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막리(溫幕里)
용각산에서 분기된 연봉들이 산동 산서로 분계령을 이루면서 남주(南走)하다 중산봉을 거쳐
600고지의 용당산이 되고 다시 크고 작은 여러 봉우리들을 사방으로 거느리면서 자미구릉을
형성케 하여 마을을 포근하게 품고 있다.
동창천의 덕(德)으로 온막 들은 매전면에서 제일의 곡창이다.
비룡계곡 하단부에 취락한 여건에 농촌과 산촌이라고 볼 수 있다.
짙은 유풍이 풍기고 예(禮)를 기조로 이루어진 종족마을이다.
자미산(紫嵋山) 릉의 남향 상부 지점에 신라 고찰 터가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온막이
취락된 시대는 오래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도 1600년경 입촌한 고성(固城)인 이담 공이 터전을 잡고 마을의 강성을 도보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명대(明臺)
이담 공이 마을의 발전을 위해 항상 밝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오늘날 적중된 것으로 선견지명의 동명이라 생각된다.
▶ 온막(溫幕)
경사를 따라 오르막이 있다고 올막이 변화하여 온막(溫幕)으로 미화 표기되었다는 설과
자미산릉 용당산 비탈이 막을 두른 것처럼 마을을 감고 있다고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 원전(院前)
지금부터 약 220여 년 전인 1782년에 명계서원(明溪書院)이 건립되고 마을이 형성되어
원전이라 불렀다.
▶ 당골(當谷)
당나무가 있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용송(龍松)
당골에 있었던 소나무로 임란 공신인 식성군(息城君) 이운룡 장군의 태생지에 이 장군이
심은 소나무가 마치 한 마리의 용처럼 둥지를 감아 돌면서 자랐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약 400여 년 된 이 고목은 고사되고 말았다.
부근의 산을 임금산, 들을 임금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신에게 하사된 토지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추정된다.
※ 이운룡 장군(1562∼1610)
선조 때의 무신(武臣)으로 임진왜란 중 충무공 이순신의 부하 장수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개전 초에 옥포 만호의 벼슬이었으나 충무공 순국 후에는 삼도수군통제사,
포도대장 등에까지 올랐으며 1610년(광해군 2년) 49세로 별세했다.
임진왜란시의 공로로 1604년(선조 37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冊錄)되고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으며,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천재 전략가였다.
이운룡은 경쟁자 원균의 부하였지만 이순신은 자신의 후계자로 이운룡 장군을 꼽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운룡은 자신의 상관인 원균을 설득해 어려운 시기에 이순신의
출전을 끌어내도록 하고, 이순신도 비록 경쟁자의 부하이지만, 이운룡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도와준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두 장수의 합심으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한산대첩을
이끌어 냈으며, 이후 일본이 다시는 조선 땅을 넘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