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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장 날 위하여 십자가의(403장)
시 40:3,2011,03,27.늘찬양교회
‘어찌 찬양 안할까?’라는 결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를 삼중적(三重的)으로 밝히고 있는데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1절), 둘째, 말씀의 축복(2절), 셋째, 천국에의 소망(3절)이 그것입니다. 통일 찬송가에는 로우리 목사의 작시․작곡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에는 19세기 후반 일본의 초교파 전도대의 일원으로 찬양사역에 힘쓴 사사오 테쓰사브로(T.Sasao;1868~1914)가 작시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찬송 곡은 목사요, 시인이요, 대학교수요, 찬송가 작가로 활동한 미국 침례교의 목사인 로버트 로우리(R. Lowry;1826-1899)박사가 작곡한 찬송가입니다.
1절 날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우리 어찌 찬양 안할까
1절,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우리 어찌 찬양안할까?
1절 가사에 “예수님께서 날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받으신 고통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조롱당하신 고통의 십자가입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하여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왕관 대신 가시 면류관을 만들어 머리에 씌웠습니다. 그리고 눈을 가리고 갈대 몽둥이로 머리를 때리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29절)며 조롱했습니다. 예수님은 머리를 맞을 때마다 가시에 찔려 머리에서는 피가 솟아 흘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보혈을 흘리신 것은 환경적인 저주를 속량하시기 위함입니다. 가시는 저주의 상징입니다.
둘째, 채찍에 맞아 살이 찢어지며 피가 티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때린 가죽 채찍은 39개의 가닥으로 되어있었으며, 가죽 안에는 쇠 구슬과 뼛조각이 들어 있었습니다. 쇠 구슬은 살을 멍들게 했고, 뼛조각은 살을 찢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병사들에 맞아 근육이 찢어지고 피범벅이 되었으며 살점은 리본처럼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3시간가량 채찍에 맞으시고 9시간가량 피를 흘리시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셋째, 대못에 손과 발이 못 박히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미션이라는 영화에서 두 눈을 뜨고 보기가 가장 민망했던 장면은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누이고 양손에 대못을 박을 때 손에서 피가 튕기며 고통 하는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양 손에 이어서 두 다리는 겹쳐서 발등에 못을 박았습니다. 못 박힌 채로 십자가에 달리시자 양손과 발에서 더 많은 피가 흘러 십자가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다섯째, 창에 찔려 돌아가신 고통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본래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면 죽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리를 부러뜨립니다. 로마의 군병들이 다른 사람들의 다리를 부러뜨릴 수는 있었으나 예수님의 다리를 부러뜨릴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시 34편 20절에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라고 말씀하신 예언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군병들은 뼈를 꺽지 않는 대신 다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나 물과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피만 흘리는데 죽은 자에게서는 피와 함께 물이 나옵니다.
주님은 살아서도 보혈을 흘리셨고 죽어서도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죽음 후에도 보혈을 흘리신 이유는 죽음의 문제와 죽음 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죄에서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셨습니다(사 53:5). 이런 구원함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절 예수 안에 잇는 우리 한량없이 즐겁고
주 성령의 위로함이 마음속에 차도다
천국 음악 소리 같은 은혜로운 그 말씀
끊임없이 듣는 우리 어찌 찬양 안할까
2절, 주 성령의 위로함과 천국음악소리 같은 그 말씀 듣는 우리 어찌 찬양안할까?
본래 예수님은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구속함의 은혜를 베풀고자 이 땅에 육신의 옷을 입고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죄사함의 은총을 베푸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은 지 3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사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바울에게도 보이시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침(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침(세)례를 받으리라.”(행 1:4-5)고 말씀하셨습니다. 더불어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는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실 수 있으나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성령님 안에서 우리와 함께 영원히 함께 거할 것이라.”(요 14:16-17)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면서 하시는 일들을 3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도와줍니다.
요한복음 14장 15절과 21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켜 순종하며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위로 자, 돕는 자(helper)의 역할을 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낙심한 자를 위로하셨으며,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습니다. 성령도 이 땅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과 똑같은 일을 하십니다. 위로 자, 돕는 자의 역할 하십니다. 그러므로 찬송가 2절 가사에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 안에 있는 우리 주 성령의 위로함으로 그 마음이 한량없이 즐겁습니다.” 마치 그 기쁨은 천국에 온 것 같은 기쁨입니다.
둘째,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상반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지하고 연약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언제? 기도할 때 가르쳐 주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가르쳐주십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같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기도와 말씀을 통해 성령의 감화와 조명을 통해 영광된 성도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가로 인도하심을 받는 은총도 덧입게 됩니다.
셋째,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하고 나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님을 통해 예수님은 이 약속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이 약속을 이루셨습니까?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예수님을 뒤따르며 주의 몸 된 사역을 배웠던 제자였지만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먹었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시금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가 약속하신 오순절 성령강림의 충만을 받고 나서는 영혼 구원하는 일에 자신들의 몸을 아낌없이 내어던졌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가 한번 설교 할 때면 3천명, 5천명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힘을 합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켜 세우는 역사도 일어났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이었던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켜 세계선교의 중심역할을 담당하는 선교사로
세워주셨습니다.
이렇듯 성령님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함께 거하시며 참된 위로와 평강을 주시며, 말씀을 읽고 들을 때 깨닫는 지혜와, 기도하며 부르짖을 때에 간구의 영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사 담대하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므로 내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끊임없이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축복을 부어 주십니다.
3절 이 세상의 모진 풍파 쉬지 않고 불어도
주님 안에 보호받는 우리 마음 편하다
늘 깨어서 기도하고 저 천국을 바라며
주님만을 기다리니 어찌 찬양 안할까
3절, 모진 풍파 속에서도 주님 안에 보호받는 천국 평안 얻으니 어찌 찬양안할까?
시편 32:7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유다서 1: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 게 하실 자”
이사야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 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시편 5:11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 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시므로 우리 죄인들에게 가져 오신 가장 큰 선물은 우리들의 죄 사함과 구원을 완성하신 일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지옥에 갈 우리들을 천국으로 데려 가시게 된 일입니다. 물론 아무나 천국에 가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진심으로 믿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진심으로 순종하고 진심으로 헌신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게 됩니다.
이렇게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 자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첫째, 이 세상의 모진 풍파 쉬지 않고 불어도 주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고 입히시며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며 인도하셨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천국 가는 그 날까지 먹이시고 입히시며 보호하사 그 어떤 풍파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이겨내게 하사 범사에 감사하며 승리하는 주의 백성으로 삼아주십니다.
둘째, 저 천국 바라보며 늘 깨어서 기도하며 늘찬양하는 주의 백성으로 삼아주십니다.
근세 선교 운동의 선구자였던 ‘데이빗 브레이너드’도 선교를 하면서도 주님을 만나 보기를 간절하게 사모하면서 살았습니다. 브레이너드는 천국을 너무너무 간절하게 사모했습니다. 인디언들의 친구요 선교사였던 데이빗 브레이너드는 자기의 젊음을 인디언 선교를 위해서 모두 불태운 다음 천국을 사모하며 주님 만나 뵈올 것을 간절하게 사모했습니다. 그의 마음과 생각과 가슴은 주님과 천국을 사모하는 것으로 가득했습니다. 그의 기도와 일기는 온통 주님을 사모하고 천국을 사모하는 간절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 새 예루살렘이여! 내 영혼이 갈망하노라. 모세와 어린 양의 노래여! 이 땅에서 구속 받은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배울 수 없는 그 복된 노래여! 주여, 나 홀로 나그네로 있사오니 이 땅에 아무런 위로가 없는 때문이니이다.”(1742.4.25).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내 마음은 하나님과 하나 되고 싶은 갈망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천국은 가까이 있었다. 내 영혼은 이미 멀리 날아오르고 있었다.”(1743.3.7).
“죽음이여, 오게나 자네의 끈에 입 맞추리니 죽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 겁날 것 조금도 없어, 영원한 곳으로 가는 길일뿐”(1743.8.23).
브레이너드는 인디언들을 위해서 그의 젊음을 모두 불태우다가 그의 육신은 완전히 탈진해 졌습니다. 그는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인디언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일기를 썼습니다. 그의 마지막 일기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나는 지금 영원의 문턱에 서 있다.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 나는 지금 영광을 얻기 위해 천국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천국을 사모하는 것은 하늘나라의 한 모퉁이에 서서 모든 영광과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기 위해서이다. 이것만이 나의 부르짖음이요 탄식이요 소원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는 것! 그리고 그를 영원토록 기쁘시게 하는 것! 오직 이것만이 내 영혼이 갈망하는 것이다.”
브레이너드는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그의 약혼녀인 제루샤에게 다음과 같이 속삭였습니다. “나는 그대와 차마 이별할 수 없소. 그러나 우리는 행복한 영원을 함께 누릴 것이요. 나의 영혼은 오늘 하나님의 품에 고이 안기오. 나는 그의 영광을 바라보고 싶소. 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는 1747년 10월 9일 2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제루샤는 넉 달 가량 지나서 닷 새 정도의 짧은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 주님 품으로 그리고 브레이너드의 곁으로 갔습니다.
천국은 주님을 만나 보는 곳이기 때문에 기쁨과 축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만나 볼 천국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그의 심정을 피력했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7).
찬송가 작사의 여왕 패니 크로스비도 주님을 눈과 눈으로 만나 뵈올 천국을 사모하면서 이렇게 간증한 일이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태어날 때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 있었다면 저는 맹인으로 태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천국에 이르렀을 때 내 눈이 제일 먼저 보고 좋아할 수 있는 얼굴이 나의 주님의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Because when I get to heaven, the first face that shall ever gladden my sight will be that of my Savior!"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도 고대가를 지어 부르면서 주님 만나 뵈올 날을 간절하게 사모하면서 하루하루를 사셨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주님 계신 그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옵소서.”
천국은 나를 위해서 지옥의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나를 구원해주시고, 한 평생 나의 걸음을 걷게 하시며 나를 사랑하신, 나의 주님을 얼굴과 얼굴로 그리고 눈과 눈으로 대하여 만나 보는 곳이기 때문에 기쁨과 축복입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받을 상급과 면류관은 모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공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아침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영원토록 찬양하고 영원토록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부활의 형체로 나타나신 예수님,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예수님, 천국에서 금 면류관으로 관 씌워주실 예수님을 생각하며 영영 죽을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1절), 은혜로운 그 말씀 끊임없이 듣는 하나님의 백성들(2절), 저 천국 바라며 주님만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3절)로서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늘찬양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