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경, 서울침례교회 부목사인 이상훈 목사의 9인승 프레지오 차량에 짐을 잔뜩 싣고 인천공항으로 향하였다. 장모님은 못내 눈시울을 붉히셨다. 어제밤에 아버님도 그러하셨다. 연세가 드셨으니 어쩌면 이제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시는 걸까? 아버님은 올해 85세, 장모님은 75세…. 내 마음도 짠~ 해져 온다.
프레지오에는 아내의 큰 언니와 큰 형부, 아내의 남동생이 함께 탔다. 인천공항으로 달리는 도로는 아침의 상큼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늘 보아왔던 올림픽도로, 한강변, 도로와 집들이 괜스리 다시 한 번 내 눈길을 잡는다. 이제는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어서 일까?
인천공항에는 아내의 둘째 언니와 형부가 나와 있었고, 침신대 신대원을 함께 공부했던 이영호 목사(부천침례교회 담임)가 나와 있었다. 비행기 좌석을 배정받고 수화물을 보내는데 예상되었던 문제가 발생했다. 무게가 초과되는 것이다. 결국 장모님께서 정성스레 싸주신 토종된장은 둘째 처형께 되맡겼다. 나중에 화물로 보내달라며…. 이삿짐을 독일로 보낸 후 한 달이 넘게 생활했었기에 그에 따른 짐들이 많았다. 옷가지도 많았고 자질구레한 것들도 적잖았다. 그런데 아시아나항공편에서 책이 든 무거운 가방 하나를 더 붙여주었기에 나머지는 우리 네 가족이 잔뜩 들고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아시아나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배웅하는 사람들과 식구들을 뒤로 하고…. 그동안 해와 여행을 여러 번 했는데 이러한 느낌은 처음인 것을 보니 역시 해외 이사는 별다른 느낌이다. 아마도 유학과도 또 다른 느낌이리라. 다시 돌아올 기약이 분명치 않으니 말이다.
긴 비행시간. 영화도 감상하고, 가끔씩 좌석의 맨 뒤편으로 나가서 팔다리를 움직이는 운동을 하기도 하고, 비행기 안에서 내다보는 땅과 구름을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기도 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지난 4월에 체코와 독일을 방문할 때도 아시아나비행기를 이용하여 프랑크푸르트로 들러서 들어갔었기에 괜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계획한 바에 의하면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은혜가 마중 나와 있을 것이었다. 드레스덴으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타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에 약 3시간을 넘게 머물러야 하는데 예전에 서울침례교회에서 내가 지도하던 중고등부에 있었던 최은혜 자매가 마중 나오기로 했었다. 은혜 자매는 독일에 올겐을 전공하기 위해 유학을 왔고 9년 정도를 독일에서 지낸 자매였다. 지금은 잉고(Ingo)라는 역사를 공부하는 독일남자와 결혼하여 딸을 한 명 낳고 프랑크푸르트에 살고 있다.
프랑크푸르트공항에 도착하여 수화물 표를 확인해보니 인천공항에서 보낸 짐이 드레스덴까지 연결된 것이 아니라 프랑크푸르트까지로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입국 수속을 하고 짐을 찾아 루프트한자(Lufthansa)의 데스크로 향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짐을 보내는 과정 속에서 데스크의 여직원의 실수로 내 짐가방 하나가 수화물 표(baggage check)도 부착하지 않은 채 컨베이어에 의해 실려나간 것이다. 그 가방은 드레스덴공항에 가서 내일이나 모레 찾으라는 직원의 말만 듣고 바쁜 나머지 좌석 배정을 받았다. 짐의 무게가 너무 많아 40유로 가까이 되는 초과운임비를 내고 짐을 보냈다.
그러는 와중에 방송을 통해 “안창국”이라는 이름이 포함된 독일어 방송이 나왔다. 나중에는 “안창국 목사님”이라는 한국말이 포함된 독일어 안내 방송이 나왔다. 나는 수화물과 좌석배정 등의 처리를 하느라 못들었는데 아내가 그 방송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은혜 자매가 우리를 찾는 것이라는 생각에 무조건 안내소(Information desk)를 찾았다. 그러다가 그 근처에 있는 은혜 자매 부부를 만났다. 얼마나 반갑던지….
은혜 자매 부부와 공항 내에 있는 맥도널드햄버거 집으로 가서 햄버거를 먹으며 잠깐의 교제를 했다. 은혜 자매의 남편인 잉고는 말이 많지 않았다. 서로 간단한 대화를 영어로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은혜 자매의 통역으로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눌 수 있었고…. 아마도 잉고는 우리가 만났으니 서로 이야기를 나누도록 배려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아내가 오랜만에 한국에서 온 가까운 사람과의 대화를 보다 더 잘 즐기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아직 갓난아기인 어린 딸을 안고 여기저기 걸어 다닐 뿐이었다.
다시 드레스덴으로 가는 비행기의 탑승구로 갔을 때에는 우리 네 명의 가족은 기진맥진하였다. 저녁 9시가 지나자 졸음이 마구잡이로 다가왔고 하람이는 그것을 견디지 못해 어디든 앉으면 깊은 잠으로 곯아떨어졌다. 한국 시간으로는 한참 오밤중이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지만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네 명이 나눠들어야만 하는 짐이 하나 가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때마다 깨워가며 가까스로 하람이와 예종이를 부추겨 드레스덴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비행기에 올라타자마자 우리 네 명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나 역시 비행기가 언제 출발했는지 기억에 없다. 드레스덴에 다 도착하였다는 기내방송이 나올 때에야 깨어났는데 족히 한 시간을 넘게 잠 잔 것 같았다.
드디어 드레스덴에 도착! 내려서 다시 수화물을 찾는데 역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잘못 들어간 짐 하나가 도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먼저 아내와 아이들을 밖으로 내 보내고 그 근처에 있는 유실물 신고소에 가서 신고를 하려고 하는데 밖에서 환호성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드레스덴한인교회 성도들인 것 같았다. 유실물 신고를 하고 밖으로 나서니 다시 한 번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나의 피로를 사라지게 하였다. 한 30여 명의 성도들이 마중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 부부에게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안창국 목사님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도 보였다. 우리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마중 나왔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두세 명의 대표자가 나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피로가 단숨에 가시는 것 같았다.
여러 대의 차에 나눠 타고 우리 집으로 향했다. 처음 들어오는 우리 집! 밤이어서 밖에서는 우리 집을 볼 수 없었지만 새로 지은 집이어서 내부가 깨끗하였다. 들어오니 카펫이 훤하게 깔렸는데 주방시설도, 아무런 가구도 없는 훵한 거실만 널찍하였다. 그래도 교회에서 냉장고와 간이 전기렌지, 커피메이커 등을 갖다놓았고, 등도 임시로 몇 개만 달려있었다. 안방과 아이들 방에는 침대가 놓여져 있었다. 교회에서 사다놓은 것이리라. 아이들 방에는 이층침대, 안방에는 싱글 침대 두 개만한 크기의 널찍한 침대가 놓여져 있었다. 이부자리와 함께…. 알고 보니 우리가 쓸 수 있도록 교인들이 자기들의 물건을 임시로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물론 침대와 일부 물건은 아예 갖다 놓은 것이지만 말이다.
거실에서 마중 나왔던 교인들과 둥그렇게 앉아 잠깐의 대화를 나누었다. 30여 명이 둘러앉을 수 있으니 거실이 넓긴 넓다. 물론 식탁 놓을 자리에도 함께 둘러앉았었지만 말이다. 모두들 그 다음날부터의 일정들을 이야기했다. 왔으니 행정적 처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누가 어떻게 담당할 것인지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이고 잘 모르기에 그저 지켜만 볼 수밖에….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모두 돌아가야 할 시간이어서 내가 대표로 기도를 하겠다고 하니 모두 머리를 조아린다.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우리의 만남이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유익한 만남이 되게 하옵소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리고 감사하면서 교인들이 가져다 놓은 이불을 덮고는 편안한 드레스덴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