
다 듣고 임동호 목사는 이들에게 "이번 주
첫예배 설교를 듣고나서 나가는 것을 결정
해도 늦지 않으니 예배는 같이 드립시다"
라고 권면한다. 이교회는 그 전에는 당회를
하다가 음료수를 얼굴에 뿌려버리고 서로
치고 때리는 육박전까지 일어나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그들과 헤어지고 돌아와 임동호
목사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 하나님께서 이곳으로 나를 인도하셨는가 의미를 찾으려 했다. 주일이 되어 그는 담대하게 말씀을 전했다. 지도자는 지배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장로 또한 협력자. 성도들을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말씀을 전했다. 그 결과 나가겠다는 그들이 그의 진실성과 가치관을 느끼고 같이 협력자로 봉사하겠다고 다짐했다. 처음부터 장로들의 반대와 비난의 어려움이 있었으나 임동호 목사는 변함없는 열정으로 어린이 선교원을 개설하고 새벽예배 강화와 말씀 증거를 더욱 힘써 내적 외적 부흥을 일으켜 나갔다.
16. 가장 가까운 곳에 적이?
교회는 계속 부흥해 나가 몇 년만에 170∼180명 정도에서 220∼230명 정도가 되었다. 장로들의 시기와 미움 속에서도 그의 확고한 의지와 신앙과 믿음을 그의 인덕을 알게 된 대부분의 성도는 그를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다. 그는 성도들의 의견을 중시하면서도 아무리 많은 사람이 찬성하고 옳다해도 하나님 편에서 잘못된 것이라면 과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의 비유를 맞추기 위해서도, 잘 보이기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모든 성도가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길 원했던 것이다. 김호곤 장로는 특별히 이런 임동호 목사가 좋았다. 그러나 그는 결국 나중에 임동호 목사를 쫓아내는 앞잡이가 된다. 그가 결정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에 선 이유는 이렇다.
1995년 11월 26일 영광교회에서 "남원시민 초청잔치"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다. 교회가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임동호 목사의 의견이었다. 그 잔치의 강사로 안기부장, 서울특별시장, 88올림픽위원장을 역임하고 국회위원으로 있던 박세직 의원을 모시기로 했다.
모두 이것에 대해 동의하고 특별히 김호곤 장로는 더 좋아했었다. 그래서 임동호 목사는 섭외를 하게 되어 모시기로 결정이 되었다.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오겠다는 것에 감사를 표하고 그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잔치 하루전날 김장로가 전화를 해 이 박세직 의원이 5·18 주동자라고 누구에게 들었다면서 막무가내 취소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동호 목사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뚜렷한 근거도 없고 막무가내 어디에서 듣고 취소하라는 소리에 임동호 목사는 취소할 수 없다는 것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홍보비며 또한 교회가 약속을 했는데 지키지 못하면 시민들 사이에 교회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김장로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는다면서 감정이 싹텄다. 물론 지금까지는 김장로가 누구보다 잘했었다. 그러나 자신의 부탁을 안 들어줬다는 이유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봉사와 헌신이 보상을 기대하며 해왔던 진정한 헌신이 아니였다는 것이다. 그후로 김장로는 성도들에게 임동호 목사에 대해 비방하고 미움을 더욱 키워갔다. 반석교회에서의 김종수 장로와 똑같이 된 것이다.
이 시대 목사의 권위와 신임도는 거의 바닥에서 맴돌았다. 물론 소수의 몇몇 목사들 때문에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신임도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믿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 비방하고 목사를 목사로써 인정해 주지 않는데서 온 것이었다. 가정에서 부모가 서로를 위해주고 높여주면 자녀 또한 부모에 대한 존경과 소중함을 알 수 있듯이 믿는 자가 먼저 목사에 대한 위치를 확고히 해 주고 그 권위를 세워준다면 사회로부터 자동적으로 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지도자 권위의 실추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신임도 까지 계속 하락하게 된다. 불신이 팽배해진 사회 속에 기독교는 어떠한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고 퇴보해 간다.
임동호 목사.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신앙의 자존심을 지킨자였다.
17. 이곳을 떠나면 또 어디로 가야 합니까?
1996년 9월 제직회에서 임동호 목사 재청빙 안건이 있었다. 그 회의에서 결정은 완전히 안 했지만 재 청빙하기로 하고, 나중에 당회원들이 암암리에 모여 재청빙거부하는 걸로 결정해 버린다. 그들의 부정과 비리를 싸워서 밝히기조차도 임동호 목사는 원치 않았다. 그래서 영광교회를 떠날 마음으로 있는데 그들 부부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왔다. 그것은 바로 개척이었다. 임동호 목사는 생각지도 않았던 그 분의 요구에 벗어나고 싶었고 어떻게 해서라도 피하고 싶었다. "지금 이나이에 개척이라니요, 예배당은 어떻게 하고요, 누가 나를 지지해 줍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계속 반문하고 질문하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침묵하신다. 고광옥 사모는 이미 반석교회에 나올 때부터 개척을 위해 기도해왔다는 고백을 그때서야 한다. 결국 그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개척한다고 하자 그를 지지하는 성도들이 그와 함께 하겠다고 나선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마음속에는 그를 지지하고 있어도 장로들과 어떤 끊지 못한 정이나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나타내지 못하고 표면적으로 자신들의 생각을 나타낸 사람은 70여명 정도. 솔직한 임동호 목사의 심정으로만 어찌 한 사람이라도 더 같이 나가고 싶지 않겠는가? 바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나가자고, 남으라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선택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임동호 목사의 반대측에서는 나갈려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임동호 목사를 헐뜯으면서 못나가게 막았다. 사람들에게 "목사가 교인들을 선동해서 나간다" 라고 떠들어댔다. 심지어 따라 나갈려는 교인들에게 협박까지 했다. "계속 그러면 우리 거래를 그만 둡시다." 그러나 임동호 목사는 그들에 대해 끝까지 침묵으로 개척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는 자신을 비방하는 소리에도 인내하며 소망을 져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18. 철길을 넘어 3천만원
나가기 몇 달 사이에 70여명중에서도 차마 결정하지 못하고 "나중에 교회 세우면 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결국 25명정도 개척에 동참하게 된다. 교회위치를 알아보던 때 영광교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장소가 나왔는데 그 곳을 결정하지도 않았는데 장로들이 찾아와서 조건을 내세웠다. 남원시내 오거리와 향교동을 나누는 철길이 있는데 그곳만 벗어나면 교회에서 3천만원을 지원해준다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그 개척지원금 3천만원으로 교회 위치를 알아보게 된다. 처음에 현대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얻을려다가 계약금이 맞지 않아 다시 찾다가 남원 시청 건너편에 위치한 형제빌딩 지하로 결정을 하게 된다. 계약금 천만원에 월세 65만원 관리비 15만원, 나머지는 수리하고 교회 비품과 사택을 얻는데 쓰게 되는데 그 돈으로는 턱없이 부족해서 고정희 전도사에게 빌려 사용하게 된다. 처음 들어간 그 지하실은 전자제품 창고였다. 들어가서 보니까 습기가 많아 곰팡이가 피었고 바닥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수리를 완성해서 드디어 1997년 3월 30일 첫예배를 드리게 된다.
19. 삶의 생명력을 주는 생명교회
첫 예배를 드리는 이들 부부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모든 것을 갖추지는 못해 엉성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이곳에서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며 주님의 복음을 증거할 생각이 그들을 감격시켰다.
첫 예배에 참석한 자들의 명단은 이두현, 이문순(이은혜), 조금성, 양선남, 박길영, 오지은, 유희동, 최대선, 김시종, 최두옥, 박지현, 최영숙, 태기출, 모승란, 이수로, 이경희, 오재식, 김서운, 서철 내외, 고정희 내외, 권태현, 허성열, 정광조, 이들 부부, 그리고 10여명정도의 학생 등등이다.
어떤 체계도 조직도 잡혀있지 않은 교회에 그것을 잡아나간다는 건 참으로 힘이 들었다. 그는 마음을 크게 가졌다. 높고 멀리 볼 수 있는 자였다. 일단 부교역자는 3명과 함께 했다. 심방전도사로 이문순(이은혜) 전도사를, 교회학교 아동부와 청년부를 고정희 전도사로, 그리고 중·고등부를 유경찬(유창용) 전도사가 맡게 되었다. 이것만해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처음 개척을 하면서 전도사를 3명이나 사역케 하는 것은 일반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전도회를 구성하고 임역원을 뽑고, 조금 후에 또 제직회 구성, 남전도회 구성, 회계집사들을 임명하고 교회의 전반적인 일들이 분담되기 시작되었다. 점차 세부화하고 조직화시키고 체계화시켜 나갔다. 교회는 점차 내적으로 외적으로 교회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초창기의 여 전도회 회장은 양선남집사, 남전도회 회장은 이두현 집사, 청년회 회장은 허성열 청년, 학생회 회장은 이주연 학생이었다. 임동호 목사는 체계를 어느정도 잡고 말씀 선포에 전념했다. 그를 통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성도의 마음을 울렸고 도전을 받아 열심을 내게 되었다. 그의 말씀은 어느 교회에서의 말씀보다 더 간절함이 있었고 열정이 있었다. 생명교회 그 공동체 떡을 같이 떼고 사랑과 복음을 전파하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그리고 삶의 생명력을 주는 그런 교회로 변모를 다져갔다.
20. 들어오기도 나가기도
생명교회에 와서는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했다. 그 자유는 임동호 목사가 줄수 있는 것은 아니였지만 그 만큼 규제와 형식을 탈피해 주님 안에서 참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사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무질서나 방종은 아니다. 교회의 질서를 지키면서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기 시작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대로 찬양하고, 자기의 표현방식대로 기도하고, 예배 또한 새로움과 변화 추구하여 예배 속에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게 참 기쁨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그의 메시지는 강한 편이었다. 조금 비약해서 말하자면 군대에서 훈련병을 키우는 식으로 주님의 군사를 만든다고 할까. 그래서 우리에게 도전을 던져다 주었다. 그의 생각은 대충대충 하고 그냥 비위나 맞추면서 융통성 있게 할 수도 있었지만 강력하게 하여 "한 영혼이라도 주님 품에 돌아올 수 있다면" 라는 생각으로 강한 메시지에 또한 그런 삶을 살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에 어긋나 적응하지 못한 성도가 몇몇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모태신앙때부터 편하게 그렇게 생활해왔는데 갑자기 그런 요구 아닌 요구를 하니까 심적 부담감을 느낀 것이다. 처음에는 시도를 해 보지만 지금까지의 삶이 그렇지 못해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해서 자신에게도 낙심하고 실망하며 결국 그의 부담감을 이기지 못해 생명교회에서 나가기도 했다. 그의 반면에 누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도전적이고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듣고 타 교회에서 그 근동으로 이사온 성도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부흥해 나갔다. 또한 마케팅 전략을 써서 교회홍보를 많이 했다. 순식간에 남원에 생명교회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21. 비젼을 갖자
1997년 5월 5일 생명교회 노회에 정식등록하고 창립조건이 모두 갖추어져 창립예배를 드리게 된다. 평소 사람들로부터 인덕이 있어 창립예배때는 많은 사람이 참석해 기도해주고 축복해 주었다. 설립예배는 1997년 12월 15일날 드림으로 교회질서를 위한 모든 법도 하나하나 밟아갔다.
모든 성도들은 신앙들이 자신도 놀랠 정도로 성숙되어갔다. 그리고 임동호 목사는 생명교회 2020년 비젼과, 생명교회 목적과 생명교인 5대 실천강령을 발표함으로 모두가 이루어 나가기를 권면하고 자신부터 실천해 나갔다.
⊙ 생명교회 목적
1.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2. 교제로 주안에서 한가족이 된다.
3. 훈련으로 성숙한 제자가 된다.
4. 봉사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한다.
5. 전도로 사람을 주님께 인도한다.
⊙ 생명교회 2020년 비젼
1. 기독학교 일개 설립
2. 개척교회 십개 설립
3. 약한교회 백개 지원
4. 성전본당 천평 건축
5. 남원시민 만명 구원
⊙ 생명교 교인 5대 실천 강령
1. 주님일을 우선하는 성도가 되라
2. 성령님께 순종하는 성도가 되라
3. 모든일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라
4. 사람들을 도와주는 성도가 되라
5. 전도하여 열매맺는 성도가 되라
그는 이런 비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어서는 이루어 질 수 없고 행동할 때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가르쳐주었다. 어떤 이들은 너무나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하면서 비웃었다. 사실 한가지만 봐도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당시 남원 시민의 수는 11만 정도 거기에 기독교인은 교회 125개 정도를 모두 합쳐도 만 명이 약간 넘을 정도였다. 남원은 특별히 춘향이 문화가 강해서 기독교가 활성화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남원시민 만명구원이라는 소리는 어쩌면 정말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확신과 믿음에 차 있었다. 그러기에 모든 성도들도 처음에는 의심을 갖다가 점차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비젼과 꿈을 하나하나 밟아나갔다.
임동호 목사 그는 꿈의 사람이었다.
22. 단물 뒤에 숨어있는 쓴 물
생명교회에서도 여전히 고난과 시험은 찾아왔다.
신진호라는 어떤 젊은 청년이 어느 날 교회를 찾아와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때 그는 그 건물 4층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순복음계통에서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지 않고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금방 적응을 했고, 옛날의 그의 열정을 회복한 듯 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에 문제를 일으켜갔다.
청년들 사이에 서로 이간질을 시키고 목사님에 대해서도 비방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항상 말과 행동이 달랐다. 그러다가 고정희 전도사까지 임동호 목사에 대한 좋지 않은 생각을 갖게 되고 비판적으로 나온다. 그때 생명교회에 성령사역을 활성화시키는 중이었는데 이에 못마땅한 고정희 전도사는 노골적으로 반대했고, 성도들이 모이는 공식적인 자리에서까지 당회장인 임동호 목사에게 혈기로 다가섰다. 나중에는 신진호 청년과 고정희 전도사와 합작이 되어 임목사와 생명교회에 대해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성도들로 하여금 실족케 만들었다. 그때에도 마찬가지로 임목사는 끝까지 인품과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다. 결국 고정희 전도사는 스스로 견디지 못해 생명교회를 1년도 못되어 사임하게 된다. 신진호 청년 역시 생명교회를 떠났다.
이 시험이 끝나자 또 다른 시험이 기다렸다. 장로교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구원파가 남원에도 있었는데 그들이 모두 통합해서 그곳 이름을 '남원생명교회'로 지칭한 것이다. 한참 좋은 홍보를 타고 있었는데 이 구원파 때문에 생명교회는 이단이라고 사람들 사이에서 그 교회는 가지 말라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임동호 목사 또한 이단 목사라고 유언비어가 돌았다. 이것은 생명교회 부흥뿐만이 아니라 복음전파에 엄청난 장애가 되었다. 또 큰 어려움은 98년도에 IMF가 터지고 경제적 어려움이 닥치게 된 것이다. 그 외에도 엄청난 시련과 역경이 찾아왔지만 아주 엎드려지지 않았던 것은 임동호 목사와 생명교회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다.
23. 협력자를 붙이리라
개척교회이다 보니 한때 부흥이 되다가 어느 정도 가니까 주춤할 때가 있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개척교회에 대한 선입관은 "개척교회는 부담스러워, 헌금 얘기만 하니까, 일만 시키니까" 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기를 꺼려했었다. 그러나 좋은 사람들도 많이 모였다. 특별히 97년 6월에 창립한지 3개월 후에 박인자 권사가 출석함으로 여전도회가 더욱 활동적이게 되었다. 그리고 고정희 전도사가 사임하고 소연숙 전도사가 부임해 오면서 아동부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젊은 청년들이 그의 모든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도왔었다. 그 밖에 더 박지현 집사와 오지은, 유희동, 최대선을 비롯한 대부분의 제직들이 그의 협력자가 되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었다.
24. 웃을 수 있었기에 그리 힘들지만은 않았다.
생명교회에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또한 웃기도 많이 했다.
언젠가 5시 새벽예배시간에 가장 먼저 일어난 임목사는 어느 때처럼 모두 정리를 다하고 예배당의 불을 켜지 않고 교회 방에 자고 있는 청년들과 교육 전도사를 깨웠다. 얼떨결에 시계도 안보고 예배당에 나와 의자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사람들이 한사람도 안 나오는 것이었다. 조금 후에 어두운 곳에서 웃으면서 "내가 시계를 잘못 봐서 한시간 더 일찍 깨웠네. 한 시간 더 자게나" 라고 하는 것이었다. 너무 웃겨 서로 웃다가 잠이 다 깼었다.
또 교회가 지하라서 비만 오면 물이 고였다. 심지어 잠자는 방까지 물이 고여 세숫대야로 퍼내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 그날도 비가 많이 와서 물이 고이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가 너무 많이 내려와 정화조 통이 넘쳐 교회방 천장으로 똥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급한 나머지 밥그릇 통을 건져내었지만 다른 도구들을 똥물로부터 구하지 못했다.그래서 그 도구들을 구하기 위해 그 방으로 들어가야 되는데 어떤 사람도 그 똥물을 맞고 그 방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임목사는 우산을 가져와 우산을 펴고 방에 들어가서 하는 소리가 "태어나서 방에서도 우산을 써보게 되네"라고 했고, 그 말 한마디에 똥물의 불쾌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모두가 얼굴에 환한 웃음을 띠고 한바탕 웃게 되었다.
그는 웃음으로 고난을 승화시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25. 임동호 목사. 그의 삶은?
임동호 목사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항상 섬김의 모습이었다. 당회장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빗자루를 들었고, 신발 정리와 하수구 청소등 남이 싫어하는 일까지 도맡아 했었다. 그는 '봉사하라'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부역자들과 신학생들에 대한 배려도 특별했다. 그의 사례비를 못 주는 한이 있어도 부교역자들 사례비는 안주면 안 된다고 고집했다. 사례비에서도 인색하지 않았다. 처음 1년은 상여금없이 20만원이었는데 1년후에 2배로 40만원에 상여금 200%가 되었다.(이것에 마음을 같이한 제직들도 대단한 교인이다.) 그는 잠도 하루에 거의 세 시간씩 정도밖에 자지 않았다. 그것도 강대상 바닥에서 얇은 홑이불 하나 덮고 잤다. 성전건축 이전까지 거의 매일 이렇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따뜻한 방에서 주무시라는 성도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그는 "따뜻한 방에서 자면 몸이 나른해지고 나태해지기 쉬우니 여기가 좋다." 면서 그 찬 바닥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는 또한 아주 작은 것까지도 세심하게 갖추었다. 악세사리나 심지어 넥타이까지도 설교에나 성도들에게 지장이 되는 것은 되도록 피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어려움속에서 보이지 않는 자신과의 싸움, 내적인 갈등도 많았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한번도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가끔 실수도 해서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므로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실수를 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시인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자였다.
"배움에 있어서는 어린이한테도 배워라"라고 까지 말하는 겸손할 줄도 아는 자였다. 교회의 통합을 부르짖고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는 그는 하나님의 충실한 청지기였다.
Ⅲ. 결론
우리는 임동호 목사의 삶과 그의 거쳐온 교회환경과 시대상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떤 한 인간을 우상시 하려고 한 것은 아니였다. 단지 그의 역사를 통해 역사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누구도 역사 앞에서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 또한 훗날 역사 앞에서 어떻게 쓰여질 것인가라는 생각에 엄숙하게 머리를 숙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의 삶을 통해 우리가 역사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자세와 무엇을 반성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다. 21세기에 어떤 절대적인 지도자 상은 아닐지라도 그의 섬김의 삶과 주님께 대한 마음을 읽으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특히 그 길을 준비하는 신학도들에게 커다란 지침들이 되길 바란다.
임동호 목사는 아직 살아있다. 그의 역사는 아직도 계속되어진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생명교회에서 어떻게 사역을 할 것인가?" 앞으로도 내가 아닌 다른 이가 그를 발견한다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도 있다. 임동호 목사가 이제 이 세상을 떠날 때 내가 살아있다면 난 또 다시 펜을 들고 이 글의 마무리를 짓고 물음표 대신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계속 그를 주목할 것이다. 고난 속에서도 그의 모습을, 실수 했을때의 모습과 후의 모습, 또한 주님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그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우리에게 희망을 던져주는 마침표가 될 것을. 혹 그의 일대기가 한국 교회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다 하더라도 그는 분명 한국교회사에 숨어있는 인재로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 참 고
● 글의 전개나 형식은 「호남 교회사 연구」제 2집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또 호남신학대학교 역사 신학교수인 차종순 교수의 지침이 컸음을 또한 밝힌다.
● 한달 여 동안 이 글을 준비하면서 정말 역사에 대한 재인식이 되었다. 그냥 생각없이 살았던 지난날을 후회도 해 보고 앞으로는 어떤 자세와 가치관을 갖고 살아야 겠다는 결단도 서게 되었다.
예전에 누군가가 부르짖는 "역사의식을 갖고 삽시다" 이말이 이제는 정말 가슴절이게 느낄수 있을 것 같다. 끝으로 이런 역사발굴에, 특히 호남 교회사 연구에 노력을 기하고 우리에게 역사의식을 고취시켜준 차종순 교수님께 감사의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복흥면 영주교회 부흥회 고등학교 웅변대회
호남신학대학에서 4.19기념예배 설교를 마치고
그당시 호신대 운동장
덕산중앙교회에서 학생과함께
보성 문덕교회에서 고광옥사모와 함께
사회운동을 할즘에 김대중 대통령 자택에서 그당시 강진 반석교회 본당
그당시 남원 영광교회 건물 남원시민 초청 큰잔치 (강사:박세직)
생명교회 창립예배 (97.5.5)
생명교회 설립예배 (97.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