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종이 사이에 목련잎을 넣는다 목공망치로 두드리니 푸른 흔적이 배어난다 황금빛으로 빛났던 지난 봄의 추억이 깊이 스며 나온다 추억은 우리를 생기있게 한다 아들놈의 방학숙제를 하느라 목련잎을 따다가, 망치질을 하니 소리없이 푸른 빛으로 사라져간다 푸른 빛으로 고요히 스며나는 삶의 빛깔 생애가 아름다운 사람은 이렇게 조용히 사라져 가나보다
손을 기리며
어느 시인은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긴 손톱의 손을 좋아한다지만, 나는 털이 적은 동양인이기에 그저 연꽃잎 같은 손 하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 하나 만나고 싶다, 그러니까 모란처럼 후줄근한 손 아니라 칸나처럼 징그런 손 아니라 진흙에서 자라나서 진흙에 물들지 않는 그런 차고 정갈한 손 하나 모든 욕망을 잠재워 줄 어진 손 하나, 中通外直의 마음 지닌 그런 손 하나를 오늘은 문득 만나고 싶다, 기필코 만나고 싶다
農先生과의 하루·1
그는 두루마기를 입고 다닌다 개량 한복에 맞게 개량된 두루마기다 속에는 황토빛 겨레옷을 입는다 한동안 적조하여 같이 밥이나 먹자고 했더니 손수 빚은 청자 술병과 잔 두 개를 안고 왔다 술병 속에는 연꽃이 상감되어 있다 그에게서는 흙 냄새가 난다 매연과 속도에 오염되지 않은 그에게선 마른 참나무 냄새가 난다 우리는 함께 양평 전주관으로 가서 호젓한 잔칫상을 벌이고 돌아오는 길에 찻집에 들렸다 씁쓸한 십전대보탕에 꿀 바른 대추를 시켜먹었다 고목예술을 하는 <선녀와 나무꾼>주인이 동동주 한 병을 서비스하기에 그걸 나누어 마시고 흥이 나선 아이들을 부추겨 <진도아리랑>을 부르게 했다 마침내 신이 동하여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백악관 노래방으로 갔다 그는 송창식의 노래를 잘 부른다 <푸르른 날>이나 '자, 떠나자, 고래 잡으러' 라고 외치는 <고래사냥>은 일품이다 나는 툭 하면 부르는 노래가 <골목길> 아니면 <몰래 한 사랑>같은 노래다 '몰래한 사랑'이라니? 우리는 유쾌하게 헤어졌다 다음 번엔 아내가 잘 만드는 함박스테이크에 와인 한 병을 마련해 놓고 서구적인 분위기로 한번 놀아보리라 기약 없는 다짐을 하며 돌아올 즐거운 만남을 기다린다
오후 세시의 커피
오후 세시의 커피는 방장스님의 죽비소리다
뜨거운 한낮 피어나는 배롱나무의 합창이다
그것은 오전 내내 울렸던 요령소리이며
독이 허물 벗어 약이 되는 소리이며
지장보살이 그의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다
나는 쓸쓸히 오후 세시의 커피를 타 마시며
이대로 죽을지라도 허물 벗어
생생한 삶에 이르고 싶을 뿐이다
놀이인간의 꿈
'포켓몬스터'를 모으는 어린 아들에게 나는 횡포한 아비다 그 희한한 이름의 괴물들을 이백여 개나 외우는 아들의 공책에는 알록달록한 스티커가 가득 붙어있다 (어떻게 저 낯선 발음의 괴물이름들을 한두 개도 아니고 이백여 개씩이나 욀까!)
틈만 나면 포켓몬스터 모양으로 만들어진 플라스틱 딱지치기 연습을 한다 포켓몬스터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방과 후 딱지치기로 지쳐서 온 아들에게 지난번의 서약서를 내밀며 다그친다 '구몬학습'은 다 했냐? 이제부터 할려구요 한다 나는 즉시 '머리박아'를 시킨다
'머리박아'를 한 상태에서 묻는다 포켓몬스터는 왜 그렇게 모으느냐? 딱지치기는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해 봐라 모으는 게 재미있어서요 따는 게 재미있어서요 (아들은 그 방면엔 선수다) 더할 수 없는 몰입과 충만의 놀이인간! 아, 그랬구나, 공부가 재미가 없었구나 나는 문득 알타미라 동굴, 그 어둠 속에서 밤낮 벽화 그리던 사람을 생각했다
제 방바닥에다 딱! 딱! 온힘을 다해 딱지를 내리치는 아들을 바라보며 다음날의 노동을 보다 잘 하기 위해 혼신의 힘으로 그림을 그린 옛사람을 본다 아들은 왜 그토록 딱지치기에 몰입하는가!
'어린 왕자'를 만나던 날
동구 밖에 어머니가 보일 때 쯤이면 읽고 있던 책갈피 어디선가 희미한 음악이 들려오곤 했다 그것은 아마도 생 모리스 드래맹 城에서 어린 생 텍쥐페리가 늘 듣던 그 어머니의 피아노 소리와도 같았을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그 소리 때로 사랑이 무너지더라도 우리는 그때 그 소리를 떠올리며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야 한다고, 비록 사하라의 사막에 조난을 당할지라도 우리는 또 다른 카사블랑카로 가서 새로운 마음의 주소를 찾아보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어린 왕자여, 너의 꽃이 있기에 나의 별은 더 반짝이는게 아니겠니? 우리는 모두 별가족이잖아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 해'* 해가 뉘엇뉘엇 질 때까지 책을 읽다가 눈이 감길 때면 어린 시절 동구 밖에 어머니가 나타나길 기다리던 그 마음으로 돌아가리라 돌아가 지중해 깊이 잠겨 버린 어린 왕자의 마음 속 깊이 담겨 있는 그 눈물겨운 우편물을 마저 읽어야만 한다
* '어린왕자'에서
은하계 바깥에서 아미타를 만나다
내게는 달에게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가시우스 성운에 사는 금오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어느 날 경기도 광주 곤지암 2리 묵뱅이의 빌라 한켠 서재에 내가 앉아 있었다 그때 태화산에선 밤송이가 막 떨어지려 하고 있었고 나는 명상에 들어가고 있었다 나의 혼이 빠져 나와 지상 백 미터 지점에서 서재에 앉아 있는 육신의 나를 바라보았다 측은하기 그지 없었다 다시 상승하다가 천 미터 지점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는데 더는 내가 안 보였다 그리곤 대기권을 벗어났다 한참 가니 달이 보였다 거기서 지구 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푸른 알이었다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을 지나고 태양계를 벗어났다 태양계가 다시 콩알만하게 보였다 한참 가니 은하계였다 거대한 은하의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은하의 물에 잠시 목욕하고 다시 수천 수만 수억의 은하계를 지났다 별들이 광속으로 내 곁을 지나갔다 마침내 우주 바깥! 황홀의 바다! 거기 큰 대자로 누워 내 마음의 만다라를 지정해 두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은하우주로 풍덩 뛰어들어 무수한 은하계를 지나고 태양계를 지나고 명왕성 해왕성 천왕성 토성 목성 화성을 지나고 초록빛 구슬이 보였다 달이었다 어린 왕자인 양 잠시 머물러 파랗고 아름다운 알을 바라 보았다 대한민국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곤지암2리 묵뱅이 한켠 서재에 앉아 있는 나의 몸 속으로 돌아왔다 정든 집, 心齋에 든다 그날 이후 나의 혼은 언제나 평온한 坐忘에 들어 있다
태화강을 바라보며
그날 태화강변엔 처용이 술에 취해 웃고 있었다 그는 이미 사랑의 종말을 보아버린 것이다 유행가 가수들이 노래 부르는 사이로 얼굴이 벌건 처용이 춤추고 있었다 새벌 발기 다래 밤드리 노니다가 드러사 자리보곤 가로리 없구나 본디 없는 것을 부질없이 찾아 헤맨들 무엇하랴 비는 내리고 새벽 네 시 태화강변에 비는 흩날리고 새우잠을 자고 일어나니 아무도 없구나 하얀 비요일 아침엔……
사이다를 위하여
너를 만나기 위해 오늘도 사이버공간으로 들어간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임꺽정과 로빈훗도 만나 악수하고 터미네이터와 스폰과 슈퍼맨과도 인사한다 라라 크로포드와 애버타는 너무 바빠 안 보이므로 양귀비나 서시를 만나 한잔 하고는 집으로 온다 버츄얼 잭과 새미를 불러 하던 일을 마무리한다 이렇게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파김치가 될 때쯤이면 교코다테를 불러 '러브커뮤니케이션'을 청해 듣고 마지막으로 너를 부른다, 너의 그 황홀한 춤에 나는 비로소 원기를 되찾고, 맑은 음성으로 부르는 네 노래를 따라 부른다, 그래 진실이 싫어! 아, 언제나 싱싱하게 살수는 없을까? 지치지도 않고 바람 피우지도 않는 나의 연인, 나의 오아시스 사이다여, 그러나 전원을 끄고 밖으로 나오면 다시 이곳은 바람 부는 사막 뿐이려니
첫댓글 교수님 동원대남양주휴먼 카페로 모셔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