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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 이야기 / 이현주
빌딩숲 인파 속에서도 사람이 그리우면 구포시장으로 가 보세요. 더구나 현재 있는 곳이 부산역 근처라면 지하철이나 버스가 아닌 열차를 타고 가 보세요.
먼 거리가 아니니 굳이 값비싼 KTX나 새마을호를 탈 필요는 없습니다. KTX나 새마을호를 타면 12분, 무궁화호를 타면 13분. 1분의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도 요금은 두세 배 이상의 차이가 나거든요. KTX는 8,100원이고 무궁화호는 2,500원이니 1분의 여유가 주는 행운치고는 꽤 값지지 않습니까?
부산역에서 11시 20분 열차를 타기 위해 상행선 플랫폼에 들어섭니다. 일상에서 탈출하는 기분입니다. 어깨에 걸친 작은 가방이 마치 먼 여행길을 준비해 온 배낭처럼 들썩거립니다. 때마침 내리는 가을비가 여행 기분을 더욱 실감케 하는군요.
좌석 번호도 확인하지 않은 채 ‘열차카페’ 칸에 오릅니다.
첫손님입니다. 넓은 창가에 앉아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막 재죽을 떼는 열차를 온몸으로 만끽해 봅니다. 열차를 통째 빌린 기분입니다.
구포역에 내리니 많은 사람들이 열차를 타기 위해 몰려있군요. 그들이 떠난 자리에 이제는 내가 머물 것입니다.
역을 나서자마자 ‘황금당’ 붉은 간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한국 지방 금융기관의 선구라고 할 수 있는 ‘구포저축주식회사’(1908년 설립)가 있던 자리입니다. 금융기관이 있었다는 것은 당시 이곳 구포가 상당한 중요지였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이곳은 바로 하단포와 부산으로 수송되는 물산의 집산지였답니다.
따라서 구포는 일찍부터 각 지방의 상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상인들이 몰려들다보니 자연적으로 객주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때문에 금융기관의 설립이 절실했겠지요. 이에, 당시 대지주였던 장우석과 윤상은이 중심이 되어 지역의 물산 객주와 지주 70여명이 합자하여 ‘구포저축주식회사’를 창립하게 되었답니다. 이 회사는 예금 및 대금업, 어음할인업 등 근대의 은행 업무와 별 차가 없는 금융기관의 형태였답니다. 바로 1912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지방은행인 ‘구포은행’의 모태가 되지요.
‘황금당’ 붉은 간판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최초의 민족계 지방은행 ‘구포은행’의 터를 씁쓸히 바라보다 길을 재촉합니다.
‘만세거리’입니다.
‘만세거리’는 구포역 앞 골목길에서부터 구포시장에 이르는 길로써, 1919년 3월 29일 거행된 일제 항거 운동의 거리를 말합니다.
그날 구포 장터에서는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장꾼 1,200여명과 더불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장날(음력 2월28일)에 맞춰 거사를 단행한 것이지요.
거사를 주동한 청년들은 장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이에 장꾼들도 함께 뜻을 모아 목이 터지도록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시장에서 발발한 시위대는 현재 구포역 방향으로 이동하며 항거했는데, 그때 시위 주동자들이 끌려가고,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투석 시위를 또다시 벌이다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합니다.
북구청에서는 지난 1999년, 3·1운동 80주년 기념으로 ‘구포 만세운동’ 을 재현하는 행사를 거행하였는데, 이후 연중행사로 자리를 잡으면서 매년 3월 말경 토요일이면 구포시장에서 출정식을 갖고 구포역까지 거리행진을 하며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답니다.
그날을 상상하며 만세거리 안으로 들어섭니다.
오래된 건물들이 줄지어 있군요. 미처 떼지도 않은 낡은 간판들도 보입니다.‘귀부인의상실’,‘시대세탁소’,‘제일전당포’등,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거리입니다. 때마침 곁을 지나는 기차 소리에 온 몸이 타임머신 속으로 빨려드는 듯 혼미해집니다.
간판도 없이 ‘이발 5,000원’이라는 문구만 적혀있는 반쯤 열린 이발소 문을 통해 안쪽을 흘낏 훔쳐봅니다. 영업을 하기는 하는가 싶었는데 손님이 만원입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들여다보니 한눈에 봐도 시설이 요즘과는 사뭇 다릅니다.
일제시대 때부터 있었다는 이곳은 처음에 일본인이 영업을 하다 해방 후 두고 간 것을 지금의 주인이 받아서 영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철통처럼 묵직한 이발의자가 첫눈에 들어옵니다. 요즘처럼 높낮이가 조절되지 않는 의자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오면 의자 팔걸이에 나무판때기를 걸쳐놓고 그 위에 아이를 앉혀서 머리를 깎았지요.
어린시절에는 그 높이가 왜 그렇게나 높게 보였는지, 머리를 깎는 내내 울부짖던 아이들이 참 많았습니다.
순간 의자에 앉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빈 의자가 없군요.. 더군다나 기다리는 손님도 네댓 분 계십니다. 대부분이 수십 년 단골이라 합니다. 잊고 지내온 정겨운 풍경입니다.
굴다리를 지나 구포시장 쪽으로 가다보니 골목입구에 아무렇게나 대충 쓴 국수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구포국수 2,500원-골목 안’. 숫자 ‘5’ 뒤편으로 지워진 숫자 ‘0’의 잔흔이 뚜렷합니다. 불과 얼마 전에 가격을 올린 모양입니다. 그래도 참 고마운 가격이지요.
골목을 따라 들어가니 간판은 보이지 않고 마당 넓은 집이 있습니다. 입구서부터 널부러져 있는 야외용 테이블에 손님들이 참 많군요. 이어 물을 것도 없이 물국수 한 그릇이 나옵니다. 알고 보니 메뉴는 오직 ‘물국수’뿐이라고 하네요.
국수하면 구포국수가 유명하지요. 일제 말기부터 구포에는 제면업이 발달하여 국수공장이 두어 곳 있었다 하네요. 급하게 끓여 먹을 수 있는 장점과 값싸고 푸짐한 양 때문에 전시(戰時)식품으로 일본 군대에도 납품할 정도였다 합니다.
더군다나 구포시장은 강물이 드나드는 저습지여서, 국수를 말리면 습기가 올라와 면이 쉽게 끊어지지 않고 면발이 쫄깃해 더욱 인기가 높았다 합니다.
광복 후 구포시장 변두리에는 소규모 공장이 더 들어서면서 그 명성은 더 높아졌다는군요. 게다가 6.25전쟁 발발로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수요는 더욱 늘어났다 합니다. 때문에 미군 부대서 나온 빈 박스에 국수를 채워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많았답니다. 구포역에는 아침이면 박스를 인 이삼십 명의 아주머니들이 인근 지방으로 국수를 팔러가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합니다.
골목길을 빠져나와 시장통으로 들어서니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때마침 장날인 게지요. 재래시장과 닷새장이 공존하는 구포시장은 단일장으로도 전국에서 손꼽히는 규모인데, 3일과 8일 장이 서는 날이면 주변에 교통 체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감동장이라 불렀다는군요. 감동장은 조선시대 때부터 번창하였으나 한때 사라질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답니다.
순조 9년(1809년)에 동래부에서 감동장(甘同場)을 산성 입구인 대천촌(현, 화명동 와석마을)으로 옮겨 달라고 중앙에 건의하였다는군요. 당시 동래부가 양산군(당시 구포는 양산군에 속해 있었음)보다 세력이 강하였기 때문에 장터가 옮겨질 지경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이에 양산군수가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려, 구포의 감동장은 낙동강 연안의 물자를 집산하는 곳으로 교류상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만약 대천으로 장을 옮기더라도 감동장은 없앨 수 없음을 건의하여 현재까지 그 맥을 이을 수 있었다 합니다.
그 뒤 대천촌에도 장이 들어섰는데 그 일면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당시 대천촌에는 소금 장사를 하여 부자가 된 천(千)씨 성을 가진 국부(國富)가 살았는데, 얼마나 큰 부자였던지 그에게 딸린 식솔만으로도 마을을 이룰 정도였다 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천국부는 소금배를 타고 장사를 다니면서 가짜 엽전을 싸게 사들였는데, 그것을 배 밑에 깔아 가마니를 덮어놓고 소금물을 퍼부어 엽전에 녹이 쓸어 진짜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만들어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 부자가 된 천씨는 큰 집을 짓게 되는데 그의 아들이 100간짜리 집을 고집하여 크게 짓다가 미처 완성도 못하고 역적으로 몰려 패가망신했다고 전해옵니다.
아무튼 당시 천국부는 감동장의 이전이 무산되자 그의 재력으로 시장을 형성하였는데‘장터걸’이라 전해져 옵니다.
강가에 형성되었던 감동장은 1930년대 강변에 제방을 쌓으면서 주위 환경의 변화로 현재의 장터로 옮겨지게 되었답니다. 함석지붕을 한 목조(木造) 건물과 노점이 들어서면서 매일 장이 열리게 되었는데 3일과 8일에 열리던 오일장도 계속 유지하였다고 합니다.
오일장에는 쇠전(牛市場)과 나무전이 유명했다 합니다. 쇠전은 이후 대리둑 너머로 옮겨 갔다가 1970년대에 없어졌고 나무전 또한 무연탄이 나오면서 사라졌는데 구포장의 명물이었답니다.
1980년대부터는 약초상(藥草商)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약초시장이 형성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또한 우시장은 사라졌지만 80년대 이후 보양식과 관련된 대형 가축시장이 들어섰는데, 보통 시골장에서 볼 수 있는 닭, 오리 등은 물론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개, 고양이, 토끼, 염소 등 몸에 좋다고 소문난 것은 다 있습니다. 특히 개고기가 유명세을 타면서 일명‘개다리 골목’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골목 입구부터 코끝을 스치는 향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육고기 특유의 냄새와 하근내가 속을 비리게 합니다.
걸음을 재촉하여 조금 빠르게 골목을 빠져나옵니다.
가축시장의 도로 건너편에 옛 객주의 장국 맛을 볼 수 있는 식당이 있다기에 물어물어 갔습니다.
덕천고가!
입구의 현수막 문구부터 시선을 끕니다.
“애비야~몸 챙기라! 속이 풀리야 일이 잘 풀린데이”
요즘 같은 불경기에 딱 어울리는 말입니다.
이 식당의 장국 맛은 당시 객주 중 하나였던 덕천객주에서 비롯되었다 합니다. 덕천객주에는 김해와 양산 일대의 보부상들, 거간꾼, 목도꾼, 뱃사람 등 수십 명의 식솔들이 들락거렸는데, 이들을 위해 끓이던 국밥이 영남 제일이라는 평을 받았답니다. 그 맛을 이어받아 탄생한 것이 덕천고가 장국이라는군요.
덕천고가의 장국밥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돼지를 가마솥에 넣고 하룻밤 하루 낮을 고아 뻑뻑하게 골수가 빠져나온 곰국인 ‘진땡(眞湯)’과, 그 진땡에다 조선된장을 풀고 우거지, 부추, 고추, 마늘, 파 등을 넣어 끓인 ‘장국’입니다. 국물이 정말 진하고 고소합니다.
이래저래 돌다보니 하루가 다 갔군요. 때마침 전화 한 통이 왔습니다. W 시인입니다. 오늘 하루 일과를 간단히 전했더니 퇴근길이니 기다리랍니다. 술 한 잔 생각이 나는 모양입니다.
30분도 채 되기 전 W 시인이 왔습니다. 중간에 연락에 닿았다며 J 평론가도 함께 왔습니다. 두 사람을 따라 시장 옆 골목길을 접어들었습니다. ‘꼬리집’골목이랍니다. 웬 꼬리! 소꼬리라면 가격도 만만찮을 텐데 생각이 드는 순간 돼지꼬리라고 귀띔을 합니다. 꼬리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을 함께 나오는데 11,000원이라네요. 족히 네댓 명은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곁들여 나오는 채소도 한 소쿠리 가득이군요. 김치도 가득, 쌈장도 가득, 게다가 먹다 모자라면 또 준답니다. 아들네가 우유대리점을 한다며 야쿠르트까지 덤으로 내놓습니다.
보름이 가까웠는지 둥근 달도 한아름입니다.
‘구포장타령’의 흥이 절로 전해오는 밤입니다.
샛바람 반지 하단(下端)장 엉덩이가 시러버(워)서 못 보고
골목골목 부산(釜山)장 질(길) 못 찾아 못 보고
나리(루) 건너 맹호(鳴湖-명지)장 선개(船價)-뱃삯) 없어 못 보고
벌판같은 김해(金海)장 여빗돈이 없어 못 보고
강건너 떡돌(德斗)장 나릿(룻)배가 없어 못 보고
꾸벅꾸벅 구포(龜浦)장 허리가 아파 못 보고
고개 너머 동래(東萊)장 다리가 아파 못 보고
미지기 짠다 밀양(密陽)장 싸게를 묵(먹)어서 못 보고
아가라 크다 대구(大邱)장 너무 넓어서 못 보고
이산 저산 양산(梁山)장 산이 가리어서 못 보고
울루루 갔다 울산(蔚山)장 하도 바빠 못 보고
언제 볼까 언양(彦陽)장 어정어정 못 보고
남실남실 남창(南昌)장 물이 짚(깊)어서 못 보고
들락날락 입실(入室)장 문이 닫혀 못보고
코 풀었다 흥해(興海)장 미끄럽어서(러워서) 못 보고
똥 샀다 구례(求禮)장 구린내가 나서 못 보고
깎아 말린 감포(甘浦)장 딱딱해서 못 보고
이리저리 못 보고 장꾼 신세가 말 아니네
이장 저장 못 보고 장타령만 하는구나
품 - 품 - 각설아
이장 저장 다 다녀도 우리 구포장이 제일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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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고] 대천장도 아직 살아입답니다.. 금곡동 화명리버빌 아파트옆 공터에서 2,7 장으로 열리고 있습니다.
장터를 좋아하는데 어디든 날짜 맞으면 한번 가볼 요량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