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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변한 시립박물관 하나 없어 박살난 용계동유적
이 전 오
“피맛골 '청일집' 역사 속으로” 2010년 2월 초 문화방송(mbc)이 전한 이 기사의 내용을 접하며 많은 것들이 생각되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서울 종로 피맛골이 재개발로 헐리는데요/ 60년 넘게 이 자리를 지켜온 청일집이 오늘밤을 끝으로 문을 닫습니다/ 서민들의 희로애락이 켜켜이 쌓여온 종로 피맛골에 해방과 함께 빈대떡 장사를 시작한 청일집/ 돼지기름에 부친 녹두 빈대떡이 일품, 기쁠 땐 기뻐서 한 잔, 슬플 땐 슬퍼서 한 잔, 막걸리와 함께 그렇게 차곡차곡 추억이 쌓이는 동안 어느덧 6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2000년 초부터 시작된 재개발 열풍을 피해갈 순 없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빈대떡을 부치는 건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이라는 어귀가 귓가를 매섭게 때린다. 사람들은 마지막이라는 말의 무게를 어느 정도나 실감하며 살까? 진정 이 의미의 무게를 알면서 살까? 서울의 ‘피맛골 청일집’이 사라지던 말 던, 대체 대전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런 부질없는 물음까지 던지게 되었을까? 그렇다! 나는 이 기사를 접하면서 내 가슴 속에 드리워진 하나의 회한을, 도저히 떨쳐낼 수 없었다. 우리 주변에 ‘피맛골 청일집’ 보다 훨씬 소중한 것들이, ‘악’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사라진 게 어디 하나 둘일까 만은, 유독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이 회한은 뭘까?
2009년 6월 초 나는 상대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난 4월에 잠시 장식했던 대전 서남부지구 택지개발사업지구 내에서 발굴되었다는 축구장 두 배 크기의 고려시대 대 저택 발굴 기사가, 상대동으로 빨리 달려가 보라고 마음을 재촉하고 있었지만, 쉽게 발길이 떼어 지지 않았었다. 그것은 수년간 나름대로 피땀 끝에 대전의 지정, 비지정 유적에 대한 조사를 마감하고 책자를 발간하기 위해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고 난 후였기 때문이다. 4절지 700쪽 분량의 책자 출간을 위해 ‘도서출판사 심지’에 넘긴 원고의 교정을 보아주어야 하는 바쁜 시간에, 선뜻 시간을 내어 나서기가 쉽지 않았었다.
이런저런 사유로 시간을 끌던 끝에 “한밭의 지정문화재, 비지정문화재” 책자의 출간을 눈앞에 두고서야, 바쁘게 상대동으로 차를 몰았다. 가수원 앞에서부터 공사로 복잡해진 길을 따라 찾아간 상대동의 고려시대 대 저택 발굴지는 이미 보전하기로 결정하고, 개발이 가능한 수년 뒤까지 발굴지의 우선적인 보전을 위해, 발굴지 모두를 흙으로 다시 덮어 놓은 상태였다. 흙으로 덮여 있는 발굴지 일대를 둘러보고 나서 발길을 용계동 쪽으로 옮겼다.
용계동의 유적은 목원대학교 뒤로부터 대정동 쪽으로 뻗어 내린 소태산의 줄기에 있었다. 이 산의 한 줄기가 목원대 정문 좌측 옆으로 지나 높이 90m 정도에 이르는 완만한 산줄기를 이루었는데, 북동쪽 방향으로 향한 능선 위의 산등성이 부분 전체가 유적이 발굴된 지역이었다. 유성구 용계동 산1-15 임야 일대인 이곳 산줄기에, 실로 많은 유적들이 발굴되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 발굴 현지담당 학예사가 현장에 있어, 유적발굴에 대한 대략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곳 용계동의 발굴현장에서 발굴된 유적들은 대략, 청동기 시대 주거지 10기, 청동기 시대 석곽묘 3기, 원삼국시대 주거지 350기, 토기가마 2기, 탄요 1기, 백제시대 석곽묘 6기, 통일신라시대 석곽묘 1기, 고려시대 석곽묘 20기 등, 그야말로 많은 것들이 발굴된 곳이었다. 그대로 쫙 펼쳐져 산줄기에 꽉 들어차 있는 수많은 유적들을, 휘둥그런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청동기 시대가 언제 적인가? 원삼국시대가 언제 적인가? 수만 년에서 수천 년에 이르는 실로 어림잡기도 어려운 시간들이 아닌가? 그런 시간 속에 안식해온 조상들의 발자국이 그대로 쫙 펼쳐져 있는 현장, 나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엄청난 유적이 가진 가치를 그 무엇으로 환산해 낼 수 있을까? 고구려, 백제, 신라가 건국되기 훨씬 이전에 세워진 원삼국시대의 주거지가 이 한곳에서 자그마치 350기 이상 대량으로 발굴된 사례는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이다. 그만큼 이곳의 가치는 말로 다할 수 없이 큰 것이다. 설령 축구장 두 배 크기의 고려시대 대 저택 열 개, 스무 개가 발굴됐다 한들, 이 용계동 유적에 비견할 수 있었을까? 시대적으로 보나 그 발굴의 양으로 보나, 비교키 어렵다는 생각이 선뜻 들었다. 기록을 보면 용계동유적의 보존 여부를 심의했던 지도위원들은 다섯 명의 대학 교수들이었던 것 같다.
이 지도위원들이 용계동유적을 보존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게 된 큰 요인 중의 하나가, 표면상 유적지의 대부분이 원형대로 발굴되지 못하고 훼손되어 있는 점을 들었다고 들었다. 세상에? 한 두 곳도 아니고 수천 년을 지나온 원삼국시대 주거지 350기가, 모두 훼손되지 않고 원형대로 발굴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설령 원형이 다소 훼손된 곳이 있다 하더라도 주거지로써의 형태가 확인된 것만 350기에 달한다면, 그 보존가치는 충분하고도 남는다.
350기의 원삼국시대 주거지 외에도 50여기에 달하는 각 시대 돌무덤(석곽묘) 등은 묘를 구성한 돌들이 쌓여져 있는 그대로 발굴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보존해야할 가치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유적지가 보존 결정을 받지 못하고 사라져야하는 대전의 현실 속에 실로 엄청난 비운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유적지임을 뻔히 알면서도 빠른 작업의 진척을 위해 힘 좋은 기계들로 상층부의 겉흙(표토)을 무조건 밀어내면 망가지지 않을 유적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훼손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고, 유적지가 훼손되어 보존의 가치가 없으니 없애버려야 한다고 하면, 그 어떤 유적지가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개발논리와 그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유적지를 적당히 뭉개고 공사를 진행시켜, 자신들의 이익만을 얻으려 한다면, 누가 그 사욕을 꺾을 수 있는가? 또한 사욕에 사로잡흰 자들의 뜻대로 놀아날 수밖에 없는 지도위원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이라면, 무슨 수로 고귀한 발굴지가 보존되게 할 수 있겠는가? 그 방대하고 고귀했던 용계동 유적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 이면에는, 엄청난 무지, 부패한 양심, 사회적 무관심, 담당공무원의 태만 등이 자리해 있었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이를 바로 잡지 못한다면 앞으로 대전에서, 그 어떤 유적이 나와도 보존하기 어렵게 된다. 유성구는 앞으로 보존하기로 한 상대동의 고려시대 유적지를 문화유적관광지로 개발할 것이라 한다.
이왕 유적관광지로 개발할 것이라면 이곳의 유적만으로는 유적지다운 면모를 갖추기가 부족한 것이었다. 인근에 바로 접해있는 용계동 유적지를 같이 살려 유적관광지로 개발했더라면,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을 불러 모을 아주 훌륭한 관광지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몇 푼의 예산타령만 하며 어물쩍 하는 사이, 그 고귀한 유적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2009년 당시 발굴처의 일꾼들이 7월이면 토지개발공사에서 이 유적지를 모두 파내어 인근의 사업지구 지층을 돋는 흙으로 쓸 예정이라 하였다.
이 유적지가 다 파헤쳐져 평지가 되면, 이곳에는 먹고 놀 위락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라는 것이다. 고귀한 유적지를 밀어내고 먹고 노는 위락시설을 세운다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히는 대전의 현실인가? 당시 파괴될 시간이 한 달여도 남아있지 않아, 없어지기 전에 학생들에게라도 보여주고 싶어, 한 중학교 학생 40여명을 버스에 태워 현지답사를 시행하였다. 답사가 정해진 전날부터 많은 비가 와서 발굴현장사무소로 들어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버스를 먼 곳에 두고 비를 맞으며 먼 곳까지 걸어 들어가야 했다. 발굴현지 산등성이에는 워낙 비가 많이 와 위험하여 못 들어가고, 발굴현장사무소에서 유적지에 대한 영상물과 설명, 발굴된 유적의 일부만 돌아보았다.
이곳에서 발굴된 빼어나게 멋진 돌칼(석검), 각종 토기, 묘한 그릇 등 발굴된 많은 유적들은 참으로 멋진 것들이었다. 이 멋진 발굴 유물들이 시립박물관 하나 없는 대전에는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없어, 거의 몽땅 수도권지역 박물관이나 타지의 박물관으로 옮겨가 버리고 말 것이라 생각하니 한없이 안타까웠다. 그 훌륭한 유물들이 대전에서 발굴되었음에도 대전에 둘 수 없는 현실, 그 나마 발굴된 유물들은 우리나라 어디로 가든지 우리나라 안에서 없어지지 않고 보존되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유적지는 한번 파손되어 사라져 버리면 영영 다시 되살려낼 수 없는 것 아닌가?
이미 사라져 다시 찾을 수 없게 된 용계동 유적은, 60여년밖에 안된 피맛골 '청일집'만한 가치도 없어, 가슴 울리는 기사한편 토해내지 못하고, 파멸의 길로 가야만 했단 말인가? 청동기로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수백 곳에 보물단지 같은 유적들이 어디에서 또 나올 수 있다고, 그렇게도 허무하게 파괴시켜 사라지게 해야 했단 말인가? 이런 귀중한 유적지가 송두리째 사라지게 만든 이 큰 문제를 바로 잡지 않고는, 앞으로 그 어떤 유적이 나오더라도 대전의 발굴지는 온전히 보전될 수 없다. 지난날 대전지역에서 발굴된 그 숫한 유적지들은 두어 곳을 제외하고는 개발에 밀려 모두 박살나 사라지고 말았다.
또한 앞으로 발굴될 유적지들도 이런 운명에 처해질 것이 확연하다. 대전에서는 발굴된 유적과 유물의 장래와 앞으로 발굴될 유적과 유물의 장래를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대전을 이런 지경에 빠지게 하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는, 대전에 변변한 시립박물관 하나 없기 때문이다. 대전에서 고귀한 유물이 아무리 많이 출토되어도, 마땅히 보관 전시할 시립박물관이 없다보니, 대전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은 먼저 보고 집어갈 수 있는 자가 주인이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유적, 유물의 관할권은 국가에 있다지만, 그 유물이 출토되면 그 유물이 출토된 지역의 기득권은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지역에서 나온 유물은 우리지역에서 보존 관리할 수 있는 시립박물관이 있어야, 그 기득권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해방 전은 그만두고 해방 후에 대전지역에서 나온 유물 유적이 그 얼마나 많았는가? 너무 많아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으며, 시는 그 정확한 실태조차도 제대로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대전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각종 건설 현장에서 나오는 유물만 해도 한해 평균 수백 점이 넘는다고 한다. 그렇게 많이 나오는 유물들이 뿔뿔이 흩어져 각지로 가버리기 때문에 십 수 년만 지나면 그 유물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파악하기 어려워진다고 한다. 유물이 들어간 곳의 담당들이 자주 바뀌기 때문에, 시간이 흘러 두어 번만 바뀌면 그 유물의 확인조차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참으로 대전의 시립박물관은 하루속히 마련되어야 한다. 대전에 국립박물관 몇 개가 들어선들 대전의 제대로 된 시립박물관 하나만큼 우리의 유물을 실제적으로 지켜주지 못한다. 용계동의 그 찬란하고 고귀한 발굴유물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가야하고, 발굴유적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야하는 이 기가 막히는 현실은, 모두가 대전에 이러다할 제대로 된 시립박물관 하나 없기 때문이다. 전국의 광역시 중 시립박물관이 없는 광역시는 대전뿐이라 한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혹자는 대전에 그런 박물관을 세울 예산이 없다고 한다. 이 무슨 당치않은 소리인가? 대전에 예산이 없는 것이 아니라, 유물 유적의 보존과 문화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시립박물관의 가치를 이해하고 진정 세우고자 하는 철학이나 개념 자체가 없는 것이다. 오직 예산 타령만 늘어놓으며, 국립박물관 유치가 지상의 과제인양 말하고 있다. 시립박물관이 없다고 그 무엇이 문제이며, 못할 일이 무엇이냐고 반문하는 시민들까지 있다. 일부 시민들의 이런 무지와 무감각이 대전에서 발굴되는 보물들을 다른 곳으로 몽땅 빼앗기게 만들고, 귀중한 유적지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변변한 시립박물관 하나 없이 대전에 제대로 된 문화는 절대 설수 없다.
이제라도 대전에 대전다운 진정한 문화와 역사의 뿌리를 세우기 위하여, 하루빨리 시립박물관을 건립하여야 한다. 대전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우리 품에서 안식할 수 있는 토대를 반드시 만들어야, 이곳에 살고 있는 시민으로써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다. 용계동 유적, 불러도 불러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파멸의 세계로 사라진 한밭의 보배여! 갈갈 이 찢기고 산산이 부셔져 영원히 사라져버린 찬란한 우리 조상의 얼이여! 수천 년 용계동의 그곳에서 안식하던 수많은 조상들에 혼이, 후세를 잘못 만난 죄로 순식간에 사라지게 한 이 죄는, 이제 죽어서도 씻을 수 없게 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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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황해도 송화출생
대전민예총, 작가회의, 대전수필문학회 회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장
저서
「유럽배낭여행기- 뜻을 세우면 길이 보인다.」
「한밭의 우리말이름과 옛이야기」
「한밭의 지정문화재·비지정문화재」등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