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대통령경호실 파견대대에서 근무하면서 제대하기 1 년전이었고 청와대 가까운 곳인 신교동에 방을 얻어 어머님과 같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막내누나가 우리집에 들어서자 마자 채 인사도 건너기전에 느닷없이
- 얘, 동생! 나하고 둘이서 집을 사자 !
...쯧쯧...아니 우리 누나가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벌써 복부인이 되었나..?? 하는 생각에서 멍하니 쳐다보는 나에게 다시
- 너하고 내가 가진 돈을 합하면 집을 하나 살수가 있다.. !!
호 ! 그렇단 말인가 !
나도 점점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1978년도에 부동산 값이 폭등하여 자고나면 집값이 솟아오르고 있던 시기였으니 군대생활을 하는 얼띠기 동생보다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눈치빠른 누나의 생각이 훨씬 앞서고 있었다.
그래서 남매는 즉석에서 부동산 투기계획(?)을 세웠다.
내가 100만원 누나가 350만원 모두 450만원을 가지고 집을 사기로 결심을 하고 실행은 내가 맡았다.
우선 나는 당시 숙부님이 살고 계신 망원동 지역과 또 화곡동 등을 둘러 보았다.
숙부님께서는 망원동에서 대시 42평짜리 판잣집을 추천하셨는데 장차 결혼을 하여 신혼살림을 차려야 할 나의 입장으로는 도저히 판잣집을 매입할 용기가 나지를 아니하였다.
그래서 강서구 신정동 주택단지를 둘러보고는 대지 27평짜리 조그만 한옥을 720만원에 계약해버렸다.
대지는 작아도 방이 다섯개나 되어 안방을 내가 쓰기로 하고 방네개 - 두 가구의 세입자를 거느리는 총각 집주인이 된 것이다.
누나는 조금은 집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으나 그때 몸집이 매우 뚱뚱한 복덕방 아주머니는 총각이 집을 사는 것을 보고는 마치 사위라도 삼을 듯이 나에게 친절을 다했다.
집값은 우리가 신정동 집을 산 뒤에도 계속 폭등을 하였다.
나는 자주 내가 산집을 보러갔는데 매주 50만원씩은 가격이 치솟고 있었다.
당시 중사 봉급이 10만원도 안되었는데 매주 봉급의 다섯배 속도로 집값이 오르고 있었으니....
드디어 서너달을 지나서 정부에서는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였고 결국 집값은 고개를 숙였는데 그래도 그 몇달 사이에 우리 집값은 두배가 올라 1400만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 누군들 할 수만 있다면 부동산에 투자를 아니하랴!
나는 집값의 잔금을 치르고 버젓한 나의 집에 이사를 하고는 공전 1학년 첫 목공시간에 만든 [朴泰鍾]문패를 대문에 붙였으니 그때의 기쁨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리 !
뚱뚱보 복덕방 아주머니가 우리집에 놀러왔다가 군대이야기에서 어머니와 살림을 차릴때 나오는 예의 볼품없는 책상을 밥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는
- 아니 총각 ! 그래 집을 마련하면서 아직 밥상 하나도 없단 말이요 ?
하고는 내손을 끌고 복덕방으로 데리고 가서는 아이들 과외지도를 하고 있는 자기 딸에게 기어이 인사를 시키고 말았다.
- 얘, 희정아 ! 인사하거라 ! 이번에 3단지로 이사 온 총각이란다.
이렇게 해서 하마터면 잠실 베레모가 총각보쌈을 당할 뻔 하였소이다.
ㅎㅎㅎ
그 아가씨 무척 후덕하게 보였었는데...
잠실 베레모
(2) 제대후 한전에 취직하다.
1979년 1월31자로 만 5년간의 군대(하사관) 생활을 마치고 나는 신정동 집에 들어 앉아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꽉 짜였던 규칙생활에서 벗어나게 되니 오히려 엄청난 고독감에 휩싸여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이 넓은 서울 바닥 어느 곳을 찾아가서 누구에게 발을 붙일 것인가 !
막상 그렇게도 제대를 원했지만 나는 서울에서 취업을 부탁할 만한 아는 사람도 없었고 그렇다고 달리 계획이나 대책이 있었던것도 아니었다.
아 !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
앞으로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렇다고 정말로 콩나물 장수나 막노동을 할 수도 없었으니....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제대를 하는 그순간부터 입술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고민에 빠졌다.
단지 막연하게 공전 기계과 출신이니 공부를 하여 취직을 하는 길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금새 한달이 지나갔지만 학교 다닐 때도 게을리한 공부.... 5년간을 군대에서 총부리만 잡고 생활해 온 내가 갑자기 공부라니...ㅎㅎㅎ 지나가는 강아지도 웃을 일이었다.
그렇게 3월5일이 되었던가 ?
신문의 구직란을 뒤적이던 나는 눈이 번쩍 띄었다.
당시 한전과 그 자회사인 한전보수(주)에서 신입사원 모집광고를 낸 것이다.
옳거니...!!
그런데 불과 날자가 20일밖에 남지를 아니하였다.
한전 입사시험이 3월25일이었고 지금 기억이 희미하지만 한전보수(주)가 며칠 앞서 입사시험을 계획하고 있었다.
한번 해보자 !
공수부대 구호가 <안되면 되게하라 !> 아닌가 !
그런데 나는 한전 입사시험 자격에 나이가 초과하여 고졸사원은 지원할 수도 없었고 대졸사원으로 지원을 해야하는데 아무래도 내 실력이 미덥지를 못했다....
그래도 나는 주섬주섬 5년간이나 곰팡이에 찌들은 교과서와 참고서적들을 한보따리 챙겨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그때 우리집에는 큰 조카딸이 와 있었고 어머님도 계셨으니 아무래도 다락방이 한가하고 맘이 편했다. 비록 허리도 펼수 없는 낮고 좁은 다락이었지만...
- 나는 할 수 있다 ! 나는 할 수 있다 ! 나는 한전에 입사할 수 있다 !
나는 다락방에 기어올라가서는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 매고 그렇게 계속 중얼거리면서 스스로를 격려하며 20일간을 책과 씨름을 하였다.
드디어 마포 수도공고에서 시험을 보았다. 나에게 시험문제는 한결같이 버거웠지만
최선을 다하는 도리밖에...
시험을 마치고 나는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마침 한전의 합격자 발표일에 예비군 창설기념 행사가 효창운동장에서 있어 새벽부터 동원훈련을 나가 소낙비를 흠뻑 맞고는 점심때서야 집에 돌아오니 몸이 파죽이 되었다.
나는 점심을 한그릇 먹어치우고는 쓰러져 잠이나 자려고 했다.
나가봐야 불합격일 것이고 실망만 할 것이니까...
- 그래도 누가 아니...나가 보거라...
어머님께서 한말씀을 하셨다.
- 그래도 한번 발표장에 다녀오거라..
나는 결국 용기를 내어 남산아래의 한전 지점 발표장에 나갔는데...
..... 와 ! 내이름이 붙어있다 !!
학창시절에 그리도 공부를 않고 5년간 군대생활로 녹쓴 머리를 가지고 단 20일공부를 하여 한국전력공사 대졸사원 경쟁율 10:1을 뚫고 자랑스런 내 이름 석자가 게시판에 나붙어 있는 것이다.
나는 뛸듯이 기뻐서 이제는
- 하나님 감사합니다 !
를 웅얼거린서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누가 듣거나 말거나...!
잠실 베레모
(3) 나의 고무신짝은 어디에 있노?
1979년도는 나에게는 정녕 행운의 한 해였다.
1월에 제대를 하였고 3월에는 한전 신입사원 공채시험에 합격하여 6월에 한전에 입사를 하였고 또 가을에는 벼락치듯이 예쁜 아내를 맞아 장가까지 들었고 아내는 큰아들을 임신하였으니....
이제 하나씩 이야기를 해보면,
나는 제대후에 신정동 3단지 시장 옆에 있는 성결교회에 다녔는데 혹시나 하는 기대에서 일요일이 되면 새 양복을 차려입고 드라이를 깔끔하게 하고는 예배에 참석하고 청년회에도 기웃거려 보았다.
이제는 연령이 30세요 취업까지 보장받게 되었으니 달덩이 같은 아가씨 한명은 있어야 팡파레를 울리고 알콩달콩 가정생활을 꾸려갈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워낙 붙임성과 재미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성격의 나에게 아무 아가씨도 관심을 가져주지 아니하였다.
다만 교회의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이 우리집에 와서 속회예배를 드릴 때면
- 하나님, 이 가정에 착한 아내 착한 며느리 얻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는 간절한 기도를 많이 해주었고 또 목사님께서 우리집에 첫심방을 오셔서는 대문에 커다란 교패를 딱 ! 붙여 놓으셨다.
나중에 그 교패가 나에게 일생의 행운을 가져다 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으니....
아무튼 나의 고무신짝은 내가 찾아 결정하겠다는 적극적인 각오로 나는 어디서든지 중매만 들어오면 열심히 쫓아 다녔다.
우리집에 같이 사는 아주머니께서 소개를 하여 저 멀리 철원 민통선 근처에까지 선을 보러 가기도 하였고,
작은누나가 소개해준 대구가 고향인 양띠 아가씨는 찰떡처럼 달라붙는 바람에 떼어내는데 무진 애를 먹기도 했고
세운상가에서 오빠의 가게를 돕고 있다는 멋쟁이 아가씨한테서는 내가 딱지를 맞고 말았다.
동대문 근처에 사는 아가씨는 만나자마자 교회 이야기만 하는 바람에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도망을 나온 적도 있었다.
6월1일쯤이던가, 한전 쌍문동 입교를 몇일 앞두고는 논산군 연무읍에 사시는 형님댁에 모내기를 도와주러 갔는데 읍내에 사는 둘째 매형이 논둑까지 찾아와서는
- 아니, 처남 지금 모내기나 할 때가 아니야. 스타상회 조카가 맛선을 보러와서 기다리고 있어 !
하고는 나를 논에서 불러냈다.
그 스타상회란 나의 군대이야기에서 내가 하사 초임때에 1년만기 10만원짜리 적금을 찾아 집(형님댁)에 갈때 어머님과 형님 내외분의 내의를 한벌씩 사가지고 갔는데 그 스타상회에서 내의를 샀었다.
매형네 바로 앞 골목 가게이고 서로 절친한 스타상회 아저씨는 그때 나를 조카사위감으로 점찍어 두었다가 오늘 선을 뵈려고 데리고 나왔다는 것이다.
모내기 하던 몸을 대충 쑥쑥 씻고 작업복 걸치고 맛선을 보러 나갔으니 아가씨 보기에도 삐쩍 마른 꺽다리가 퍽이나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니 그후 감감 소식은 당연지사 ...
그렇게 장가 못간 늦총각의 애간장을 태우면서도 몇달이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나는 6월4일부로 한전에 발령을 받아 당시 쌍문동에 있는 한전연수원에 2주간의 신입사원 합숙교육을 받게 되었다.
잠실 베레모
(4) 이 짜식아 ! 너 빨갱이 새끼지 !
1979년 6월4일부로 나는 드디어 한국전력공사의 쌍문동 연수원(현재 한일병원 자리)에 연수교육차 입교를 하였다.
우리는 영광스럽게도 한전 신입사원 100기였다.
연수원에서는 특별히 <100기>신입사원 채용에 의미를 부여하며 성대한 환영을 해주었다.
100기 신입사원 연수생들은 모두 300 명쯤으로 기억되는데 한방에 12 명씩 2 주간의 합숙훈련이었고 나는 연령이 많은 탓인지 방장이 되어 내무생활을 통솔하게 되었다.
우리들은 매일 저녁 9시에는 군대처럼 내무반을 정리해놓고 침대에 앉아서 당직사감으로 부터 점호를 받아야 했는데 군대경험이 없는 대부분의 연수생들은 점호 받는 것을 무척 싫어하였고 또 한전에 대한 불만도 꽤나 았다.
다른 대기업에 비하여 봉급이 적고 사원복지제도가 뒤져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고 마치 언제든지 한전 입사를 포기할 듯한 자세들이었다.
나는 한전 직원이 된것이 무척 자랑스러웠고 얼마나 가슴이 뿌듯하였는데...
입대전에 전매청에 입사하여 신탄진 정비공작창에 다닐때 선배기사들이 한전에 취업을 하여 사표를 써서 휙 내던지고는 도망을 가는 것을 보고 얼마나 부러워했었는데...
아무튼 점호시간이면 신입사원 군기를 잡으려는 당직사감과 신입사원들 간에 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재미있던 일은 각 방장들이 점호보고를 군대식으로 하는데 그 보고가 매우 서툴렀고 흔히 말을 더듬거리기 일쑤였다.
- 단결 !
신입사원반 206호실
일석점호 인원보고
총원 12명
사고 무
현재원 12명
열외는 보고자 1명외
점호 준비 끝
단결 !
중간에서 보고가 끊기거나 더듬거리나 보고순서가 틀리면 당직사감이 책망을 하면서 이르 바로 잡아주는 사이에 이방 저방에서는 연수생들이 킥킥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오곤 하였다.
그러나 내 차례가되면 5 년간 몸에 배인 솜씨로 점호보고를 줄줄 해버렸고 그 덕분에 우리방의 점호는 쉽게 지나가곤 하였다.
그런데 다 좋았으나 문제는 두번째 주 교육의 새마을 분임토의에서 벌어졌다.
새마을 교육담당은 별명이 오뚜기 과장이었는데 키는 작고 배는 불쑥 튀어나오고 이마는 동그랗고 눈은 크고 영락없이 오뚜기의 모습이었으니 뭐 별명을 원망할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오뚜기과장이 너무나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면서 연수생들에게 극성을 부리는 바람에 오히려 교사의 권위가 떨어지고 연수생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면 과장의 말을 어렵게 듣기보다는
- 와 ... !
- 우 ... !
소리를 내면서 장난기 섞인 조롱을 보내기도 하였다.
특히 우리방 연수생들은 그정도가 심하여 늘 나는 중간에서 샌드위치가 되곤 하였는데 우리들은 장난기가 발동하여 교육 마지막 무렵에 분임토의 준비에서 분임토의 구호 및 노래를 그 오뚜기 과장을 조롱하는 내용 일색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어느날 저녁에 오뚜기 과장이 우리방을 순찰하여 분임토의 준비상황을 점검하고자 하였다.
- 여 ! 분임토의하느라고 수고들 한다 ! 어디 한 번 분임토의 구호를 외쳐 봐 !
그러자 우리방 연수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 오뚜기 오뚜기 오똘똘 !
오뚜기 오뚜기 오똘똘 ! 얏 !
하고는 구호를 외치고 나서 숨을 죽였다. 오뚜기 과장 얼굴색이 어떻게 변하나 ?
- 아니 이녀석들 봐라 !?
황당한 오뚜기 과장은 그래도 솟아오르는 분기를 겨우 참으면서...
- 분임토의 노래 시작 !
하고는 우리방에서 지은 분임토의 노래를 시켜보았다.
....어 ! 오뚜기 오똘똘 구호에도 화를 내지 않네 ?? 연수생들은 이번에는 분임토의 노래를 힘차게 불러대기 시작하였다. 동요 <송아지>의 가사를 변조해서 지은...
오뚜기 오뚜기
못된 오뚜기
배만 불쑥 나온게
돼지 닮았네
노래가 다 끝나자마자 기어이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 이 방의 분임조장 누구야 ! 이리나와 !
나는 또 애꿎은 샌드취치가 되는구나... 그러게 내가 이러면 안된다고 얼마나 말렸어...
- 제가 분임조장입니다....
나는 목소리가 다 기어 들어갔다.
- 야 ! 이 짜식아 ! 너 빨갱이 새끼지 ! 너는 이제 퇴교다 ! 퇴교 !
왝 !! 이거이 아닌데..................
그 퇴교라는 말에 나는 놀랐고 오뚜기 과장은 내 코를 수없이 비틀어 대도 할말이 없었다.
그는 화가 풀릴 때까지... 내 코를 비틀고...
.. 아구 오늘... 내 코 다 뭉개지는구나...
정말이지 나는 그때 나의 코뼈가 모두 뭉개져 버리는줄 알았다.
그 매운 맛은 어찌 말로다 형용하랴 !
그런데... 오뚜기 과장님 ! 왜 하필 그 순간에 빨갱이 자식이란 말이 튀어 나온답니까!
아무리 시대 상황이 유신말기라 해도 그렇지 정치판도 아닌 한전 연수원에 웬 때도 아닌 매카시 선풍이 불어닥친단 말입니까...?
(* 매카시 : 상대방 정적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던 미국 의원)
잠실 베레모
(5) 원자력의 요람 - 고리원자력본부
우리들 신입사원들은 쌍문동 연수원에서 2 주간의 합숙훈현을 마치고 희망근무지를 조사할 때에 대부분이 서울을 첫근무지로 원했고 잘 되면 당인리화력발전소에 근무하게 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막상 사령장을 받아 든 나는 아연하였으니...
- 명, 원자력직군, 보 고리원자력 근무...라고....!!
당시만 해도 고리원자력발전소란 상식책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내가 그 시골 구석인 경상도 해변가에 지은 마치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빠삐용 같은 건물의 원자력발전소에서 근무를 한다 ?
그러나 어쩔수가 없었다.
아니 돌이켜보면 그렇게 첨단의 산업분야에 근무하게 된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도 원자력 관련 직장에서 잘 견디며 근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들은 집결지인 해운대역에서 모여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 해변도로를 40분도 더 들어가서야 고리원자력연수원 마당에 내려섰다.
아하...!!
이곳이 우리나라에서 제3의 불을 밝히기 시작한 원자력의 요람이 될 곳이란 말인가 !
우리는 또 그곳 연수원에서 5 주간의 원자력 기초교육을 받았다.
원자로물리 공부에서부터 원자력발전소의 구조, 주요 계통의 개요와 건설 및 품질보증 모두가 처음 듣는 난해한 내용들이었다.
원자의 구조는 중심에 양자와 중성자로 구성된 핵이 있고 그 주위를 전자가 회전하고 있는데 중성자는 보통의 물체 속에서도 빠른 이동을 할 수 있다.
이 빠른 속도의 중성자가 여기저기 부딪쳐서 속도가 느린 중성자가 되면 바로 이것을 <열중성자> 라 한다.
이 <열중성자>가 우랴늄 핵에 부딪치면 순간에 핵은 둘로 분열하고 다시 2.5개의 중성자가 발생하며 약간의 질량이 줄어 열로 변환되는데 이러한 반응은 극히 짧은 순간에 일어난다.
물론 2.5 개의 중성자 중 일부는 밖으로 새어 나가고 대략 1 개 정도가 다시 위의 핵분열을 계속하는데 이를 연쇄반응이라고 한다.
핵은 매우 작고 또 순식간에 반응이 일어나므로 비록 1회의 핵 분열시 발생하는 열은 극히 적은 것이지만 연쇄반응으로 엄청난 횟수의 핵분열이 계속되므로 또한 많은 양의 열이 발생하며 그 열을 이용하여 증기를 발생시켜 발전기를 돌리는 것이다.
당시에 고리원자력 1호기가 준공되어 가동을 시작한지 1년쯤 되었을 때였다.
고리원자력 1호기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脫油전원개발계획의 야심찬 원자력정책의 추진결과였다.
그러한 원자력정책으로 인해 이제는 무려 20 기의 원전이 가동중에 있고 추가로 6 기의 건설을 추진중에 있는 원자력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며 우리가 세계적으로 값싼 양질의 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원자력발전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혹은 원자력발전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백년대계의 국가 에너지정책을 현실적인 대안없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엔지니어의 한사람으로서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이렇게 경상남도 양산군 장안면 고리의 한적한 해변가에서 시작된 원자력의 불씨는 지금은 영광, 월성, 울진 등과 더불어 네곳의 대단위 원전단지로 발전하여 국가경제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고리원자력연수원에서 원자력 기초교육 5주를 마치고 생각하기를
- ... 흠... 안되겠다... 내가 어짜피 한전에서 원자력분야에 종사를 하려면 좀더 교육을 받아야겠구나...
하고는 당시에 고리원자력 2호기 시운전요원 교육 - 무려 28개월간의 장기교육을 자진하여 신청하였었다.
우리 신입사원 약 40 명은 단 5주의 기초교육도 받기를 힘들어 하였고 감히 28개월(140주)짜리 교육은 아무도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
여기 뚱딴지 같은 잠실 베레모밖에는...
그러나 그것도 희망사항일 뿐 교육을 마치고 5 일간의 휴가기간을 보낸 후 출근을 하니 엉뚱하게도 서울 본사 요원으로 내정되어 고리 품질보증부 OJT 근무명령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품질보증(Quality Assurance)이라....
이렇게 나는 원자력발전소의 품질보증과 최초의 인연이 맺어졌다.
잠실 베레모
(6) 태풍 쥬디호의 비바람을 뚫고...
서울의 쌍문동 한전 연수원에 들어가 2주간의 신입사원 기본교육을 마치고 경남 고리원자력본부에 OJT 근무명령을 받고 혼자 내려가서 한달쯤 지낸 나는 살림방을 얻어놓고는 이제 서울에 계시는 어머님을 모셔와야 했다.
물론 연무읍에 형님이 살고 계셨지만 내가 특별한 효자라서가 아니라 당초 어머님과 함께 살림을 시작할 때부터 어머님과 같이 살 것을 결심하였었고 그 마음은 지난해(2004년) 어머님께서 소천하시기전까지 조금도 흔들려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몇일간의 다리품을 판 고생 끝에 드디어 고리원자력본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장안면 좌천리 시장터 한 쪽에 있는 방 두개 짜리 집을 전세 120만원에 계약을 하고는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 신정동 집에서는 어머님께서 미리 이사짐을 거의다 챙겨 놓으신 상태였고 또 고맙게도 연무읍에 사시는 둘째 매형이 트럭을 몰고 이삿짐을 옮겨 주겠다고 불원천리 찾아와 기다리고 있었으니 이사에는 걱정이 없었는데...
아...! 1979년 8월 27일 !!
그때 마침 태풍 쥬디호가 남부해안을 강타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는 하루종일 쉴새없이 소낙비를 쏟아붓고 있었다.
이삿짐이라야 별것도 없었으나 그래도 워낙 그치지않고 비가 쏟아지므로 도저히 어쩌지 못하고 하루를 더 지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그때 내가 다니던 신정동 성결교회의 전도사님이 중매를 선다고 하여 맛선을 보기로 하였었는데 망할 놈의 쥬디호 태풍때문인지 아니면 무슨 연유에서인지 노총각 애태우며 기다리는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가씨는 콧배기도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몹쓸 사람같으니라구....
- 얘 ! 내가 전도사님한테 너의 군대시절 사진 한장을 주었다. 인연이 있으면 다음에 연락이 오겠지...
심란해 하는 아들의 마음을 위로라도 하시듯 어머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맞다. 다음이라는 기다림이 남아 있다....
이튿날 겨우 이사짐을 주워싣고 매형이 트럭을 몰고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아직 쥬디호의 여파로 비바람이 하도 강하여 차체가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해운대에 도착하니 방파제에 부딪치는 하얀 파도의 높이가 가히 20-30 미터는 치솟고 있었다.
드디어 장안면 좌천 시장터 마을 회관 옆집 - 그렇게 알콩달콩 신혼살림을 차릴 준비가 조금씩 진행되어가고 있었음 - 에 도착하였다.
나는 좌천에 살면서 장로교회에 다녔는데 목사님과 집사님들의 사랑을 각별하게 받았고 특히 여집사님들은 나를 장가보내 좌천에 정착을 시키겠다고 팔을 걷어 붙히고 나서서 부산 아가씨를 선 보여주고...
그 때 마침 서울 신정동 성결교회의 전도사님으로부터도 그 아가씨의 사진을 보내왔는데...
잠시 마음속에 저울질을 하고 있는데 어느날 저녁 늦은 시간에 어느 젊은 아주머니(?)가 우리집에 갑자기 들이 닥치면서
- 나 서울 신정동 성결교회의 전도사이고 그 아가씨의 사촌언니인데 지금 시간이 없으니 결혼할 생각이 있으면 한번 서울에 와서 만나보시고 생각이 없으면 그만두시요 ! 나는 할 말 다했으니 이제 갑니다 !
하고는 훌쩍 다시 나가버렸다.
- ...???
나는 무슨 얼굴도 모르는 도깨비같은 여자 전도사님의 행동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당시에는 고리원자력본부가 있는 장안면이 양산군에 속해 있어서(현재는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자칫 잘못하여 양산을 찾아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 전도사님이 그리하였던거라...
고리와는 전혀 방향이 다른 양산에 가서 헤매다가 막차 버스시간이 거의다 되어 간신히 우리집에 찾아 왔다가는 한마디를 하고 급하게 다시 나간 것이란다...ㅎㅎㅎ
또 그 전도사님은 아가씨의 사촌언니도 아니고 바로 손아래 4살이나 나이가 적은 동생이면서 그렇게 둘러붙였다고 한다.
하기는 중매장이의 얼굴 모습이 훨씬 나이가 들어보여 오히려 서너살 위의 언니로 보였으니... ㅎㅎㅎ (처제가 이글을 보면 아마도 많이 삐지겠지...ㅋㅋ)
잠실 베레모
(7) 아내와의 세가지 약속
마침 그무렵에 어머님께서 갑자기 몸이 불편하셔서 팔다리가 아프고 부엌일과 기타 살림을 하시기에 몹시 힘들어 하셨고 때문에 주위에서는 나보고 결혼을 서두르라고 성화였다.
하기는 취업도 했고 살림집도 있고 웨만한 살림살이는 거의다 갖추고 있었으니 참한 신부여 몸만 들어 오소서...!!
나는 서울의 신정동 성결교회의 여전도사님이 보내온 아가씨한테 이미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얼굴 모습이 무척 순하고 착해보였으니... 신부에게 더이상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결심을 하고는 토요일에 서울로 올라가서 한번 아가씨를 만나 보기로 했다.
두근거리는 총각 앞에 예의 그 여전도사님과 부친과 함께 드디어 그 아가씨가 나타났다.
그 부친의 아래서 자랐으면 생각이 들 정도로 부친이 풍채와 언행이 확실해보였다.
맛선 장소가 전농동 바로 자기집 부근인데도 장모되실 분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웬지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잠시 부친과 이야기를 나눈뒤 의사가 있으시면 다음에 만나서 약혼을 하자는 제안을 하였고 부친께서는 대충 좋다는 답변을 하셨었다.
그런데 이때 확실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으니...
나는 아가씨를 데리고 장충공원에 가서 이런저런 말을 시켜보고 환심을 사기 위해 자진하여 세가지 약속을 하였다.
첫째, 부지런하게 일해서 쌀과 연탄이 떨어져 밥을 굶게 하지는 않겠다.
둘째, 양심적으로 착하게 살고 고의적인 범법을 하지는 않겠다.
셋째, 바람을 피워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지 않겠다.
그녀는 마음의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를 않고 말을 무척 삼가고 웃기만 하였다.
- .... 허참 ! 이 아가씨가 나를 좋아할 것인가 말것인가?
... 내 원... 총각 장가들기가 넘 힘들다.... 휴...
그후 한달쯤이 되도록 연락이 잘 안되고 에구 이번도 헛물을 켠것이 아닌가하고 생각이 되었었다.
사실은 그때 맛선자리에서 나는 용감하게도 한달 후에 약혼을 하자고 제안을 했던 것이나 실은 장인께서는 다음에 만나 양가 어른들 상견례를 하자고 답변을 하셨던 것이란다.
결국은 내가 밀어붙이고 장인께서 서두는 바람에 양가의 가족이 모여 약혼예배를 드리고 나서 나는 그 아가씨의 손에 시계와 반지를 끼어주게 되었다.
그때서야 나는 중매장이가 사촌언니가 아니요 실은 아직 미혼의 네살 아래 처제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만큼 나이가 들어보이는 처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제는 어차피 올릴 결혼식을 날씨가 추워지기전에 서두르고 알콜달콩 살아가자고 신부와 속삭일 수 있게 되었다.
며칠후 장인께서 내가 살고 있는 좌천에 오셔서 장농과 그릇장과 기타 필요한 몇가지 혼수를 마련해 주셨다.
나는 사실 그때 수중에 돈 한푼도 없었고 약혼예물도 둘째 누님한테 30만원을 빌려서 마련한 것이었으니 더구나 다시 결혼식을 올릴 돈도 준비가 되었을 턱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내가 가난해서가 아니고 나는 본래부터 혼수에는 별로 욕심도 없었고 그저 나에게 착하게 생긴 아내가 들어온 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야 ...!! 드디어 잠실 베레모가 장가를 간대요 ... !!
잠실 베레모
(8) 결혼비용 50만원
에게게...!
50만원으로 장가를 들었다고 ?
나는 그때 실제로 돈이 없었다. 약혼비용도 둘째누님한테서 30만원을 빌려서 사용하였고 막상 11월 15일로 결혼날자는 잡았으나 장가밑천이라고는 XX밖에 없었으나 그래도 신부감을 구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그래도 좀 형편이 나은 둘째누님한테 부탁을 해서 다시 50만원을 빌렸다.나는 6남매의 막내였는데 부친께서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님도 경제력이 전무하셨고 형님도 오히려 내가 도와드려야할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결혼비용을 장만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으니 맨손으로 장가를 들 수밖에...
아무리 그렇더라도... 아무리 당시의 화폐가치가 높았다해도 사실 베레모가 50만원을 손에 들고 장가를 들려고 한것은 고육지책이었으니 이해들 하시라요.
결혼식은 서울의 신부측이 다니던 교회에서 올리기로 결정을 하였다.
적절치 못한 판단이라는 얘기도 들었으나 일찍 고향을 떠나온 나로서는 고향에서 결혼식을 할 수도 없었고 고리에서 예식을 올릴까 많은 생각도 해보았으나 이 또한 양가측에 불편만을 줄것이 뻔했다.
그래서 신부측 하객이라도 편하게 올수 있도록 서울로 정한 것인데...예식시간에 문제가 생겼다.
주례를 맡아주시기로 한 그 교회 담임목사님께서 결혼일자를 5일 남겨두고 12시 예식이 불가능하니 9시에 예식을 하자고 통보를 해오신 것이다.
11월달에 아침 9시 예식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교회와 결혼주례를 허락해 주신것은 고마웠지만 귀중한 결혼식에 관한 약속을 이렇게 쉽게 바꾸어도 괜찮은 것인가 ?
나로서는 무척 섭섭하였고 또 그로 인해 초겨울 아침 9시에 결혼식을 올린다는 진기록을 수립하였으니...
때마침 매서운 첫추위가 찾아와 날씨는 영하 15도를 가르켰으니 하객들은 아침부터 덜덜 떨면서 예식장소를 찾아와야 했었다.
기껏 추위가 오기전에 서둘러 예식을 올리자고 날자를 잡은 것이 영하 15도라...!!
내가 너무 사나운 신부를 만난 것은 아닐까...?? ㅎㅎㅎ
분명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럼 신혼여행은 어디로 갔느냐구요?
이 얘기는 비밀인데....어쩐담...
약혼을 한후 신부가 고리에 한번 다녀갔는데 그때 신부가 입덧을 하게 만들고 말았던 것... 어휴 얼굴 붉어져라...
그래서, 실은 신혼여행갈 비용도 없었지만 이러저런 사유, 형님과 누님들이 고리에 가서 막내동생 국수잔치를 아니할 수 없다는 성화에 슬그머니 양보를 하여 우리 신혼부부는 해운대의 어느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는 그 다음 날 좌천으로 돌아와 신나는 국수잔치를 하였다.
잔치 잔치 벌렸네...
국수잔치 벌렸네
베레모가 장가가고
서울 아씨 시집오네
열린마당 벗님들 어서 오셔서 국수 한릇씩 드시와요 !!
잠실 베레모
(9) 어쩔 수 없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
어머님께서는 새며느리가 들어오기를 아주 간절하게 바라셨었다.
오죽하셨으면 내가 서울로 선을 보러 올라갈 때
- 얘야 ! 고속버스 표를 두장을 사가지고 가서 네 마음에만 들면 이곳으로 데리고 오너라 !
하시면서 며느리감의 얼굴을 어서속히 보고 싶어하셨다.
하기는 천리타향에서 달랑 아들 하나를 따라와서 생활을 하시려니 외로움도 많으셨을 것이다.
드디어 약혼을 한후 새며느리 감이 좌천 우리집에 다니러 온다고 연락을 받고부터는 미리부터 나에게
- 얘야 ! 이곳에 와서 하루밤이라도 자고 가도록 하려면 시장에가서 쓸만한 잠옷이라도 준비해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