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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 봐라
구 제 필(ID: gjp0205. 제96기)
인연
첫 손녀가 태어나기 전에, 제 어미가 임신 5개월쯤 되었을 때 임신한 사실을 알았고, 또 ‘아버님, 어쩔까요.’ 하는 말에 임신한 아이가 여자 아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며느리의 말과 그 어조와 태도로 미루어 아버지가 섭섭하게 생각할 것을 짐작하고, 또 아버지가 섭섭하기 전에 우선 자신이 먼저 불만스럽고 섭섭하다는 느낌이 있었음을 얼른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느낌은 덤덤했고 손자를 갖게 되었다는 실감보다는 내 아들이 벌써 아버지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생각에 앞서 섭섭해 하는 아들 내외에게 아버지로서 무언가 위로가 되고 태어날 아이에게 누가 되지 않는 말로 답해 주어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생명은 외경의 대상이란다. 아들이든 딸이든 건강하게 태어나는 게 첫째이니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마라. 아들은 다음에 또 나면 안 되겠냐.’하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 태어날 손녀의 이름을 지어 보기 시작했다. 항렬에 따라 ‘희’자를 넣어 지어 보기도 하고, 30여 년 전에 딸애의 이름을 지었던 기억을 되살려 순 우리말과 한자말을 번갈아 가며 지어 보기도 했다. 아무튼 손녀가 태어나기 전에 그의 이름을 대충 지어 거의 마무리해 두었다.
손녀가 태어나기 전에 아들 내외를 따로 분가시키기로 하고 분가시킬 집을 물색하였다. 그러나 막상 분가시키려고 하니 어느 곳에, 어떤 형태의 집을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인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저희들이 알아서 구해 보라고는 하였으나 아무래도 깊은 생각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나중에라도 섭섭하면 그 때 우리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미안할 것은 물론 부모로서의 도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만 예정일이 거의 다가온 11월 옆 아파트에 살던 사람이 갑자기 이사를 가겠단다. 그래 잘 되었다 싶어 그들이 나가면 그 아파트로 보내기로 하였다. 12월 중순, 살던 사람들이 이사를 간다더니 며칠씩 늦어지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사를 가서 출산하기는 어렵고 출산해서 이사를 가야 하지않나 하고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출산 예정일이 꼬박꼬박 닥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들이 나가고 며느리는 산달이 다가왔다. 이사를 하지는 못 한 것이다. 그리고 손녀가 태어났다.
손녀가 태어난 것은 12월 29일이었다.
산기가 있어 며느리가 입원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친구들과의 약속대로 지리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문수골에서 자고 다음날 쌍계사, 불일폭포 보고 화개장에서 점심을 먹으려는데 아들이 휴대폰을 걸어왔다. 방금 손녀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예상했던 것이라 별로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무언지 기쁨 같은 것이 가슴을 툭 치는 것이었다. 아들의 약간 들뜬 듯한 목소리가 가슴을 슬쩍 달아오르게도 하는 듯 싶었다. ‘몸무게가 3.4kg으로 건강하고, 산모도 건강하게 순산했어요.’ 다른 산모들은 몇 시간씩 산통을 겪는데 입원하자 바로 태어나서 거의 산통을 겪을 시간이 없었단다. 또 태어난 신생아도 용모가 깨끗하고 소리도 컸단다. 퍽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2월 29일. 이 날은 내가 태어난 날이다. 집에서 음력으로 생일을 지내기 때문에 음력만 기억할 뿐 대부분 양력은 잊어버리는데 내가 태어난 날이 양력 12월 29일이다. 그런데 이 날은 음력으로 11월 18일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음력 생일날이다. 손녀는 양력으로는 제 할아버지와, 음력으로는 제 증조할머니와 같은 생일날을 갖게 된 것이다.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대단한 인연이라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만일 양력으로 생일을 차리게 된다면 나와 같이, 음력으로 생일을 차린다면 돌아가신 어머니와 같이 생일을 차려야 한다. 나를 위해 28살 청상으로 평생을 살다 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이게 범상한 인연은 아니지 싶다.
손녀와 처음 대면한 것은 애가 태어난 다음 날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오후에 광주에 도착하여 집에 들렀다가 아이들이 있는 산부인과병원으로 갔다. 마침 산모인 며느리는 물리치료차 자리를 비웠고 아이만 침대에 누워 있었다. 살결이 깨끗하고 머리가 거멓다. 어제 태어난 아이 같지 않게 단아하게 보인다. 배냇짓을 하느라 가끔 팔을 내젓고 놀란 몸짓을 한다. 눈을 뜨기에 보니 까맣고 맑은 게 더욱 귀엽다. 그 날 예방주사를 맞힌단다.
손녀가 태어난 사이 그가 자랄 집은 살던 이가 이사 가고, 2주여 동안 입원해 있는 사이 아파트 내부를 손질해 짐을 옮겼다. 결국 며느리가 입원해 아이가 태어난 사이 그들이 살고 자랄 집으로 옮겨 간 것이다. 아이의 출생에 맞춰 새 집으로 이사를 간 것이다.
손녀 이름은 태어나기 전에 지어 두었으나 막상 태어나니 아내와 아이들이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첫 아이도 되고 아들과 딸 이름을 내가 지어 쓴 것에 다소 미련이 남았던지 모르겠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아내보다 알아보라고 했더니 이름 짓는 이에게 알아보니 한글은 그대론데 한자는 한 글자를 바꾸라고 하더란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고 해서 예지라고 출생신고를 하였다.
컴퓨터와 함께
손녀가 태어나 6개월쯤 지나니 TV의 화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자연히 각 방송의 어린이 프로를 찾아 보여 주었다. 그러는 사이 기고, 걷기 시작하였다. 11개월이 넘어 서자 물체를 잡고 서서 옆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TV의 옆까지 가서는 TV의 각 버튼을 눌러 화면이 바뀌거나 꺼지거나 소리가 커지면 제 나름의 반응을 소리를 크게 내거나, 제법 기쁜 표정의 움직임을 보이며 어른들을 보는 것이었다.
어느 날 윤 교장과 손자들의 이야기를 하다가 TV 이야기를 하면서 비디오테이프나 책을 사다 주어야 하지 않을까 했더니 자기 손자 아이에게는 네이버의 사이트에서 동요를 찾아 들려 준다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컴퓨터 공부를 하면서도 컴퓨터에서 자료를 찾아 아이에게 도움을 줄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 했던 것이었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마음이 있어야 보인다더니 매일 컴퓨터를 하면서도 그 생각은 못 했던 것이다. 그저 공부만 했지 그것을 활용하고 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생활에 활용하지 못하는 공부, 그게 어찌 필요하랴. 그 날 당장 집에 가서 인터넷을 켜고 네이버 사이트를 더듬어 보았다. 상단의 서비스 란에 쥬니버/유아를 클릭하고 들어가니 깨비키즈를 비롯한 몇 개의 하위 카테고리가 뜬다. 깨비키즈 가운데 동요듣기가 있다. 이것이 우리 아이에게 알맞은 동요들이다. 물론 이제 돌도 안 지난 아이가 동요의 내용도 리듬도 알 리가 없지만 아이들의 아름다운 상상과 생각을 노래한 정평난 동요들이니 아이의 정서를 순화하고 순치시키는 데는 다소의 도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곰 세 마리/ 귀여운 꼬마/그대로 멈춰라/사과 같은 내 얼굴/악어떼/숫자놀이등의 동요와 외국 동요가 몇 곡 들어 있었다. 신기한 것이 처음에는 별로 듣는 것 같지 않더니 반복될수록 아이의 시선이 모니터에 집중되는 것이었다. 돌이 지날 무렵부터는 제가 우리를 컴퓨터 앞으로 끌어가 프로그램을 들려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물론 말을 제대로 못 하니 몸짓과 소리로 의사 표현을 하지만 그의 요구만은 넉넉히 전달되는 것이다. 또 곰 세 마리의 노래에서는 그림만 보아도 그게 곰이라는 것을 아는지 ‘엄마’ ‘아빠’라는 말을 붙이기도 했다. 제가 아는 단어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리듬으로 반응을 보인 것은 악어 떼였다.
‘엉금엉금 기어서 가자, 악어 떼가 나올라. 악어 떼’ 하고 끝나는 부분에서 ‘아어아’하고 소리를 올려 하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컴퓨터 음악에 적극적 반응을 보인 것은 6,7월의 독일 월드컵 때였다. 전국적으로 월드컵 열풍이 분데다가 붉은 악마의 응원까지 거리에 넘쳐 온통 국민이 열광의 도가니였다. 우리집이라고 예외는 아닌 듯 아이가 백화점에서 손녀의 붉은 악마 셔츠와 머리띠를 얻어왔다. 텔레비전에서 보고 눈에 익은데다 또 붉은 색이어서 녀석의 마음에 들었던지 자꾸 입겠다고 하고 입혀 주면 좋다고 할 뿐 아니라 컴퓨터의 음악을 들려 주면 아주 좋아 하며 춤을 추고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태극전사 파이팅의 ‘짝짝 짝짝짝’ 하는 박수 치는 소리와 리드미컬한 노래는 그의 마음에 남는지 한 동안은 그 흉내를 제법 내곤 했다.
컴퓨터를 활용한 아이의 음악 듣기는 자라는 동안 계속되고 있다. 네이버의 쥬니버에는 동요/이어듣기가 카테고리로 있는데 그 하위에 아이가 잘 때, 춤 출 때, 혼자 놀 때의 시기별 구분과 동물, 자연, 계절의 재재별 구분, 그리고 30분, 1시간, 전부 듣기의 시간별 구분이 있어서 우리 아이에게 다양한 형태로 들려 줄 수 있게 되어 있다. 아이의 집과 우리 집의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아예 쥬니버네이버의 바로가기 아이콘이 설정되어 있다. 아들, 며느리는 물론이고 컴퓨터에 거의 문외한인 아내까지 클릭만 하면 화면을 열어 아이에게 노래를 들려 줄 수가 있도록 정리해 놓은 것이다.
또 컴퓨터를 활용한 것은 아들이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올려 놓은 것이다. 덩달아 내가 컴퓨터를 배우고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기 시작하면서는 두 집의 컴퓨터에 모두 사진방을 만들어 아이 중심의 사진 정리 폴더가 생겼다. 그러면서 차츰 가족들의 옛날 사진까지도 스캔해서 실어 놓았다. 이 사진들을 제가 보고 알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18개월 쯤 지나자 제법 사진을 보고 판별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성인이 인식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제 나름의 해석과 지식을 펴 보였다. 제 사진을 동생인 아기 사진이라든가, 젊은 여자 사진은 고모나 이모로 답하는 것이다. 이는 제가 인지하는 수준이 그렇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생일 축하 케이크를 놓고 촛불 켜고 가족이 모인 장면에서는 어김없이 ‘추카추카’라고 한다. 또 할아버지 안경을 제가 쓰고 찍은 사진에서는 ‘안경’이라고 특별한 사물에 관심을 두어 대답하는 것이다. 너무 당연하고 귀엽기만 하다. 아들이 바탕화면에 제 사진을 깔아 놓은 것을 보면서는 ‘예지, 예지’ 하면서 아주 즐거워 한다. 따라서 컴퓨터를 열고 보는 것은 저에게 아주 즐거운 일인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본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제 머리와 귀에 남은 것 가운데 ‘뽀로로’가 인상적이었던지 어린이 프로그램은 모두 ‘뽀뽀’라고 한다. 따라서 컴퓨터에서도 어린이 음악을 열어 달라고 할 때는 ‘뽀뽀’라고 하며 의사를 전달한다. 제가 컴퓨터 몸체의 스위치를 넣으면서 ‘뽀뽀, 뽀뽀’하면 바로 네이버의 동요를 들려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원용하여 아예 이름을 짓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하는 것이다. 제 아비가 개그맨 정선희가 출연한 DVD ‘둘리와 함께하는 글자놀이’를 사다가 들려 주자, 이것을 ‘재미 뽀뽀’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따라서 ‘재미 뽀뽀’ 하면 이 DVD를 들려 달라고 하는 말이다. ‘가, 나, 다, 라 가나다라’ 하거나 ‘ 가가가가’ 하고 ‘가’와 관련된 낱말을 열거하는 노래로 엮은 것이 DVD에 실린 내용인데 그 중에 제가 알아 듣고 기억나는 것만 엮어서 노래하거나 흥얼거리는 것이다. 마냥 귀엽고 그것을 알아 듣는 가족은 그저 즐겁기만 하다. 제가 한참 듣다가 갑자기 실증이 나는지 몸체의 꼭지를 꾹 눌러 테이프를 갑자기 빼 우리를 당황하게만 하지 않는다면 더욱 즐거운 것이다. 아내도 컴퓨터의 마우스로 이 DVD를 열고 닫을 수 있으니 이 녀석으로 우리는 더욱 행복한 것이다.
그런데 차츰 자라면서 지나치게 자주성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우리를 부담스럽게 한다. 저를 안고 모니터 앞에 앉아 보여주고 들려주면 얌전히 듣고 보는 게 아니라 제가 하겠다고 ‘예지가, 예지가’ 하면서 마우스를 제가 끌어당겨 마음대로 클릭을 하는가 하면 키보드를 끌어당겨 마구 두드려댄다. 때로는 무관하게 잘 진행되기도 하지만 어느 때는 마구 새 장면이 뜨고, 펼침 목록이 떠서 아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래도 귀여운 것은 귀엽다.
바깥나들이
돐이 지나고 봄이 되자 녀석을 안고 바깥바람을 쏘이는 일과가 시작되었다. 제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아내나 내가 저를 안거나 밀차에 싣고 바깥일을 볼 필요가 있을 때, 밖으로 나간 것이다. 제 집에서 저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와 밀린 일을 처리하거나 농협에 가서 통장정리를 하거나 마트나 점포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 오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그러다가 제가 혹시 먹으려나 싶어서 집 앞 제과점에서 과자나 빵을 가끔 사 주었다. 아직 일반 음식물을 먹는 단계가 아니라 무르고 알갱이로 된 음식물들을 가려 먹이는 수준이어서 그러한 수준의 제과류를 사 주었다. 그런데 날이 가면서 장난감 같은 물건을 가지고 오는 재미가 이 아이에게 생긴 것이다. 그래 물건을 산다는 개념이 없는 아이는 곧잘 상점의 물건이 집에 있는 제 장난감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지 손에 잡히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은 들고 오려고 억지를 부리는 빈도가 잦아졌다.
녀석이 신을 신고 걷기 시작한 것은 늦은 봄 즈음이었다. 노랑 신을 사다 주니 거실에서 신고 자박자박 걷는다기보다 뒤뚱뒤뚱 걷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게 몸을 움직였다. 아무래도 몸 움직임이 불안하게 보일 뿐이었다. 밀차에만 의존하던 외출이 신 신고 밀차 타고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 신을 신고 걷기 시작하면서는 아예 밀차는 타려고 하지 않아 처음에는 끌고 뒤를 따르다가 다음부터는 놓아 두고 다녔다.
외출하는 영역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과점까지 50여 m정도만 외출하는 것이 초여름까지의 여정이었다. 차츰 욕심을 내고 떼를 써서 그보다 몇 배나 넓어지게 되었다. 제 눈에 보이는 쪽을 가리키며 가자고 하면 대개는 그대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금 더 간 것이 200여 m는 족히 되는 R&B 문구점이었다. 그 앞에는 크레인 뽑기 기계가 있어 각종 인형이나 장난감이 밝고 환한 불빛을 받고 갇혀 있었다. 그것이 제 눈에 색다르게 보였던지 가다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상점으로 들어가더니 여러 가지 장난감(문구)이 있으니까 제 마음대로 이것도 만져 보고, 저것도 만져 보고 하다가는 하나 챙겨 드는 것이었다. 다행이 그것이 저에게 알맞은 것이면 무방한데, 엉뚱하게도 아이들의 학용품이거나 도저히 사 줄 수 없는 것인 경우에는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서 달래고 어르고 해야 했다. 핸드폰 고리, 비닐 가방, 하트녹음기, 물놀이용 공 등 아직은 제가 가지기에는 맞지 않으나 그나마 장난감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여름이 한창인 7월경에는 반경을 더욱 넓혀 2차 삼익아파트 앞까지 진출하였다. 그 곳에도 문방구가 있었는데 그 곳은 초등학교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곳이어서 각종 떼기, 풍선, 공, 만들기 용품, 게임기 등이 있었다. 그런데 그 곳에 가면 다른 초등학생들이 공을 가지고 놀거나 게임기에서 게임하는 것을 계속 보고 싶어 할 뿐만 아니라 저도 그런 것들을 갖겠다고 집어 드는 것이었다. 설명하기도 어렵고 설득하기도 어렵고 참으로 쩔쩔 매야 했다. 야광공, 떼어붙이기는 거기서 산 것들이다.
8월 들면서는 이제 제법 산책 코스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제과점, 문구점, 유정유치원, 대주아파트, 텃밭, 그리고 우리 아파트의 어린이 놀이터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제가 걷기에는 조금 벅차고, 그렇다고 안고 오기에는 내 힘이 모자랐다. 자연히 걸리다가 안다가 업다가 해야 했다. 그런데 내 마음대로 걸리고 안고 업는 게 아니라 녀석의 동의가 항상 필요했다. 차가 오니 아이 무섭다고 위협적 분위기로 안고 가거나, 아이 힘들다 이제 좀 걷자 하고 슬그머니 내려 놓아야 했다. 그러노라면 녀석은 걷는 것을 더 좋아 해서 아무래도 불안하고 느린 행차가 되었다. 미장원 앞에서는 화려한 표지의 색등이 눈에 뜨이는지 ‘야’하고 환성을 지르면서 서서 쳐다보고 웃고 마냥 즐거워한다. 때로는 가다가 돌아서서 다시 제 자리로 오기도 했다. 또 가다가 닭을 사육하는 유정 유치원의 닭장에 이르러서는 ‘꼬꼬’라며 쭈그리고 앉아 제가 일어서고 싶을 때까지 있다. 가로수로 심은 나뭇잎이나 집 울타리에 핀 꽃, 텃밭 주위의 길옆에 핀 코스모스와 나팔꽃, 텃밭의 여러 작물 들 모두가 예지에게는 ‘꽃’이었다. 만나는 대로 ‘꽃’이라며 한 번씩은 말하고, 웃고 흥얼거리고 해찰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진짜 꽃을 만나 즐거운 경우도 있었다. 우리 집에서 걸어 제 집으로 가다가 우리 아파트의 7・8라인에 이르렀을 때, 승용차가 앞에 서더니 양장을 곱게 차려 입은 중년 부인이 화려하게 장식된 꽃바구니 하나를 내려 놓고 다음 짐을 내리기 위해 차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 순간 녀석이 꽃바구니에 가더니 ‘야, 꽃’ 하고 그 앞에 앉아 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꽃, 꽃’ 하는 것이었다. 순간 대견하기도 하나 실례가 될 것 같아 안고 옮기려니 녀석이 버티고 앉아 있으려고만 한다. 부인이 짐을 내리고 그 모습을 보더니 녀석의 볼을 툭 건드리고 ‘꽃 줘?’ 하더니 그 꽃바구니 속에서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골라 대견스러워 하는 미소와 함께 넘겨 주었다. 장미를 받아 쥔 녀석의 표정이 금세 밝아지며 일어섰다. 내가 고마운 생각으로 ‘예지야, 안녕해야지.’ 하니까 예지가 고개를 꾸뻑하고 숙이는 것이었다.
바깥나들이를 하면서 녀석의 정서와 사고의 범위와 양태는 다양하게 변하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새와 구름과 비행기를 보며 감탄사를 발하고, 그것들을 구분하게 되는가 하면, 햇볕이 비치는 길을 걷다가 제 그림자를 알아보고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며 좋아하기도 하고 같이 간 나나 제 할머니더러 같이 서서 그림자를 보라고 손짓도 하는 것이었다. 그게 실내로 연결되어 거실의 조명등을 의자 위로 올라가 켜고는 등불 아래 들어나는 제 그림자를 보고 그림자놀이를 하기도 하였다. 그 때 다른 사람의 방해는 강한 떼 부림으로 막았다.
이제 녀석의 산보는 집 근처에 머물지 않고 제 아빠가 근무하는 학교와 시내 백화점까지로 넓혀지고 있다. 집에 있다가 제 아빠나 고모가 있으면 ‘백화, 백화’ 하며 나가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말 배우기
모든 아이들이 그렇겠지만 녀석이 처음으로 선명하게 발음한 것은 ‘엄마’와 ‘아빠’였다. 돌이 지나고도 두 단어 외에는 별로 말이 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 6월이 지나면서 제 이름을 부르면 반응을 보였다. 그냥 제 이름을 부르면 ‘예’하고, 당시 개그에 등장하는 말투로 ‘구예∨지’하고 끊어 부르면 ‘아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단음절어를 발음하기 시작했다. 단음절이든 다음절이든 모두 첫 음절만 소리 내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모(고모), 빠(바나나)라고 하고 제 이름은 ‘지야’라고 했으며, 컴퓨터는 켜라거나 꺼라는 뜻의 말을 모두 ‘꺼’라고 하였다.
아내가 제 얼굴의 부위를 가리키며 코, 입, 귀, 눈을 가르쳐 주자 말하지는 못하고, 아내나 내가 발음하는 대로 제 코, 입, 귀 눈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대로 의미를 익혔는지 ‘할아버지 코’ 하면 내게 다가와 내 코를 손으로 가리키며 웃고, ‘할머니 입’ 하면 제 할머니의 입을 손으로 가리켰다. 서툰 걸음걸이로 걸어가 손으로 상대의 해당 부위를 가리키는 동작이 귀엽기만 했다.
8월이 되면서 동물의 이름을 ‘꼬꼬, 멍멍, 깩깩(오리)’과 같이 의태/의성어로 익혔다. 그리고 쌀에서 나방이가 나와 날아다니기에 ‘야’하고 잡았더니 다음부터는 나방이는 모두 ‘야’였다. 그리고 나아가 파리, 개미, 모기까지도 ‘야’로 부르고 그와 유사한 것들은 모조리 ‘야’라고 하며 잡는 시늉을 했다.
10월에는 단음절 단어가 증가하였다. 제가 먹는 조기나 갈치 고기는 ‘꼬’ 포도는 ‘포’다. 이 무렵에 ‘돈, 방, 신’ 발음을 분명하게 하고 뜻을 알았다.
23개월이 되는 11월에는 많은 행동과 어휘, 발음의 변화가 있었다.
먼저 배변 훈련이 이루어졌다. 제 어미가 아우를 낳느라고 출산휴가 중이어서 데리고 며칠 함께 지내더니 소변과 대변을 며칠 사이에 확실하게 가리게 되었다. 소변이 마려우면 ‘쉬’라고 하며 바삐 제 하의를 내리는 시늉을 하고, 대변이 마려우면 ‘똥’하고 확실하게 의사 표시를 했다. 대/소변을 가리는 것이 너무 쉽게 이루어져 과연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하고 은근히 걱정했는데, 단지 제 팬티에 조금 젖거나 신호가 늦어져 실례되는 경우가 있기는 했으나 벌써 몇 달째 낮은 물론 밤에도 실례하는 일이 없었다.
어휘의 증가도 현저해졌다. 품(풍선) 시어(싫어) 야(거부하는 소리, 아니야)) 김치, 귤, 밥, 껌, 김, 감 등의 단어를 구사하고, 제 감정을 나타내고, ‘안 먹어’와 같은 의사 표현의 문장도 썼다. 할아버지를 부르는 소리를 ‘하씨’로 하더니 호격조사 ‘야’를 붙여 부르기도 했다. 아마도 음절수가 많고 발음이 쉽지 않으니 제 귀에 들리는 대로 축약하고 활음화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만 두 살이 되는 12월부터의 어휘 증가와 발음 변화는 정말 놀라웠다. 그리고 의미의 체득도 빨라 제 주변의 사물과 상황에 대해서는 제법 의미있는 전달을 하기도 했다. 고모와 이모, 삼촌과 아저씨(아씨), 오빠와 언니를 구분하고, ‘있어’와 ‘없어’를 가리고, ‘먹어’와 ‘안 먹어’를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같은 와이셔츠도 제 아빠 것은 ‘아빠 것’, 할아버지 것은 ‘하씨 것’으로 말하고 제 의사와 다르면 ‘아니’라고 했다.
백화점에서 세일 책자나 홍보용 책자를 보내오면 제가 펼쳐 들고 그림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요건?’하고 묻고 대답을 구한다. 대답이 제가 아는 것과 부합하거나 제가 잘 모르는 것이면 다음으로 넘어가 ‘요건?’이 계속되지만, 제가 아는 것이면 ‘하품(화장품)’ 또는 얼굴에 바르는 시늉을 해 틀렸음을 말하고, ‘아빠 거’ ‘엄마 거’ 하며 주된 사용자를 말하기도 한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노래를 신나게 부르며 발음 연습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가 없다. 가끔은 가다가 엄마나 맘마 같이 음절을 이루는 말이 있기도 하나 도무지 연결이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녀석은 재미가 있는지 마구 불러댄다. 그리고 가다가는 ‘시계는 ?!?!%$@’ 하고 시계 노래를 부르다가 나더러 부르라고 ‘시작’한다. 내가 알아듣고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독딱’하고 부르면 녀석은 그 이상 신날 수가 없다. 춤을 추며 저도 노래를 한다. 발음도 줄거리도 음정도 별로이지만 그걸 듣는 나는 그만 그 어떤 노래보다도 감동적이다.
만 두 살이 넘어선 녀석은 이제 거의 제 의사를 전달한다. 전화를 가져다 주며 제 아빠나 엄마에게 하라고 하기도 하고, 전화를 걸면 제가 아는 내용을 말하기도 한다. 단지 듣는 사람이 잘 새겨 들어야 알지 누구나 그의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다.
“고모. 친구. 노아.”
고모하고 전화를 했는데 고모는 친구하고 지금 놀고 있다고 한다는 것이다.
“가지마. 못 가. 추워.”
저하고 놀지 가지 말아라, 못 간다. 지금 춥다는 뜻이다.
사랑으로
내가 젊었을 때 중국 어느 문호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어느 힘 있는 사람의 집 돐 잔치에서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이 아이는 장래 장군이 될 재목이라느니 재상감이라느니 하고 침이 마르도록 흰소리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차례가 되어 무언가 한 마디 해야 하는데 자기는 미래가 불확실한 아이의 장래를 무어라고 이야기하기가 난감해 ‘어, 이 녀석 봐라. 이 녀석 봐라.’ 했다는 줄거리였다.
자라고 있는 아이는 무한한 미래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어떻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직업적으로 또는 아첨 삼아 아니면 희망 삼아 무어라고 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확실한 단정은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내 손녀가 정말 어떻게 자라 어떤 삶을 살아갈지 모른다. 단지 이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서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를 염원할 뿐이다.
옛 어른들은 자식을 기를 때 엄이자(嚴而慈)라 하여 가정교육은 엄하게 하되 마음 깊이 사랑으로 교육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엄과 자가 대등한 개념으로 자리하여 사랑보다는 엄격함을 강조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인간 사회가 투쟁과 경쟁으로 얼룩지다 보니 살아남기 위하여 강하게 키워야 승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논리에 근거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교육하기에는 너무 비정하고 차라리 태어남이 짐스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의 생존경쟁을 한층 살벌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자식은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란다. 따라서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어린이와 그렇지 못한 어린이 사이에는 사물을 보는 관점이 그만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물을 사랑으로 볼 수 있는 눈, 그것은 인간관계를 한층 따뜻하게 하고, 그것이 확대된다면 인류 사회는 증오가 한결 줄어드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녀석이 자라는 동안 내가 그의 곁에 있다면 항상 사랑을 먹고 자랄 수 있도록 사랑으로 도와 주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