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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 주최 제7회 중학생 학력대회 예년보다 전반적 성적 향상 해마다 계명대 주최로 열리는 도내(대구, 경북) 남자 중학생 학력대회가 그 일곱 번째 대회를 지난 1월 6일 본교에서 가졌다. 50명 선정에 1,402명이 응시하여 28: 1이라는 대회 사상 유례 없는 치열한 경쟁을 보였으며, 커트라인은 국, 영, 수, 합하여 300점 만점에 214점으로 예년에 비하면 무척 높은 것이었다. (중략) 대회에서 입상권 내에 든 학생은 본교에 결원이 있을 때 당사자의 희망에 따라 전․입학을 할 수 있다. 각 과목별 수위 및 입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 국어 수위 : 정만진 (계성중) • 영어 수위 : 손병직 (신라중) • 수학 수위 : 김명식 (대구중) 이하, 생략 |
국어 1등을 한 건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사건이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중학교 입학시험 때 음악을 제외한 다른 과목은 다 맞혔는데
국어만 1개 틀렸다.
국민학교 6년 동안 음악 과목 수업을 한 기억이 별로 없으니
입시에서 음악의 대부분을 틀린 것이야 당연한 결과이지만
국어만 만점을 받지 못한 것은 아무래도 그 과목이 성격상 약간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음치인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처녀 시절이던 일제 시대에
의성군 구천면 노래자랑에서 상을 받은 실력이고, 한국화 전공인 '하나밖에 없는' 딸
연지는 언제 어디서 노래를 불러도 전문가수가 나타났나 싶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가창력을 자랑한다. 그러하다고 내가 그 수준이라는 것은 아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거의 음치 수준이었는데,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중간쯤 되지 싶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면 어떤 날은 "노래 정말 잘 부른다" 소리를 듣고
어떤 날은 스스로 들어도 시원찮으니 말이다.)
그러다가 문득 국어 과목을 획기적으로 잘 하게 되었으니, 그 계기를 여기 기록해놓지 않을 수 없다.
중3 초의 일이다.
국어 시간이 끝나자(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 단원이 끝났는데)
선생님(서정원 선생님, 이 글을 쓰는 며칠 전에도 만나뵈었다)께서
"학습문제에 '단편소설을 써보자'가 있는 월요일까지 각자 단편소설을 한 편씩 써서 제출해."
하고 숙제를 내셨다. 아이들은 비명을 질렀고, 아무도 그 숙제를 해오지 않았다.
전교에서 단편소설을 써온 학생은 나 혼자뿐이었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 배운 이론에 맞춰 소설을 썼다.
전형적인 모범생답게 토요일과 일요일 모두 하얗게 밤을 새워 소설을 썼다.
숙제를 안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월요일에 숙제를 제출하니 선생님께서 "정말 잘 썼다. 전국대회에 내자."하셨다.
당시 청소년 문화를 주도하던 매체는 월간 <학원>이었다.
(그 무렵 이 잡지에는 최인호의 장편소설 '우리들의 시대'가 연재되고 있었다.)
<학원>은 해마다 중고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와 소설을 모집하여 상을 주었는데
내가 낸 처녀작이 거기에 우수작으로 뽑혀 상을 받게 되었다.
그 후, 갑자기 국어가 쉬워졌다.
소설을 한 편 써보고 나니
다른 글을 읽을 때 필자의 생각, 구성 의도 등을 파악해내는 힘이 생겼던 것이다.
과연 그렇다. 쓰면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면 사고력과 독해력이 신장되고
그냥 읽기로 시작하는 것보다 직접 써보는 것이 국어 학력을 키우는 노둣돌이 된다.
나중에 교사가 된 이후에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도 나는
그런 생각을 실천했다.
사실 중학생 때 나는 미술 공부가 하고 싶었다.
국민학교 때에도 그랬지만 교실 뒷면 게시판의 환경 정리는 중학생 때에는 늘 내 몫이었는데
농촌에서 국민학교를 다닐 때에 서예를 본격적으로 배우려다 그만두었던 것처럼
중학교에서도 미술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고 싶었던 내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계명대학교 교수로 옮겨가신 김기한, 장진필 두 분 미술 선생님께서
미술부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면 성공할 것이라고 계속 권유하셨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했다가 줄곧 꾸중만 들었다.
서예를 하고 싶었는데 하지 못했다는 국민학교 시절 추억은 이렇다. 국민학생이던 당시,
단밀국민학교 학교장(왕철 이동규)은 유명한 서예가였다. 아버지는 그 학교 교사였다.
교장 선생님은 서예 지도에 여념이 없으셨는데,
그림에 소질을 보인 나를 특별히 가르치시겠노라 지목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마다하고 그냥 공부만 하라고 하셨다.
그 때 교장 선생님에게 배운 아이들 중에서
나와 같은 학년의 두 명은 여기저기 서예대회에서 상을 받더니
중학교 진학시에는 계성중학교에 특기생으로 입학하였다.
내가 입학시험에 합격했을 때
의성교육장이 우리집에 왔다는 사실을 보면
궁벽한 시골 국민학교에서 계성중학교에 입학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공부는 보통 수준이면서도
서예를 해서 특기생으로 간단히 진학을 한 걸 보면
교장선생님의 지도는 대단한 경지였음이 미루어 짐작이 된다.
하지만 공부로 입신출세를 해야 한다는 집념에 가득차 있었던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근무 중인 학교의 교장선생님의 특별 배려도 마다하고
나에게 공부만 하라고 하셨다. 그 때 서예를 했더라면,
정말 좋았을 것이다. 그 후로 한번도 서예를 배우지 못했다.
당연히 정통 붓글씨를 쓰지는 못한다. 장편소설 <딸아, 울지 마라>를 발간할 때 표지 그림과 구성은 딸 연지가 했는데, 표지 제자 중 '딸아'는 내가 붓을 들고 썼다. 출판사의 표지 구성에 오른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아 무리를 해본 것이다. 연지가 좋다고 하여 책 표지에 올렸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특별히 할 게 없으면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나."
뒤집어 말하면, "공부 말고도 할 게 있으면 그걸 하는 게 현명하다."
그것이 나의 교육철학이다.
그러므로 특히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는 교육청에서 반복적으로 철저하게 적성검사를 해주고,
그의 내재된 특장이 무엇인지를 찾아주는 일을 해야 한다.
신경림은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하고 노래했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자신의 천재성도 발견하지 못한 채
평생 동안 엉뚱한 일만 힘들게 하다가 저 세상으로 가서야 되겠는가.
교육부, 교육청, 정치인 등은 '공교육 활성화, 교육이 백년지대계' 등을
입으로만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의 소질 적성, 특기를 열성으로 찾아주어
그것으로 말미암아 많은 개인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고
나아가 국력이 신장되는 기초를 닦아야 한다.
팔공산 갓바위 부처
사람들은 기도를 한다.
갓바위에 가보면, 전국 방방골골에서 운집한 군중들이 땅에 엎드려 기도를 한다.
갓바위 부처는 한 사람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나는 갓바위 부처께 기원을 하지는 않지만, 절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저들은 무엇을 기원하고 있을까?" 궁금해하기는 한다.
중학교 다니던 시절, 공부를 잘하기는 했지만, 특히 중3- 2학기 이후는 즐겁지 않았다.
처음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너무 철이 없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누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다녔다.
할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와 서문시장 옆에 얻은 셋방에 함께 살면서 밥을 했다.
그 후 결국 집이 아주 망해서 나는 고1부터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이던 여동생은 학교를 중퇴했고
막내는 국민학생이라 학교는 다녔지만 몇 달 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하루는 교실에 있는데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불렀다.
"집이 이사를 했으니 찾아오라고 하던데, 이게 집 주소야."
종이에는 북구 대현동 000번지라고 적혀 있었다.
어느덧 캄캄해진 신천을 건넌 나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질퍽해진 비포장길을 걸어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대현동 000번지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 집에 당도하면 삶에 지친 부모님과 공장에서 돌아온 누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밤새 공장에서 일을 하고 돌아와 쓰러진 듯 잠이 든 누이는
꿈속에서나마 무엇을 기도하고 있었을까.
나는 한번도 그것을 물어보지 못한 채 지금까지 왔다.
나는 기도한다.
"가난한 집 아이들도 학교에는 다닐 수 있어야 한다"고.
당시 버스를 탈 때마다 나는 그 생각을 했다.
고등학생은 차비를 절반만 받았는데
정부가 말하는 '근로 청소년'은 차비를 어른과 같이 전액 다 받았다.
학생은 돈이 없으니 반만 받고
공장에 다니는 청소년은 수입이 있다고 반을 받는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대학 무상교육'을 반대한다.
대학 학비를 받지 않으면
부잣집 아이들은 그만큼 용돈이 늘어날 것이고
생계비를 벌어야 하는 가난한 집 아이들은 여전히 대학에 다니지 못할 것이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학비를 면제해주어야 하고
교내에서 근로장학생이라도 하여 생계비를 벌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학교를 다닐 수 있다.
대학 무상교육이 되려면
무상의료, 무상주택이 함께 되어야 한다.
그래야 가난한 집 아이들도 마음놓고 학교에 다닐 수가 있다.
무상의료, 무상주택이 대학 무상교육보다 먼저다.
대구외고 전경
2002년 8월 31일자로 대구외국어고등학교에서 퇴직하였다.
1980년 9월부터 경북여상, 경일여고, 현대여고(현, 청운고), 영신고, 신암여중, 신암중, 제일중 교사로,
영천 영동고등학교 전임강사로 근무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2002년에 대구시 교육위원 선거에 당선되면서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당시 낙선할 것이라는 의견이 대종이었지만 9명 당선자 중 최다 득표, 최고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칠 마당을 잃은 것이다.
내가 아이들을 처음 가르친 것은 군대에 다녀와서 사범대학을 졸업한 이후가 아니다.
나는 중3 때부터 아이들을 그르쳤다.
집이 경제적으로 망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재학시에는 신암동의 독서실 뒷방에 머물면서
그 독서실에 다니는 중학생들 중에서 개인지도를 받고자 하는 아이가 있으면
독서실 주인이 내게 지도를 맡겼다.
돈이 없으니 서울에 있는 사립대학에는 갈 수가 없었고,
서울대 사대 국어교육과에 시험을 쳐보라는 담임 선생님의 권유를 듣고
"졸업하면 어떻게 됩니까?" 물었는데
"전국에 발령이 난다"고 하여 포기를 하고
서울대 사대보다는 학비가 학기당 2천원 비싸지만
집에서(사실은 셋방에서) 다닐 수 있어 현실적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싼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진학했는데
대학생이 된 후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을 가르쳤다.
당시 사범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6만원이었다는 사실이 기억난다.
그리고 주 2회 방문하는 가정교사 월급이 2만원이었다. (지금 돈으로 30만원 수준)
세 집 가정교사를 하면 한 학기 등록금 6만원을 벌 수 있었다.
한 학기 여섯 달 줄곧 가정교사를 하여
한 달분 월급으로 한 한기 등록금을 납부하고
나머지 다섯 달분 월급(30만원, 지금 돈으로 450만원)은
가족의 6개월 생계를 유지하는 데 보탰다(월 70만원 수준).
그런 식으로 생활하는 시간이 6-7년 이어지자
가정교사를 하여 살아가는 일상이 너무나 지겨웠다.
특히 대학 진학 후에는 날마다 가정교사를 했으니 그 지겨움은 진작에 도를 넘었다.
그래서 3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
왜관에 가서 머리를 빡빡 깎고 군용 기차에 몸을 실었다.
현역 장병들이 나눠주는 건빵을 먹다보니 논산에 도착했다.
훈련을 마치고 울산으로 배치되었다.
당시 훈련병 대부분이 전방으로 배치되었는데
그리 가지 않고 울산에 배치된 것은 아주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는 울산에 당도한 뒤에야 내가 울산으로 배치된 것을 알았지만
울산 부대에 당도하니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등병들은 가족들이 이미 면회를 와 있었다는 사실이다.
울산 앞바다의 처용바위
재미없는 대한민국 남자들은 축구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군대 이야기를 한다.
마지막으로 군대 가서 축구한 이야기를 한다.
그 지경이 되면 이제 더 이상 화제가 없다고 한다.
나도 군대에 갔다 왔으니 돌이켜볼 만한 추억이 없을 리 없다.
그렇다고 장황하게 적을 일은 아니니, 교육과 연관이 있는 일은 기록해 두어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구관 건물과, 그 위로 신관 건물이 보인다. (당시의) 도서관(지금의 박물관) 앞 야외 박물관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을 했지만 학교 다니는 데에 아무 흥미가 없었다.
그렇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두 가지 이유만 돌이켜보면-
첫째, 학비가 전국에서 두 번째로 싸다는 이유 때문에 가기는 갔지만 (한 학기 등록금이, 고3 주제에 직접 알아 보았는데, 한 학기 등록금이 6만원이던 그 당시 서울대 사대보다 2천원? 더 많았다. 그러나 서울에 가면, 집에서 다니는 데 비해 훨씬 경비가 많이 드니 경북대 사대가 비교할 수 없이 싸다고 판단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서울사대는 그때 발령 범위가 전국이었다.) 날마다 가정교사를 해야 했고, 2류(당시는 3류는 아니었다)대학 학생이 되었다는 자격지심 때문에 날마다, 언제나 몸과 마음도 피곤했다.
둘째, 국립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가면 박목월이나 김동리 같은, 교과서에 나오는 분들이 가르쳐주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영 그게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이 없어서' 스스로 그렇게 시달렸던 것으로 판단이 되지만 그 나이 때는 그것이 정말 고통스러웠다.
세를 얻어 살고 있던 대현동 집은 방으로 들어가려면 담벼락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을 이용해야 했는데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옆을 보며 걸어야 했다. 나는 그것이 날마다 힘들었다. 시골에서 유학 온 신입생들이 문득 테니스채를 옆구리에 끼고 호사를 부리는 모습에도 나는 어쩐지 지쳐갔다. (그 이후 2011년 지금까지도 나는 테니스를 쳐보지 못했다.)
어느 날인가, 고향에 제사가 있어 갔는데 (추석이었던가?) 5급시험(지금의 행정고시)에 갓 합격하여 중앙청으로 발령이 난 상태인 친척 형이 "역사과라도 가지 왜 국어교육과를 갔냐? (고시)공부에 도움도 안 되는데 말이야." 하면서 고시공부를 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도 흥미가 없었다. 만약 그 공부를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논문식 시험이니 붙었을 가능성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꼭 잘 살게 되었을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니, 공무원 시험 공부를 안 한 데 대한 평가는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좋아지고 나빠지고는 알 수 없어도 어쨌든 인생 자체는 지금과 판연히 달라졌을 터이다. 그것이 조금 궁금하기는 하다.
하여간, 나는 고시공부를 할 마음도 없었지만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열심히 다니지도 않았다. 내가 열심히 한 것은, 1주에 3곳을 다니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과 독서, 그리고 음주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단 한 번도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운 적이 없었다. 담배는 특히 군대를 마칠 때까지도 피우지 않았고, 결혼 이후, 학교 교사를 하면서 서른 이후에 배웠다. 당시만 해도 모든 남자 교사들이 담배를 빡빡 피워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오면 인근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는 게 어려울 지경이었으니 선배 동료 남자교사들의 흡연 권유를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술은 대학 입학 이후부터 마셨다.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에는 잠시 학교에 다녔다.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을 했는데 막걸리와 소주가 나왔다. 막걸리는 마셔보니 냄새도 이상하고 배만 불렀다. 소주를 마셔보니 톡 쏘는 맛이 구미에 맞았다. (그 이후 줄곧 소주를 마셨는데, 국어교육과의 교수들은 소주 마시는 몇 안 되는 학생들에게 '소주파'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소주파들은 대체로 반항적인 기질을 가진 부류들이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술 마시는 데는 이력이 난 남자들의 집이었으므로 나도 음주에 '쎘다.' 학교에는 안 가는 날이 많았지만 가끔 가면 날마다 몰려서 술을 마셨고, 나는 대취한 아이들을 업거나(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는 동기들이 많았다.) 버스에 태워서 집까지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래도 귀가 후 세수만 하면 책을 보는 데에는 거의 지장이 없었다.
당시 생각에도 나는 시골에서 올라온 그 유학생들보다 더 가난했다. 그들은 경북대 근처에 방 한칸을 얻어 자취를 하면서 궁상을 떨었지만 우리집은 일곱 식구가 방 두 칸을 세얻어 살았으니 말이다. 한번은 한참 학교에 출석을 하지 않았더니 동기 두 명이 집을 찾아왔던 모양이다. 아무도 없는 셋방을 둘러보고 빈 손으로 돌아간 그들이 소문을 퍼뜨렸다. "정만진, 정말 가난하더라."
그들은 예상보다도 더 빈한한 우리집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몰려다니며 마실 때 두 번 중 한 번은 내가 술값을 내었으니 그들은 그래도 뭔가 있으니 돈을 낼 것이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그것이 대중의 발상법이니까. 나는 날마다 가정교사를 해서 달마다 세 번 월급을 받았으므로 아무리 그 돈으로 생활비를 부담한다 해도 주머니에는 언제나 약간의 잔돈이 조금 있었다. 그리고 경북대학교 신문인 <경북대학보>(나중에는 <경북대신문>으로 제호가 바뀜)에 연재소설을 집필했는데 (제목 '길은 어둡고') 그 원고료가 짭짤했다. (연재가 끝나고 난 뒤 '신경림론'도 썼다. 원고료를 받으려고)
소설을 써서 학보사로 찾아갔던 기억이 난다. 당시 학보사는 대학본부 1층에 있었다. 지금 본관 1층 중 맨 왼쪽 방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 때는 학보사 출입문이 고00총장 흉상 쪽으로 나 있었다. 원고지 뭉치를 들고 학보사 앞에 가니 학생 기자들이 농성 중이었다. 편집자주권 확보! 아마 그것이 주제였던 것 같다. 나를 본 어떤 학생기자가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었다. 연재를 하려고 소설을 써 왔다고 하니 '지금까지 소설을 연재한 적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이제부터 연재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두고 가면 교수님과 선배들께 말씀드리겠노라' 하였다. (그 학보사 기자는 그 당시 나를 알아보았다. 고교 때 <학원>지에 소설을 썼는 게 도움이 되었다. 그 학보사 기자는 국어교육과 선배 학생이었다.) 그랬는데 다음 주 학보부터 소설이 연재되기 시작했다. 신문을 보고 동기들이 '원고료는 언제 나오냐?'고 묻는데 학과 사무실에서 호출이 왔다. 가니 직원 누나가 교수실로 데리고 갔다. 학보사 주간이 우리 과의 서병국 교수(지금은 작고)님이었던 것이다.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나는 열심히 하지 않고 대충 학교에 다녔다.
그 무렵, 경북대학교는 본관 앞에도 식당인지 막걸리집인지 불분명한 그런 집이 있었고 사범대학 뒤에도 있었다. 경북대학교 교지 <복현문화> 편집위원을 할 때에는 그런 식당들에는 가서 먹고 '싸인'을 하면 되었다. 물론 간소한 밥값 수준이었지만 밥 대신 술을 마시는 우리에게는 그것도 상당한 호사였다. 그런 식으로, 두 번 중 한번 술값을 내었으니 아이들은 내가 그토록 가난한 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구관 입구에는 박정희 흉상이 걸려 있었다. 물론 그것은 지금도 걸려 있다.
그렇게 아무 의미도 없이 대학을 다니다가 입대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고등학생 때부터 해온 가정교사 생활에 넌덜머리가 났고, 1학년 때 거의 출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점을 얻지 못한 게 많아 그냥 다니다가는 4년만에 졸업을 못하게 될 궁지에 몰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련을 이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있다가는 군대에 강제 징집될 판이었다. 나는, 당시는 160학점을 따야 졸업이 되었는데 군대에 갔다 오면 140학점만으로 졸업이 되도록 바뀐다는 사실에 주목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억지로 다닌 대학을 8학기도 아닌, 9학기만에 졸업할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비슷한 친구들을 설득하여 동시에 입대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해당이 되지 않았지만 내게만 문제가 되는 심각한 현안이 있었다. 교련을 이수한 학생에게는 일찍 제대를 시켜주는데 (대학 재학 1학기당 0.5-1개월 일찍 제대) 난 교련 수업에 참석하지 않았으니 그건 어쩐담?
아, 쓰다 보니 너무 진도가 빠르다. 대학 다닌 이야기를 더 쓰는 게 옳겠다. 자서전은 특성상, 시간 순서대로 써놓고 나중에 흐름을 가다듬는 것이 옳다.
군대에 가서 처음 배치된 곳은 울산 동해안 우봉 바닷가였다. 초소 근무 배치를 받기 전에는 사령부와 대대본부에서 잡일을 했는데 대대본부에 있을 때 바닷가 횟집에(세죽마을) 가서 회를 사오라는 명령을 받고 자전거를 타고 달렸던 기억이 난다. 그곳이 바로 처용바위 바로앞이었다. 지금은 공단 조성으로 마을 자체가 철거되고 없다. (사진에 보이는 물가가 옛날 세죽마을) |
(미완성, 이후 계속 집필하겠습니다.)
첫댓글 모두가 자서전을 써 보도록 합시다. 그러면 자신을 돌아볼 기회도 생기겠지요. 우리는 너무 앞만 보고 가는 건 아닌지?
아...만화캔디기다리던 그 어릴적이 떠오릅니다.뒷이야기 왕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