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자아도취 하셨네, 동지분들을 눈 아래로 보는 듯하고
처음 읽을때는 흥미진진하더니 읽을수록 기분이 나빠지네.
글 군데군데 "남한" 이란 표현도 눈에 거슬리고, 고생은 많이
하셨는데 스스로 활동가-혁명가? 로서의 자기만족 때문이었다는
느낌이 드네요.
우리는 민노당의 똘마니가 아닙니다. 도와주신건 고맙지만,
정치세력의 이용, 내지는 도구화를 거부합니다.
어떤 이권도 개입되머선 안됩니다. 철저한 비영리단체로서
오직 조합원의 권익에만 나서야 합니다.
투쟁후 얻은건 "화 물 연 대" 이름넉자 알린것뿐 앞으로 갈 길이
멀어요.
먼저 수배해제 부터, ...
::::::::::::::::::::::::::::::::::::::::::::::
[화물연대 파업투쟁 8일간의 기억]의 작성자 소한님의 답글
화물연대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입니다.
경인츄레라님의 충고와 비판 겸허히 받아 들이겠습니다.
혹시나 제가 사용한 문구나 문투 또는 글의 서술방식으로 인해 화물노동자들의 마음이 불편하시거나 상처를 입으셨다면, 그건 전적으로 글을 적은 제 잘못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번 투쟁의 기록들을 정리하면서 자아도취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면서 그런점이 없지않았다는 생각에 다시한번 반성합니다.
하지만, 화물연대가 민주노동당의 똘마니로 도구화하거나 이용할려는 생각이나 의도는 절대 없으며, 단지 노동자투쟁 민중투쟁에 결합한 하나의 사례였다는 생각입니다.
아울러 조합원의 권익을 위해서는 투쟁을 기본으로 정치적 진출이나 활용도 반드시 필요한 측면이라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약간 견해의 차이가 있는듯 합니다.
동지의 충고 결코 서운하게 생각지는 않겠습니다.
만약 이후 이 글들과 화물연대 투쟁의 각 자료를 모아 출판(?) 할 기회가 된다면, 반드시 님이 충고하신 내용을 반영하여 문구와 어투의 수정 그리고 과다한 서술은 수정할 것입니다.
다시한번 동지의 충고 감사드립니다.
--------------------------------------
화물연대 파업투쟁 8일간의 기억 - 첫번째
이글을 쓰기 시작한 5월 19일 오후에 화물연대 지도부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몰아쳤다.
화물연대 포항지부장을 비롯한 간부 8명에 대한 긴급체포 영장이 발부되었고, 곧이어 2선 지도부들에 대한 전면조사와 함께 소환장을 발부시켜 놓고 있다.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던 정부의 약속은 거짓말이 되었다.
노무현 정권은 자신들과 화물노동자 간에 맺어진 협정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그것을 찢어버리고, 탄압의 칼날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화물연대 파업투쟁은 노무현 정권의 반노동자성, 반민중성이라는 본질을 완전히 드러내놓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위대한 투쟁이다.
노동자 민중의 입장을 벗어난 자유주의자가 외치는 개혁의 기치는 결국 민중의 가슴에 비수를 겨누는 예리한 탄압의 칼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증명된 셈이다..
"적어도 화물노동자는 안다! 노무현은 개혁의 탈을 쓴 반노동자적 자본가 정권이라는 사실을…"
88년 남한 노동자계급은 자신들이 세계 노동운동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수도 서울의 한복판 여의도에서 계급투쟁의 본격적인 서막을 열어 제끼고 있었다.
당시 처음으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의 그 장엄한 물결이 시내를 가로질러 모 대학 앞을 지나가고 있을 때 학교 담장 위에는 노학연대를 실천하던 학생 동지 몇 명이 노동운동사에 있어서 길이 기억될 명문구가 새겨진 글씨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남한 노동자 계급의 영웅적 투쟁 만세!
이곳을 지나던 모든 노동자는 그제서야 자신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장엄이라는 말 이외에 그 어떠한 단어로도 표현하기 힘든 순간을 우리는 21세기가 된 지금 아스라이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 넣으며 망각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2003년 5월 화물연대 총파업 투쟁을 경험하면서 15년을 훌쩍 넘은 지금 다시 한번 역사의 주인임을 상기시키면서 당당히 진군하고 있는 노동계급에게 그 문구를 돌려드리고자 한다.
남한 노동자 계급의 영웅적 투쟁 만세!
필자는 2003년 5월 물류총파업 투쟁의 진원지가 된 포항 화물연대 투쟁을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결합한 한사람으로서, 이제 우리 운동의 영웅으로 거듭난 화물연대 동지들의 투쟁을 부족한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로 옮겨 다른 동지들과 그 소중한 경험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글을 기술함에 있어 미진하거나 오해를 불러 일을 킬 소지가 있는 내용은 전적으로 필자에게 그 책임이 있으며, 혹시나 이 글로 인해 그 위대했던 5월의 투쟁에 조금이라도 누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아울러 필자는 교섭이 진행되는 곳이 아니라 조합원들이 모였던 현장에서 8일간 함께 했던 이유로 인해... 교섭과 관련되어 진행된 내용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않으며, 단지 생생한 현장의 역동성은 누구보다 풍부하게 경험했다는 것을 밝혀 두며, 때로는 시간별 기술 형식으로 때로는 소설형식으로 때로는 필자 개인의 감정에 치우친 무형식의 글로... 기록될 것임을 밝혀 둔다.
흔히 이야기하는 Behind story이며 화물사기가 아니라 화물유사로 기록될 것이다.
필자는 이글을 고 박상준 동지와 위대한 우리들의 영웅이자 새로운 전사로 거듭난 화물연대 동지들에게 바친다.
1. 세상이 이리도 좁을 수가… 아! 바로 당신이었군요!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꾼 화물연대 총파업 투쟁의 진원지였던 포항 화물연대 파업투쟁의 촉매제 역할을 했던 고 박상준(34세 4월 말 음독 자살) 동지의 죽음은 이번 투쟁 내내 우리들 뇌리와 혈관속을 떠돌아 다니며,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게 했던 동력이었다.
4월 27일 민주노총포항시협의회 간부의 가족 결혼식이 대구에서 있어서 포항시협의회 전 상근간부들이 결혼식에 참여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축구경기장에 들렀다가 저녁시간쯤 대구에서 포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안강 강교휴게소를 지날때쯤 휴대폰으로 날아온 소리 "아 예 여기 **병원인데요~ 급하게 농약 마신 환자가 있어서 그런데 지금 즉시 병원으로 와 주세요"
하필 필자의 아내가 그 병원 책임간호사 였습니다.
아내는 집에 도착한 즉시 병원으로 달려 갔고, 새벽 4시 30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그 환자(?)는 생명을 잃었다.
4월 28일 전국운송하역노조에서 급히 포항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전갈과 함께 화물연대 소속 노동자 한명이 자살을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화물노동자장으로 장례를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급히 동대병원 영안실로 가서 운송하역노조 간부들과 협의를 하라는 민주노총경북본부 본부장의 지침을 받아 필자가 영안실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절친했던 고교친구가 영안실에 서 있는 것이었다.
친구에게 물었더니 바로 돌아가신 박상준 동지가 친구의 손아래 동서라는 것이었다.
친구는 조용히 민주노총의 조기를 영안실 빈소 앞에 설치하고, 문상을 마친 필자에게 가족들을 소개시켜주었다.
가족(독실한 불교신자)들은 화물노동자장을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가족장으로 치를 것을 주장하였고, 결국 우리들은 가족들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일요일 혈액투석을 받았던 농약환자가 바로 박상준 동지였던 것이었다.
평소 안면이 있던 남편 친구의 동서가 바로 일요일 그 환자였다는 사실을 접한 나의 아내도 한동안 말을 잊지 못했다.
아 바로 당신이었군요! 박상준 동지!
그날 포항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비는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가슴을 서러움으로 다시한번 적시고 있었다.
2. 엄청난(?) 철벽보안! - 준비되지 않은 투쟁의 서막!
4월 30일 과천 상경투쟁과 메이데이 투쟁의 주인공은 단연, 화물연대 노동자들이었다.
그 주인공들의 대오 가장 선두에는 박상준 동지의 영정이 걸려 있었다.
메이데이 상경투쟁을 마치고 내려오던 포항지부 동지들은 버스안에서 전국적인 투쟁열기를 그대로 계승하여 5월 2일 파업투쟁에 돌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5월 2일 민주노총포항시협의회에서는 화물연대 포항지부에 연락을 해서 파업에 대한 문의를 했으나, 지부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간부들은 파업은 하지 않고 집회만 한다는 답변이었다.
각 언론사에서 문의를 해오면, 우리는 역시 그렇게 답변을 했다.
그런데 글쎄 이 아저씨들이 저거들끼리는 TRS(화물연대 조합원들이 가지고 있는 최신 무선통신전화기 겸 무전기) 로 통신을 하면서 전국방방곡곡 파업한다는 광고들을 다 해댔답니다.
으~ 열받어~ 이게 무슨 보안이고!
민주노총 한테는 철벽보안이고... 짭새한테는 다 들키고... ㅎㅎㅎ
어쨌던 이런 보안 덕택에 첫날부터 밥은 도시락을 시켜먹고... 잠은 천막(3동 - 민주노총에서 긴급지원한 천막)과 차량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다.
그러나 누구 알았던가?
이런 어설픈 준비와 계획되지 않은 투쟁이 태풍의 눈이 될줄이야~
사실 이제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그날 우리들은 엄청 열받아서 꼭지가 패~0 돌아버렸음!
부랴부랴 건설노조에 연락해서 대형전기밥솥(1,000인분)과 식기를 빌려서 설치하고...
천막을 수배하러 다니고... 이런 럭비공 같은 아저씨들!
대단한 보안이야~ 나 원 참!
3. 파괴! - 새로운 질서를 향한 진통, 건설의 또 다른 모습
파업 첫날 어스름 해가 지고 난 후 지도부는 조직을 정비하고 있었다.
동방, 동국, 로얄, 천일, 포항1, 포항2, 경주, 영천, BCT, 선봉대, 순찰대, 정문경비대, 기타...
대략적인 조직정비를 마치고 포항지역 주요 거점 13군데에 각 조별로 대오들을 배치시키기 시작했다.
야간에 대오들이 배치되자마자 전쟁은 시작되었다.
파괴, 충돌, 혼란...
특히 관문주유소가 있는 포항진입도로 부근에서는 끊임없는 마찰이 발생했다.
철강제품을 실고 출입하는 상당수의 차량들이 우리 대오들의 검문검색에 막혀 실랑이를 벌이다가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첫날 경찰에 접수된 신고건수 만도 10여건이나 되었고, 우리 상황실에 접수된 내용은 헤아릴 수 없었다.
차량이 부서지고, 다쳐서 병원에 실려가고 각종 접촉사고가 일어나는 등의 혼란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전쟁은 이렇게 파괴와 충돌의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상황실과 지도부에서는 거점 지역 근무교대 시 특별지침을 하달했다!
1)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폭력은 절대로 금할 것
2) 화물차량이 아닌 일반차량은 통제하지 말 것
그러나 지도부의 거듭되는 지침과 호소에도 불구하고 곳곳의 마찰을 막을 수는 없었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응어리진 한은 파업을 하고 있는 시기에 얌체처럼 짐을 싣고 다니는 다른 화물차 기사들에 대한 응징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파괴와 충돌 극심한 혼란은 둘째날을 고비로 현저히 줄어들면서... 안정화되고 있었다.
둘째날을 고비로 포항지역 전 도로에 대한 100% 장악을 화물연대가 하면서부터 가능해졌다.
불필요한 마찰은 최대한 억제하고, 적절한 통제와 내부규율로 포항은 예전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단, 화물차는 찾아볼 수가 없었지만...
들리는 풍문에 겁을 집어먹은 화물차 기사들이 아예 포항 쪽으로 들어오질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영천과 경주지역에 대부분의 화물차들이 집결해서 상황을 살피고 있는 중이라 했다.
우리는 파괴라는 단어가 창조라는 단어의 또 다른 동의어라고 본다.
조용한 창조와 평온한 새 질서는 결코 없는 것이다.
새로운 질로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진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굴종과 노예의 옛 질서는 파괴되었고, 새로운 질서가 건설되고 있었다.
4. 오합지졸을 넘어 혁명군으로…
주요거점지역에 투입된 화물연대 조합원들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대부분 4,50대인 이들은 단, 한번도 파업이나 투쟁을 해보지 못한 그야말로 완전 초짜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철의 규율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욕심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합지졸은 점점 더 규율과 통제를 갖춘 혁명군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정문경비대 충돌사건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당시 상황실 전체의 진행과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던 필자가 정문경비대에 누차에 걸쳐 통제강화를 지시하고, 대중적으로 집회시마다 확인시켜 주었다.
통제강화의 주요 내용인즉슨, 화물연대 지부장을 비롯한 그 어떠한 사람도 통행증이 없으면, 통과시킬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내부규율을 위해 어쩔수 없이 - 타 지역에서 온 사람은 천막에서 자고, 포항지역 조합원들은 자꾸 밤에 집에가는 등 문란해진 기강을 잡기 위해 - 취한 조처였다.
통행증은 지부장과 상황실에서 발급하였다.
5월 4일쯤으로 기억하고 있는데..11시경에 식당조(성우지회 조합원들로 구성) 동지들이 외출증을 끊어서 나가다가 정문경비대와 전면 충돌을 해버렸다.
통행증에는 000외 6명으로 되어 있는데... 트렁크에 숨어서 나가다가 조합원의 제보로 들켜서 정문경비대에 의해 제지를 당한 사건이었다.
정문경비대원들의 제지에 화가 난 식당조 간부가 "너희들이 뭔데 막느냐! 우리는 식당조 사람들인데.. 내일 밥을 하기 위해서는 청결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 밖에서 씻고 들어와야 한다! 막지마라!"라고 하자 정문경비대원들 왈 "당신이 책임자고 식당조면 다인줄 아느냐! 죽어도 통행증 없이는 안된다! "
한마디로 난리가 나 버렸다.
부랴부랴 지부장이 출동하고, 간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곤하고 지쳐있던 차에 욕설이 오고가고....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다.
특히, 정문경비대에서는 자신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선봉대장의 지침에 의거해서 설혹 지부장이라 하더라도 통행증이 없으면, 나갈수 없다고 버티기 시작했다.
이쯤되다 보니 지부장도 꼭지가 돌아버렸다.
말리는 간부, 으러렁 거리는 정문경비대와 식당조 참... 미칠지경이었다.
결국 민주노총의 권위를 빌릴 수 밖에 없었다.
필자가 나서서 욕을 섞어 가면서까지 훈계조로 타이르고 윽박지르고 협박해서 겨우 마찰을 막아 놓고, 양쪽 입장을 듣기 시작했다.
결론은 정문경비대가 잘못이 없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식당조는 새롭게 통행증을 발급받아서 외출을 하라는 지침을 내리고 상황을 일단락 시켰다.
이 사건 이후 지부장이 손수 경비대의 손을 잡으며 노고를 치하하고, 마음을 달래주고, 다시한번 이번 투쟁이 우리 내부의 싸움이 아니라 권력과 자본과의 한판 싸움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면서 상황을 수습했다.
필자는 이 사건이, 우리내부를 본격적으로 규율로서 통제하기 시작한 상징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 이후로 상황실은 통행증을 받기 위한 임시 동사무소처럼 변해 버렸다.
이 사건 이후로 외부인의 출입과 술(우리는 투쟁기간 내내 이것을 약이라 불렀다.)의 반입은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마찬가지고 각 거점 근무지에서의 규율도 한층 틀을 잡아나가고 있었다.
오합지졸에서...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는 혁명군으로 우뚝 서고 있었던 것이다.
화물연대 파업투쟁 8일간의 기억 - 2
5. 계엄사령부의 통행증을 확보하라!
화물연대 파업투쟁 지도부와 상황실에서는 전체 간부 회의를 통해 계속되는 마찰과 사고를 줄이기 위해, 또 불요불급한 제품 납품과 관련된 통행 허가를 위해 시내통행증을 발급하기로 하였다.
당시 전면적인 통제가 시작되면서, 많은 문제들이 양산되었고, 이것은 언론사들의 표적이 되어 마치 우리를 폭도로 몰아갈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1)중소기업이나 생산에 급박한 차질이 있는 경우 해당 제품과 차량의 통행을 허용한다.
2)평소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운송하던 물품 이외의 제품은 통행을 허용한다.
3)운송 제품의 내용과 관계없이 2.5톤 이하 차량은 전면 통행제한을 해제한다.
그러나 위의 지침들이 근무지에 있는 조합원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거나 잘못전달되어 포항지역에서는 마치 모든 차량이 통행증을 발급받아야만 다닐 수 있는 것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임시 상황본부로 사용하고 있던 민주노동당포항시남구울릉군 지구당에서는 모든 업무가 마비되었다.
왜냐구요~
포항 전 지역의 차량들이 통행증을 받으러 와서...
지구당 사무실은 계엄사령부의 통행증 발급처가 되어 버린 것이다.
본의아니게 통행증 업무를 전담하는 업무를 우리들이 하게 되었는데, 첫째날은 운송하역노조 아무개가 사령관(?)이었고, 둘째날은 민주노총 아무개가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 ㅋㅋㅋ
셋째날은 필자가 팔자에도 없는...임시사령관으로...ㅎㅎㅎ
정말 반 죽었다.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파업투쟁 중 가장 힘든 일이 바로 이 일이었다.
쓰레기 치우는 차량, 밥차, 똥차, 오만가지 차량이 다 와서 통행증을 발급받겠다고 지구당 회의실 옆에서 1시간 2시간 심지어는 반나절을 기다리는 상황은 정말 계엄 그 자체였다.
상황실에서는 통행증을 발급받은 차량 가운데 외부로 나가는 차량은 조합원 1명을 태워서 안전하게 외곽까지 보호해주기도 하였다.
통행증을 끊은 업체의 사장은 확 핀 얼굴로 웃으면서 머리가 땅 끝에 닿을 정도로 꾸벅거리면서 돌아갔고, 통행증을 받지 못한 업체의 사장이나 담당자는 죽을상을 해가지고 상황실에서 애걸복걸 매달리고 있었다.
통행증을 가지고 있는 차량은 그 다음날도 무사통과 되었고, 특히 사령관들의 명함이라도 하나 입수한 사람은 본부장 이름 들이대면서...무슨 큰 빽이나되는것 처럼 통행을 요구했고, 또 실제 그렇게 되어 버렸다.
웃지못할 상황들이 벌어졌던 것이다.
게중에는 꼭 필요한 물품반출이라고 우리를 속이고 조합원을 동승시켜 나가다가 조합원이 차량 적재함을 검사하고 난 후 불법반출(우리의 입장에서 볼때)이라고 통행을 저지시키는 사태도 발생했다.
어디 그뿐인가?
포스코에서는 관광버스에 몰래 물건을 싣고 나가기도 하고, 승용차 트렁크, 덤프차에 물건을 싣고 나가기도 하고, 정말 천태만상이었다.
정말이지 이런 상황을 우리가 원한 것은 아니었는데...
우리는 대부분의 차량에 대해 통행증을 발급하고, 조합원을 동승시켜 안전하게 외곽으로 안내했다.
몇몇 차량에 대해서만 통행을 제한했었다.
예를들어 5월 5일 포스코가 몰래 물량을 빼낼려다가 우리 대오에 의해 제지당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포스코의 물량을 빼내려고 시도한 주역이 바로 한진이었다.
그런데 5월 6일 한진의 회사간부가 찾아와서 부두쪽 중기를 움직이는 기름실은 차량에 대한 통행증을 요구했다.
우리는 단호히 거부하면서, 한진 사장이 직접 와서 조합원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사과하기 전에는 불가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우리 조합원들이 몰고 다니는 차량과 같은 트레일러에 철강을 싣고 가는 차량의 경우에는 불가하다는 방침을 내리고 업체 사장을 설득하고 돌려보냈다.
도저히 이런 식으로는 안되겠다는 판단을 내린 지도부는 셋째 날부터는 통행증 발급을 중단하고, 화물연대 관련 차량을 제외한 전 차량에 대해 통행을 해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의 통행제한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찌 그들의 분노를 지침으로 다 통제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3일 천하이긴 했지만 통행증 발급 사령부에서의 일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우리가 행정권, 사법권 등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니...
심지어 포항시청 상수도사업본부에서 조차 우리들에게 통행증 발급을 받아서 갔었다.
우리는 3일동안의 통치(?)를 우리 스스로 끝내고 말았다. 너무 힘들어서…
6. 어린이날 대항쟁! - 물류 총파업 투쟁의 도화선!
5월 4일 자정경에 2개의 첩보가 날아들었다.
첩보의 내용은 포스코에서 공권력을 동원한 채 5월 5일 대규모로 코일(철강1차 완제품)을 빼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5월 5일 아침 일찍 긴급 비상회의를 소집하여 대오를 정비하고, 보안을 유지한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 TRS를 통해 포스코에 병력이 속속 움직이고 있다는 무선이 날아 들었다.
곧이어 지도부의 행동지침이 떨어졌다.
정말 가슴이 터질듯한 긴장감에 목이타고 혓바닥이 바짝바짝 말리고 있었다.
떨리는 가슴으로 전체대오를 향해 지침이 하달되고 있었다!
"동지 여러분! 이제 결전의 순간이 왔습니다.
포스코 개시끼들이 우리를 죽이려 합니다.
오늘 우리 화물노동자들의 분노가 무엇인지 보여 줍시다!
각 지회별로 전체 행동으로 돌입하십시오
포스코에서는 단 1톤의 제품도 출하할 수 없도록 포철 3문을 막아 주십시오"
이 지침이 떨어지자 25톤 카고 트럭과 트레일러 7대에 분승한 500여명의 노동자들은 출동하였고, 급기야 포스코 3문은 봉쇄되었다.
곧이어 트레일러와 카고트럭 10여대(대한통운 하청 조합원)가 조합원들 뒤편으로 2차봉쇄를 하면서 포스코 3문은 전면 통제되었다.
9시 저녁뉴스를 장식했던 포스코 3문 앞에서의 전투경찰과 피말리는 대치가 시작된 것이다.
한편, 상황실에서는 봉쇄투쟁을 효과적으로 마무리하고 엄호하기 위한 비상작전에 들어갔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포스코의 정문, 1문, 2문을 봉쇄할 차량을 준비하고, 나아가 장기봉쇄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판단하에 밥을 투쟁현장에 배달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식당조는 급박하게 봉고차 밴을 동원하여 국과 밥을 싣고 포스코 3문을 중심으로 1,2, 정문에 배식을 실시했다. 저녁 식사는 25톤 대형차(식당차)를 아예 투쟁현장으로 급파했다.
물론 나머지 10여곳의 거점 근무자들은 스스로 식사를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주로 컵라면과 자장면이었다. 게중에는 다방에 커피를 시켜 마시는 간큰 동지들도 있었으니...
포스코 3문에서는 거대한 흡혈의 공장 포스코를 뒤로하고 빼낼 물건을 실은 차량(주로 한진차량)이 쭈욱 서있고, 그 앞에는 전투경찰이,,, 전투경찰 바로 앞에는 우리 조합원들이 전체 드러누워 있고, 또 조합원들의 뒤에는 조합원들이 타고 있는 트레일러와 카고차량이.. 그 뒤에는 다시한번 우리들의 차량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경찰과 포스코는 움직이지 않고 계속 우리들의 틈을 노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투쟁지도부는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적들의 반응이 없어서...
우리는 2차 투쟁의 수위를 높이기로 결정했다.
공권력을 철수시키고, 물건 실은 차를 돌리지 않으면 매 30분마다 하나의 문을 더 틀어막을 것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다.
2문이 봉쇄되고, 정문과 1문이 봉쇄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기초공장이자 핵심이라고 이야기하는 포스코가 완전 봉쇄 된 것이었다.
이날 INI steel은 이미 전기로 4개중 3개가 꺼져 있는 상황이었다.
화물노동자들은 물류를 멈춰 세상마저 멈춰가고 있었다.
화물연대파업투쟁의 몇몇 고비가 있었지만, 어린이날 감행된 이 봉쇄투쟁은 투쟁의 성격을 한단계 더 강화시킨, 중요한 대항쟁이었다.
상황실에서는 원래 이날 일정을 어린이날인 관계로 다양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먼저 조합원들의 전 가족을 투쟁현장에 오게 해서 족구를 비롯한 체육대회와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행사를 하기로 하고, 돼지고기 60만원어치와 어린이 상품을 준비하기로 했었다.
결국 돼지고기와 어린이 상품을 각 근무지에 나누어 주느라고 식당조와 순찰조 그리고 필자가 뺑이쳤다는 것 아닙니까? - 13개 근무지에 일일이 된장과 고기를 다 손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급작스런 투쟁으로 인해 모든 행사가 취소되고 어린이날 부푼 꿈을 안고 아빠를 찾아왔던 어린이들은 시커먼 얼굴에 덥수룩한 털복숭이 얼굴을 한 채, 전투경찰과 대치하면서, 누워있는 또 길거리에 앉아서 퀭한 눈을 한 채 전투식량을 배급받아 식사하는 장면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산가족 상봉의 그 짠한 장면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날 5월 5일 어린이날의 대항쟁은 바로 이산가족 상봉이었다.
오후 1시가 되면서, 남편 줄랍시고 김밥에 맛난 도시락 챙겨 바리바리 사들고 또 한 손에는 올망졸망 애기들 손잡고 오는 가족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사랑하는 아빠, 남편이 9시 뉴스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투사가 되어 있었으니…
이산가족 상봉의 핵심은 눈물이 아니던가?
대오속에서 나오지도 못한 채 사랑하는 가족들을 바라보고 있는 투사 남편도, 그 남편을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도 모두 울어버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들은 함께 모여 사온 음식들도 나누어 먹고, 아이들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마침, 포스코 3문 맞은편이 이마트 야외 주차장 겸 휴식공간이어서 좋은 상봉장소가 되었죠!
한동안의 상봉을 마친후 조직정비를 하고, 전체 대오는 근무자와 대규모 차량으로 봉쇄를 한 채, 나머지 대오들은 스크럼을 짜고 당찬 행진을 하면서 개선장군이 되어 천막현장으로 무사히 귀환했다.
화물연대 파업투쟁 8일간의 기억 - 3
7. 폭풍우를 이겨낸 아침구보! - 반성
5월 7일 밤부터 시작된 비와 바람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대형천막이 뒤로 발랑 까져 뒤집어지고, 식당이 부분 파손되고, 조합원들은 추워서 오들오들 떨고 있고, 턱없이 부족한 천막속에서 새우잠을 자는 정말 너무나 힘겨운 상황이었다.
대오는 슬슬 이탈하기 시작했고, 불만과 동요의 목소리는 높아가는 듯 했다.
5월7일과 8일 사이 지도부 전술회의에서는 심각한 논의와 함께 많은 우려를 하면서 투쟁을 빨리 정리하고 마무리하기 위한 마무리 교섭에 총력을 기울이자는 논의를 시작했다.
다음날 해가 떴다.
투쟁현장에 도착한 필자는 아연실색하여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추스르느라 잠시동안 무대로 만든 트레일러 위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왜냐하면, 조합원이 갑자기 사라지고 아무도 없는 것이었다.
이런 열여덜~
그러기를 5분... 갑자기 인덕구장(해방광장) 고수부지 위에서 군가소리 비슷한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전체 600여명의 대오가 줄을 맞추어 구보를 하고 돌아오는 중이었다.
밤새 몰아친 폭풍우를 견뎌내고, 새롭게 투쟁의 대오를 갖춘 영웅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폭풍우에 오히려 200여명이 늘어난 대오로서 화답한 조합원들의 얼굴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빛나고 있었다.
그들의 그 이글거리는 눈빛 속에서 우리는 승리할 수밖에 없는 필승의 결의를 보았다.
또 그 눈빛 속에서 우리는 대중들을 신뢰하지 못하고, 걱정하며 투쟁의 수위를 낮추고자 했던 그 잘나빠진 활동가들의 알량한 정세분석이 얼마나 씨잘대기 없는 것인가를 깨닫고 있었다.
대중으로부터 배우고 대중과 함께 투쟁하는 원칙을 다시 한번 각인하는 좋은 계기였다.
이날의 구보모습은 공영TV를 통해 방영되면서... 자본과 권력에게는 두려움으로 우리들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뽀다구(폼이라는 사투리 - 지부장이 자주 사용해서 공식 표준어가 됨)나는 투쟁으로 다가왔다.
이번 투쟁 내내 가장 모범적이었던 대경지부장님! (서울 과천상경투쟁)
언제나 투쟁의 선봉에 선 홍보위원장 - 며칠전 할부금을 넣지 못해 카드사로부터 주택 차압이 들어 왔다고 한다. (서울 과천상경투쟁)
맨 좌측이 사동길 동국통운 지회장님! -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항상 웃으시며 교섭과 투쟁을 하시던 지도부 - 지금 수배중! (서울 과천상경투쟁)
동방의 권협 지회장님! - 필자가 '소장수'라고 별명을 붙여 드렸죠 - 지금 수배중!(서울 과천상경투쟁)
8. 희한한 장사! - 없어서 못판다!
이번 화물연대 투쟁에 있어서 가장 큰 성과는 뭐니뭐니해도 조직력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
첫째날 파업대오가 300~400여명 정도였다. (도시락 숫자로 파악)
그러나 하루가 지날수록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하루에 거의 100명씩 가입자가 늘어났다.
문제는 투쟁조끼와 머리띠 그리고 띠자보(직사각형의 천에 구호를 담은 집회물품 - 수천명이 노래에 맞춰 폈다 오무렸다 하면 아주 뽀다구 남)였다.
연휴가 끼여 있어서 주문할때도 없고, 턱없이 부족한데, 신규 조합원들에게 나누어 줄수가 없었다.
그러니 대오를 보면, 조끼와 머리띠 띠자보를 다 갖춘 정규군에서 츄리닝 바지에 아무것도 없는 비정규군까지 정말 가관이었다.
복장에서부터 조합원들의 등급이 매겨져 있었다.
+ 맹렬조합원 (5월 이전 조합 가입자) - 조끼 + 머리띠 + 띠자보
+ 보통조합원 (5월 투쟁 초기 가입자) - 머리따나 띠자보 착용
+ 완전 신삥이 조합원 - 아무것도 없는 군번없는 학보병과 비스무리함
이러다보니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고참들의 군기와 괄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신참조합원들의 경우 어디 끼이지도 못해서 하루종일 텐트 주변에서 어슬렁 거리기만 했다.
게중에는 안면이 있는 고참조합원을 찾아가서 말을 붙이며, 혹시 머리띠라도 빌릴 수 있으면 거의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는 행운을 거머쥐는 것이었다.
신분상승...ㅎㅎㅎ
문제는 선봉대였다.
복장이 일반조합원과 차이가 없어서 늘 구분에도 애를 먹고 있었는데..
5월 7일 선봉대 조끼 100벌이 도착했다.
화물연대는 공짜가 없다.
선봉대 조끼를 2만원에 판매했는데, 30분만에 동이 나 버렸다.
정작 선봉대가 입어야 할 조끼를 다른 사람이 입는 경우도 있어서 싸움이 나고 난리가 나버렸다.
그런데, 이때부터 희한한 장사가 시작되었다.
선봉대원의 경우 2만원을 주고 선봉대조끼를 구입하고 난후 기존에 자기가 입고 있던 일반조끼를 판매하였는데...
이게 프리미엄이 붙어가지고 심지어는 5만원을 호가하기도 했다.
그렇게 팔렸는지 그 매매의 구체적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서로 그 잉여조끼를 사겠다고 싸우는 모습은 아직까지도 잊을수가 없다.
조끼는 투쟁의 상징이자 화물연대 조합원으로서의 긍지와 핵심조합원의 징표였으니까…
9. 12만원짜리 스티커를 아십니까!
일반적으로 씨링이라 불리는 스티커(화물차에 붙이는 것)는 원가를 따지면 거의 1~2백원 수준이다.
그러나 화물연대 스티커는 최소 12만원이다.
황금으로 만든 것도 아닌데…
화물연대포항지부 스티커는 조합 가입을 해야 준다 (총3종류로서 차량 앞, 측면, 후면에 부착) 조합 가입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투쟁기금 10만원, 구속자들을 위한 구제기금 2만원 합계 12만원이 있어야 한다.
사실 우째보면 큰돈인데... 서슴없이 돈을 내며 가입하는 조합원이 평균 하루 100명이었다.
1,200만원의 돈이 들어오는 셈이었다.
신규조합원들이 투쟁현장에서 조합 가입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정문경비대에서 사실을 이야기하고 허락을 득한 후 상황실로 오게 되는데, 일단 정문에서 한차례 검문을 받고 - 사실 고역이었을 테다.
곱지 않은 시선 등 - 상황실에 와서 100만원짜리 돈다발이나 수표를 들고와서 20~30명이 집단가입을 하게 되는 상황이 마지막날까지 진행되었다.
혼자서는 무섭기도 하고, 낯설기도 해서 올수가 없으니까...
그리고 가입하고 나면, 꼭 스티커는 받아간다
왜냐하면, 이것은 돈으로 따지면 12만원이지만, 이것은 곧 화물연대라는 시대적 흐름과 대세에 편입된다는 티켓에 다름아니니까...
그야말로 천국으로 가는 면죄부였던 것이었다.
신규가입자들에게는 절대 버릴수 없는 신주단지 였던 것이었다.
이 징표가 있어야 향후 추풍령이나 화물휴게소에서 화물노동자들과 어울릴수 있고 - 사람 대접 받고 - 화물연대라는 새희망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화물연대 파업투쟁 8일간의 기억 - 4
10. 보수정당과 민주노동당의 차이!
포항 지역 화물연대 8일간의 투쟁!
그 투쟁의 한복판에 언제나 민주노동당은 있었다.
민주노동당 경북도지부장 (민주노총경북본부장 겸임 : 민지네 대화명 바탈)을 비롯한 포항시 남구 울릉군 지구당 위원장을 비롯한 전 당직자와 간부들이 수시로 화물연대 파업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지구당 사무실을 아예 투쟁 상황실로 내어주었고, 지구당 당직자들은 그 고달픈(하지만 행복했죠!) 발품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투쟁의 한복판에 보수정당은 없었다.
지역구 국회의원을 비롯한 모든 놈들이 우리들의 투쟁을 호도하고, 깨뜨리기 위해 언론과 지역여론을 망가뜨리고 있었고 국가 물류가 멈추는 단군이래 최대의 대란이라는 난리법석에도 그들은 포항이 아니라 서울 여의도에 있었다.
코빼기 한번 내비친 놈이 없었다.
아마도 화물노동자에게는 투표권이 없는가 보다.
개혁을 외치고, 참여를 외치던 민주당과 노빠들 역시 없었다.
역사와 민족을 운운하고 새로운 정치를 노래하던 유시민 계열의 개혁당은 아예 그림자 조차 없었다.
민주노동당은 있었다.
화물연대 파업투쟁을 통해 지난 수십년간 노동자의 눈과 귀와 입을 가리고 막았던 보수의 장벽이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었다.
노동자는 자신들의 투쟁에 있어서 누가 암까마귀인지 수까마귀인지 몸으로 체득하고 경험했다.
참고로 사회당 동지 한분이 지구당 상황실에서 인터넷 관련 일을 도와주었다.
다시한번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이제 적어도 화물연대 포항투쟁에 참가했던 많은 조합원들은 자신들이 미래에 지지하고 선택해야 할 정당이 민주노동당(진보정당)임을 직감하였다.
그 위대한 5월 투쟁은 화물연대와 민주노동당이 하나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또, 마무리 되었던 것이다.
그 하나됨에는 바탈을 비롯한 지구당 김숙향 사무국장(도지부 부지부장 겸임)과 많은 당원동지들의 애정어린 활동이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김숙향(과거 민중당, 민정련 활동 그리고 2002년 지자체 선거때 포항 연일2선거구에 출마한 이지경 동지의 부인) 동지의 경우에는 이미 화물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 저간의 사정은 대개 이러하다!
[김숙향(별명 : 살인미소 혹은 팥쥐) 동지가 화물노동자의 영웅이 된 상황과 일지]
+ 3월 22일 화물노동자 포항결의대회 - 2003년 화물투쟁의 첫 시발점이 된 최초의 전국적 지역집회
당시 이날(토요일) 집회는 반전집회와 동시에 진행하였는데, 이 집회에서 살인미소가 반전결의문을 읽게 되었다.
이때 화물연대 포항지부 보도1차장 (현재 깁스한 채로 5월 화물투쟁 동영상 편집하고 있슴)은 살인미소의 모습과 목소리(???)에 주목하고 있었다.
이후 보도1차장의 집요한 요청과 공작으로 김숙향동지는 4월 20일경에 4월 30일 세계노동절 전야제에서 방영될 화물노동자 투쟁의 나레이터를 맡아 녹음하게 되었다.
그 긴장되고 항상 촉촉한 눈물이 깃들었음직한 목소리 - 지극히 선동적인 음성 - 로 인해 수만명의 비정규노동자가 울어버렸다는 것 아닙니까?
4월 30일 고려대 노천극장은 눈물과 감동의 도가니가 되었다.
한편 살인미소의 형부가 바로 그 자랑스러운 화물노동자였다.
제 113주년 세계 노동절 전야제 사진 - 고려대 노천극장
+ 5월 1일 포항에서는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메이데이 상경투쟁을 했고, 서울 대학로에서 화물노동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행진을 하다가 서울시청앞 광장에 다달았을즈음 화물연대 전체 대오와 조우하게 되었는데, 그때 화물연대 대오속에 있던 살인미소의 형부가 처제를 발견하고는 주위 동료들에게 "우리 처제데이~ 어젯밤에 화물투쟁 방송하던 목소리 주인공 아이가~"
그 소리에 주변의 화물노동자들은 박수를 보내고, 또 악수를 청하고…
살인미소의 형부 어깨가 63빌딩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을 우리는 목도했다.
제 113주년 세계 노동절 본대회 - 대학로 (왼쪽 붉은띠자보 대오가 화물연대)
+ 5월 2일 파업 현장에서 첫 집회를 할 때 홍보차장이 민주노총의 간부들을 제쳐놓고 민주노동당의 살인미소를 먼저 등단시켜 소개하는 것을 보면서 약간의 야속함(?)도 느꼈지만, 그래도 기분 무지무지하게 좋았다.
이미 화물노동자들에게 살인미소는 영웅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살인미소가 트레일러 무대 위에 올라갔을 때, 우레와 같은 박수와 연호는 기본이었다.
이제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4월 30일의 그 짜아 ~ㄴ 했던 목소리의 주인공을 두 눈으로 확인하면서, 목소리에 대한 경의를 넘어 살인미소 실물에 대한 경의를 가지게 되었다.
게다가 4월 30일 서울 상경투쟁 전야제에서 방영되었던 그 영상을 농성장 임시 무대 - 죽도시장에서 광목을 떠서 두겹으로 스크린을 만들고, 빈프로젝트로 쏘아서 만든 임시극장 -에서 재방영하면서 다시 한번 서울에서의 그 감동을 맛보았고, 그 관람장에는 화물연대 동지들과, 살인미소, 바탈, 소한 그리고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간부들이 숨죽여 보고 있었다.
영웅의 목소리를 들으며…
5월 그 화려했던 모든 휴가와 일정을 반납한 채 하루죙일 지구당(상황실)에서 또 파업투쟁 현장에서 조합원들을 격려하고, 뒤치다꺼리하고, 또 늦은 새벽까지 상황을 점검하고, 내일의 투쟁을 대비하고…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어 함께 하였던 민주노동당과 사회당 동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민주노동당은 화물노동자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2인칭이 아니라 1인칭이 되었던 것이다.
이 글을 적고 있는데(19일 당시) 방금 화물연대 간부들이 투쟁 마무리를 하고 인사차 민주노총에 들렀다. (체포영장 발부되기 1시간 전)
이 자리에는 지구당 김숙향 사무국장도 함께 있다.
그래서 필자가 다시 한번 민주노동당과 화물연대와의 밀약(?)을 확인해 보았다.
소한 : "화물연대 포항지부 전체 간부 민주노동당 가입 확실합니까?"
지부장 : "예 간부회의 때 전부 가입하께요, 기름쟁이는 한다카면 한다카이~"
소한 : "우째 믿는교? 개별 가입은 부도니까 아예 전체 간부들 인명부하고 계좌번호 일괄 당으로 주시오, 간부들한테는 당가입 통보만 하시고... 우리가 통째로 가입하께 안그라만 부도라 카이~ 됐는교?"
지부장 : "OK !!!"
이제 화물연대 동지들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정말 믿는다.
심심한데 팥으로 메주나 한번 쑤어볼까?
여러분! 좀 드실라우~
ㅋㅋㅋ
11. 포항 인덕구장이 해방광장으로 개명된 사연
해방이 무엇인가?
압제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던가?
화물연대 투쟁대오는 포항 인덕구장에서 8일간을 야수처럼 그렇게 머물렀다.
한 3일쯤 지났을 때인가?
필자가 사회를 보고 있는데, 뭔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영상이 있어서 입을 통해 쏟아버렸다.
"소한 : 우리는 지금 우리를 짖누르고 있는 자본과 권력의 온갖 탄압과 화물악법으로부터 해방되고 있으며, 위대한 노동자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해방의 기쁨을 맞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발 딛고 서 있는 이곳은 더 이상 축구나 하는 인덕구장이 아니라 노동자 해방을 여는 해방광장입니다. 맞습니까? 동지 여러분!
조합원 : 예~~~~
소한 : 그러면 우리 다같이 해방광장이라고 한번 크게 외쳐 봅시다!
소한 : 해~
조합원 : 해~
소한 : 방~
조합원 : 방~
소한 : 광~
조합원 : 광~
소한 : 장~
조합원 : 장~
소한 : 해방~
조합원 : 해방~
소한 : 광장~
조합원 : 광장~
소한 : 해방광장~
조합원 : 해방광장~
소한 :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인덕구장은 없습니다. 오직 해방광장만이 있을 뿐입니다. 제가 이참에 아예 등기소에 해방광장이라고 콱 도장찍어 등기이전 할 생각입니다.
조합원 : 환호와 박수~~~ "
이때부터 우리는 해방광장이라고 불렀고, 그에 대해서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포항에 인덕구장은 없다!
그 빛나는 해방광장만이 있을 뿐이다.
12. '사람이 태어나…'의 가사는 수정되어야 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세 번을 운다지만 노동자는 오직 한번 해방을 위해 운다라는 노동가 가사의 내용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지난 8일간의 투쟁 속에서 너무나 많이 울어(훌쩍거리는 것은 아예 빼고 줄줄 우는것만)버렸기 때문이다.
[처음 줄줄]
5월 5일 포스코 3문 앞에서의 대항쟁 당시 고교동창인 화물연대 조합원이 다가와서 꼬마아이를 소개시켜 주었다.
처음에 필자는 친구의 아들인줄 알고 번쩍 안아주었는데, 친구 왈 "며칠 전에 죽은 박상준 아들래미 아이가"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줄 알았다.
그 꼬마녀석을 보고 있으니 천지를 모르고 좋아서 히죽히죽 거린다.
나는 내 감정을 내 스스로 통제할 겨를도 없이 그냥 울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이 절망적인 화물노동자의 삶을 견디다 못해 음독자살했다는 사실도 모른채 그냥 어린이날이라서 좋은가 보다.
손에는 사탕이 들려 있고…
그 꼬마의 얼굴위로 필자의 사랑하는 딸의 얼굴도 오버랩 되고...
한참을 소리 없이, 주책도 없이 울고 있을 때 화물연대 보도2차장이 열심히 디지털캠코더를 내 얼굴에 대고 돌려대고 있었다.
그제서야 나는 눈물을 멈추고 고 박상준 동지의 아이를 내려 놓았다.
[다음 줄줄]
5월 9일 잠정합의안에 대한 조합원 총투표를 실시하고 난 이후 개표가 막시작 되고 있었다. 장소가 열려져 있는 공간이라서 투개표가 정말 만만치가 않았다.
투표하는 데에만 한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개표는 바탈(민주노동당 도지부장 겸 민주노총경북본부장), 살인미소(지구당 사무국장), 동양석판 위원장, 지구당 위원장, 민주노총포항시협의회 수석부의장 겸 건설노조위원장 등 5명이서 진행하였다.
필자가 당시 사회를 보고 있었는데, 노래패도, 풍물패도 아무런 문화시스템이 없는 상황에서 순전히 이빨로만 두드려서 2시간을 떼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개표 상황을 잠시 잠시 슬쩍 슬쩍 훔쳐보고 있었다.
필자의 뒤편에서 개표가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찬성이 약간 많은 듯 보였다.
순간 지난 8일 동안의 모든 상황들이 정말 거짓말 안보태고 단 몇초 만에 활동사진의 필름처럼 좌~악 지나갔다.
전국의 기자들 수십명이 대오 외곽에서 플래시를 터뜨리고 있었고, 전 간부들은 대오 앞에 부동자세로 정렬해 있고, 오직 들리는 것은 필자가 외치는 선동뿐이었다.
포항에 온지 10년!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점점 더 관성의 늪으로 빠져들던 자칭 활동가인 나와 우리 모두를 다시한번 튼튼하게 전선에 서게 해준 자랑스런 화물노동자들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마주하며, 우리의 투쟁을 끝까지 지켜주며, 그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고 박상준 동지의 삶을 이야기 하고, 살아남아 이 험한 세상에 버려진 그 아들과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화물노동자가 되자는 약속을 선동하면서 나는 그만 목이 메이고 말았다.
이미 목속의 혈관이 터져 피가 솟구치고, 목소리는 갈라진채, 꺼어억 꺼어억 쇳소리를 담은 그 목소리의 선동은 중단되었고,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아 버렸다.
그것도 완전 오리지날 100% 공개적으로…
아~ 그때 생각하니 지금도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나네요~
이제 가사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세 번을 운다지만 노동자는 아주 많이 해방을 위해 운다~
[5편 이후 집필순서]
13. 포스코의 항복일지
14. 굉음! - 해방을 향한 진군
15. 언론은 통제되어야 한다!
16. 아~ 참! 쪽팔리서~ 교섭장에서 일어난 해프닝!
17. 숨어 있는 영웅들! - 경비와 식당
18. 슬로건의 변화 과정
19.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 - '투쟁'과 '대중'의 진정한 의미
20.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
21. 전선을 사수하라! - 민주노총 대표자들의 결의!
22. 거꾸로 김밥을 아시나요?
23. 400과 1098의 차이?
24. 끝나지 않은 투쟁 - 개미와 BCT
25.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에 대한 존경과 경의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26. 협정서에 없는 협정내용
27. 중독! 히로뽕! 그러나 후유증이 없다.
28. 투쟁이 끝난 해방광장에 서서….
화물연대 파업투쟁 8일간의 기억 - 5
13. 포스코의 항복 일지
단군이래 우리 민족은 수많은 외적의 침입을 받아왔다.
그러나 가장 치욕스러운 외침중의 하나가 바로 한일합방이었다.
굴욕적 한일회담의 떡고물로,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은 일제 강점 36년간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돈으로 이곳 영일만에 포항제철을 만들었다.
포스코는 바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죽고, 잡혀가고 유린당한 치욕의 댓가를 가지고 만든 민족기업이다.
그러므로 포스코의 모든 이익과 잉여금은 바로 민족 전체를 위해, 또 일반 민중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정권에게 엄청난 정치자금줄이 되고 있음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포스코에는 약 4만여명의 노동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일하고 있다.
15,000여명의 포스코 직원
2만여명의 포스코 자회사, 협력회사 직원들
그리고 5,000여명의 일용직 노동자들
포스코 직원을 제외한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한마디로 착취의 수레바퀴 속에서 끊임없이 돌고 있는 다람쥐 신세로 전락해 있다.
배부른 포스코와 정치권력
배고픈 대다수 노동자와 시민들!
비단 경제적 부의 분배에서 뿐만아니라 포스코는 모든 면에 있어서 안하무인이었다.
이제까지 지역 환경문제든, 노사문제든 한번도 상식적으로 대응한 적이 없는 세계최일류의 세계최고비상식 기업인 것이다.
포항지역에서 민주노조 운동의 종국적인 목표는 아마도 저 거대한 흡협의 공장 포스코에 민주노조의 깃발을 꽂는 것이리라!
현재 어용 포철노조는 15,000 직원 중 19명만이 조합원으로 가입해 있다. 기가 막힌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화물연대 투쟁으로 통해서 저 거대한 포스코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고, 또 그렇게 했다!
화물노동자 만세!
남한노동자계급의 영웅적 투쟁 만세!
(이 외침의 의미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은 1편을 한번 보시라)
서울상경 메이데이 투쟁을 마치고 돌아오자 마자 화물연대 포항지부 동지들은 5월 2일 곧바로 파업에 들어갔고, 이에 놀란 자본은 우리들과의 교섭을 요구해 왔다.
우리는 이에 대해 5월 3일부터 교섭과 투쟁, 대화와 대결, 강온 양면 전략으로 나락으로 떨어져 있는 화물연대 조합원들의 생존권을 끌어올리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감행했다.
화물노동자들이 어떻게 포스코의 저 오만한 콧대를 뭉개버렸는지 당시의 교섭 진행상황일지를 한번 살펴보자!
이 교섭 진행상황은 당시 교섭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가했던 민주노총경북본부포항시협의회 교선부장 (김용식)이 정리한 내용이다.
참고로 우리는 절대 아니고,... 넘들이 민주노총포항지역 상근 간부들을 가리켜 일명 '드림팀'이라고 부른다.
(대장 - 바탈, 투쟁 담당 - 소한, 교섭 - 교선부장, 법률- 산안부장, 선전 - 총무부장)
드림팀의 평소 활동 방침 -> 하나는 전체를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
교섭진행상황 1
*** 참고 : 화주업계 - 포스코 등 발주업체, 운송업계 - 발주를 받아서 운송하는 업체
5/3 교섭요구안 전달 (포스코, INI steel, 동국제강, 세아제강, 동방, 천일, 삼일, 대한통운, 한진, 한국시멘트, 쌍용시멘트, 동양시멘트)
5/4 10:00 교섭을 위한 실무회의 (동방, 천일, 삼일, 대한통운, 한진 등 포스코 관련 5개운송사)
5/5 10:00 1차교섭 (동방, 천일, 삼일, 대한통운, 한진, 삼안 6개 운송사)
=> 화주업계 불참 및 포스코의 경찰병력 동원 등과 관련 문제제기 후 교섭결렬 선언
5/6 11:00 2차교섭 (운송 9개사 교섭참가)
=>일단 철강관련 9개 운송사와 교섭을 진행하되, 화주업계 참가 문제는 지속제기키로 하였으며, 원할한 교섭위해 B.C.T는 별도진행키로 함.
---------------------------------------------------------------------
*** 5월 6일 화물연대 교섭과는 별도로 INIsteel과 금속노조INIsteel지회와의 2003년 임단협 교섭이 있었는데, 교섭석상에서 우연히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 이야기가 오고가던 중 INIsteel 사측 교섭위원들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끝까지 한번 갈 때까지 가겠다는 망발을 서슴치 않았다.
그날 오전에 포스코에서 긴급 화주업계 회의가 있었는데 그때 모종의 음모가 시작되었다.
포스코를 비롯한 화주업계가 모여서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 절대 밀리지 말고 강공 대응을 할것을 약속하고 방침을 정했던 것이다.
화물연대를 공권력으로라도 완전히 깨버리겠다는 더러운 의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5월 3일까지만 해도 INIsteel과 동국제강의 경우(화주업체)에는 죽을상을 해가지고는 INIsteel노동조합 간부들을 통해 제발 야적장에 있는 물건이라도 고로에 넣을 수 있게 교통통제를 풀어달라고 애걸복걸하던 놈들이 갑자기 태도가 돌변해서 끝까지 맞고 하겠다는 것이다.
자본이 단결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미 INIsteel의 경우에는 4개 전기로 중에 하나가 꺼졌고 조만간 2개가 더 꺼질 것으로 예상되었는데도 그들은 도발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장을 세우는 한이 있더라도 화물연대의 씨를 말리겠다는 자본의 추악한 음모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개새끼들!
당시 상황실에서의 자본과 권력에 대한 정세분석과 판단은 다음과 같았다.
포스코의 경우 유상부회장이 낙마하고 난뒤, 이번 화물연대 파업투쟁을 빌미로 삼아 당시 언론에서 친노동정책 - 노무현의 노동정책이 친노동정책이면, 날아가는 똥파리도 천연기념물이다 18~ - 으로 비판당하면서 코너에 몰려있던 청와대를 더욱 몰아부쳐 공권력을 투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서 결국 우리 화물연대의 투쟁을 초토화시키겠다는 것으로 파악했다.
사실 그러한 징후는 경찰, 여러 부면에서의 마찰과 대립, 각종 제보 등에서 충분히 파악되었다.
그리고 또 초기의 언론의 방향도 그런 식으로 정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특히 YTN, 좆선일보를 비롯한 가운데일보, 똥아일보 등
이런 정세분석을 한축으로 우리는 과감한 언론플레이를 시작했다.
투쟁이 터지고 가장 늦게(?) 결합한 한겨레와 오마이뉴스 기자들에게 우리들의 분석 방향에 대해 많이 강조하고, 또 그렇게 언론의 보도 방향이 잡혀지게 되면서, 우리는 청와대와 포스코의 대립을 확대 재생산시켜 나갔다. - 아이고 고소해라 -
사실 이날 저녁까지만 해도 포스코는 끄떡도 미동도 하지 않는 태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태산도 움직일 수 있다는 믿음이 우리에게는 있었다.
바로 그 믿음은 화물노동자들의 투쟁이 얼마나 뜨끈뜨끈한가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
교섭진행상황 2
5/7 11:00 3차교섭 (포스코, INI steel, 동국제강, 세아제강, 동방, 천일, 삼일, 대한통운, 한진, 동국통운, 삼안, 성우, 로얄상운)
=>화주 4사 : 다단계알선 폐지, 화물연대 활동보장 및 조합원임을 이유로 불이익금지, 성실교섭 및 합의사항 준수 등의 입장발표하고 이후에는 9개 운송사와 교섭키로 함.
=>14:00 기자회견
---------------------------------------------------------------------
한판 해보자던 포스코를 비롯한 화주업체 4곳이 급기야 무릎을 꿇고, 교섭석상에 나타났다.
밤새 포스코와 청와대의 힘겨루기가 있었던 것 같았다.
뿐만아니라 더 이상 힘으로 화물연대를 막으려 하다가는 더 큰 사태로 확산될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것 같았다.
포스코를 비롯한 화주4사는 다단계알선 폐지, 화물연대 활동보장 및 조합원임을 이유로 불이익금지, 성실교섭 및 합의사항 준수라는 큰 틀의 교섭내용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우리나라 최고의 자본가들이 화물연대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포스코를 중심으로 한 자본은 끊임없이 발악을 해댔다.
그 발악의 내용을 한번 보자!
30% 인상을 요구했는데, 돌아온 자본의 답변은 2% 인상이었다.
운송업체는 철저하게 포스코와 짜고치는 고스톱 패를 돌리며 우리를 기만하고 있었다.
5월 8일 9시 정각 파업총회 7일차 집회에서 필자가 사회를 보면서, 자본이 내놓은 2%인상안을 설명하자마자 대오속에서는 그대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가장 원초적인 욕인 개새끼에서부터 씨팔놈들에 이르기까지...
불난 곳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화물노동자들의 분노는 이제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지도부에서는 차량투쟁실천지침 1호 (진돗개 하나)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지도부의 지침에 의거해서 800여명의 조합원들이 700여대의 차량에 조별로 분승하기 시작했다.
점심도 거른채...
포항시내와 주변에 배치되어 있던 거대한 화물자동차 600대가 동시에 시커먼 연기를 품으면서 며칠동안 잊고 있었던 차량들은 기계들의 질주본능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었다.
포항지역 전체를 5개조로 나누어서 산개해 준비하고 있다가 준법운행을 해나간다는 전술이었다.
한편, 교섭은 지지부진 했다.
저놈의 돌대가리 자본가들은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봐야 맛을 아는 모양이었다.
지도부는 14:00 정각을 기해 성난 진돗개를 풀어 버렸다.
거대한 굉음을 울리면서 1차 150대의 트레일러와 25톤 카고 트럭이 서서히 포항을 향해 진입해 들어왔다.
다시 한번 화물연대의 깃발이 나부끼며, 세상이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포항이 완전히 멈추어 서 버렸다.
포항공단은 적어도 몇시간 동안 바퀴가 아니라 인간의 두 다리로 이동해야만 했다.
자본가는 아연실색했다.
언론사는 급하게 우리들에게 휴대폰으로 긴급 SOS 인터뷰를 요청했다.
상황실은 이 해방의 순간을 음미하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매연을 뿜어대는 저 괴물같은 대형차의 엔진소리가 얼마나 우리들의 가슴을 후벼팠던가?
몸속에 있는 수천개의 혈관을 팽팽하게 긴장하게 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소리보다 아름답게 달팽이관을 거쳐 고막을 때렸던 그 순간을 필자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지도부 침탈을 염려했던 상황실에서는 지도부와 지도부 보위를 위한 선봉대를 배치하여 민주노총 사무실 주변에 은신시키고 있었는데, 마침 그 건물 앞으로 해방의 트럭 150여대가 시속 20km로 서서히 지나가고 있던 모습을 보았다.
우리는 환호와 만세를 불렀다. 마치 히딩크처럼 폼을 잡으면서...
필자는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건물에서 내려와서 차량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화물연대의 띠자보를 쫙 펴서 길가에 서 있었다.
띠자보의 글씨는 당당히 빛나고 있었다.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
이날 1차 차량 준법투쟁이 끝나고 난 후 자본은 0.5%를 더 인상해서 12.5%를 제시했다.
자본은 그날 내내 노동에 대한 두려움과 치욕에 파묻혀 떨고 있었다.
한편, 차량 준법 투쟁을 성공적으로 끝낸 조합원들의 표정은 정말 엄청났다.
어쩌면 그리도 환하고 밝을수가 있단 말인가?
입은 째져서 전부 귀에 걸려 있고...
군데군데 천막에서는 무용담에 취해... 목청을 높여가고...
물고기가 물을 만났다고나 할까?
운짱들에게 5~6일 정도를 운전 못하게 하고, 투쟁한답시고 천막에 가두어 놓았으니 그들에게는 완전히 감옥이 따로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차량을 몰면서 투쟁을 하게 하니 이건 완전히 날개를 달은 꼴이었다.
투쟁을 마치고 저녁 늦게 배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있는 영웅들의 모습을 해방광장에 서서 하루를 마감하여 떨어지고 있는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바라보았던 필자는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이었을 게다.
그날 저녁 우리는 다시 스크린을 올려서 기본 좋은 비디오 한편을 동지들의 어깨를 걸고 감상하면서 아무도 예상치 못한 긴박하게 다가올 다음날의 투쟁을 맞이하고 있었다.
포항 송도나 북부해수욕장이 있는 바닷가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의 눈에는 포스코가 휘황찬란하게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노동자들은 포스코의 불빛을 분노의 이를 갈면서 쳐다본다.
그날 밤 화물노동자들의 분노가 포스코의 휘황찬란함의 불빛을 끄고 있었다.!
화물연대 파업투쟁 8일간의 기억 - 6
14. 굉음! - 해방을 향한 진군
5월 5일 어린이날 포스코 3문 앞에서 진행된 전면봉쇄투쟁은 화물연대 투쟁을 전국적 대투쟁으로 밀고 가는 도화선이 되었고 이러한 투쟁소식들은 최첨단 통신기기인 TRS(1편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음)와 휴대폰을 통해 화물연대 조합원들에게 순식간에 전파되었다.
당시 포항지역 화물투쟁은 포항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넘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으며, 포항지역 파업투쟁의 대오에는 부산, 충청, 대구경북, 경주, 영천, 양산 등을 비롯한 영남지역 동지들이 조직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감동적이었던 연대의 한 순간을 소개하고자 한다.
5월 7일!
포항지역 화물투쟁이 중반을 넘어 고비를 맞이하고 있을 때, 그 고비를 돌파하기 위한 지도부와 화물조합원들의 투쟁은 정말 처절한 몸부림 그 자체였다.
하루 24시간을 빢빡한 일정에 맞춰 교대근무를 서고 있던 조합원들의 몸과 마음이 서서히 지쳐가고 있을 즈음이었다.
화물조합원들은 하루에 최소 3번에서 4번을 근무지(포항지역 주요 통행 13군데 지점)에 근무를 서고, 잠은 냉기와 습기가 한정 없이 올라오는 천막에서 새우잠을 5일 이상 잤으니 정말 몸이 말이 아니었다.
밖에서 잠을 자본 경험이 있는 분들은 다 아실 것이다.
그러던 5월 7일 오전 10시경 울산지부 동지들의 TRS가 요란하게 울려 댔다.
"지부장님! 우리는 우짭니까? 지금 포항으로 출동하까요~ 마까요?"
"전체 대오 정비를 해서 포항으로 진격하시기 바랍니다."
포항의 투쟁상황을 TRS를 통해 알고 있던 울산지부의 소속 화물조합원들이 이 투쟁에 동참하기 위해 포항으로의 진격투쟁을 감행한 것이었다.
이날 애초에 파악하기로는 트레일러 70대라고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무려 80대가 넘었다.
한번 상상해 보라!
보통 승용차 80대가 늘어서서 국도로 진입한다해도 그 장면은 엄청 날텐데, 무려 트레일러 - 한 대당 십수M 길이 - 80대가 모여서 오니 그것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날 포항경찰은 난리가 났고, 언론 역시 이 상황을 파악하고 보도하느라 야단법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침에 출발한 차량행렬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오후부터는 슬금슬금 그 지랄 같은 봄비가 뿌려대더니, 급기야는 바닷가에서 불어닥치는 샛바람이 자신의 위세라도 과시하려는 양 정말 발광을 했다.
임시 식당을 위해 무대 주변에 묵어 두었던 비닐천막이 찢어지고, 정말 난리가 따로 없었다.
포항투쟁 대오는 으슬으슬 엄습해오는 한기와 외로움에 약간씩 그 힘겨움을 간간히 토해내고 있었다.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줄 그 무엇인가가 절실히 필요할 때였다.
빗물과 함께 섞인 국밥 한 그릇을 떼우고 있을 때였다.
TRS가 다시 한번 진동하고 있었다.
울산지역 동지들 80여명이 그 당당한 트레일러를 앞세우고 포항시내로 진입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포항 공단 전역의 도로가 이미 마비되었다는 것이었다.
울산동지들이 포항으로 진격하는 동안 울산, 경주, 포항의 주요 국도가 차례차례 막혔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필자는 다시 한번 무대위로 우의를 걸치고 튀어 올라갔다.
"사랑하는 동지 여러분!
역사적인 투쟁! 세상을 바꾸는 투쟁! 이 지긋지긋한 노예와 굴종의 삶을 뒤엎어버리기 위한 화물연대 투쟁을 지원, 엄호하기 위해 울산지역 동지들이 비바람을 뚫고 우리들의 품안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뜨거운 박수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해방광장은 화물노동자들의 굳은살 베긴 그 억센 손으로 두들겨 대는 박수소리로 흔들리고 있었다.
다시 1시간이 흐르고, 울산의 선도차량이 쌍라이트를 켜고, 굉음을 울리면서 포스코3문을 지나 해방광장을 향해 서서히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을 때 우리는 모두 서서 기립 박수를 치면서 쏟아지는 빗물과 함께 뜨거운 동지애에 감동 받은 사나이들의 빗물을 퀭한 눈속에서 하염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마침내 해방광장은 생기가 돌면서 바쁘게 돌아갔다.
우선 울산동지들을 대접(?)하기 위해 식당조 동지들의 손과 발놀림이 더욱 바빠졌고, 국솥과 밥솥에서는 피시식 피시식 요란한 수증기 소리를 내면서 울산동지들의 차가운 몸을 녹여줄 준비를 해갔다.
비를 맞으며, 동지가 해주는 밥을 동지가 받아들고 후루룩 후루룩 주린배를 채워 나갔다. 해방광장을 짓누르고 있던 어둑어둑한 어스름 사이에서 번쩍이는 동지들의 안광은 또 하나의 승리를 가능케 해줄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밥이 아니라 잠잘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루하루 100명 이상의 조합원들이 늘어나서 더 이상 천막과 텐트로는 도저히 울산 동지 80명을 수용하기가 불가능해 졌다.
상황실과 울산지부 지도부는 긴급하게 다음과 같이 결정을 내리고 준비했다.
울산지부 기존 결합된 동지들 외에 80명의 추가 결합 동지들을 위해 컨테이너 박스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어느새 거대한 25톤 카고트럭에서는 컨테이너 박스 2동을 해방광장에 내려놓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25톤 카고트럭위에 천막(갑바 - 덥개)을 치고 잠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상황실의 걱정은 언제나 그렇듯이 기우에 불과했다.
또다시 대중들이 지도부를 감동케 하고, 반성케 하는 대목이었다.
이미 해방을 향한 진군에 참여한 노동자 군대는 밥과 잠자리가 더 이상 문제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험난한 길을 폭우와 폭풍을 뚫고서라도 오직 하나! 내 사랑하는 동지를 위해 달려 왔던 것이었다.
그것도 하루 한바리(십수만원)의 일당을 과감히 포기하고서 말이다.
울산동지들의 연대 소식은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결과를 주었고, 반대로 자본과 권력에게는 큰 타격을 주는 비보였던 것이다.
특히, 경찰은 당황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고, 이후 이 울산결합투쟁은 자본과 권력으로 하여금 교섭에 있어서 방어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도록 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들은 확실히 겁을 먹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우리는 결국 5월 8일부터 진행된 교섭에서 전반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동지들이 함께 주축이 되어 5월 8일 아침에 그 엄청난 구보를 하며, 언론을 통해 등장을 해버렸으니...
우리는 포스코 3문을 지나 해방광장으로 보무도 당당히 진군해오던 그 울산지부 80대의 트레일러 행렬과 굉음 소리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더 생생해지는 이상한 경험을 하고 있다.
화물노동자들에게 이미 지역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지배세력이 만들어 놓은 지도상의 구분이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포항도 울산도 없었다.
오직 화물노동자라는 자랑스러운 훈장과 영광만이 있을 뿐이었다.
십년 아니 20년 이상을 핸들대에 메달려 곡예사와 같은 인생을 살아왔던 운짱들에게 있어서 크락숀 소리는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또는 좀더 악바리 같이 살기 위해 다른 차량을 추월하기 위한 생존의 소리였었다.
그러나 5월 7일 우리가 들었던 크락숀 소리와 트레일러의 엔진소리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연대의 함성이었으며,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능가하는 훌륭한 교향곡이었다는 사실을 아마도 해방광장에 서서 비를 맞으며 박수를 쳤던 모든 동지들은 충분히 동의 할 것이다.
언제 다시 그 아름답고 가슴뜨거워지게 하며, 사나이 눈시울을 붉어지게 만들 불후의 명곡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5월 7일 지역의 장벽을 깨부순 연대의 진군은 폭풍우 속에서도 그렇게 빛나고 있었다.
새로운 승리라는 미소를 머금은 채…
15. 언론은 통제되어야 한다!
이번 화물연대의 투쟁이 전국적으로 급속하게 확산되고, 온 국민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뭐니뭐니 해도 언론의 보도가 한몫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초기 제일먼저 화물투쟁을 보도했던 YTN을 비롯한 수구보수 언론들의 보도행태는 아예 화물노동자들의 염장을 지르는 일이었다.
상황실과 지도부에서는 어차피 언론이라는 것 자체가 절대 우리들 편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인식 하에 출발하면서 언론에 대한 관리 원칙을 내부적으로 설정해 놓고 있었다.
1) 한시간 교섭하고 20분 언론 브리핑 한다.
2) 언론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부장과 지부자의 지침을 받은 홍보위원장이 담당한다.
사실, 1번항은 그런 대로 잘 진행되었다.
교섭팀들은 교섭을 하고 난 후 전국에서 모여든 기자들을 향해 교섭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 아주 상세하게 브리핑을 함으로써, 나름대로 객관성을 유지한 기사가 언론에 보도되게 하였고, 특히 화물노동자 삶의 문제에 대한 본질적 부분을 다룰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2번 항의 경우에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사실 언론사 기자들에게 화물연대 투쟁은 특종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던 것이다.
교섭위원들을 비롯한 지도부와 상황실에 있는 필자까지 정말 언론사 기자라면, 진저리를 칠 정도로 시달렸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MBC의 아주특별한 아침(제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같은 주부들 프로그램에서도 밀착취재를 하러 왔고, 주요 방송사를 비롯한 언론기자들은 기획취재를 위해 무차별적으로 조합원들에게로 접근해 왔다.
우리는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 기자양반들이 화물노동자가 어떤 구조속에서 착취당하고, 또 어떤 관계속에서 노동을 하고, 또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기획취재나 보도를 했을 때, 자신들의 예정된 각본대로 기사를 멋대로 써내려갈 개연성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뿐만아니라 무턱대고 아무 조합원이나 붙잡고 취재를 진행한다면, 기사 내용이 침소봉대 될 수도 있었다.
일단 상황실에서는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렸다.
1) 지도부를 제외한 모든 언론사와의 접촉은 절대 금지한다.
2) 일방적으로 화물연대 투쟁을 폄하한 YTN, 조선일보는 취재를 금지한다.
이로 인해 정문경비대에서는 대부분의 언론기자들의 해방광장 출입을 철저하게 금지시킴은 물론, YTN과 조선일보는 아예 취재 자체를 못하게 막았다.
그들의 반발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 적이었다.
예외적으로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에 대해서는 약간의 취재편의 - 필자가 직접 현장에 와서 취재하게 하고, 지도부와 연결 시켜줌 - 를 제공했다.
전쟁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었다.
적과 아군 2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일보의 경우에는 필자가 직접 막았다.
"당신들의 그간 보도 형태나 기사 내용을 보면, 완전히 노동자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사람들 같다. 우리는 당신들을 정상적인 언론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언론이 취해야 할 기본적인 역할도 하지 않는 보수수구세력들의 입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이 주변에서 나가라!"
이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복면을 하고 있던 우리 정문경비대는 보수 수구세력들의 상징 좆선일보를 해방광장에서 밀어내 버렸다.
이후 해방광장에서는 더 이상 조선일보 취재차량을 볼 수 없었다.
5월 9일 투쟁의 마직막 날 언론사 기자들은 정말 전쟁이었다.
우리들이 해방광장에서 투표와 개표를 하려고 하자, 우리 대오에게 접근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정문경비대에서는 상황실의 지침에 따라 언론기자들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방광장 고수부지 위에는 방송3사를 비롯한 기자 50여명이 진을 치고,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대고 있었다.
투표가 진행되기 전인 5월 9일 대오정비를 하고 있을 때 사회를 보고 있던 필자에게 평소 안면이 있던 MBC지역방송 카메라 기자가 다급하게 SOS를 요청해 왔다!"
"0부장님! 부탁있는데요~ 우리들 중에 선별해서 방송 카메라 1명, 일반 카메라 1명 두명만 취재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필름은 같이 사용하는 것으로 하고요~ 부탁합니다."
"예~ 논의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논의후 상황실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기자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송카메라, 일반카메라 기자와 기자증이 있는 기자만 출입시키고, 취재는 원칙적으로 무대위에서 하는 것으로 한정한다.
아울러 개별 조합원 접촉 취재는 금지한다라는 것이었다.
상황실의 통제에 따라 취재는 시작되었다.
필자는 생전에 그렇게 많은 카메라와 기자들은 처음 보았다.
투개표시 딱 한번의 상황이 발생했는데, 투표장면을 취재하기 위해 몇몇 기자들이 무대를 벗어나 카메라를 돌리고 있었다.
필자는 그 더러운 성질을 폭발시키고 말았다.
"전체 투표 중시하십시오! 그리고 지도부는 전체 일정 중지하십시오!
그리고 지금 무대 아래에서 취재하고 있는 기자분들은 전체 나가 주십시오!
자~ 조합원 여러분!
만약 무대위를 벗어나서 취재하시는 분이 있으면, 기관원으로 단정하고, 카메라를 뺏고, 해방광장에서 추방해 주십시오!"
이후 무대 아래 본대오 주변에는 단 한명의 기자도 찾아볼수 없었다.
필자는 언론을 통제한 것이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혼란은 훨씬 컷으리라 생각한다.
아울러, 5월 9일 투개표를 제대로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투쟁의 중심에 서서, 해방의 중심에 서서, 모든 것을 우리가 제어하고 조율하고, 또 관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획득이 중요하다고 본다.
5월 초 우리는 이미 중심이었다.
16. 아~ 참! 쪽팔리서~ 교섭장에서 일어난 해프닝!
5월 8일 투쟁은 기로에 서 있었다.
파국이냐 타결이냐~
자본과 권력은 다양한 통로와 다양한 기제를 통해 우리를 압박해 들어 왔고, 우리들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과 권력을 공격해 들어가고 있었다.
며칠전부터 지도부에 대한 긴급체포 소문이 무성해지면서, 우리는 결사대 동지들 가운데 가장 젊은 동지들을 중심으로 지부장을 비롯한 지도부 사수조로 배치했다.
그런데, 몇몇 통로를 통해 확인해 들어갔을 때, 교섭위원 대부분에 대한 사법처리 방침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5월 8일 저녁부터 우리는 지도부에 대한 보위를 구체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교섭에서는 우리가 마지막 수정안을 제시하고, 결렬되면 파국으로 돌입할 것이라는 초강수를 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교섭의 중심을 맡고 있던 운송하역노조 조직국장의 PDA에 긴급메시지가 떴다.
"지도부 8명 긴급체포 영장 발부 !!!"
조직국장은 상황실과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사수조에게 긴급 병력 요청을 해왔다.
상황실에서는 사수조 30여명을 지도부(교섭단) 보위를 위해 교섭장소 주변에 긴급히 배치했다.
교섭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한마디로 시계제로였다.
그때가 22:10분경이었다.
긴급히 파견된 사수조의 5명은 교섭장 안에, 나머지 25명은 2열로 지어서 교섭장 밖에 대기하고 있었다.
지루한 교섭이 진행되다가 교섭이 잠시 정회되었고, 이때 취재를 위해 밖에 대기 중이던 기자들이 교섭위원들에게 질문하기 위해 달려드는 것을 사수대 동지들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긴급 체포하려는 사복경찰로 오인하여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우리의 믿음직한 사수대 전사들은 기자들과 교섭위원 사이를 가로막고 나서 지도부를 보위하기 위해 육탄으로 방어하기 시작했다.
몸싸움이 벌어지고 욕설이 난무하고...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사복조가 아니라 기자였다.
사수조는 대오를 정비하고, 다시 전열을 갖추었다.
솔직히 억수로 쪽팔리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주워 담을 수도 없고...ㅎㅎㅎ
우리보다 더 놀란 것은 주변에 있던 정보과 형사들이었다.
게다가 교섭테이블에 나왔던 사측 교섭위원들은 얼굴이 완전 하얗게 질려버렸다.
기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분위기는 마치 월드컵 축구할 때 페널티킥 순간과도 같았다.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자 해프닝이었다는 사실을 누구나가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해프닝 속에서 모두가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여차하면, 몸으로라도 붙어버리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두 번은 안되지만, 한번쯤은 괜찮은 해프닝으로 평가하면서, 우리들은 한바탕 소리내어 웃는 것으로 그 사건을 마무리했다.
아직도 궁금한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그순간 그 자리에 KBS뉴스 생방송을 하고 있던 여기자와 카메라맨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보도했을까?
방송사고로 보도했을까?
아니면...?
아~ 너무 궁금하다~
그러나 2003년 남한노동계급은 퀭한 눈에 거스름한 수염턱에, 비듬이 폴폴 떨어지는 씻지 않은 머리칼에, 쉬어 쇳소리를 내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영웅이라 칭하게 되었다.
그들은 보잘 것 없는 외모에 나이 50을 훌쩍 넘어 70이 다된 할아버지에서부터 이제 갓 대형면허를 땃음직한 앳된 얼굴을 한 약관의 나이를 가진 혈기방장한 청년이었을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눈만 떳다 하면, 개혁을 씨불렁거리는 노무현 대통령과 노빠 패거리들의 9시 뉴스 헤드라인 입성을 한방에 날려 버리고, 어느날 갑자기 우리들 눈속으로 마치 게릴라처럼 침투해 버렸다.
우리가 칭송하는 영웅들은 우리들이 무료한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언제나 큰 의미없이 스치고, 부딪히고, 싸우고, 웃고 울던 누군가가 이야기했던 보통사람들이다.
그러나 바로 이들에 의해 2003년 남한의 역사는 새롭게 기록되었고, 당당히 자신들의 이름을 이 세상 전면에 선명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혼자 잘난 영웅이 아니라 거대한 파도처럼, 해일처럼, 산이 되고, 바다가 되어 어느날 갑자기 다가온 영웅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역사라는 연극의 주인공인 것이다.
2003년 5월 화물노동자들의 위대한 투쟁은 사실 많은 보이지 않는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영웅들에 의해 이끌어져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강요하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 그들은 투쟁을 즐거워했다. 아니 차라리 환호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2003년 5월 2일 투쟁의 깃발이 오르자마자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난관으로 다가왔던 것이 먹는 것과 자는 것 그리고 근무조를 편성하는 것이었다.
특히 먹는 문제는 심각했다.
지도부의 한 동지께서 왈 "우리 기름쟁이들은요 다른 것은 다 말잘 듣고 괜찮은데, 밥 안 묵있다카믄 뚜껑열리가꼬 폭동일어납니데이~"
첫날 400명 집결에 도시락 500인분이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증발해 버렸다.
아이고... 장차 이일을 우짜믄 좋노~?
궁즉통이라 ...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포항지역에는 포스코에서 일하고 있는 최하층의 일용직 노동자들이 있고, 이들의 조직적 결사체가 바로 포항지역건설노동조합이다.
건설노조는 민주노총포항시협의회의 핵심사업장이기도 하다.
흔히 이야기 하는 노가다 일용직이지만, 벌써 10년전에 월차, 주차등 기본적인 근로조건은 확보해 놓고 있는 베테랑 노동자들이다.
이들이 수년간 파업과 투쟁을 하면서, 노하우가 생겨서 많은 경험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중 가장 큰 노하우 중의 하나가 바로 대규모 군사들을 먹이는 실력이다.
보통 일년에 한두차례의 총회때 1500인분의 밥은 거뜬하게 해낸다.
실제 포항에서는 건설노조의 소고기국밥의 그 진한 맛을 못 잊어 일부러 건설노조 총회때 찾아와 한그릇 뚝딱하는 노조간부들도 있다. - 진짜입니다.
건설노조 후복부장 (이름이 좀 특이합니다. 공장근 - 이름 덕택에 노조운동 하시는 것 같기도 함.)에게 급히 구원요청을 했다.
한시간이 지나자 직접 후복부장이 오셔서 건설노조에서 공수해온 1,000인분 밥할 수 있는 장비를 직접 작동 시범까지 보여주시며, 식당조로 편성된 성우지회 동지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노하우(밥한지 벌써 5년째 입니다.)를 전수해 주셨다.
5월 3일부터 영웅들의 활약이 시작되었다.
성우지회의 경우 대부분 나이가 50을 훨씬 넘은 고령의 노동자들이었는데, 불평 한마디 없이 핸들 대신 쌀을 씻고, 설거지를 하시고, 무를 썰고, 김치를 자르고, 콩나물 껍질을 벗기고... 그들은 한마디로 무슨 마술사 같았다.
그들의 손이 한번씩 지나갈 때면, 우리 동지들의 살과 피가 될 음식(실탄)을 얼마 지나지 않아 뚝딱 만드시는 걸 보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평생을 단 한번도 밥이라는 것을 해보시지 않고, 남들이 만들어 주는 밥만을 드시다가 이제 투쟁과 해방의 현장에서 보급부대라는 막중한 사명감 하나로 동지들의 식사를 책임진 그들이 만든 밥과 국은 형편없는 삼층밥이 아니라 실제 맛있었다.
그리고 메뉴도 매끼마다 바뀌는 것이었다.
소고기 국밥에서 동태국으로 다시 닭백숙으로 다시 해물탕으로 ...
새벽 3시경부터 식사를 준비하는 손길이 시작된다.
불을 지피고, 물을 데우고, 쌀을 씻고, 국을 끓이고...
동이 터오고 새벽 근무조가 교대해서 들어왔을 때 이미 모든 식사준비가 100% 완료 되어 있었으니 수고한 손길이 그 얼마나 정감 있고 고마울 수가...
아침을 먹을 때 이들은 점심을 준비하고, 점심을 먹을 때 이들은 이미 저녁을 다 만들어 놓고 있어야 했다.
사실 운짱들의 입맛이 깐깐하기로는 알만한 세상사람들은 다 안다. 그래서 미식가들은 기사식당을 일부러 찾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별난 입맛의 운짱들도 해방광장 화물연대 식당에서는 한마디 불평불만이 없다.
자신과 똑같이 기름밥 먹는 동지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온갖 정성을 다 모아 만든 밥이기에 어찌 불만을 가질수가 있겠는가?
지난 8일동안 그들은 밥을 먹은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었던 것이다.
특히나 5월 5일 어린이날 대항쟁때는 식당조 영웅들의 활약상은 정말 대단했다.
포스코 3문을 봉쇄하고, 곧이어 전제 문이 봉쇄되었을 때 투쟁 대오들은 아예 식사를 엄두에도 못내고 있었다.
포항지역 13군데에 배치되어 있던 포스코 3문 봉쇄조 이외의 동지들은 그날 새벽부터 근무교대없이 식사도 하지 못하고 있던 차 였다.
그러나 이 위대한 영웅들께서는 식사를 준비하자마자 조를 나누고 봉고차를 비롯한 차량에 싣고 그대로 투쟁현장으로 급파되어 그 자리에서 배식과 설거지, 잔밥처리까지 정말 깔끔하게 처리하였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저녁을 준비해서는 대형식당트럭 (지난 대선때 민주노동당이 운영했던 뚜껑열리는 차량 - 이름을 몰라서) 자체를 현장에 급파해서 무려 3시간 동안 배식과 설거지를 포스코 앞에서 했던 것이다.
이미 그들은 슈퍼맨이 되어 있었다.
그런 중간중간에 또 돼지고기까지 배급했으니...
사실 필자와 상황실에서는 이들에게 주문만 했었다. 뭐 해달라 뭐 해달라...
한번도 그 주문을 위배하거나 시간을 어긴 적이 없었다.
그 덕분에 8일 내내 엄청난 재정을 아낄 수 있었고 - 도시락을 먹었더라면 보통 한끼당 300~500만원 소요 - 뚜껑이 열려 폭동이 일어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식당조와 함께 이번 포항투쟁을 견고하게 흔들림 없이 잘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준 영웅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정문경비대 동지들이었다.
전편에서 이들에 대한 에피소드는 이미 소개되었으므로 다른 내용을 서술코자 한다.
정문경비대 동지들은 어느 지회나 조직에서도 약간은 자유로운 사수대 산하의 별동대 같은 조직이었다.
자체로 인원을 짜서 아예 먹는 것, 자는 것, 교대하는 것 등을 완전히 자체적으로 진행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자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만큼 철저하고 견고하게 자신들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주었다.
그들 덕분에 기관원이나 언론, 씨씨껄렁한 시정잡배들이 얼씬도 못하게 우리의 대오를 안전하게 보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화물트럭과 수많은 차량이 지나갔음에도 단 한차례의 사소한 접촉사고도 없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철저한 태도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울러 마직막 5월 9일 투개표 하는 순간까지도 자신들의 위치를 이탈하지 않고 꿋꿋이 역할을 수행해 주었다.
그 동지들만 생각하면, 지금도 믿음직하다!
식당조, 정문경비대, 그리고 동방지회의 고문님! 순찰조 동지들! 대오이동을 책임졌던 버스운전 동지 등등 정말 주마등처럼 그들의 얼굴이 스쳐간다.
그들은 이름 없는 전사가 아니라 진짜 영웅들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높이지 않는 참 멋진 아저씨 영웅들~ 지금쯤 고속도로 위에서 TRS를 켜고 있을까? 아니 어느 허름한 휴게소에서 식사라도 하시고 계신가~
왜 이리 영웅들이 보고 싶은가? 아마 오늘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5월 7일 그 폭풍우가 생각나서 일게다!
영웅 화이팅!
화물연대 파업투쟁 8일간의 기억 - 여덟번째 7/14
늦어서 죄송합니다. 새롭게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제 구속자 6명에 대한 검찰조사는 끝났구요~ 기소된 상태에서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혼났습니다.
::::::::::::::::::::::::::::::::::::::::::
18. 슬로건의 변화 과정
슬로건은 요구와 내용이 함축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투쟁 결의의 표현이다.
화물연대 포항투쟁이 맨 처음 시작될 때, 화물연대 동지들의 구체적인 요구사항이나 내용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막연하게 운송하역노조의 12개 요구사항 (주로 대정부적인 내용)을 기반으로 투쟁하고, 현실 운송료를 인상시킨다는 것 정도의 내용이 내부에 흐르고 있던 암묵적인 내용이었다.
상당히 즉흥적인 면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초기 슬로건 역시 상당히 추상적이고 즉흥적이었다.
초기 화물연대 조합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외쳐진 구호 중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화물노동자 총단결로 확 엎어불자!"
이 슬로건은 당시 화물연대 조합원들의 심경을 솔직하게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요구내용이나 대상에 대해 구체적이고 정형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 그리고 폭발직전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이 슬로건은 대중들의 정서를 전적으로 담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투쟁의 경로를 설정하고 요구를 어떻게 가시화 할 것인가 하는 내용이 표현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 슬로건 속에는 화물노동자들의 투쟁이 폭발성을 담고 있으며, 전면적인 투쟁으로 전화될 수 있는 맹아들이 숨어 있기는 했지만…
투쟁이 시작되고 2~3일이 지나면서,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눈에 가장 거대한 대립물로 포스코가 다가왔다.
포스코가 나머지 화주업체들을 꼬드겨서 화물연대 파괴공작을 구체적으로 진행하고, 이후 화주업체들의 조직적인 교섭거부로 진행되면서, 포스코와의 한판 격돌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되어 가고 있었다.
포항투쟁의 가장 중요한 시점이었던 5월 4일부터 5일을 정점으로 다음과 같은 슬로건이 중심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판 붙어보자! 포스코는 각오하라!"
이 구호 역시 구체적 슬로건으로서의 기능보다는 강력한 대립물로 다가오는 적에 대한 분노와 투쟁의 의지를 모아내는 쪽으로 맞추어 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구체적 요구내용을 담은 경제적 요구인 경유가 인하, 운송료 인상, 12대요구 쟁취 등의 슬로건들이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5월 7일 8일에 즈음해서는 포스코라는 대립물이 가시권에서 튕겨나가고, 운송업체와의 실질적인 교섭이 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구호들이 외쳐졌다.
"운송료를 인상하여 인간답게 살아보자!"
이놈의 '인간답게 살자'라는 슬로건이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서까지 사용되어질 줄은 몰랐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7~8일날 집중된 구호는 운송료를 중심으로 한 생존권적인 요구 쟁취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으며, 이 요구 이상을 뛰어 넘는 현사회 구조와 모순에 대한 본질적 요구들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점은 이번 화물연대 투쟁이 가지고 있는 한계지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좀더 변혁적이고 자본과 권력에 대한 본질적인 요구와 투쟁을 담아내는 적절한 슬로건이 출현하지 않았다는 것은 투쟁지도부가 여전히 숙달되거나 훈련되지 않은 아마추어들이었다는 점과, 애초 투쟁의 첫 출발점에서 투쟁의 요구와 성격을 분명히 하지 않고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9.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 - '투쟁'과 '대중'의 진정한 의미
파업을 일컬어 자본가와 보수정당들은 난동이라 지껄이며 악다구니를 퍼붓지만 우리들은 멋있게 '노동자의 정치학교'라고 부른다.
노동과 자본의 격렬한 직접적인 대립 속에서, 평소에는 느슨하고 완만하게 진행되던 노동자의식의 변화가 단순간에 계급의식으로 발전, 상승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게 된다.
노동자들은 파업투쟁을 통해 자신이 발 딛고 서있는 현 사회구조 본질에 대한 인식의 접근을 이뤄내고 가슴속 깊이 내재하고 있던 그 폭발적인 계급적 본성을 회복하게 된다.
'투쟁'이라는 실천적인 의식적 행위를 통해 근로자에서 '노동계급'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아울러 파업이라는 집단적 행위를 통해 노동자들은 관념적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를 넘어 노동자민주주의인 민주집중제에 대한 집중적인 훈련을 받게 되며, 그 시스템을 몸으로 체화시켜 진정한 민주투사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화물연대 포항지부의 파업투쟁이 5월 7일을 경과하면서, 운송업체들의 버티기 작전으로 인해 교섭이 난관에 봉착하게 되면서, 민주노총 활동가들은 어떻게 당면한 현실을 돌파할 것인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다음은 민주노총포항시협의회 활동가들의 내부 토론의 한 과정을 소개한다.
- 야~ 이제 마무리 투쟁을 어떻게 할것인가도 고민을 슬슬 해야되는데 현장분위기는 어떻노!
- 최소 20%는 되어야 된다고 난리데이~!
- 조합원들은 지난번 대산 파업투쟁 때 15%로 타결되가꼬, 기본 15%는 따논 당상이라고 생각들 하는 모양이다.
10% 12%까지고는 아예 들이대도 못하겠다.
- 교섭 되가는 꼬라지 보니까 대가리 돌겠다.... 아이고~ 근데 20%를 우째 뺏들어 낸단 말이고~ 미치고 팔짝 뛰겠데이...
- 근데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프로수도 프로수지만 타결방식이 더 문제다카이
일단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조 박어 놓고 마무리를 해야된다카이~ 포스코 3문은 저리 세리 잠가놓고 오만상 씨게 박아뿟는데 그 뒷타가 없어가꼬야~ 되겠나?
우쨋든 전체 조합원들이 참여하는 대중적 2차 투쟁이 있어야 된다.
그래야 포스코나 경찰 청와대에서도 놀래지 안그래가꼬는 텍도 없다.
- 야~ 일단 내일 아침 총회 때 교섭보고하고 씨게 한판 박아뿌자
투쟁이 점점 상승되도록 내일은 약간만 맛만 보이주는 걸로 해가꼬 한판 박아가 마 저놈들 눈까리 확 뒤비지게 해야된데이~
- 그래 일단 내일 총회때 조짜서 조별로 포항전역 포위해서 압박해 들어오는 준법투쟁 전술 30% 정도만 가동시켜 보자~
만약에 그래가지고 공권력 들어오면, 일단 지도부는 흥해 한동대나 대구, 부산 안그라만 명동으로 숨겨 놓고, 2선 지도부 중심으로 전면 시가전 한판 하면 되지 뭐~
그쯤되면, 여기는 광주되는기다~
- 맞다! 근데 저거들도 쉽게 미친 짓은 못할끼다.
- 좋다! 내일 아침 총회 때 전체 조합원들에게 투쟁지침 설명하고, 각 지회별로 조짜서 포항외곽으로 스탠바이 하고 있다가 지침 내리면 그대로 박아뿌라
- O. K ! O. K ! O. K !
결론은 투쟁을 통해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모든 것을 마무리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교섭위원 몇몇의 기술이 아니라 철저하게 대중 스스로가 투쟁에 참가하고 대중 스스로가 결정해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즉, 타결이 10%가 되던 20%가 되던 그 수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조합원 대중 전체가 함께 투쟁에 참여하고, 또 함께 참여하는 그 투쟁을 통해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특히, 마무리 수순은 납득할만한 안을 끌어낸다 하더라도 반드시 조합원들의 투쟁을 몇 차례 거치고 난 뒤에 진행할 것을 결정했다.
이번 투쟁 속에서 우리 활동가의 역할은 열정과 환희에 빛나는 역사적 투쟁에 조합원들이 직접 참여하고 스스로 느끼게끔 열린 투쟁의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스스로 확인하고 다짐했다.
이러한 결론은 다음과 같은 실천행동을 만들어 냈다.
1)5월 8일 모든 지회를 6개조로 나누어 포항 외곽 6개 주요 거점지역에서 대기 한 후 지침에 의거 준법운행(포항진입투쟁 - 20KM 속도로 진입)을 시작한다.
2)5월 9일 모든 지회를 11개조로 나누어 포항 시내 전역에 대한 도로 진입 및 화주, 주요운송사 전면 봉쇄와 주변도로 준법운행을 시작한다.
투쟁을 통해 쟁취하지 않는 결과물은 쉽게 사라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몸으로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중 전체가 합의하고 함께 참여하는 것이 담보되지 않는 합의는 결코 긍정성을 나타낼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투쟁과 대중이라는 단어는 결국 노동조합 운동에 있어서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인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지난 수십년간의 노동운동사에서 너무나 비일비재하게 발견할 수 있다.
똑같은 결과라 하더라도 노동자 민주주의에 입각해 조합원 스스로 쟁취한 결과와 몇몇 지도부와 자본이 타협을 해서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결과는 이미 그 성격자체가 다른 것이다.
노동자 민주주의에 입각해 투쟁이라는 실천을 통해 결과가 쟁취되는 그 위대한 과정은 이미 단순한 산술적 논리가 아니라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 성격과 내용이 변화되는 것이다.
이번 화물연대 투쟁에 있어서 중요한 성과중의 하나가 바로 전 과정에 대해 화물연대 조합원 스스로 투쟁에 참여하고, 스스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게 말처럼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자본가나 보수야당 같은 기득권 세력들이야 죽었다 깨나도 모르겠지만…
니들이 민주주의를 알어~!
21. 전선을 사수하라! - 민주노총 대표자들의 결의!
이번 화물연대 포항지부의 파업투쟁은 연대의 손길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5월 5일, 5월 8일이 공교롭게도 공휴일이었고, 당시 포항지역의 경우에는 대부분 휴무기간이 길었거나 아니면, 대분분 노동조합에서 간부수련회 등을 개최하고 있어서 실제 포항에는 노조 간부들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화물연대 투쟁이 점점 더 탄력을 받으면서, 지역 노동조합들의 연대의 발길도 빨라졌다.
5월 8일 어버이날이자 석가탄신일인 이었던 관계로 민주노총포항시협의회 정기운영위원회 (노조대표자 회의 - 매월 첫째주 목요일 10:00)가 그 다음날인 5월 9일 10시에 개최되었다.
민주노총포항시협의회 의장(김병일 - 민주노총 경북본부장 및 민주노동당경북도지부장 겸임)이 마무리 교섭에 직접참여하고 급박한 현장 투쟁 지도로 인해 회의주재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회의는 수석부의장인 포항건설노조 위원장이 주재하였다.
이날 회의에서 포항지역 노조대표자들은 모든 안건을 유보하고 화물연대 투쟁 지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민주노총포항시협의회 공문 중에서 ...
[화물연대 포항지부 투쟁 지원 건]
1. 민주노총포항시협의회 운영위원회를 민주노총 전국운송하역노동조합 화물연대 포항지부 지원 투쟁본부로 전환한다.
2. 실무책임자는 민주노총경북본부 사무차창 배성훈, 금속노조 포항지부 조직부장 홍훈식, 민주노총포항시협의회 교육선전부장 김용식으로 한다.
3. 5월 9일(금) 15:30 노동부포항사무소 앞에서 전체 간부 및 퇴근조가 집결하여 투쟁대기 상태로 돌입한다.
4. 이후 간부파업 등으로 투쟁전선을 전면 확대한다.
※세부적인 사항은 투쟁본부 지도부의 지침을 따른다.
※화물연대 포항지부의 찬반투표 가결로 타결될 시 투쟁본부는 자동 해산된다.
위와 같은 공식적인 결정 외에 포항지역 노동조합 전체를 조별로 나누어 차량시위 투쟁 결합 방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해 들어갔으며, 아마 파국으로 치달았다면, 화물연대 차량과 민주노총 조합원 차량이 전체가 합세한 그야말로 장관인 멋진 투쟁모습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당시 민주노총포항시협의회 대표자들은 이 역사적인 투쟁에 대해 지원하지 않고 연대파업을 진행하지 않는다면, 천추의 한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로의 조건은 다르지만, 최대한 조직하여 전면적인 시가전을 비롯한 해방투쟁에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분위기 또한 자연스레 그렇게 흘러갔다.
대표자들은 긴급회의를 마치자 마자 - 이때까지 대표자들은 잠정합의된 줄을 모르고 있었다. - 잠정합의 후 조합원 총회를 하고 있는 해방광장에 함께 서서 그 진한 투쟁과 연대의 여운을 맛보고 있었다.
필자는 5월 운영위원회 결정을 보면서 민주노총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대해 다시 한번 한없는 기쁨과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다.
22. 거꾸로 김밥을 아시나요?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전면 파업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가장 먼저 알려진 곳은 민주노총도 언론사도 아니었다. 바로 주유소였다.
엄청난 기름을 소비하는 대형차들이 전부 국도변 갓길에 딱 멈추어 서버렸으니 주유소가 파리를 날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파업 첫날인 5월 2일을 제외하고, 그 다음날부터 포항 인근 지역과 국도변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각 주유소의 화물연대 구애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화물연대 조합원들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각 주유소마다 직접 사장님들께서 납시어서 컵라면, 드링크제품 음료수, 투쟁지원금이 든 돈봉투, 생수 등 온갖 물품을 찬조하고 돌아갔다. 이 물품의 높이가 어른 키보다 더 높게 쌓이기 시작했다.
아침은 컵라면으로 떼우고 점심과 저녁은 밥을 해서 배식을 했는데, 실제 하루인가 이틀인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아침을 찬조 물품으로 들어온 컵라면으로 해결했다.
5월 9일 파업투쟁의 마지막날 한 주유소에서 집에서 어머니가 말았음직한 고급 김밥 300개와 소형 생수 500개가 찬조물품으로 들어왔는데, 문제는 김밥이었다.
이날 아침 조합원 총회 때 긴박한 전면 투쟁을 앞두고 조합원들에게 점심을 배식 할 수가 없을 것 같은 판단이 들어서 점심은 직접 투쟁 현장에 빵과 우유를 배식하기로 하고 총 800개씩을 주문했다.
그런데 각 지회별로 빵과 우유를 배식하고 있는 순간에 그 망할 놈의 닭장차가 지나가고, 헬기가 뜨면서 상황실에서는 전면전이 발생한 줄 알고 전체 대오를 예정된 투쟁장소로 급히 출동명령을 내려버렸다.
결국 어떤 지회는 빵과 우유를 배식 받았고, 어떤 지회는 쫄쫄 굶으며 현장에 투입되어 마지막날의 그 화려한 봉쇄투쟁과 준법투쟁을 감행했던 것이다.
게다가 5월 9일 마지막 순간에 개표를 하면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인원이 무려 1100여명에 육박하고 있었다.
넉넉하게 잡아 800여명으로 계산하고 빵과 우유를 시켰으니 모자라는게 당연하지~!
오후 들어 600여대의 차량이 굉음을 울리면서 포항 전 지역을 틀어 막으면서 역사에 길이 남을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놀란 자본과 권력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게 되었고, 지루하게 진행되던 교섭이 잠정합의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이에 지도부는 잠정합의에 따른 지침으로 전 차량에 대해 복귀명령을 내리게 되었고, 전체 조합원들은 거의 2시 반이 되어서야 해방광장에 모이게 되었다.
해방광장에 모인 조합원들은 대오를 정비하고 난 다음 제일먼저 밥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대형트럭을 몰고 포항전역에 대한 준법투쟁으로 점심을 건너뛰고 만 것이었다.
정말 난리가 났다.
울산지부의 경우 대오 점검을 하고 난 뒤 조합원들에게 못다 나누어준 빵과 우유를 배급하기 시작했고, 나머지 지회들은 제대로 지급이 되지 않아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그때 식당에서는 김밥300개를 배식하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뿔사~ 잘못 배식했다가는 큰일 나겠다. 음..."
"배식조~! 배식조~! 김밥 배식 전면 중단 !!!"
상황실에서는 김밥 배식을 전면 중단시키고 배식조와 협의한 후에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렸다!
"빵과 우유를 배급 받은 조합원들과 직책을 맡고 있는 전 간부는 배식 금지합니다!"
"자신이 김밥 한줄 몰래 더 먹을 때 다른 동지들 허기진 배를 움켜쥔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간부들은 이름만 간부가 아닙니다. 책임과 의무는 많고 권리는 하나도 없는게 간부 아닙니까? 자! 저 줄서 있는 대오 가운데 간부들은 전부 옆으로 빠져 주시고, 빵과 우유를 배급 받은 동지들도 속히 빠져 주십시오! 모든 배식은 거꾸로 진행합니다."
이후 상황실 담당자들은 배식조 옆에 붙어서 해인사 출입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의 그 부릅뜬 눈처럼 눈알을 부라리면서 간부들을 솎아내고, 줄을 서서 김밥을 받고 있는 조합원 한사람 한사람의 눈을 마주치면서 말없는 협박을 가하고 있었다.
빵 먹은 사람 김밥 먹지 마라고 고래고래 고함 치는 눈빛으로…
내원 참~ 분위기 조금 살벌했죠~
그런데 아무도 군소리 없이 질서정연하게 김밥을 배식 받았고, 배식이 끝난 후에도 상황은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때 필자의 귓등을 스쳐 지나가는 밉지 않은 투정소리가 있었다.
식당차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모 지회의 간부 한사람이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간부할라면 단식부터 배워야 겠네~"라고 하자 주변의 동료들이 같이 웃어주며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가장 낮은 곳으로…
우리는 그 김밥의 이름를 거꾸로 김밥이라 불렀다.
300개의 거꾸로 김밥은 그렇게 우리 조합원들의 창자속으로 들어갔고, 아마도 김밥으로 태아난 놈들 중에 가장 행복한 생을 마감했는지도 모른다.
서로 먹으려고 다투고 싸우다 김밥옆구리라도 터졌다면, 얼마나 불행했겠는가?
사소한 하나의 일상 속에서도 혁명적 규율과 민주주의를 배워가고 또 실천했던 화물연대 동지들을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던 6월 7일 포항지부 3차 임시총회에서 다시 만났다~
필자가 지나가는 물음으로 툭 던져 보았다.
"파업 마치고 집에 형수님들이 해주던 밥이 맛있던교 아니면 식당조 나이 많은 성우지회 형님들이 퍼주던 국밥이 맛있던교~?"
"말하마 뭐하노! 국밥이 훨씬 맛있다카이~"
"김밥은 요~?"
"하이고~ 그때 그 김밥 맛을 잊을 수가 있나~"
거꾸로 김밥처럼 이놈의 세상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야 살맛이 날것이다.
세상은 김밥을 닮아야 한다.
23. 200과 1098의 차이?
5월 2일 파업 첫날 200명에 조금 모자라게 모인 인원이 하루가 지날 때마다 평균 130여명씩 늘어났다.
결국 5월 9일 파업 마지막날 투표에 참가한 전체 조합원 숫자가 1098명이었다.
통상적으로 파업을 진행하게 되면, 조합원 숫자가 줄어 드는게 일반적 현상이다.
게다가 금속사업장과 같은 현장에서의 파업을 대부분 출퇴근 파업을 하고, 사수조나 농성조 그리고 지도부만 현장을 지킨다.
그런데, 화물연대의 경우 훤하게 뻥 뚫린 야외공간에서 숙식을 하면서 파업을 하는 악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이탈은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대오가 비바람과 폭우에도 파업현장을 지키면서 게다가 날이 갈수록 조합원이 점점 늘어나는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참으로 불가사의 한 현상이다.
꼭 맞다고 장담은 할 수 없지만, 필자나 주변 동지들의 견해를 종합해서 판단해 보자면,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1)화물연대 노동자들의 경우 하루 짐을 실고 그 작업을 마무리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대략 1~3일 정도 되기 때문에 최종 집결하는데 일정부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화물연대 파업의 파고가 높아가면서 눈치를 보고있던 대부분의 화물운전사들이 작업 강행 보다는 파업동참 쪽으로 분위기가 많이 쏠렸기 때문이다. 초기 통제권을 벗어난 상태에서 발생한 비조합원과 화물연대 조합원과의 격렬한 마찰 등 몇가지 사건이 포항, 경주, 영천 등 인근지역에 파다하게 소문이 나면서 화물기사나 알선사무소 사장들이나 지레 겁을 먹고 아예 작업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3)아울러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화물연대에 가입하지 않고는 향후 화물일을 할 수 없을것이라는 위기감과 분위기가 전 지역을 감싸고 있었다. 이것은 결국 한시라도 빨리 조합에 가입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감마저 만들어 내게 되었고, 이러한 실증적 예는 화물연대에 가입하기 위해 해방광장 언덕에서 사수대에 막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그 행렬이 웅변해주고 있다. 가입비 12만원인데도 불구하고...
4)그리고 화물연대 교섭팀(운송하역노조 조직국장, 민주노총경북본부장, 민주노총포항시협의회 교선부장, 법규부장, 화물연대 지회 교섭위원들)에서는 철저하게 교섭하고 언론 브리핑하는 방식으로 대부분의 교섭상황을 아주 정밀하게 공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인해 매일매일 또 매순간 순간의 상황이 아주 상세하게 언론에 보도되었고, 이러한 내용을 접한 대부분의 화물기사들이 이번 싸움이 화물연대의 승리로 달려가고 있다는 일종의 확신을 가졌지 않은가 판단하고 있다.
5)부분적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화물노동자들이 학연, 지연 등 아주 다양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다. 동네 선후배지간은 말할 것도 없고 다 개인적인 친분 또는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화물연대의 상황이 입소문을 통해 다양하게 전해지면서, 가입하지 않으면 왕따당하는 분위기가 그들 내부에 형성되어 있었다.
실제 200과 1098의 차이는 898이라는 숫자상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200이 500을 넘고 1000을 넘어 서고 있을 때 숫자의 의미는 단순 증가가 아니라 이미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고 또 경험했다.
200과 1098의 차이는 아라비아 숫자 898
200과 1098의 차이는 세상을 바꾸는 파괴와 건설의 힘!
200과 1098의 차이는 우리 스스로를 노동계급으로 자각하게 해준 빛
200과 1098의 차이는 노무현 정권의 본질을 폭로하게 해준 사건
200과 1098의 차이는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의 차이를 확인하게 해준 리트머스 시험지
200과 1098의 차이는 불안에서 환희로 인간의 감정을 변화시킨 엔돌핀
200과 1098의 차이는 9시 뉴스를 장악하게 한 노동자의 힘
200과 1098의 차이는 해방을 향한 진군!
24. 끝나지 않은 투쟁 - 개미와 BCT
화물연대 포항지부의 조합원 구성은 대략적으로 대형운송업체로부터 직접 물량을 받는 운송사 조합원들과 운송업체에서 알선업체에 위탁한 짐을 싣는 개인 화물차들로 이루어진 개미군단으로 나누어진다.
상대적으로 동국통운, 동방, 성우, 로얄, 삼한, 천일 등의 주요 운송업체 소속 조합원에 비해 더 열악한 작업조건과 운송비를 받으면서 일해 왔다.
2003년 5월 화물연대 포항지역 투쟁은 포스코를 중심으로 한 화주업체 및 운송업체로 대변되는 자본과 화물연대 노동자들과의 계급투쟁이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운송조건의 향상을 비롯한 운송료 인상이 합의, 타결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합의한 내용이 메이저 운송업체와 운송사 소속 화물연대 조합원들과의 합의였지 개미군단이라 불리는 개인 화물차에게까지는 적용이 되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5월 9일 화물연대 파업투쟁이 마무리되자 마자 수십개에 달하는 소규모 운송업체와 다단계 알선업체 사장들과 개미들과의 전쟁이 발발했다.
하루에도 몇 군데씩 포성이 멎는 날이 없었다.
지도부는 애초 법적 책임을 묻지 않겠다던 약속을 뒤집고 눈까리를 확 까뒤집은 채 검거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검찰과 검찰의 녹색사냥개인 경찰 정보팀의 검거를 피해 바닷가와 산속 안가로 이동해 있는 상황이라 그야말로 수습이 되지 않는 무정부상태였다.
자연발생적으로 운행을 중단하고, 전투를 치르는 곳이 계속해서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1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면서 상황은 수습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운송업체 사장들이 알아서 기기 시작했다.
기본 타결 내용을 모범안으로 스스로 합의해 들어가기 시작했고, 또 임시 지도부에서는 모범안에 준하는 합의를 끌어내기 위해 한편으로는 윽박지르고, 또 한편으로는 교섭을 통해 상황을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문제는 부두 항만 하역작업을 주로 하는 - 한진, 대한통운 - 개미들과 BCT였다.
다시 한번 항만쪽 개미들의 별도 요구안을 만들고, 투쟁의 깃발을 세워 올렸다.
BCT 역시 마찬가지 였다.
얼마후 BCT가 타결이 되었고 - BCT의 경우에는 원래 다 타결되었던 내용인데, 내부 보안과 적들의 교란으로 일시 주춤하다 타결 됨 - 항만쪽 개미들을 중심으로 화물연대 항부지회(항만부두지회)를 결성했다.
투쟁의 대오는 항부지회를 중심으로 해서 약 1주일간의 연속파업으로 새롭게 요율을 비롯한 제반 근로조건을 구체적으로 합의한 채 마무리지었다.
이 과정에서 5월 5일 포스코 3문을 틀어막았던 주요 대오인 대한통운의 하청업체인 대한통상의 조합원들이 큰 힘을 발휘했다.
이렇게 투쟁은 마무리되었고, 합의서를 작성하였다.
하지만 5월 중순의 그 합의서는 현장에서 지켜지지 않았고, 화물연대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인해 배차거부, 조합 탈퇴공작 등 전방위적인 노조깨기 공작이 가시화되었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난 7월 7일 전국 동시다발 화물노동자 결의대회에서 포항 화물노동자들은 화물연대 조합을 깨기 위해 근화라는 새로운 운송업체를 만들고, 그곳에 입사하기를 종용하면서 화물연대 탈퇴를 전제로 하면서 화물연대 파괴공작을 펼치던 대한통운을 전면 엎어버리기 위해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7월 7일 대한통운 앞에서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집회에 참여한 700 조합원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대한통운과 맞선 전면전을 경고하면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개새끼 호로새끼 대한통운 박살내자!"
"화물연대 탄압하는 대한통운 박살내자!"
7월 9일 항만지회는 45명 투표자 가운데 41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표를 던졌다.
다시 한번 파업의 깃발이 올랐던 것이다.
이 소식은 언론사와 조합원들에게 급히 전달되었고, 지도부에서는 일단 대한통운 앞에 농성 천막부터 치기로 했다.
그때였다.
다급한 대한통운에서 연락이 왔다.
" 제발 교섭 좀 합시다!"
게임은 싱겁게 끝나 버렸다. 우리의 KO승이었다.
7월 9일 저녁 재합의서에 도장을 찍고, 우리는 투쟁의 깃발을 내렸다.
이번 합의서에서는 이후 작업량이 설사 늘어나더라도 배차물량에 대해 화물연대와의 협의와 조정을 통해 배차하기로 하는 등 결정적인 요소인 배차에 대한 부분까지 언급됨으로써 더 큰 성과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진(우리나라 5대 메이저 운송업체)에서는 다른 식으로 문제가 터졌고 또 다른 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
배차과장이라는 놈이 70이 넘은 우리 화물연대 조합원에게 개새끼, 십새끼 등 쌍소리를 하고 지 맘대로 배차를 하는 등 원성이 자자했다.
한진에서 짐을 싣는 우리 조합원들은 운송료가 안 올라도 좋으니 배차과장 저놈 모가지는 반드시 날려야 되겠다고 주장했다.
한진 역시 차를 세우고 한판 붙기로 결정하자마자 사측에서는 문제가 된 배차과장을 대기발령시키고 영업본부장이 사과를 하게 되었고, 이로써 문제는 해결되었다.
우리는 8일간의 파업투쟁을 넘어 2달이 넘은 지금까지 투쟁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다시 한번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투쟁하지 않는 순간, 투쟁을 멈추거나 머뭇거리거나 후퇴하는 순간 생명과 삶 자체가 후퇴한다는 사실을 우리들의 뇌리에 새롭게 각인시키는 과정이었다.
화산은 결코 갑작스레 폭발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크고 작은 활동과 연기를 내뿜으면서 대폭발을 예고하는 법이다.
25.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에 대한 존경과 경의는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8일간의 화물연대 파업투쟁에 있어서 최대의 수혜자(?)라고 한다면 그야 당연히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라고 생각된다.
함께 호흡하고, 함께 먹고, 자고, 울고, 웃고, 또 함께 투쟁하고…
그들은 우리를 그들과 동일시했고, 우리도 그들을 우리와 같은 운명이라 생각했다.
8일간의 파업투쟁 속에서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에 대해 한없는 존경과 애정을 보내주었다.
대표적인 사례를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해방광장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행증이 필요했다. 심지어는 투쟁의 중심이던 지부장에게조차 통행증을 제시하라고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바탈(민주노총 경북본부장 겸 민주노동당 경북도지부장)과 필자 그리고 살인미소에게만은 유독 물(?)경계 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우리들에 대해 몸짓과 말투가 변해 있었다.
70이 가까운 조합원들이 단 한차례도 우리들에게 하대를 하지 않고 존댓말을 사용했다.
사실 이 말투 때문에 우리는 엄청 불편했다. 아버지뻘 되시는 분들이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인 채 우리들에게 존댓말로 말을 건넨다고 생각해 보라!
아침은 식사가 준비되지 않아서 매일 컵라면을 먹었다. 그런데 그 컵라면이라는 것이 그냥 먹지 않고 냄비에 끓여서 먹으면 일반라면보다 더 맛있다는 것은 자취를 오래했거나 미식가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성우지회를 중심으로 식당을 담당하고 있던 배식반 동지들은 아침에 항상 자신들만의 특권(?)으로 컵라면을 끓여서 먹고 있었다.
필자는 파업 첫날을 빼고 대부분의 아침을 끓인 컵라면을 먹었다.
아예 식당차 앞에 가면, 끓인 컵라면을 준비하고 따로 배식을 해주곤 해서 일반 배식을 받는 조합원들의 눈치가 보여서 몸둘 바를 몰랐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한 달이 지난 6월 7일 임시총회 때 화물연대 조합원들은 30분만에 민주노동당 가입원서를 70장이나 써 주었고, 통상적으로 입당원서 에러율(계좌번호 오기 또는 깡통계좌)이 3분의 1 정도가 되지만, 화물연대 조합원들이 가입한 그 원서에 기재된 계좌번호의 오류가 단 한건도 없었다는 사실은 바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에 대한 그들의 신뢰가 어떠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2003년 5월 화물연대 포항지부의 투쟁은 많은 한계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계급투쟁의 엄청난 폭발력을 드러내면서 남한 노동운동사에 하나의 큰 획을 그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투쟁의 가장 한 복판에 서서 투쟁을 지도하고 온몸으로 투쟁을 이끌었던 투쟁의 구심은 당연하게 포항지부장이었다.
지금 현재 경주 내남 교도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화물연대 포항지부장 김달식 동지를 필자가 만난 것은 정확히 10년 전이었다.
필자는 1994년 1월 노동운동에 복무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정든 고향 대구에서 포항으로 소위 '현장이전'을 했고 당시 소속되어 활동하던 포항노동자협의회에서는 94년 여름 신규 노동조합을 설립했었는데, 강원산업(현재 INI STEEL)의 운송전담 계열사인 동화상운이었다.
김달식 동지는 당시 동화상운의 상조회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동화상운 노동조합을 반대하는 세력의 수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강원산업 노동조합의 간부들이 김달식 동지를 불러 주의와 경고도 보내면서, 노동조합 분열 행동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 이후 동화상운 노동조합은 노동조합 자체 내부의 분열과 자본의 교란전술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면서 해산되게 되었다.
김달식 동지로 인해 노동조합이 깨진 것은 아니었지만, 좌우간 김달식 동지가 노동조합에 반하는 행위를 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어용이었던 것이다.
얼마 후 동화상운 노동자 가운데 동료들 사이에서 '막내'라고 불리던 가장 어린 노동자 한명이 사고로 죽게 되었고, 그 사고 이후 회사와 유족사이에는 교섭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회사의 기만적인 태도와 비인간적인 처사에 분노한 노동자들과 함께 김달식 동지는 상조회를 중심으로 뭉쳐 회사에 맞서 투쟁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료의 주검 앞에서 김달식 지부장은 자본의 더러운 본질을 깨닫게 되었고, 이때부터 180도 달라진 인생을 출발하겠다는 각오를 했다고 한다.
2002년 월드컵의 함성으로 한반도가 떠들썩할 때 김달식 지부장은 화물연대 가입원서를 들고 일일이 고속도로 휴게소와 국도변 주유소 그리고 개미군단이 있는 운수업체를 찾아다니면서 운수노동자를 설득하고 돌아 다녔다.
아마 노련한 활동가들도 이 작업을 할라치면 진이 빠지고, 넌더리가 나 포기할 일인지도 모를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김달식 지부장은 추풍령 휴게소에서 휴게소 사장이 화물연대를 무시하고, 화물차 기사들을 우롱하는 처사를 보다 못해 아예 지나가는 모든 차량에 연락해서 고속도로를 세워 버렸다.
이러한 투쟁을 통해서 철없던 어용의 껍질을 깨고 새롭게 투사로 당당히 단련되고 있었다.
포항 사투리로 '쇳딩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이 자랑스러운 키 160이 되지 않는 자그마한 체구의 노동자가 10년만에 어용에서 한반도를 뒤흔든 투사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2003년 3월 민주노총포항시협의회 사무실에 정말 쪼그마한 한 사내가 들어 왔다.
김 달 식!
우리는 눈과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노동조합에 맞서 싸우던 어용 노동자가 10년의 세월을 넘어 화물연대의 지부장이 되어 금의환향(?)했던 것이다.
'쇳딩이'의 이야기는 의외로 간단했다.
3월 화물노동자 결의대회를 포항에서 하고자 하니 민주노총포항시협의회에서 많은 지원을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3월 화물노동자 포항결의대회는 그렇게 쇳딩이의 요구로부터 시작하여 4월 전국적 순회 결의대회, 5월 메이데이 투쟁, 5월 총파업 투쟁으로 가는 교향곡이었다.
바로 그 교향곡의 지휘자는 카라얀이 아니라 10년 동안 담금질한 우리의 쇳딩이었다.
얼마 전 경주 내남 교도소에서 김달식 지부장으로부터 필자에게 편지가 왔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직 답장을 하지는 못하고 겨우 면회만 한차례 했다.
김달식 지부장이 10년 전 어용에서 얼마만큼 노동해방 투사의 모습으로 변했는가는 바로 이 편지의 내용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 편지의 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투쟁 1) ---> 이 문구는 편지지 오른쪽 윗부분 페이지에 쓰여있는 글귀입니다. 김달식 동지는 페이지 숫자도 이제 투쟁으로 적고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배부장님 더운 날씨에 조직하느라 고생 많으시죠
배부장님의 컬컬한 목소리 정말 많이 생각납니다.
단상에서 늠름한 님의 모습 정말 가슴 따뜻한 사나이라고 느꼈습니다.
이곳에 온지도 10여일이 지났네요
6월 11일 남부 경찰서 조합원 동지들과 자진출두해서 8일간 경찰조사 투쟁을 마치고 6월 19일 경주 내남교도소 이송, 6월 30일까지 지긋지긋한 검찰조사, Ne Me C 8
정말 욕이 절로 나온다.
머릿털 나고 경찰서 유치장에서 교도소까지 짧은 시간을 보냈는데 정말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함부로 쓸게 못되더군요
능력 있고(돈) 힘있고(조직력) 빽 있는 사람은 쉽게 들어와 쉽게 빠져나가고 그렇지 않는 사람을 쉽게 들어가고 나가는데 전 재산을 털어 변호사 사고 공탁, 보석 등 돈으로 때워야 하고 교도소에서 자유를 영치 시키고 화장실 드나드는 것 외에는 내가 원해서 할수 있는 것 하나도 없다는 것 그것으로 세상에 모든 것들을 자유이지만 믿으며 신뢰할 수 없다는 점도 함께 느끼게 된다는 점, 이런 것들이 내가 원하지 않아도 서서히 이속에서 살아가는 자체에서 하나씩 숙지가 되어 있어요.
고로 이곳에서 정말 人生을 새로 맛보던 것 같아요
새로운 인생 이곳에서 나가면 나는 이런 인간이 되겠다고 혼자 각오로 어금니 물어 봅니다.
힘없고 가난한 노동자 열심히 일하고도 노동의 댓가를 받지 못하고 노예처럼 살아가는 노동자를 대변하고 앞장서서 최선을 다해 노동해방을 위해 끝까지 앞장설 것이다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생활도 투쟁이라는 각오로 하루하루 생활하고 있기에 살아가지만 다른 죄로 이런곳에 들어온다면 나는 차라리 혀를 물고 죽을 것입니다.
정말 숨조차 쉬기 어려울 정도로 갑갑한 것이 내 성격에는 전혀 맞지 않는군요
하지만, 지금 제가 생할하는 방도 모든 방식구들이 사람들조 좋고 담당, 부장, 근무자 모두가 친절하게 대우해 주고 있어 그나마 환경에 적응되어 가고 있습니다.
배부장님
이제 정말 시원한 맥주가 생각나고, 푸른 바다와 싱그러운 회색 하늘이 그리워집니다.
이렇게 더울 때 바닷가 방파제에 않아서 회 한접시 시켜 놓고 쇠구 한잔 "카아~"
생각만해도 짜릿하지 않습니까?
어제 TV녹화되어 있는 방송을 보는데 로얄 상운지회 소속 분회장 이종춘씨가 공장어 구이 특미 방송에 얼핏 나오는데 곰장어도 맛있게 보였지만 우리 동지인 이 분회장 얼굴 보니까 한결 더 사회가 그립고 가족들과 놀러 다니지 못했던 것들이 아내에게 미안해져 오는 것 같아요
이상하네요
평소에는 크게 신경도 못썻어도 미안하거나 죄책감이 들지 않았는데 이곳에서 생활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가족에게 엄청 미안해서 죄책감까지 들더군요
이곳에서 나가면 가족에게 더욱 잘해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런저런 생각과 걱정 틈틈이 독서 등등을 하다보면 하루라는 시간이 금방 흐르고 또 하루가 금방 흐르면 한달이 금방 흐를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사회로 나가는 날도 빨리 되겠지요?
하여간에 이번에 좋은 경험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4.7평 방에 총원 19명이 생활하고 있어요
상상을 초월하는 생활이지만 그래도 그나마 잘살아간답니다.
지금 저는 방에서 열외되어 아무것도 하는일이 없어요
그래서 좀 따분한게 조금 흠이었는데
어제 회의를 했는데 방에 너무 규율이 없다고 저를 규율반장으로 임명하더라구요
죄명이 폭력정도만 되어도 제대로 폼나가 징역살아가는데 죄명도 죄명이지만 민주노총전국운송하역노조화물연대포항지부장의 명예가 있기에 하루하루 점잖게 보내고 있습니다.
배부장님도 민주노총포항시협의회에서 베테랑이지만 저는 사람들 시키고 내편으로 만드는데 베테랑 아닙니까?
지금 생활을 인생공부 차원이라고 보며 더욱더 열심히 공부해서 조합원에게 큰힘이 되어주고 그늘이 될 수 있는 그런 지도자로 거듭날 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공부하겠습니다.
참 엊그제 본부장님 면회 오셨던데 여전히 자상하게 우리 화물연대에 힘을 많이 실어주시고 계시어 정말 다시 한번 시협의회 가족 동지 여러분께 감사 드리고 총무부장 여성동지 살인미소 숙향 동지에게도 안부 전해 주세요
언젠가는 당당하게 서로 만날 날을 꿈꾸며 오늘 두서 없이 작성한 글 이해롭게 읽고 봐주세요
항상 노동자 계급 사회를 위해 투쟁하는 모든 동지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2003년 7월 4일
민주노총전국운송하역노조화물연대포항지부장 김달식 올림
투쟁 !
추신 : 8일간의 기억에 이어 저가 매일 일기를 쓰고 있거든요
배부장님하고 합작, 책한권 만들어 봅시다. ㅎ ㅎ
작렬하는 여름태양과 무더위에 맞서 감옥에서 지내고 있을 쇳딩이가 무척이나 그리워진다.
28. 부창부수
부부는 서로 닮아 간다고 했던가?
부창부수라 정말 맞는 말이다.
7월 7일 화물노동자 전국 동시다발 결의대회가 포항에서도 힘차게 열렸다.
5월 함성을 다시 한번 재현하기 위해서인 듯 해방광장 언덕에서 집회가 개최되었다.
쇳딩이의 아내 또 다른 쇳딩이의 편지는 그날 집회에 참가한 700 화물연대 조합원과 민주노총 간부들의 눈물을 완전히 쏙 빼내고야 말았다.
그 편지의 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편지 (구속된 화물연대 김달식 지부장 아내의 글)
사랑하는 나의 달식씨...
첨엔, 그저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 차 달식씨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무지한 짓을 하고 말았던 제 자신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거 하면 돈은 언제 버느냐고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제 무지에 달식씨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가족이 젤 든든한 후원자이자 동반자인데 그 역할을 제대로 해주지 못해 지금도 아쉽습니다. 하지만 그땐, 혼자서 만삭된 몸으로 가계를 꾸려야 했고, 남들 신랑 손 잡고 태어날 아기를 위해 출산 준비하는 모습을 부러워하며 혼자서 출산용품을 고르러 다녀야 했고, 남들 다 하는 태교음악 들을 때, 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어야 했습니다.
출산예정일에도 엠블란스가 먼저 왔고 백일엔 과천투쟁을 떠난 신랑을 원망하며 백일떡도 없이 진한이를 부둥켜 안고 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달식씨는 그런 투정을 하는 제게 오히려 화를 냈었죠...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 땅의 노동자가 죽어 갈 수밖에 없다"고.... 제가 죽어가고 있는 줄은 모르구요...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가정의 행복이란 것에 목말라 죽어가고 있었고, 이제 갓 태어난 진한이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주지 못하는 죄스러움에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오월의 해방광장에 씌여진 역사가 있기 전까지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제가 보고 싶을때 언제든지 볼 수 있는 나의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아 저는 ..지금..행복합니다... 일 때문에 서로 얼굴 볼 시간도 없이, 집에 들어 온다해도 피곤함에 지쳐 쓰러져 잠만 자고, 밤을 세워 달려야 하는 고된 하루 하루를 묵묵히 일관해 오던 달식씨였는데 ....이젠 차가운 콘크리트 무덤 같은 교도소이지만 목숨걸고 달리지 않아도 된다하고, 짧지만 나만을 바라봐 주며 얘기할 수 있게된 이 시간이 저는 정말 행복하기만 합니다.
동지 여러분께서는 희생이라 말씀하시지만 저에게는 일생에 다시 올 수 없는 행복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 시간이 없었다면 달식씨는 죽음의 고속도로에 내몰려 두다리 뻗고 잠다운 잠 한번 자보질 못하고 그렇게 생을 마감하고, 그저 흔적도 없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갔을 것입니다. 그렇게...우리의 행복도 같이......
달식씨!! 이제는 더 크게 소리 치세요!!
그저 인간답게 살수 있는 생존권을 보장해 달라고요.
이젠 달식씨 곁에서 이보다 더 큰 어려움이 있다해도 견뎌내 보렵니다.
달식씨, 저, 그리고 진한이가 웃음을 되찾고 살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십시오!!
달식씨 곁엔 화물연대 여러분들의 거대한 방패가 있으니 뽑아든 창을 내던져 이 나라가 바로 설 때까지 열심히 투쟁하세요!!
곁들여 건강에도 유념하시구요~ 그럼 이만....
투쟁!!
화물연대 포항지부 지부장 김달식 아내...
부창부수라~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4자성어 입니다.
29. 못다 한 이야기
5월 투쟁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가슴 벅차고, 뼈저리게 반성이 되고, 새롭게 투쟁의지를 재충전 받은 경험은 없었다고들 한다.
이 신비로운 경험을 함께 하고, 또 함께 투쟁의 교향곡을 연주하였던 많은 연주자들이 있었으니, 지면을 빌어 잠시만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 이외에 이번 투쟁을 가장 선두에서 진두지휘한 민주노총경북본부 본부장 김병일, 산안부장 손두현, 교선부장 김용식 (이상 민주노총 화물연대 교섭위원)
김병일 민주노총경북본부 본부장
김용식 민주노총포항시협의회 교선부장 - 화물연대 교섭위원
그리고 떠오르는 또 하나의 이름 윤 창 호 동지!
잠정합의안을 설명하고 있는 윤창호 동지 - 뒷편의 취재기자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우리들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한 부산 동의대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수년간을 감옥에서 보내고, 다시금 운동의 전선에서 힘차게 복무하고 있는 전국운송하역노조 조직국장이다.
교섭을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이끌었던 실질적인 교섭팀장이었다.
경찰쪽에서는 5월 5일 포스코 3문 봉쇄의 주범으로 윤창호 동지를 지목하여 소환장을 보내기도 하였다. 사실 그 순간 윤창호 동지는 교섭을 하고 있었다.
교섭과 공투본 회의 그리고 현장 투쟁 지도까지 1인 3역을 하면서 팔방미인으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동지다.
5월 9일 교섭에서 잠정합의안이 만들어지고 교섭에 들어갔던 윤창호 동지를 비롯해 김병일 본부장 등 많은 동지들이 해방광장으로 달려왔다.
해방광장에 모여 있던 1098명의 조합원들에게 윤창호 동지는 그간에 있었던 교섭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고, 조합원들은 정말 숨죽여 듣고 있었다.
그 드넓은 야외 광장에 사람 숨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풀벌레소리 그리고 해방광장 옆을 지나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윤창호 동지의 교섭안 설명에 이어 잠정합의안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대한 김병일 본부장의 선동이 끝나고,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을 조합원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투표 준비를 하고, 투개표작업에 돌입했다.
5월 9일 투표 장면
5월 9일 개표 장면 - 개표는 이날 집회에 참가한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임원들이 맡았다.
투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약 1시간 동안 필자는 선동과 사례, 노래, 율동을 번갈아 가면서 진행하였다.
5월 9일 해방광장에서 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전체 선동과 노래, 구호, 율동연습 - 1
5월 9일 해방광장에서 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전체 선동과 노래, 구호, 율동연습 - 2
마침내 개표가 끝나고 잠정합의안이 통과되었다는 발표가 있은 후 필자는 밀려오는 피곤과 이름 모를 허탈감에 빠져 단상을 내려오고 있었는데, 몇 발짝 앞에서 윤창호 동지가 함박 미소를 머금은 채 두팔을 벌려 나를 포옹해 주었다.
순간 필자는 한없이 따뜻한 가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진한 동지적 애정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5월 9일 마지막 사회를 보고 있는 필자
그날의 포옹은 상대방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가장 원초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날 새벽 윤창호 동지는 포항의 해방광장을 뒤로하고 이제 그 화려한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던 부산 화물투쟁의 불덩이 속으로 다시금 뛰어 들어 갔다.
30. 투쟁이 끝난 해방광장에 서서…
해방광장의 모습 - 인덕구장이라 불리는 축구장
필자는 가끔 해방광장을 지나면서 문득 그 뜨거웠던 5월을 생각하며, 상념에 잠기곤 한다.
대형할인마트인 이마트가 바로 옆에 있고, 냉천교 다리 건너편에는 우리나라 독점자본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포항제철이 보인다.
거대한 자본의 담장과 화려한 불빛들 주변에 초라하게 자리잡고 있던 흙투성이 잡초가 나뒹구는 작은 축구장 하나!
우리는 그곳을 해방광장이라 불렀고,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부를 것이다.
해방광장이라 부를 때마다 우리는 그 뜨거웠던 5월의 햇살과 화물노동자들의 피맺힌 절규 소리를 잊을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 해방광장에서 모두들 새롭게 태어났으니까…
어느날인가 민주노총에서 민주노동당 사무실로 가다가 잠시 해방광장 언덕위에 차를 세워 놓고 필자는 아직도 한편의 영화처럼 진한 여운을 가진채 가슴에 살아 펄펄 끓고 있는 투쟁의 함성소리를 듣고 있었다.
포항시내 거점지역 규찰을 서기 위해 출발하는 25톤 카고트럭 1
포항시내 거점지역 규찰을 서기 위해 출발하는 25톤 카고트럭 2
박상준 동지의 영정!
성우지회와 식당차!
트레일러로 만든 무대!
8일동안 묵었던 십여개의 천막!
수백명을 태우고 쌍라이트를 켠 25톤 카고차의 질주!
포스코 3문 봉쇄의 선봉 대한통상의 붉은 차량행렬!
경주를 거쳐 포항으로 오던 80여대의 울산지원차량 행렬!
700대의 화물차들의 포항시내 봉쇄투쟁!
통행증 발급을 받으려던 자본가의 행렬!
5월 5일 남편을 찾아온 아내와 자식들의 울던 모습!
포항진입도로 양측에 세워진 화물차 수백대의 모습!
우리를 취재하기 위해 몰려 왔던 언론사와 기자들의 모습!
비상벨 소리와 함께 매순간 출동하던 선봉대의 모습!
포항도로 곳곳에 설치된 임시천막과 검문을 하던 늙은 노동자의 모습!
해방광장 언덕위 도로를 힘차게 구보하며 뛰던 그 함성소리!
잠정합의 후 조합원들에게 큰절을 하던 교섭위원들의 구리빛 얼굴
연대를 위해 함께 했던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금속, 업종의 노동자들!
24시간 털털거리며 상황실의 귀를 괴롭혔던 발전기 소리!
포항전역을 꽉 틀어막은 준법운행투쟁의 모습 - 1
포항전역을 꽉 틀어막은 준법운행투쟁의 모습 - 2
이제 그 소리와 모습이 정말 그립습니다.
그리고…
고맙다고, 놀랍다고, 잊지 않겠다고…
존경하고 사랑한다던 주름이 깊게 패이고 햇살에 타서 시커먼 얼굴 넘어 환한 미소를 띄우며 하얀이와 잇몸까지 다 드러내며 웃어주던 화물노동자들!
아닙니다. 그런게 아닙니다.
미안하고, 부끄럽고, 다시금 일깨워 주어 오히려 우리가 고맙다고…
자랑스런 민주노총의 깃발아래 부끄럽지 않은 활동가로 다시 서야겠다고…
해방광장에 설 때마다 우리는 다짐합니다.
점점 오만해지고, 교만의 극치를 향해 달리고 있던 우리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던 화물노동자 당신들의 그 함성소리로 인해 우리는 새롭게 더 낮은 곳으로 더 작아지고자 하는 결의를 다져 봅니다.
그동안 보잘것 없고 거칠기 짝이 없는 저의 글을 읽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또 충고를 보내주신 많은 동지들에게 이자리를 빌어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저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화물노동자들의 투쟁에 조금이라도 누가 되었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바라며, 이로 인한 전적인 잘못은 분명 저에게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글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노동자의 삶과 희망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고 실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더없는 바램입니다.
글을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끌어 주시고 배려해 주신 김병일 본부장을 비롯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식구들 그리고 언제나 저를 반겨주시는 화물연대 포항지부 간부여러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폭염이 몰아치는 감방에서 힘겹게 싸우고 계시는 김달식 지부장과 동지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민지네 식구들에게도 감사드리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