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 속의 고래와 노래로 다리를 놓는 사람들

겨울밤에… 노래로 다리 놓는 사람들 시드니의 겨울장마비가 시대의 우울처럼 추적거리던 지난 토요일 저녁, 문인회원들과 어울려서 한인동포 성악가들이 들려주는 한국가곡과 크로스오버음악을 감상하러 스트라스휠드에 갔다.  음악서클 <노래로 다리 놓는 사람들>이 이메일로 보내준 초청장의 타이틀은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였다. 프로그램을 펼쳐보니 1부의 제목은 ‘한국가곡’이고, 2부 제목은 ‘우리들의 이야기들’이었는데, 왠지 친근하고 푸근한 <열린 음악회>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그런데 아뿔싸! 2부 순서로 열거된 노래제목들을 보면서,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옛 시인의 노래’나 ‘사랑은 아마도(Perhaps Love)'는 그렇다 치더라도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같은 아주 뜻밖의 트롯가요가 들어 있었던 것. 개성, 자율성, 다양성, 대중성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서 등장한 크로스오버음악이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를 허물었다고는 하지만, 경력이 만만치 않은 중견 성악가들이 트롯가요까지 부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내 친구가 좋아하는 노래 ‘마법의 성(城)’이 2부 순서에 들어있어 내심 반가웠지만, 그런 노래를 테너가수가 어떤 방식으로 소화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긴 <3테너>의 도밍고가 ‘테네시 왈츠’를 부르는 시대이니...  근년에 들어서, 일부 문화평론가들은 “현대예술은 작가주의나 예술지상주의만 가지고는 안 되고, 엔터테이너(연예인)의 역할까지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술계에 종사자들은 누구나 광대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인들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시의 원형이 노래이고, 최초의 시인들이 가인(歌人)/노래꾼이었다는 사실만 봐도 시인의 임무가 작가주의에서 머물지 않는다는 증거가 된다. 노래꾼 이전엔, 제의(祭儀)에서 주문(呪文)을 외우는 등의 무당역할을 맡기도 했으니, 한 마디로 그 시대의 엔터테이너였다.  어둠에 길을 내는 사람들  나는 감동적인 음악을 듣는 동안, 내가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진하게 느낀다. 지난 토요일 밤에 들은 ‘동심초’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아주 친숙한 노래이지만, 그토록 절절하게 폐부를 찔러오는 동심초는 일찍이 들어본 적 없다.  소프라노 곽도영이 부른 동심초를 듣다보니 정신이 까무룩 해졌다. 마치 어둠 속에 길을 내는 사람처럼, 기억 저편에 잠겨서 잊고 살았던 얼굴 하나를 떠오르게 만든 것이다.  동심초(同心草)… 꽃잎 하염없이 지는 날, 첫사랑과 함께 풀밭에 앉아서 한 마음으로 상상했던 풀,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식물이다. 지금은 얼굴조차 가물거리는 첫사랑처럼, 한갖되이 풀잎만… 맺고 말았던 날들을 추억하면서, 나는 곽도영의 노래에 젖어들었다.  그렇다. 우리가 살아온 날들은 어둠 속으로 묻혀 질 수밖에 없다. 그 캄캄한 추억 속으로 등불 하나 밝혀들고 천천히 걸어가는 게, 한 편의 서정시를 쓰는 일이고, 눈 지그시 감고 노래 부르는 마음이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그 희미한 등불 아래서, 오래 전에 잊혀 진 첫사랑의 얼굴을 망연히 바라보다니…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음악회가 끝나고 문인들과 어울려서 자정이 훨씬 넘는 시간까지 술을 마셨다. 참 미안하게도, 나는 동료 문인들과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고 혼자 따로 앉아서 술을 마셨다. 겨울장마에 속절없이 젖는 어둠 속에서 까무룩 한 시절을 심하게 앓았던 것이다.  창밖으로 기차가 오고가는 스트라스휠드 클럽에 앉아서 ‘마지막 기차’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저 기차가 떠나가면 더 이상 나를 태워줄 기차는 없는데... 난 어쩌자고 클럽 마당의 나무벤치에 혼자 앉아서 하염없이 속울음을 울었을까. 너나없이, 잊으면서 한 생(生)을 건너가야 하는데… Wonderful tonight  약 한 달 전에 <노래로 다리를 놓는 사람들>을 출범시킨 성악가들은 동포사회에 친숙한 음악인들이다. <3테너>의 이나라와 천인욱, 끼가 철철 넘치는 베이스 이태준, 소프라노 곽도영, 만나면 기분이 맑아지는 ‘사랑의 듀엣’ 이재숙과 남양우가 그들이다.  <노․다․놓․사>라는 약칭으로 불러달라고 말한 피아니스트 이경혜 목사는 “음악이 좋아서 죽고 못 사는 사람들이 ‘노래 사랑방’처럼 만든 서클입니다. 동포들과 자주 만나서 정통성악, 기독교음악, 크로스오버 등으로 콘서트를 꾸며가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통로에 임시의자를 놓을 정도로 콘서트 장을 꽉 메운 청중들은 함께 노래하고 박수치면서 가열 찬 성원을 보냈다. 나와 동행한 한 동료문인은 “다음엔 성악과 기악이 함께 어울리는 열린 음악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치기도 했다.  음악회가 끝나고 조촐한 다과모임이 열렸다. 함께 차를 마시던 피아니스트 이경혜 목사가 나에게 물었다. “처음 시도해보는 형식의 음악회라서 힘들었습니다. 많이 미흡했지요?”라고.  그래서 나는 ‘기타의 신(神)’으로 불리는 에릭 크랩튼의 노래 ‘Wonderful tonight’에 나오는 가사를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파티에 참석했던 연인들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이다.  Do you feel all right?(오늘밤 파티 즐기셨나요?) Oh my darling, You were wonderful tonight.(그대는 오늘밤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겨울의 길목에서 노래로 다리를 놓아준 사람들을 나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밤샘을 하면서 원고를 쓸 때마다 내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처럼 그 다리 위에서 달빛을 사냥을 할 것이다. Thanks a lot! --------------------------------------------------------------------        詩든이 & 시드니           어항 속의 고래                                                   주 선 영  포항선린병원 응급실 침대에 아버지는 제삿날 어머니가 만들었던 노란 치잣물 들인 동태전처럼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은 초겨울 처마 밑에 매달려 시나브로 마른 늙은 호박 같았다. 황달수치 39, 병명 담도암. 먼 바다로부터 높은 파랑이 일었다. 동리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집안에 들어가 문을 걸고 덧문까지 꼭꼭 닫았다. 샛바람이 북으로 치달으며 던져놓은 파도는 칼을 물고 대안마을을 위협했다. 동리 사람들이 앙팍한 가슴에 팔짱을 끼고 조상의 제사를 제대로 모셨는지 올해 마을신 제사에 부정 탄 일은 없었는지를 모의하는 동안 아버지는 한 동이의 막걸리를 마시고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놓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바다의 위협에 대항키 위하여 결심을 모은 시간에 아버지는 반쯤 뜯겨나간 대문을 밀쳤다. 정지칸에 서 있던 어머니는 주먹을 조심스레 쥐었다. 나와 동생은 따뜻! 이 데워진 아랫목을 뒹굴며 찢어진 만! 화책을 서로 보겠다고 강아지들처럼 싸웠다. 술비린내가 사방연속무늬 벽지에 스미어 새로운 흔적을 남겼다. 나는 만화책 속의 주인공처럼 아버지께 어리광을 부렸다. 아부지는 술고래야! 어머니가 가만히 꼬집었다. 아버지는 마당의 낙엽을 쓸어버리듯 우리를 웃목으로 밀친 후 벌러덩 누웠다. 아부지는 진짜로 술고래야! 나는 만화책을 건성 넘기다가 받아쓰기에 마침표를 찍듯이 말하며 파도소리에, 샛바람 웅웅거리는 소리에 귀를 담그고 만화책의 첫 페이지를 다시 펼쳤다. 내사마 이래보예도 동해안에서 질로 가는 기관사인기라! 너그들이 아나? 너그들이 머를 알겄노! 아버지는 시대를 잘못 만나 영웅이 대접 받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자유분방한 탄식을 하였다. 해일의 시간에 아버지가 꺾임없이 걸어왔을 길을 동생과 나는 손을 잡고서도 휘청이며 걸었다. 어머니가 여름날 뙤약볕에 시들어진 봉선화처럼 목을 꺾고 정지를 서성이는 것을 기억하며. 아버지는 일원짜리 동전만한 구멍이 난 런닝구를 들추며 배를 보여주었다. 배와 가슴사이쯤 아버지의 목마름이 차오르고 있었다. 졸지에 찾아 온 낯선 병명의 무게보다! 아버지의 구멍난 런닝구가 너무 무?! 탓? 털썩 주저앉았다. 인연이란 슬프게 느껴지는 것과 한 호흡인 것을. 아? 适熾? 우째다가! 아버지의 얼굴은 얼음저장고가 부족하여 잡은 고기를 바다에 던질 때처럼 비장해보였다. 그 모습은 노래진 눈꼬리를 타고 흐를 눈물이나 갈라진 탄식보다 더욱 비감한 언어였다. 서울 세브란스병원 응급실, 황달수치 39, 수술불가. 아버지는 술고래였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태풍 지나간 바다처럼 잔잔하였고 따뜻하였고 또한 단호하여 모두들 그를 두려워하면서 존경했다. 아 뱃놈의 존경이라니! 아버지가 떡 벌어진 어깨를 조이며 좁은 기관실 문을 열고 들어가 시동을 걸면 배는 사내가 사정하듯 온 몸을 떨며 울었다. 아버지는 기계의 달인이었고 선창가에서는 거대한 고래처럼 우뚝한 존재였다. 고래가 바다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거야. 세상을 탄식하며 마셔댄 술은, 내받았던 욕설은, 행했던 폭력은, 자신을 학대했던 일들은 고래의 검푸른 등처럼 질기고 견고했던 비밀이었다. 아버지는 가야했다. 비밀을 무두질하러. 여름날 뙤약볕 아래의 봉선화처럼 목을 꺾고 살았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힘찬 물질을 기원하며 두 손을 모았다. 어항 속의 고래가 몸을 틀자 神은 잠시 세상을 지웠다. 큰 바다에서 부터 비가 쏟아졌다. 산 자들은 아버지! 를 위해 오랜 이별의 꽃을 놓았다. 어항이 산산이 부서지자 아버지는 하늘을 향해 힘차게 차고 올랐다가 검푸른 바다 깊이 가라앉았다. 부디 힘차게 가소서. 금주의 詩든 이 : 주선영   아부지요… 바다로 돌아간 고래 1. 주선영 시인의 고향인 경상도지방 방언, 아부지. 그 아부지를 몇 번 되뇌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2. 호주동포사회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산문시(prose poem)다. 산문시는 ‘일정한 운율을 갖추지 않고 자유로운 형식으로 내재율(內在律)의 조화만 살리는 산문 형식의 서정시’다. 3. 산문시에 대해서 조금 더 인용하면, ‘서정시가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산문의 형태로 쓰여 진 시라고 보면 된다. 산문시는 시적 산문(poetic prose)보다 짧고 간결하며, 자유시와 같은 행의 끊어짐(line breaks)이 없고 내재율(inner rhyme)과 운율적 흐름을 지닌다.’ 4. 산문시는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가 <파리의 우울>(1869)을 발표한 이래 중요한 시의 한 부문이 되었다. 보들레르는 산문시의 특질에 관하여 "율동과 압운이 없지만 음악적이며 영혼의 서정적 억양과 환상의 파도와 의식의 도약에 적합한 유연성과 융통성을 겸비한 시적 산문의 기적"이라고! 진술했다. 5. 나는 이토록 절절하고 가슴 애이는 시적 고백을 일찍이 만나본 적 없다. 고기잡이배의 기관사였던 아버지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다. ‘아버지는 일원짜리 동전만한 구멍이 난 런닝구를 들추며 배를 보여주었다.’에 이어지는 절규 ‘ 아부지요 우째다가!’의 대목에 이르면 저절로 눈이 감겨진다.    6. 주선영의 시 <어항 속의 고래>를 더 설명해서 무엇 하겠는가? 오히려 시적 감흥만 훼손시킬 위험성이 크다. 한 마디만 덧붙인다면, 좋은 시는 좋은 삶에서 출발한다. 아버지의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그 슬픔을 시적울림이 큰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일은 아버지를 다시 살게 하는 숭고한 작업이다.                                                                  <윤필립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