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천 이씨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 가면 김수로 왕이 나온다.
가야국의 시조인 김수로 왕에겐 열 명의 아들이 있었다.
열 아들 중 장자(거등)는 가야국을 계승하는 2代 왕이 되고둘째(거칠부)와 세째(명)은 어머니 허씨의 바램으로 허씨로 성씨를 바꾸게 되었다.
수로왕의 왕비(허황옥/인도 아유타 왕국, 혹은 남천축국의 왕녀)인 허왕후는 먼 이국땅을 바다건너 홀홀단신 시집와 외롭게 뿌리를 내리며 살게된 자신의 처지와 자신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땅의 역사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과 자신의 성씨를 지닌 자손이 대대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왕에게 간청하여 마침내 두 아들이 어머니 성(母姓)인 허씨 성을 물려(賜姓/사성) 받게 되었다.
나머지 일곱 아들은 인도에서 온 외삼촌 장유화상을 따라 入山하여 지리산 칠불사(七佛寺)의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가락국이 10대 구형왕(년)에 이르러 신라에 병합되자, 가락왕실의 후예들과 그 유민들은 신라의 사민(徙民)정책에 의해 전국 여러 지방으로 흩어졌다.
이에따라 許氏는 거주지(居住地)에 따라 양천(陽川), 태인(泰人), 하양(河陽), 김해(金海)등으로 흩어져 자리잡아 뿌리 내리며 살게 되었다. 이처럼 관향(貫鄕)을 달리하고 있으나, 이들 모두는 보주태후 허황후의 후손들이다.
현존하는 허씨(許氏)는 위 허씨 사본(許氏四本)이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으며 각 시조(始祖) 관향조(貫鄕祖)는 허황후의 30세손, 33세손, 35세손이다.
그 후손 중에 허기(許奇/허황후의 23세손/당시 양천 허씨)라는 분이 있었는데 아찬(阿粲:신라시대 6두품 벼슬)이란 벼슬을 지내고 있었다.
왕의 신임이 두터웠던 허기는 경덕왕(景德王) 15년(서기 756년)에 왕명을 받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당나라에 도착을 하고 보니, 마침 안록산의 난으로 인해 궁궐은 어지럽고, 당나라 현종은 서촉(현:成都/쓰촨성/작년 대지진이 난곳) 으로 피란하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때에 신라의 사신으로서 위험을 무릅쓰고 양자강을 거슬러 성도(成都)에 이르러 현종을 호위하고 환도(還都/수도로 돌아옴)를 도움으로써 이를 가상히 여긴 당나라의 현종으로부터 시서(詩書/고마운 마음을 표하는시와 글씨)와 황제(皇帝)의 성(姓)인 이성(李姓)을 사성(賜姓/물려줌) 받아 무술(戊戌)년에 환국함에 따라, 신라 경덕왕은 친히 다시 치하하고 공을 높이어 (功高親書) 소성백(邵城伯/지금의 인천지역을 관할하는 최고 책임자)의 작위(爵位)와 식읍(食邑/세금을 거둘수 있는 가구) 1,500호(戶)를 봉(封)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허씨 성을 이름으로 삼고 ‘이씨’라는 성을 앞에 붙여 ‘이허’(李許)로 부르게 되었다. 원래의 이름인 허기(許奇)가 이허기(李許奇)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성을 얻으신 분인 득성조(得姓祖/이씨라는 성을 최초로 얻은 조상) 이허기(李許奇/양천이씨의 시조)께서는 소성부(仁川)의 동쪽 소래산(蘇來山) 아래에 거주했으며, 그 아들들은 대대로 신라의 대관(大官)이 되어 소성백(인천지역 책임자)을 습봉(襲封/대대로 지역 관할권을 물려 받음)하였다. 득성조로부터 10세(世)에 내려와 다시 소성백이 되신 이허겸공(李許謙公)을 인천이씨세보(仁川李氏世譜)의 본관조(本貫祖: 貫鄕祖/살고 있는 곳을 본관이나 관향을 정하여 맨처음 사용한 조상) 삼으니, 본관도 지명에 따라(소성:邵城.경원:慶源. 인주:仁州.인천:仁川) 바뀌어 사용하게 되었다.
이분이 고려 현종 15년 서기 1024년에 증(贈)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尙書 左僕射 上柱國 邵城縣 開國侯)에 추증(追贈)된 이허겸(李許謙) 시조공 이며, 그 후손들이 고려를 반석 위에 세웠으며 140여 년간 왕손의 가계를 이으며, 찬란한 꽃을 피웠다. 그후 후손들은 인천을 중심으로 기반을 잡고 거주를 하면서 오래도록 인천지역(소성→인주→경원→인천/지역의 이름이 이처럼 바뀜)에 큰 세력을 형성 했었다.
득성(得性)후 자손들이 인천에 이주하고 번성하여 지방 최고 호족(豪族/지방의 귀족, 권력자)으로 자리잡은 것은, 이씨가 당(唐)과 관계있는 해상세력 이었음을 알게 하는 것이고, 더불어 서해안을 중심으로 당(唐)과의 긴밀한 관계가 있어, 고려 왕실 깊숙이 세력을 확장할 만치, 나름의 독자세력을 강건히 구축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무신들의 반란(정중부의 난) 으로 인하여 우리 문중은 많은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번연히 앉아 눈뜨고 당할 수 만 없었기에, 어떤 문중은 전국 각지 지방으로 피신하여 몸을 숨기며 가문을 보전하고, 어떤 문중은 성씨를 바꾸어 무신 반란군의 눈을 피해, 문중을 보존하고자 하는 눈물겨운 지경의 지나온 역사가 있었다. 그런 아픈 시련의 역사로 인하여, 현재 문중인의 숫자는, 시조에서 출발한 1,000여년의 장대한 역사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그리 번창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 조선초기 역사의 전면에 재 등장하여 많은 활약을 하였으나, 그 이후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는 아픔을 겪고, 당쟁의 파벌싸움이 사화(士禍/선비가 목숨을 잃거나 귀양이나 유배를 가는 화를 당함)로 번짐에, 거기에 여러차례 희생되어 한번 더 번창함이 꺽이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시중공파(侍中公派), 공도공파(恭度公派), 쌍명재공파(雙明齋公派), 충강공파 (忠剛公派)를 형성하고 있다. 오늘날 남한내 인천 이씨 문중인의 수는 약 8만명(2000년 당시 인구 통계 기준)에 헤아린다.
그 중 공도공파가 가장 번성하여 그 후손들이 인천 이씨의 80 %를 이루고 있다. 김해 김씨, 허씨, 인천 이씨는 모두 한집안 한뿌리 인것이다. 김해 김씨가 가장 맏집이고 허씨가 둘째 집안이고, 우리가 끝째 집안으로 보면 된다.
그래서 우리 세 집안은 가락 종친회를 결성하여 매년 수로왕 춘향대제를 같이 지내고 서로 문중의 대소사에 우호적인 교류를 하고 있다.
인구수에 있어서도 남한내 약 500만 이상의 인구를 자랑하는 남한내 최대의 문중이다.
시조묘의 위치는 인천광역시 연수구 연수2동에 위치해 있으며, 고려초기에 묘를 썼기에 묘가 조성된지는 약 천년이나 되었다.
옛날에는 주위가 바다였으며, 그곳이 작은 섬이어서 간치도<看雉(꿩)島>라 불렸는데 지금은 바다가 메워지고,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서 그러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주변이 염전 밭으로 둘러 쌓였으며, 배가 없이는 섬에 접근 할 수 없었다 하는데, 세월따라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는 여기도 예외일 수 없는 모양이다.
풍수적으로 이곳을 연화부수형(주변산세가 연꽃이 물위에 뜨있는 형태의 명당)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거북의 형국으로 본다는 사람도 있다는데, 이는 보는 사람마다 눈이 제각각이라 그러한 말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연화부수형보다는 금구형(거북형상의 명당)이라 판단 되는데, 이는 연수아파트 꼭대기로 올라가 정확한 형국을 보면, 문학산에서 내려온 줄기는 끊어질듯 하면서도 끊어지지않고 은은히 내려온 산세(꼬리 부분)가 거북의 형국이 맞기도 하고 금구몰니형(金龜沒泥形/거북이 진흙에 잠겨 있는 모양의 형세)이나 영구예미형(靈龜曳尾形/거북이 꼬리를 끌며 진흙 밭을 헤집고 다니는 모양이 형세) 으로 본 것이다. 이런 명당에 시조묘를 쓴 인천이씨의 그 족벌세력이 당시의 고려 왕실을 좌지우지 하였으니,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대단한 문중이었던 것이다.
인천이씨들이 이처럼 왕실을 움직인 것은 역사상에 유례가 없는 것으로 조선시대 말, 한 때 권력을 잡았던 안동 권문(安東權門)이나 안동 김문(安東金門)도 그들처럼 장구한 영화를 누리지 못했다. 그리고 국내 현존하는 330여 문중들 중에서 시조묘가 현재까지 온전하게 보전된 문중이 20여 문중도 채 않되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데 우리의 시조묘는 한자리에서 천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시조묘를 수호해온 조상의 위선(爲善/조상을 받들고 후손을 길러 문중을 번창시키는 일)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우리는 훌륭한 문중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