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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자 수업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이상 실질적인 왕의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이렇게 미묘한 위치에 놓여있 던 정종은 어떠한 자세를 가지고 정권의 운영을 구상했을까?
형제애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형제애를 회복한다' 함은 곧 왕실세력의 재결집을 의미하며, 나아가서는 국정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기초였다. 또한 개혁세력들이 추구하고자 한 여러 정책사항
들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이들의 내용은 그 대표적인 사항을 중심으로 해서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의 역할은 어찌보면 태조와 태종을 연결하는 안전한 징검다리로서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한다.
금하는 하교를 내리면서 말하고 있는 부분을 보면 그는 나름대로 당시의 정치와 사회의 안정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즉 당시의 혼란한 상황을 틈타 기회를 엿보면서 관직에 나아
가고자 하는 자들이 몰려다니면서 참소와 무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무리를 지어가면서 몰려다님으로써 큰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이것은 정종이 당시 정치상황 속에서 벌어지게 된
여러 문제의 근본적인 것에 대한 인식과 함께 일차적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작업으로 분경을 금지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 후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되고 사병의 혁파가 이루어진 시점에
가야 비로소 개국초의 혼란한 정치상 황은 이제 중앙정부의 주도로 움직여 나가게 되는 것이다.
행정과 군정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아가 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로 이렇게 제정되었던 것이다. 그 내용은 일족 중 3, 4촌내의 근친이나 각 절제사의 대소군관을 제외한 일체의 대소
관리가 서로 사알(私謁)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분경 금지대상이 확정되는 것은 성종대에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는 점을 볼 때 당시로선 규제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다시금 정종에게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의 한계였던 셈이다. 어찌보면 이 시기를 기점으로하여 어떻든간에 왕권을 확립
하고 이를 스스로 실현하고자 했던 노력이 무너지고 동생 즉 태종의 본격적인 정계복귀가 시작됨에 따라 정안군은 세자에 책봉되었다.
정종은 정치다툼 속에서 권력의 기반을 장악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면서, 혹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이제는 물러설 때가 된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