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음악공연의 새로운 정립을 위한 제언
이 상 만(음악평론가)
1. 국악이란 용어를 다시 생각하자.
2. 일제와 국악전통의 함수
3. 전통의 파괴냐, 재창조냐
4. 우리스러운 전통음악 계승과 재창조의 방향
5. 전통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전용공연장이 있어야 한다.
1. 국악이란 용어를 다시 생각하자.
우리는 그동안 국악이라는 용어 자체를 무심코 써왔습니다. 국기, 국가, 국민 등 특히 광복 50년이 지나면서 별의식도 하지 않은 채 당연한 용어로 이 말을 써왔습니다. 따라서 오늘도 저의 강연제목은 여전히 국악 50년이라는 부제가 붙어있습니다.
최근 이런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국민학교의 명칭을 초등학교로 고치겠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국악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는 것이 좋을지 다른 말로 고쳐 쓰는 것이 좋을지 한번 생각해 볼 때가 되었습니다.
성경린씨의 글에 의하면 우리 나라 궁중의 전통음악을 지켜오던 장악원은 지금도 국립국악원의 전신이라고 생각해 오고 있는데 1897년 장악원을 교방사로 개칭하고 또 융희 원년 장악원 장악과로 격하시켜서 국악직의 직명을 ‘國樂師長(국악사장)’, ‘國樂師(국악사)’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한낱 속악, 향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우리음악에 대해 국악이라는 용어를 쓰게 된 것은 갑오경장이후 자주정신 국가의식의 발로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이론에 공감을 하면서도 제도적으로 위축되고 국력이 쇠퇴되고 할 즈음에 이런 말이 써졌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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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50주년 기념 학술대회
장악원이 위축되기 전에는 지금 서울의 을지로2가 외환은행이 섰던 자리에 만여평의 대지에 수백간의 건물에 음악가 1,000여명을 고용하던 큰 기관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 궁성을 빼놓고는 제일 큰 건물이요, 기관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자리도 해방 때만 하더라도 권력의 상징인 내무부의 건물이었다가 근대화의 상징인 은행 건물로 바뀐 것은 시대의 흐름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든 국악이라는 상징적 용어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현재의 국립국악원도 예술의 전당 한 모퉁이에서 초라하게 서 있습니다. 국립극장에 새로이 국립국악관현악단이 탄생했는데 국립국악원은 무엇이고 국립국악관현악단은 무엇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과거 50년간 정부의 국악진흥에 대한 역할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1948년 아악부를 국가경영형태로 바꾸고, 1951년 1월 18일 국립국악원을 피난지 부산에서 설립했다는 것은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사실과 함께 그동안 우리나라 정부가 공연예술진흥에 힘써온 업적도 과소 평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럽사회에서도 그랬고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실속은 없으면서도 정부의 관여와 규제로 결국은 국악이라는 용어조차도 관제용어로 변신하였고 새시대에 맞지 않는 관료적 상징성을 띤 용어로 인식되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결국 음악의 생명력은 그 시대에 사는 사람과 호흡을 함께 할 수 있는 음악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국악이란 용어도 낡은 틀에 속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악에 대칭 되는 용어를 제가 함부로 제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소한도 이번 논의에서 그 이름을 바꿀 수 있는 제의는 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성급하게 바꿀 것이 아니고 분단된 국토와 민족의 통일이 이루어질 때 양측이 합의해서 새로운 우리음악의 이름을 불러야 할 것입니다.
2. 일제와 국악전통의 함수
우리는 흔히들 일제 36년 강점심기에 우리의 고유문화를 일제가 전적으로 말살시켰다는 일방적인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일제 침략 이전 한말에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외래문화 수용의 태도는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을 계승하는데 오류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어쩌면 당시 일본의 지도층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도 일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정부가 신사유람단이라는 것을 만들어 구미의 문물제도를 살피는 시찰역할을 했습니다. 이때에 그들은 구미의 여러 모습을 보고 서양의 문화는 좋은 문화이고 전통적인 것은 낙후된 것이라고 생각했고 우리나라 개화기의 지도층들도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 개화기 이후 중요한 음악교육기관이었던 조선정악 전습소는 1909년 조양구락부의 발족에서 비롯했는데 그때에 이 전습소에서 서양음악을 배우는 월사금은 50전인데 비해 조선악은 1원을 내야했고 또 음악교사의 월급도 조선악은 4원인데 비해 서양음악교사는 100원이었다는 사실이 단적으로 서양음악을 더 장려하고 선호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합방이전에도 학교의 교과에는 찬가라는 서양음악과목만 있어 우리 전통음악은 가르치지 않고 서양음악만 가르쳤던 교육정책이 오늘날 우리음악의 전승단절을 가져오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행했던 것은 일제시에도 여전히 한일합방 이전의 교육과목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시에 한국의 전통음악을 보존하게 된 두건의 중요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일본의 음악학자인 다나베 히사오가 1920년 우리나라에 와서 한국음악의 실태를 조사하고 조선음악개요라는 보고서를 제출한 뒤 일본정부에 건의하여 한국의 아악이 중요한 예술적 값어치가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이왕직아악부를 존속시키고 여기서 한국아악의 전통을 계승시켰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을 길렀다는 것이고 후일에 국립국악원이 서게 된 것도 다나베 히사오의 공로는 추앙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하나 중요한 사실은 1933년 당시 JODK가 그때까지 일본어 중심의 방송을 2重(2중) 방송이라고 우리말 방송을 하게 되었고, 여기서 당시 지역 방송이었지만 지역적 특성을 살린다는 미명아래 우리의 전통음악을 방송을 통해 보급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일제통치하의 일본인들로서는 하나의 허점이었습니다. 그때에 선구자인 李惠求(이혜구)씨와 같은 역할이 없었던들 불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일본정부의 정책과는 관계가 없었어도 그 시기에 일어난 음악산업의 구조 속에서 레코드의 발전으로 인해 미국의 레코드회사나 일본의 레코드회사가 시장확보의 발상으로 우리나라 전통음악을 음반에 담아 팔았던 일입니다. 물론 이 레코드산업은 동시에 서양음악의 보급에도 공헌을 했습니다.
3. 전통의 파괴냐, 재창조냐
해방 50년의 전통예술공연의 현황을 살펴볼 때 그 동안의 양적 팽창이 괄목한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여러 가지 상황에서 볼 때 공연의 회수, 공연내용 등 다양하게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45년에서 50년에 이르러 국악이 공연된 기록을 보면은 1년에 고작 서울에서 한 두건 정도의 공연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간추려 보면은 해방이 되던 해인
1945년 12월에 대춘향전 공연 - 국악원 창립
1946. 8. 12 한미협회 주최 공연 미군위문공연 - 국제극장
1947. 11. 12-18 고전국악국극 "아랑애화" 국악연주회 - 국도극장
1948. 12. 29. 유엔 대표 우리국악감상 - 명월관
1949. 6. 15 시민위안 음악명창대회 만보단 중앙협의회 주최 - 시공관
1949. 12. 24-30 송년국악감상 선화공주 국악연주회 - 시민관
1950. 5. 12-16 창극 만리장성 - 국극사
1950년경까지 국악의 공연형태는 앞의 예와 거의 비슷한 형태를 유지했습니다. 이기간 동안에 국악공연으로 특기할 만한 현상은 1955년 10월 6-11일기간 동아일보사가 추기(秋期) 독자위안공연으로써 玉龍花郞(옥용화랑)을 우리국극단 창립5주년 기념으로 공연했다는 것입니다. 언론사가 국악공연을 지원했다는 선례를 남기었습니다.
1958년부터는 국악공연의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중앙방송국은 공보실 산하의 관청이었는데 오재경 공보실장이 취임하고 나서 국악 진흥정책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특히 1957년 12월 남산에 KBS 신사옥이 건립된 뒤 제5스튜디오를 국악전용스튜디오로 꾸미고 그곳에는 예쁜 비단보료를 깔고 그곳에서 방송을 하도록 배려했습니다. 국악악기의 복원제작도 그때에 이루어졌고 처음으로 방송국이 주최하여 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사라져가는 우리전통음악을 보존키 위해 국악라이브러리를 만들어 150여개의 음악을 테이프에 담아 보존케 했습니다. 한편 지금은 대형화된 전국민속경연대회도 1959년에 장충체육관에서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지금은 불타 없어진 을지로입구 경춘철도사무실을 개축하여 원각사를 짓고 전통음악공연을 새롭게 가다듬는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한편 1958년을 계기로 해서 국악학회가 재건이 되었습니다. 국악학회는 지금 서울신문사자리에 일제 시에는 내청각자리에 KBS홀이라는 곳에서 매월 정기공연을 가졌습니다. 순수음악의 참멋을 학술적인 연구와 함께 심도 있는 음악이해의 질을 택한 것입니다. 이때에 국악학회는 이혜구박사에 의해서 영도되었습니다. 국악학회의 업적은 국악이 지닌 정신적인 가치를 많은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한편 국악학회의 활동은 중앙공보관을 중심으로 학술발표회 등의 역할이 전개되었습니다.
국악발전에 있어서 인재육성의 방편은 1955년 국립국악원에 부설된 국악사양성소가 선도적역활을 했고 1956년 덕성여대에 장사훈의 발의로 국악과가 설립되었다가 중도하차되었습니다. 한편 1959년에는 서울대학교에 국악과가 설립되었습니다. 그 주동역활은 李惠求(이혜구)박사가 했지만 당시 양악가로써 학장을 맡았던 玄濟明(현제명)의 역할도 컸습니다. 우리나라 국악공연의 새경지를 개척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의 역할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1959년에 또 하나의 국악교육의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KBS의 국악연구생의 발족이었습니다. 여성만을 대상으로 교육시켰던 이 기관의 존속이 민주당 정부가 들어선 1960년에 해체되었지만 국악인재 육성의 새장을 열었습니다. 가야금의 조청자, 가곡의 조순자, 무용의 황옥선 등이 여기서 배출된 인물입니다.
한편 박헌봉이 주도하여 세운 국악예술학교는 고등학교과정의 교육기관이지마는 여기서 배출된 인물들이 민속악분야에서 활약하는 것은 이 교육기관의 의의를 평가해 줍니다.
1960년대 중반에 발족된 중요무형문화재지정은 국악인력자원보존의 획기적인 조치였습니다. 이 제도가 정부의 충분한 재정적 지원과 이해가 결핍되었다고 하더라도 국가기관의 권위에 의해서 그나마 명맥이 유지된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1961년 국립국악원은 오재경 장관이 공보부장관으로 취임하면서 국립국악원을 개수하였습니다. 공연장도 소규모이지마는 개수했고 정문도 새로 세웠습니다. 이시기가 국악원 중흥의 새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운니동시대는 민족문화센터의 건립과 함께 또 한번 국립극장의 일각에서 셋방살이를 면치못하였습니다.
1964년 발족된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은 지영희, 김희조, 한만영, 김용진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의 출범은 오늘날 지방도시에 국악관현악단을 만들게 한 원동역활을 담당했습니다. 이 관현악단이 초기에 서양식 턱시도를 입고 의자에 앉아서 연주했던 일은 그 동안 이 단체가 얼마나 어설프게 공연활동을 해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1962년 제1회 국제음악제가 열렸을 때 그 첫날밤은 "아악의 밤"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양악이 주조가 된 프로그램 편성에서 첫날에 악이 연주되었다는 것은 국악의 진로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1969년 제1회 서울음악제때에는 전야제에 무용문화재 제1호인 종묘제례악을 재현함으로 해서 한국전통음악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새롭게 해주었습니다.
1980년 전두환정부가 국풍이라는 대대적인 잔치를 여의도에서 벌렸습니다. 행사자체에 대한 여운이 남아있지는 않지마는 전통예술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인식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공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작품을 연주하느냐입니다. 한국의 전통음악공연에 있어서 과거의 것을 되살리는 일과 새로운 음악들을 만들어 간다는 두 가지 방향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전통공연의 보존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종교적인 의식에서 음악이 배제되었다는 것입니다. 공자를 섬기는 석전제가 문묘악에 없었던들 어떻게 존재했으며 종묘제례도 그 음악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불교의 음악은 찬불가라는 기독교 찬송가의 흉내에 급급했고 범패와 영산제의 양식은 골동품화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 전통음악 창작은 김기수, 송광복, 개천부 등의 창작으로 계승되었습니다. 중요한 업적입니다. 1962년 공보부의 신인예술상에서 이강덕, 조재선 그 뒤에 김용진, 이성천, 서우석 등의 새로운 작품이 탄생되었습니다. 그 이전 양악오케스트라와 함께 가야금변주곡을 쓴 정회갑의 작품은 이런 점에서 고전의 미를 가집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작곡가들이 국악악기를 쓰면서도 작곡기법은 서구적인 양식에 의거하였습니다. 서양그릇에 한국음식을 담는 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루 해리슨의 무궁화 새당악, 새로운 송가 그리고 알란 호바네스의 교향곡 16번 교포작곡가 서영세(도날드 서)의 만장풍신과 같은 작품에서는 오히려 한국음악의 본질 이해에 접근했던 일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국악관현악은 사회주의국가의 민족기악합주를 모방했고 이 구성의 원형은 서양오케스트라에서 본뜬 것입니다. 지금의 형태를 계속한다고 한다면 이러한 구성은 결국 독창성이 없는 하나의 쓰레기 같은 음악으로 시대의 뒷전에 쳐지고 말 것입니다.
1948년 이북에서는 평양음악학교에 조선음악과가 발족되었습니다. 사회주의국가의 분위기에서 민속음악수립의 기치를 높이 올렸습니다. 악기개량사업도 그들은 우리보다 앞섰으며, 그 영향은 중국, 러시아까지 퍼졌습니다.
지난번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이 찌끄러기를 수입해서 악기개량으로 보도하였습니다. 참 창피한 일입니다. 국가기관의 영도력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재발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발상은 근본적으로 서양의 빵이 더 커 보이는 그러한 시각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전통의 계승이 반듯이 원형보존에만 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시대정신과 함께 변화를 꾀하면서 전통적 요소의 순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고 여기서 독창성이라는 의미를 부여받게 됩니다. 전통의 파괴와 재창조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4. 우리스러운 전통음악 계승과 재창조의 방향
80년대에 들어서 공연의 형태가 다양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미디어의 발전이 그런 환경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특히 88년 올림픽 이후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새인식이 제고되었고, 90년 문화부의 발족과 더불어 초대장관인 이어령씨의 업적이 방향을 새롭게 정리한 것은 기록될 만한 일 입이다. 아직도 전통음악공연의 양태는 매우 제한적이고 정부가 주도했던 사업들은 획일적이고 아직도 업적과시의 구시대적인 관습에 얽매여 있습니다.
전통예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것이 오늘에 사는 사람들과 직접 부딪치면서 그 취향을 키워가야 하는데 그 취향은 일조 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전통음악을 접하고 그 맛을 알 때 진정한 교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태리음악이 전성기일 때 유럽 여러 나라 독일이나 프랑스음악은 변방의 음악이었습니다. 요한 세바스챤 바흐가 나오기 전까지는 독일음악은 시골음악으로 업신여겨 졌습니다. 마틴루터나 칸트나 바흐가 독일정신을 가다듬지 않았더라면 독일음악이 탄생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전통음악의 계승은 원형의 완전한 보존 연구가 이루어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최근 방송국을 중심으로 민요채집의 열성이 있는 수집가들의 업적은 치하할 만 합니다. 실은 1960년대말 한양대학의 권오성교수가 KBS에서 근무할 때 민요수집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오늘의 발전을 이룩한 것입니다. 재창조에는 투자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특히 정부가 주도한다고 생각한 과거의 발상을 과감히 전환하여야 합니다. 기업이 새로운 전통음악을 만드는데 투자해 주어야 합니다. 지방자치시대의 지방특유의 음악생산물이 창조되어야 합니다. 방송에서 특히 광고음악들이 전통적 음악언어로써 표현되어야 합니다.
청와대의 의식이 한국적인 모습으로 변모되어야 합니다. 기업가들은 이미 한국적 경영철학을 갖는 길이 경쟁의 길이라고 합니다. 예술적 창조의 뒷받침없이 이룩될 리 없습니다.
5. 전통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전용공연장이 있어야 한다.
국립극장도 있고 국악원의 소극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도 전통음악을 공연할 수 있는 전용공연장이 없습니다. 국립국악원의 소극장이 그런 것이 아니냐고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이 공연장이 제일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공연장은 서양식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리스식 전통에 따른 프로세누움 아치의 서양공연장의 건축양식에서 볼 때에는 매우 고전적인 형식에 속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과도기적인 건물로 평가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독일의 바이로이트의 축제극장은 바그너 음악을 공연하기에 알맞도록 되었습니다. 극장좌석의 배치도 평면배역이 되어있고 과거 귀족중심의 좌석배치도 누구나 평등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기에 백년이 넘은 공연장이 신비로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극장무대와 관객과의 관계는 평면성을 유지하여야 합니다. 우리 전통음악은 무대에 높이 올라 청중을 위압하는 서양음악과는 다른 것입니다. 공연자들이 바닥에 앉아서 연주한다면 관객도 바닥에 앉아보는 구조가 필요합니다. 이런 내용을 전제로 해서 기능적인 구조가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실내의 장식도 전통적인 분위기가 기본을 이루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한국음악은 본질적으로 신과 통하는 음악이고 그런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과거에는 큰 것에만 집착했습니다. 세종문화회관도 예술의 전당도 과시하기 위해서 지었습니다. 그런 풋내기 시절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정부는 풋내기가 아닙니다. 전용극장을 지어야 된다는 것은 이제는 전문화시대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청마루에서 시조를 읊고 거문고를 타던 그런 분위기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 줄 공연장은 없습니다. 건축양식에서도 독창적인 공연장이 서울 곳곳에 지방 여러 곳에 지어져야 합니다. 전용공연장은 궁극적으로 모든 분야의 전문화를 촉구하게 됩니다. 공연장의 국가관리가 불가능하다면 민간에게 관리를 위임하는 전문경영시대의 발상전환이 국악계에 오지 않는 한 우리의 앞으로 50년도 별볼일 없게 됩니다.
* 광복 50주년 기념 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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