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천천히, 미련스러운 해가 늦은 오후 자락의 꼬리를 물고
루앙프라방을 물들인다.</b><br />
뉘엿뉘엿 지는 해에 속절없이 곁을 내주는 이때의 루앙프라방은,
씨엥통 사원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승려들의 오렌지빛 가사와 닮았다.
푸씨 산 정상에 자리한 촘씨 탑은 지는 해의 기운을 받아 더욱 황금빛으로 빛나고
그렇게 이 도시 전체가 다른 시계를 맞을 준비를 한다.
도시라고 하기엔 너무도 소박하고 천진한 곳, 라오스 루앙프라방에 밤이 찾아오고 있다.
저 멀리, 칸 강과 메콩 강이 서로를 껴안고 그 위를 작은 배 몇 척이 일렬로 가로질러 온다. 산을 삶의 터전으로 하는 자들, 몽족의 배다. 무리를 지어 앉은 정갈한 얼굴들이 그 배를 타고 뭍으로 건너온다. 5시부터 10시까지 루앙프라방의 번화가 시사방봉 거리와 사카린 거리에서 열리는 딸랏 통칸캄(야시장)을 위해서다. 우리 돈 만 원도 채 안 되는 자릿세를 내고 그들은 한 달 동안 같은 자리에서 그렇게 세상과 만난다.
중국 묘족에 뿌리를 둔 몽족들은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을 돕다가 베트남과 라오스의 공산주의자들과 대립관계에 섰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들은 라오스 정부를 피해 산으로 숨어들었고 이제는 그것이 그들 삶의 방식이 되어 산속에서의 생활을 고수하고 있다.
딸랏 통칸캄은
라오스 정부가 궁핍한 몽족을 위해 마련한 시장이다.
지금은 몽족과 루앙프라방 현지인들이 함께 어울려 장을 연다. 짐을 옮기는 일도, 강을 오가는 것도 번거로울 법한데 몽족들은 루앙프라방으로 나와 잠깐 장사만 하다 돌아갈 뿐, 산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고집인 듯 무욕인 듯한 그 모습이 쉽게 수긍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묵직함을 지녔다.
저녁 6시. 이제 거리에는 뚝뚝이도 자전거도 없다. 500여 미터에 달하는 사카린 거리를 가득 메운 몽족들이 바닥에 옷가지와 가방, 장신구 등을 널어놓고 지나가는 관광객을 향해 눈인사를 한다. 그 어떤 호객행위도 손짓도 없이 그저 바라봐주기를 기다리는 그 눈빛이 애잔하고 정직하다.
딸랏 통칸캄에 나온 물건들은 대부분 3~5달러부터 시작한다. 우리에게는 그리 큰돈도 아닌데, 파는 이들은 겨우 1~2달러를 얹어 말하면서도 마음을 조아린다. 행여 그냥 갈까, 비싸다는 항의나 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눈빛에 그대로 담겨있다.
<b>사람들은
저마다 가장 아름답게 여기는 순간에 머무르기 위하여
현재를 떠난다. </b>
그리고 떠나간 곳에서조차 다시 찰나를 아쉬워한다.
그러나 루앙프라방에서만큼은 아쉬워하지 않는다. 어디를 가든 이곳에서는, 조금 전에 느낀 그 희열을 다시 그대로 돌려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딸랏 통칸캄, 야시장은 그 희열의 농도가 더욱 짙어지는 곳이다.
유럽에서 온 이방인들은 몽족이 만든 장신구나 옷가지를 구경하며 싼값에 구매하고 거리 곳곳에 문을 연 간이 찻집에서 달큰한 라오스 커피로 목을 축인다. 우리 돈 천 원 미만으로 시원한 냉커피 한 잔에 여행이 주는 설렘을 더욱 부추길 수 있다.
몽족은 천진하지만 그들의 옷은 꽤 화려하다. 남자는 헐렁한 바지에 지퍼가 달린 상의를 입고 터번을 쓴다. 허리에는 장식 띠도 두른다. 여자들은 자수와 은으로 장식한 옷에 역시 터번을 쓰고 허리에 꽃장식 띠를 두른다. 야시장에 나온 옷가지들도 물감을 풀어놓은 듯 알록달록하다. 그 덕분에 딸랏 통칸캄의 거리는 온통 형형색색의 물결이다.
그러나 야시장에 나온 몽족들은 대부분 평상복 차림이었다. 무릎을 꿇은 채 곱게 앉은 전통복 차림의 여인은 그래서 쉽게 눈에 띄었다. 순박한 얼굴에 그만 그 앞에 멈춰선 내게, 여인은 다소곳이 미소만 지었다. 지인의 아이에게 선물할 옷가지를 사며 슬쩍 신상명세를 물었다.
<b>므앙 씬에 산다는 여인의 이름은 '허'라고 했다.
“싸바이디(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자 금방 큰 웃음을 돌려준다. </b>
몽족 전통의 갓난아이 여름옷에 모자까지 얹어 원래 10달러인 것을 7달러만 받고 판다. 덤으로 얹어 받은 여인의 미소에 가슴 안쪽이 뻐근하게 차올랐다.
<b>루앙프라방의 밤은 그렇게 착하게 깊어가고 있었다.
(루앙프라방을 위한 예찬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