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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10:1-5> 나무궤의 영적 의미, 법궤, 증거궤,언약궤와 속죄소를 통하여 보여준 하나님의 자비, 사랑, 은혜,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
1. 말씀의 배경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이 기록된 증거판 두 둘판을 받았습니다 (출 31:18), 이 돌판은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으며 대표적인 율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사이에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보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목전에서 그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 버립니다. (출 32:19). 이것은 두 돌판에 기록된 언약을 깨뜨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날 계약서를 찢은 것과 같습니다.
[신명기 9:17] 내가 그 두 돌판을 내 두 손으로 들어 던져 너희의 목전에서 깨뜨렸노라
오늘 전하고자 하는 말씀은 아니지만 인간들이 그렇게 짧은 기간에 하나님 말씀을 떠나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모습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죄성이 강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셔서 주신 두 돌판을 깨뜨린 모세를 하나님께서 책망을 해야 하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돌판 둘을 처음과 같이 다듬어 시내산으로 올라오라 하셨습니다 (출 34:1-4, 신 10:1). 깨뜨려진 언약을 다시 세우자 하는 것입니다. 찢어버린 계약서를 다시 쓰는 것과 같습니다.
[신명기 10: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출애굽기 34: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 곧 내가 아직 온 땅 아무 국민에게도 행하지 아니한 이적을 너희 전체 백성 앞에 행할 것이라 네가 머무는 나라 백성이 다 여호와의 행하심을 보리니 내가 너를 위하여 행할 일이 두려운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을 다시 세우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는데 출 34:6절 말씀입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처음의 두 돌판을 깨뜨렸기 때문에 다시 언약을 세우시면서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마음이 없다면 피로 맺은 언약 (출 24:6-8)을 지키지 않은 그들은 다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언약을 주시면서 새롭게 시작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비와 은혜, 인자한 마음으로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사랑이 더 구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드러난 말씀이 오늘 중점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나무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두 번째로 두 돌판을 준비하라고 하셨을 때 특별히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하시는 것입니다 (신 10:1-3)
나무궤는 조각목, 싯딤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무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나무궤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궤, 법궤, 언약궤, 증거궤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인용되는 말씀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다 같은 것입니다.
2. 왜 하나님께서는 나무궤를 만들어 그 안에 두 돌판을 넣으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으시면 하나님의 마음과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말씀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출 34:6)
▶ 먼저 이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모세가 두 돌판을 던져버린 이유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께서 친히 손가락으로 기록하신 첫 번째 두 돌판을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던져 버린 이유는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두 돌판에 기록된 십계명의 내용 그대로 적용을 받는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죽기 때문입니다.
두 돌판, 곧 율법에 기록된대로 공의로운 심판이 이루어진다면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절하고 섬긴 그들은 십계명의 1,2계명을 어긴 것이 되어 죽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두 돌판을 던져 깨뜨리므로 두 돌판에 기록된 율법이 적용되지 않게 한 것입니다. 두 돌판을 깨뜨리심으로 출 24장에서 언약서를 낭독하고 피를 뿌려 세운 첫째의 언약을 깨뜨린 것입니다. 율법의 조문을 없앤 형국이 된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과 같이 계약서를 찢어 없앤 것입니다.
두 돌판이 그대로 하나님 앞에 있었다면 그 율법대로 심판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 이런 유사한 원리가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종말에 있을 심판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보면, 심판이 유보되는 것은 심판의 내용이 기록된 두루마리 등이 인봉되거나 봉함된 경우입니다. 반대로 인봉되거나 봉함된 것이 열려질 때에는 심판이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12:4절을 보면,
[다니엘 12: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간수하고 봉함하는 이유는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 10:14] 이제 내가 마지막 날에 네 백성이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이는 이 환상이 오랜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오랜 후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종말의 때가 되었으므로 심판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인봉된 두루마리의 인이 떼어지고 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2] 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요한계시록 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임박한 심판이 있을 때에는 심판의 내용이 기록된 두루마리가 인봉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모세가 두 돌판을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깨어야 하는 것, 다니엘을 통하여 주신 심판의 예언이 오랜 후의 일이기 때문에 간수하고 봉함해야 하는 것, 종말에는 요한에게 알게 하신 심판의 예언이 시작되어야 하기에 심판의 두루마리가 인봉되지 않아야 하는 것 등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두 돌판을 나무궤 안에 넣으라는 영적 의미는 율법을 나무궤 안에 감추어 놓으시고 덮어 놓으심으로 심판에 대한 유보 또는 즉각적으로 율법대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임이 분명합니다.
▶ 그러므로 지켜야 사는 율법인 두 돌판을 나무궤에 넣으라는 것은 마치 심판의 두루마리를 인봉하는 것과 같고 심판의 예언의 말씀을 봉함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깨뜨린 두 돌판과 또 다른 차원인 것입니다. 분명히 율법은 있지만 덮혀져 있는 것입니다. 봄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무궤 위에 속죄소가 또 덮개처럼 덮힙니다. 그렇다면 나무궤와 속죄소의 모습을 보면서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율법을 감추고 봉인하고 덮어서 심판을 즉각적으로 행하지 아니라고 유보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왜, 하나님께서 새롭게 언약을 체결하시면서 나무궤를 준비하라고 하시고 자신을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소개하는 이유를 알 것입니다.
[출애굽기 25: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출애굽기 40:20] 그는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
“궤 속에 넣으라, 궤 속에 넣고”, 그리고 “속죄소를 궤 위에 두고“는 우리를 살리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증표입니다. 나무궤와 속죄소는 눈에 보이는 사랑의 모습인 것입니다.
▶ 두 돌판이 들어 있는 금으로 덮힌 나무궤와 나무궤를 덮고 있는 금으로 덮힌 속죄소는 또 다른 더 깊은 영적 의미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무궤는 동서남북 사방이 다 막혀 있습니다. 그리고 땅으로도 막혀 있습니다.
이것은 땅이나 땅 아래 그 누구도 무엇도 율법대로 심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 막혀 율법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나무궤 위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속죄소를 들어낼 때에 그 안에 율법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심판자는 유일하게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입법자와 재판관은 하나님이라도 단언하고 있습니다 (야 4:12).
인간은 재판관이 아니기 때문에 속죄소를 들어내고 그 안을 들여다 보는 자는 다 죽습니다. 그리고 그가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대로 정죄를 당하여 죽게 되는 것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그런 화를 당했습니다.
[사무엘상 6: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그래서 죄인인 인간들은 아무나 지성소 안에도 들어갈 수 없고 아무나 법궤를 만져도 안됩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대제사장 만이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도 땅과 사방 그리고 위로는 속죄소가 덮혀 있기 때문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0:6] 그 제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속죄소가 덮혀 있지 않고 율법이 휀히 드러나 보인다면 우리들은 그 율법대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모세도 그 누구도 속죄소로 나무궤가 덮혀 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향로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향연을 피워 속죄소를 가려야 살 수 있습니다.
[레 16:13]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2)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며
→ 가리는 것은 이 모두가 살려주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참으로 나무궤와 속죄소를 통하여 우리들은 다시한번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 속죄소를 시은좌라고 부릅니다. 은혜를 베푸시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 나무궤와 속죄소가 금으로 입혀진 것도 큰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나무궤는 조각목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출 25:10)
이 나무는 광야에서 자생하는 아카시아 계통의 싯딤나무로 알려져 있습니다.
단순히 나무 상자입니다.
(히, 키보토스, 마 24:38, 눅 17:27절의 노아의 방주와 같은 단어)
그런데 금으로 입혀 있습니다 (출 25:10) 그리고 그 위에 덮힌 속죄소도 순금입혀져 있는 구조입니다.
→ 나무궤와 속죄소를 금으로 입힌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금은 불변성, 영원성을 나타냅니다.
금이 변하지 않듯이 종말의 그날까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 은혜, 인자와 진실을 베풀어 노하기를 더디하겠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마음이 깨달아지지 않습니까? 마치 잘못하고 있는 자식을 대하는 부모님의 마음과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이런 마음 때문에 지금까지 심판을 당하지 않고 인류가 온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속죄소는 나무궤와 일체가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덮개는 언제든지 열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아무나 심판을 할 수 없지만 속죄소 위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 요한 계시록에서 마지막 심판인 일곱 대접 심판이 시작되는 일곱 째 천사에 의한 마지막 나팔이 불어질 때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번개와 음성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1: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번개와 음성과 우레와 지진은 심판을 뜻하고 언약궤가 보이는 것은 그 법대로 말씀대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오래 동안 우리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심판을 유보하시고 죄를 덮으시고 인내하시고 기다리시지만 속죄소의 두껑이 열리는 때가 있는데 인간들의 죄가 가득찰 때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그랬으며, 노아의 시대에도 그랬으며, 가나안 일곱 족속도 그랬습니다. 종말에도 그렇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죄소가 열리게 되는 이유는 인간들의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주어지는 심판의 유보를 거두어 가게 하는 것입니다. 나무궤의 덮개인 속죄소를 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안전장치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지성소와 속죄소를 정결하게 하는 피 뿌림입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씩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사장들을 위하여 속죄소 동쪽, 속죄소 앞과 그 위에 죄 사함의 피를 뿌리게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6:14]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쪽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레위기 16:15]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속죄의 피를 뿌리게 함으로 죄로 인하여 속죄소 두껑이 열리는 것을 막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겹겹이 사랑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3. 나무궤 안에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가 있다는 히브리서의 말씀은 지금까지 전한 말씀의 영적 의미와는 맞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9:4]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히브리서에서는 언약궤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언약의 돌판들과 함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속죄소로 덮힌 구조가 됩니다. 그들이 나무궤 안에 들어가야할 이유가 있을까요?
출애굽기에서는 분명히 만나와 지팡이는 여호와 앞에 (출 16:33), 증거판 앞에 (출 16:34)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무궤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출 16:33]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34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앞에”는 얼굴이라는 뜻의 “파님”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 안이라는 뜻과는 다릅니다. 언약궤 안은 하나님의 얼굴 앞이 될 수 없고 율법이 감추어진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속죄소 위에 임재하신다고 하셨으므로 앞 (파님)은 나무궤 앞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왕상 8:9, 대하 5:10절에서도 언약궤 안에는 두 돌판 밖에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상 8:9]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역대하 5:10]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그들과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그러면 히브리서가 맞는 것입니까? 왕상, 역대하 기록 내용이 맞습니까? 어떤 것이 맞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도 분분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의미를 깨달으면 나무궤 안에는 두 돌판만이 들어가 있어야 맞는 것입니다.
법궤 안에 만나를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감추어져 있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도록 드러나야 하고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필요할 때 모세가 만나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기록은 유대 랍비들의 전승에 따른 것으로 분명합니다 (그랜서 주석, 옥스퍼드 주석)
원래는 그 안에 있었는데 전쟁 등으로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 안에 있어도 꺼집어 낼 수도 없습니다. 보는 자는 다 죽기 때문입니다.
깊은 영적인 의미를 깨닫게 되면 법궤 안에 말씀만이 들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오늘날 나무궤 안에 두 돌판이 있고 속죄소가 그 위에 덮개처럼 덮혀 있는 것은 예수님과 무슨 관계가 있나요?
구약에서는 법궤의 모습은 오늘날 율법이 그리스도와 그의 보혈로 덮혀져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레위기 16장을 보면, 대속죄일에 대사장이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소 동쪽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피를 뿌려 자기와 제사장들의 죄를 속죄하고, 또 염소의 피를 가지고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피를 일곱 번 뿌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게 합니다.
속죄소에 피를 뿌리는 것은 인류를 구원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속죄소”는 히브리어 “캅포레트”로서 원형이 “카파르” (덮다, 화해하다, 속죄하다, 역청으로 칠하다) 이며 “화해하는 것, 속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속죄소는 율법으로부터 우리들을 해방하는 완벽한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부려진 피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인 것입니다.
율법이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피로 덮혀짐으로 인하여 우리들이 생명의 법 안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의 잣대로는 우리는 다 죽습니다. 이게 사망의 법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사는 법이 생명의 법인 것입니다.
[로마서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자세히 보면, 율법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 로 덮혀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종말에 율법대로 심판을 해야 하므로 율법이 폐하여진 것이 아닙니다 (마 5:17,갈 3:17).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은 구약의 말씀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잣대로 자신을 돌라보고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날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피흘림의 사랑 안으로 나아와야 함을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종말을 앞 당기는 속죄소가 열리지 않도록 말입니다.
언약궤를 주신 하나님, 그 위에 속죄소를 주신 하나님, 그리고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덮어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이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깊이 깨달아지길 바랍니다. 지금은 구약에 있었던 나무궤도 없고 속죄소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음을 기억해야 하시고 (계 11:19) 우리들의 방주가 되는 금으로 입혀진 나무궤와 속죄소의 사랑을 간직하며 살아가시되 연약해서 여전히 넘어질 때에도 더 이상 사탄이 정죄하지 못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깨닫고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로마서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