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 서원의 즐거움
한 번 제대로 아부하려한다. 너무 얄미워마라. 작년 7월 백수 생활의 끝자락에 서있는 나에게 하나의 소식이 들려왔다. 로고스서원의 글쓰기 모임이 서울에 생긴다는 것이다. 아무 망설임 없이 등록했다. 책을 읽었으니 뭔가 써보고 싶은 본능이었을까? 아니면 글 쓰는 그리스도인이란 책을 접하고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일까? 사실 어떤 만남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더듬어간 만남은 나를 책의 세계로, 쓰기의 세계로, 만남의 세계로 이끌었다.
책의 세계로 빠지다.
책에 대한 자극은 꾸준히 받으며 살았다. 책 읽기를 좋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봤던 까닭일까?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은 늘 있었다. 하지만 왜? 읽어야 하는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이가 없다. 학교에 다닐 때 교수님이 그러셨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100권을 읽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지금은 그 말에 딴죽을 걸고 싶다. 읽되 제대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 전문가가 된다.
로고스 서원을 통해 책은 철저하게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색색별로 밑줄치고 읽어 내려가며 뿌듯해 했던 지난날의 모습이 떠오른다. 스쳐 지나가는 생각을 잡을 생각도, 저자가 걸어오는 말에 대답하지도 않은 체 마지막페이지로 달라가곤 했다. 그리고 기뻐하며 쾅 덮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책읽기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활용해야 내 것이 된다. 활용의 정점은 쓰기다. 써야 내 것이 된다.
로고스 서원은 책을 점점 좋아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책에도 편식을 있을까? 즐겨 읽던 장르가 아닌 책들이 커리큘럼에 있다. 시큰둥하게 읽다가 푹 빠져든다. 서영은 작가의 ‘노란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란 책이 그랬다. 세심한 감정의 표현도 좋았고, 문장의 느낌도 좋았다. 좋은 작가를 소개받는 즐거움이란? 괜스레 부자라도 된 듯 행복에 겨워진다.
쓰기의 세계로 이끌다.
로고스서원의 원칙이 있으니 글쓴이가 글을 읽고 나면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어떤 분은 박수 때문에 오는 것 같아 조심스럽다고 한다. 난 생각이 다르다. 박수 좀 받으면 어떠랴! 박수는 받아야 한다. 그래야 쓴다. 공산당박수는 힘이 세다. 그 박수가 내 글을 변화시킬 것이다.
공산당박수가 힘이 얼마나 센지 내가 산 증인이다. 고등부에서 생의 첫 설교를 했을 때다. 현장 증인인 여고생이 말한다. “전도사님 처음 봤을 때, 수전증 걸린 줄 알았어요.” 나도 안다. 기운 쫙 빠지고, 앞으로 어떻게 감당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때 부장선생님이 부른다. 창피한 마음에 얼굴을 떨구고 갔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연출됐다. 부장선생님이 말한다. “오늘 처음 설교하신 전도사님께 박수쳐드리며 축하해 드립시다.” 얼마나 열심히 쳐주는지 환호까지 말이다. 그때 힘을 세게 받았다. 얼마나 좋던지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산당박수는 로고스서원의 행복 비타민이다.
써야한다는 부담감이 버릇하나를 만들었다. 매사에 글감을 찾는 것이다. 스쳐지나가는 일상에도, 오고가는 대화에도 주위를 기울인다. 일주일에 하나의 글이지만 만만치 않다. 시간도 많이 잡아먹어 지칠 때쯤 사부님은 페북을 통해 자극하고 어르며 다독인다. 초짜에게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까닭이리라.
쓰기는 또 하나의 유익이 있으니 생각이 깊어지는 것이다. 무엇이든 쓰려고 하면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지 않고 말할 수는 있으나 쓰기는 생각이 선행된다. 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을 거듭하니 생각이 생각을 낳는다. 때로는 좀 엉뚱한 놈도 나오지만 기찬 놈도 가끔씩 나온다. 스스로 대견해진 나는 또 생각에 빠진다. 한국의 글쟁이라는 책에서 이주헌씨는 책을 쓰는 것은 돈 벌면서 공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공부의 달인, 호모쿵푸스의 저자 고미숙씨는 모든 공부가 귀환하는 최종심급은 글쓰기라 하였다. 쓰기를 통해 공부의 정점을 찍고, 사고의 깊어짐을 체험하며, 상상의 나례를 펼치고자하는 자는 로고스서원으로 오라!
만남의 세계로 접촉하다.
“저 이제 일해요.”란 글을 해맑게 웃으며 읽어내려 가던 혜림자매가 멈추어 선다. 내 두 눈의 시선도 그곳에 멈추어 느낌을 공유한다. 이내 다시 이어지는 읽기 그리고 마무리. 곧이어 터져 나오는 박수와 사랑의 마음들. 여기가 로고스서원이다.
아픈 곳을 말할 필요도, 드러내 보일 필요도 없다. 의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과 느끼는 감정에 충실하게 글만 써내려 가면 된다. 쓰고, 읽고, 듣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치유는 보이지 않게 이루어진다. 닫힌 마음을 두드려 열게 하고, 모난 상처들도 다듬는다. 오랜 체증도 내려간다. 로고스서원엔 보이지 않는 손의 치유가 있다. 로고스서원의 신비다.
책의 저자와 직접 만남을 주선하는 로고스서원만의 즐거움도 있다. 북토크를 통해 저자가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은혜도 되고 책의 내용이 더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저자를 더 깊이 이해하고 만났다는 충만함이 있다. 이 또한 로고스서원만 즐거움이라 하겠다.
몇 주 전에 사부님께 물어다. KTX 타고 부산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두 시간 반. 왜 묻느냐고 묻는다. 그냥이라고 답했다. 사실은 고맙다고 말해야하는데 그냥이라고 말했다. 부산에서 서울,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 5시간, 아침에 준비하고 걷고, 대중교통까지 이용하면 거의 하루의 삼분의 일을 보낸다. 이건 고마운 거다. 신대원 다닐 때, 새벽부터 우유배달하고 양평으로 학교가고 다시 집으로, 하루에 7시간씩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피곤하고 지친다. 사부님은 왜 피곤을 무릅쓰고 오실까? 그저 고마운 거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사실 사부님께 감격했던 다소 엉뚱한 일이 있었다. 전도사의 고충을 누가 알겠느냐? 서울 첫 북토크 때 플랜카드를 붙일 때였다. 플랜카드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였다. 그리곤 난 한쪽 끝을 붙잡고 사부님은 반대편 끝을 붙잡고 단 몇 초 만에 붙여버리는 마술을 부렸다. 사부님의 한 마디 말로 그 마술은 이루어졌다. 그 마술의 주문은 “홍전도사! 플랜카드는 벽에서 안 떨어지고 붙어있기만 하면 돼!” 난 충격과 감격스런 마음으로 벽에 대충 붙였다. 뚝딱 붙인 플랜카드는 북토크 내내 잘 견뎌줬다. 그 사건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는 전도사들만 공감할 것이다.
로고스서원에서의 만남 끝엔 독자가 있다. 내 책의 독자가 되어 읽어줄 이가 상상 속에 등장한다. 상상만으로도 기쁨일 아닌가? 사실 난 책을 내야겠다는 각오나 다짐이 매우 약했다. 모임을 통해 글을 사랑하고 책 출판을 목표로 다부지게 노력하는 서원사람들을 보며 자극을 받는다. 그 자극은 나를 상상속의 내 독자들에게로 향하게 한다. 아 기쁘다! 누군가가 내 글에 대가를 지불하고 가져간다면 이처럼 기쁜 일이 또 있을까!
로고스서원에는 즐거움이 있다. 책이 있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곳엔 치유가 있고 웃음이 있고 환희가 있다. 부러워하는 그대여! 그대도 로고스서원에 와 기쁨을 나누어가져가라!
첫댓글 홍 전도사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정말 로고스 통해 배운 게 많으시네요...바쁘셔서 4학기는 같이 못해 아쉬었는데,이렇게 글을 통해 만나니 반갑네요..늘 진지한모습으로 검은 안경이 인상적인 홍전도사님^.지속적으로 로고스통해 함께 성장해요^^ 늘 감사^^
로고스 서원의 그 즐거움 덕분에 부산 16기 3학기를 새롭게 시작합니다. 로고스 서원에 붙어 있기만 하면 될 것 같습니다.^^
글이 재미나고 유익합니다!!! 죽죽죽 잘 읽히네요!!! 짝짝짝! 공산당 박수!
공산당 박수가 이렇게 힘이 될줄 몰랐네요. 많이 써 먹어야 겠어요. 나한테도 공산당박수 자주 쳐 줘야지. 짝짝짝~~~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