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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城羅氏 史要
금성나씨 가문유래(錦城羅氏 家門由來)
중국 그대 축융(祝融)의 후예로 알려진 금성나씨는 기원전 759년(주나라 무왕 때)에 광정공(匡正公)이 공을 세워 나국(羅國)에 봉해짐으로서 나라 이름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 나씨(羅氏)가 되었다.
『금성나씨대동보(錦城羅氏大同譜)』에 의하면 축융의 후손 주공(珠公)이 한고조(漢高祖)때 나라에 공을 세우고 예장군(豫章君)에 봉해져서 예장나씨(豫章羅氏)가 되었다.
당(唐) 태종(太宗)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 나지강공(羅至强公)이 조정의 고구려 정벌론을 반대하고 우리나라(발라현=나주)에 망명한 후 신라국 좌승상(左丞相)에 이르렀으며 그 후에 십여대가 대대로 나주지방에서 거주하였다. 그러나 상대의 소목계통(昭穆系統)이 명확하지 않아 후삼국(後三國) 통일 때 공을 세운 삼한벽상공신(三韓璧上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이신 나총례(羅聰禮)를 시조(始祖)로 한다.
나주시 문평 소재 경모사(景慕祠)에서 시조로부터 15조가지 91위(位)를 봉안(奉安) 매년 양력 5월 첫째 일요일에 금성나씨 모두가 향사(享祀)에 참배(參拜)한다.
고려사 열전편(烈傳篇)을 비롯하여 모든 문헌에 나주나씨(羅州羅氏) 시조(始祖)는 나총례(羅聰禮)라 되어 있고, 모든 인물이 나주인(羅州人)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본래 나주인(羅州人)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조조(英祖朝)는 무신(戊申:1728)년에 무신흉변(戊申凶變)의 혐의(嫌疑)를 벗기 위하여 변의문(辨疑文)을 내고 금성나씨(錦城羅氏)로 이관(移貫)하여 금성나씨(錦城羅氏)라 부르게 되었다. [변의문] 나주의 나씨는 두 씨족이 있으니 나부(羅富)를 시조로 하는 나씨는 근본이 여황인(艅艎人)이다. 여황이 나주에 혁속된 고로 나주라 이관하고 금성나씨는 4세(四世)가 금성군(錦城君)이므로 금성(錦城)으로 관(貫)을 삼르니, 대개 연혁이 같지 않고, 실로 관이 같아서 입는 혐의를 없게 할 따름이다. 본관이 나주였다가 금성으로 옮겨진 실증은 숙종43년(1717) 이전부터 영조5년(1729)까지 나주로 납적했고, 영조8년(1732)부터 영조32년(1756)까지는 거평(居平)으로 납적하고 영조35년(1759)부터는 금성으로 납적하였다.
금성나씨는 고려 개국시 한강의 양천허씨(陽川許氏) 금강의 전의이씨(全義李氏) 가문과 더불어 영산강 유역을 대표하는 성씨(姓氏)로 자리하였다.
2007년 4월 일 한국족보학연구소장 양권승(梁權承)
나성원류와 가문유래(羅姓源流, 家門由來)
나성(羅姓)의 개종조(開宗祖) 축융(祝融)은 황제(黃帝)의 후손으로 제왕곡(嚳)의 스승이였는데 회국(鄶國 : 지금의 하남성정주부(河南省鄭州府))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워 다스렸다.
그 후 축융의 61세손 광정공(匡正公)이 주나라 무왕 때에 의성을 평정하는데 공(功)이 있어 의성후(宜城候)에 봉해졌고 사방 백리를 식읍으로 하사 받았다. 이곳은 나수(羅水)의 남쪽에 있으므로 국호를 나국(羅國)이라 하였는데 땅을 가르켜서 성(姓)을 상징하고 나라 이름을 성으로 삼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그로부터 강정공 31세손 능보(凌甫)공이 진(秦) 나라에 공을 세워 익백후(益伯候)에 봉해진 후 나국(羅國)을 부흥하여 지강(枝江)에 도읍하니 구 나국성이 있던 곳이다. 나라로써 성씨를 삼는 일은 이로부터 시작되니 나씨시조(羅氏始祖) 원류라 할 수있다.
한나라 때 광정공(匡正公)의 41세손 주공(珠公 전 245~155)이 예장(豫章 : 지금의 南昌) 태수로 출사하였을 때 송백(松柏)을 널리 심어 자신의 절조를 보이니 세상에서는 홍애(洪涯)선생 또는 나한백(羅漢柏)이라고 하였다. 그 후손들은 이때부터 주공(珠公)을 예장나씨 시조로 기일세(起一世)하니 중국에서는 예장나씨 일본이다.
당태종 때 벼슬하던 지강공(至强公 珠公 25世孫? 650년경 추측?)이 고구려를 정벌하자는 정책에 반대하고 후환이 두려워 부득히 가솔을 거느리고 동도하니 발라현 지금의 나주땅에 배를 댔다고 한다.
그 후에는 신라국 좌승상에 오르고 자손들 십여대가 나주지방에서 거주하였다. 그러나 대수가 명확하지 못한 탓으로 소목계통이 소명한 삼한공신(三韓功臣) 대광(大匡) 금성부원군(錦成府院君) 휘 총례(聰禮)를 기일세(起一世)하고 우리의 시조로 삼았다. 근안컨대 고려사 열전에 "대장군 나유(羅裕)는 나주인(羅州人)이니 삼한공신(三韓功臣) 대광 총례(聰禮)의 십세손야(十世孫也)라" 하였다. 연고로 동방나성의 시조는 휘 총례이시니 제족 중 안정(安定) 군위(軍威) 수성(壽城) 비안(比安)등의 나씨는 모두 총례를 시조로 하는 나주에서 분관(分貫) 하였다.
우리 씨족은 신라 효공왕때 사관(賜貫) 나주(羅州)하고 918년에 금성이 나주로 개명되면서 나주지방의 실질적인 지배 호족으로 그 후손들이 삼한갑족으로 조선시대 중기까지 약 820년간 행세하면서 나주나씨 족보 즉 가정임술보(1562)와 천계계해보(1623)을 간행하여 씨족사로 삼아왔다.
그런데 숙종임신보(1692)를 만들려고 할 때에 나주성내에 살던 일파가 중조인 부(富)가 상실고휘(上失考諱)되어 계통이 미혹됨을 한탄한 나머지 별립(別立)하여 자존을 지키자는 모의 끝에 그 증거가 되는 상기 양구보와 고승을 수거 소각하는 방법으로 토당양라설(土唐兩羅設)을 허위날조하고 상혼(相婚)된 혼염을 악용하여 이근(異根) 이족(異族)하는 파장을 일으켜 씨족을 이간시키는 한편 저 소중한 가정, 천계 양보를 수거 소각하는 일대 소동과 만행을 일으켰다. 나아가 경종신축보(1721)라는 이름하에 부(富)를 시조로 족보 없는 자들을 설복하여 세력확장을 꾀하는 한편 소기의 임신보 간행을 적극 방해함으로 인하여 수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조무신흉변(1728)과 동왕6년 나홍언(羅弘彦)의 역모사건(1730)등이 발생하여 일주동관(一州同貫)으로 인한 혐의와 누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부득히 본관을 거평(居平)으로 바꾸어 쓰다가 정모수보시(1747) 변의문(辯疑文)을 부치고 나주의 고호(古號)가 금성(錦城)이고 시조가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인 고로 이관금성(移貫錦城)한다고 하였다.
수보당시 이관의 불가피성을 전국에 산거하는 일가(一家)들에게 전달하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미처 영향이 미치지 못한 곳도 있고 교통과 통신망의 불편으로 합의 도출이 어려울 수도 있어 지금도 종인 중에는 금성으로 수보는 하되 호적에는 의연 나주로 되어 있어 심히 유감지사라 아니 할 수 없고, 우리씨족의 가장 불행했던 시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사한 연유에서 우리는 신라말엽부터 1732년까지 본관을 나주로 써왔고 이로부터 1758년까지 27년간 거평으로 썼다가 그후 부터 오늘에 약 250여년간 금성나씨로 행세하며 살아왔다.
연이나 오늘날 호주제의 폐지등 씨족관념이 거의 사라져가는 마당에 더욱더 동근(同根)의 귀일이 요청되며 서로 단합하고 아껴야 할 시대적 요청이 있다 할 것이니 이미 대구에서는 본관을 초월하여 나씨대종회(羅氏大宗會)란 이름으로 대동단결하고 있다 함은 매우 자랑스럽고 모범된 일로 여사한 사례를 표본으로 오라(五羅)의 각 대표가 한자리에 모여 대아(大我)를 위하여 소아(小我)를 버리고 각종문헌과 보록(譜錄)등을 근거로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합의점을 찾아 대동단결하여 자랑스럽게 총라보(總羅譜)가 간행된다면 명실상부한 나주나씨(羅州羅氏)로 우리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2007년 4월 일 대종회고문 34세 갑주(甲柱) 삼가 기록하다
금성나씨 성향비문(錦城羅氏 姓鄕 碑文)
나성(羅姓)은 본시 축융(祝融)의 후예로 광정공(匡正公)이 나국(羅國)에 봉해지면서 득성하게 되었고, 한고조 때 주공(珠公)이 예장땅 영주가 되면서 예장나씨(豫章羅氏)라 하니 중국에서는 예장나씨 일본이다.
당태종 때 상서좌복야로 있던 나지강공(羅至强公)이 고구려 정벌의 모이를 반대하고 망명길에 올라 황해를 건너 발라현 지금 나주에 박주하였다. 그후 신라조정에 출사하여 좌승상(左丞相)에 오르고 자손들은 나주를 중심으로 포거하게 되었는데 효광왕 때에 이르러 사관(賜貫) 나주나씨(羅州羅氏)라 하였다.
그러나 소목계통(昭穆係統)을 밝히기 어려워 연대 계승이 소명한 때로부터 위시조(爲始祖) 기일세(起一世)하니 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 휘 총례(聰禮)이시다. 근안컨대 고려사열전에 "대장군 나유(羅裕)는 나주인(羅州人)이니 삼한공신 대광 총례의 십세손야(十世孫也)"라 하였다. 연고로 동방나성의 시조는 휘 총례이니 제족중 소위 안정(安定) 군위(軍威) 수성(壽城) 비안(比安)등의 나씨가 개출어나주(皆出於羅州)에서 분관(分貫)하였다.
오족(五族)은 여초로부터 규조가 대대로 빛나서 칠대광(七大匡) 이상서(二尙書) 사부원군(四府院君)과 육봉군(六封君)을 받은 근역의 명문벌족으로 특히 의종때 도첨의를 지낸 금성부원군 6세(六世) 국영(國英)은 말년에 정중부의 난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낙향(나주)하여 스스로 호장(戶長)이 되셨고, 슬하에 대호군 인겸(仁謙)과 상장군 수겸(守謙) 형제를 두니 대호군계의 9세(九世) 득황(得璜)은 방호사에 이어 형부상서에 오르고 아들 금성군 유(裕)는 황명회원대장군이요. 아들 익희(益禧)는 첨의참리 금성군으로 시호가 양절(良節)인데 충목왕 때 금서 신아동(新芽洞=文平)으로 이거하였고 서해도 안렴사를 지낸 13세 문규(文奎)는 문장과 행위가 한 세상의 으뜸으로 건봉강사 향하고 있다.
상장군계의 10세 인송(仁松)은 한림학사로 시호가 문절(文節)이고 충렬왕 때 도첨의를 지낸 순(珣)은 금성부원군이요 고려말 예문관제학을 지낸 불사이군의 수절신 15세 계종(繼從)은 동학사 삼은각에 배향되고 죽헌사를 세워 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사이군의 종훈을 지켜 영채된 듯 하였으나 성종11년 경자시에 10명이 나주골에서 합격한 경사를 노래한 금성별곡(錦城別曲) 5장 중에 나환흥(羅渙興) 나경원(羅慶源) 형제 무고하고 나진문(羅振文) 나처광(羅處光) 시기가풍(始起家風)하며 나현(羅顯) 나빈(羅贇) 사촌형제 공등연방(共登蓮榜)하니 경기하여(景幾何如)로다 하였다. 이어 중종 때 대과에 세 번 장원하고 호당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오른 송제공 세찬(世纘)은 을사명현으로 시호가 희민인데 건송제사향(建松齊祠享)하고 임진왜란때 거북선을 만들어 매해전에서 공훈을 세운 체암공 대용(大用)은 경기수사에 오른 선무공신으로 건소충사향(建昭忠祠享)하고 정유재란 때에 협천군수 청류공 적(迪)은 거의토적(擧義討賊)한 의병대장으로 일문삼절(一門三節)이다.
이와같이 현조들의 관(貫)이 사승과 공과문적에 모두 나주인이라하였고 또 과방록에도 송제공을 위시하여 창주공 무송(茂松) 구화공 무춘(茂春) 간암공 충좌(忠佐)등이 역시 나주나씨로 기록되어 행세하여 왔으나 영조4년(1728) 이인좌의 반란과 동왕6년 경술 흉변에 소조(所祖)를 달리하는 나씨와 일주동관(一州同貫)으로 인한 혼효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 영조23년 정묘수보시(1747) 변의문(辨疑文)을 부치고 나주의 고호가 금성이고 또 시조가 금성부원군이신 고로 이관금성하고 현재에 이르렀으나 이관당시 나주와 격조했던 각처에 산재한 제족중에는 지금에 금성으로 수보는 하되 호적에는 의연이 나주로 되어있어 유감지사라 아니 할 수 없다.
우리 씨족은 조기이래 자손들이 번연현달하여 36여세에 그 수 5만여에 이르고 제제다사(濟濟多士)로 인물이 연면부렟하여 문과 59명, 무과 96명, 생진과 음사 570명이며 특히 경술국치 이후 항일독립투쟁한 3.1운동민족 대표 나인협(羅仁協)과 나용환(羅龍煥)이 있고 의열단의 나석주(羅錫鑄) 의사와 광복군의 나월환(羅月煥) 장군 등이 있다.
그 외 각 방면에 현저한 학행훈업(學行勳業)을 매거하기 어려워 계락만을 서술하는 바이다.
(소재지 나주시 성향공원)
단기 4324(서기 1991)년 9월 15일
34세 갑주(甲柱) 짓고, 전주후인 이학용(李學庸) 쓰고, 금성나씨성향비건립위원회 세움
금성나씨사요 - 경모사 묘정 비문(景慕祠 廟庭 碑文)
나주의 옛 이름 금성은 고려때 삼한공신 대광(大匡) 금성부원군 휘 총례(聰禮)를 시조로 우리 나씨의 성향이다.
본래 나씨는 중국 축융씨의 후예로 예장 땅에 살아서 예장나씨라 하는데 당태종 때 지강공이 고구려 정벌을 반대하고 동쪽나라의 나주땅에 건너와 십여세가 신라에 벼슬하였으나 소목을 가르기 어려워서 고려개국공신인 휘 총례를 일세조로 하니 우리의 시조이시다.
6세조에 이르러 벽상삼중대관 도첨의 금성부원군 휘 국영(國英)은 백관의 우두머리였으나 명종이 수선하자 나주호장을 자청하고 대호군 휘 인겸(仁謙)과 금성부원군 휘 수겸(守謙) 형제를 두었고 8세 휘 효전(孝全)은 예부상서, 9세 휘 득황(得璜)은 사공상서, 10세 회원대장군 휘 유(裕)는 지밀사사이고, 휘 윤(允)의 초휘는 인(認)인데 첨의정승이고 휘 인송(仁松)은 한립학사로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11세 금성군 휘 익희(益禧)는 시호가 양절(良節)인데 이곳 문평에 오셨고 휘 순(珣)은 금성부원군이고 휘 천부(川富)는 신호위대장군이요 안정백 휘 천서(川瑞)는 안정(安定)으로 적라백 휘 문서(文瑞)는 군위(軍威)라. 분관(分貫)하고 12세 금성군 휘 열걸(英傑)은 문명이 높고 외방정벌에 공이 컸으며 13세 명경박사 휘 문규(文奎)는 서해도 안렴사를 지냈는데 서해민이 선정에 보답하여 영당(影堂)에 모셨고, 14세 예부시랑 휘 순(純)의 초휘는 위(緯)인데 이태조의 예의파서에도 불취하고 한림학사 휘 봉(奉)과 그리고 15세 충순당 휘 흥유(興儒)와 예문관 제학 휘 계종(繼從)과 더불어 이군(二君)을 섬기지 않은 수절신(守節臣)들이었다. 휘 중호(仲浩)는 통례문봉례이고 휘 광우(光佑)는 중순대부 충주목사로서 수성파(壽城派)의 중조요 휘 명우(明佑)는 홍문관교리이고 휘 중귀(仲貴)는 정순대부이니 현조를 두루 조술(祖述)하기 어렵다.
오호라! 15세에 이르도록 송와(松窩) 선조 아니고는 봉영을 모두 실수(失守)했으니 한탄이 막심할 따름이다.
이제나마 후손들이 헌성을 모아 시조의 단(壇)을 설하고 경모사와 숭의문 금서제, 여충헌을 건립하여 시조이하 15세까지 91위(位)를 봉안하고 세일제(歲一祭)로 조두(俎豆)하게 되니 후손은 보본추원하고 만세에 번연하라. 여기 비(碑)를 세우다.
단기 4332(서기 1999)년 11월 일
금성나씨대종회(錦城羅氏大宗會) 세움 34세 맹헌(孟獻) 찬병서(撰幷書)
경모사 봉안 선조록(景慕祠 奉安 先祖錄)
시조 1세 휘 총례 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 (始祖一世 諱 聰禮 三韓功臣 大匡 錦城府院君)
2 세조 휘 은고 자헌대부 금산군 (二 世祖 諱 恩誥 資憲大夫 錦山君)
3 세조 휘 함헌 교위직장 대광 (三 世祖 諱 含憲 校尉直長 大匡)
4 세조 휘 성좌 삼중대광 예빈경대호군 (四 世祖 諱 成佐 三重大匡 禮賓卿大護軍)
5 세조 휘 정서 삼중대광 나성군 (五 世祖 諱 廷胥 三重大匡 羅城君)
6 세조 휘 국영 삼중대광 금성부원군 (六 世祖 諱 國英 三重大匡 錦城府院君)
6 세조 휘 언 서경유수 ( 六 世祖 諱 彦 西京留守)
6 세조 휘 ○○ 정사 (六 世祖 諱 ○○ 政事)
7 세조 휘 인겸 검교대호군 (七 世祖 諱 仁謙 檢校大護軍)
7 세조 휘 수겸 상장군 금성부원군 (七 世祖 諱 守謙 上將軍 錦城府院君)
8 세조 휘 효전 황태중대부 예부상서, 배 나주 손씨 (八 世祖 諱 孝全 皇太中大夫 禮部尙書, 配 羅州 孫氏)
8 세조 휘 선 정의대부 (八 世 祖 諱 宣 正義大夫)
8 세조 휘 극효 정원장군 중랑장 (八 世 祖 諱 克孝 定遠將軍 中郞將)
9 세조 휘 국충 (九 世 祖 諱 鞠忠)
9 세조 휘 응화 (九 世 祖 諱 應和)
9 세조 휘 득황 황금자광록대부 사공상서, 배 나주 정씨
九 世祖 諱 得璜 皇金紫光錄大夫 司空尙書, 配 羅州 鄭氏
9 세조 휘 문현 삼중대광 (九 世 祖 諱 文玄 三重大匡)
9 세조 휘 문일, 배 양씨九 世 祖 諱 紋逸, 配 梁氏
10 세조 휘 성 직장, 배 정부인 조씨十 世 祖 諱 成 直長, 配 貞夫人 趙氏
10 세조 휘 유 회원대장군 밀직사사, 배 군부인 백천 조씨
十 世祖 諱 裕 懷遠大將軍 密直司事, 配 郡夫人 白川 趙氏
10 세조 휘 윤 동경유수 첨의정승, 배 정경부인 안동 김씨
十 世祖 諱 允 東京留守 僉議政丞, 配 貞敬夫人 安東 金氏
10 세조 휘 종수 첨의중찬十 世 祖 諱 宗綏 僉議中贊
10 세조 휘 철준 봉익대부十 世 祖 諱 哲準 奉翊大夫
10 세조 휘 장명 봉순대부, 배 정부인 복주 권씨 (十 世祖 諱 長命 奉順大夫, 配 貞夫人 福州 權氏)
10 세조 휘 인송 통의대부 함림원시강학사 시호 문절공, 배 정부인 수원 이씨
十 世祖 諱 仁松 通義大夫 翰林院侍講學士 諡號 文節公, 配 貞夫人 水原 李氏
10 세조 휘 익희 금성군 시호 양절공, 배 여흥 민씨(十 世祖 諱 益禧 錦城君 諡號 良節公, 配 驪興 閔氏)
11 세조 휘 천부 호위대장군, 배 청주 곽씨(十一世祖 諱 天富 虎衛大將軍, 配 淸州 郭氏)
11 세조 휘 천서 문하시중 안정백, 배 동복 오씨(十一世祖 諱 天瑞 門下侍中 安定伯, 配 同福 吳氏)
11 세조 휘 원서 시중 상산백 (十一世祖 諱 元瑞 侍中 商山伯)
11 세조 휘 문서 시중 적라백 (十一世祖 諱 文瑞 時中 赤羅伯)
11 세조 휘 정서 검교정승 (十一世祖 諱 正瑞 檢校政丞)
11 세조 휘 지열 경주부윤 (十一世祖 諱 旨說 慶州府尹)
11 세조 휘 언 밀직부호군 (十一世祖 諱 彦 密直副護軍)
11 세조 휘 순 도첨의 금성부원군, 배 해주 오씨 (十一世祖 諱 珣 都僉議 錦性府院君, 配 海州 吳氏)
12 세조 휘 영결 봉익대부 금성군, 배 원주 원씨 (十一世祖 諱 英傑 奉翊大夫 錦城君, 配 原州 元氏)
12 세조 휘 준걸 나성군 (十二世祖 諱 俊傑 羅城君)
12 세조 휘 열걸 봉익대부 (十二世祖 諱 烈傑 奉翊大夫)
12 세조 휘 포 통의대부 상호군 (十二世祖 諱 泡 通議大夫 上護軍)
12 세조 휘 종 조산대부 감찰어사 (十二世祖 諱 淙 朝散大夫 監察御使)
12 세조 휘 득방 종사랑 직장, 배 인동 장씨十二世祖 諱 得逄 從仕郞 直長, 配 仁同 張氏
13 세조 휘 문규 명경박사 안렴사, 배 군부인 협천 이씨
十三世祖 諱 文奎 明經博士 按廉使, 配 郡夫人 陜川 李氏
13 세조 휘 구규 승사랑 해평군사, 배 숙부인 함양 박씨
十三世祖 諱 龜奎 承仕郞 海平郡事, 配 淑夫人 咸陽 朴氏
13 세조 휘 천규 봉순대부 (十三世祖 諱 天奎 奉順大夫)
13 세조 휘 원 개성참군 (十三世祖 諱 元 開城參軍)
13 세조 휘 윤, 배 밀양 박씨 (十三世祖 諱 綸, 配 密陽 朴氏)
13 세조 휘 개 전법사 봉직랑, 배 창녕 조씨 (十三世祖 諱 凱 典法司 奉直郞, 配 昌寧 曺氏)
13 세조 휘 덕중 평양부사록 참봉, 배 경주 이씨 (十三世祖 諱 德中 平壤府司錄 參奉, 配 慶州 李氏)
13 세조 휘 이, 배 고흥 신씨十三世祖 諱 頤, 配 高興 申氏
14 세조 휘 순 봉상대부 예부시랑 증판서, 배 이씨, 배 윤씨
十四世祖 諱 純 奉常大夫 禮部侍郞 贈判書, 配 李氏, 配 尹氏
14 세조 휘 연 문하시중 (十四世祖 諱 珚 門下侍中)
14 세조 휘 신 병조정랑 (十四世祖 諱 臣 兵曺正郞)
14 세조 휘 봉 한림직학사 (十四世祖 諱 奉 翰林直學士)
14 세조 휘 신 중추부녹사 (十四世祖 諱 信 中樞府錄事)
14 세조 휘 경 통례, 배 파평 윤씨 (十四世祖 諱 經 通禮, 配 波平 尹氏)
14 세조 휘 낙 밀직부호군 (十四世祖 諱 絡 密直副護軍)
14 세조 휘 문 봉정대부 사헌부감찰 (十四世祖 諱 紋 奉正大夫 司憲府監察)
14 세조 휘 서, 배 제주 양씨 (十四世祖 諱 緖, 配 濟州 梁氏)
14 세조 휘 귀생 (十四世祖 諱 貴生)
14 세조 휘 조 감찰어사, 배 하동 정씨十四世祖 諱 組 監察御使, 配 河東 鄭氏
14 세조 휘 직 봉선대부 밀직부사, 배 함안군부인 안동 김씨
十四世祖 諱 織 奉善大夫 密直副使, 配 咸安郡夫人 安東 金氏
14 세조 휘 서 직장 (十四世祖 諱 緖 直長)
14 세조 휘 선 현령 (十四世祖 諱 線 顯令)
14 세조 휘 제도 (十四世祖 諱 制道)
14 세조 휘 섬 (十四世祖 諱 纖)
14 세조 휘 증 (十四世祖 諱 繒)
15 세조 휘 중호 선무랑 통례문 봉례, 배 안인 박씨, 배 안인 윤씨
十五世祖 諱 仲浩 宣務郞 通禮門 奉禮, 配 安人 朴氏, 配 安人 尹氏
15 세조 휘 광우 중현대부 충주목사, 배 숙부인 벽진 이씨
十五世祖 諱 光佑 中顯大夫 忠州牧使, 配 淑夫人 碧珍 李氏
15 세조 휘 명우 홍문관교리 병조판서, 배 안동 김씨(十五世祖 諱 明佑 弘門觀校理 兵曹判書, 配 安東 金氏)
15 세조 휘 중귀 정순대부 한성판윤, 배 정부인 경주 이씨
十五世祖 諱 仲貴 正順大夫 漢城判尹, 配 貞夫人 慶州 李氏
15 세조 휘 사고 중직대부 형조판서, 배 정부인 충주 유씨
十五世祖 諱 師古 中直大夫 刑曹判書, 配 貞夫人 忠州 劉氏
15 세조 휘 중징 봉정대부 사헌부감찰 (十五世祖 諱 中徵 奉政大夫 司憲府監察)
15 세조 휘 욱 진사 (十五世祖 諱 郁 進士)
15 세조 휘 희 생원 호장 (十五世祖 諱 熙 生員 戶長)
15 세조 휘 중문 군수 (十五世祖 諱 中文 郡守)
15 세조 휘 중산 주서 (十五世祖 諱 仲山 駐書)
15 세조 휘 중립 봉사 (十五世祖 諱 仲立 奉事)
15 세조 휘 중원, 배 이천 서씨 (十五世祖 諱 仲元, 配 利川 徐氏)
15 세조 휘 흥유 판전사 지리박사 (十五世祖 諱 興儒 判典事 地理博士)
15 세조 휘 계유 판관 (十五世祖 諱 啓儒 判官)
15 세조 휘 천강 (十五世祖 諱 天綱)
15 세조 휘 천산 권지승사랑 통례문봉례十五世祖 諱 天산 權知承仕郞 通禮門奉禮
15 세조 휘 천통 (十五世祖 諱 天統)
15 세조 휘 온 선위장군, 배 숙부인 함평 이씨 (十五世祖 諱 縕 宣衛將軍, 配 淑夫人 咸平 李氏)
15 세조 휘 소 (十五世祖 諱 素)
15 세조 휘 석강 (十五世祖 諱 石綱)
15 세조 휘 석견 (十五世祖 諱 石堅)
15 세조 휘 계종 예문관 제학, 배 군부인 한산 이씨(十五世祖 諱 繼從 藝文館 提學, 配 郡夫人 韓山 李氏)
15 세조 휘 구동 판전의사 (十五世祖 諱 龜東 判典儀司)
15 세조 휘 인주 호조전서 (十五世祖 諱 仁柱 戶曹典書)
15 세조 휘 도 (十五世祖 諱 縚)
15 세조 휘 언 생원 (十五世祖 諱 언 生員)
대광 나총례(大匡 羅聰禮) 선생 봉안문(奉安文)
오호(嗚呼) 선생이시여! 엎드려 생각하니 삼한이 분열하여 견훤(甄萱)이 신라를 독란함에, 인민은 분격하여 그 원성이 하늘을 찔렀도다. 드디어 왕태조(王太祖)가 의기(義旗)를 들어 남쪽으로 내려가니, 선생은 나주의 영주(領主)로서 태조를 쫓아 성전(聖戰)을 도왔도다. 드디어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려서, 삼한통합(三韓統合)의 경사가 크게 일어났도다.
현릉은 선생을 특별히 포창하여 삼한공신(三韓功臣)을 책봉(策封)하고 대광(大匡)을 제수(除授)하였도다. 그 수훈을 생각하면 어찌 천양(闡揚)을 늦추리요? 후세의 의로운 성예(姓裔)들 그 천양이 없음을 근심하도다. 이에 숭의제사의 의론이 제발하야, 고려대묘(高麗大廟)의 창건을 선포하도다. 천만예손은 의리를 같이하여 출연을 아끼지 않았으며, 정부기관은 취지에 찬동하여 보조금을 협찬하였도다. 드디어 통일대전이 파주동천(坡州洞天)에 울연하니, 지금 송악산(松嶽山) 푸른빛이 한강(漢江)과 어울려 협화하는 도다.
오백년의 충공(忠功)을 모두 배사(配祀)하니 승국의 역사가 이에 찬연하고, 전각이 사위에 장엄하니 군신(君臣)의 거동이 여재양양하도다. 위로는 하늘의 원기를 지행하고, 아래로는 산하의 정기를 갊었도다. 태양이 하늘에 빛남이여! 그 공훈(功勳)은 천추에 불멸할 것이요, 천신이 충령을 보우하심이여! 향화는 만세에 이어지리로다. 드디어 고려선양회 유사는 고례를 쫓아 정결한 예제(禮齊)를 갖추어 감히 존령을 개국실(開國室)에 봉안(奉安)하고, 태묘(太廟)의 전례에 준하여 공경(恭敬)히 청작(淸酌)을 영전(靈前)에 바치나이다. 바라옵건대 영령(英靈)이시여! 이에 강림(降臨)하사 영원(永遠)히 이에 명인(明禋)을 음향(飮響)하소서.
고려역사선양회(高麗歷史宣揚會)
예문관제학 죽헌 나계종 선생 봉안문 (藝文館提學 竹軒 羅繼從 先生 奉安文)
오호(嗚呼) 선생이시여! 일찍이 문사가 정박하여 현능께서 경서(經書)를 내려 총애하시고, 궁전에 재변이 일어나자 왕실의 안녕을 빌어 천경록(天經錄)을 찬진하셨도다. 계종(繼從)은 곧 현능의 사명(賜名)이요, 선조의 위열을 쫓으라는 뜻이로다. 어찌 모진 운명은 성왕(聖王)의 웅도를 꺾어버렸는가? 저 간악한 역신이 그 성체(聖體)를 시해(弑害)하였도다. 이내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송천(松川)으로 돌아가시고 어느새 조정에는 역도들로 충일하였도다.
마침내 정포은(鄭圃隱)이 선죽교(善竹橋)에서 순절(殉節)하고, 드디어 사직은 이시중(李侍中)에게 돌아가도다. 몸은 초옥에 의지하나 성충의 기품은 오직 결연하고, 마음은 청송(靑松)을 향하니 고절(孤節)의 풍채(風采)는 오히려 안락(安樂)하시도다.
이태조(李太祖)가 문생(門生)으로 하여금 선생을 불렀더니, 다만 왕씨의 세상에서 죽지 못한 것을 한(恨)하시도다. 이제 고려의 사직이 바뀐지 이미 육백년이 지났으나, 오직 승국충현(勝國忠賢)은 유식(侑食)할 곳을 겨를치 못하였도다. 이는 오로지 국가의 결전이요, 또한 실로 천만운잉(千萬雲仍)의 재한(齎恨)이로다. 하늘의 뜻은 기다림에 있고, 사람의 마음은 막기 어렵도다. 이에 고려선양회의 주관으로 드디어 황도남방(皇都南方)에 저 익연(翼然)한 통일대전(統一大殿)을 열었도다. 천만성손(千萬姓孫)은 의를 들어 이에 헌성(獻誠)하고, 정부기관은 충을 쫓아 이에 협찬하였도다. 드디어 유사(有司)는 고례(古禮)를 쫓아 감히 존영(尊靈)을 정절실(靖節室)에 봉안(奉安)하고, 정결히 예제(禮齊)를 갖추어 선생의 영전(靈前)에 천신(薦新)하나이다. 바라옵건대 불매(不昧)하신 영령(英靈)이시여! 이에 강림하사 영원히 이에 편안하옵소서.
고려역사선양회(高麗歷史宣揚會)
회원대장군 나공 묘표(懷遠大將軍 羅公 墓表)
아! 우리 외조부 회원대장군 나공(羅公)이 돌아가신지 39년(1331)이 되어서야 비석을 처음으로 마련하고 공의 자손들이 주(澍)에게 말하기를 택상(宅相)의 반열에 서 있으니 영구히 없어지지 않도록 도모하라 하므로 주(澍)는 재배하고 받아들여 마침내 울음을 걷우고 삼가 서술하니 공의 휘는 유(裕)요 자는 만기(萬器)이고 처음의 휘는 철준(哲準)인데 항렬의 이름이 같은 것을 피하여 재명하였다.
나씨는 본래 나주에서 나왔으니 삼한공신 대광 휘 총례의 10세손이다. 증조의 휘는 인겸(仁謙)이니 검교(檢校) 대호군(大護軍)이요 조부의 휘는 효전(孝全)이니 태중대부(太中大夫) 예부상서(禮部尙書) 지도성사(知都省事)이고 아버지의 휘는 득황(得璜)이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사공(守司空)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판호부사(判戶部事)로 치사(致仕)하였으며, 어머니는 정씨(鄭氏)이시니 삼중대광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휘 국정(國貞)의 따님으로 규범이 있고 자애로웠다.
공이 충생하심에 완력과 용기 기지가 있었고 대의(大義)를 환히 통달하여서 공의 나이 이십 일세에 경선점 녹사(綠事)에 뽑혔고 이럭저럭 하는 사이에 주능직(周陵直)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떄에 임연(林衍)이 궁궐에 친척 또는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기용하고 밖으로는 권세를 폈으며 그물과 함정을 만들어 온 세상 선비들을 함정에 빠지게 하고 사감(私感)을 가지고 공의 장인 조공(趙公) 문주(文柱)를 죽이고 공을 위협하여 이혼(離婚)하게 하였으나 공이 의(義)로써 거절하니 듣는 이들이 탄복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얼마 후 천직되어 병마사(兵馬使)에 이르러 도독사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진도에서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하여 크게 이긴 전공이 있었는데 이때에 조정(朝廷) 선비들의 많은 부인(夫人)들이 적의 무리들에게 재난을 당해서 다시 장가들고 적을 평정한 뒤에 아내가 혹 돌아오는 이도 있었으나 모두 버렸는데 공도 역시 새장가를 들었으나 먼저 적중에 들어가 전처(前妻)를 데리고 와서 다시 부부(夫婦)가 되니 사람들이 다 의(義)롭게 여겼다.
또 김방경이 제주를 칠적에 공이 중군(中軍)으로써 선봉이 되어 먼저 해안에 내려가서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으매 경략사(經略使)가 일찍이 사로잡은 남여 두명을 상(賞)으로 주고 황제께 아뢰어 중통보초(中統寶鈔)를 하사하게 하였다.
신미년 봄에 또 병마사로서 도독사 김공과 병마사 박지량(朴之亮) 김흔(金炘)과 함께 일본(日本)을 정벌할 때 삼익군(三翼軍)이라 이름하고 원(元)나라 도원수 홀돈(忽敦), 좌우부원수 홍다구(洪茶丘) 유복형(劉復亨)과 함께 몽고군, 한군(韓軍) 25,000명과 아군(我軍) 8,000명으로써 합포(合浦=지금의 마산)를 출발하여(1274) 11일 만에 기도(岐島)에 이르니 왜병이 언덕 위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제장이 힘을 다하여 싸워서 천여급을 베고 드디어 삼랑포에 배를 두고 길을 나우어 진격하니 왜병이 대패하여 엎드러진 시체가 삼대 갈거늘 공이 승세를 타고 쫓아가서 남은 무리들을 모두 베어 죽이고 조정에 돌아와서 벼슬을 응양군 대호군(大護軍)으로 옮겼고 금패(金牌)를 하사하며 무덕장군(武德將軍) 관고려군천호(管高麗軍千戶) 벼슬을 내려 우대하였다.
충렬왕5년(1279) 공이 외직으로 나가서 합포를 진압하였고 예(禮)를 안다하여 특별히 소환하여 토속신에게 제사지내는 의식을 맡게 하였다가 얼마 안되어서 지신사(知申事)로 옮겼으며 또 부지밀직사(副知密直司)로 승진되었다.
정해년(1287)에 왕이 내안(乃顔)을 친히 정벌할 적에 공에게 호두패(虎頭牌)를 주어 중익 부만호(副萬戶)를 삼았고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옴에 일등공신으로 책록하여 철권(鐵券)과 토지 일백결(一百結)과 노비 20명을 주고 명위장군(明威將軍)을 제수하고 황제께서는 쌍주금패(雙珠金牌)를 하사하였다.
내안의 무리 합단(哈丹)의 아들 노적(老的)이 평양을 노략질하여 빼앗고 장차 강도(江都=강화도)를 치려고 하거늘 왕이 공에게 명하여 방어케하니 공이 명을 받고 곧 물러나와 자기 집을 지나면서도 들리지 않고 바다를 따라 험한 곳을 넘어 평양에서 적을 만나 싸워 적장 2명을 베니 적의 무리들은 드디어 무너졌다. 또 연기(燕岐)에서 싸워 대패시키니 남은 무리들이 여진(女眞) 땅으로 도망하는지라 왕이 공을 교주도(交州道)로 보내어 쫓아가서 잡도록 하니 노적이 죽전을 넘어 다시 평양으로 달아나는지라 공이 배를 내버려두고 육지에 오르니 현문혁(玄文奕)이 언덕과 습한 벌판이 구불구불하여 복병이 있을까 두렵다고 하였으나 공이 듣지 않고 군사들을 아직 정돈하기도 전에 적군이 크게 몰려오거늘 군사를 지휘하여 후퇴하여 배에 모두 올랐으나 낭장 이무(李茂)등 수십인은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하였다. 문혁이 배에 서서 부르짖어 말하기를 "무(茂)야 힘써서 특별한 공을 세우면 나라에서 큰 상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니 이무등이 독산(獨山)으로 달아났다. 적장이 이를 가볍게 여기고 말에서 내려 앉아 무리들을 나누어 산을 에워싸고 올라오는데 해는 저물고 배가 너무 고파 주머니 속의 밥을 씹으며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사나이가 마땅히 죽을 곳에서 삶을 구할 적에는 두려울 것이 없다" 하고 활을 당겨 쏘아 적장의 목구멍을 맞히니 활시위의 소리에 응하듯이 거꾸러졌다. 때에 적진이 어지러워지니 이무 등이 크게 소리치고 돌격하여 베어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셀 수 없었다.
공은 지밀직사사로서 원(元)나라에 가서 신정을 하례하니 황제께서 삼주호부(三珠虎符)와 옥대(玉帶) 은정(銀錠=은화) 활과 화살, 칼, 안장을 지운말을 주고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을 제수하였다.
가친 낙헌공(樂軒公)이 글을 바쳐 치사(致仕)하시도록 청하면서 말하기를 "누차 사직을 편안히 하여 이름이 철권에 올랐고 형상이 기린각에 올랐는데 그 외에 다시 무엇을 바라십니까?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請)하는 것만 못하겠습니다" 하니 공이 글을 보시고 바로 그날 물러가기를 왕에게 청하니 하교하여 이르되 "경(卿)이 고향으로 돌아가면 나는 앞으로 누구를 의지하랴" 하시매 누차 글을 올리니 마침내 허락하였다.
공이 고향의 산천으로 돌아와 한가롭게 노년을 보내면서 좋은날 좋은 명절이면 자손들이 앞에 가득하고 주연에 풍악을 울려서 즐겁게 하니 모두 부러워 하였다.
충렬왕 임진(1292) 6월 17일 병을 얻어 집에서 졸(卒)하시니 춘추 68세였다. 부음이 들리자 왕이 매우 슬퍼하여 3일간 조회를 하지 아니하시고 제물을 하사하시며 제관을 보내 장례를 도와주셨고 해를 넘겨 3월 어느날 나주 약사원(藥師院)의 북쪽 벌에 하관하여 장례지냈다.
부인은 백천 조씨(趙氏)로서 군부인(郡夫人)이니 병부상서(兵部尙書) 휘 문주(文柱)의 따님이시다. 병인년(1226)에 출생하고 갑술년(1274)에 졸(卒)하셨으며 공의 묘 좌편에 붙였다.
공을 슬하에 남 2녀를 키웠으니 아들 익희(益禧)는 벼슬이 감문위 상호군(上護軍)이요, 딸에 맞이는 홍융(洪戎) 대광 중찬(大匡 中贊)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이방보(李方甫) 지유대위(指諭隊尉)에게 출가하였다.
아들 익희(益禧)가 삼중대광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 민지(閔漬)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으니 아들 영걸(英傑)은 만호(萬戶)요, 딸은 최문도(崔文度)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여서 홍융(洪戎)이 3남을 낳으니 주(澍)와 언박(彦博)과 언유(彦猷)로서 벼슬이 모두 고관(高官)에 이르렀으며 이방보(李方甫)가 1남을 낳았으나 아직 어려서 기록하지 아니한다.
아! 나라가 장차 위태로움에 충성을 다하여 몸이 파리하도록 한 적이 여러번 이었고 군사를 인솔하고 싸워 공(功)을 세운 적이 많았다. 높은 작위와 높은 관직은 공을 영화롭게 할만 하였고 하신 일의 큰 빛이 해와 달같이 밝게 빛나서 공과 같은 이는 국가와 세운(世運)의 성쇠에 관계가 있었으나 이는 한 나라의 공론(公論)이요 나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다.
공의 정벌(征伐)한 공훈이 국사(國史)에 실려 있으나 간략(簡略)하게 기술하여 묘도(墓道)의 글로 하여 오는 후세(後世)에 증거하려고 하나 지극히 사모하는 마음임에도 글을 짓는 실력이 없으니 서러워서 할 말이 없다.
신미(辛未) 1332년 월 일
외손(外孫) 홍주(洪澍) 삼가 기록하다. 금성나씨 대종회 문헌위원 삼가 번역하다
광정대부 첨의참리 상호군 묘명 (匡靖大夫 僉議參理 上護軍 墓銘)
1344년(충혜5)9월 첨의참리 나공이 돌아가니 왕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조상(弔喪)을 하고 양절(良節)이라는 시호를 주었고, 송림현 약사원 북쪽에 예장(禮葬)하였다. 공의 휘는 익희(益禧)요 본관은 나주며 삼한공신 대광 휘 총례(聰禮)의 11세손이다. 증조의 휘는 효전이며 황증 태중대부 상서 좌복야 판호부사로 치사(致仕)하였다. 황회원대장군 판군상만호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군부판서 상장군 세자원빈 휘 유(裕)는 아버님이요 은청 광록대부 동지 추밀원사 병부상서 장군 조문주(趙文柱)의 따님은 군부인인데 공의 어머님이다. 한림직학사사 묵헌선생 민지(閔漬)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남매를 출산, 딸은 봉익대부 동지 밀직사사 상호군 최문도(崔文道)에게 출가하였고, 아들은 영걸(英傑)이며 지금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이다.
공(公)은 절의를 사모하고 다투고 소송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어머니께서 가산을 분배할 때 노복 40명 등 많은 가산으 물려 주려할 때 어찌 같은 자녀인데 남녀 차별이 있을 수 있으며 인덕(仁德)에 누가 되는 일을 하겠습니까 하였더니 어머니께서 의롭게 여기셨다. 원나라의 선명(宣命)을 받아 금부(金符)를 띠고 상천호 회원(懷遠)이 되었다. 별세후 습작으로 관군상만호가 되어 호덕장군의 품계로 삼주호부(三珠虎符)를 찾다. 충렬왕 말년에 신호위 호군이 되어 금자겸 첨의중사를 제수 하였다. 덕릉(춘성왕)이 구폐를 개혁하여 조정신하를 랑관(郞官)으로 쫓는 등 인사계획 등 집정에 문제점을 논박하였다. 벼슬을 그만 둔 10년 후 검교 상호군이 되었고, 7년에 감문위 상호군 천무위겸 중문사수좌상시를 거쳐 광정대부 상의평리가 되고 금성군(錦城君)에 봉작되었으며 44세에 그 아들(英傑)에게 세작(世爵)을 주었다. 17년 동안 한가하게 지내며 민생문제와 인재등용 문제에 대하여 뒷짐지고 근심하며 홀로 정원을 거닐면서 조정의 난맥상을 걱정하다. 일찍이 계림부윤 한번, 합포진관 세 번은 역임했는데 청렴 근면하고 인자하여 남쪽 백성들이 지금까지 칭송하다.
왕이 1344년(충혜5)에 공을 첨의참의에 기용하니 이른바 오재상(五宰相)이라 하다. 하루는 판삼사 이제현에게 말하기를 『과거의 잘못을 경계하지 않으니 내가 그들과 함께 관직을 함께하여 지탄을 받고 싶지 않아 관직을 피하고자 했는데 공은 어찌 생각 하십니까』하였더니, 제현이 사례하면서 『내가 집정에 계책을 말 하였는데 실행하지 않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공의 말씀 뜻 깊게 새기겠습니다』하였다. 이후 10여일 후에 공의 병세를 왕에게 고했다. 아! 그분이 마침내 일어나지 못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급히 찾아가 조문하고 물러나오니 아들과 사위가 비문을 청하기에 그 명(銘)에 가로되 관직에 계실 때는 자혜(慈惠)로우셨고 그 후에는 염치(廉恥)있게 하고 의로움을 강조하며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 하셨도다. 내가 만년에 지기(知己)가 되었으니 공에 대한 말씀을 져버리겠는가.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찬술(撰述) 금성나씨 대종회 문헌위원 삼가 번역하다.
송와선생신도비명(松窩先生神道碑銘)
선생의 휘는 문규(文奎)요 초휘(初諱)는 극종(克綜)이며, 호(號)는 송와(松窩)다. 나씨의 세계(世系)가 나주에서 나왔는데 삼한벽상일등공신 삼중대광보국으로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봉작된 휘 총례(聰禮)를시조로 하였다.
그 뒤 6대가 대광(大匡)이였고 휘 국영(國英)에 이르러서는 고려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도첨의(都僉議)에 이르렀고 좌명 공훈으로 금성부원군에 봉작되었다. 명종 즉위 후 벼슬을 아니하고 나주에서 청백한 생활을 하니 세상에서 공의 참삶을 칭송하였다. 공의 5대조 효전(孝全)은 황명 태중대부 예부상서 지도성사요, 고조의 휘는 득황(得璜)이며 황명 금자광록 대부 사공상서 판호부사 치사하였고 증조 휘 유(裕)는 용맴과 지략이 뛰어나더니 여섯 번이나 정란훈(靖亂勳)을 세워 철권(鐵券)에 이름을 썼고 인각(麟閣)에 화상을 그렸으며 조부의 휘는 익희요 호는 경재 또는 퇴유재요 시호는 양절이며 합포진관을 세 번 하였고 계림부윤을 한번하였으며 금성군(錦城軍)에 봉작되었다. 아버지의 휘는 영걸(英傑)이요 호는 월포(月浦)이며 밀직부사상호군(密直副使上護軍)이다. 명장(名將)으로 연경(燕京)에 들어가 장사성(張士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니 금성군에 봉하였다.
어머니는 원주원씨로 정승을 지낸 충(忠)의 따님이다. 공(公)은 1312년(충성왕4)에 나주 문평 오륜동에서 출생하였고, 어려서 덕기(德器)와 재예(才藝)가 초월에 15세 때 경서와 성리학에 재행(才行)이 탁월하다 하여 지방유지의 추천을 받아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문규(文奎)로 개명했다. 신사년에 명경박사(明經搏士)에 올랐고 충정왕 신묘년에 통례원 지후로 행직을 하였으며, 1352년(공민왕1)에 서해도 안렴사로 제수되어 지내는 곳 마다 교화를 베풀었더니 어린이와 백발노인이 그 수례에 와서 칭송하였다. 그후 신호위 보승랑장이 되었고 계사년에 판도관이 되어 치화(治化)가 크게 행함으로 저정(朝廷) 출입증인 비어대를 하사 하였다. 갑오년에 영주지사로서 학교를 세워 유풍(濡風)을 크게 떨쳤더니 국왕을 접견할 수 있는 비표인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다. 상고해 조면 공은 문무의 재주를 자취를 거두고 빛을 숨기면서 충숙왕과 충혜왕을 폐위하고 복귀 시키는 당에 불참했으며 높은 관직도 사양하고 낮은 관직에 있었으며 내직을 사양하고 외직에 있었기에 그 인품이 마침내 현양되지 못하고 직위가 덕망에 알맞지 못하니 애석하며 아깝다.
1355년(공민왕4) 3월 1일에 별세하니 그 나이 44세요 나주 거평면 탄방 천마봉 아래 오좌로 된 언덕에 예장하였다. 배위는 협천 군부인 이씨이니 판사 음(蔭)의 따님이요 묘는 합장하였다.
공양왕 경오년(1390)에 남방 선비들이 나주군서에서 삼십리 된 무학봉 아래에 사우(祠宇)를 건립하였고 제봉산 아래 오륜촌에 영당(影堂)을 지어 춘추로 제향을 받은지가 삼백여년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년 병화로 소실되었고 아직도 중건하지 못하였다.
공이 5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순(純)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시랑인데 아버지 상을 당해 3년을 예묘살이하고 상복을 벗은 후로는 인근에 있는 바위 위에 올라 선고를 회상하곤 했더니 세상 사람들이 그 바위를 망사암이라 하였다. 차남 인(珚)은 시중이요, 삼남신(臣)은 병조정랑이며, 사남 봉(奉)은 문과 한림이요, 오남 신(信)은 중추녹사이다. 두 딸은 하동 정영흥(鄭永興)과 창령 성수항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중호(仲浩)는 태종 때 문과로 봉례요. 광우(光佑)는 문과로 충주목사요, 명우(明佑)는 진사이며 중귀(仲貴)는 장방(長房)소생이요, 중징(仲徵)은 감찰이니 중방소생이며 욱(郁)은 진사요, 희(熙)는 삼방소생이요, 중문과 중산은 문과주서이고 중위와 함양 박팽수의 아내는 사방의 소생이다.
아! 공의 명성과 덕망이 당시에 빛났고 복음이 후손에게 내리어 한강 남쪽 천리에 자손이 곳곳에 번창하여 현관으로 입적하였고 초야에서 행적이 드러난 사람의 숫자가 천백이나 되어 비록 심상하게 길 가는 사람이라고 분묘를 지적하면서 공경하고 부러워하며 탄식하고 찬양하니 마땅히 비석에 새기어 영원히 밝게 보일 것이로다.
공의 후손 기종(基宗)이 문로(門老)의 명의로 나에게 명(銘)을 청하였기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가장(家狀)에 의거 위와 같이 찬술하고 명(銘)으로 이어 가로되,
세상에서 썪지 않은 것은 오직 덕과 공훈이로세 아름다운 공의 덕과 공훈은 도로써 임을 섬기는 것이로다. 상분(賞分)이 원제(元帝)의 세력을 끼고 있어 인군이 노정에서 욕을 당하는데 탁월하게 의지하기 않고 빛나고 밝게 곳곳하였다. 산반(散般=한직)에서 머뭇거리고 외직을 왔다 갔다 하다 보니 교목세가(喬木世家=훌륭한 집안)에 관직이 덕에 차지않았구나. 고인복의 여파가 멀리 천백리를 흘러갔는데 혁혁한 후적(後蹟)을 지나 비로서 묘도에 새기려고 하였네. 삼척봉분은 흙을 덮어 무너지지 않으리라.
세재계해(歲在癸亥) 1923년 월 일
전숭록대부(前崇錄大夫) 의정부찬정 겸(議政府贊政 兼)
판돈령원사(判敦寧院事)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 규장각학사(奎章閣學士)
시강원(侍講院) 일강관(日講官) 당성(唐城) 홍순형(洪淳馨) 찬술(撰述)함
죽헌 나선생 기적비문(竹軒 羅先生 紀績碑文)
우리는 고려말 충절의 표본이요 동방이학의 조종이라 할 수 있는 정포은(鄭圃隱)선생등 3은과 이문회우로 도의지교하고 학행일여로 입절사의(立節死義)의 근본을 같이한 불사이군의 수절신 금성 나죽헌선생(羅竹軒先生)에 대한 행적을 여기에 밝혀두려 한다.
선생의 자는 술선(述先)이요 휘는 계종(繼從), 초휘는 계도(啓道)이며 호는 송은(松隱) 또는 죽헌(竹軒)이라 하였다.
시조는 휘 총례(聰禮)로 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이시다. 조기 이래 규조가 대대로 빛나서 근역의 명문벌족으로 특히 의종 때 도첨의를 지낸 6세 휘 국영(國英)은 금성부원군에 봉해졌고 전하여 한림학사 휘 인송(仁松)은 문장과 절행이 한세상의 으뜸으로 시호가 문절(文節)이며 전하여 휘 순(珣)은 충열왕 때 영도첨의를 지내고 금성부원군에 봉해졌으니 바로 선생의 고조이시다.
고(考)의 휘는 직(織)이요 사제(思齊)는 그 호인데 벼슬이 선공부령에 이르렀고 비(妣)는 안동 김재댁(金在宅)의 따님으로 현숙하셨다.
선생은 충숙왕기묘(1339)년 3월 9일에 고양군 송천에서 탄생하니 첨품이 고명하고 재예가 뛰어나 6세에 소학을 암송할 수 있었고 충효와 우애를 근본으로 경전과 성리학 탐구에 정진하니 왕께서 영명(令名)을 듣고 4서6경(四書六經) 각 한질씩을 하사하였다.
선생은 15세 되던 봄 문효공 한산 이곡(李穀)의 따님과 혼례를 맺고 공민왕9년에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공부하고 이듬해 전시(殿試)에 장원(壯元)한 후 청현(淸顯)의 요직을 두루 거쳐 동왕23년 정순대부(正順大夫)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제수 되었다. 때에 왕께서 경은 선조 문절공(文節公)의 선지를 이어서 그 위열을 따르라는 뜻을 취하여 이름을 계종(繼從)이라 하사(下賜)하였다.
그러나 국운은 동년 가을 왕이 시해되고 위주가 왕위를 승습하니 환로(宦路)에 뜻을 버리고 소명에 불응하니 은율(殷栗)에 유배되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공양왕2년 귀양에서 풀려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부배되어도 거듭사직하고 조정의 간신들을 규탄하는 항소문을 올렸다.
이에 간당들은 임심년 초에 무인 최형도(崔衡道)를 시켜 선생의 별제를 방화하여 고금서적을 불태우고 또 사관 이견을 사주하여 사승에 소재된 선생의 상소문과 제현들과 문답한 기록들을 칼로 베어내니 사책이 모두 결파 되었다.
선생이 탄식하며 "나의 서재를 불태우고 사책을 결파하니 반평생 경영하던 일 모두 허망에 붙였도다. 나의 몸 밖에 뜬 이름 어찌 족히 아끼리 남으로 와서 다행한 것 촌심이 남아 있구나" 하였다.
역사의 장은 역성혁명으로 1391년 4월에 동지 정포은의 순절에 이어 7월에 고려왕조가 망하니 이태조는 누차 선생을 소명하고 양촌 권근(權近)을 보내 새왕조 섬기기를 간청하나 사절한 후 가솔들을 이끌고 나주 석간동에 내려와 청검한 은거생활로 죽헌거사(竹軒居士)라 하였다.
태종2년에 진사 김원이(金元履)가 찾아와 말하되 "오늘날 조정을 통하지 않는 선비는 문정이 냉락(冷落)하여 자손이 영체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선생이 이르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구하려면 이도 또한 좋은 기회이지만 선세의 훈공이 어떠하며 선조(先朝)의 은우가 어떠함을 잊었단 말인가! 자손의 흥체는 기수(氣數)에 있는 것 천명을 따름이요 어찌 사욕을 하랴 나는 능히 두 마음을 품고 이록(利祿)을 구할 수 없도다." 하였다.
여사한 충절의 의지와 청검한 절조는 당세의 많은 사람이 숭앙하는바였으나 태종 을미(1415)년 1월 9일 77세의 천수를 누리고 기세하니 나주 동북 자산(紫山)의 언덕에 예장 모셨다.
선생은 슬하에 4남을 두니 장자 백훈(伯勳)은 유교(遺敎)에 따라 고향 송천(松川)으로 가고 차자 숙훈(叔勳)은 조몰하니 손(孫)이 우필(禹弼)이요 3남 중훈(仲勳)은 석간거사(石澗居士)라 호하고 4남 계훈(系勳)은 자산(紫山)에 거주하였다.
아! 위대하도다. 성리의 미묘함을 강하고 오륜의 실행으로 세도를 밝혔으며 벼슬을 위조(僞朝)에서 버려 오욕을 씻고 위세(危世)에 상소 올려 강어에 굴하지 않고 왕조 바뀌어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수절 그 충의는 천추에 빛나리라.
영락16년 무술 고려종사랑 문하주서(高麗從仕郞 門下注書) 길재(吉再) 짓고
금성나씨대종회(錦城羅氏大宗會) 문헌위원 번역
1993년 3월 일 죽헌 나계종 선생 기념사업회 세움
송재선생 신도비명(松齋先生 神道碑銘)
아 여기는 송재선생 나공의 묘소(墓所)이다. 이제 공의 세상과의 상거(相距)가 300여년이 되었는데 후손인 종태(鍾泰) 종운(鍾雲) 기종(基宗) 도순(度淳) 등의 청탁으로 인하여 300년 전의 일을 기록하고자 하나 멀어서 자상히 기록하기 어렵다. 그러나 권문순공(權文純公) 윤문헌공(尹文憲公) 두 선생이 그 행장을 짓고 묘표를 지었으니 이는 진실로 구정(九鼎) 대여(大呂)보다 중하다 하겠다. 그러므로 삼가 따라서 서(序)하며 명(銘)을 한다. 그 서에 이르되 선생의 휘는 세찬(世纘)이요 자는 비승(丕承)이니 나주인(羅州人)이다. 삼한벽상삼중대광(三韓壁上三重大匡) 휘 총례(聰禮)는 시조가 되며 안렴사(按廉使)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휘 문규(文奎)는 문장과 행의가 한 세상에 으뜸이 되었고 증조 휘 계(繼)는 사복시정(司僕侍正)에 증직되었고 조부의 휘는 은제(殷制)니 학행으로써 장성현감(長城縣監)에 제수되었고 귀향할 때에 삼마(三馬)에 불과하니 세상에서 삼마대부(三馬大夫)라 칭하고 조정에서 그 청백(淸白)을 록(錄)하였으며 후에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증하였다. 아버지의 휘 빈(彬)은 성균생원으로 참판(參判)을 증하였는데 여러차례 상소를 올려 합문(閤門)에 부르짖어 사류(士類)의 추대한 바가 되었다. 찰방(察訪) 해평윤노겸(海平尹勞謙)은 그의 외조부(外祖父)이다. 공(公)이 낳아서부터 총명하였고 기국(器局)이 또한 넓었다. 집은 빈한하여도 글 읽기를 좋아하여 항상 송지(松脂)를 불살라서 낮을 이어서 경사(經史)를 모두 관통하여 문장이 훌륭하였다. 가정(嘉靖) 을유(乙酉 1525)에 사마시험(司馬試驗)에 합격하고 무자(戊子 1528)에 대과에 올라 나주(羅州) 황주(黃州) 두 고을 훈도(訓導)가 되었고 갑오(甲午 1534)에 성균관 학유(學諭)로 천거되어 예문관에 들어가서 검열(檢閱)이 되었고 병신(丙申 1536)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봉교(奉敎)에 올랐다. 그때에 김안로(金安老)가 국사에 당하여 권리를 탐학(貪虐)함을 자행하여도 사람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공이 중시의 대책(對策)으로 인하여 당시의 폐단을 논하여 이르기를 「지록(指鹿)의 간신이 어찌 홀로 2세(世)의 조정에만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니 대개 그의 임금이 없는 마음을 통렬히 배척한 것이었다. 김안로가 크게 성을 내어 조옥(詔獄)을 꾸며서 형벌을 가하여 완전한 피부가 없었다. 공이 파쇄(破碎)된 뼈를 찬 주머니에 주어 담으면서 이르기를 「부모의 유체(遺體이니 가히 버리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옷을 찢어 혈서(血書)를 하되 「나라를 위하는 충성에 백일(白日)이 비추어 임한다.」하여 임금에게 상소하였다. 주달함에 이르러 중종께서 측연(惻然)히 여기시어 특히 용서하시어 고성(固城)에 유배(流配)하시었다. 격리된 적소에서 먹을 것이 핍절하여 단사(簞食)가 여러차례 비었으나 편안히 여겨 걱정을 하지 아니하고 날마다 성현의 글을 외우고 일찍이 노래와 시를 지어 북궐(北闕)을 바라보고 읊으며 눈물을 흘렸다. 주상께서 비밀히 중인(中人)을 보내어 그의 생사(生死)를 정찰한즉 중사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손에 근사록(近思錄)등의 모든 책을 놓지 아니하고 좌우(左右)에는 크게 충신(忠信) 두 글자를 써서 부쳤다」하니 주상께서 크게 감동하시었다. 김안로가 패사(敗死)함에 이르러 봉교(奉敎)로써 불러 돌아오게 하시고 편전(便殿)에서 인대(引對)하사와 어주(御酒)를 하사하시어 회사(悔謝)의 뜻을 보이시다. 무술(戊戌 1538)에 또 탁영시(擢英試)의 장원에 뽑히었다. 이로부터 두어 해의 사이에 예조(禮曹) 병조(兵曹)의 정랑(正郞) 좌랑佐郞).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응교(應敎).전한(典翰).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사간원헌납(司講院文學).필선(弼善).보덕(輔德).의정부검상사인(議政府檢詳舍人).선균관사예(成均館司藝).사옹(司甕).사복(司僕).종부(宗簿).상의(尙衣).제사원정(諸寺院正)을 지내고 간간히 퇴계(退溪).하서(河西)의 두 선생 및 임금호형수(林錦湖亨秀)와 정임당유길(鄭林塘惟吉)의 제공으로 더불어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었으니 대게 한 때의 극선(極選)이었다. 때에 기묘(己卯 1519)의 사화를 지내어 사람들이 모두 소학(小學)을 말하지 아니하였는데 공은 이 글을 강구하여 써 사습(士習)을 바루기를 청하였다. 갑진(甲辰 1544)에 특히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올랐다가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옮기고 줄례에 따라 좌승지에 올랐고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전직되었다. 을사(乙巳 1545)에 판결사(判決事)를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의 계급을 뛰어 대사간(大司諫)을 받았다. 때에 중종과 인종의 두 임금께서 이어서 승하하시고 명종께서 어리시니 모후(母后)께서 수렴(垂簾)하시고 정사를 들으셨다.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등이 고상하게 말을 만들어 선동하여 선량한 사람들에게 화망을 입히니 공이 염전(簾前)에 들어가서 대답하여 겨우 구원하여 풀어 주었으며 또 상소를 올려 백공인걸(白公仁傑).유공희춘(柳公希春).정공황(丁公熿) 등의 원장(寃狀)을 변명하니 간당(奸黨)이 미워하여 공으로 하여금 간직(諫職)에 있지 못하게 하였다. 병오에 대사헌(大司憲)에 올라서 또 그 전의 말을 진술하더니 오래지 못하여 파직이 되고 한성우윤(漢城右尹)에 전보되었다. 이기 등이 공더러 일찍이 충순당(忠順堂)에 들어갔으므로써 그 공훈을 기록하여 끌어 당기려고 하거늘 공이 소리를 높여 꾸짖으니 이기 등이 그의 항직함을 미워하여 배척하여 조정에 용납하지 못하게 하였다. 정미(丁未 1547)에 다시 우윤(右尹)이 되었다. 여름에 서절사(聖節使)에 보충되어 연경에 갔다가 돌아와서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무신(戊申 1548)에 다시 좌윤이 되었다. 때에 당시의 의론이 인종께서는 해를 넘기지 못한 임금이라하여 신주를 문소전에 드리고자 아니하거늘 공이 극히 그 불가함을 간하였다. 그로 좌죄(坐罪)되어 방출되니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어 문교(文敎)를 힘써 일으키고 온 경내에 덕화가 흡족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사설(邪設)이 다시 치열하고 국사가 날로 글러가므로 드디어 우분(憂憤)으로 병이 되어 신해(辛亥 1551) 6월14일로써 관아에서 고종(考終)하니 그가 낳은 홍치(弘治) 무오(戊午) 5월21일을 헤아리면 년수가 54세였다. 나주 송림산(松林山) 묘좌원(卯坐原)에 귀장(歸葬)하였고 정부인(貞夫人) 담양전씨(潭陽田氏)는 부장하였다. 호남의 사람들이 사우(祠宇)를 세워 조두(俎豆)하고 철종(哲宗) 경신(庚申 1860)에 유림의 상소로 인하여 이조판서와 시호 희민을 증하였다. 전씨는 원종공신(原從功臣) 세균(世均)의 딸이니 3남5녀를 낳았다. 척(惕)은 현감(縣監)이요 협(協)은 증 참의(參議)요 열(悅)은 참봉(參奉)이며 딸은 사인 김경덕(金景德) 김천추(金千秋) 부사 유몽정(柳夢井) 찰방 이황종(李黃鍾) 증 참의 유염(柳濂)에게 출가하였다. 손남(孫男) 덕윤(德允) 덕민(德敏)과 노상문(魯尙文) 찰방 ㅇ홍종(李洪鍾)의 처(妻)는 장방(長房)에서 낳았고 증 참판 덕전(德全) 덕령(德令) 덕함(德含)은 중방(仲房)에서 낳았고 현감 덕원(德元) 진사 덕기(德基) 진사 덕립(德立) 참봉 덕종(德鍾) 덕부(德符) 덕심(德深)과 군수 김충수(金忠秀) 주부 유수경(柳守敬) 처는 계방(李房)에서 낳았다. 형(泂) 호(滸) 양(瀁) 면(沔)과 양종우(梁宗遇) 이진(李縉)은 유몽정의 아들과 사위요 박지충(朴之忠)은 이황종의 사위요 경중(敬仲) 신중(愼仲)과 형감 이태남(李泰男) 나덕준(羅德俊)은 유염의 아들과 사위이며 내외의 증손과 현손은 많아서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아! 성대하도다. 그 명(銘)에 이르기를 아름다운 덕행이라 칭함은 하서(河西)의 제문이며 군자의 사람이다함은 지지당(知止堂)의 말에 상고하겠도다. 유미암(柳眉菴)은 굳은 돌과 같다하였고 소양곡(蘇陽谷)은 나라의 그릇이라 일렀도다. 그 사람은 누구인가 희민이 그 시호이다. 빛나는 명절(名節)이여 광체가 청사에 넘쳐 흘렀도다. 처음에는 김안로의 모함으로 악형에 거의 죽을 뻔 하였다가 두 번째로 윤원형의 모함을 만나 원한을 품고 을사년을 지났도다. 위훈(僞勳)에 누적(漏籍)되니 거듭 거슬렸도다. 마침내 내침을 보게됨은 문소전(文昭殿)의 이론이었도다. 필부(匹夫)가 구슬을 품으니 진실로 시기가 많았도다. 험난중에 한결같은 절개로 종시토록 부끄러움이 없었도다. 굴하면 반드시 펼때가 있나니 표양과 총애가 거듭 이르렀도다. 고요한 묘소가 송림산의 지대(址臺)로다. 옛날의 유적이니 내의 명을 볼지어다.
기해 계춘 상순(歲屠維大淵獻 李春 上澣)
가의대부(嘉義大夫) 사헌부(司憲夫) 대사헌(大司憲) 겸
성균관제주(成均館祭酒) 시강원(侍講院) 찬선(贊善) 경영관(經篷官
은진 송병선(恩津 宋秉璿) 근찬(謹撰)
체암 나장군 기적비문(遞菴 羅將軍 紀績碑文)
우리는 누구나 임진란을 모르는이가 없고 임진란이라면 충무공과 거북선은 연상하게 되면서도 정작 거북선 제작에 큰 공로를 세운 나대용장군을 아는 이는 적으므로 여기서 장군의 사적을 밝혀두려 한다.
장군의 자는 시망(時望), 호는 체암(遞菴) 본관은 금성, 삼한공신 총례(聰禮)의 후손으로서 부친은 항(亢) 모친은 광산김씨인데 고향 나주는 고려 태조의 해군격전지였고 또 고려말 정지(鄭地)장군의 태생지니더니 그로부터 1세기반이 지나 명종11년 서기 1556년 7월 29일 장군이 그 전통의 고장에서 태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젊어서는 학문을 닦았으나 20세에 이르러 깨달은바 있어 계연히 붓을 던지고서 무예방면으로 전환하여 28세에 무과(武科)에 올랐으나 미관말직에서 허덕이다가 왜란이 일어나기 전년 장차 국난이 있을 것을 알고 또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소식을 듣고 종제 치용(致用)과 함께 충무공을 찾아가니 때에 나이 36세였는데 충무공에게 있어서는 장군과 같이 문무기술을 겸전한 동지(同志)를 만난 것은 여간 특이한 일이 아니였던 것이다.
장군이 거북선 감조군관(監造軍官)으로 실질적인 기술자였음은 왕조실록과 충무전서와 나주읍지 등에 밝히 적혔고 또 전술전략에도 능숙하여 제1차 옥포승첩 때는 발포가장(鉢浦假將)으로서 적선 두척을 깨뜨려 1등공을 세우고 제2차 사천전에서는 충무공과 함께 적탄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용전하여 장병들로 하여금 감탄케 했고 계사년 3월 여수 본영에서 송시랑 응창(應昌)의 패문을 가지고와 충무공에게 보고하는 중책을 수행하기도 했다. 계사년 윤11월 3일 복병장이 되어 적장 조승감의 부하 탐정병 망고질지(亡古叱之)를 사로잡은 일도 있거니와 이같은 전공으로 강진현감(康津縣監)에 임명되었고 이어 금구(金溝) 능성(綾城) 고성(固城)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정유년 2월 충무공이 모함으로 잡혀 올라와 옥에 갇히자 동지들과 함께 옥문 밖에서 억울함을 통곡하였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충무공을 따라가 전선을 거북선으로 개장하여 명량해전의 승첩을 거두었으며 마지막 무술년 11월 노량해전에서는 충무공과 종제 치용(致用)이 순국함으로 통곡하기를 마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에 장군은 순찰사 한효순의 군관이 되어 창선(鎗船)이라 이름한 배 25척을 새로 만들었고 광해군 때에 곤양군수를 지내고 남해현감(南海縣監)이 되어서는 해추선(海鰌船)이라는 쾌속정을 고안해 내기도 했으며 그러한 공로로 경기수사(京畿水使)에 승진되었지만 전쟁 때의 탄환 상처를 다시 앓아 그 이듬해 세상을 여의니 때는 광해군 4년 서기 1612년 1월 29일 향년 57세요 나주군 문평면 마전동에 예장 모셨다.
부인(夫人)은 군수 응문(應文)의 따님 이천서씨요 2남 1여를 끼치니 장남은 원(源)이요 차남은 연(淵)이요 여서는 김종도(金宗道)이며 그로부터 2세기 반이 지나 철종 십년 서기 1859년에 이르러 호남유림들이 장군의 공적을 잊지 못하여 옛날 인종 때의 곧은 선비 송제 나세찬(羅世纘)선생의 사우에 장군을 배향함으로써 숭모하는 뜻을 표했지마는 그 뒤 백여년이 지나가는 동안 이름과 행적이 숨겨지고 위에서 내린 삼지창과 청룡도마저 잃어버린 오늘이라 다시금 여러 문헌에 의하여 장군의 사적을 정확히 새로 밝히고 그것을 돌에 새겨 영원히 전하는 것이다.
장군은 실로 충무공(忠武公)의 직속부하요. 동지(同志)요. 거북선 제작의 최고 공로자이며 구국분전한 용장(勇將)이요 기술자라 장군의 위대한 역사적 공적을 찬양하고 기념하고 숭앙(崇仰)한다는 것은 우리 민족으로서 자랑스런 일이거니와 그보다는 오히려 과거를 과거로만 흘러 보내지 아니하고 역사를 오늘에 되살려 우리 몸속에 배게 함으로써 민족의 영광스런 오랜 전통을 바로 세우고 보다 더 튼튼하게 하고 빛나게 하는 데에 더 큰 뜻이 있는 것이니 누구나 여기에 이르러서는 옷깃 여미어 장군(將軍)을 추모(追慕)하고 다시 그의 구국정신을 체득하게 될 것이다.
장군몰후 363년 서기 1975년 3월 1일
후학 이은상(李殷相) 짓고, 후학 신호렬(辛鎬烈) 쓰고, 체암 나대용장군 기념사업회 세움
나총례(羅聰禮)
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 휘 총례(聰禮)는 우리 나씨의 시조(始祖)이고 기일세조(起一世祖)이시다.
시조의 처음 이름은 종례(宗禮)로 어려서부터 자품이 웅위(雄偉)하고 영용다지(英勇多知)하여 학문과 무용이 뛰어났다. 신라말엽 나주지방의 호족으로 나주성주(羅州城主)가 되어 있을때 후삼국의 형세가 그 미래를 가름할 수 없을 즈음 후백제왕 견훤(甄萱)은 남도의 곡창지대인 영산강 유역과 제하조달이 편리한 서해안 일대를 장악하고자 그 요충인 나주성(羅州城)을 수차 공격하여 왔으나 성주 나총례의 지휘하에 군.관민이 일체가 되어 성을 굳게 지켜 후백제의 공세를 번번이 물리쳤다.
때에 중부 태봉(泰封)에서는 후백제와의 대결에서 정기대감 왕건장군(王建將軍)을 남방경락의 선봉으로 내세워 출전시켰다.
그 무렵 나주성주 휘 총례는 단약한 진세로 호시탐탐하는 견훤을 힘겹게 견제하던 터에 제왕(帝王)의 인덕을 지닌 왕건장군의 남하를 기뻐하고 전쟁없이 성문을 열어 환영할 뿐 아니라 상좌를 양보하고 적극 보필하여 장차 고려창업의 기틀을 마련하는 초석이 되었다. 918년 왕건이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검 등의 추대로 왕위(王位)에 오르고 마침내 후삼국통일에 유공한 휘 총례는 강궁진 김한충 청명 등과 더불어 삼한일등공신(三韓一等功臣)에 봉해지고 혜종원년(943)에 북변방어와 이듬해 왕규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고 정종2년에는 박수경과 더불어 내란을 삭평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문종8년(1054)에 이르러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추증되었다. 근안컨대 고려사열전에 "대장군 나유(羅裕)는 나주인(羅州人)인데 삼한공신 대광 나총례의 10세손야(十世孫也)라 하였고, 익재 이재현(李齋賢)이 찬한 나익희(羅益禧) 묘지문에도 모두 삼한일등공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 시조의 혁혁한 역사적 공적과 그 숭고한 얼을 기리기 위해 고려통일대전개국실(高麗統一大殿開國室)에 배향하고 나주시 문평 무학산록(舞鶴山麓) 용드림하는 혈처(穴處)에 단(壇)을 설(設)하여 예배하는 곳으로 삼고 경모사에 위폐를 봉안 이하 90위(位)와 더불어 세일제(歲一祭)로 숭선보본(崇先報本)의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나국영(羅國英) 1136~1175
공(公)은 시조 총례(始祖 聰禮)로부터 6세(六世)이며 나성군 정서(羅城君 廷胥)의 아들로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이다.
고려(高麗)는 개국초(開國初)부터 왕족간(王族間)의 집권 암투, 북진정책, 호족간(豪族間)의 갈등, 문무간(文武間)의 견제, 한강이북 호족에 대한 우대 등으로 혼란을 겪었으나 광종(光宗)이 집권한 후로는 서서히 선정(善政)을 베풀면서 민심을 다스렸다.
공(公)은 의종(毅宗)때 탁월한 문장가로 겸손하고 예의바르며 모든이에게 공평(公平)한 교류(交流)로 처신해 만인(萬人)으로부터 존경을 받은 인물로서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나라에 봉사하였다.
고려 과거제도는 958년 광종(光宗)때 당나라에서 처음으로 도입했고, 1004년에는 과거법을 개정했으며, 1023년 현종(顯宗 14)에는 최치원(崔致遠)을 문창후(文昌候)로 추봉(追封)하면서 문인(文人)들의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무신(武臣)들의 불평불만이 팽배하던 중 ㅓㅇ중부(鄭仲夫) 일당의 란(亂)은 극에 달했다. 이때 국영(國英)은 오랫동안 국정에 참여하면서 많은 치적을 세웠으나 도첨의(都僉議) 높은 벼슬을 버리고 혼란을 피해 나주(羅州)로 귀향(歸鄕) 호장(戶長)으로 은거(隱居)하면서 민심(民心)을 지혜롭게 다스리니 후에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봉(封)했다. 인겸(仁謙)과 수겸(守謙) 이남(二男)을 두고 별세(別世)하였으며 저서(著書)로 "계자유훈(戒子遺訓)"이 있었으나 실전(失傳)되어 애통(哀痛)하기 그지없다. 경모사(景慕祠)에 봉안(奉安)하다.
나득황(羅得璜) 1205~1268
공(公)의 초휘(初諱)는 득거(得巨)이며, 1205년 출생하였으며, 시조 휘 나총례(羅聰禮)로부터 9세(九世)이며 금성부원군 국영(國英)이 증조이시고, 대호군 인겸(仁謙)이 조부이시며, 예부상서 나효전(禮部尙書 羅孝全)이 아버지이시다.
공(公)은 1251년에 문과(文科)에 급제, 최항(崔沆)이 선지사용 별감(別監)에 임명하였으며, 1260년에 제주부사 겸 방호사가 되었고 그 후 특치방어사(特置防禦使)까지 겸임하면서 노략질이 심한 송(宋)나라 상인과 왜구를 수차례 격퇴한 공훈(功勳)으로 황금자광록대부(黃金紫光錄大夫) 사공상서(司空尙書)까지 역임하신 분으로 고려사에 적고 있다.
성품이 간계한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으며 전란에 휩싸인 제주도에서 군수품 조달과 군사를 모으는 과정에서 다소의 민심 소란이 있었으나 나라를 지키고 평화를 위해 통제함은 불가피헀다. 이로인해 일부 주민의 원성으로 잠시 물러났으나 제주도에 평온과 안정을 가져오고 왜구와 송나라 상인을 격퇴하는 데는 가장 적임자로 인정돼 다시 기용되어 지략과 충직을 발휘해 국왕과 원나라 황제로부터 신임(信任)을 인정받고 공훈을 세워 1263년 12월 신유일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와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올랐으며 그의 기골(氣骨)과 무용(武勇)은 평생에 당당했다.
1268년 64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으며, 배위 나주정씨(羅州鄭氏)와 삼남 유(裕), 윤(允), 종(宗)을 두었고, 나주시 문평면 경모사(景慕祠)에 봉안(奉安)하다.
나유(羅裕) 1224~1292
고려명장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 나유는 삼한공신 대광 금성부원군(錦城府院軍) 나총례(羅聰禮)의 10세손(十世孫)이요, 고조 국영(國英)은 금성군(錦城軍)이며 조부 효전(孝全)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고, 아버지 득황(得璜)은 병부상서사송(兵部尙書司空)을 지내신 분이다.
공(公)은 소년시절부터 효성이 지극했고 문무에 특출하더니 1262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1269년(원종10년) 7월에 세자(후일 충렬왕)와 함께 몽고에 갔다가 귀국시, 야별초(夜別抄)의 위계에서 세자가 벗어나도록 지혜를 발휘하여 신변 안전에 공을 세웠으며, 1271년에는 완도에서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삼별초를 섬멸하였고, 1272년 5월에는 왕명에 따라 군사 1,550명을 모병하여 훈련시켜 1273년 4월에 배중손 일당이 왕족인 승화후온(承化侯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강화도민과 선박 모두를 총동원하여 남하한 삼별초를 평정하면서 왜구들도 완전히 격퇴하여, 그 공훈으로 송경보와 함께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1274년에는 군사 30,500명을 증집하여 왜구침범을 철저히 방어하면서 원(元)나라에 가서 전함 900척을 건조해 와 요세지에 배치하였더니 병석에 있던 원종이 극찬했다.
1277년(충렬왕 3년) 12월에 부정과 탐욕만 누리는 일부 병사를 파직시켰더니, 그들이 나유, 한희유 등이 공모하여 왕과 공주 다루하치를 제거하려 한다고 모함하였으나 바로 무고임이 판명되어 복권되었으며, 격렬하게 침공해온 왜구를 합포(合浦-마산)에서 격퇴시켰다.
이러한 공훈에 의거하여 1281년 12월 충렬왕이 교서 내리기를 "과인이 과거에 세자로 원(元)나라 조정에 들 때, 나유, 지윤보, 김부선 등이 시종한 공이 크니 상사(賞賜) 절차를 의논하라."고 하여, 나유(羅裕)를 동지밀직사사(종2품)에 임명하였으며, 1287년에는 나유에게 중익부만호(中翼副萬戶) 임명과 함께 호두패도 하사했다.
1288년에는 왕의 선두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원나라의 북적반란 토벌에 공을 세워 원나라로부터 쌍주금패를 받았으며, 귀국해서는 일등공신이 되었고, 1289년 3월에는 밀직사사(密直司事)인 나유를 충청도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임명하였으며, 1290년 6월에는 합단군의 적 원태조(元太祖)의 동생 합적온이 압록강변을 수없이 침입하여 포위망에 걸려 고초를 겪고 있는 부녀자들을 소중히 여겨 구출한 무용담과 부인의 전란중 고난을 지극히 위로해서 애처가로도 유명했으며, 1291년 6월에는 왕명에 따라 나유가 교주도(交州道-강원도 일부)에서 고려국사(高麗國事)를 한없이 흔들려는 합단(哈丹)군 잔당을 완전히 섬멸함으로써, 고려를 위기에서 구하였다.
이는 중대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충렬왕의 신임이 두터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나유를 1291년 11월 원나라에 보내 신정하례(新正賀禮)토록 하였으며, 1292년 3월 정미일에 나유는 원나라 황제로부터 삼주호부(三珠虎符)를 하사받고, 옥대은전, 궁시, 검, 안마 등을 받으면서 회원대장군으로 임명받고 이듬해 귀국하였다. 1292년 6월 정축일에 나유는 배위 백천조씨(白川趙氏) 사이에 익희(益禧) 1남 5녀를 두고 별세하시니, 세상 사람들이 평하기를 효도가 깊고 문무에 뛰어났으며 송사에 있어 형평과 공정성을 잃지 않는 명확한 명판결을 남긴 명장이요 위인이라 했다.
후일 조선조정(朝鮮朝廷)에서도 나유 대장군을 용장(勇將), 지장(智將), 덕장(德將)을 겸비한 위인으로 여겨, 조선조 때 판서와 대사헌 및 집현전 직제학을 역임하고, 세조실록(世祖實錄)을 편찬한 남원군 양성지(梁誠之)가 1456년(세조 2년) 3우러 28일에 세조(世祖)에게 상소하기를 "단군부터 시작해 역대군상(歷代君相) 12위를 합제(合祭)하고 신라의 김유신, 김인문, 고구려의 을지문덕, 백제의 흑치상지를 배향한 16신(臣)과 한희유, 나유(羅裕), 최영(崔榮), 정지(鄭地)를 배향하게 하소서....... 문묘에는 설총, 최치원(崔致遠), 안순(安珣), 이제현(李齊賢),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나라에 쌓은 공훈을 백성에게 본받게 하기위해 그의 관향인 고을에 사우(詞宇)를 세워 춘추로 제사를 향하도록 하소서."라는 요지의 상소를 하였으나, 고려(高麗)에 대해 폐쇄적(閉鎖的)이었던 조선조(朝鮮朝)의 소극적 시책으로 인해 금세기에 그 공훈을 상징하는 사우(詞宇)가 없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주시 문평소재 경모사(景慕祠)에 봉안(奉安)하다.
나인송(羅仁松)
공(公)의 휘는 인송(仁松)이요 시호는 문절(文節)인데 나씨시조 삼한공신(三韓功臣) 대광(大匡) 금성부원군 휘 총례(聰禮)의 10세손이다.
고조의 휘는 국영(國英)인데 의종 때 도첨의(都僉議)를 지낸 금성부원군이시고, 증조는 휘 수겸(守謙)인데 명종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금성부원군이시며 조부의 휘는 극효(克孝)인데 고종 때 정원장군 금오중랑장(金吾中郞將)이였고, 부친은 휘 문일(文逸)인데 통의대부(通議大夫) 상호군(上護軍)에 증직(贈職)되었다. 모친은 양씨(梁氏)로 우사의(右司議)를 지낸 충길(忠吉)의 따님인데 귀범이 있었다.
공은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 하였고 천품이 침착 관후하여 말이 적었으며 경솔하게 아무나 사귀지 않았다. 공이 원종5년(1264) 5월에 지공거(知貢擧) 최윤개(崔允愷) 동지공거 박윤(朴倫)이 시관으로 전형을 맡은 국자감의 전시(殿試)에서 김주정 등 25명과 함께 급제하고 누차 승진하여 통의대부 한림원 시강학사(侍講學士)를 지낼 때 경연(經筵)에서 원종(元宗)이 이르기를 "경(卿)의 이름에는 지극히 아름답고 고귀한 뜻이 담겨져 있는데 인(仁)은 모든 선(善)의 으뜸이요, 송(松)은 만 초목의 으뜸이니 경은 응당 자손들에게 전하기를 고려와 더불어 평안과 근심과 걱정을 함께 하라" 하시었다.
공은 충렬왕2년(1276) 봄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어 상께 아뢰기를 지방의 "안렴사 수령들의 근면하고 태만함과 공물(貢物) 부역의 경중이 공평하지 못한 것과 향리들이 세력에 붙어서 부역을 피하는 일들이 많아 민원은 물론 지방행정에 지장이 막심합니다." 이를 조사하여 시정 처리 할 것을 청하니 왕께서 허락 채택 하였으나 당시 무인시대 권신(權臣)들의 저지로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일이였다.
공은 충렬왕14년(1287) 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고 성절사로 원(元)나라 황제를 하례하니 답례로 금패(金牌)와 삼주호부(三珠虎簿), 옥대(玉帶)등을 하사하였다. 귀국 후 누차의 청을 올려서 치사(致仕)하고 고향 송천에서 은거(隱居)하고 있었는데, 왕이 행성 좌우사(左右司)를 시켜 이르기를 "임금은 어진이 구하기를 부지런히 하여야 인재(人才)를 얻는 지름길이라" 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재능이나 한 가지 기예를 지닌 사람이라도 반드시 나오도록 하는 것이 도리인데, 하물며 경과 같은 사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학문의 재능뿐 아니라 행정 역량에 있어서도 당대에 비길 만한 사람이 드물며 그 충성(忠誠)과 절조(節操)는 능히 왕의 마음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데도 헛되이 산중에서 은거하고 있으니 내 일찍이 민망히 여긴 바이다 하시며 누차 초빙하였으나 공은 혼세에 환멸을 느끼고 지병을 사유로 환로(宦路)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우국지사들과 도의지교하다가 임천에서 청백한 생애를 마쳤다. 부음이 들이자 왕께서 매우 슬퍼하고 애석히 여겨 제물을 하사하시며 제관을 보내어 장례를 도와주셨고, 시호를 문절(文節)이라 내리시었다.
부인은 수원이씨(水原李氏)로서 군부인(郡夫人)이니 봉익대부 의서(義瑞)의 따님이다. 아들 순(珣)은 충렬왕 때에 등과하여 벼슬이 첨의부 도첨의에 이르고 금성부원군에 봉해졌다.
5세손 계종(繼從)은 등과 후 청현의 요직을 거쳐 예문관 제학(提學)에 이르렀는데 공민왕께서 "선조 문절공(文節公)의 충의를 계승하라는 뜻으로 계종(繼從)이라 사명(賜名)" 하였다.
오늘날 공의 충절과 위대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경모사(景慕祠)에 배향하고 세일제로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나익희(羅益禧) 1271~1344
양절공(良節公) 나익희는 금성나씨 시조 나총례(羅聰禮)의 11세손이다. 증조는 황태중대부(皇太中大夫) 효전(孝全)이요 조부는 병부상서, 사공(兵部尙書, 司空)을 역임한 득황(得璜)이며 회원대장군 나유(羅裕)가 아버지이시다.
소년기에는 무예(武藝)와 용맹이 높았고 청년기에는 유학(儒學)에 능통해 백화헌 이조년(百花軒 李兆年)과 함께 문성공 안순(文成公 安珣)에게 사사했으며 문ㆍ무과(文ㆍ武科) 양과에 급제 후 직무에 있어 절의와 깔끔한 업무처리로 덕망이 높았고 금부(金符)를 휴대하였다.
1308년(충렬왕 말)에 신호위군이 되어 정도를 원칙으로 열정을 다해 처무(處務) 했으나 새로 즉위한 충선왕이 제도개혁이라는 미명아래 민심에 이반되는 법규(法規)를 수시로 개정함으로 이에 그 부당성을 개선토록 수 차례 상소하였으나 도리어 면직되었다. 그러나 위풍당당하게 백성들의 생활상과 조정(朝廷)의 인사등용에 있어 문제점을 지적하곤 했다. 이러한 지적들이 결국 충정으로 인정되어 1320년 첨교상호군(僉校上護軍)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좌상시(左常侍=정3품)를 거쳐 상의평리(商議評理)에 오르면서 국정에 참여해 과감하게 시책을 전개해 나갔다.
나익희는 1344년(충목왕 1) 4월 이제현(李齊賢)이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될 때 손수경과 함께 첨의참리(僉議參理=종2품)에 임명 받았으나 국정 참여를 사양하다가 결국 참여하면서 이제현에게 말하기를 "우리 왕이 어려서 정치를 재상에게 위임했는데 무능한 관료들이 높은 자리에만 급급하고 과거의 실책을 거울삼지 않으니 저들과 같이 백성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자 하는데 공(公)은 어떠한가" 하니 재상 이제현(宰相 李齊賢)이 고마운 뜻으로 대답하기를 "내가 일찍 두 세가지 시책(施策)을 세워 집정(執政)에 알아듣게 하였으나 아직 시행을 보지 못하여 항상 용퇴(勇退)치 못함을 부끄러워하니 감히 공의 말을 따르지 않으리요" 하였다.
이와 같이 첨의참리 낙익희와 판삼사사 이제현간의 우의는 돈독하였고 고려시정(施政)에 있어 많은 교류를 하였으며, 용모가 큰 첨의참리 나익희는 계림(경주지방)을 다스리고 합포(마산, 창원지역)를 세 번이나 지켰는데 그때 많은 백성들이 위엄있고 청렴하고 성실하다 해 온 백성이 경하했다.
또한 나익희는 그의 어머니가 재산을 자녀에게 나누어 줄 때 아들인 자신에게 남녀노비 40명과 많은 재산을 딸들과 큰 차별을 두어 분재하려 할 때 자식 사랑에 남녀 차별이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어머님과 딸들의 마음이 결코 편할 일이 아니라며 강력히 거절 의사를 밝혔더니 어머니께서 그를 의(義)롭게 여겨 그의 뜻에 따랐다. 이를 안 만인(萬人)이 칭송하였다. 이는 남녀평등 실천의 효시(嚆矢)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나익희는 성품이 깔끔하고 절의를 소중히 여기면서 평등사상이 투철했으며 절의와 정도는 국정운영에 크게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임금의 손발이 된 신하 44인 중 나익희가 12번 째라 사적에 적고 있다.
조정에서 위와 같은 공훈을 가상히 여겨 시호는 양절공(良節公)이라 하였고 금성군(錦城君)에 봉하다.
나익희는 1344년 9월 3일 배위 여흥 민씨와 사이에 영걸, 준걸, 열결(英傑, 俊傑, 烈傑) 3남 1여(사위는 첨의평리 崔文道)를 두고 별세, 묘(墓)는 실전하였으나 나주시 문평 소재 경모사(景慕祠)에 봉안하다.
나순(羅珣)
공의 휘는 순(珣)인데,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 대광 금성부원군(大匡 錦城府院君) 휘 총례(聰禮)의 십일세손(十一世孫)이다. 고조의 휘는 수겸(守謙)인데 명종 때 상장군을 지낸 금성부원군이시고 증조의 휘는 극효(克孝)인데 고종 때 정원장군 금오위중랑장(金五衛中郞將)이였고 조부의 휘는 문일(文逸)인데 통의대부 상호군(上護軍)에 증직되었다. 부친은 휘 인송(仁松)인데 한림원 시강학사(侍講學士)로 문장과 행위가 한 세상의 으뜸이였으니 시호가 문절(文節)이시고, 모친은 수원 이의서(李義瑞)의 따님으로 귀범이 있고 자애로웠다.
공은 태어나면서 기상이 준수하고 웅위(雄偉)하며 도량이 넓고 컸으며 학문에 힘써 문장과 행위가 뛰어나 향당이 장래를 기약하였다.
충렬왕 경진(1280) 5월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장원하고 한림원(翰林院) 직원(直院)에 제수되어 충근한 직무 수행으로 누차 포상을 받고 승진을 거듭하여 국자감 학사(學士)를 거쳐 국학박사(國學博士)에 이르렀다.
동왕 을유(1285) 5월 시(詩)와 부(賦)로 문신(文臣)들에게 실시한 전시(殿試)에 으뜸으로 뽑히고 황패(黃牌)를 하사(下賜)받는 영광을 누렸다.
때에 원(元)나라와 연합하여 동정(東征 : 일본정벌)을 준비할 때 삼도순문사(三道巡問使)가 되어 군량미를 조달하고 각종 무기들을 점검할 때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으므로 이에 힘입어 민심이 평안하였다.
동왕 병자년에 보문각 직학사(直學士) 겸 사관원(史館院) 수찬관(修撰官)에 이르렀고 얼마 후 첨의부(僉議府)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어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제수되어 정승의 반렬에서 서정(庶政)쇄신에 노력하였으나 무인시대 권신(權臣)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혼세(混世)를 한탄하면서 노쇠를 핑계 삼아 치사(致仕)한 후 삼림에서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충숙왕 무진(1328)에 왕께서 안렴부사(按廉副使)를 보내어 이르기를 "이제 천박한 덕으로 외람이 양위를 받아 옛 친구와 함께 국가를 다스리고자 하니 그대는 나의 초조히 기다리는 뜻을 받아 행여나 늙었다고 사양하지 말라" 하시고 또 "과인은 평소부터 경의 이름을 듣고 같이 국사를 다스리려고 생각하여 경에게 사림시독좌간의대부(詞林侍讀左諫議大夫)를 제수하고 사관수찬관지제고(史館修撰官知制誥)에 보하노니 바라건데 창생을 위하여 한 번 일어서라" 하시었다. 공은 마침내 사은숙배하고 나아가니 왕께서 매우 기뻐하였다.
얼마 후 공이 진언하여 아뢰기를 "전하께서 노신을 부르신 까닭은 다만 보고 들은 것을 이해와 관계없이 숨기지 말라는 것이니 신(臣)이 어찌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아끼어 전하의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하였다.
얼마 안되어 원나라에서 사신이 와서 따지고 묻는 일 이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경을 초빙하자마자 마침 이런 이외의 걱정이 생겼으니 어쩌면 좋겠소" 하시니 대답하기를 "어지러운 사태를 무릅쓰고 좋은 정치를 이룩하려면 예로부터 그러하온 것입니다. 하늘이 아마도 전하로 하여금 덕을 닦고 반성하여 길이 태평(太平)을 누리도록 하려는 것이오니 너무 근심하지 마옵소서" 하였다.
공은 왕의 두터운 신임과 총애를 받으면서 충성으로 보필하여 많은 사람들의 선망이었으나 병으로 집에서 생애를 마치시니 춘추 69세였다. 부음이 들리자 왕이 매우 슬퍼하여 3일간 조회를 하지 아니하시고 제물을 하사하시며 제관을 보내 장례를 도와주셨고 증 영도첨의(領都僉議) 정사공신(政社功臣)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추봉(追封)하였다.
부인은 해주오씨(海州吳氏)로서 군부인(郡夫人)이니 이부시랑(吏部侍郞) 천상(天祥)의 따님이시다. 아들은 득방(得逢)인데 전의사(典議寺) 직장(直長)이였다.
오늘날 공의 충근한 열과 위업을 기리기 위해 경모사(景慕祠)에 배향하고 있다.
나영걸(羅英傑) 1290~1360
공(公)은 시조 나총례(羅聰禮)의 12세손(十二世孫)이며 조부는 회원대장군 휘 유(裕)이시고 아버지 양절공 휘 익희(益禧)와 어머니(여흥민씨) 슬하에서 1290년 장남으로 출생하다.
소년기에 아버지로부터 문무(文武)를 익혀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더니 1317년(충렬왕4)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1330년에는 탁월한 봉직활동을 인정받아 전라도순문사(全羅道巡問事)를 역임했고, 1333년에는 충숙왕이 원(元)에 침거하고 있을때 연경(燕京)에 들어가 국왕이 환국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343년(충혜왕4)에 밀직상호군(密直上護軍)에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정3품)를 제수받고 그후 봉익대부(奉翊大夫=정2품)로 지내시고, 1352년 혼탁한 정국을 기회로 조일신(趙日新) 일당이 조정에 반기를 들고 유력인사를 영입코자 공에게 판밀직사사(判密直司使)로 임명해 회유했으나 이를 단오하게 거절하여 정의감(正義感)이 투철한 인물(人物)로 평가 받았다.
1353년 7월 원나라 조정을 배반한 장사성(張士誠) 일당을 평정코자 원나라 황제와 국왕의 지령에 따라 1354년 유탁, 최영(崔塋) 장군 등과 함께 군사 2천명을 이끌고 그들을 토벌했다.
1355년 5월 공민왕은 귀국(歸國)한 장병(將兵)들에게 친히 축하연(祝賀宴)을 베풀어 주었으며 나영걸(羅英傑)에게는 금성군(錦城君)에 봉(封)했다.
나영걸(羅英傑) 장군은 평생(平生)을 나라 사랑과 평온치 못한 조정을 걱정하면서도 외교활동에 여력을 다하다가 1360년에 배위(配位) 원주원씨(原州元氏)와 사이에 문규(文奎), 구규(龜奎), 천규(天奎) 삼남(三男)을 두고 별세하니 조정(朝廷)에서는 물론 원(元)나라 황제(皇帝) 순제(順帝)가 친히 조의(弔意)를 표해 왔으며, 많은 백성들이 "고려의 큰 별 하나가 떨어졌다며 비통(悲痛)해 하였다" 라고 고려사(高麗史) 등에 적고 있다. 많은 문집(文集)이 있었으나 병란(兵亂)으로 소실되고 다만 몇 수의 시(詩)가 동국풍아(東國風雅)에 수록되어 있다. 경모사(景慕祠)에 봉안(奉安)하다
나문규(羅文奎) 1312~1355
공(公)의 초휘(初諱)는 극종(克綜), 호(號)는 송와(松窩)이다. 조부는 익희(益禧, 錦城帶院君 良節公)요, 아버지 영걸(英傑, 錦城君)과 어머니(原州元씨) 슬하에 장남으로 충선왕 4년(1312) 나주 문평 오륜동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민하고 재주가 특출하여 15세에 경서(經書)와 성리학(性理學)을 관통하여 향천(鄕薦)에 오르고 충혜왕 복위 1년(1340)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여 휘(諱)를 문규(文奎)라 개명(改名)하였다.
1343년 명경박사(明經博士), 1350년 10월에 보승랑장(保承郞將)을 거쳐 공민왕 1년(1352)에 서해도(西海道=황해도), 안렴사(按廉使)를 제수받았고, 각 부처에 부임하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푸니 그 뜻을 기리는 거사비가 각처에 세워졌으며 포상으로 비어대(緋魚袋=조정(朝廷) 출입증표)를 하사(下賜)받았다.
공(公)은 공민왕 3년(1354)에 지영주사(知寧州事)에 임명되어 학교를 세우고 유풍진작(儒風振作)에 힘써 고을의 칭송이 왕에게 주달되니 자금어대(紫金魚袋=국왕을 접견할 수 있는 비표)를 하사받는 영광을 입었다.
또한, 문장(文章)과 행의(行誼)가 한 세상의 으뜸이었으나 높은 벼슬을 사양하고 낮은 외직(外職)으로 벼슬이 덕망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불평 없이 소임(所任)을 다한 청백한 고급관료로 청사(靑史)에 기리 빛나고 있다.
공은 공민왕 4년(1355) 3월 1일 배위 협천군부인 이씨(李판사의 따님) 5남(五男)을 두고 청백한 생애를 마치다.
나주 문평면 대도리 탄방 천마봉(天馬峯) 아래 길지에 예장으로 모셨으며, 봉강사(鳳岡祠)에 봉안(奉安)하고 경모사(景慕祠)에 배향(配享)하다.
나순(羅純) 1337~1399
공(公)의 처음 이름은 위(緯)이며, 고려 충숙왕 복위 6년(1337)에 나주 문평에서 출생하였다. 공민왕 20년(1371) 문과에 급제하여 명경박사(明經博士)후 조봉랑(朝奉郞) 선공령(繕工令)을 지내시고 순(純)으로 이름을 바꿔 봉상대부군기소윤(奉常大夫軍器少尹), 예부시랑(禮部侍郞=차관)을 지냈으며, 선친의 상을 당한 후 수시로 마을 앞에 있는 암반(岩盤)에 올라 멀리 부친(父親)의 산소를 바라보며 배곡(拜哭)하기를 불피풍우(비바람 가리지 않고)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 바위를 망사암이라 하였는데 현재 나주시 문평면 쌍정마을에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고려 우왕 10년(1384)엔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명나라 사신으로 갔는데 당시 고려가 명나라와 불편한 관계에 있어 조정의 문무백관들이 모두 두려워서 감히 사신으로 가는 것을 꺼려하였으나 공은 포은 정몽주와 함께 청하기를 "신하로써 임글을 위한 일에 무엇을 못 하리요" 하고 부사를 자청하여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왕이 중책에 발탁하였다.
공민왕 4년(1392)에 밀직부사(密直副使=정3품)가 되어 폐위된 공양왕을 호종하였으나 이조 개국신들의 저지로 그만 원주손위소(原州遜位所)에 머물러 두문자정하고 수절불사(守節不仕)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수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망국신하로써 절의(節義)를 지키시다 정종 1년(1399) 슬하에 4남(四男)을 두고 별세하시다. 1418년에 태종(太宗)이 증판서(贈判書)하다.
경모사(景慕祠)에 배향(配享)하였으며 매년 5월에 선대조(先代祖)와 함께 모든 후손들이 모여 추모한다.
나봉(羅奉) 1349~1409
공(公)의 휘는 봉(奉)이요, 자는 천휴(天休)이며 호는 남은(南隱) 또는 호은(湖隱)이다. 고려말 충절(忠節) 한림공(翰林公)이라 이른다. 고조는 휘 유(裕=회원대장군)이며, 증조는 휘 익희(益禧=양절공)이며, 조부는 휘 영걸(英傑=금성군)이요, 아버지는 휘 문규(文奎=서해도 안렴사)와 어머니(합천이씨) 슬하에서 장형인 휘 순(純=고려시랑), 둘 째형인 휘 연(고려 문하시중), 셋째 형인 휘 신(臣=병조정랑)에 이어 1349년에 출생하였고 아우로 휘 신(信=중추부록사)이 있다.
공(公)의 성품이 화평하고 문장 탐구에 탁월했으며 또한 풍체도 우람해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고 성장했으며 지방추천으로 1372년(공민왕21)에 국자감 시험에 6위로 합격하였으며 1378년에는 문과에 급제 한 후 한림(翰林)을 역임했다. 그러나 고려말 조정이 혼탁하니 탄식(歎息) 속에 소일하다 1392년(공양왕4)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 왕조가 시작되자 공께서 그들에게 가로되 "나라가 망했으니 신하도 따라 없어져야 하나 나라 위해 죽지 못했으니 황폐한 곳에 숨어 사는것만 같지 못하다" 하면서 이듬해인 1393년에 가족과 함께 한주(韓州=한산) 서쪽 산성동에 은거하면서 후생들을 양성하고 틈틈이 고려 왕도를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눈물과 함께 하였더니, 옷소매가 눈물로 젖은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태조(李太祖)가 수차례 소명(召命)하였으나 표면으로는 신병을 빙자했으나, 내심으로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끝내 불응하다가 1409년 슬하에 욱, 희(郁, 熙) 두 아들을 두고 겸손과 검소를 유훈으로 남기고 별세하시니 후세인들이 생전의 은거처 이름을 따 남은암(南隱岩)이라 하였으며, 개성 왕씨 문중사초(王氏 門中史草)에 충.열.수절신(忠.烈.守節臣)으로 충순당(忠順堂) 죽헌공(竹軒公) 안천군 천서(安川君 天瑞)와 함께 남은공(南隱公)을 적고 있다. 묘소를 실전하였기에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에 단비(壇碑)를 세웠으며 나주시 문평면 경모사(景慕祠)에 배향하다.
나계종(羅繼從) 1339~1415
공(公)의 휘는 계종(繼從) 초휘는 계도(啓道)이고 자는 술선(述先)이며 호는 송은(松隱) 또는 죽헌(竹軒)이라 하다.
고려 충숙왕8년(1339년) 3월 9일에 경기도 고양군 송천동에서 아버지 휘 직(織)과 어머니 안동김씨(함안군부인) 사이에 출생하시다.
공의 아버지는 충정왕 때 선대부 선공부령(善大夫 繕工副令)을 역임하였고 고조는 휘 순(珣)으로 금성부원군이시다. 5대조는 문절공 나인송(羅仁松)이시며, 8대조는 금성부원군 나수겸(羅守謙)이시다.
공은 17세 되던 봄에 한산이씨 상호군 문효공 이곡(李穀)의 셋째 따님과 혼례를 맺고 21세에 국자감 전시에서 장원급제 하였고 2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 수찬(修撰)을 역임하였다.
1368년 성균관 순유박사(諄諭博士) 겸임 때 경전을 강론하고 집주(集註)를 풀이할 때 잘 이해되지 못한 것을 현명하게 풀이 하였으며 고려 삼은(三隱)과 공맹정주학(孔孟程朱學)을 토론하고 서로간에 서신을 왕래하였다. 특히 포은 정몽주(鄭夢周) 선생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공은 오언절구(五言節句)와 칠언율시(七言律詩)에 탁월하여 많은 시부(試賦)와 족선조(族先祖)인 양절공(良節公) 나익희(羅益禧)와 장인인 문효공(文孝公) 가정(稼亭) 이곡(李穀)과 그리고 설제공(雪齊公) 정가신(鄭可臣)등 많은 명사들의 화상찬(畵像撰)을 남겼다.
1374년 공민왕(23년) 때 좌상시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에 승진한 후 사퇴하고 송천 고향으로 돌아가 계시다가 1390년(공양왕2) 예문관 제학에 복직 되었으나 혼탁한 국정하에서 간당들의 농간으로 해임하다.
공은 20여년간 공직에 있으면서 경제정책과 시무책(時務策) 및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있어 현명한 정책을 직간언(直諫言) 하였으나 간신들의 작태로 인해 정책에 반영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야사통회(野史通會)에 기록된 당시 의혹들이 분분한 많은 사건들을 간당(奸黨)들이 없애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음으로 1392년 정월 공이 고려 현릉을 참배하러 간 사이에 별제(別齊)와 동서(東西) 사동(四棟)을 불태워 버렸기에 평생동안 연구하고 저술한 서적 등 귀중한 사료(史料)들이 소실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공양왕3년(1391) 포은 정몽주선생이 순절하자 공께서 애도의 글을 남겼고 고려가 멸망하자 양촌(陽村) 권근이 이씨조선 조정에 참여 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극구 사양하고 가솔(家率)을 이끌고 나주 석간동에 은거(隱居)하시니 죽헌거사라 하였다.
공께서 1393년(태조2) 고려 현릉을 참배하고 고양(高陽) 땅을 찾을 때 태조가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고 "나는 두 나라 임금을 섬길 수 없다" 는 불사이군의 뜻을 전하고 과두문동(過杜門洞)이라는 시(詩)를 남겼는데 거기에 고려사직 탄식과 선비들의 충절을 그리셨다.
야은은 자신과 같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며 혹독한 정치적 박해를 받으며 지병(持病)에 고통을 겪고 있는 14세 연상을 스승 죽헌 나계종(竹軒 羅繼從)님을 문병차 찾아가 월여(月餘)를 묵으면서 그의 강직한 지조를 "봉위죽헌선생(奉爲竹軒先生)"의 시(詩)를 읊으셨다.
1415년(태종15) 1우러 수(壽) 77세를 일기로 별세하시니 유학자(儒學者) 야은(野隱) 길재(吉再)선생이 추모의 글을 썼다.
나주 세지에 죽헌사(竹軒祠)와 충남 동학사 삼은각(三隱閣)에 정포은, 이목은, 길야은, 이도은, 류금은 선생과 함께 배향하였고, 문평 봉강사, 경모사, 파주 소재 고려통일대전에 배향하였다.
저서로 죽헌유집 2권은 보존되어 있으나 야사통회(野史通會) 20권은 불행이도 소실되었다.
※ 공의 죽헌유집(竹軒遺集)은 후일 한글로 번역 출판할 계획이다.
나흥유(羅興儒) 1335~1382
공(公)은 고려말의 문신으로 호(號)는 충순당(忠順堂)이며, 시조(始祖) 총례(聰禮)로부터 15세(十五世)로 천부(天富=대장군)가 고조(高祖)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민하고 재주가 있어 경사와 성리학을 관통하여 그 지식이 인정되어 공민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동왕 22년(1373)에 영전도감(影殿都監)에 재임중 모대감(某大監)의 간청으로 그의 조상 영전을 그려주고자 도료(塗料)를 유출한 사건으로 문책 받은바 있으나, 한 평생을 묵비로 일관했다. 그러나 그 후 소임을 다한 공훈으로 예의총랑(禮儀摠郞)에 제수되고 이어 사농소경(司農少卿)이 되어서는 고려지도(高麗地圖)를 만들어 이웃 중국과 국경선을 정하는데 크게 공헌하고 역대왕조의 흥망과 국토의 변천과정을 기록한 책을 만들어 역사 지리에 밝은 박사(博士)로 유명하였다.
공은 우왕 때 왜구의 창궐로 행패가 심하고 조운을 파(罷)할 지경에 이르자 1375년 전객사판사(典客寺判司=정3품)로 승진됨과 동시에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파견되어 해적(海賊)을 금하고 선린수교(善隣修交) 하기를 청하였으나 이 때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장군 아시가가 요시미쓰가 처음에는 공을 의심하고 가두었다가 마침 재일승려(在日僧侶) 양유(良柔)의 변호로 공을 석방하고 방물(方物)을 주면서 방내교란(邦內攪亂)으로 해적을 금압하기 어렵다는 뜻을 말함으로 귀국 후 일본실정을 보고하고 왜구소탕에 나서니 1376년 원수(元帥) 김선치(金先致)와 더불어 작전계획을 세우고 왜적섬멸의 선봉이 되었다.
그 5월경에 왜적의 한 두목이 되는 후지하라를 생포하고 추종하는 무리들을 잡아들이는 대공을 세웠는데 이러한 사실이 고려사와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도은 이숭인(李崇仁)의 봉송나판사흥유사일동사수(奉送羅判司興儒使日東四首)라는 시(詩)에 잘 표현되어 있어 그 위대한 업적이 청사(靑史)에 빛나고 있다.
공은 우왕 8년(1382)에 아들 득경(得卿)을 두고 별세. 현재 경모사(景慕祠)에 배향(配享)하여 향사하고 있다.
나중귀(羅仲貴) 1385~1452
공(公)의 휘는 중귀(仲貴)요 호는 송도(松都) 또는 송운(松雲)이라 하였고, 정순대부(正順大夫)요 송도공파조(松都公派祖)이다.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이신 휘 총례(聰禮)를 시조(始祖)로 그의 15세손이며 회원대장군 휘 유(懷遠大將軍 諱 裕)는 5대조이시고, 양절공, 금성군 휘 익희(良節公, 錦城君 諱 益禧)는 고조(高祖)이시며 금성군 휘 영걸(錦城君 諱 英傑)은 증조(曾祖)요. 안렴사 휘 문규(按廉使 諱 文奎)는 조부(祖父)이시며 시랑 증판서 휘 순(侍郞 贈判書 諱 純)이 공(公)의 아버지이시다. 공의 형으로 중호(仲浩), 광우(光佑), 명우(明佑) 다음 막내로 1385년(고려 우왕11)에 출생하였으며, 7세때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되고 고려왕조(高麗王祖)가 무너지자 아버지는 고려 충절로써 강경한 언행(言行)으로 정변(政變)을 탄식 하셨는데, 조선 태조가 공을 회유코자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소환했으나 불취(不就)하면서 끊임없는 회유를 완강히 거절한 환경에서 공(公)은 고려문벌(高麗門閥)의 긍지(矜持)를 굽히지 않고 어렵게 학예(學藝)를 닦던 중 14세때 아버지를 잃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충효, 겸손, 검소, 우애, 지조에 있어 행위가 투철하자 조정(朝廷)에서 이를 가상(嘉尙)히 여겨 돈영부도정(敦寧府都正)을 거쳐 정순대부(正順大夫)로 명하였으며, 선대(先代)의 공훈, 충효, 학덕을 인정하여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증직(贈職)하다.
공(公)이 1452년(문종2)에 송도에서 배위 경주이씨(配位 慶州李氏)와 아들 진사 호(進士 鎬), 자부 전주이씨(子婦 全州李氏), 손자 처광, 처휘, 경운(處光處輝, 慶雲)이 지켜본 가운데 "충효와 우애 잘 하고, 신의지키며 교만하지 말라" 는 유훈(遺訓)을 남기고 별세(別世)하시다.
묘(墓)는 실전하였으나 나주시 토계동 금영제(錦榮齊)에 봉안(奉安)하고 인근에 설단(設壇)하였으며, 나주시 문평면 경모사(景慕祠)에 배향(配享)하다.
나인겸(羅仁謙)
시조(始祖) 나총례 금성부원군(羅聰禮 錦城府院君)으로부터 7세손이며 아버지는 국영(國英=錦城府院君)이요 고려 명종(明宗)때 과거 급제하였고 관검교대호군(官檢交大護軍)하다.
나수겸(羅守謙)
인겸(仁謙)의 아우로 고려 명종(明宗)때 과거 급제하였고 관지상장군(官至上將軍)에 역임 후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에 책봉.
나효전(羅孝全)
시조(始祖) 나총례 금성부원군(羅聰禮 錦城府院君)으로부터 8세손이며 조부는 국영(國英=錦城府院君)이요 아버지는 인겸(仁謙=大護軍)이다.
공(公)의 자(字)는 광취(光就)이며 고려 강종(康宗)때 과거 급제, 황태중대부, 예부상서, 지도성사(皇太中大夫, 禮部尙書, 知都省事)를 역임하다.
나윤(羅允)
공(公)은 시조(始祖) 나총례 금성부원군(羅聰禮 錦城府院君)으로부터 10세손으로, 병부상서 사공 휘 득황(得璜)이 아버지이시다. 초휘는 인(認)이며, 고려 충렬왕 26년(1300)에 동경유수(東京留守=경주의 수장 3품) 역임 후 윤(允)이라 개명하였으며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내시다.
형은 유(裕=회원대장군)이며, 배위 안동김씨(安東金氏=아버지는 判書)로 슬하에 천부, 천서, 원서, 문서(天富, 天瑞, 元瑞, 文瑞) 4남(四男)을 두다.
나지열(羅旨說)
시조(始祖) 나총례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으로부터 11세손이며, 증조부는 병부상서 득황(得璜)이요 조부는 삼중대광 문현(文玄)이며, 아버지는 봉익대부 철준(哲準)이다.
공(公)은 1042년(정종8년)에 판관(判官) 시절 동경부류수(東京府留守) 최석, 사록 윤겸 등과 함께 후한서, 당서(後漢書, 唐書)를 출간하여 왕에게 바친 전적(典籍)으로써 불서(佛書)등 많은 귀중서적을 발간하였으며,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역임하다.
나중호(羅仲浩)
증판서(贈判書) 순(純)의 아들, 문장과 행위가 으뜸으로 태종 계미년(1403)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권지승사랑(權知承仕郞)을 지내고 무자년(1408)에 선무랑(宣務郞) 통례문봉례(通禮門奉禮)에 제수되었다. 현재 영모사(永慕祠)에 배향 세일제(歲一祭)하고 있다.
나광우(羅光佑)
공(公)의 휘는 광우(光佑)이다. 시조 휘 총례(금성부원군) 로부터 15세손이며 조부는 휘 문규(文奎 = 서해도 안렴사)요 아버지는 휘 순(純 = 고려시랑)이시다. 형으로 중호(仲浩 = 통례문봉례)가 있고 둘째가 공(公)이며 아우로는 명우(明佑 = 홍문관교리)와 중귀(仲貴 = 증.한성판윤)가 있어 4형제이다.
학덕(學德)이 풍부했고, 수성(壽城 = 대구)도사(都事)와 충주목사(忠州牧使)를 역임하였는데 공의 재임 지역에서는 송사가 없어 백성들이 평안했다. 공을 수성파(壽成派) 파조(派祖로 하여 공의 후예들은 양상 대구등 경상도 지역에 거주.)
나천부(羅天富)
공(公)은 시조(始祖) 나총례 금성부원군(羅聰禮 錦城府院君)의 11세손으로 정순대부 대장군 지전리사사(知典理司事=종2품)를 역임, 득황(得璜=병부상서)이 조부요 윤(允=정승)이 아버지이며, 배위 청주곽씨(淸州郭氏) 슬하에 두 딸을 두었는데 큰 따님이 성삼문(成三問)의 조모이시다.
나천서(羅天瑞)
시조(始祖) 나총례 금성부원군(羅聰禮 錦城府院君)으로부터 11세손이며 득황(得璜=병부상서)이 조부요 윤(允=정승)이 아버지이며, 천부(天富)는 형이고 원서(元瑞) 문서(文瑞)는 아우가 되며, 공(公)은 고려문하시중 평장사(高麗門下侍中 平章事=정1품)요 안정백(安定伯)에 책봉
안정나씨(安定羅氏)로 분관(分貫) 그 파조(派祖)이다.
나문서(羅文瑞)
시조(始祖) 나총례 금성부원군(羅聰禮 錦城府院君)으로부터 11세손이며, 예부상서 휘 효전(孝全)이 증조부이시며, 병부상서 사공 휘 득황(得璜)은 조부이시며, 아버지인 첨의정승 휘 윤(允)과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 슬하에서 태어났는데, 첫째 형은 천부(天富=대장군)이며 둘째 형은 천서(天瑞=安定伯)요. 셋째 형은 원서(元瑞=高麗侍中 高山伯)이고, 공(公)은 고려시중, 삼중대광, 적라백(高麗侍中, 三重大匡, 赤羅伯=경주). 군위나씨(軍威羅氏)로 분관(分貫) 파조(派祖)이다.
나정서(羅正瑞)
시조(始祖) 나총례 금성부원군(羅聰禮 錦城府院君)의 십일세손이며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역임하신 분이며 고려 공민왕 때 문과급제(文科及第)후 선정(善政)하더니 마침내 아버지에 이어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역임하시다.
나은제(羅殷制)
공(公)의 휘(諱)는 은제(殷制)니 나주(羅州)에서 계출(系出)하여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휘 총례(聰禮)로써 시조(始祖)를 삼고 그 후에 빛나는 관작(官爵)과 훌륭한 인물로 정승의 물망에 오른 분들이 끊어지지 않았다.
부친의 휘는 계(繼)니 벼슬이 사직(司直)으로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이요 모친은 함평이씨(咸平李氏)니 부위(副尉) 성혜(成蹊)의 따님이다. 공(公)이 세종(世宗) 기해(己亥 1419)년에 남산리제(南山里第)에서 태어나 천품(天稟)이 강직하고 지기(志氣)가 고결(高潔)하며 모든 외물(外物)에 흔들리거나 굴(屈)하는 바가 없고 오직 의(義)를 중하게 여기었다. 세조 정해(丁亥 1467)년에 학행(學行)으로써 추천되어 장성(長城)현감(縣監) 겸 나주(羅州)진관(鎭管)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제수하니 그 관직(官職)에 임(臨)하여 치정(治政)이 관평하여 세금을 경감(經減)하고 옥사(獄事)에 억울함이 없으니 일경(一境)노소(老少)가 흐뭇하여 이르되 원님이 오시어 우리가 소생(蘇生)한다 하였다.
만기(滿期)가 되기전에 친상(親喪)을 당하여 사임(辭任)하고 돌아올 제 행장(行裝)이 세 필의 말에 가득하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삼마태수(三馬太守)라 칭하고 조정(朝廷)에서 그 청백리(淸白吏)를 녹(錄)하였다. 춘추(春秋) 69세인 성종(成宗) 정미(丁未 1487)년 3월 27일에 별세(別世)하니 무학산(舞鶴山) 서편 송림(松林) 묘좌의 벌에 안장(安葬) 하였다.
선생(先生)의 재주와 덕(德)으로 국가에서 문(文)을 숭상하는 날에 있어 그 포부(抱負)를 쓰일 바가 어찌 여기에 그치리오마는 친상(親喪)을 당하여 돌아온 후로는 다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요히 수양하며 때로는 혹 운림천석(雲林泉石)의 사이에 소요(逍遙) 하면서 시서(詩書)로써 즐기다가 세상을 마치었으니 아는 이들마다 차탄(嗟歎)하였다. 그러나 벼슬에 임하여 청백(淸白)한 업적은 조야(朝野)가 송덕(頌德)하여 백세(百世)라도 그치지않고 자손(子孫)이 매우 번성(繁盛)하여 팔도에 가득한 수가 천억(千億)으로 헤아린즉 공(公)의 덕을 심고 인(仁)을 쌓음을 여기에서 징험(徵驗)할 만하니 어찌 훌륭하지 않은가? 하였다
35세손 나태웅 컴퓨터 입력
출처 금성나씨 대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