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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회보 제작에서 소설가로
증언자 : 전용호
생년월일 : 1957년
출생지 : 전남 고흥군
성장지 : 광주시
당시직업 :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
현재직업 : 소설가
채록일시 : 1998년 6월 18일
어린시절
나는 중학교 과학선생님이 아버지이시고, 어머니 사이에 2남 6녀중에 4번째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중학교 교사를 하셨기 飁문에, 여기저기 전근을 다니신 관계로 고향은 고흥이었지만은 순천에서 출생하여 4살쯤 보성여중 관사로 전학을 와서 그곳에서 초등학교 5학년까지를 마쳤다.
초등학교 5학년까지 다니다가 광주계림국민학교로 전학을 와서 광주에서 계속 살았는데 보성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보성읍에는 남국민학교와 북국민학교로 초등학교가 2개 있었는데, 학군제가 되어 보성읍에 가게집이나 공무원 자녀는 북국민학교를 다녔고, 농사꾼의 자식은 남국민학교를 다녔다.
그때가 1960년대여서 가난했고 그래서 보성남국민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은 거의 99%가 검정고무신에 책보를 메고 다녔고, 4학년이 넘어 도시락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 오륙십프로, 즉 30∼40%가 결식을 할 정도로 빈궁하였다. 그래서 교실도 재정이 없어서 2층 이상이 없는 단층 건물이었다. 그래서 남국민학교를 다니는 학생은 그때 꿈이 2층 이상 교실에서 수업을 받는 것이 희망이었고, 꿈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시골 농민이 아니라 부친이 보성여중 교사였기 때문에 가방과 운동화를 신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다니는데 1학년때 신체도 왜소하고 성격도 무척 순해서 공부를 별로 안했지만 2학기때, 선생님이 날 반장으로 지목해 주셨다. 그것은 내가 공무원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그것이 나를 공부를 열심히 하게 만든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를 해 시험도 잘 봤고, 어머니도 학습을 지도해 주셨다. 그러다 4학년이 되었을 때 점심 결식아를 위해서 옥수수죽을 쒀서 한반에 7-8명씩 순번제로 점심대신 배급해 주었다. 난 도시락을 지니고 다녔지만 옥수수죽을 먹고 싶어, 내 도시락과 옥수수죽을 바꿔먹은 기억도 난다.
5학년 5월쯤에 광주로 이사왔다. 광주로 이사와서 계림국민학교에 전학을 갔는데 계림국민학교는 꿈에도 그리던 교실이 4층의 규모가 큰 건물이었다. 5학년이라 4층에 배치가 되었고, 보성 남국민학교에서는 전교 1등이었는데 계림국민학교로 학교가 바뀌자 반에서 18등 정도밖에 못했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밤12시,1시까지 공부를 했던 걸로 기억이 난다. 그래서 학년말에는 학급에서 내가 1등으로 졸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6학년이 되면서 입시가 없어졌으며,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추첨을 해서 가까운 충장중학교로 배치가 되었다.
충장중학교는 그 당시 입시제도로 있었던 서중과 동중이 없어지면서 만들어진 충장중, 무등중 중 한 학교였다. 충장중학교에서 생활을 했는데 충장중학교에서는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모범생이고 사고 없이 중3을 지냈었던 것 같다. 중3때 고등학교입시가 있었기 때문에 독서실을 다니며 중3년 성적을 유지한채 그때 당시 광주에서 제일 명문이라고 하는 제일고등학교에 합격을 할 수 있었다. 그 때 당시 나는 중학교 수업이 끝나면 복습을 하고 저녁 먹고 집에서 놀거나 산책을 하다가 집에 와서 예습을 하고 잤다. 그리고 다시 아침에 학교를 가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중학교 3년을 지냈기 때문에, 친한 친구도 별로 없었고, 특별히 운동도 안했고 단지 가까운 상고 체육관의 탁구장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탁구를 쳤던 기억밖에 없다.
고교시절, 영일과의 만남
그래서 고등학교 진학을 했는데 시험을 보고 나서 약2개월쯤 공백이 있었는데, 그 기간동안 나도 명문고를 합격해서 긴장이 풀리고 부모님도 나를 많이 놓아주셨기 때문에 처음으로 친구와 많이 놀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그 친구들과 축구도 하고 탁구도 치고 제과점도 다니고 호기심으로 담배도 피워 보면서 그동안 내가 느끼지 못했던 자유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명문고 진학을 했으나 공부를 별로 안하고 그 자유감에 맛을 부쳐 동네친구들과 계속 놀면서 고2쯤을 지냈다. 그 때 고등학교 친구중 내가 이런 길을 살아오게 만든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1학년때 친구였던 신영일이라는 친구였다. 1학년때 나는 내가 키가 적어 7번이었는데 영일이는 나보다 더 적어 5번이었다. 그런데 1학년때는 별로 친하지 않았다. 나는 내 동네 친구들이 있었고 또 내 나름대로 나도 적었지만 키 작은 애들은 스케일도 적다라는 느낌이 있어서 그런 친구와는 잘 안 어울리고 키가 큰 애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2학년이 되었는데 1학년 중간에 영일이의 능력을 본 사건이 일어났다. 그 사건은 쉬는 시간에 이유없이 갑자기 떨어져 화분이 하나 깨진 사건이 일어났다. 그 뒤 선생님이 누가 갰는지 말을 하라고 했으나, 범인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생님이 몹시 화를 내며 말을 안하면 전체를 혼내겠다며 눈을 감고 범인은 손을 들으라 했다. 나는 우연히 실눈을 뜨고 있다가 화분 정 반대쪽에 있는 영일이가 손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상하게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러다가 수업시간이 끝났다. 그 때 내가 처음으로 '그래도 저아이가 무척 착하구나'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 2학년이 되어서 반배치를 하는데 영일이가 나와 같은 반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특별히 친한 애가 우리반에 배정이 안 되어서 영일이가 나와 같이 서기로 해서 나는 7번이었는데, 그때 영일이는 키가 더 커서 약15번쯤 했어야 陖는데 무릎을 약간 굽혀 8번이 되어서 나란히 번호를 매겨서 짝꿍이 陖다. 영일이와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그런데 영일이가 순해서 뒤에 아이들에게 좀 괴롭힘을 당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영일이를 보호해 주었다.
그런데 2학년 중순때 영일이가 예쁜 손수건을 가지고 와서 수업은 전혀 안듣고, 명상에 잠겨있었다. 나는 왜 그러는지 몰라서 영일이가 없을 때 영일이 가방을 뒤져 보았더니 수첩이 나왔다. 거기에 어떤 여자의 전화번호가 있어서 영일이에게 물어보았더니 전전날 쯤에 여자와 사귀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영일이가 1학년때 엄청나게 순했는데 2학년,3학년이 되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중에 아주 중요한 사건 같아서 얘기를 한다.
그러다가 2학년 끝날 때쯤에는 놀기도 좋아하고 명량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려 노는 영일이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기타도 배우고 유행가도 배우고 자기표현도 제법 활달하게 하고 그러다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완전히 노는 것이 공부하는 것보다 더 많이 차지하는 수준까지 갔다. 그래서 나는 가끔 영일이가 어떤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그렇게 까지 되었는가 하면서 영일이집에 놀러 가보면 영일이가 산수5거리에 살았는데 산수5거리에 살던 상고출신 등 중류급이나 하류급, 공부 못해서 고등학교를 못가는 애들과 어울리며 근처여학생들과 노는 것 등을 보고는 '아 영일이가 이런 애들 때문에 많이 놀게 되었구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는데 난 그동안 못한 공부를 열심히 해서 따라잡으려 했지만 내가 따라 잡기에는 너무 멀어져 있었다. 그래도 3학년때 더욱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하는 편이었고, 영일이도 공부에 힘쓰는 것 같았다. 그러다 3학년이 지나고 둘다 전대에 시험을 봤는데 그동안 둘다 워낙 공부를 안해서 낙방을 하여 재수를 했다. 난 그 뒤에 종합반 학원에 다녔고, 영일이는 학원을 안 다녔다. 그런데 영일이가 약2달 쯤 집에서 쉬는 것 같더니 그러다 나중에 나와 다른 종합반을 다녀 공부를 했다. 그래서 학원도 같이 다니게 되었다.
그후 다시 시험을 봤는데 영일이는 교사가 되겠다고 사범대를 해서 합격을 했고, 나는 또 떨어져서 서울에 올라 갔다가 그래서 나는 삼수하게 되었는데 난 삼수했을 때에는 학원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면서 영일이 집에 가 보면은 영일이는 대학생이 되어서 그런지 아침 오전 늦게까지 책을 보는데 그 책을 보면은 문학책이 아니었고, 전환시대의 논리 ,역사 등 딱딱한 책을 보았었다.
그러다 1년이 지나 예비고사를 보았는데 예비고사 성적이 너무 좋지 않아서, 그 뒤 또 전대상대 원서를 냈다가 합격을 했다. 그래서 보통 대학생보다 2년 늦게 전대 상대를 들어갔는데 내가 다니던 일고는 성적이 좋은 애들은 서울로 많이 올라갔고, 다른 애들은 거의 전대를 다니고 있어서, 상대에도 후배들이 2학년, 동급생이 3학년인 상태의 동급생들이 많이 있었다.
대학시절
그래서 삼수로 들어가 1학년이지만 후배, 동급생들이 많이 있어서 다른 1학년들에게 형이라는 말을 들으며 1학년 시절을 지냈다. 그러다 영일이가 어떤 써클로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 써클은 영일이 말로는 독서 써클 이라고 했다. 이름도 독서잔디였는데 나도 원래독서를 좋아했기 때문에 기꺼이 들어갔다.
그런데 독서잔디는 신입생도 많이 있었고, 1주일간 책을 돌려가면서 발표를 하던 건전한 써클이었는데 그때 당시 처음 주제로 낸 책들이 '대학이란 무엇인가?'등의 내용의 책들이 많았다. 그런데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독후감을 토론할 때 대부분의 애들이 우리 클럽은 다른 학생들은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굉장히 충격적이다고 발표를 했으나, 나는 별로 와닫지가 않아 왜 그러는가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고등학교때까지 반공교육을 받으면서도 방공교육 자체에 대해서 크게 신뢰를 하지 않았던 것이어서 별로 충격을 안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비교적 착실하게 중고등학교를 마쳤던 보통학생들에게는 그런 내용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던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
탈춤반에 들어가서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독서잔디클럽활동을 약 3개월쯤 했는데, 4월 중순쯤에 나는 우연히 전대 학교 신문을 보았는데 신문에 새로운 써클등록에 관한 안내가 하나 눈에 띄었는데 신입생 공모는 거의 다 학기초에 하는데 그 써클은 4월달에 모집을 해서 특별히 눈에 띄었던 것 같다. 그 때 그 써클의 이름은 민속문화연구회였는데, 말하자면 탈춤을 배우고, 민속놀이를 배우던 써클이었는데 두번이나 대학에 떨어지고 나이가 차서 하는 학교생활에 흥미를 못느끼고 있었던 나에게 탈춤이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활력적인 힘 때문에 '이 써클이 내가 찾는 써클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꼭 가보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 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참석을 했더니 마침 그 써클을 주도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고등학교 동창이어서 입회원서를 내고 오리엔테이션을 마치자 그 뒤 가능하면 시간을 맞추어 참석을 할 정도로 탈춤활동을 했다. 그런데 그 때까지는 내가 기대했던 활력적인 면을 찾아내기는 좀 힘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독서써클과 탈춤써클을 겸하면서 신학기초를 보내다가 4월인가 5월인가 내가 학생운동에 직접적으로 개입이 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은 박정희 군사 정권이 78년이었으니 그것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었는데 우리들은 그런 역사적인 흐름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것을 잘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점심시간에 독서잔디회원들은 점심때마다 박물관 뒤의 잔디에 앉아 가지고 온 점심을 나눠 먹었는데 그 때 어떤 선배들이 와서 명함크기만한 종이에 강의날짜와 강의시간, 강사가 적혀진 쪽지를 나누어 주면서 시간 있으면 한 번 가보라고 우리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하나를 읽어보니까 김동길 교수가 한국의 민주정치에 관한 주제로 시내 YWCA에서 저녁 7시쯤에 강의를 한다고 알리는 쪽지가 있었다. 그래서 한번 가보려고 작정을 했고 그날 강연회장인 YWCA로 갔다. 가는데 그 땐 별다른 느낌이 없었지만은 가는 도중에 YWCA입구 양쪽에 양복차림에 사람들이 줄지어서 있었던 옆으로 보면서 이상한 느낌을 받긴 하였다. 하지만 그 이상의 느낌은 없었다. 그리고 강연회장에 들어갔다.
강연회장에 앉아서 김동길 교수의 조금 열정적인 목소리의 강연을 듣고 끝나서 집으로 오려고 하는데 머리에 흰색수건을 묶은 청년이 나와서 북동성당에서 함평카톨릭 농민들이 농협에서 고구마를 수매했다가 썩어버려 수매대금을 못 받은 농민들이 와서 단식 농성을 하니까 가서 격려의 인사치사라도 하자고 그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했고 그 강연에 참여했던 우리들은 그렇게 하기로 동의를 하고 줄을 이어서 북동성당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인도를 따라서 서너명씩 자연스럽게 같이 갔는데 나는 중간쯤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앞에서 경찰 막는다고 그래서 인도로 가던 길이 반듯하게 가지 못하고 대인동 쪽에서 대한극장 사거리 쪽으로 대열이 틀어졌다. 나는 그냥 중간에 있었기 때문에 묵묵히 따라 갔고, 대한극장 사거리 쪽으로 가니까 더 이상 나가지를 못했다. 그랬더니 앞에서 전투경찰이 방패로 진행하는 길을 막고 서있어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런데 내가 대열의 중간쯤에 서 있었는데 전투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제일 앞쪽부터가 차근차근 해산이 되면서 그 앞줄이 자연스럽게 해산이 되면서 뒷줄에 가서 붙었고 또 앞줄이 해산되어 뒤로 가서 붙으면서, 나중에 중간에 있던 우리 줄이 어느새 제일 앞줄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전투경찰과 제일 앞에서 마주 보면서 대치하는 자리에 서 있다가 그러고 있을 때쯤 우리 대열의 중간쯤인 저 뒤쪽에서 이렇게 대치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저기 충장로에 가서 항의시위를 하자 라는 이야기가 나즈막하게 입에서 입을 통해 내게 전달이 되었다. 그래서 나도 그런 것이 좋겠다고 묵시적으로 동의를 하고 그쪽에서 갑자기 대열의 중간에서부터 충장로쪽으로 뛰어나가면서 따라오라고 그래서 그뒤를 무작정 따라 갔다.
가는 도중에 누군가 그 대열 중간에서 구호를 선창을 하면서 따라 해라고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따라서 했는데 그때 구호가 아마도 유신반대 뭐 그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조흥은행 충장로 4거리에서 다시 좌회전해서 다시 충장로 파출소 쪽으로 구호를 외치고 가다가 충파쪽에서 나오는 전투경찰들과 충돌이 나면서 대열은 거기서 자연스럽게 찢어져 나눠져 버렸다.
그래서 나는 공원쪽 가는 대열에 합류해가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약국 앞에 잠시 서성거리다가 손님처럼 들어가 약국에 숨어 있었는데 경찰들이 내 앞을 지나서 휙하니 지나서 대열쪽으로 달려갔다.
그래서 나는 거기 좀 있다가 집에 들어오려고 하는데 조금 있다가 보니까 고등학교 1년 후배이자 상대 같이 다니는 김연중이라는 후배가 전투경찰 4명들에게 사지를 잡혀서 끌려왔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서 그건 너무하지 않냐? 했더니 그 경찰들이 나까지 잡아서 충파에 덜컥 집어 넣어버렸다. 충파에서 나는 연중이와 함께 광주 경찰서로 밤중에 이동을 했고 광주경찰서에서 다시 유치장에 갇혀서 하루밤을 잦다. 유치장에서는 그날밤 20∼30명의 학생과 또 여자 유치장에 몇 명이 잡혀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여자 유치장에서 어떤 여학생이 높은 소리로 찬송가를 계속 불러대서 잠을 자려고 하는데 찬송가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을 깊은 잠을 못들고 자다 깨다 그랬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아침이 되자 우리는 하나씩 불려가 인적사항 조사를 받고 우리과 지도 교수인 박동운교수가 우리를 찾으려 왔다고 해서 우리는 교수가 가져온 차 뒷좌석에 타고 학교까지 와서 거기에서 풀려났다. 그런데 내가 눈치도 없게 차안에서 교수들은 우리를 구해주는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안심하고 교수가 도대체 너희들은 어떤 불순분자들에게 속아서 데모에 가담을 했냐는 식으로 물어서 그 말이 좀 화가 나서 좀 격한 음성으로 아니 우리 스스로 자발적으로 했다고 항의하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그러자 박동운교수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래서 그 뒤로는 침묵을 하고 학교까지 차를 타고 왔는데 아마 그것이 좀 걸렸던 것 같았다.
그 뒤부터 나는 말하자면 주목해야하는 요시찰인물이 되었다. 교수들이 학생지도하는 그런데도 아마 그런데도 기록이 된 것 같고 그런 내용이 그때 당시 우리를 감시했던 서부경찰서 정보과에도 그렇게 올랐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뒤부터 학교에서 떤 사건이 나거나 무슨 집회가 열릴만한 때가 되면은 무슨 정보과 형사들이 와서 나를 괴롭혔고 또 학생과 교수들도 나에게 주의를 계속 주었다.
그렇게 대학교 1학년 5월 6월 쯤 지나가다가 6월 하순에 우리 상대 1학년들이 10일간의 병영집체훈련이 31사단으로 집단으로 병영집체훈련을 들어 갔다. 그런데 대개 병영집체 훈련 10일간 훈련하다 보면 한 7일쯤 되면 교수들이 뭐 음료수 같은 것을 사가지고 와서 위로겸 찾아온다는데 그래서 일반 학생들은 7일쯤 되는 날 교수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넘어가 버리고 마지막 날이 되서야 교수 한두사람이 와서 고생했다며 우리를 위로하고는 바로 수업이 끝나서 이제 기말시험만 남았다고 우리를 해산시켜 버렸다.
그래서 해산이 되서 집에 와서 보니까 그 사이에 6월 29일날 전남대 교수들 송기숙 교수를 비롯한 교수들이 6월 27일날 민주교육지표선언서란 것을 낭독을 하고 연행이 되어버렸고 그에 항의를 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6월 29일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나는 그때 병영집체훈련에 참가를 하고 있어서 그 시위를 목격하지는 못했다. 근데 그 시위에 관련이 되어서 내 친구 영일이도 정학을 맞았고 우리 민속문화연구회 탈춤반도 탈춤반 그때 회장이었던 김선출 또 고등학교 동창 친구 김윤기 둘다 주동으로 수배가 되어서 학교를 떠나서 어디론가 도피를 해버렸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좀 내가 그 현장에 있지 못했다고 하는 애석함, 말하자면 좀 볼만한 거리를 못 봤다는 그러한 호기심, 그런 큰 볼 것을 놓쳤다는 참 애석했다는 생각과 함께 혹시 또 나도 또 그때 현장에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두가지 생각이 겹쳐 좀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여름방학이 가을 2학기에 접어들었고 나는 그때 당시에 일말의 궁금함은 있었는데 우리 탈춤반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함은 있었는데, 독서 잔디나 뭐 이런 것들 때문에 바빠서 관심을 갖고 있지 못하던 어느 날 정학이 풀려서 복학을 한 영일이하고 몇 명의 학생들이 탈춤반회장 부회장이 수배가 되면서 학교에서 직권해체를 시켰기 때문에 부당하다고 하는 그런 내용의 말하자면 항의문과 서명용지를 우리에게 나눠주면서 우리에게 서명을 하라고 우리한테 그런 서명용지를 나눠주었다.
내가 탈춤반 회원인데도 나는 그런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런 용지를 배포하고 그런 것을 보고 좀 가슴 속으로 낯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관심을 좀 가져야 되는데 이런 자기반성을 하고 서명을 해주었다. 그러다가 며칠 있는데 김연중이라고 전에 함께 연행되었던 연중이도 그때 탈춤반 오리엔테이션에 들어와 같이 활동했던 후배였는데 광주경찰서도 같이 끌려갔었고 그랬던 연중이가 연락을 해서 탈춤반 재건을 위해서 같이 모여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연중이한테 한번 모여보자는 연락을 받고 그 모임에 갔더니 그때 오리엔테이션에 왔던 당시 1학년 학생들이 한 서너명 모여 있었다.
그래서 다시 같이 재건하기로 협의를 하고 몇사람 더 찾아보자, 그 때 오리엔테이션에 나왔던 사람들을 수소문해 가지고 파악을 해봤더니 한 7명정도 되서 다시 연락을 해서 정기적으로 만나서 자체적으로 공부도 좀 하고 그랬다 아마 그때 모였던 학생들이 사대 하경량, 현수정, 상대 김연중, 그리고 나, 공대 김석천이라고 있었고 또 문리대 신경화 그리고 또 한 두 사람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한 7명쯤 되었던 것 같다. 우리는 모여서 공부도 하고 그 이후로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민속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공부도 하면서 탈춤은 지도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때 농대 다녔던 선배였던 윤만식 선배를 만나서 윤만식선배한테 기본적인 춤동작 같은 것도 1-2주일에 한번정도씩 배우고 가을 후학기를 보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우리들이 탈춤반 재건하는 그런 모임으로 그래도 장구도 좀 배우고 기본 봉산탈춤의기본 적인 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그런 춤도 연습하고 이런 것이 알려지고 그러면서 가을쯤에 들불야학이라고 하는 야학에서 체육대회가 있는데 와서 공연 좀 해달라고 하는 그런 요청이 있었다.
들불야학
나는 연중이와 함께 일단 그 들불야학에서 요구하는 공연이 어떤 정도인가를 파악을 할려고 광천동에 있는 들불야학으로 찾아가보니까 들불야학은 광천동천주교회에 교리실을 빌려갖고 교실을 쓰로 있었는데 성당은 튼튼한 벽돌건물로 반듯하게 지어있었는데 비해서 교리실은 허스름한 공간이었다. 거기에서 연중이와 함께 책상도 나무판자나 나무각목들을 이리저리 못을 박아서 만든 그런 좀 허수룩한 교실과 책상이 있는 그런 자리에서 교사들인 어떤 사람들 당시 영일이도 그때 그 교사였는데 교사들을 만나서 어떤 공연을 요구하는가를 이야기 하는 과정에서 도저히 우리들의 능력으로 할 수가 없겠다 그것 때문에 공연 요청은 고맙지만 우리가 못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공연 안해도 좋으니까 와서 장단만이라도 쳐주라고 해서 그러면은 그 정도는 같이 할 수 있겠다고 협의를 하고 학교로 들어왔다.
우리들이 좀 미약하나마 탈춤 탈하고 뭐 의상 그런 것을 챙겨가지고 들불야학 학생들 체육대회때 같이 참석을 했다. 말하자면 옆에서 장단도 맞춰주고 같이 즐겼던 것같다. 그러다가 겨울 후학기가 끝나고 겨울방학이 되자 우리는 봉산탈춤은 일부라도 춤을 알고 있으니까 그 정도면 될 것같아서 경상도인 경상남도 고성에 오광대라고 하는 그 탈춤을 배우기로 결저을 하고 그 전수관에 미리 협의를 해서 날짜를 12월말로 잡아서 미리 예정을 잡아놓고 우리 숫자 가지고는 전수비용을 다 충당하기가 힘들어서 연극반에도 연락을 해서 연극반에서도 한 대여섯 사람 참여하기로 하고 조대 탈춤반에도 연락을 해서 서너사람이 참여를 하기로 해서 한 15명정도가 고성 오광대 전수를 가기로 날짜를 정해서 그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들불야학에서 나하고 연중이한테 야학교사 제의가 들어왔다. 그때 교사는 강학이라고 불렸었는데 강학제의가 들어와서 탈춤반 활동 때문에 힘들다고 사양을 했더니 그러면 탈춤반 활동하고 겹쳐도 상관이 없으니 교사를 해달라고 제의가 좀 강하게 들어와 거절을 못하고 탈춤반활동을 계속하는 조건으로 들불야학 강학으로 참여를 했다.
들불야학 강학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대기강학이라고 하는 대기강학 수련과정이 있었는데 그 수련과정은 말하자면 학습세미나를 일정한 커리큘럼에 따른 학습세미나와 수업을 대비하는 교육학에 관한 초보적인 학습을 하는 그런 수준이었다. 그래서 대기강학으로 참여를 해서 저녁마다 들불야학을 가서 수업하는 것 참관도 하고 우리 강학들끼리 모여 서학습세미나도 하고 그렇게 하면서 낮에는 탈춤반 재건을 위한 학습과 전수준비를 하면서 겨울방학을 시작을 했다.
그때 들불야학 대기강학 과정동안에 같이 학습했던 그 교재들은 아마 박현채 선생의 한국 경제에 관한 그런 책이라든지 혹은 노동운동에 관한 책 또 한국의 역사에 관한 책 그런 책들 이었던 것 같고 교육학에 대한 책으로는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라고 하는 그런 번역서라든지, 또 민중교육론 그런 종류의 책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대기강학 과정을 거쳐 나는 한문을 맡았다.
정식 강학은 1월달에 맡기로 한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래가지고 12월 하순경에 탈춤반 연수 일정이었던 고성5광대로 전수를 갔고 그래서 거기에서 전수를 마치고 와보니까 그 사이에 들불야학 강학이었던 박기순이라고 하는 과로에 연탄가스로 이미 죽어 있었고 이미 장례가 다 끝난 이후였다. 그래서 들불야학은 분위기가 상당히 침울해 있었고 그리고 나서 탈춤반 활동과 병행해서 들불야학 한문과목을 맡아서 수업을 하기 시작을 했다.
그 사이에 나는 대기강학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잘 못 들었는데, 참 그 이야기 하기 전 가을쯤에 들불야학 공연문제 때문에 왔을 때 만났던 사람중에 윤상원이라는 머리가 곱슬곱슬하고 나이가 걸출했던 선배가 기억이 나는데 그 윤상원선배가 나중에 함께 나랑 함께 같이 운명을 함께 했던 그런 선배이기도 했는데 윤상원선배가 거기 손님격으로 와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나고 그리고 또 들불야학이 운영되고 있었던 광천동 천주교회 옆에 광천동 시민아파트라고 하는 3층짜리 세동의 빈민아파트가 있었는데 그 빈민아파트에서 지역개발운동을 한다고 하는 김영철씨가 또 오셔가지고 자기 아파트 개발계획이나 혹은 현재 아파트의 주민들의 생활실태에 대해서 설명을 했던 그런 것도 빼먹어선 안될 그런 것으로 기억이 난다.
1월달부터 강학생활을 했는데 그때 김영철형도 사회생활이라는 과목을 맡아서 했고 윤상원선배도 역사와 노동법 과목을 맡아서 강학으로서 수업을 같이 했다. 그리고 인제 생각이 나는데 대기강학 세미나를 하는 과정에서 처음에 교섭이 되어서 참여하기로 했던 문리대 출신의 그런 교사들이 몇 명 있었는데 대기강학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두명이 시간약속에 빵꾸를 내서 그때 당시에 우리 대기강학 세미나를 지도했던 윤상원 상원이 형이 크게 화를 내면서 왜 분명히 참석을 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안왔느냐고, 그런 얘들은 이런 노동자 민중을 가르칠 자격이 없다그래서 그얘집에 다시 한번 전화를 해보고 없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분명히 있을텐데 없다고 그러는 것이다 가서 잡아가지고 오자 그래서 가서 끌고 와가지고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 최종 확답을 듣기로 하고 그래서 거기에서 막 멱살을 잡고 싸우면서 또 술을 마시면서 또 막 함께 울고 그랬던 그런 기억도 난다.
그렇게 해서 1월달 들불야학 수업이 시작이 되었는데 그 사이에 들불야학 강학을 했던 몇 사람들이 따로 빠져 나가면서 광천동 시민아파트를 빌려서, 시민아파트에 있는 방 하나를 빌려가지고 또 다른 학교에 한 3-4학년급 들을 여러명 모아가지고 광천동 노동자 실태조사팀을 만들어서 그때 노동자 실태조사를 했던 기억이 나다. 그때 실태조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보니까 법대 박관현, 사회대 안진 또 인문대에 이세천, 사대에 박병섭, 김정희, 법대에 박용안 그런 학생들이 모여가지고 실태조사 활동을 했는데, 내느낌으로는 우리 들불야학 강학들이 대부분 1학년이나 2학년 이었던 것에 반해서 실태조사 팀들은 군대를 갔다 와서 뭐 1학년 다니거나 혹은 3학년 4학년, 장석웅 선배같은 졸업을 앞두고 있는 선배들 더구나 군대도 갔다 오고 그래서 그런 걸쭉걸쭉한 선배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우리들 대기강학들은 혹은 나이어린 대기강학들의 모임임과는 훨씬 더 여유있고 인간적으로 더 성숙한 그런 분위기를 그 자리에 참석할 때마다 느껴서 어쩐지 좀 인간적인 존경심이나 인간적인 의지를 맛볼 수 있는 그런 모임이었던 것으로 느낀 그런 느낌을 그때 강하게 받았었다.
그렇게 해서 79년 겨울방학이 지나가고 신학기가 들어서면서 실태조사 팀들이 해체되고 그 선배들이 다시 학교로 들어가면서 사회조사연구반이라는 써클로 등록을 하고 우리 탈춤반도 78년도에 민속문화연구반으로 등록했다가 깨졌기 때문에 가면극연구회로 이름을 바꿔서 등록을 하고 그때 우리 강학으로 참여를 했던 고희숙 등이 기독학생회라는 원래 비등록써클에 있었는데 다시 기독학생회라는 이름으로 등록을 할 경우에 문제써클로 지목을 받을 것을 두려워해서 '바이블 앤 뮤직'이라고 하는 즉 '성경과 찬송연구반' 그런 이름으로 등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3월달에 우리는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사회조사 연구반 창립을 할 때 가서 격려해주고 또 우리 가면극연구회 창립할 때 와서 격려해주고 또 우리가 '바이블 앤 뮤직' 써클 등록할 때 가서 격려해주고 하는 식으로 서로를 격려하면서 또 새로운 신흥 써클을 만들어서 키워나가는 그런 의지를 서로 모았다.
유신말기의 전남대 학생운동
탈춤반 이야기를 다시 좀 더 해보자면 우리가 78년도 민속문화연구반으로 등록을 할 때 회장이 그때 3학년이었던 김선출 부회장이 김윤기였는데 그 당시에 전남대학교에서 써클등록을 할 때 학생지도를 위한 규제조치가 있어서 학점은 B학점이상 3학년만이 가능한 것으로 부회장은 2학년이어도 상관이 없는 그런 식으로 규제를 해놨는데 민속문화연구반의 후신인 우리 모임은 전부가 2학년들이 주류였기 때문에 79년에 2학년이 되자 회장을 맡을 B학점 이상이면서 3학년인 사람이 없어서 그때 사대 3학년이면서 들불야학 동료강학이었던 고희숙이한테 부탁을 했더니 김경희라고 하는 영어교육과 3학년을 소개를 해줬다. 그래서 김경희가 우리 가면극연구회 회장으로등록을 하고 실질적으로도 창립초기부터 회장으로와서 활동을 했다. 그래서 다행히 김경희가 회장을 하고 나는 이미 문제학생으로 지목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뒤로 물러나고 사대 2학년인 하경량이가 부회장으로 등록을 해서 써클등록이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또 지도교수 2인을 의무적으로 선임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기존에 사회조사연구반하고 민속문화연구반 즉 문제써클의 후신이라고 할 경우에 교수들이 귀찮은 일이 있을까봐 기피를 해버렸기 때문에 가면극연구회란 이름으로 명칭도 바꾸어서 지도교수를 찾아내야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때 당시 대학생활을 한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아서 교수들을 몰라 써클 지도교수를 승락해 줄 교수가 어떤 사람들이 적합할 것인가를 판단할 수가 없어서 일단 역사과 교수들 방을 무조건 노크해보기로 하고, 나하고 김경희회장하고 하경량부회장하고 셋이서 사학과와 역사교육학과 교수님 방을 무조건 교수님 계시는가 노크하고 들어가서 부탁을 했다. 그렇게 쭉 다니면서 거절을 당하다가 마침 사학과교수 한분이 웃으면서 맡아주마고 해서 설마 그래서 이상식 교수 한분은 지도교수로 선임이 되었고, 또 한사람은 아주 찾기가 힘들었는대, 마침 탈춤반 선배였던 조길례 선배, 독문과 4학년 마치고 대학원에 갔던 조길례선배가 독문과에 그때 독일에서 가면극을 전공을 하고 전임으로 오신 남자교수 한사람 명단을 알려주어서 그 교수 방에 찾아가서 부탁을 했더니 그 교수는 아직 국내 실정이 어두워서인지 흔쾌히 싸인을 해주셔서 그 두분을 지도교수로 올리고 등록을 해서 써클등록은 다행이도 적법하게 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했더니 신입생이 약 2-30명정도가 꽤 많이 몰려와서 탈춤이라고 하는 그런 역동적인 이미지 때문인지 꽤 많이 몰려와서 성공적으로 신입갱 오리엔테이션을 마칠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1979년 초학기가 시작이 되었다.
1979년을 그렇게 지내다가 여름학기부터 5-6월 경부터 그때 나는 78년 1학년 김동길 교수 강의 이후에 연행되었던 그 사건 때문에 학교하고 전대 사찰당국이었던 서부경찰서에 강성의 문제학생으로 지목이 되어 있어 가지고 그때부터 소위 사찰 형사가 두명씩 붙어서 매학기 사람이 바꿔지면서 두명씩 붙어 있어서 어떤 활동을 하기가 굉장히 힘든 상황이었는데, 79년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이 마지막 해였던 그런 만큼 아주 탄압도 심했고, 국민적 저항도 무척 심했던 것 같다.
우리 학생들뿐만 아니라 그때 당시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목사라든지 재야단체 국민연합이라든가 뭐 이런 식으로 저항을 했던 것 같애. 그러다가 79년 4월쯤에 통일주체국민회의 이런 것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회의가 일정이 잡히니까 그 회의를 앞둔 3-4일전부터 한1주일간 가정학습조치라고 하는 신종의 징계조치를 내렸는데, 그 때 나도 가정학습조치를 당해서 학교 등교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학교 등교를 못하고 내가 아버님이 계셨던 고흥 외가집으로 내려가 있었어야 되는데, 고흥 외가집에 내려가서 있는 동안에 마침 우리 탈춤반 회장으로 등록을 해주었던, 사대 3학년이었던 김경희도 가면극연구회의 회장이라는 명분으로 가정학습조치를 당했는데 고흥 내가 있던 곳으로부터 그 옆의 점암이라고 하는 면에 자기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이기 때문에 그곳 관사에서 가정학습 조치를 당하고 있었다.
고흥 외가집에 있기가 좀 무료해서 김경희가 있었던 그 점암 초등학교 관사에 가서 김경희를 불러내서 같이 하루 이틀 고흥읍으로 해서 놀러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런 내용들이 다 서부경찰서로 김경희 부모님을 통해서 보고가 되었던 것 같다.
가정학습조치가 끝나서 다음 주에 학교를 올라와 보니까 사범대학교 여학생 화장실에서 벽에 매직으로 낙서가 유신반대하는 그런 낙서가 여러 건이 발생이 되가지고 그런 소문이 학생들 간에 퍼지고 있었다. 근데 그때 당시 우리들이 문제학생으로 찍혀 있듯이 학생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우리들 끼리는 서로 잘 알고 있었는데 사대 4학년 신민정이라고 하는 함께 공부도 하고 학생운동 논의도 하고 그러던 학생이 있었는데 학교나 경찰 정보과에 전혀 파악이 안되가지고 문제학생으로 지목이 안되고, 소위 불랙리스트에 안올라가 있었다.
그 신민정이가 우리와 같이 가정학습 조치를 안당하고 학교를 계속 다닐 수가 있었다.신민정이가 사범대 여학생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짐작으로 그때 여학생 화장실 낙서를 아마 민정이가 한 모양이다. 이렇게 미루어 짐작만 하고 그러고는 그냥 넘어가 버렸다. 그러다가 79년 여름방학이 가까워오는데 그때부터 정보과하고 학교당국이 우리 들불야학을 말하자면 해체시키기 위해 집중적으로 탄압을 해오기 시작을 했다.
강학으로 있는 우리들 중에 부모님이 공무원이라든지 교사신분이라든지 이런 경우에는 부모님들한테 강한 압력을 넣고 뭐 사업을 한다거나 그런 경우에는 경찰들이 찾아와서 귀찮게 하고, 다만 그런 탄압을 피할 수 있는 경우는 시골서 농사짓고 있는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부모님을 통해서 압력을 넣어가지고 그때 부모님이 교사였던 김연중이가 제일 먼저 낙오를 했고 할 수 없이 우리들은 울면서 술마시고 그러면서 작별을 하고, 들불야학을 그만두게 되었다. 현수정이라고 하는 부모님이 사업을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거기 현수정이는 아버님 스스로가 굉장히 보수적이셔서 경찰로부터 그런 압력이 들어오자 아버님 스스로 현수정이 종아리도 때리고 그러면서 말려가지고, 현수정이도 마지막 회의에서 소주 두병인가 세병인가를 마구 마셔가지고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이 취했던 기억도 있다. 들불야학 강학이었던 배환중도 부모님이 교사여서 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낙오가 되었는데, 나도 마찬가지로 아버님하고 서로 언쟁을 하고 심지어는 아버님한테 구타를 당하면서도 버티다가 나도 결국은 양해를 구하고 그만 둘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까지 되었다.
결국은 부모님이 시골에서 농사지어서 별로 탄압을 안받았던 사대 김경옥이, 박관현선배, 혹은 상원이 형이나 이런 형들, 또 고희숙이 두세과목을 맡기도 하면서 겨우 수업을 꾸려가니까, 들불야학 분위기도 침울해지고 학생들도 결석이 잦아지고, 그때가 들불야학이 시련을 겪었던 그런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79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면서 2학기에 들어갔는데, 학내에서는 무엇인가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그런 시위가 있어야 되지 않냐 이런 견해도 있었고, 또 일부 우리 운동권 학생들은 지금 우리 역량이 너무 취약한데 소위 한건주의 식으로 시위를 했다가는 깨져버리는거 아니냐 그나마 조직의 뿌리마저, 그래서 더 역량을 키워가지고 하자 이런 준비론적 견해도 있었다. 그러다가 10월 어느날 하순경에 그날도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서울에서 열리는 날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가정학습조치를 당해야 해서 고흥 외가집에 어머님을 따라서 내려가 있었는데, 그날 오후에 고흥으로 광주에서 그때 당시는 시골에는 전화가 귀했는데, 고흥 반장집으로 전화가 와서 어머니가 통화를 하더니 나를 저녁 8시경에 데리고 나가서, 아마 서보서 정보과에서 전화를 했던 모양인데, 고흥에서 올라오는 막차가 8시에 떨어지니까 내 담당형사가 광주에서 출발하면 두시간 정도 걸리니까 6시에 광주에서 출발하면 8시까지 고흥에 도착하므로 나를 데리고 나와주라고 부탁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속도 모르고 나를 형사에게 데려다 주고 다시 고흥 외가집으로 돌아가셨다. 나는 정보과 형사를 따라서 광주로 올라와서 정보과 경찰서로 막 들어가는데, 오른 쪽 입구 쪽에 고희숙, 김경희 또 박유순, 여학생 세명이 거기에 형사랑 같이 앉아 있었다.
나는 거기 잠시 대기하고 있는 동안에 형사들이 여학생들한테, 약간 비꼬는 말투로 너희들 데모송 한번 불러봐라 이런 식으로 놀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두번 놀리자, 고희숙이가 자기가 하겠다고 그러면서 우리가 복음성가로 자주 불렀던 '시냇가에', '흔들리지 않게' 몇가지 노래를 당당하게 불러나가니까, 옆에 있던 김경희와 박유순도 같이 합세를 해서 이제 손을 흔들어 가면서 크게 부르자 오히려 비꼬는 투로 노래를 불러라고 했던 그 형사들이 당황해 가지고 나중에는 노래부르지 마라고 막 제지를 하던 그런 광경이 기억에 난다. 잠시후 나는 담당형사를 따라서 정보과 과장실에 불려 갔다. 과장이 내 얼굴을 보고 이름을 확인하고는 데리고 나가라는 눈짓을 해서, 다시 나왔다.
그때부터 조사실에 가서 조사를 당했는데, 처음에 나에게 물어봤던 것은 다른 것은 안물어 보고 4월쯤에 있었던 여학생 화장실 낙서사건 범인을 아냐고 물어봤다. 나는 사실 몰랐고, 내가 짐작으로 신민정이라고 하는 운동권 여학생 동료가 그때 가정학습조치를 안당했었기 때문에 신민정이가 했을 것으로 생각이 들어서 추측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모른다고 잡아뗐다.
그렇게 한참을 잡아뗐더니 담당형사는 어디론가 나갔다 오더니 조서를 한뭉치 보여주면서, 나한테 왜 거짓말을 하냐고 나를 다그쳤다. 그래서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냐고 하면서 항의를 하니까, 그 조서를 보이면서 김경희가 너가 신민정이가 낙서사건 당사자라고 진술했다고 하여 황당하기도 하고 기가 막혔다.
내가 언제 경희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하면서 기억을 더듬어 봤는데, 그때 기억을 더듬어 보니까 여름쯤에 경희가 우리 탈춤반 회장이었기 때문에 우리 회원들 강습이 끝나면 학교 앞에서 막걸리 한잔씩 하면서 땀을 식히고 나서 헤어졌는데, 공교롭게도 김경희 와 내가 집이 같은 산수5거리였기 때문에 버스타고 내려서 집으로 걸어가는 약 5분 간의 동안에 경희가 나한테 낙서사건에 대해 한번 물어봤던 기억이 났다. 경희가 누가 했는지 아냐고 물어봐서 모른다고 잡아뗐다가 그 다음날 또 연습 끝나고 오는 길에 또 다시 한번 물어보길래, 나는 짐작만 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했더니 경희가 혹시 민정이 언니 아니겠냐고 해서 아마 나도 짐작으로 그런 것 같다고 긍정을 했던 기억이 그때야 났다. 아마 그런 이야기를 써놨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이 들어서 나는 형사한테, 그때 정황이 이렇게 되어서 짐작을 했을 따름이다 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형사는 나한테 그러면 진작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지 거짓말로 잡아떼냐고 하면서 구타도 하고 소위 군대에서 하듯이 기합도 주고 그래서 그때는 좀 억울하게 당했었다.
그러고 나서 형사가 정색을 하면서 전대 상담지도관실에 방화사건이 났는데, 방화사건의 범인을 나보고 알고 있으면 이야기를 해주라고 그래서 나는 그때 정말 방화사건은 모르고 있었고, 형사한테 처음 듣던 이야기고 그래서 나는 정말 모른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형사는 나한테 또 거짓말을 한다고 그러면은 짐작이라도 해 봐라고 다그쳤다. 나는 딱 잡아떼고 짐작을 해도 생각난 사람도 없고 그렇게 잡아뗐더니 조금 있다가 나를 데리고 가서 1층 식당에 앉혀놓더니 어디를 갔다 오더니 더 기다리라고 해서 거기서 한 두세시간을 기다려서 새벽 한두시쯤 되자 나를 숙직실로 데리고 들어 갔다. 숙직실에는 큰 책상이 두 개 있고, 그 다음에 몽둥이가 하나 있고. 또 뭐 수갑이라든지 이런 것이 있었다. 그리고 또 물주전자도 있고 그래서 한눈에 막 보더라도 소위 통닭구이식의 물고문을 할 수 있도록 장치를 해논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 형사들은 나를 수갑에 채워서 나를 손에 먼저 신문지를 감아서 수갑을 채우면 나중에라도 상처가 안 나니까 그런 식으로 수갑을 채우고 눈을 손수건으로 아니 수건으로 가려 가지고 그렇게 해서 공포심을 조장한 다음에 때리면서 불라고 했다. 나는 정말로 처음 듣는 이야기고 해서 계속 모른다고 잡아뗐다. 그러자 계속 구타하면서 누군가를 불으라고 그랬는데, 내가 하도 완강하게 모른다고 하니까, 자기들도 어느 정도 내가 모르는 것으로 그렇게 생각을 했는지, 그러면 생각나는 사람 몇 사람 이름만 불러봐라고 그래서 그냥 생각나는 대로 그때 그냥 몇 사람의 선배들 이름만 좀 대고 그렇게 해서 풀려나서 나는 유치장으로 넘어 갔다.
아마 내 다음 순번으로 다른 사람들이 계속 조사를 받고 고문을 당하기 위해서 아마 대기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유치장에 있는데, 그날부터 계속 고문당하는 비명소리가 바로 옆에 숙직실이 유치장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고문당하는 비명소리가 유치장으로 계속 넘어 왔는데, 사실 그때 나는 2학년이었고, 또 학생운동의 단계상, 1-2학년은 말하자면 행동요원에 불과했지, 어떤 것을 결정하고 지도하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나는 학내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그때 당시 우리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을 지도하고 정책을 결정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3-4학년 그룹이었다. 3학년에서는 신영일이가 거의 책임자 격이었고, 4학년에서는 이세천 선배가 책임자격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근데 내가 이미 잡혀들어가 있었을 때, 이세천 형이나 영일이나 고희숙이 그런 여학생들까지 한 10여명은 이미 들어와서 나보다 더 먼저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계속 말하자면 잡혀들어와서 조사하는 고문을 받고 어느 정도 조서가 작성이 되면 유치장으로 넘어오고, 또 끌려들어와서 조사를 받고 고문을 받고 또 조사가 끝나면 유치장으로 끌려들어 오고, 이런 식으로 계속 되어 어느덧 유치장에는 약 한 30여명의 우리 동료들 혹은 후배들 선배들 거의 가득차게 되면서도 계속 끌려들어 왔는데, 그 때 보니까 이미 졸업을 했던, 실태조사에도 참여를 했던 장석웅 선배가 보성 어디 중학교에 사대국사교육과를 나와 가지고 78년 겨울에 광천동실태조사에 참여를 해서 한 학기가 남아가지고 사회조사연구회 창립회때 참여를 하고, 그리고 여름 학기로 졸업을 해서 보성 어디 중학교에 발령이 나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끌려 들어온 그런 장석웅 선배가 또 그 약혼녀랑 한꺼번에 잡혀들어와 조사를 받았고, 또 철학과 다니다 제적당해서 밖에서 있었던 박병기 선배나 그런 사람들이 와서 다 조사를 받았다. 또 민청학련 선배라고 이름만 기억을 하고 있었던 윤한봉 선배가 마지막에 잡혀 들어와서 조사를 받았던 그런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러던 10월 26일 말하자면 박정희가 김재규한테 저격당했던 그날인데, 10월 26일 숙직실에서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고문을 당하는 비명소리 때문에 유치장에서 담뇨를 뒤집어쓰고 이번에는 또 누구 목소린가 귀기울이면서 매번 애처러이 그렇게 며칠밤을 지내야 되었는데, 유치장 담당경찰이 숙직실에서 나오는 비명소리를 상쇄하기 위해서 라디오 소리를 크게 틀어 놓았다.
그날도 새벽에 누구 비명소린가 해서 귀를 쫑긋이 세우고 자다 깨다 자다 깨다 하고 듣고 있는데, 갑자기 라디오에서 새벽 4시나 5시 첫방송 첫 뉴스시간이 된 것 같은데 박정희 대통령이 유고 어쩌고 하는 이런 소리가 라디오에서 들리는 것을 내가 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옆에 사람들을 깨우면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냐고 했는데, 아무도 그것을 못 들어서 나는 혹시 내가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 이야기를 해줬다. 그러자 모두들 그러면 다음 뉴스를 들어보기로 생각을 하고 다음 뉴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다음 뉴스가 아마 아침 여섯시나 여섯시 반쯤 나왔던 것 같은 데 그때 박정희대통령 시해, 이런 내용이 발표가 되어서 모두 박정희대통령이 죽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혹시 저것이 우리를 놀리기 위해서 장난할려고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까지 들어서 우리 유치장을 담당하는 경찰들 표정을 유심히 살펴봤지만 그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어서 정말 긴가 민가 그런 의심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숙직실에서는 윤한봉 선배가 잡혀 들어와서 조사를 받던 중이어서 비명소리 같은 것이 간헐적으로 계속 나오던 때였다.
아침이 되자 우리를 고문하고 구타했던 형사들이 몇 명이 와 가지고 웃는 얼굴로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는 그때 아침식사로 사식이 아니라 꽁보리밥에 무줄기를 그냥 소금에 절여논 관식을 먹고 있었는데, 흰쌀밥에 고기국물이 있는 사식과 담배도 몇갑씩 넣어주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마도 그래서 형사들이 우리들한테 감정 품지마라고 아부하는 뜻이었던 것 같다. 그때서야 아 박정희 대통령이 드디어 죽었구나 그렇게 생각해서 정말 뿌듯해서 그동안 괴로웠던 유치장 생활도 기쁘게 참을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10월 26일이 지나가자 그전에는 한 2-30명을 구속할 그런 방침이었는데, 방화사건 관련자 세명과 고희숙, 김경희, 박유순 세명과, 그 교사한 혐의로 신영일과 그리고 낙서사건으로 신민정, 그리고 그 사이에 우리도 몰랐던 충장로 유인물 사건으로 박병기형, 그리고 또 전남대학교 학생들 한 천여명들한테 외지에서 유신독재정권 타도하자라고 하는 내용이 주로 였던 그런 편지가 배달된 사건이 있었는데, 그 편지발송사건의 주모자로 장석웅과 그 약혼자였던 윤명숙씨(지금은 결혼해서 그 형수가 부인되었지만) 그리고 이세천선배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한 교사로 윤한봉선배, 이렇게 구속자가 한 7-8명 정도로 줄어지고 또 나머지는 비급으로 분류가 되서 10일간 구류를 살고, 나머지는 또 3일간 구류를 살고, 그리고 나머지는 훈방되는 그런 식으로 징계가 맺어진 채 그 사건은 끝이 났다.
교내시위 주도, 그리고 수배
나는 10일간 구류를 살고 나와서 다시 학교에 다녔고 그때 구속된 선배들은 광주교도소로 넘어가서 살고 있다가 12월 9일 구속중지로 모두 풀려났다. 박정희가 죽자 학교 분위기도 훨씬 풀렸고, 여러 가지 규제조치도 풀어지고 학교 교수들도 웬만한 학생들의 활동은 묵인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학교수업이 늘어진채 겨울방학으로 돌입했다. 12월 9일 영일이가 영일이를 비롯한 구속자들이 전부 감옥에서 나오자 그때 당시에 영일이는 실태조사에 참여를 했던 사대영어교육학과 3학년이었던 김정희라는 여학생하고 사귀고 있었는데 그 정희가 어느날 12월 중순경에 나를 좀 만나자고 해서 나는 무슨일인가 해서 정희를 만났다.
그런데 정희 옆에는 영일이도 같이 있었다. 정희는 나한테 와서 지금 전두환 군부세력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서 실권을 잡고 있는데 계엄령을 해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해야 할 상황이 아니냐고 나한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말은 맞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계엄령을 해제하라는 시위를 하자고 제의를 해왔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그럼 그 시위를 누구누구 할 것이냐고 하니까 자기하고 나하고 단둘이 하자고 제의를 해서 나는 정말 좀 의아했다. 옆에 영일이는 그냥 심각하게 정희가 나에게 제의한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나는 그말이 맞기도 하고 또 같이 시위를 하자는데 안하겠다 그러면은 굉장히 비겁한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여러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작용이 되자, 나는 그러면 같이 하자고 순순히 응답하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진심으로는 그 시위를 주동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그 때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고 꼭 학과 공부가 아니더라도 사회와 역사에 대한 공부를 충분히 하고 싶었던 마음속의 욕구가 있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나는 그 시위를 하고싶지 않았다. 하지만 정희가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제의를 해오고 그런 상황 인식에 대해서 요구를 하는데 내가 거절하기는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영일이는 심각하게 제발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말라고 옆에서 계속 만류를 했다.
하지만 이미 그 대화의 주도권은 정희가 갖고 있었고 정희는 막무가내로 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상태에서 나에게 요구를 해서 할 수 없이 나도 수락을 한 상황이어서 영일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계획을 추진하도록 했다. 그때 시간이 밤 11시쯤 되었는데 길을 걸어가면서 주룩주룩 비가 와서 셋이 우산도 없이 비를 쭉쭉 맞으면서 신역까지 그런 이야기에 동의를 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하고 나는 또 헤어졌는데 또 영일이와 정희는 어디론가 가고 나는 그렇게 대답을 하고 나니까 마음도 허전하고 또 유인물을 내가 작성하기로 해서 집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광천동 상원이형이 살고 있는 상원이형 집으로 가기로 결정을 하고 광청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광천동으로 갔다.
광천동에 마침 가니까 모두들 자고 있고 상원이형은 어디론가 계셔서 안 계셨고 그래서 영철이형 집으로 갔더니 마침 낙평이가 책상에 앉아서 무엇인가 쓰고 있었다. 비에 흠뻑젖어서 들어온 나를 보고 의아한 듯이 왜 그랬는지 물었고 그 낙평이에게 나는 거꾸로 무엇을 하냐고 물어보니까 낙평이가 계엄령 상황에서 계엄령을 해제 해라고 하는 그런 내용의 유인물을 만들어서 뿌리려고 초안을 작성하고 있다고 이야기를 했다. 나는 낙평이에게 아까 정희하고 했던 시위계획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를 하고는 그럼 그 유인물을 실은 내가 오늘 유인물 문안을 작성을 해야하는데 너가 그 문안을 작성해주라 그럼 내가 작성한 걸로 해서 뿌리겠다. 그리고 나는 피곤하니까 자야겠다 그러니까 낙평이도 그러마고 해서 낙평이는 문안을 작성하고 나는 한편에서 누워서 잠을 잤다.
아침에 내가 유인물 문안을 쓴 걸로 해서 초안을 조금 수정하고 정리를 다시 해서 내 글자체로 써가지고 다음날 만나기로 했던 장소에서 정희하고 만나서 주고 그래서 둘이서 등사를 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실은 등사를 내가 광천동에서 등사를 하고 등사기하고 그 무슨 원지같은 것은 정희의 외할아버지인가 노부부 두분이 사시는 정희가 자취하던 방에서 그렇게 한 것으로 알리바이를 짜고 거기에서 몇가지 등사용지 같은 것을 일부러 구겨가지고 불에 태워서 아궁이에 집어 넣는 그런 흔적을 남기고 그날밤 광천동에서 내가 필경을 하고 그 필경한 그걸 가지고 용준이가 등사를 해 주었다. 그래서 한 500부나 1000부쯤 되었을까 모르겠는데 기억이 정확하게 안 나는데 유인물을 등사한 다음에 정희하고 나하고 디데이로 약속한 그날 만나서 그날 오전에 만나서 정희가방과 내 가방에 반틈씩 나누어서 전대 도서관에 가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시위를 하기로 결정을 했다.
전대를 들어갔다. 전대를 시위를 구상을 하면서 나는 핸드마이크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학생들의 주의를 끌여 들일까 생각을 하다가 내가 생각을 해낸 것은 아, 호각을 이용해서 하면 되겠다 라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가는 길에 문방구에서 호각을 하나 사가지고 함께 식당으로 갔다. 그래서 11시 반부터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점심시간이 되서 학생들이 꽉 들어차자 정희와 나는 식당의 정문과 후문쪽에서 먼저 유인물을 하나씩 배포하기 시작했다. 유인물을 배포하자 학생들이 놀래서 얼굴색이 변하는 학생들을 여러명 보았다.
그렇게 해서 등산 유인물을 모두 배포를 하고 나자 내가 호각을 빼서 불었다. 호각을 불자 그것이 결국은 실패작이었는데 실은 학생들이 경찰이 오는줄 착각을 하고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경찰이 아닌걸 알아 좀 안정이 되자 정희는 그중에 가운데 한 책상에 올라가서 유인물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지켜 서있다가 낭독이 다 끝나자 훌라송을 선창해서 부르면서 모두 밖에 나가서 스크럼을 짜자고 선동을 했다. 그래서 뒷문쪽으로 학생들이 빠져 나가고 앞문쪽에서는 내가 학생들을 끌고 나가는데, 학생과 직원들이 2-30명이 우르르 몰려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렇게 해서 뒷문쪽으로 빠져 나가는데, 이미 정문 쪽에서 교수하고 학생들이 바로 충돌이 되면서 정희가 교수들한테 끌려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후문 쪽에서 학생들을 스크럼을 짜려고 하는데 교수들이 다시 몰려 들어오자 우르르 몰려드는 학생들이 차츰 대열이 흩어지면서 해산되었다. 그러자 대오가 흩어져버리자 몇 명 학생들이 나에게 강당 뒤쪽길로 먼저 피신하라고 이야기해서 나는 그쪽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날이후의 학생들 상황은 잘 몰랐고 그렇게 해서 후문쪽으로 걸어 나오다가 공대옆 문을 타고 일단 시내로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이후 상황은 나중에 이야기만 들었는데 그날 오전에 내가 연극반 친구였던 김태종한테 점심시간에 이러이러한 계획이 있는데 니가 방송국에 들어가서 방송국 학생들에게 부탁을 해서 이 유인물을 낭독을 할수 있으면 낭독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태종이가 친구인 빌립이에게 유인물을 가지고 가서 방송국에 부탁을 하니까 그 학생들이 그 말을 안 들어주자 몇 명을 강제로 구타를 하고 소동을 일으키다가 잡혀서 태종이도 연행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배환중 우리 들불야학 강학이었던 선배가 그 시위 와중에 경찰에 연행되었다고 한다. 그런 일이 있고 그날 시위가 그렇게 불발로 끝나버리자, 다음날 시위를 다시 할 것을 생각하고 학교로 잠입을 했다.
학교로 들어가서 인문대 3층 빈 강당에서 1층을 내려다보는 데 경찰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각각 인문대 상대 앞을 계속 주기적으로 순찰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오늘은 안되겠다고 포기를 하고 상대 뒷산을 넘어서 다시 시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밤중에 산수동에 있는 김상윤선배 집으로 갔다. 김상윤선배 집에는 마침 민청학련 선배들 몇 명이 모여있었는데, 김희택이라는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내려온 선배가 그날밤 시내에서 시위를 주동하기로 계획이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그분이 상윤이형과 몇마디 말을 나누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래서 그날밤 충장로 쪽에서 시위를 하기로 결정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가능하면 연락이 되면 학생들이 그쪽으로 집결해 달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시내에서 몇몇 연락이 되는 학생들과 충장로 우체국에서 충파쪽으로 가고 있는데, 충장로에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 물결 속에 휩쓸려 가는데 저쪽 어디선가 누군가 눈초리가 이상한 사람들이 눈에 확 뜨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형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빨리 인파 속으로 몸을 감춰서 공원쪽으로 몸을 피했다. 1차 시위 예정장소가 충장로였고, 2차 시위장소는 공원이었다고 이야기를 들어서 공원 쪽으로 가는데 공원 쪽에서 이미 소규모 시위가 시작되고 있었다.
경찰들이 그쪽으로 몰려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해서 하룻밤이 지나고, 그 다음날 도저히 이런 상태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몸을 피하기로 작정을 하고 나는 그때 영광에 있는 친구 집으로 도망을 갔다. 그래서 말하자면 수배가 되고 도피생활로 접어들고 만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영광에서 한 3개월 정도 가정교사를 하면서 친구가게에서 80년 3월까지 거기에서 도피생활을 했다.
80년 민주화의 봄
80년 3월이 지나서 4월달에 미리 이야기를 맞춰논 보안대의 수사관을 통해서 들어가서 간단하게 조서를 마치고 불구속으로 풀려나왔다. 그렇게 해서 학교에 다시 복학을 해서 다녔는데, 학교 분위기는 79년과는 딴판이고, 굉장히 자유로운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학교에는 자율화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한상석선배가 자율화추진위원장이 되어서 학생들에게 총학생회 부활을 위한 공청회라든지, 기타 민주적인 학생활동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들을 학생들과 격의없이 토론하면서 그런 분위기를 끌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각 단대에서도 단대학생회 부활을 위한 여러 가지 학생활동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3-4개월의 도피생활 때문에 학내 조직적인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놓치게 되서 다시 탈춤반 써클에 관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과대학 서클인 후진국 경제학회 창립을 준비하는 그 모임에 참여를 하면서 학교생활을 시작을 했다. 3월 4월 4월 중순쯤이었을까? 총학생회 선거도 마무리가 되고 우리 들불야학 출신 박관현선배가 자율화추진위원회 공청회 결과 많은 학생들의 지지로 총학생회 후보로 결정이 되서 출마를 하게 되었고, 기타 다른 일반 다른 학생들과 겨뤄서 약 73%라는 득표율로 높은 득표율로 회장으로 당당하게 당선이 되었다.
우리는 총학생회장 선거를 치루고 나서 또 총학생회와 별개로 학생들의 교양이나 친목 이런 것을 중심으로 말하자면 이념써클 수준이었던 각 써클들을 이제는 한국사회에 대한 제반문제들을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개진하기 위한 학회로 새롭게 출발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견에 합의를 해서 각 써클을 학회하는 그런 성격으로 변모를 시켜서 창립을 준비를 해서 4월달에 학회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우리 민속문화연구회79년,'바이블 앤드 뮤직'이라는 이름으로 등록을 했던 기독학생회도는 본이름을 찾게 되고 '독서 잔디'도 학국사회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다시 바꾸고, 사회조사 연구회, 그리고 들블야학 같이 했던 임낙평 나상진이가 노동문제연구학회를 만들어 내고 , 또 농대출신에 우리 학생운동을 했던 멤버들이 중심이 되서 농민문제연구학회, 또 여성문제연구회, 또 기타 각 단대별로 후진국경제학회나 사학과 쪽에서 근대사학회라든지, 사회철학회 등의 보다 더 전문적으로 사회문제를 진단하고자 했던 그런 입장을 표방했던 학회를 창립했다. 그렇게 해서 4월달이 가고 5월이 되었는데, 상대다니다 군대에 갔다 와서 복학을 했던 경제학과 이재의 선배가 나한테 와서 제의를 했다.
총학생회와 다른 총학생회라고 하는 것은 합법적인 학생활동의 중심기구이기 때문에 총학생회에서 다룰 수 있는 쟁점과 다룰 수 없는 쟁점이 분명하게 구분이 되는데, 이제 다룰 수 없는 쟁점들, 말하자면 통일문제에 있어서도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혹은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문제에 있어서도 보다 더 근본적인 경제구조에 관한 문제, 가령 이런 문제들은 다룰 수 없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그런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비합법적인 유인물 팀을 하나 조직을 하자, 그래서 자기는 자기가 재정조달과 총학생회 관련된 섭외는 자기가 맡을 테니까, 조직을 책임질 수 있겠냐, 그리고 사람을 좀 모아라 이런 제의를 해서 나는 거기에 동의를 하고 그동안 각 써클이나 학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지 않은 1-2학년 중심으로 7-8명 회원들을 모집을 하기 시작을 했다.
그래서 법대에서 광천동 실태조사 팀에 참여를 했던 박용안, 농대에 동근식, 또 자연대의 김돈규 또 사대에 교육문제연구회에 있던 여학생, 상대에 또 2학년이었던 후진국경제학회 회원이었던 후배 하나, 또 기타 그렇게 해서 약 7명 정도우리 팀을 하나 구성을 했다. 그래서 1차로 그때부터 유인물을 만들어서 전대 후문 앞에서 자취를 하던 자연대 다니던 우리 멤버의 자취방에서 등사를 해가지고, 집회때 학생들이나 혹은 주택가를 돌아다니면서 배포를 하였다. 거기서 다뤘던 내용들은 총학생회나 기타 공개 학생조직에서 다룰 수 없었던 경제구조나 기타 노동자 농민의 생존권 문제나 학생활동과는 좀 질적으로 다른 어떤 내용에 관한 것, 혹은 그때 당시 전두환 군부에 관한 어떤 성격규정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주된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명의는 기억이 잘 나지안는데, '대학의 소리'였던 것같다. 그런 내용의 유인물을 대여섯 차례 뿌렸다.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면, 비합법 유인물을 뿌린다고 하는 모험 내지 스릴감을 느낄 수 있었고, 또 유인물을 뿌리는 방식을 우리 스스로 많이 개발을 했는데, 예를 들자면, 공중전화박스에 붙이고 다니는 방식이라든지, 또 회사정문 담벼락 같은 데, 혹은 시내버스 환풍기 사이에 한 몇십장씩 올려 놓고 내리면 시내버스가 출발하면서 바람에 유인물이 한두장씩 인도나 차도에 떨어져서 시민들이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게 했던것, 혹은 충장로 2층 계단에 나있는 유리창에 뿌리고는 바로 1층으로 내려서 몸을 피신한다든지, 하는 그런 유인물을 배포방식을 여러 가지 개발하여 써먹었던 그런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암만해도 그때 당시는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움직이도록 경찰이나 당국에서 방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스럽게 뿌릴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5월 14,15, 16, 3일간 횃불대성회를 포함해서 각 대학생연합, 전남대가 중심이 된 각 대학생연합의 평화적 시위가 도청앞에서 마무리가 되고 만약에 계엄령이 확대될 경우에 그 다음 오전 10시에 각대학 정문에서 모여서 대오를 형성한 다음 도청 앞에서 집결하자는 그런 약속을 하고 16일 시위가 끝났다. 17일날은 그때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동네 친구가 휴가를 나왔기 때문에 오랜만에 동네친구들이 모여서 영종이 집인 학동 너머 2수원지 안에 있는 영종이 집에서 모여서 즐겁게 하루를 좀 쉬면서 즐겁게 보냈다.
17일날이 토요일 이었을까, 일요일이었을까 영종이집에 모여서 앉아 있는데, 저녁 9시쯤인가 뉴스에 비상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된다는 비상뉴스가 나왔다. 그 뉴스를 보면서 나는 저러면 안될텐데 놀라면서 그 뉴스를 들었다. 또 그것을 보고 내일은 일찍 시내에 나가야 되겠네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랬는데 거기가 광주시하고 좀 떨어진 곳이어서, 버스편이 그렇게 자주 있던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다음날 아침식사를 하고 시내에 버스를 타고 나오니까 마침 10시 반쯤 되었던 것 같다.
도청 앞에서 버스를 내려서 보니 학생들이 약 200명쯤 카토릭센타 앞에서 대열을 형성해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제일 먼저 총학생회나 학생회 간부들이 이렇게 앞에서 인솔을 해서 오지 않나 해서 인솔자들을 봤는데, 인솔자들이 하나도 없었다. 보니까 박몽구 선배와 우리 유인물 팀이었던 자연대에 김동규 라는 후배가 대열의 옆에 있었을 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한테 가방을 맡겨놓고, 그 대열에 합류를 하기 위해 달려 갔다. 그 대열은 전일빌딩 앞에서 전경들과 부딪혀서 충장로 쪽 우체국 쪽으로 대열이 그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충장로 쪽으로 향했다. 내가 달려갔을 때는 대열의 마지막이 저 멀리 보이고 있었다. 나는 대열을 향해서 계속 달려 갔다.
광주항쟁
충장로 우체국 앞에서 다시 충파쪽으로 대열이 꺽여서 돌아가서 따라 가니까 이미 그쪽에서 전경들과 붙어서 충돌하면서 대열은 삼삼오오로 흩어져 있었다. 나는 거기에서 충파까지 계속 간 다음에 다시 금남로를 가로질러서 현대예식장 옆으로 가려고 했다. 현대예식장 옆 골목으로 들어서려는데 골목에서 마침 탈춤반 활동을 같이 했던 김윤기 김선출 김태종 세 친구들을 만났다. 나는 무척 반가왔다. 그래서 그 친구들과 함께 무엇을 할 것인가 상의를 했다. 그래서 우리가 결정한 것은 일단 계엄령이 확대되었으나까, 학생들에게 그리고 총학생회가 현재 행방이 나타나지 않으니까 우리가 유인물을 만들어서 외곽의 시민들한테도 알리고 학생들한테도 행동지침을 적어서 알리자 그런 결정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유인물을 만들 등사기나 이런 것이 없어서 어떻게 그런 걸 구할 것인가, 그것을 상의하다가 내가 우리가 비밀 유인물을 등사했던 우리팀인 동규 자취방이 생각이 나서 그리 가자고 해서 택시를 타고 그곳에 가서 넷이서 유인물을 수백장을 만들었다.
수백장을 만들고 나니까 오후 한 3-4시쯤 되서 그 등사기를 정부미 부대에 넣고 유인물을 각각 나눠가지고 시내로 나왔다. 그때 마침 아까 헤어졌을 때 아까 충장로에서 만났던 인문대 후배들 몇 명을 만나서 우리가 흩어지면 오후 3-4시쯤에 시내 금남로 무슨 다방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 사이에 혹시 학생회 간부들 모습이 보이면 연락을 해서 거기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해서 아마 거기에 있으리라고 생각을 하고 우리는 시내로 택시를 타고 나오다가 택시기사가 시내 지금 난리가 났는데 어떻게 금남로를 들어가느냐 못들어 가니까 내려달라고 그래서 우리는 내리고 등사기가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에 등사기를 들고 있는 태종이는 그 옆에 가게에서 잠시 앉아 있기로 하고 우리는 유인물만 가지고 시내로 들어왔다.
시내로 들어가는데, 공용터미날 근처쯤 오는데 대인동 쪽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으면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수근수근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요 하고 물으니까 방금 공수부대들이 훑으고 지나가면서 사람들을 엄청나게 다쳐서 지금 피투성이가 되고 난리가 났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금남로는 어쩌냐고 했더니 금남로는 지금 젊은 학생처럼 보이는 얘들은 다 끌려가서 죽으니까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거기에서 만나기로 했던 다방으로 전화를 하니까 다방에는 주인이 전화를 받아서 지금 사람 하나도 없고 금남로에 지금 난리가 나서 셔터를 이미 내려논 상태니까, 여기서 약속을 했다면 올 필요도 없다고 이야기를 해서 이미 상황이 급진전한 것을 직감을 하고 우리는 그곳에서 유인물을 각자 나는 다음에 각 시내 외곽으로 배포를 하면서 학동으로 우리 같은 친구였던 현철이라는 친구 자취방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나눠서 가진 후 배포를 위해서 각자 해산을 했다.
나는 선출이와 함께 대인동, 계림동, 산수동, 지산동에다 뿌리고는 학동으로 갔다. 그리고 태종이하고 윤기도 다른 쪽 방향으로 뿌리고 현철이 집으로 모이기로 했는데, 모이기로 해서 오던 도중에 마침 게림동 계림동 금수장 근처에서 민청학련 선배인 이양현형을 만났다. 양현이형은 우리를 보자마자 차 한잔 하자고 해서 다방에 가서 이야기를 하는데, 양현이형은 굉장히 흥분한 상태로 지금부터 잘못하면 큰 피비린내나는 사건이 날지모르니까 문제학생으로 지목되었던 너희들이나 민청학련 선배들은 이미 절대 집에 들어가지 말고 어디 여관에 들어가더라도 고급 호텔로 들어가야지 잘못하면 전부 검문 검색에 걸려서 다 사전에 검거되니까 조심해서 숨어라는 주의를 듣고 헤어졌다. 학동에 오니까 학동에서 다시 선출이와 태종이와 나 셋이는 다시 만나고 윤기는 오는 도중에 친척집에서 잠시 쉬겠다며 고모집으로 갔다고 했다. 우리 셋이는 거기서 다시 그 근처 문구점에서 등사용 필기도구 하고 종이를 사서 밤새내 등사를 했다.
밤새내 등사를 하고 또 그 다음날 오전에 또 연락이 되는 후배들 몇 명을 불러와서 함께 또 또 유인물을 나눠가지고 주택가를 쭉 뿌리면서 이번에는 낮에 오후쯤에 낙평이가 양림동쪽에서 자취를 했는데, 낙평이 자취방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래 또 각자 외곽으로 해서 배포를 하고 양림동 낙평이집에 서 만나니까 그때 낙평이는 없고 문은 잠겨 있었고 그때 선출이던가 거기서 다시 배포하기로 하고 다시 그날 밤에는 산수동에서 만나기로 했어. 그날이 19일 밤이 되는데, 그때는 선출이하고 내가 한조가 되서, 거기서 양림동 쪽을 거쳐 광주천변 쪽으로 내려오니까, 공수부대 한명이 시민들한테 붸겨가지고 광주천 다리밑에서 붸겨가고 있었고, 시민들이 그옆에서 산발적으로 붸고 있었지. 시민들이 돌멩이로 던지고 공수부대도 이미 제정신이 아니어 가지고 돌멩이에 맞고 어떻게 하고 그런 광경을 지켜보면서 양림동쪽으로 넘어와 가지고 그러다가 19일날 그때 시위대를 거쳐가지고 지산동 법원에 와가지고 그때 연극반 후배 자취방에서 또 하룻밤을 잤어요.
그 다음날이 20일인데, 20일날 아침이 되니까, 말하자면 이틀간을 그렇게 돌아다니니까 좀 허탈하고 지치고고, 20일날 아침부터 비가 왔어요. 비가 와가지고 후배들도 연락이 안되고, 학생회도 연락이 안되고, 운동했던 친구들도 연락이 안되고 그래서 어디로 가야되나 집에는 들어가면 안된다는 생각이 고정적으로 있었고, 그래서 그러면 어디로 갈까 그러고 있는데 그래도 제일 갈만한 데가 광천동 우리 들불야학 동료들이 있는데 거기를 가야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고 특히 상원이형 얼굴이 떠오르고 영철이형 얼굴도 떠오르고 거기는 무엇인가 활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광천동을 갔어요. 광천동을 갔는데 그때 내 가방에 미처 못 뿌린 유인물들이 있었는데, 그 유인물들은 우리가 그때 명의를 우리 마음대로 써가지고 이를테면 학생혁명위원회라든지 총학생회니 혹은 대학생 일동 해가지고, 작전상 여러 명의로 내는 것이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 명의로 만들어 냈기 때문에 그런 유인물이 내 가방에 몇십장 있었는데, 가방을 택시 뒷좌석에 깔고 광천동에 갈려고 영업용 택시를 탔어요. 근데 광천동 다리에서 검문을 하더란 말이여. 앞차들이 보니까 검문을 하는데, 아이고 이제는 운명에 맡겨불자 그러고 있는데 다행이 검문에 안 걸리고 지나갔어.
그래서 광천동 야학으로 가니까 마침 야학 강학들이 있던 방에 대석이랑 강학들이 몇 명 있고 또 앞쪽 영철이형 방으로 가니까 용준이하고 우리가 학동에서 하루밤 지냈던 현철이가 있었다. 거기서 같이 반갑게 만나고 용준이 방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가 방어적으로 움직이면 안되겠다. 자위를 위해서라도 무기를 하나씩 소지를 하자 그래서 그 앞에 슈퍼에 가 가지고 과도를 하나씩 샀어요. 과도가 날이 잘 들게 보이드만. 과도를 사가지고 이렇게 하나씩 품고 시내로 가자 유인물이고 뭐고 죽자 살자 싸워야지 뭐하겄냐 시내로 가자 용준이 방을 나와서 막 시내로 출발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현철이가 와서 사고가 났다고 해서 가봤더니 용준이가 그 과도를 가지고 찌르는 연습을 하다가 과도가 해작바지 재봉선에 걸려가지고 칼날이 오히려 자기 무릎을 파고 든거여. 파고 들어분께, 피가 질질 흐흐고, 그래서 우리가 그 옆에 병원을 데리고 갔어요. 병원에서 의사가 웬 사고냐고 그래서 마취하지 말고 바로 소독만하고 바로 꿰매야지 빨리 낫는다고 그래서 그러니까 용준이도 동의를 하고 그래서 우리가 사지를 잡고 소독만 하고 마취를 않고 그냥 꿰맸어. 용준이가 이를 악물고 참어 내드만.
그러고 용준이를 방에다 눕혀놓고 우리는 시내로 나오는데, 나는 선출이랑 거기서부터 전방 임동 전방 앞으로 이렇게 오는데, 전방에서 신역쪽 이렇게 오는 사이에 말하자면 그때가 군인들이 일부 교체가 되든지, 공수부대가 향토사단으로 교체가 되든지 무슨 교체가 되는 상황인 거 같애. 그래서 전방 임동 사거리에서 전대 정문 사거리 그 사이에 군인들이 한 100여명 정도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뒷걸음치면서 철수를 하고 있었어. 그래서 시민들이 모여서 소리치고 그러니까 거기서 핸드마이크로 우리느 향토사단인데 해칠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까 공격하지 마라는 선무방송을 하면서 아마 군인들이 31사단쪽으로 나가는 것 같앴어. 그걸 바라보면서 시내 쪽으로 가다가 마침 재의형을 만났어.
이재의 선배가 지금 상황이 이렇게 도청 앞에서 대치해 있고 이런 상황인데 리스트에 올라 있는 사람들은 일단 시외로 피신을 해야 할 것 같다. 자기는 그날밤에 우선 짐정리를 해가지고 외곽으로 빠져 나갈란다 너희들도 그래라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더라고. 그래서 그러냐 알았다 그러고는 시내 쪽으로 가는데 임동 쪽에서 북동 쪽으로 가다가 보니까 임동에서 전남방직 여공들이 작업복을 입으면서 우르르 나오면서 어디로피신하고 이런 사고가 나서 왜그런가 지켜보다가 경상도 차가 어떻게 되고 어쩌고 해서 그쪽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시내로 들어가다가 거기서 무슨 쌀가게를 하는 선출이 친구를 만났어. 친구를 만나서 이런 저런 안부를 묻고, 그러다가 선출이 친구가 오늘밤에 자기 방 열쇠를 줄테니까 거기서 자라 그리고 쉬어라 그래서 선출이 친구방에서 셔터를 내리고 쉬고 잇는데 저녁 먹고 쉬니까 여덟시나 여덟시 반이나 되었을까 그때는 통금이 빨리 되었죠. 쉬고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지르는 무슨 함성같은 소리가 났어요. 저게 무슨 소리다냐 하면서 셔터를 열고 나가봤더니, 서울에서 광주로 오는 버스나 이런 차들이 이미 터미널이 봉쇄되었기 때문에 무등경기장에서 손님들을 내려주고 회차하는 그런 차들을 시민들이 잡아가지고 운전기사한테 양해를 구하거나 아니면 강제로 차를 갖고 도청에 가서 군인들을 마지막으로 몰아내불어야 한다고 몰고가는 참이었어. 그때 너나없이 시민들이 전부 참여했기 때문에 거기서 애국가 봉선화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또 짐을 가득 실은 트럭 같은 데는 짐칸에 사람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가지고 마치 6.25때 피난민 행렬들이 차에 매달려서 오는 그런 모양으로 하는데 그 한가운데를 보니까 나는 정말 가슴에서 뭉클하는 감동이 전해지면서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정말 무슨 해방의 함성 같은 그런 느낌을 가졌어.
그래서 그 행렬들과 같이 거기서부터 시내에 들어왔지. 밤에. 신역 , 유동쪽으로 오는데, 신역옆에 그때 KBS방송국이 있는데, 왜곡보도하는 KBS 때려부수자 그래가지고 또 차를 앞세우고 갔어요. 가는데 KBS 방송국 앞에 아직 군인들이 남아 있었드만. 차를 몰고 가는데 갑자기 앞에서 두두두두 총소리가 나니까, 사람들이 전부 숨고 엎드리거나 피했어.
차는 그때 실탄을 쏘았는지 공포를 쏘았는지 모르겠어.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다시 또 사람들이 총성이 멈추니까 다시 또 모여서 가자고 하니까 일부 앞에서 선두에 섰던 차량들과 사람들이 우리가 여기에서 소모하지 말고 도청 쪽으로 다시 가자 그래서 방향을 다시 돌려서 도청 쪽으로 갔어요. 그래서 전여고 앞을 지나서 장동로타리 쪽으로 가는데, 또 그쪽에도 대치를 하고 있었지. 이렇게 가는데 내 기억에도 선한데 갑자기 깜깜한 장동로타리 전방에서 갑자기 하얀 안개같은 것이 포물선 그러니까 조그만한 반원을 그리면서 퍼져나가요. 저게 뭐다냐, 아마 그게 바로 알았지만 최루탄을 푸는 거였어. 갑자기 총소리가 타타타탕 나니까 또 사람들이 전부 피해서 우리도 엉겹결에 전남여고 담을 넘어서 전남여고 운동장에 갔네. 그러다가 다시 총소리가 멈추니까 전남여고 담으로 싸악 보니까 다시 대치상태 그대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또 저쪽에서 어떤 사람들이 드럼통에다가 석유가 휘발윤가를 가득 담아갔고, 사람들이 또 같이 모여갔고 대치하고 그러다가 보니까 새벽 한 2시정도 됐어. 우리는 집에 들어가서 쉬고 또 다시 내일 다시 나오자 그리고 나와 선출이는 거기 다시 들어와서 잠을 자고 아침에 나왔다.
그때는 이미 도청하고 장동로타리를 제외하고는 군인들이 전부 철수를 하고, 또 그날 KBS는 전부 불에 타고, 자기들이 불을 지르고 피해버렸는가 군인들도 전부다 철수를 해버린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이 되어서우리들이 비교적 자유스럽게 모일 수가 있었어. 그래서 YWCA와 녹두서점에 모여서 대책을 논의하고, 또 녹두서점 뒷방에서는 상집이형이 주동이 되가지고 화염병을 만들고, 고등학생들 효석이 이런 얘들이 화염병을 만들고 송백회 형수들이 모여서 화염병 만든 것을 도와주고, 또 모여서 프랭카드를 만들고 어쩌고 이렇게 해서 21일이 그렇게 해서, 오후 아니 오전에 또 금남로 대치 상황에서 죽은 시민들 시체를 리어카에 끌고 사람들이 다니면서 흥분하고, 또 그 시체들이 구 동구청 뒤쪽에 6-7구 정도를 모아서 늘어 놓고, 막 그런 상황이었죠.
그러고 그때 아시아자동차에서 그 만들다가 만 전차라든지 뭐 트럭 같은 거 이런 것을 끌고 나와서 계속 도청을 향해서 진격하고, 그때 계엄군이 정조준을 해서 사격을 시작을 하고, 정조준을 해서 사격을 할 때 그때 우리는 녹두서점에 들어가 있고, 또 막 이런 상황이어서 정확한 기억이 안나고, 그러고 21일이 말하자면 계엄군이 도청에서 철수를 하던 날이었죠. 22일날, 그러니까 내가 21일날 밤을 어디서 잤는지 기억이 안나네.
22일날 다시 도청 앞에 모여서 그 예술회관 앞에 대학생 모이라고 그래서 일부 대학생들은 도청안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YWCA로 들어가고 인자 무엇인가를 해야 될 것이냐? 그래갖고 거기서 팀을 짜가지고 거기서 차량홍보반 홍보반 뭐 이런거 아니다 뭔가 팀을 짜야 한다고 그래서 이런저런 회의를 하다가 그러다가 도청앞에서 궐기대회가 열리니까 자연스런 보고대횐가 뭐 이런 것이 열리고, 어떻게 하다가 나는 인자 그날 그날 처음으로 인자 집에 들어가서 옷 다 갈아입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궐기대회할 때 장휴동이라고 태평극장 사장이었다든가, 그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뭐라고 하니까 김종배라고 하는 조대학생이 올라가서 마이크를 뺏어불고 뭐라고 연설하고 그런 것이 기억이 나는데, 집에 들어와서 나는 씻고 잠을 잤다.
그 다음날 보성건설이라고 그때 태평극장 근처 어디에 있었는데 거기서 만나기로 해서 보성건설을 갔는데 아무도 없어서 다시 YWCA로 갔다고 그래서 거기로 가서 보니까 모여가지고 무슨 홍보팀을 어떻게 짜자 그래서 나는 다시 녹두서점 쪽으로 다시 와서 거기서 인자 막 오니까 회의가 끝나가지고, 상원이형이 나오다가 나를 보고 우리 들불야학 팀은 광천동에 가서 유인물 홍보를 맡기로 했다고 그래서 같이 가자고 해서 광천동으로 왔다.
거기서 상원이형이 나보고 유인물 홍보팀 조직정비를 다시 해라 그래서 거기서 경국이나 동근식이 또 성섭이 윤순호 또 용준이 이렇게 모여가지고 거기서 투사회보 팀을 정식으로 조직을 했어요. 그래서 문안은 상원이 형이 도청 수습위원회에서 결정된 내용을 갖다가이리 전달해주면은 우리가 등사를 하기로 하고, 그렇게 하려고 보니까 말하자면 물자조달도 필요하고 배포도 해야 되고 그래서 그때 말하자면 문안작성, 배포, 그 다음에 등사, 이런 식으로 세팀정도로 나눴어요.
부서를 세팀으로 나눠서 문안은 상원이 형이 가지고 오면은 인자 내가 전달을 하고, 그다음에 물자조달은 내가 경국이를 팀장으로 시켰는데, 지금은 호남대 교수로 되있는, 김경국이를 물자조달을 해라고 하고, 처음 어떻게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경국이를 데리고 시내에 충장로 5-6가에 지물포가 많은데, 그쪽을 데리고 가서 혹시 모르니까 호신용으로 총을 하나 메고 지물포를 하나 두드렸죠.
주인이 있는 경우는 셔터를 열고 나오면 돈도 좀 가지고 가서 우리가 돈이 이것밖에 없는데 종이 좀 주시오 우리 시민들 홍보물 만들려고 하는 거다. 그러니까 주인이 마음씨 좋은 사람은 우리가 한 돈만원 주면은 한 5만원 어치 주고 어떤 사람은 돈도 안받아불고, 약간 구두쇠같은 사람은 한 돈 만원주면 한 만이삼천원 어치 주고 그런 식으로 해서 종이를 구해서 계속 종이를 공급을 하고, 그리고 인자 필경이나 등사는 용준이가 주로 필경.[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