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에서 광주 -속리산 고속 08:10ㅡ10:30, 13,800원
광주에서 목포 -직행 11:00ㅡ12:30 5,700원
목포에서 흑산도 -남해퀸호 14:30ㅡ16:20 22,150원,
사리까지 비포장 -택시 30분 15,000원
민박 하루 10,000원, 식사 4,000원
-배-
무수한 섬 사이로 지날때의 바다 빛깔은 황토 섞인 누런물이더니 먼바다로 나오니 옥빛입니다 하늘과의 경계 수평선만 보입니다. 파도 없이 잔잔한 바다를 배는 가볍게 내 달립니다. 봄날 오후의 바다, 한참 따라오던 섬들도 지쳤는지 안보이고 엔진 소리만 요란합니다.
공룡이 살던 때는 여기도 벌판이었겠지요. 오직 흑산도 사리만을 목표로 이 여행은 시작되었습니다. 그곳 '복성재'엔 손암 '정약전' 선생님이 16년간의 유배생활을 하다가 끝내 벗어나지 못하신 곳입니다. 남아있는 단 하나의 책 '자산어보'를 쓴 곳이기도 합니다.
흑산이 무서워 자산(玆山)이라고 한 빛나던 하나의 영혼이 살았던 남쪽바다 먼 귀양지를, 이제는 쾌속 관광선을 타고 가는 것입니다 1977년 동국대 교수를 지낸 어류학자 정문기 박사가 지식산업사에서 펴낸 '자산어보'를 가방에 넣어 가지고 그 책의 탄생지를 찾아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지요 목포 부두 터미널 앞 식당에서 어리굴젓, 황새기 젓갈이 맛나 덮밥을 하나 더 시켜 반 그릇을 추가했더니 약간 졸리긴 해도 바다의 짭짤함이 배여 드는 듯 합니다.
-민박집-
저녁을 먹고 손바닥 만한 동네 포구에 산보를 갔습니다 여기는 흑산도 사리라는 곳으로 옛 이름은 '모래미', '사촌', 그리고 지금은 '사리'로 불리고 있는 섬 서남쪽입니다. 초등학생 11명이 다니는 분교 옆 민박집에 조금 전 연안부두에서 지프차 택시를 30분타고 도착한곳으로 홍합국으로 맛있게 저녁을 먹고 난 뒤입니다. 바다는 조용하고 썰물로 물이 빠져 바위와 돌들이 드러나 있군요. 가볍게 한바퀴 돌고 와 커다란 방에 혼자 앉아 이 글을 씁니다. 택시 기사가 준 지도를 보니 서쪽으로 보이는 큰 봉이 '옥녀봉'이라 하고 그 남쪽에 꽃섬이 점처럼 찍혀 있군요. 오는 도중 친절한 운전기사의 호의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유배지도 보고 그의 대쪽같은 글씨가 바위에 새겨진 것도 보았습니다. 이곳에 몇 대를 살다간 사람들은 조용한데 외지에서 유배 온 사람들의 흔적은 떠들썩하니 주객이 전도된 것은 아닐까요. 섬 서북쪽에는 젖가슴바위가 장보고 장군이 쌓았다는 반월성 옆 바다에 있다고 표시되어 있는걸 보니 어디에나 예리한 안목(?)의 소유자는 있나 봅니다.
관광이 아닌 특별한 의미를 찾아 온 여행이라 편안하고 좋습니다. 복성재 를 잠깐 올라가 보니 돈을 많이 들여서 그런지 담장이 너무 이쁘더군요. 초가집으로 작고 아담한 동네 서쪽 제일 높은 곳에 복원되어 있습니다. 거기서도 바다가 보이고 작은 돌섬 하나가 기막히게 적당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끝없이 되돌아 가려 했던 그의 의지가 선 듯 이해되지 않았으나 그 긴 유배를 생각해 보면 그 뜻을 헤아릴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이런 적막속에 있으니 편안하나 약간은 어색하기도 하군요. 저녁 산보에는 새 소리가 많이 들리던데 산에 나무가 무성해서 그런가 봅니다. 저녁 8시 20분에 이불을 펴고 누웠습니다. 피곤도하고 동네 공청 테레비가 고장나 아주 조용합니다. 그저께 도서관에서 출판저널 자산어보의 산실 흑산도를 찾아서 기사를 보고 복사해 거기 기사내용대로 그 책을 가지고 그 기자가 탔던 그 택시 운전수(김형만)의 차로 여기 도착했으니 기분이 묘합니다. 지역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이에게 신나게 들려주는 그의 열정이 멋있었습니다. 보통의 택시모는 사람들에게 없는 그의 영업 방식이 흥미롭고 재미있더군요. 동전 만한 산비탈 밭에 심겨진 홍당무 싹 같은게 뭔가 했더니 그게 천궁이란 약초 라는군요. 내일은 산에 올라 후박나무, 황칠나무 , 초령목을 만나려고 합니다 황칠나무는 즙을 짜 칠하면 모든 것이 황금빛으로 변하는 귀한 나무이구요. 초령목은 멸종위기에 처한 귀한나무로 일명 귀신나무로 불리기도 한다는데 이 나뭇가지를 불전에 꼽아 귀신을 부른다는 설이 있답니다. 흑산도는 사람이 사는 11개의 섬과 무인도 90개의 섬으로 인구가 5,000명, 목포까지의 거리는 93km이니 이백 삼십리구요. 멀리서 흑산도를 바라 보았을 때 깊은 바닷물 빛과 섬이 검게 보인다 해서 그리 불린다 합니다. 무공해로 남아있는 항구에 있다는 것이 따뜻하고 좋습니다.
-둘째날 4,12, 금요일 흐림, 6시 30 기상-
어젯밤 일찍 잔덕에 아침 기상이 빨랐습니다. 방바닥이 따끈따끈해 게으름 피우기 딱 좋군요. 하늘엔 구름이 가득합니다. 밴댕이(큰놈은 6~7치 정도로 몸이 높고 엷다. 색은 희고, 맛은 달고 짙다. 흑산 바다에서는 간간이 이 물고기를 볼 수 있으며 망종때 부터는 암태도에서 잡히기 시작한다. 작은놈은 크기가 3~4치 정도로 몸이 약간 둥글고 두텁다) 자산어보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밴댕이 콧구멍 이라고 놀릴 때 쓰는 고기를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약전이 그토록 바라던 귀향을 하지 못하고 죽자 평소 그를 시중들고 도와주던 박씨 부인은 그가 남긴 몇 권의 책을 가지고 육지로 갑니다. 얼마 후 그의 장성한 아들이 결혼을 하게되자 그 책은 신방 벽지로 발라지게 됩니다. 유배에서 풀린 다산이 형을 도와준 박씨부인을 찾아 감사인사와 혹시 유품이라도 남아있지 않을까 살펴보지만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것을 알고 평소 형으로 보다 사부처럼 따랐던 형을 생각하며 가슴 아파합니다. 하늘도 무심치 않아 신방 문을 열어보게 되고 벽면가득이 붙어있는 낯익은 형의 글을 발견 할 수 있어 그것을 필사 복원해 우리 나라 수산고 문헌 중에서 대표적인 책 자산어보가 부활하게 됩니다. 한편의 영화보다 더 극적인 장면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그 책을 볼 수 있고 내가 이곳에 찾아올 수 있는 계기도 된 것이지요. 인연이란 이렇게 되어야 근사한게 아닐까요?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때문에 많이 알려진 것에 대해서 섬사람들은 고마워하면서도 불만이 큽니다. 섬사람들을 비하했다는 것이지요, 또 자산어보 박물관이 이곳에 세워지지 않고 면 소재지에 세워진 것은 정치적인 논리의 희생으로 생각하더군요 찾아오기 힘들어도 여기 복성재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옳기는 하나 세상은 꼭 그렇게만 되는 것이 아니지요 "칼자루 쥔 사람 맘이다" 어제저녁 먹으면서 옛날 이장님과, 주인장, 택시기사 그리고 나와 함께 나눈 이야기입니다. 아! 참 하나 빠진 것이 있습니다. 주인장 왈 "사실 사람들이 여기를 찾아와도 부끄럽습니다. 남아 있는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집만 옛터에 덩그러니 지어 놓았을 뿐이지요." 마치 자기가 잘못해 그런 것처럼 말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관광 온 것이 아니고 오직 여기를 목표로 해서 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자료와 내용을 알고 왔으며 다만 그분의 체취를 느끼고자 온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잠깐 다녀왔지만 그만큼 복원된 것만이라도 고마운 일 이지요" 거의 10시간, 버스 두 번, 배 ,택시로 이곳까지 온 것이 새삼 잘한 일이다 생각됩니다. 이동 전화는 잘 터져 아이들과 몇 번 통화했으니 고마운 일입니다 만년필로 오랫만에 이야기를 풀어놓으니 이 고요만큼이나 좋습니다.
아침을 먹고 습관대로 커피 한잔을 청해 마신 후 뒷산으로 올랐습니다. 지금 서남쪽 바다가 보이는 산등성이 바위에 앉아 나는 이 글을 씁니다. 이번 여행에는 현장에서 글 쓰기로 생각해 종이와 팬을 들고 다닙니다. 동백나무, 해송, 그리고 처음보는 이국적인 풀들이 길가에 가득합니다. 햇살도 따뜻하고 특히 온갖 새소리가 바람속에 섞여 들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시는 영국 어느 시인의 "아! 바다가 보인다!" 라고 하지요 나는 지금 그 시의 모든 것을 느끼는 듯 합니다. 바다 위 해녀머리처럼 떠있는 것은 바다목장 부표이겠지요 뒤로는 마을 지붕의 짙은 감색갈이 유난히 선명합니다. 바다 쪽으론 급경사이고 길도 없어 가기는 어렵지만 바라보기만 해도 좋습니다. 아름드리 나무가 세월의 무게를 담고 있는 듯 싶습니다. 붉은 동백꽃은 돌맹이 가득한 좁은 길 위에 뚝뚝 떨어져 있습니다. 남쪽바다를 좀더 보고싶어 작은 봉우리를 더 오르고 싶지만 길이 없어 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신발을 벗고 바위에 앉아 글을 쓰니 꿈속 같습니다. 바다가 정말 좋습니다. 가까이 눈에 익은 제비꽃도 보이구요 비탈에 드문드문 산 벗꽃이 불처럼 환합니다. 이 오염되지 않은 땅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부지런히 구경거리 찾아 허둥대는 여행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알 것 같습니다. 머리 위에 경쾌하게 나르는 작은 새 들은 제비입니다. 육지에 사라진 제비가 이곳으로 이주한 모양입니다. 풀이나 나무 모두가 억세고 튼튼해 보이는 것은 바람 때문이겠지요 옆 바위틈새에서 자라는 작은 해송나무는 아래를 바라보니 나이 꽤나 먹은 듯 하구요. 가지 다섯 개 위로 솟은 잎들은 바닷가 아낙의 손처럼 힘줄 가득 합니다. 길은 이상스럽게도 사람들의 생각과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 '손암'도 나처럼 이 바위 위에서 바다를 바라 보았을 것입니다. 이 능선에 이곳이 가장 편하고 전망 좋은 곳 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성재 뒤로 난 유일한 산길이니까요. 여기까지와 산봉우리를 안가 볼 수 있나 생각해 무조건 올라가니 곳 길이 있었습니다. 산꼭대기엔 작은호가 있더군요 이 땅을 지키던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안개 때문에 수평선은 아니 보이고 우측 끝으로 보이는게 꽃섬 같군요. 사리항구 앞에 떠있는 쬐끄만 섬들도 잘 보입니다. 어제 지나온 도로는 급경사구요 나무를 헤치고 왔더니 잠바에 송진이 묻어 지저분하게 됐지만 오고 싶어 왔고 하고싶어 이룬 것이니 뭐 대수겠습니까. 물푸레나무 순이 아기 손처럼 삐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다시 복성재 사랑채 쪽마루에 앉아 이 글을 씁니다. 한 평 남짓한 방 두 개가 있는 쪽 마루지요. 집 앞대문 아래에 작은 공소가 있습니다. 탄피 껍데기 종이 입구 앞에 달려있고 늙은 수국, 유도화, 무화과 울타리가 있구요. 샘이 있어 들여다보니 맑은 물이 고여있고 비닐호수가 몇 개 연결되어 있어 지금도 동네 사람들이 먹고 있나 봅니다. 복성재 본채 방문 위에는 다산의 글씨로 사촌서당(沙邨書堂)이라 쓴 현판이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각 되어 붙어 있습니다.
서당을 열며 손암이 다산에게 서당기를 부탁했으니 다산의 글씨로 집자한 현판이 어울리겠지요. 본채 동쪽으로 있는 건물은 북쪽이 변소 남쪽이 광입니다. 그 남쪽으로 양지 바른곳에 장독대가 있습니다. 독은 하나도 없습니다만 옛날에는 가슴저린 독들이 있었겠지요. 비탈진 곳이라 축대를 쌓고 대문에서 서너발짝 가면 여섯 개의 계단을 올라야만 본채가 있습니다. 본채는 세칸으로 마루와 약간 큰 방둘은 서당으로 사용한 듯 합니다. 동남쪽으로 있는 작은방이 거실이고 북동쪽으로 부엌이 있습니다. 담과 축대가 큼지막한 돌로 되어있어 퍽 안정감이 있습니다. 방문을 열어보니 깨끗이 비어있고 노란 비닐 장판이 현재의 시대로 나를 끌어 내리는군요 곰팡이 쓴 벽을 수리하는지 사랑채 방에는 풀 그릇이 널려 있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싶습니다. 노란 개나리 몇 그루 아직 꽃을 달고 있는 것은 응달에 심겨진 까닭일 겝니다. 손암은 여기서 죽지는 않았습니다. 가까운 우이도에서 지병으로 죽었으며 육지 땅끝 강진에 유배된 동생 다산과는 자주 편지를 주고 받았다고 하나 남아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가 유배 된 것은 천주교를 포교한 까닭이지만
정조가 죽자 그때까지 숨죽이고 있다가 살아남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에 의한 남인계열의 숙청이라는 정치적인 이유가 더 컸습니다. 제가 가진 정조가 열 세 살에 영조의 생일날에 쓴 글씨는 영조가 70이 넘어 새장가를 든 후 오빠 김 귀주에게 준 것이지요. 이런 역사의 인연을 무어라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볏집 지붕의 바랜 색이 편안하게 다가옵니다. 뜨락에 삶은 달걀껍질이 누군가 이곳에와 허기를 채운 흔적이겠지만 안 그랬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갑자기 학교 운동장에서 여선생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크게 들립니다. 담 너머로 바라보니 학생 열한명과 선생님 한 분이 전통음악을 현대화한 테잎에 맞추어 체조를 합니다. 전교생이 다 모인 듯 싶습니다. 봄날이라 바람이 불고 뿌연 황사가 끼였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동네 이장님이 올라 오셨습니다. 낯선 사람이 왔으니 찾아온 것이지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동네 형편을 알 것 같습니다. 관광지로 개발해야만 한다는 의지가 강하더군요. 상록수 우거진 앞산이 궁금했는데, 거긴 당산으로 그 오랜 세월 아무도 손대지 않아 아름드리나무가 많다합니다. 점심 먹고 가봐야겠습니다. 어느덧 오전 시간이 거의 다 지나 갑니다. 골목길이 시멘트로 포장되어 깨끗합니다. 가즈런히 쌓인 장작더미, 지금은 비어있는 염소 집, 모두 정겹고 편안합니다.
이장님 말씀으론 이 동네 여자들은 과부가 되어도 시집을 안가 열녀문이 많다든가, 서당이 있었던 까닭에 사리에서 면장이 많이 나왔다는 말은 은근한 자부심의 표현 이겠지요.
가만히 있어도 이리도 구경꺼리가 많은데 돌아 다녀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일 주일은 머물러야 제대로 알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엇저녁에 가 보았던 포구를 나가보니 밀물이 밀려와 내가 거닐던 자갈밭은 물 속에 잠겨 있습니다. 여기는 야생 고양이와 누런 족제비가 자주 눈에 띄는군요. 모래사장을 걸으며 기념될게 없을까 찾아보니 별 다른게 없어 흰 조개껍질 하나와 지름15센치, 두께 2센치 되는 시멘트에 작은 구멍이 뚫렸고 비닐 끈이 꼬여있는 것을 주어 왔습니다. 바다어장 추로 생각됩니다. 떨어져 파도에 떼밀려 나온 모양입니다. 어부들의 삶에 한 단면인 것 같아 육지로 데려 가기로 했습니다. 민물과 만나는 도랑 입구 쪽으로 가보니 길이 4~50 센치 짜리 숭어가 나를 보자 황급히 바다 쪽으로 사라집니다.
넓은 바다 물고기라 그런지 행동이 힘차고 민첩합니다.
여기는 당산입니다. 잡밤나무가 고목이 되어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동백도 아름드리가 많습니다. 토종난 한 그루가 이 글을 쓰는 곳 정면에 보이구요 고사리, 둥굴레 , 삽초싹도 눈에 띕니다. 길은 사방으로 나 있어 대중만 치고 올라와도 되는군요. 약간 높은 곳이라 그런지 바람소리가 크게 들리고 여기도 새가 많습니다. 수북이 쌓인 낙엽이 세월을 말해 줍니다. 햇살 드는 곳에 앉아 나무사이로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글을 쓰니 웬 호사 입니까? 하루에 서너번 들락이는 마을버스에서 경적을 울려도 타는 사람이 안 보입니다. 참 조용한 동네입니다. 오리나무, 단풍나무, 진달래도 눈에 보입니다. 바위속에 둥근 돌들이 박혀 있는 것을 보면 옛날 옛날 땅이 용 트림한 흔적 인 듯 싶습니다. 부지런히 길을 따라 걸어가니 새로 시멘트 포장한 동네로 들어오는 유일한 도로로 빠집니다. 항구 동쪽이라 바다와 동네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아까 오전에 올랐던 동산도 가까이 보이구요 집집마다 둘러싼 돌담, 구불구불한 고삿길, 바다에 동동 떠있는 배, 나는 아무 때나 고기를 잡는 줄 알았더니 요사이는 잡는 때가 아니라는군요. 자리를 또 옮겨 이번엔 동쪽능선 바다가 가장 많이 보이는 곳입니다. 작은 소나무만 있는 까닭에 저 아래 동쪽바다와 바위가 선명히 보입니다. 바다가 잔잔한 날인데도 바위를 향해 쉴새없이 밀려드는 파도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부서지는 하얀 포말과 푸른바다가 넘치는 힘을 뿜어냅니다. 나무숲을 헤치고 오는 도중 갑자기 작은 새매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올라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산이 무척 야성적입니다. 바위 산 이라 그런가요. 어떤 나무나 풀 한 포기도 자기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살아남기 힘들겠지요 아무런 부담 없이 느낌대로 걷고 쉬고 바라보고 이런 것도 재미있습니다. 점심때도 이름 모를 고기와 젓갈을 반찬 삼아 맛있게 먹었습니다. 아주머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숭어 이야기를 했더니 "한번 잡아 보시지 그랬어요?" 답 하시더군요. 혼자서는 어렵고 둘 이라면 그물 들고 시도하면 될 것 같기도 합니다만, 싱싱한 고기 구경한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바람이 점차 세게 붑니다. 바위를 타고 내려가 새로 만든 배대는 곳으로 내려가 걸었습니다. 아까 숭어 만난 곳에 어떤 젊은이가 차를 대어놓고 괭이를 들고 몸을 낮춰 걸어가더니 얕은 물로 뛰어들며 내리 치는걸 보았습니다. 허탕 치는걸 보고 옆에 있는 젊은이에게 "왜 그물로 잡지 그래요?" 했더니 그런건 쉽게 뛰어넘는 다나요. 바다고기를 그리 쉽게 잡으려 하다니 말도 안 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향로 폐리라 쓰인 커다란 배가 들어와 배 뒤쪽을 내려 화물차 두 대를 싣고는 이내 물보라를 일으키며 돌아갑니다. 축대 아래를 보니 붉게 녹슨 쇠 뭉치 하나가 보여 뛰어 내려가 가져와 물에 씻어보니 배에서 쓰던 것 같았습니다. 이것으로 무얼 만들 수 있을까 이리저리 궁리해 보았지만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버리고 오며 아까 주어온 시멘트 조각을 "흑산도의 달" 이라 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풍자적이고 현대적인 이름이 될 것 같습니다. 나는 사리 앞 바다에서 "흑산도의 달"을 주어왔다. 괜찮은데, 스스로 웃으며 바람 속을 뚫고 집으로와 이 글을 씁니다. 산으로 바다로 많이 돌아 다녔는데도 아직 두시반 입니다. 아이들 표현처럼 시간이 널널 합니다. 길가에서 동네 학생 둘을 만나 같이 돌아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상점에들려 과자도 사주고 음료수도 마시고 초등학교 계단에도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학생 숫자가 12명이라고 하니 한명이 틀린 것입니다. 졸졸졸 따라다녀 이제는 떼어내고 들어 왔습니다만 글쓰는 중에도 유리창 밖에서 드려다 보고 재잘거립니다. 여기도 눈에 띄는 사람은 거의 노인들입니다. 마치 동네에 많은 늙은 나무처럼 세월을 가득 담은 얼굴입니다. 길가에 많이 보이는 녹슨 쇳덩어리는 닻입니다. 큰 것 작은 것, 옛날의 빛나던 시절을 품고 쉬는 닻은 또 다른 바닷가의 그리운 풍경이군요. 이제 네시 반입니다. 설핏 기울기 시작하고 약간 나른합니다. 다시 어제 처음 이곳에 도착한 시간입니다. 바다가 궁금해 항구에 나가 보았더니 아까 숭어가 놀던 곳이 100미터쯤 물위로 드러나 있습니다. 3 미터 정도는 간만의 차이가 있는 곳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녁 준비하시는 아주머니께서 육지에서 재미있는 분이 오셨다고, 초등학교 여선생님 두 분이 함께 저녁식사 하시며 말씀 나누시겠다고 합니다. 점심 저녁을 이 민박집에서 늘 해결 한다하니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이쁜 젊은 여 선생님 인가 했으나 40대 후반 아주머니와 나와 동갑내기 한 분 이였습니다. 식사 후엔 동네 아주머니 어제 이장님 까지 오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10시쯤 모두 가시고 두분과 주인 아주머니 넷이서 11시 반까지 장장 다섯시간 반을 이야기했습니다. 어디서나 사람 사는 모습은 다 같구나 너나없이 희노애락의 길을 걸어가는구나........ 오랫만에 이 낯선 땅에서 소낙비처럼 흠뻑 이야기를 나누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안 먹던 저녁커피 덕분인지 졸리지는 않으나 주인아주머니가 졸아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자 잡시다.
-셋째날 아침- 4. 13.
일찍 바다에 나가 물 빠진 동굴 속에서 나무 조각 하나와 손에 들어오는 둥근 회색 돌 하나를 주었습니다 흑산도의 달2 작품에 쓸 계획입니다. 나무 조각은 길이가25 센치 폭 3 센치로 작은 것이나 오랜 세월 바닷물과 돌 사이에 굴러다녀 꽤 단단한 나무인데도 잘 마모가 되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 에게 부탁해 동백나무 토막 하나를 얻어 왔습니다. 가져온 작은 톱으로 잘라 반을 잘라 가방에 넣었습니다. 이제 돌아갈 준비는 다 되었으니 끝으로 복성재에 다시 한번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따뜻한 햇살아래 천천히 낮은 돌담, 장작더미, 졸졸졸 흐르는 또랑물을 보며 찾아가 마루에 걸터앉아 새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어슬렁거림의 기분 좋음을 즐겼습니다. 이제 곳 택시가 올 시간입니다. 바다를 새소리를, 바람을, 인정을 가득 담아 가지고 돌아가는군요. 안녕 흑산도여, 안녕
첫댓글 편지지를 들고 다니며 현장에서 쓴 글입니다 참 좋았던 여행 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