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1:1-6>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모든 신령한 복 (구원)
1. <에베소서 개관>
에베소교회는 바울의 2,3차 전도여행시 세워진 교회로서 (행19장) 아데미여신 전이 있는 등 우상숭배가 심한 지역입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에서 1차 감옥에 있었을 때에 기록한 옥중서신입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에베소교회의 유대인, 이방인 신자들 간의 갈들을 해소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참교회의 모습을 가르치고 있는 서신입니다.
▶ 이 때는 초대교회가 탄생한지 고작 30년도 정도 지난 시기입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주인, 부자와 가난한 자, 남녀노소로 구성된 그동안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갈등이 많았겠어요! 아직 참교회가 무엇인지 정립되지 않은 시기에 이 서신은 참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 우리 대산교회가 이제 새롭게 교회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교회론에 대하여 말씀으로 전하게 하시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앞으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몇 번의 설교를 통하여 참교회가 무엇인지를 알아볼 것입니다. 그래서 대산교회가 하나님 기뻐하는 교회로 나아가는데, 방향을 잡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할 두가지는
▶ 첫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를 이루는 지체이기 때문에, 교회를 이루는 나와 너가 어떤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이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 둘째는, 교회를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역사의 틀 속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갑자기 누군가가 만들자고 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역사 곧 구속의 역사속에서 계획되어지고 예정되어져 지금가지 존재해 온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역사속에서 교회는 벌써 핍박으로 없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이미 계획하셨고 그 이후에도 교회를 보호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시고 시작과 종말 사이에 있는 지금 중간 구속사 기간에도 성령 하나님을 보내셔서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대단합니다.
2. <인사> 1-2절
대부분의 바울 서신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변증이기도 하며, 자신의 서신 내용이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기록되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사 내용에서 “은혜와 평강”을 비는 것은 “은혜”는 헬라인들의 인사법이요 “평강”은 유대인들의 인사법이므로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동시에 고려한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축도”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3. <성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3-6절
1) 3절에, 찬송하리로다 (율로게토스) 이 단어는 신약에서는 하나님에게만 사용되었습니다. 찬송 받으실 분은 유일하게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바울처럼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더구나 6절, 14절에 보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도 구원을 주신 하나님을 감격으로 찬송하고 있습니다.
[벧전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시편 67편 저자는 모든 민족이 주를 찬송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시 67:3]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계시록에 보면 하늘에 있는 모든 천사들도, 이십사 장로들도, 모든 피조물들도 하늘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계 5: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계 19: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작은 자나 큰 자나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 모든 피조물까지도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하물며, 구원 받은 우리들은 감격하며 찬송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교회와 연관 지어서 구원 받은 백성들의 모임이 교회이라면, 교회의 본질은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찬송은 기도요 예배입니다.
찬송소리가 끊이지 않는 교회가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죽은 교회는 찬송가 기도가 끊어진 교회라고 보면 됩니다. 교회가 썰렁합니다. 주일에 한번 문을 엽니다. 전 개인적으로 우리교회가 365일 24시간 개방되고 북적되었으면 좋겠어요! 찬송을 위하여 기도를 위하여 선교를 위하여 그룹별로 자꾸 모였으면 좋겠어요! 그게 살아 있는 교회가 아닐까요?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셨고 그리스도이십니다.
주 예수는 인성, 그리스도는 신성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주”가 아닙니다. 당시 로마 황제에게 “OUR LORD, 우리 주 (퀴리오스)” 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거부입니다.
3) 3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주시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4-5절을 보니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주신 “구원의 복”을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 = 복
원어를 본다면, “파세 율로기아 프뉴마티케”인데, 모든 + 좋은 + 말 + 영적인 것의 합성어입니다. “모든 영적인 축복”의 의미가 있습니다
* 파세 - 모든 신령한 영적인 복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영적인 복 안에 다른 복도 다 들어 있습니다.
* 율로기아 - 좋은 말을 해 주는 것 (축복, benediction) , 하나님께서 로고스의 좋은 말로 축복해 주시면 복이 주어지고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로고스는 창조의 말씀입니다. 영원한 말씀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말씀입니다.
* 프뉴마티케 - 하늘에 속한 영적인 것, 육의 복을 말하지 않고 영적인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참 복입니다. 구원 안에 모든 복이 다 있습니다.
▶ 구원의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상이나 다른 것들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들에게 밤새도록 빌어도 구원도 다른 복도 주지 못합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말도 못합니다. 화나 복을 주지 못합니다.
[시 135:15]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렘 10:5] 그것이 둥근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 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메어야 하느니라 그것이 그들에게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우상에게 절하고 빌면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귀신이 그를 잠시속일 수 잇지만, 궁극적으로 도둑질하고 멸망시키기 위한 술책입니다.
▶ 하나님께서 구원의 복을 주시는 영역이 “예수 안”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구원을 받고 싶으면 예수 안에 있으면 됩니다. 성경은 복의 영역이 분명이 정해져 있습니다. 복이 주어지는 영역 안에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비가 오는 지역에 있으면 비를 맞는 것처럼 그 안에 있으면 그저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햇빛이 비치는 곳에 있으면 햇빛을 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3) 4절에, 우리의 구원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것입니다.
▶ 구원론에 있어서 칼빈을 따르는 장로교와 웨슬리를 따르는 감리교, 성결교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차이입니다. 모두 성경을 근거로 한 주장이므로 일방적으로 누구는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이런 교리들은 그 시대가 강조 할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산물임에도 유념해야 합니다. 칼빈 시대에서는 예정론이 필요했고, 웨슬리 시대에는 전도를 위하여 선행은총론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주장을 받아 들여도 지옥 가는 것 아닙니다. 잠시 비교해보면,
<칼빈의 주장>
▶ 칼빈은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로는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구원을 얻는데, 구원을 얻을 자와 얻지 못할 자가 이미 창세전에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중 예정이라 합니다. 선택받지 못한 자도 죄인이기 때문에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지 않더라도 불공평하지 않고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롬 9:18-21]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19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구원을 받을 자는 그 은혜를 거부할 수 없고 결국에는 구원을 얻는 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는다는 것입니다.
[행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순전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속격, 여격, 수동태)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서만도 은혜(2절), 은혜의 영광(6절), 은혜의 풍성함(7절)을 계속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웨슬리의 주장>
▶ 이에 비하여 웨슬리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구원의 문은 열려 있는데, 그가 구원을 받고 받지 않는 것은 그의 자유의지에 따라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가는 것은 자기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창세전에 예정된 것도 그가 믿을 것을 하나님은 미리 알기에 선택했다는 예지 예정론을 주장합니다.
▶ 웨슬리는 은혜를 똑 같이 주었는데, 불순종하는 인간도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전도하는 자와 복음을 듣는자 모두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셨고 마음을 두드렸는데, 그들이 자유의지로 누구 하나라도 순종하지 않고 거부했다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은 성령의 감동을 주셨는데, 모두다 순종하고 사십니까? 순종하지 못한 것이 많지 않습니까?. 물론 칼빈의 입장에서 본다면, 거부하고 받아들이고 하는 것도 이미 정해졌다고 합니다.
▶ 우리 인간들 앞에는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가 선택하도록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을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사망을 선택하여 많은 아픔을 겪습니다.
[신 30: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반대로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생명을 택하면 산다고 하시는 것이 또 성경의 기록입니다.
[렘 18:8]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겔 33:18]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죄악을 범하면 그가 그 가운데에서 죽을 것이고
▶ 또 성경에 보면, 한번 은혜 구원을 맛보고 타락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인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떠난 자가 있다고 하였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히 6: 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딤전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 이렇게 보면, 자유의지가 인간에게서 어느정도 발동되고 있음을 봅니다.
자유의지를 무시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요? 죄가 아직 없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들이 범죄할 것을 알고 계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칼빈의 주장대로라면 그는 타락하도록 이미 예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죄를 범했으니,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를 방조하는 모습이 되고 타락할 인간을 동산에 만들어 놓으신 것이 됩니다. 그 책임을 그들에게 묻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의지에 의해서 죄를 범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 세례요한과 예수님께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은 그들이 이 복음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구원 받을 자가 이미 정해졌다면, 굳이 회개하라고 외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로보트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계시록은 “누구든지”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 16:15]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웨슬레는 인간이 타락은 했지만 우리들에게 “선행은총”을 주셔서 인간이 자유의지로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형상이 조금 남아 있다고 봅니다. 가령 선을 향하는 모습과 신을 찾고자 하는 모습 (종교심, 행 17:22), 영원을 사모하는 모습 (전 3:11), 비록 많이 오염되었지만 선을 향하고자 하는 양심은 은 하나님의 형상이 조금 남아 있는 모습입니다.
[시 16: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롬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그래서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형상이 생명을 택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 칼빈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는 문제가 생기고, 전도를 해야 하는 당위성이 떨어집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다가 보니 인간의 자유의지가 무시된 측면이 있습니다.
웨슬리의 주장을 100% 받아 들이면, 하나님의 은혜가 경시되고 인간의 의지가 강조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4) 두 주장을 어떻게 조합하고 조정할 수 있을까요?
믿음이 자라고 은혜를 체험한 자는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구원을 받은 것이 마치 자기 의지로 무엇을 해서 한 것 같지만 돌아보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마치 자라는 아이가 있는데, 부모가 뒤에서 거의 다 슬쩍 슬쩍 해주면서 아이가 조금 한 것을 보고 잘한다 잘한다 하고 마치 아이가 다 한 것처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처음에는 마치 자기가 다 한 것 같이 알고 있지만, 어른이 되고 보면, 부모님이 도와서 다 한 것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 또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은 항상 현재”로 살고 계십니다. 인간들은 짧은 인생을 살기에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지만, 전지전능하시고 시간 공간을 초월하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항상 현재만 있습니다.
하나님은 칼빈의 주장처럼 누가 복음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를 창세전에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창세전에 어떤 인간이 자유의지로 복음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미리 알고 계시므로 얼마든지 창세전에 예정과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예지예정론, 인간의 입장에서 창세전입니다)
▶ 복음이 인간 앞에 제시되어 졌을 때, 그들의 자유의지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자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선택한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처음에는 자유의지의 비중이 높았는데, 나중에 믿음이 깊어지고 은혜가 많이 체험될수록 은혜가 더 크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5) 바울의 주장대로 예정은 창세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4절에, 창세전에 택했다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곧 인간이 만들어지기 전에 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요 1:1, 태초에 (아르케)와 같은 의미입니다. 세상도 만들기 전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신 것이죠.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미 구원의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구원 받를 자를 미리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계 13: 8, 17:8절에, 창세 이후로 그 이름에 생명록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다 짐승에게 경배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 우리에게 이런 구원의 계획을 창세전에 세우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더구나 유대인이 아니므로 조금도 구원의 가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창 3:15절에도 인간이 죄를 짓자마자 벌써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세우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시복음).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우리를 이렇게 창세전에 택하신 이유는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거룩하지 않고 흠이 있는 것은 죄의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거룩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엡 2:1에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셧도다” 했습니다. 허물과 죄를 해결해주기 위하여 택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 다음 단계인 점진적인 성화는 구원 받은 후에 더 거룩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거룩함과 흠이 없게 하는 것은 영과 혼과 육의 거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영과 혼과 육이 온전히 구속함을 받는 것입니다.
[살전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6) 5절에서는, 우리를 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9) 구원을 위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영혼의 구원에도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집 나간 탕자의 비유나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렘 50:6] 내 백성은 잃어 버린 양 떼로다 그 목자들이 그들을 곁길로 가게 하여 산으로 돌이키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산에서 언덕으로 돌아다니며 쉴 곳을 잊었도다
[눅 15:4-7]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구원의 목적은 “자기 아들”이 되게 하여 예수님 안에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6, 14)
여기서 아들은 양자를 뜻합니다. 당시 헬라법으로는 양자가 되면 그 양부의 모든 재산과 소유를 상속 받을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를 상속 받습니다. 하늘의 축복과 권세를 받습니다.
[계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여기서 이것들은 새하늘과 새땅, 새 예루살렘 성, 생명수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 땅에서 상속 받을 것이 별로 없는 저희들로서는 하늘의 것을 기대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소결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백성은 교회의 지체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지체를 만들어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요 사랑의 결과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교회의 지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알아 지체를 귀히 여기는 우리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참고자료 : <칼빈주의 (TULIP) VS. 알미니안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