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이순신
시 대 : 조선
생 년 : 1545년(인종 1)~1598년(선조 31)
자 : 여해(汝諧)
시 호 : 충무(忠武)
본 관 : 덕수
관련 전투 : 한산도(閑山島)해전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왜군을 대파하여 나라를 구한 명장.
아버지는 이정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로 변수림의 딸이다.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으며, 이후 발포수군만호·훈련원참군과 전라도의 조방장·선전관 등을 역임하고 1589년 정읍현감이 되었다. 이어 만포첨사·진도군수 등을 지내고,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듬해인 1592년 4월 14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으로부터 왜선 350여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받고 이순신은 5월 4일 85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7일 옥포 앞바다를 지날 무렵 정박중인 적선을 발견하고 이를 공격하여 왜선 26척과 많은 왜군을 궤멸시켰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으로 그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5월 29일 그는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여 일본 수군이 정박중인 사천으로 진출, 왜군을 바다로 유인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왜군을 섬멸하였으나 자신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가 뚫리는 부상을 입었다.
6월 2일에는 왜선이 당포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고 그곳으로 진격하여 거북선을 앞세우고 맹렬한 공격으로 대파하고 왜장 구루시마를 전사시켰다. 5일 아침 거제로 향하다 이억기의 함대를 만나 연합함대를 구성한 이순신은 왜선단이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를 듣고 바로 그곳으로 향하였다. 조선수군의 내습을 발견한 일본수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왔다. 아군의 전선들은 적선을 포위하고 먼저 거북선을 돌입시켜 맹공을 가하였다. 이 싸움에서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때 왜 수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병력을 증강시키고 견내량에 대규모 전선을 정박시키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이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견내량이 지형이 좁아 활동이 불편하자 그는 약간의 판옥선으로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을 쳐 일제히 총통을 발사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한산도대첩으로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이순신은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 공격을 결심하였다. 전라좌·우도의 전선이 좌수영을 떠나 9월 1일 오전 절영도에 이르러 부산포의 적정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약 500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해안에 정박해 있음을 알았다. 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그는 독전기를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하였다. 이에 우부장 정운 등이 선두에 서서 바다로 나오는 왜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여 피차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척을 격파하였다. 이 공으로 조정에서는 1593년 8월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다. 마침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하자 죽도에 진을 옮기고,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간의 강화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나 1597년 강화회담이 깨어지자, 본국으로 건너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때 이순신은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고 원균이 그 직을 대신하게 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가혹한 고문을 받아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로 들어가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한편,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그해 7월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에서 대패하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였다. 통제사에 재임용된 그는 8월 15일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조수의 역류하는 힘을 이용하여 왜선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은 그는 보화도(목포의 고하도)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로 영을 옮겼다.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은 퇴각하기 위하여 노량에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명의 수군과 함께 맹공을 가하여 왜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에 나서서 군사를 지휘하던 이순신도 적의 유탄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 통영의 충렬사, 순천의 충민사, 아산의 현충사 등에 제향하였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8358&mode=title&query=%C0%CC%BC%F8%BD%C5&dircode=0
2. 태조 이성계
시 대 : 조선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8352&mode=title&query=%C0%CC%BC%BA%B0%E8&dircode=0 3. 흥선 대원군
조선 후기의 왕족 정치가. 이름 이하응(李昰應). 자 시백(時伯). 호 석파(石坡). 시호 헌의(獻懿). 고종의 아버지. 1863년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져 어린 고종의 섭정이 되었다. 당파를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였고, 부패관리를 적발하여 파직시켰다. 경복궁(景福宮) 중건(重建)을 위해 원납전(願納錢)을 발행했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키고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가하는 등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의 악화와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2860&mode=title&query=%C8%EF%BC%B1+%B4%EB%BF%F8%B1%BA&dircode=0 4. 3-1 운동 후에 중앙여자고등학교 교장이 되는 황신덕은 3ㆍ1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28557&mode=content&query=%C0%AF%B0%FC%BC%F8&dircode=0 5. 남한산성
이 칭: 주장성(晝長城) 조선시대에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쪽의 방어기지. 서쪽의 청량산과 북쪽의 연주봉·동쪽의 망월봉·벌봉 등을 연결하여 쌓은 대규모의 석축산성이다. 출처: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16210&mode=title&query=%B3%B2%C7%D1%BB%EA%BC%BA&dircode=0 소감: 나는 조선사전만들기 프로젝트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특히 내가 모르던 것도 있었지만, 배웠던 것을 더 자세히 배울 수 있었습니다. 나도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져 우리나라에 대해 더 많이 알자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생몰년 : 1335년(충숙왕 복위 4)~1408년(태종 8)
자 : 중결(仲潔), 군진(君晋)
호 : 송헌(松軒)
본 관 : 전주
고려 말의 장군으로 조선을 건국한 왕. 재위 1392년~1398년.
등극 후의 이름은 단(旦). 이자춘(李子春)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최한기의 딸이다. 비는 신의왕후 한씨이고, 계비는 신덕왕후 강씨이다.
그의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로부터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아버지 이자춘도 원나라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로 있었으며,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내응하여 원나라의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하여 크게 활약함으로써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361년 11월 홍건적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이듬해 1월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선봉장이 되어 적의 장수를 2명이나 사살하여 수도 탈환 작전에 공을 세웠다.
1380년 8월에는 왜구가 500척의 대선단으로 금강 어귀의 진포에 침입하여 남쪽 지방을 약탈하여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로 삼아 왜구 토벌작전에 나서게 하였다. 이리하여 양군은 9월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의 정산봉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적들이 산 위의 험지에 자리잡고 버티자 이성계는 죽음을 각오하고 산 위로 올라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자 모든 군사가 총공격을 하여 일대 격전이 벌어졌고, 마침내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지휘하던 왜구를 크게 물리쳤다. 이 황산대첩으로 이후 왜구 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고, 그 뒤부터 왜구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후에도 이성계는 계속 무공을 세워 1388년 수문하시중이 되었으며, 이해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 문제로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정벌군을 거느리고 위화도까지 나아갔으나, 끝내 회군을 단행하여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정치적·군사적 실권자의 자리를 굳혔으며 마침내 1392년 7월 새 왕조의 태조로서 왕위에 올랐다.
태조는 만년에 불교에 정진하여 덕안전을 새로 지어 정사로 삼고 염불삼매의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별전에서 죽었다.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이고, 묘호는 태조이며, 능호는 건원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3ㆍ1운동은] 조선여자로 하여금 사회의 일원으로서 남자와 협력하여 활약하기를 개시한 첫 막이었으니, 이 첫 번 시험에서 여자는 병신도 아니었고 천치도 아니었고 남자와 다름없는 사람이었던 것을 자타가 인정하게 되었다.”
이처럼 3ㆍ1운동은 조선사회에서 천치로 취급받아오면서 자신의 가치를 의심해야 했던 여성들에게 ‘남자와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준 사건이었다. 거리를 활보하며 목놓아 “만세”를 외쳤던 경험은 여성들에게 해방감을 주었으며, 남성과 더불어 민족을 말하면서 남성의 ‘동지’가 된 듯한 뿌듯함을 느끼게 했던 것이다.
3ㆍ1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여성들은 어느 정도 사회활동이 가능했던 여학생, 기생, 기독교인 등이었다. 기숙사에서, 교실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있던 여학생들은 빠르게 정보를 공유하며 독립선언서의 전달과 배포, 태극기의 제작 및 배포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찍이 교내에서 "송죽결사대"라는 종교ㆍ친목 모임을 가지면서 독립자금을 보내고 있던 숭의여학교의 학생들을 비롯하여 정신, 숙명, 이화, 배화, 진명 등의 학생들이 “감동적으로” 참여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세운 관립학교인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의 학생들도 일본인 교사들의 감시를 넘어 대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울 시내 각급 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쉽사리 가라앉지 않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에 각 증등 과정 이상의 학교에 대해 임시휴교령을 내려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자신의 연고지에서 대중을 끌어모으고 태극기를 나눠주며 다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시위를 주도한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도 그러한 이들 중의 한 명이었다. 많은 지식인, 청년, 학생들이 3ㆍ1운동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고문에 시달려야 했는데, 여성들에게는 여기에 성적인 괴롭힘도 더해졌다. 정조를 강요하는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경찰의 성적 고문은 몹시 외롭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시 대: 삼국
소재지: 경기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일대
규 모: 지정면적 526,476㎡
지정사항: 사적 제57호
관련전투: 남한산성(南漢山城)전투(1) 남한산성(南漢山城)전투(2)
평면형태는 동서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불규칙한 장방형이다. 성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 지역이 많으나 성의 내부는 경사가 완만하고 넓은 구릉성 분지를 이루고 있다. 성 안에는 45개의 연못과 80여개의 샘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동쪽의 엄미리 방향으로 침식협곡이 발달하여 물자의 수송에도 수월해 천연 요새로서의 지리적인 조건을 갖고 있다. 또한 남한산성은 팔당지역에서 한강하류에 이르는 넓은 수계가 영향권에 들어와 내륙 수운을 장악할 수 있고 한강 이북의 아차산 일대와 불암산, 인왕산까지 조망이 가능하여 유적의 서쪽에 개설된 교통로인 좌로(서울~부산간 간선도로)를 통제하는 등 남쪽으로부터 한양 도성으로 가거나 북쪽으로부터 한강 이남지역으로 내려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남한산성은 672년(문무왕 12) 신라가 당의 침공에 대비하여 쌓은 주장성이라 한다. 주장성은 고려시대에 몽고의 침입시에도 사용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항쟁하였다는 기록도 보이고 있다. 현재의 남한산성에 대한 수축논의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계속되어져 왔지만 이괄의 난과 청의 군사적 위협이 전개되면서 1624년(인조 2)에 수축되어 인조 4년에 완성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1638년(인조 16) 대대적인 증·개축이 이루어졌고 1685년(숙종 11)에는 봉암성을 신축하였다. 1693년에는 병자호란 때 청군의 공격때 방어상의 취약점으로 들어난 동쪽지역에 한봉성을 신축하여 취약점을 보완하였다. 1753년(영조 11) 신남성 돈대가 구축되었으며, 1779년(정조 3) 남한산성에 대한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산성 내에 있던 많은 사찰과 건물들이 훼손되었다.
남한산성은 크게 원성·옹성·외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원성은 본성을 말하며 신라시대 축성된 주장성과 겹치는 부분으로 생각되어지며, 인조 2년에서 4년까지 수축되었다. 둘레는 7,545m이고 4개의 성문과 11개의 암문이 있다. 축성방법은 잘 치석된 장방형 석재를 바른층 막힌줄눈쌓기를 사용하였고, 안정감을 주기 위해 지대석 위 어느 정도까지는 5~10cm 가량 퇴물림쌓기를 하고 그 윗부분은 수직에 가깝게 쌓았다. 옹성은 5개로 연주봉 옹성만 원성을 쌓을 때 축조된 것이고 나머지 4개의 옹성은 병자호란 이후 화포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옹성의 총 둘레는 1,643m이다. 옹성의 축조방법은 원성과 대체로 같으나 원성에 비해 크기가 커진 정방형의 성돌을 사용한 차이가 확인되어 축조시기와 축조방법의 차이를 알 수 있는 구간이다. 외성은 동쪽에 봉암성과 한봉성이, 서쪽에는 신남성이 각각 자리한다. 봉암성에는 4개, 한봉성에는 1개의 암문이 설치되었으며 신남성에는 동·서에 논대가 1개씩 설치되어 있다. 봉암성은 새로 쌓은 성이라 하여 신성(新城) 또는 동쪽에 있다 하여 동성(東城)이라 불린다. 성벽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성돌을 외면만 판판하게 치석하여 끼워 맞추듯이 쌓았다. 한봉성은 원성 축조시 축성하지 않은 구간으로 병자호란 이후 봉암성에서 한봉을 이어 축성하였다. 성벽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성돌을 장방형 또는 정방형으로 치석하여 축성하였다. 신남성은 ‘남격대’ 또는 원성과 마주본다고 하여 ‘대봉’이라고도 불리나 현재 성벽은 확인되지 않고 2개의 돈대가 남아 있다. 돈대는 동서에 각각 1개씩 있으나 동돈대는 송신탑 건립시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다. 서돈대는 동돈대에서 서쪽으로 235m 거리에 위치하며 동돈대보다 시계가 좋다. 모두 1개의 홍예문을 갖고 있다. 이 외에 남한산성에는 5개의 치와 7개의 포루, 1개의 수구문, 28개의 수구가 설치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대에 축조되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되어질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남한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피난성으로서의 성격이 대두되었으나 내륙수운과 육상교통을 통제하기 위해 중요한 거점성으로서의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역사적으로 한 번도 함락되지않은 대외항전의 전적지로서, 최고 수준에 달한 우리나라 성곽 축조기술을 보여주는 중요한 호국유적이다.
|
첫댓글 경도군 일번으로 한 것을 칭찬합니다. 그런데 소감이 2줄이군요. 조사한 내용을 읽어 보고, 그 내용에서 느낀 소감을 적어 주기 바랍니다.
경도군, 설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설문에 응해주기 바랍니다. 참, 보기 좋게 편집하여 올린 점도 칭찬합니다. 역시 공경도 군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