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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 박영재가 만나고 싶어 했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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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재는 노동자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노동자답다’라는 말처럼 좋은 칭찬은 없다.
이 말에는 노동자이면서 노동자로서 살지 못하게 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전제되어있다.
아울러 ‘노동자답다’란 말은 ‘근로자’에서 ‘노동자’임을 쟁취한 투쟁성과 역사성을 계승하자는 의지가 담겨 있는, 서로에 대한 북돋움의 표현이기도 하다.
얼마 전, 전직 민주노총 위원장이 한 지방 방송사에서 주관하는 토론 프로그램에 나와 요즘 유행하는 토크식 강연을 하는 걸 우연하게 본적이 있다. 그는 ‘나는 노동자다’라는 주제로 ‘경쟁과 차별이 아닌 연대와 평등’이 더 소중하고 노동의 가치가 바로 그것이며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좋은 내용을 세련된 언술로 설득력 있게 얘기하고 있었다.
그 전직 민주노총 위원장에게는 아픔이 있다. 민주노총이 세운 민주노동당, 이를 계승한 통합진보당의 분열을 막지 못한 아픔이다. 민주노총의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실패했다고 규정한 과정의 한 복판에 그가 있었다. 그 역시 책임을 많이 느꼈을 것이고 아픔도 크지 않았을까 싶지만, 1년이 지난 지금 그가 그 때를 어떻게 돌아보고 평가하는지는 잘 모른다. 그에게 당시 당사태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더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박영재’라는 노동자의 이야기를 더 들려주고 싶다.
이제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관심 밖의 일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아직도 통합진보당 분열의 본질이 ‘진실과 거짓의 싸움’이었는지 아니면 ‘패권 대 정의의 싸움’이었는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박영재를 통해 당시 통합진보당 사태를 돌아보고 무엇이 옳았는지를 분석하자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진보당 사태라는 큰 소용돌이 속에서 미처 주목받지 못한 박영재란 노동자의 삶을 만나보기를 바랄 뿐이다. ‘당권파 박영재’가 아닌 ‘노동자 박영재’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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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운동이 많이 힘들어졌다는 얘기를 한다. 그나마 얘기를 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고민의 흔적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문제는, 꺼내놓고 얘기할 자신도 없으면서 온 몸으로 힘든 티만 내는 데 있다. 전 현직 노조간부들이 민주당으로, 또는 안철수 의원 그룹으로 간 이유가 무엇일까. 실패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새로운 경로를 찾아서 갔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이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와 ‘노조간부의 정치세력화’를 구분 못 할 정도의 사람들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노조활동을 할 때 그토록 비판해 마지않던 ‘활용할 수는 있어도 같이 하기는 어렵다’던 정치세력과 또는 그와 궤를 같이 할 것이라 예상되는 사람들과 한 배를 타려고 할까? 그 수많은 집회 때마다 연단에 올라 자신을 향해 박수를 쳤던 노동자들에게 ‘노동자’의 이름으로 수 백 수 천 번 ‘투쟁’을 외쳤던 사람들이 쪽을 팔면서까지 왜 그리 되었을까?
양 노총을 포함해 90년 18%였던 노조 조직율이 2012년 현재 9%가 되었다. 절반이다. 변혁적 노동운동을 주도하였던 민주노총이 전태일 열사정신을 계승하는 노동자대회를 앞두고 위원장이 사퇴하고 나서, 그 자리를 비워 놓은 지 벌써 7개월이 넘었다. 부정할 수 없는 노동운동의 객관현실이다. 하지만 그 객관 현실이 그들의 변신을 정당화시켜주지 않는다.
혹시 그들처럼 객관 현실의 어려움에 압도당해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가 있다면 박영재의 삶을 같이 들여다보자고 권하고 싶다.
“학교에서 학생 운동을 할 때는 학생운동이 망한 시기였다고들 했고, 현장에 나오니 노동운동이 망한 시기라고들 했지요. 옛날 같지 않다고. 잘 나갈 때는 이랬네 저랬네. 저마다 무용담을 늘어놓으면서. 그 사람들이 이제는 진보정당이 망해 간다고들 하네요. 그렇지만 전 한 번도 학생운동이 망한 적도 없고, 노동운동이, 진보정당이 망한 적은 없었다고 믿어요.
그 숱한 우울한 시절을 살아냈고, 울면서 성장했고, 아픔 속에 꽃을 피워낸 ‘우리’가 증명하는 걸요.”
영재가 한참 화마와 싸우며 입원해 있을 때 줄곧 병원을 지켰던 수원의 한 동지가 방명록에 써 놓은 글 중의 일부다. 어쩌면 그녀 역시 어느 순간 흔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왜 이렇게 되고 있지? 이러다 정말 망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 동지는 곧 이어서 병상에 있는 박영재가 자기에게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니 박영재 당원에게 듣고 싶은 얘기를 이렇게 적어 놓았다.
“진보는 흔들리는 꽃이나 바람 속에 존재하는 게 아니고
오로지 투쟁하는 민중의 호흡으로 지속될 뿐이에요.
투쟁하는 민중이 있는 한 그 가치가 사라질 수 없지요.
그래서 환~하게 해~맑게 웃을 수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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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재의 운동 경력은 그리 길지 않다. 2000년대 초반부터 경진여객에 근무할 때 소위 ‘야당’(버스 노동자들은 집행부에 반대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흔히 이렇게 부른다) 활동을 하며 노조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지만 목적의식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한 것은 2005년 무렵이다. 박영재가 68년생이니까 2005년이면 38살이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2004년 말 즈음에 경진여객 노조 대의원 선거가 있었고 나름 민주노조를 세워보고자 노력하면서 지인의 소개로 민주노동당에 찾아오게 되었다. 결국 대의원 선거는 이기지 못 했지만 버스 노동자들의 모임을 꾸렸고 민주노동당 당원으로서 당 활동에 관심을 보이면서 열심히 하려 하였다. 2005년에 시의원 보궐선거가 있었고 그에게 선거운동은 생전 처음이었지만 꽤나 열심히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보궐 선거에서 여성 시의원 후보가 낙선하고 나서 2006년 지방선거에 다시 출마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당선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박영재 당원은 그 때도 정말 열과 성을 다하였다. 새벽에 나가서 새벽에 들어오는 버스 노동자가 다음날이면 쉬고 싶을 텐데 그는 어김없이 선거 사무실에 찾아 왔고 본 선거운동 기간에는 월차를 내며 선거운동에 결합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아쉬운 낙선이었다.
낙선한 후보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박영재는 크게 실망한 듯 힘들어 했다. 그리고 2006년 말에 그는 다니던 경진여객을 그만 두었다. 그를 가깝게 보고 있던 동지는 그만두지 않았으면 하였지만 이미 박영재는 스스로 결정을 하고 있었고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하지만 수원과 평택 인근 지역의 뜻있는 버스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민주 버스 노동자회’를 조직해서 총무를 맡아 보았고 동시에 수원 비정규노동센터의 사무국장 역할을 맡아 또 치열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2년 후 분열의 어려움을 격고 난 직후에 치러진 2008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사천의 기적’을 포함해 나름 성과를 내며 재기에 성공했지만 그 해 겨울 박영재는 활동에 큰 시련을 맞는다. 결국 수원비정규 노동센터 상근활동을 그만 두었고 심지어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겠다는 의사까지도 밝힌다.
아무리 사천에서 기적이 일어났지만 자신이 있는 수원은 여전히 당선자가 나오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이 컸고 민주노동당 당원이 되기 전부터 쌓여왔던 집안 문제가 더욱 더 얽히면서 그는 물러서려 하였다. 지병이던 목 디스크 때문에 잠을 못 이루기도 하고 중단된 방송대학에 마저 다니고 싶다고도 했다. 매월 60만원씩을 집에 보내주기로 한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단체 상근 활동비로는 감당이 안 돼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아두었던 것으로 충당해왔는데 그 것 역시 바닥이 났다고도 했다. 결국 그는 ‘집안문제 하나 풀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고 동지들과 당원들한테도 면목이 서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면서 단체 상근 활동을 접고 덤프트럭 고용기사로 현장에 다시 들어간다. 당원을 그만두겠다는 말은 그의 본심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유지한 채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활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4년 뒤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 당을 위해, 동지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다. 길지 않은 4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 버스운전 기사에서 노동자로 나서다.
저녁 7시경, 사당역에 가면 수원 가는 버스를 타려는 시민들이 수 십 미터씩 줄을 서서 차를 기다리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그 버스 정거장에서는 7770번을 운행하는 경진여객의 노동조합 지부장과 동료 버스 노동자들과 진보당 당원들이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누어 주며 서명을 받곤 한다. 해고된 박** 노조 지부장의 복직을 위한 것도 있지만 그 보다는 ‘시민의 발인 버스기사 노동자들이 식사시간, 화장실 갈 시간조차 보장받지 못할 정도로 높은 노동 강도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리고 운수 노동자들의 권리가 보장받아야 국민들의 혈세로 지원되는 버스가 시민들에 대한 안전 보장과 서비스 개선을 취할 수 있으니 노동조합의 요구에 시민들이 관심을 가져달라’는 내용이다. 박영재가 바로 그 경진여객의 운전기사였다.
버스 운전기사들은 자기 주장이 매우 강한 편이다. 아는 것도 많다. 도로교통법은 당연하고 민형사에서 노동법까지 일가견이 있는 기사 아저씨들이 많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꺼내 놓으면 각자 나름의 정견이 있는지라 어느새 정치판 저리 갈 정도로 논쟁이 붙고 소주라도 한잔 곁들여지면 고성도 오고간다.
하루 종일 혼자서 버스를 몰며 자기 운전대에 승객과 도로의 차며 보행자들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매 순간 운전대를 어떻게 돌릴지, 브레이크를 어떻게 밟아야 하는지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들이 이어져 그의 삶이 지탱되고, 가족들과 승객들 보행자들의 삶도 좌우된다.
운수 노동자들은 매 순간 긴장 상태에서의 각성된 자기 결정에 익숙해져 있다. 회사에서는 배차시간과 CCTV로 운전기사들의 모든 행동을 제어하고 들여다보고 있지만 운전대를 잡는 순간 ‘기사 아저씨 마음대로'다. 박영재 운전기사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농사짓는 집이 다 그렇지만 박영재 역시 어려운 집안사정으로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 한 채 지금은 사라진 시골 버스 차장(조수)으로 어린나이에 노동을 시작한다. 성실했던 그는 정비일을 배우게 되었고 가지 않을 수도 있었던 군대를 자원해서 입대하고 운전병 조교까지 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한 운수계통일은 결혼 후 풀무원 물장사 사업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망하고 나서 이내 경진여객 버스 노동자의 삶으로 이어진다.
그와 함께 경진여객을 다녔던 이태진는 박영재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2006년 4월, 내가 경진운수에 입사하여 가장 먼저 알게 된 동료의 이름이 박영재였습니다. ‘박영재와 가까이 마라. 당신에게 피해만 갈 것이다’ 박영재가 누구이기에... 궁금함에 용기를 내어 그를 만났었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회사나 동료들이 하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허구임을 알았습니다. 피해만 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의 머리엔 온통 ‘동료 기사의 권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하는 생각으로 가득 하였습니다.”
박영재는 회사에서 유명했던 모양이다. 아는 것도 많고 고집도 세서 자기 생각을 절대로 꺾지 않는 운짱이었다. 모난 돌 정 맞는다고 그런 박영재는 회사로부터, 어용노조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지만 워낙 노동법을 잘 알고 강단이 있으니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럼 박영재는 어떻게 노동법을 알게 되었고 회사와 맞장 뜰 정도의 배짱을 갖게 되었을까? 2005년에 처음 민주노동당 당사에 몇 명의 버스노동자들과 함께 찾아 온 박영재를 만나고 나는 그가 노동조합 경험을 어디서 좀 해보았거나 누구한테 지원을 받고있는 친구겠거니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는 생짜 노동자였다. 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그는 못 배운 게 한이 맺혀 검정고시 공부를 했고 운전 일을 하면서도 아는 것이 없으니 업신여기는 것 같고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해서 법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그대로 실천에 옮겼을 뿐이었다. 동지들과 만나기 전 전태일 평전도 그렇게 혼자 읽었다. 아는 게 있으니 동료들한테 설명해주었고 회사에게 부당한 것은 따졌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노조가 어용이고 이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을 따름이었다.
처음 노동자 계급의식은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터득된다. 노동을 노동자로부터 소외시키고 자본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시키려는 노동현장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과 그에 따른 투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담배 한 가치를 피는 그 순간에도 화장실을 가는 그 시간에도 말이다.
다만 그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려하는가 아니면 애써 외면하는가에 따라 노동자의 운명은 갈라진다. 박영재는 그 현장을 자신의 눈으로 정면으로 응시했고 저항했을 뿐이었다.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자임을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박영재는 자기가 아는 것을 그대로 생활화하고 실천하는 곧은 사람이었다.
“하루는 담배를 주니 피우지 않겠다고 합니다. 몸이 안 좋은가 하고 물으니 ‘아니오. 어제 환경오염에 대한 책을 보았는데 담배꽁초와 음식물 쓰레기가 심각한 오염물질이라네요’ 그 뒤론 많이 힘들 때 간혹 한 개비 씩 피운 것으로 기억되며, 음식물 쓰레기를 남기지 않으려고 자장면 그릇을 씻은 듯이 먹던 기억도 납니다.”
경진여객 동료 이태수는 다시 그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2008년 수원 비정규노동센터 상근 활동을 그만 둔 박영재는 새벽바람을 맞으며 건설 현장으로 덤프트럭을 몰고 나간다. 경진여객을 그만 두고 나서 단체상근을 하면 더 많은 시간을 노동자들과 만날 수 있다고 여기고 그렇게 자신을 투여하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2년 만에 접고 노동현장으로 간다. 스스로 물러선 것이다. 하지만 그 물러섬은 스스로 자신을 채워야겠다는 또 다른 결심이었다. 그 결심은 그 후에 나타난 그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전업활동을 하는 당 간부들과 단체 활동가들에게 미안해하였지만 여느 사람처럼 이를 이유로 자기가 해야 할 몫을 포기하거나 주저앉지 않았다. 물러섬과 미안함을 메우기 위해 자신을 더욱 더 철저히 관리해나갔다. 그는 하루에 5시간 이상을 자지 않았다. 일이 끝나면 사무실로 오거나 사람을 만났고 학습을 했다. 그는 시간을 창조했다. 오랜 노동생활이 몸에 배인 노동자들이 그런 것처럼 그의 생활 역시 치밀하게 계획 된 시간의 연속이었다.
병원 방명록과 당시의 페북을 보면 2012년 총선 당시 저녁 시간에 성균관대역 앞에서 그를 봤다는 사람들의 글이 심심치 않게 올라왔었다. 1, 2월 추운 겨울 날씨, 어둑어둑해지는 저녁이 되면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성균관대역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누가 그리하라고 한 게 아니었다. 피켓도 스스로 만들었다. 좀 작아 눈에 안 뜨인다며 크게 만들었다. 스스로 구호를 만들고 나서 스스로 대견한 듯 괜찮지 않냐며 겸연쩍어하면서 물어왔고 처음엔 무심코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루 이틀 지나자 말을 건네는 사람들도 생겼다고 뿌듯해했다. 본 선거운동 전까지 했으니 2개월을 넘는 기간이었으리라. 덤프트럭 운전 때문에 선거운동에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 자신의 실천계획을 정했고 스스로 정한 계획을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지켜나갔다.
자기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박영재, 어릴 때부터 집안을 책임져야 했던 가장으로서 살아오면서 지닌 무거운 책임감의 소유자, 결심 하나, 행동 하나에 무거운 책임감만큼 따라오는 실천의 완강함, 오랜 노동 생활로 몸에 밴 성실함이 노동현장에서 그를 노동자답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금성철벽’을 뚫을 수 있는 노동자 의식으로 스스로를 더욱 더 단단히 단련시켜나갔다.
다음은 그가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메모해 놓은 글 중의 한 대목이다.
“강한 자들은 이 길들여진 양들에게 ‘착실’ ‘온건’ ‘성실’ ‘적응성 있다’는 등의 온갖 아름다운 찬사를 퍼부으며 환영하고 칭찬하면서 그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털을 뽑는다... 고통받는 인간은 한 동안은 얼떨떨하여 그가 고통을 당하는지 털을 뽑히는지 모른다. 설사 어렴풋이 그것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만다. 때때로 무엇인가 ‘부당하다’또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나 역시 자신은 ‘무력’하며 그것은 시정될 길이 없으므로 그는 곧 머리를 흔들어 그런 건방진 생각을 털어버린다. 인내는 영원한 금과옥조로 된다. 그러나 억압과 혹사,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이 그가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서 그의 인간으로서의 존립을 위협하게 될 때 잠자던 그이 비판의식은 돌연 고개를 쳐들어 절실하게 부지런히 활동을 개시한다. 고통이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그가 한 인간으로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극한점에 다다랐을 때 그는 비로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를, 무엇이 아름다운 것이고 무엇이 추잡한 것인가를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재생하는 것이다. 인간다운 자존심이 되살아나고 억눌렸던 분노가 폭발한다. 저항이 시작된다. 그것이 철저해질 때 그는 이미 자신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현실의 질곡이 결코 인간이 뚫을 수 없는 금성철벽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
이 메모에는 노동운동을 시작하며 새롭게 읽은 전태일 평전에 대한 그의 생각이 진하게 담겨 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재생되었고 ‘현실의 질곡’이 비록 ‘금성철벽’일 지라도 뚫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아름다운 것’과 ‘추잡한 것’ ‘거짓’과 ‘진실’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의 이러한 다짐은 박영재가 남긴 또 다른 메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 문제이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에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인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인간들이여, 그대들은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인간의 가치를? 희망과 윤리를? 아니면 그대 금전대의 부피를? ”
3. 노동자 계급에서 민중을 품은 노동자로 다시 나서다.
권리의식에 눈을 뜬 노동자들은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권리를 빼앗아 간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와 비인간성에 분노한다. 누구는 태어날 때부터 자본가였고 노동자였던 것이 아닌 것처럼, 자본은 처음부터 자본이 아니라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순간부터 자본이 되었고 그 축적된 자본이 때로는 시장 원리에, 때로는 정치권력에 의해 나누어 가졌을 뿐 그리고 심지어는 대를 이어 상속되었을 뿐 처음부터 그들의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이제 그 노동자에게는 회식 술자리에서 형님이라고 부르라던 회사 사장의 사람 좋은 모습과 웃음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경영난에 허덕이며 고뇌하고, 이른 아침 회사에 먼저 나와서 출근하는 직원마다 먼저 인사하는 착한 사장도 더 이상 그에게는 존경할 수 있는 사장이 아니다.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고 그것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자본가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을 만들고 가입하는 순간, 그 사장이 안면을 몰수하고 불편해하기까지 하면 그 노동자의 확신은 더욱 더 굳어진다.
이제 투쟁이다. 그 것도 한 치의 물러섬 없는 비타협적인 투쟁만이 자신의 삶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이 된다. 그리고 이제 함께 투쟁할 노동자들을 조직하면 된다. 그러면 승리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투쟁을 함께 할 노동자들이 자기 맘처럼 잘 나서지 않는다. 함께 투쟁을 결심했던 사람마저 끝까지 가지 못한다. 함께 해야 할 이유는 단 하나였지만 함께 하려 하지 않을 때는 이러 저러한 이유가 왜 그리 많이 생기는지. 노동자 의식이 부족한 사람들, 노예 의식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 의리도 없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믿고 투쟁하려했던 자신이 후회스럽다. 아니면 그 부류에 속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이제 사장보다 동료들이 야속하고 특히 투쟁하지 말고 타협하자며 물을 흐리게 만든 사람은 꼴도 보기 싫다. 그리고 그 노동자는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하고 같은 심정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더 가열차고 비타협적인 투쟁을 자본가를 향해 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또 반복된다. 그리고 함께 하는 노동자의 수는 더 줄어든다.
그 노동자에게는 중요한 게 하나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권리의식에 눈을 뜬 노동자는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혼자의 힘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자본가가 더 많은 이윤을 생산과정을 통해 집적시키기 위해서 만든 생산체제가 노동자들로 하여금 집단성을 체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오와 열을 맞춰 톱니바퀴처럼 맞물리지 않으면 안 되는 시스템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단 1%의 임금을 올리기 위해서도, 눈치 보지 않고 화장실을 가기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함께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집단성을 체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집단성이 투쟁하는 동지들을 조직하는 데는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거기엔 중요한 게 있어야 한다.
바로 사랑이다. 동지애다. 투쟁력을 유지하고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조직이 아니라 사랑으로, 동지애로 뭉친 조직이 있어야 한다. 노동자의 집단성이 투쟁력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필요하니까 뭉치는 조직이 아니라 동지애로 연결된 조직이 필요하다.
다시 돌아가 보자. 이제 권리의식에 눈을 뜬 노동자는 자신처럼 견결하지 못하고 의식이 확고하지 못한 동료 노동자들이 자기 생각처럼 비타협적인 투쟁을 끝까지 못한다고 탓하면서 자기기준에 맞는 새로운 노동자들과 만나려 하지 않는다. 예전에 자기의 모습이 그 어떤 노동자의 각성된 눈에는 그리 비춰졌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흔들렸던 동료가 문제가 아니라 잡아주지 못한 내가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그 동료들을 만나려 한다.
박영재가 경진여객 노조 대의원 선거에서 이기지 못했을 때, 그리고 끝내 그만두려 했을 때 동료들 탓을 한 적이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면 그럴 만 했다. 그렇다고 그가 그만두는 것을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현장에서도 그를 의지했던 꽤 많은 노동자들이 그가 그만두는 것을 정말 아쉬워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가 처음 민주노동당의 간부들과 노동단체 활동가를 좋아한 이유는 자기의 생각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회사 하나를 바꾸는 게 아니라 세상을 통째로 바꾸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니 그 얼마나 포부가 큰가. 아는 것도 많고 의식수준도 높고 게다가 투쟁은 얼마나 빡세게 잘 하는지 마음에 쏙 들지 않았겠는가. 박영재는 경진여객에서 찾지 못한 승리를 민주노동당에서 찾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그의 맘 한구석에는 경진여객에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박영재가 그런 자신의 문제점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할 무렵 그는 민주노동당의 당 간부들과 지역 활동가들과 본격적인 동지적 인연을 맺게 된다.
그가 동지애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동지애를 심어주려고 한 것이 언제인지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동지애는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받든 안 받든 상관없이 말이다. 사업을 계획하고 투쟁을 얘기하거나 학습할 때가 아니었다. 그의 집안생활을 꺼내놓게 할 때였다. 누구나 사생활을 얘기하는 건 쉽지 않다. 오랜 친구이거나 집안 사이가 아니면 말이다. 노동운동하는 사람들도 집안 얘기는 시간이 흘러 이러저러하게 알게 되거나 술자리를 빌어 얘기할 뿐 잘 하지 않는다. 꺼내 놓는다 해도 관여하지 않으려 하고 조언을 하는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동지는 투쟁할 때만 찾고 사업할 때만 찾는 것이 아니다. 동지와 동지의 관계는 전면적이고 삶을 통째로 걸고 맺어지는 사이이다. 공적 생활과 개인의 생활은 성격이 다르지만 푸는 이치는 같다. 정신적 이상이 있지 않는 한 공적 생활을 규제하는 의식이 다르고 사생활을 규제하는 의식이 다르지 않다. 한사람을 전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의식이 규제하는 모든 영역을 알 수 있어야 한다. 하물며 세상을 바꾸자는 동지들이 서로를 전면적으로 알지 못하면 어떻게 한 몸처럼 움직일 수 있겠는가. “죽는 날까지 함께 할 동지가 있다면 술 한 잔을 마셔도 목숨 걸고 마셔라”라는 노래 가사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지 않는가.
동지로 만나기 시작했지만 박영재는 처음에 가정생활에 대해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와 오랜 단짝 친구 외에는 경진여객에 오래 같이 있었던 동료들도 잘 모르고 있었다. 아무튼 그가 가정생활을 대하는 관점에 문제가 있다는 것에 대해 비판적 관점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제언을 하였다. 그리고 그런 관점이 가정뿐만 아니라 현장에서도 사람들과의 문제를 풀 때 나타나지 않았는지도 생각해보자고 했다.
스스로 강한 사람에게는 약점이 있다. 웬만해서는 자기 생각을 접지 않는다는 것이다. 책임감이 무척 강하고 자기견해가 뚜렷한 그가 집안문제인들 왜 심각히 고민하지 않았으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하지만 그는 아내에 대해 냉정하였다. 자신에 대해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내에 대한 분석과 원망이 가득하였다. 거기에도 그는 강하게 자기 기준을 들이밀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박영재는 마음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갈지 실행계획도 잡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도 확인해 보았다. 그의 마음을 돌려세운 바탕에는 당연히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결정적 이유는 변혁운동을 하는 사람은 가정생활도 잘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변혁운동에 대한 지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운동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자기 생활을 변화시켜나갈 수 있다. 박영재는 운동에 대한 원리를 이해하고 습득하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 물론 처음에는 노동법이나 정치경제 같은 분야를 더 선호하고 노동자 철학이나 사회변화 원리에 대한 학습은 힘들어 하였다. 특히 노동자 사상에 대해서는 맨날 비슷한 얘기인 것 같다며 불편해하였다. 불편한 학습은 안 하면 된다. 학습이 책만 가지고 되란 법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에게는 자기를 들여다보는 학습이 필요하였다. 그게 더 힘들고 어렵다. 남보다 빠른 사회생활 경험을 통해 자기 나름의 세상 보는 눈을 터득한 40줄이 된 노동자, 그것도 자기 주관이 매우 강한 사람에게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동지들이 자신의 가정생활까지 간섭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지만 어느새 고마움과 사랑으로 전해지고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원리가 개인한테 나온 것이 아니라 변혁운동을 이끌어온 역사 속의 가르침이었다는 것이 그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사회변화를 지향하는 조직은 사업을 통해 만들고 관리하는 것이 중심이 아니라 지향하는 바를 분명히 한 사람들끼리 ‘한 번 같이 해 봅시다“라고 결의하고 그 순간부터 평생을 함께 할 동지들 사이에 진한 사랑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진보당이 지향하는 당 조직 생활이지 않는가.
어디 이뿐이랴 늦깎이 노동운동가에 대한 주변의 많은 동지들의 격려와 세심한 배려가 그에게 새로운 힘을 갖게 하였다. 박영재는 한 해만 빼고 2008년부터 거의 해마다 노동자 통일선봉대를 참가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2006년 지방선거부터 시작해서 2008년 총선, 2009년 보궐선거, 2010년 지방선거, 그리고 2012년 총선까지 선거차량 운전부터 지역조직 책임자까지 그가 참여하지 않은 선거는 없었다. 덤프트럭을 운전하면서도 중요한 정치 실천에는 휴가를 내서라도 빠지지 않았다. 재정적 어려움과 방통대 공부 등을 이유로 덤프트럭 운전을 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운동가로서 자기를 정비해가면서 개인적 목표를 뒤로 미루고서라도 당에 필요하고 운동에 도움이 되는 것이 요구되면 다 하려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2010년으로 기억되는데,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동안 저녁 시간에 퇴근하고 수원 비정규노동센터에도 잘 가지 못하고 자기 일을 쉬면서까지 어떤 건설 현장 입구에 가서 방송차를 틀어 놓고 싸움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건설 현장에 흙을 퍼 나르는 일을 맡은 업체사장이 임금을 체불시키고 있단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체불임금 노동자들을 상대로 노동 상담을 해주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수원 비정규노동센터 사무국장이 돈을 못 받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거의 한 달 이상 싸움을 지속하고 있길래 여태 못 받았냐고 물었다. 거의 매일같이 건설 현장 앞에서 확성기를 틀어놓고 노래를 틀고 떠드는 데다, 게다가 수원 비정규노동센터 사무국장이 집회신고까지 내놓으니 정보과 경찰까지 나와야 하고 그 정도면 못 받아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사장이 자기한테 몇 번씩 연락이 와서 주겠으니 만나서 합의를 하자고 했단다. 그런데 안 만나고 있단다. 알고 보니 자기 말고 거기서 임금 못 받고 그만 둔 운전기사들이 더 있어서 그 것까지 받아낼 심산이란다. 우리가 해결사가 아니고 본래 본인이 맡은 임무가 있으니 그 쯤 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그러자 그는 조금만 더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다른 덤프 노동자의 임금을 받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체임 노동자가 찾아와 너무 고맙다고 인사를 하길래 영재는 ‘자기는 민주노동당 당원’이고 왜 이렇게 싸웠는지를 설명해주고 즉석에서 바로 민주노동당의 당원이 되지 않겠느냐며 준비해간 입당원서를 내밀었단다. 어찌 됐겠는가. 당연히 그 노동자는 당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게 소문이 나서 몇 사람이 더 당원이 되었다. 그 노동자들이 박영재가 누워있는 빈소에 찾아왔었다. 박영재는 어느 한 순간에도 민주노동당의 당원임을 잊지 않았다. 그의 모든 생활은 민주노동당으로 시작해서 민주노동당으로 끝났다.
여기서 어떤 이들은 엉뚱한 궁금증이 하나 생길만 하다. 그렇게 하고 다니면 과연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영재는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처럼 성실하게 사장들의 일을 잘 처리해주는 기사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맡은 일이 있으면 늦은 시간까지 해주었고 쉬는 날이든 밤 늦게든 연락이 오면 웬만하면 나가서 일을 해 주었다. 그를 한 번 사용한 사장들은 일이 생기면 그를 꼭 데려다 쓰려고 했다. 또한 그는 덤프 차량을 정비할 능력을 지니고 있는 몇 안 되는 탁월한 운전기술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임금을 더 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는 빠르게 변혁적 노동운동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학습을 통해 노동운동도 사회 변혁적 관점에서 해야 한다는 원리를 알게 되었고 동의했다. 노동조합운동이 조합주의와 실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문제와 노조간부들이 직책을 그만두면 더 이상 운동 전선에서 뛰려 하지 않는 현상 등이 극복되려면 정치사상적으로 각성하고 변혁적 관점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간부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국주의 자본의 수탈과 정치군사적 지배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미국으로부터 자주의 문제를 풀어내지 못하면 우리 사회의 참된 민주화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우리나라 사회성격에 대한 이해도 하게 되었다.
“영등포행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로 시작된 그의 마지막 문자 메시지 말미에 “...저의 인생에서 마지막 눈물은 내 조국 대추리 철조망 아래에서가 좋아요..”란 표현에 그가 우리 사회의 자주화의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는지가 나타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지들에게 보낸 편지 유서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함께 가자!
행복했습니다.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고 학습하고 실천했던 나날들이 말입니다.
2005년 민주노동당에 입당하면서 저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당당한 노동자가 되었고 민중의 삶과 나의 삶을 바꿔내는 일도 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과 양심에 비춰, 가야 할 길을 가는 데는 버려야 할 것들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다 버리지 못한 것 때문에 민중들의 삶에 나쁜 영향을 끼칠까 두렵습니다...”
생을 달리한 마지막 결단을 하며 쓴 유서에서도 그는 민중의 삶에 자신을 비추어 더 버리지 못한 것이 있지 않나를 총화하고 있었다. 생명까지 바쳐가는 그 순간에 무얼 더 버릴 게 있다고.
노동자 박영재는 어느 새 가슴 한가득 민중을 품에 안은 진실한 노동자가 되었다.
4. 그 순간이 되어서야 이해할 수 있는 그 무엇.
당 활동과 노동운동을 시작한 게 2005년이니 박영재가 생을 다할 때까지 8년이다. 정말 짧다. 그런데 20년, 30년 운동을 한사람들이 못 가 본 길을 그는 가고 말았다.
당시에 그가 선택한 길에 대해 많은 해석이 있었다. 조중동류의 해석은 입만 더럽힌다. 나름 그의 선택을 진심으로 이해해보려는 참여당 출신의 당원이 게시판에 올린 이런 글이 있었다.
“박모 당원분이 분신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저의 첫마디는 이러했습니다. ‘에혀, 운동권 투쟁노선에 매몰된 투사 납시셨다. 당도 이런 상황에서 왜 분신하고 난리야.’ 솔직하게 그랬습니다. 지금 생사를 넘나드시는 당원 동지께 너무나도 죄송스럽습니다...너무나도 죄송스럽습니다. 민주노동당 당원들은 기본이 현장에서의 투쟁 정신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따라서... 자신의 소신과 신념이 상처받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그러한 것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침해로 보고 이러한 것이 무너지려 하면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야 한다는 관념이 존재한다...아마 그런 분일꺼다. 부끄러웠습니다. 내 자신의 기준과 해석만 가지고 내가 모르는 한 사람을 내 기준에 재단하고 평가하고 단정하여 차마 입에 담지 말아야 했던 말을 했음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지요... 그리고 눈을 감고 찬찬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람들이 가슴이 답답하거나 속이 상하면 왜 등산을 가서 함성을 지르고 노래방에서 악을 쓰고 노래를 부르는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사람들이 통곡을 하고 비명을 지르는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해했습니다. 저 분도 결국 그런 행동가셨구나...답답함이 계셨구나. 차마 분출하지 못한 분도가 있었구나. 자기 자신의 소신과 신념이 무너지는 상실감과 위기감이 있었구나. 밖으로 분출하지 못해 그 것이 한이 되었구나. 그리고 그것을 놓고 죄인으로 낙인지우는 현실이 원망스러웠구나. 그래서 삶의 끈을 스스로 놓으셨구나... 민주노동당 출신의 활동가 당원들의 모습과 마음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미 전 가슴으로 그 분들을 안았습니다.”
고마운 글이다. 이 당원은 진심으로 박영재의 선택을 그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죽음을 결심한 사람의 깊은 속마음을 이해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아니 불가능하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자기마음을 자기도 모르고 때로는 자기체면을 통해 스스로를 속이는 게 처세술로 권장되기까지 하는 물신이 지배하는 이 사회에서 상대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정말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 변혁운동을 하는 사람은 상대의 마음을 아는 것보다 동지들 사이에 하나의 마음을 새로 만들어 가려하고 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런 면에서 앞서 그 당원은 박영재의 입장에서 그의 선택을 해석해보고 이해하려 했지만 이미 그 순간 그 당원은 박영재와 하나의 마음을 만들어보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박영재가 살아있었다면 그 당원과 좋은 동지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박영재와 한 마음을 만들고자 했던 동지들도 마지막 그의 선택을 몰랐다. 그 순간 그는 어떤 이유로 선택했고 그 순간 무슨 마음을 먹고 있었을까? 수많은 열사를 먼저 보낸 운동가들은 열사를 통해 죽음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런 결심을 미처 알지 못하고 함께 하지 못한 자신들을 자책하며 미안함 속에서 그의 한을, 못 다한 꿈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 한다. 그러면서 언젠가 자신의 것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그 선택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긴다. 먼저 간이나 조금 나중 가는 이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린 그렇게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가기 때문이다.
선택의 그 순간, 박영재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역시 그의 마지막 글에 담겨있다.
“... 하고 싶은 일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계획하고 있는 것과 약속한 일들, 이러한 것을 다 이루지 못하는 심정은 아프지만, 일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소중한 일, 중요한 일, 급한 일, 그 중에서 선택을 해야 되겠죠.
저의 판단이 또 다시 파국으로 몰고 가면 어떻게 하나 많은 고민과 걱정이 앞섭니다.
하지만 책임 있는 당사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택합니다.”
그의 이러한 차분한 판단은 그가 “유시민, 심상정 공동대표님 통합의 정신으로 돌아오십시오!” 라는 제목의 편지에서 더욱 더 냉철하게 나타난다.
“이석기 국회의원 당선자가 그렇게 부담스럽습니까? ...
저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반박하려고 하면 다음 사항을 철저히
지켜주십시오!
모든 당원들이 납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반드시 약속해주십시오! ...
첫째, 진상보고서 폐기, 당원의 권리와 명예 회복을 위한 당원 총투표를 실시하라!..
둘째, 통합진보당 제1차 중앙위원회를 폐기하라!..
셋째, 통합진보당 회의 의장단의 독재를 멈춰라!”
분신했던 날 새벽에 쓴 두 페이지에 걸친 이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의견을 논리정연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편지의 마지막에 손도장을 찍고 복사본에는 간인까지 날인하는 치밀한 준비를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차분하게 하고 있었다.
평상시에도 박영재는 그랬다. 그의 생활은 매우 잘 짜여진 시간표대로 움직인다. 일의 선후차가 분명하고 사업의 경중에 따라 자신을 배치하는 것도 치밀하게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조준호의 머리채를 잡은 폭도로 몰린 억울함과 욱하는 분노에서 그랬을 것이라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당이 무너지고 자신도 함께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감에 휩싸여 그랬을 것이라고? 공공부문 노조의 한 간부가 이에 대한 답을 해준 글이 또한 방명록에 써 있다.
“... 그만 모독해라. 글 몇줄로.. 몇마디 말로, 간단하게 비하하고 단정할 삶이 아니다.”
분노의 감정에 휩싸여 크고 작은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알고 있다. 분노의 순간에는 오직 상대에 대한 증오와 공격만 있을 뿐 판단하고 선택하지 못한다. 무엇인가 판단하고 선택하는 순간 분노는 사그라들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해득실을 따질 뿐 절대로 자기가 손해나는 일을 하지 않는 법이다. 실의와 절망에 빠져 하던 일을 내팽개쳐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고 있다. 절망이란 말 그대로 희망을 잃는 것이다. 그 순간 사람은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자신이 놓인 상황에 그저 자신을 내 맡길 뿐이다. 걱정도 할 수 없다. 걱정이란 무엇인가를 기대할 때 생기는 것 아닌가.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았을 때 근심도 생기는 법이다.
절망에 빠진 채 자신의 생명을 던지겠다는 사람이 논리정연한 글을 쓰고 손도장까지 찍을 수 있다고 보는가? 나아가 자신의 행동이 미칠 파장을 걱정을 한다? 웃기는 소리다.
그가 유서에 남긴 것처럼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놓고 판단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육체적 생명을 버리기로 냉철하게 선택했다.
다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어떻게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것을 여러 선택지 중에 하나로 놓고 판단할 수 있었을까하는 놀라움이다. 그 놀라움의 답은 죽음의 문턱에 서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추측컨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평상시에도 늘 자신을 바치는 것을 해본 사람이다. 평상시에도 자신을 버리는 게 하나도 아깝지 않은 생활을 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경지이다.
전태일 열사를 우리가 두고두고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며 자본가 세상을 향해 몸을 불사른 불굴의 저항정신, 투쟁의지 때문이 아니다. 자기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을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라고 부를 수 있는 그의 사랑, 그의 사상 때문이다. 그리고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라며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는 그 순간에도 ‘나의 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고 아주 의연하고 담담하게 ‘잠시 쉬러’ 갈 뿐이라며 자신의 생명까지 버리고 있는, 심지어 ‘내 생애 굴리다 만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겠다는 그의 굳은 신념을 존경하는 것이다.
박영재는 ‘...시간이 없습니다. 나는 가야합니다. 참된 벗들 노동자 형제를 사랑합니다.’라고 직접 표현하고 있다. 박영재에게 ‘내 생애 굴리다 만 덩이’가 무엇이었는지도 그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탁이 있습니다. 자주 민주 통일 조국을 만들어주십시오”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목숨을 던지는 선택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 하지만 책임이 있는 당사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택합니다”
여기서 나는 박영재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자신만이 책임있는 당사자라고 생각했는가이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당원들이 당사자인데 왜 자기인가. 아니 책임이 있다면 내가 더 큰데 말이다. 그가 원망스럽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박영재가 동지들에 대한 믿음이 약했던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할 지 모른다. 당원들이 당 사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말해주고 싶다. 아니다. 그가 자신의 유서 첫 시작을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함께 가자”라고 한 것에 그가 동지를 얼마나 믿고 있는지 승리에 대한 확신을 깊이 간직하고 있는지가 담겨있다.
다만 그는 책임감이 정말 강했다. 당에 의거하고 당에서 주어진 역할을 기본으로 한다고 해서 늘 주어진 몫만 하고, 하라는 것만 하는 것이 주인다운 태도가 아니듯이 말이다. 성균관대역에 나갈 때나 건설현장의 체불임금 노동자를 당원으로 조직할 때 나타났듯이 그는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어디를 가나 한 시라도 당원으로서 자신의 몫을 찾아서 하려 한 사람이었다. 당에 대한 충실성은 결국 하라는 것을 잘 하는 것이지만 어떤 순간에는 자신의 깨끗한 양심을 걸고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찾아내서 하는 것이어야 한다. 박영재는 그 선택의 순간이 그런 자신만의 결단을 요구하는 때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다만 그가 선택한 그 순간이 자신만의 책임 있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그 때였는가에 대해 나는 동의하지 못할 뿐이다.
나 역시 그처럼 하지 않았을까, 그리 해야 하지 않았을 까하는 끊임없는 질문을 하면서도 말이다.
진보정책연구원 조영건 이사장은 “청년 전태일은 자신에게 대학생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노동자 박영재는 스스로 공부하며 자기 운명을 개척한 자주적인 노동자다. 박영재가 바로 이시대의 또 다른 전태일이다”라고 했다. 박영재가 이 시대의 전태일이 될 수 있는 더 큰 이유는 그가 ‘진실한 당원’이기 때문이다. 전태일 열사에게 근로기준법이 그가 그처럼 사랑하는 동료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투쟁의 무기이자 버팀목이었다면, 박영재는 ‘지금 이 시대의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민중과 더불어 세상을 바꾸는 힘이고 그게 바로 진보당’이라고 확신했다.
여기서 초점은 그의 그런 입장에 동의를 구하는 데 있지 않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한 노동자가 스스로 사랑하는 노동자와 민중의 조직된 힘의 실체로 이해하고 있는 조직을 자신의 목숨을 다해 지키고자 한 그 깨끗하고 숭고한 양심을 그 값 높은 사상을 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이제 그의 마지막 선택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고 존경심을 갖게 된 사람들은 ‘진실한 당원’ 박영재가 그토록 지키려했던 진보당에 대해 마음을 열고 알려고 했으면 좋겠다. 박영재의 짧지만 영원한 삶을 우리의 가슴에 새기자.
영원히 ‘참 노동자, 진실한 우리 당원’이라고 부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