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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밌는 역사 - '제너럴 셔먼'호 출발전야 스케치
1866년의 어느 여름날 밤, 중국 산둥반도 톈진(天津)항 외국인주거지의 한 술집. 건장한 미국남자 프리스턴(Preston)이 나타나 "건강하고 용맹스런 선원을 구한다" 는 소문을 냈다. "두둑한 보수는 물론, 실적에 따라 수익배당을 별도로 해준다"고 했다.
당시 중국의 개항장 톈진은 막 문호가 개방된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한몫 챙기려 몰려든 서구 무역상들의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극동(極東, Fareast Asia)은 유럽과 미국으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황금시장이었다. 프리스턴도 그런 꿈을 꾸며 톈진을 찿은 야심만만한 미국 벤처무역상 가운데 하나였다.
소문을 듣고 몰려 온 선원지망자들은 프리스턴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냐?" 고 물었다. 프리스턴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세상은 달라졌다. 이제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우물안 개구리처럼 독불장군으로는 살아 갈 수가 없는 시대가 왔다. 중국과 일본도 서구와 통상수교를 하고나서 무서운 속도로 발전 해나가고 있지않은가. 그런데, 극동지역에선 유독 조선만이 '은둔의 왕국'으로 남아서 시대발전을 역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많은 서구 무역상들이 조선과 통상거래를 트려 노력 했지만 번번이 조선정부의 완강한 쇄국정책에 막혀 무산되고 말았다. 나는 조선과 최초로 통상관계를 맺고, 조선사람들에게 선진국의 신기한 물건들을 파는 개척자가 될 것이다. 교역품들을 나의 선박에 가득싣고 나는 곧 조선으로 향할 것이다. 나의 이런 뜻을 함께 할 수 있는 용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 배의 선원이 될 수 있다"
설명을 들은 선원지망자들은 선주(船主)의 뜻에는 공감했지만 한편으로 회의를 드러냈다. 민간 무역상인의 힘으로 조선정부를 상대하고 문호를 개방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실제로 지금까지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성공한 사례가 없었다는 점을 들었다.
프리스턴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러나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생사고락을 함께 할 선원들이니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겠다. 조선과의 무역통상은 사실 굉장히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 불확실한 수익을 위해 내 사업밑천을 몽땅 쏟아붓는 어리석은 짓은 절대로 하지않을 것이다. 조선과 무역통상한다는 명목은 어디까지나 우리 원정대가 내건 '대외적 명분'일 뿐이다. 그래야 정당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진짜 목표는 따로있다. 조선 땅을 자세히 보라... 참으로 매력적이지 않은가? 수천년 역사를 가진 나라기 때문에 야산 곳곳에 왕이나 귀족의 무덤이 널려있다. 그 속에는 온갖 황금기물과 보석들, 값비싼 문화재 유물이 매장돼 있다. 그 뿐아니다. 조선 사대부 부잣집이나 산 속 곳곳에 자리잡은 사찰에도 희귀문화재나 값 나가는 골동품이 많다는 사실은 여러분들도 잘 알고있을 것이다."
선원지망자들은 프리스턴이 제시한 '확실한 사업성'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민간인이 맨손으로 조선땅에 상륙해 그런 '모험'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고 되물었다.
프리스턴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내 배에는 12파운드(포탄무게 약 5.4kg) 함포 2문과 게이틀링 기관포 2문을 장착했는데, 사실 그 정도 무력만으로도 16세기 화승총으로 무장한 조선군 따위는 수천명이 한꺼번에 몰려와도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정도는 돼. 게다가 선원 모두에게 최신 라이플 소총도 지급할 예정이고"
한 선원지망자가 물었다.
"그렇다면, 조선의 어느쪽을 치고 들어갈 작정이오? 왕릉이 많은 곳은 수도 한양부근인데, 아시다시피 대궐이있는 한양주변은 조선군이 쫙 깔려있어서 아무리 약한 조선군이라지만 그 많은 군인들을 상대로 전투라도 벌일 작정이오?"
프리스턴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아무리 최신무기로 무장했다지만, 어찌 조선정예군이 지키는 '호랑이 소굴'로 쳐들어갈 수 있겠나. 나에게도 다 생각이 있소. 우리의 목적지는 수도 한양 쪽이 아니라 한양북쪽 평양이 될 것이다. 평양은 한양 못지않게 유서깊은 도시이고 유적이 많은 지역이다. 그러나 조선군의 방어수준은 한양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취약한 곳이지. 임금이 살지않는 도시여서 몇명 안되는 오합지졸을 데리고 지방관리가 지킬 뿐이지"
선원지망자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함께 하겠다"는 사람이 줄을 지었다. 이렇게 모집된 선원은 중국인 13명, 말레이인 3명, 영국인 2명, 미국인 2명(경호원). 이 가운데 특이인물은 영국인(1명) 개신교선교사 토마스(Robert Thomas)였다. 중국에서 독학으로 공부한 한국어가 수준급이어서 '통역관'으로 특채됐다.
프리스턴은 호기롭게도, 톈진의 위안부 12명을 배의 선실에 동승시켜 조선원정 길에 나서는 남자선원들의 객기(客氣)를 달래주는 통큰 '배려'도 했다.
선장과 1등 항해사 1명을 포함하면 프리스턴이 인솔하는 조선원정대의 총 인원은 35명이나 됐다. 제너럴셔먼호는 저마다 '한탕의 꿈'을 간직한 선원들과 함께 조선인들과 교역할 물품을 가득 싣고, 8월9일 드디어 톈진항을 떠났다.
* 이 글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제너럴셔먼호가 조선으로 출항하게 된 배경을 이야기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본문의 뼈대가 되는 팩트(Fact)는 미국측 기록과 관련 논문내용들을 참고하여 '확인된 부분'만 인용한 것이므로 어느정도의 신뢰성은 담보할 것으로 판단합니다.<필자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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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해군역사자료관(Department of the Navy- Naval Historical Center)이 보존하고 있는
미해군함(U.S. Navy ships; 1863-1865) 프린세스 로열함(USS Princess Royal) 기록화.
'제너럴셔먼호'로 이름이 바뀌기 전인 1862년, 기록화가 에릭 헤일(Eric Heyl)이 그렸다.
제너럴셔먼호의 사진은 미국해군 기록보관소에도 없다. 이 그림이 거의 유일한 실정이다.
■ '제너럴 셔먼호' 사건개요
1866년(고종 3년) 음력 7월 12일(양력 8월 21일)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를 평양 군민(軍民)들이 합심하여 응징, 불 태운 사건이다.
이 사건은 미국측이 2차례의 문책사(問責史; 진상조사 및 배상요구사절)를 파견하는 등 국제적인 이슈로
등장했다가, 결국 1871년 미국정부가 무력응징을 선언하며 군사행동으로 옮긴 '신미양요'의 불씨가 됐다.
▲ 대동강 유역(노란색) 지도.
1. 사건의 서막
중국 톈진(天津)에서 국제무역업에 종사하던 미국인 프리스턴(Preston)은 자신이 상선 소유한 제너럴셔먼을
이용, 조선과의 무역통상을 시도하게 된다. 프리스턴은 톈지주재 영국상사 미도스(Meadows)와 물품교역 거래를
체결하고, 일본과 조선에 비단·유리그릇·천리경(망원경)·자명종(알람시계) 등의 상품을 선적했다.
당시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했던 인원은 모두 35명으로, 선장(덴마크인 Page)을 비롯
1등항해사(미국인 Wilson) 등 항해전담 2명의 선원과 남자승무원 20명, 여자(위안부) 12명이었다.
국적별로는 중국인 25명(여성12명 포함), 미국인 5명, 말레이인 3명, 영국인 2명으로 구성됐다.
이 가운데 개신교선교사(런던 선교회소속)이던 영국인 로버트 토머스(Robert Thomas)는
중국에서 한국어를 독학으로 습득한 '통역사' 역할을 맡아 승선하게 됐다.
당시 조선은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 드라이브로 말미암아 프랑스선교사 9명을 처형한
사실을 놓고 "프랑스 군함이 침략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던 때였다.
2. 제너럴 셔먼호의 대동강 진입
제너럴 셔먼호가 8월18일(양력) 대동강입구에 다다르고 이윽고 대동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평양경내에
정박하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사람을 보내 "평양에 온 목적이 뭔가" 물었다. 통역으로 탑승한 토머스는
백인들의 국적을 소개하고 "항해목적은 오로지 조선과 상거래를 트기위한 것"임을 강조했다.
토마스는 배 안에 가득 실린 비단·시계·유리그릇·천리경·자명종 등을 보여주며
"조선의 쌀·사금·은·홍삼·베·호표피(표범가죽) 등과 교역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토마스의 한국어구사 능력은 '국제교역'을 주선할 만한 수준은 아니어서, 조선관리와의 의사소통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조선관리는 "외국과의 무역은 조선국법으로 금지된 만큼, 허용되지 않으니
즉시 배를 돌려 출국하라"는 통보를 했다.
3. 의사소통 부재로 인한 비극의 시작
음력 7월12일 제너럴 셔먼호는 조선측의 강경한 '출국통보'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평양 만경대
한사정(閑似亭)까지 올라왔다. 이에 평안감사는 또 한번 출국을 종용하는 문정관(問情官; 탐문조사관)으로
중군 이현익(李玄益) 등 3명을 파견했는데,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제너럴 셔먼호 측은
그들을 "침입자"로 오해해 인질로 잡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평양에는 험악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평양성 내 관민(官民)들이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이를 공격으로 인식한 제너럴 셔먼호는 함포와 소총을 관민들에게 난사했다.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평양시민들과 군관은 강변으로 몰려나와
돌팔매·활·화승총 사격으로 제너럴 셔먼호를 응징했고 퇴역군관 박춘권(朴春權)은 민관군이
엄호하는 사이 뗏마(전마선)를 타고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 인질로 잡혀있던 이현익을 구출해냈다.
당시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깊숙한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몇년만의 평양장마" 덕분에 불어난
대동강 수심때문에 가능했는데, 평양관민들과 공방전을 펼치는 동안 어느듯 강물수위가 낮아져 선박용골이
양각도(羊角島) 서쪽 모래톱에 좌초하고 말았다. 제너럴셔먼호의 흘수(선박이 물에 잠기는 깊이)는
5m에 가까웠기 때문에, 또다시 장마비가 따뤄 수심이 높아지지 않는 한 탈출은 불가능했다.
적진 한가운데 고립된 초조와 불안을 떨치지 못한 제너럴 셔먼호의 선원들은 그때부터 접근하는 조선인을
무조건 인질로 잡아 감금했고, 식량이 모자라자 평양관민의 공격이 뜸한 야밤을 틈타 강도 약탈행위를 벌이기도
했으며 돌팔매질하는 사람들을 향해 함포를 발사하는 등 '과잉 무력행사'에 나섰다. 시민 7명이 죽고 5명이
다치는 불상사가 발생하자 평안감사도 더 이상 방관할 수 만은 없었다.
4. 제너럴 셔먼호 방화, 승무원전원 학살
9월5일(양력)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철산부사(鐵山府事) 백낙연(白樂淵) 등과 상의하여 강 기슭에서
포격을 가한 뒤 대동강 물에 콩기름을 풀어 불을 붙여서 셔먼호를 불 태워 격침시켰다.
<* 이 부분에서는 많은 이견이 있다. 강물에 푼 콩기름이 휘발류처럼 강한 발화성을 가지는 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당시 화공작전은 인화성물질을 실은 소형목선에 불을 붙여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시켜 방화했다는 설이 더 설득력을 얻고있다>
불타는 제너럴 셔먼호에서 타 죽은 승무원도 있었고 물에 빠져죽은 자도 있었다. 23명은 대동강에 뛰어들어
강기슭로 헤엄쳐 나왔지만, 그들을 기다리고있던 분노한 평양시민은 무차별 린치를 가했다. 생존자들은
박춘권에 의해 참수(斬首; 목 잘림) 당했고, 그 목은 효수(梟首; 장대에 걸어놓음)됐다.
<* 필자 註 : 이 끔찍한 사형방식으로 말미맘아 서구사회에서는 "조선의 야만인들이 서양인들의 목을 잘라
소금에 절인 피클(pickles)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구경시키며 의기양양해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게 됐다.
1871년 신미양요에 참전한 미군병사들이 치를 떨며 복수를 다짐케 한 가장 큰 '이유'도 그 부분이었다>
*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더 자세한 기록은 다음편 내용
'1871년 강화도 한미(韓美)전쟁 - 발단(2)'를 참고할 것.
■ 미국정부의 진상조사단, 문책사 파견
미국정부는 조선에서 벌어진 제너럴 셔먼호 승무원 학살사건에 분노했다. 우선 원정대장 격인 프리스턴이
미국무역상이었으며,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제너럴 셔먼호도 미국적 선박이었고 영국인이긴 하지만
비무장한 선교사 토머스까지 무참하게 살해한 것에는 미국시민들까지 분노했다. 더군다나 목을 잘라
장대에 걸어놓는 '야만적 처형'에는 치를 떨었다.
제너럴 사건 직후 미국외무성은 정식 외교문서로 조선정부에 정식항의 했지만, 조선조정에서는 그 문서를
번역할 사람이 없어 어떤 내용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문서함에 보관해놓고만 있었다.
미국은 조선이 이 끔찍한 사건을 은폐하려 든다는 생각을 하게됐고 급기야 진상조사관을 파견하고,
책임추궁을 다그치는 문책사(問責使)까지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 1차 진상조사관 슈펠트제독 파견
1867년(고종임금4년)에 미국전함 워츄세트(USS Wachusetts)함장인 슈펠트(Robert W. Shufeldt)제독에게
사건진상 파악을 명령, 슈펠트제독은 중국을 거쳐 평양에 가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의 행방수색과 함께
조선정부의 문호개방을 촉구하고 되돌아 갔다.
슈펠트제독이 진상조사하는 과정에서 제너럴 셔먼호를 조선군에서 수리해 쓰고있는 것을 발견, 강력하게
반환요구하여 미국에 되돌아왔다는 '미국측 기록' 이 전한다. 다음은 미국측 관련기록을 번역한 내용이며,
아래는 영어원문을 붙였다.
▲ 로버트 W. 슈펠트(Robert W. Shufeldt, 1821-1895).
▲ 미국 아시아함대 워츄세트(USS Wachusetts)함
대원군은 첨단 전함인 제너럴 셔먼호를 격파한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다. 조선군은 제너럴 셔먼호에 장착된
함포와 앵커체인(쇠닻줄)을 수거하여 평양에 전시했다. 당시 평양의 조선군은 제너럴 셔먼호를 완전히 불질러
파괴했다고 보고했지만, 사실은 모래톱에서 끌어내 선박을 수리했고 조선수군의 첫 현대식 전함으로 취역시켰다.
1867년 진상조사차 들른 슈펠트제독이 이를 항의했고, 제너럴 셔먼호는 다시 성조기를 달았다. 조선정부는 조용하게
제너럴 셔먼호를 반환했으며, 아프리카남단 희망봉을 돌아 미국의 보스턴항으로 보내졌다. 미국에서 이 배는 1868년
윌리엄웰회사(William F. Well Co.)에 팔려 화물선으로 운항됐고, 1874년1월 남캐롤라이나주 윌밍턴( Wilmington)
에서 폭풍을 만나 침몰하고 말았다.
<영어원문>
The Daewongun took great pride in the destruction of a modern warship. Soldiers removed the cannon and
ship's anchor chains, placing them on display in Pyongyang. Although Korean accounts give the General
Sherman utterly destroyed by fire, actually the Koreans floated the ship off the sandbar, refitted and restored
the ship, commissioning the schooner as Korea's first modern warship. Later, after Admiral Shufeldt
protested the treatment of a ship carrying the United States flag, the Korea's quietly returned the General
Sherman which traveled around Cape Horn to Boston, and was sold to William F. Well Co. in 1868.
After serving as a cargo ship, the General Sherman went down in a storm off Wilmington,
North Carolina, in January 1874.
* 슈펠트제독과 조선과의 '인연의 고리'
슈펠트 제독은 근대 한국역사에서 몇가지의 독특한 인연을 맺은 인물로 기록된다. 제너럴 셔먼호 진상조사차
한반도를 처음 방문한 그는 1882년(고종임금19년) 3월, 미국 전권대사의 자격으로 군함을 이끌고 인천항에
들어와 4월 인천 화도진 언덕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조인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최초로
외국과 맺은 '상호평등조약'이었다.
조선과 미국이 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중국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은 "조선은 우리의 속국이므로 주권행사는
우리가 하겠다"는 억지를 부려 마젠중(馬建忠) 딩루창(丁汝昌) 등을 조약식 현장에 파견했지만, 슈펠트 전권대사는
이들을 별도의 방에 가두고 "미국과 조선은 자주독립국가로서 조약을 체결하며 중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중국측 간섭을 일축했다.
슈펠트는 미국해군에 입대, 시민전쟁때는 아바나 총영사로 재직했다. 1878년 해군 준장으로 승진해
전함 타이콘데로가함을 타고 세계일주항해를 지휘했고, 아프리카 해안을 돌아 1880년에 다시 중국에 들러
이홍장에게 한국과 미국간 통상수호관계 수립을 위한 중개역할을 해 줄것을 요청, 승낙을 받았다.
슈펠트는 그 해 3월 부산에 도착, 동래부사에게 통상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고 돌아갔다.
▲ 2차 문책사 페비거 해군중위 파견
1868년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책임을 묻는 문책사를 파견했다. 미국의 아시아함대 부사령관
골즈보로(Louis M. Goldsborough)는 전함 셰넌도어(USS Shenandoah)의 부함장 페비거(John Carson Febiger)
해군중위에게 출동명령을 내려 3월15일(양력 4월7일) 중국의 체푸(Chefoo, 현재의 옌타이)항을 떠나
이틀 후 황해의 대동강입구 초도섬에 도착했다.
▲ 페비거(John Carson Febiger; 1821–1898)
▲ 미국 전함 셰넌도어(USS Shenandoah) 연필스케치화.
셰넌도어함은 그곳에서 남동쪽 일원을 답사한 뒤 4월16일, 대동강 하구에 도착했다. 페비거 일행은 수집한 정보를
종합해볼 때 제너럴 셔먼호 사건당시 살아남은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그는 지금까지
조사되지 않았던 평양의 대동강 일원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수집했다.
페비거 해군중위를 위시한 문책사일행은 평양에서 평안도 관찰사와 "제너럴 셔먼호 배상"에 관한 담판을 벌였다.
문책사 일행은 ▲ 배상금 1백만달러 ▲ 외국선교사의 기독교 포교 및 조선인의 믿을 자유 ▲ 기독교신자 생명과 재산의 보호 및 토지소유권 보장 등을 요구했는데, 어느 것 하나 평안도 관찰사가 들어 줄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나마 깨달은 조선조정은 관찰사에게 원만한 해결을 종용했고, 평안도 관찰사는
미국측 문책사가 요구한 답서를 보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원천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었다.
결국 미국 문책사일행은 조선조정의 답변을 듣지 못한 채 철수하고 말았다.
3년 후 1871년 6월, 미국정부는 사태해결에 미온적인 조선정부를 무력응징하기 위해,
로저스제독이 지휘하는 아시아함대에 정예 해병대원과 해군수병을 싣고 강화도에 상륙,
조선정부는 병인양요에 이어 또 한 차례 서구열강의 무력침공을 받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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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슬픈 '평양기생 최옥향' 이야기
평양감사는 제너럴셔먼호 승무원 학살에 대한 진상조사와 배상을 요구하기 위해 평양에 파견된 미국 문책사일행을 맞아 그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모란봉 득월루(得月樓)에서 큰 잔치를 베풀기도 하고 대동강 놀잇배를 띄워 접대했다고 한다.
문책사일행이 남자들이고 미국본토를 떠나 장기간 타국생활을 해왔다는 점을 십분이용, 미모의 기생들을 동원해 "문책의 수위"를 낮추기로 작정한 것이다. 관기(官妓) 제도가 버젓이 존재했던 조선 관료사회이고 보면, 당시 관리들의 이런 발상은 지극히 정상 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예로부터 '평양기생'의 미색(美色)은 조선제일로 여기던 터였다.
미국 문책사 일행을 접대하기 위해 평양기생 백여명이 출동했다. 밤이고 낮이고 문책사들을 '구워삶는' 잔치가 평양의 고위관리 주관으로 열렸는데, 미국인 대표 문책사(골즈보로 제독이었을 것으로 추정)가 한 기생을 지목해 넌즈시 "수청들 것"을 요구해왔다.
최옥향이란 기생이었다. 평안도 관찰사는 문책사의 환심만 사게되면 유리하게 담판을 이끌 수 있을 것으로 판단, 최옥향을 설득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서게 됐다. 그러나 당사자 최옥향은 완강하게 거부, 외국인에게 몸을 허락할 수 없다고 버텼다.
열여덟 최옥향은, 높으신 관리가 "수청한번 들어주면 우리나라가 다 잘살게 된다"는 감언이설로 계속 꼬득였지만 "죽는 한이 있어도 그리 못한다"며 심지굳게 거부했다. 관찰사는 결국 옥향의 어머니를 찾아가 설득했고,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칠 수 없는 옥향은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문책사의 노리개'가 되기에 이르렀다.
10여일간의 담판을 끝낸 미국문책사 일행은 평양기생 최옥향을 동원한 환심사기가 먹혀든 탓인지, 별다른 내용없는 결말을 짓고 평양을 철수했다. 그러나 이 소문이 평양 사람들에게 알음알음 퍼져나가기 시작하면서, 최옥향은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입에 담지못할 욕설, 비난을 받는 신세가 됐다.
"양놈의 수청을 든 더러운 년!" 혹은 "뻔뻔스럽게 그 낮짝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 심지어는 동료기생들 마저 옥향을 비난하고 나섰다.
평양사람들의 무차별적인 학대를 견디다 못한 옥향은 결국 대동강에 투신, 자살하고 말았다. 다음날 시체가 강물에 떠올랐고 낚싯배가 건져 강기슭에 올려놓았다. 그럼에도 옥향에 대한 험담은 그치지 않았다. 더러운 기생의 시체를 묻어 줄 수 없다며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다.
강가에서 썩어가던 옥향의 시체는 까치떼가 쪼아 먹었다고 한다. 수 개월이 지난 뒤 일부만 남은 사체를 누군가 옮겼는데, 그날 이후 날씨만 궂으면 평양의 대동강에서는 옥향의 애끓는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전해지는 이야기 한 토막이긴 하다만,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을 기르지 못한다면, 우리나라는 언제 어디서 또 "죄없는 최옥향"을 만들어낼 지 모른다.
*<필자 註> 이 이야기는 정사(正史)에 기록된 내용이 아니다. 야사(野史)와 민간에서 전승된 내용이기는 하나, 단지 기록만 되지 않았을 뿐 당시 평양주민은 누구나 알았던 사실(史實)에 기초하고 약간의 소설적 허구가 덧입혀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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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강화도 한미(韓美)전쟁 - 발단(1). 끝
* 본문내용은 강화화승총 동호인회의 소중한 지적재산입니다.
사전허락없는 무단전재나 임의복사를 엄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