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여(大餘) 김춘수(金春洙)
임 보(시인, 충북대 교수)
대여 김춘수 시인이 타계했다. 2004년에 우리 시단은 구상(具常)에 이어 두 원로를 잃게 되었다. 여러 대중매체와 문예지들은 앞을 다투어 타계의 소식과 함께 그의 문학적 업적을 크게 보도했다. 세칭 김춘수를 ‘꽃의 시인’이라고들 부른다. 그의 작품「꽃」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는 막상「꽃」이 그의 대표작으로 거론된 것에 대해서 별로 달갑게 생각지 않았다.「꽃」은 그가 평소 심혈을 기울여 작업해 온 소위 ‘무의미의 시’와는 상치된 초기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우리 시단에서 대여만큼 하나의 문학적 경향을 일관되게 고수하며 밀고 나간 시인은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그의 문학관에 대한 태도는 고집스러워 보일 만큼 집요했다. 김춘수 시론의 골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시(poem)는 곧 예술(art)이며 예술은 곧 기술(craft)이다. 고로 시는 기술이므로 시에서의 내용(정신) 같은 것은 문제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의 내용이 되는 언어의 관념을 지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것이 그가 추구한 무의미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는/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純潔이다./ 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나의 하나님」전문 이 시의 구조는 단순하다. A=B라는 은유 구조인데, ‘하나님’이라는 하나의 주지(원관념,tenor)를 놓고 여러 가지의 매체(보조관념,vehicle)들이 병치되어 있다. 하나님이 늙은 비애요, 푸줏간의 살점이요, 놋쇠 항아리요, 어린 순결이요, 연둣빛 바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어떤 독자가 이 시를 읽고 상식과 논리로 해석해 보고자 한다면 얼마나 당황해 할 것인가? 전지전능한 성스러운 하나님이 어떻게 동물의 육신이며 광물질이며 또한 무형의 바람에 비유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상식을 초월한 황당한 진술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은 일반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상식적인 하나님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기존의 고정 관념을 깨뜨리고자 시도된 것이다. 이 시의 의도는 ‘하나님’이 지닌 일상적 의미의 해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기존의 관념을 난도질하여 그 의미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왜, 언어로부터 의미를 제거하려 하는가? 대상으로부터의 ‘자유’를 내세운다. 마치 비구상 화가들이 대상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듯이 시에서도 그러한 자유를 구현해 보겠다는 것이리라. 아무런 메시지도 담겨 있지 않는 소리의 울림만 들어 있는 그러한 순수시를 꿈꾼다. 그의 시관(詩觀)의 저변에는 세계에 대한 부정― 허무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회화에서와는 달리 시에서 의미를 제거하는 일은 쉽지 않다. 회화의 매체인 선과 색채는 원래 의미가 없는 것이므로 가능하지만, 시의 매체인 언어는 원초적으로 의미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아무리 잘라 의미를 제거하려 하지만 잘린 언어들은 부러진 몸뚱이를 꿈틀대면서 다른 의미를 만들며 불사조처럼 살아난다. 이것이 죽일 수 없는 언어의 숙명이다. 대여는 한평생 언어의 의미와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고독한 시지프스라고 할 수 있다 대여와 나는 사석에서 꼭 한번 만났다. 어느 상가(喪家)에 갔다가 우연히 가까운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는 내게 몇 마디 건넸으나 말소리가 크지 않아(주위도 소란스럽고)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내 글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대여는 2001년 정월, 모 시지(詩誌)에「건건록초(蹇蹇錄抄)」라는 권두시화를 발표했는데, 내가 그 글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 바 있었다. 대여는 그 글에서 시 쓰기는 시인의 인격과는 무관한 재능의 문제일 뿐이라는 지론을 폈는데, 내 글은 그의 ‘인격 무관론’에 대한 반론이었던 것이다. 내 반론에 대한 대여의 재반론이 있었다. 거기에 대한 재재반론을 나는 썼지만 원로와 계속 맞서는 일이 바람직해 보이지 않아 발표는 보류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던 얼마 뒤였으므로 아마 그 문제에 관한 언급이 아니었던가 추측이 된다. 그날 곁에 있던 어떤 이가 대여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참 있던 대여가 촉촉한 눈빛으로 ‘아내’라고 대답했다. 상처(喪妻)의 아픔이 채 가시지 않았던 대여가 상가(喪家) 마당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이었던가 싶다. 그의 냉철한 시론과는 달리 여리고 따스한 정을 느끼게 한 정황이었다. 그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내 가슴속에 아름다운 여운으로 오래 남았다. 행사장에 나타난 대여는 멋진 나비 넥타이를 즐겨 달고 있었다. 시에서뿐만 아니라 생활에서도 그는 스타일리스트였던 것 같다. 동양에서 태어났지만 그를 기른 것은 서구적 풍토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적 자양이 된 인물들이 릴케, 세스토프, 도스토예브스키 등 서구인들인 것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어렸을 때 보았던 호주 선교사의 강렬한 인상 때문이었을까? 그는 이국적인 향수 속에 젖어 살았던 것 같다.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處容)’을 자처했던 그의 선민(選民) 의식도 어쩌면 이와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를 ‘언어의 비구상화’로 만들려 했던 그는 한국 현대시의 폭을 넓혔고, 적지 않은 추종자들을 얻기도 했다. 그리하여 이 땅의 수많은 비극적인 시인들과는 달리 시인으로서의 영화를 생전에 충분히 누리고 갔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그의 선호와는 달리 세상 사람들이 그를 「꽃」의 시인으로만 기억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아직 그의 ‘무의미의 시’를 받아 드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