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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초(焰硝)의 제조 - 우리나라 화약무기의 출발
예나 지금이나
‘화약무기’의 작동원리는 매 한가지다.
화약을 터뜨려서 순간폭발압력을 얻고 그 추진력으로 실탄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현대전쟁에 쓰이는 화약무기는 종류도 엄청나고 기능이나 성능도 천차만별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화약 ▲발사관(發射管), 이 두 가지가 어떻게 결합됐느냐에 따라 무기가치가 결정된다.
중국측 사료에 의하면,
중국은 서기 850년경에 이미 흑색화약을 발명했고 11세기에는 화약을 이용한
화염방사기와 유사한 무기까지 개발했다고 한다. 또 13세기에는 화약을 이용한 신호탄이나
현대의 수류탄과 닮은 진천뢰(震天雷), 커다란 돌이나 철환(鐵丸)을 발사하는
중화기까지 발명해 전투에 동원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화약무기 역사는
고려말(1375년)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승총(조총)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 1592-1598)직후였으나, 조총이 등장하기 200여년전
고려 말에 이미 ‘원시화승총’ 형태인 총통(銃筒)류 화약무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고려 말 화약무기(개인화기)가 처음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한 무신(武臣)의
자주국방의지가 절대적인 밑받침이 됐다. 최무선장군(崔茂宣, 1325-1395)이 그 분이다.
최무선은 그때까지 중국이 독점하던 화약제조비법을 어렵사리 터득,
당대의 화약 염초(焰硝)를 생산해 우리나라의 화약무기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 한국의 노벨, 염초의 아버지 최무선장군.
1375년 최무선은
당시 원(元)나라 강남(江南; 양쯔강 남쪽)지역에서 장사를 하며 고려를 왕래했던
중국인 화약제조 전문가 이원(李元)을 자신의 집에 초청, 수십일 동안 함께 기거하면서
은밀히 화약제조비법을 전수받았고 성능실험까지 마쳤다. 당시 원나라는
화약제조법을 국가기밀로 취급해 철저한 비밀을 유지했다.
최무선은 화약제조가 성공하자 고려조정에 그 사실을 알리고,
화약무기 생산을 관장할 군사기구의 설치를 건의했다.
1377년(고려 우왕3년)에 최무선의 주도로 마침내
‘화통도감’(火桶都監)이 설치됐고 화약과 각종 총통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초기 화약무기발전사에서
고려 무신(武臣) 최무선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 최초로 화약제조법을 익혀 염초를 제조하신 분이고
▲ 염초를 이용한 각종 화포를 만들어 왜구(倭寇)와 벌인 전투에 투입했고
▲ 그 전투에 직접 참여해 승리를 이끈 명장(名將)이었다.
화약의 제조에서 화약무기 위력테스트까지, 전 과정을 검증하셨던 셈이다.
* 최무선에 의한 고려 말 화약무기에 관한 내용은 이 게시판 ‘우리나라 화약무기(고려편)을 참고하기 바람.
염초(焰硝)?
‘염초’는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요즘의 ‘화약’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의미로 통용됐다.
염초는 흑색화약(black powder = gunpowder)의 주성분으로
초석(硝石)성분을 정제하고 추출하여 얻는다.
흑색화약은 중국 송(宋; 서기960-1279년)나라 때 특히 제조가 왕성해
불꽃놀이는 물론 각종 화약무기에도 널리 사용돼왔는데, 기본재료인
숯가루와 황가루, 염초(질산칼륨)를 일정비율로 배합해서 만들어졌다.
염초 주성분은
질산칼륨(Niter, Potassium nitrate)이며 초석(硝石, saltpeter), 질산나트륨(NaNO)과 대체가 가능하다.
염초의 역할은 황과 목탄(숯가루)이 연소할 때 산소를 공급하여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키는데 있다.
그러나, 염초 자체만 태워서는 강력한 불꽃이나 폭발이 일어나지 않는다.
흑색화약의 3가지 원료가운데 염초를 제외한 황(유황가루)이나 숯가루는 자연에서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염초는 자연광물 상태의 생산량이 매우 적었고 채굴도 쉽지않아 반드시 정제(精製) 과정을 거쳐
추출해야만 했다. 그에 따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중세 사람들의 염초제조법은 중국에서 발명된
방식이 채택됐으며 그것이 곧 흑색화약 생산의 '표준공정'으로 자리잡았다.
고려 말 초기 염초제조법은 염초토를 물로 걸러 질산을 추출하고
재에서 칼륨성분을 정제해냈다. 그러나 조선후반기에는 말똥(馬糞)이나 사람의 오줌(人尿)을
추가해 질산성분을 대량추출 해내기 시작했다.
흑색화약에서 차지하는
염초의 역할이 워낙 도드라졌기때문에,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화약이 곧 염초란 등식이 성립했다.
염초나 흑색화약은 상온에서 아무리 충격을 가해도 발화하지 않는다. 불을 붙여야만
순식간에 연기와 함께 불꽃이 타오르는 산화제(酸化劑)가 된다.
흑색화약은 개방된 공간에서 불을 붙이면 순간화염이 발생하는데 그치지만,
총신내부 약실처럼 폐쇄된 공간에서 발화시키면 강한 폭발력을 갖는다.
고려나 조선에서 조총과 대포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염초덕분이었다.
재미있는 사실하나는
염초성분인 질산칼륨(Nitre)이 동의보감 등 한방(韓方)에서 약재(藥材)로 취급된다는 점이다.
복용효능이 연견(軟堅; 어깨근육을 풀어준다), 산적(散積; 체한 곳을 내린다), 이뇨(利尿; 소변을 용이하게 한다),
사하(瀉下; 설사촉진제), 해독(解毒; 독기를 해소한다), 소종(消腫; 종양이 사라지게 한다),
파혈(破血; 몸 안에 뭉친 나쁜 피를 없앤다), 파적(破積; 뱃속에 딱딱하게 뭉친 것을 풀어준다)이라고 하니,
가히 만병통치약에 버금간다.
‘염초자취술’(焰硝煮取術)
최무선이 중국인 이원에게서
터득한 화약제조법은 ‘염초자취술’(焰硝煮取術)이었다.
질산칼륨 성분을 함유한 흙에다 물을 섞은 뒤 걸러내, 이를 끓여서
정제(精製)하는 작업을 되풀이, 순수 염초를 추출해내는 방법이다.
▲ 우리나라에서 창작된 '만화위인전 최무선과 화포'에 등장하는
"염초달이는 과정묘사" . 주인공 최무선이 염초관련 책자를 보아가며
진지하게 연구하고있다. 가마솥 오른쪽에는 정제가 끝난 초석결정을
고운 가루로 걸러내는 채가 설치돼 있어 눈길을 끈다.
염초의 전통제작법은 처마 밑 등에서 염초토(焰硝土)를 모으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 염초토를 물로 걸러내고 그 물을 끓이고 걸러, 나무를 태워 얻은 재와 섞어
하얀색 염초를 정제해낸다.
고려의 '염초자취술'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제조방식이 그대로 조선에 승계(承繼)됐고 16-17세기에 이르러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다양한 제조법이 기록되고있기 때문에, 제조과정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1635년(인조임금13)에 저술된
이서(李曙)의 ‘신전자취염초방’(新典煮取焰硝方)은 관서지방에서 별장벼슬을 지냈던
성근(成根)이란 분이 중국에 건너가 습득하고 또 본인의 연구를 보탠 염초제조비법을
국문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 ‘염초달이는 법’은 다음과 같이 기술되고 있다.
① 적당한 종류의 흙 채취하기; 오래된 가옥의 부엌 부뚜막, 마루아래, 담벼락아래와
온돌구들 밑의 흙을 가볍게 가만가만 위쪽부분만 긁어서 취한다. 혀로 핥아서 흙 맛을 보아
짜고(鹹), 시고(酸), 달고(甘), 또는 매운(辛) 흙이 좋다.
② 채집한 흙은 가마솥 아래에 들러붙은 여러 종류의 재(灰)와 사람의 오줌(人尿)으로 잘 섞고,
비를 맞지 않게 높이 쌓아둔다.
③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잘 말린 말똥(馬糞)을 흙 위에 덮어 불을 붙이고,
불기가 흙 속으로 들어가면 습하고 더운 김으로 띄워진 흰 이끼가 생긴다.
이 흙은 4-5개월 더 놔두었다가 쓰는데, 오래두면 둘수록 더 좋다.
④ 잘 숙성되고 혼합된 흙은 작은 주둥이가 달린 나무통(木槽)에 담아 물을 부어
사수(篩水; 물 거르기)하여, 흙 속의 질산성분이 물에 녹아들게 한다.
이 물을 세 번 반복하여 끓이고 식히면 초석(硝石)결정을 얻을 수 있다.
⑤ 이런 방법으로 3일 동안 초련(初鍊; 처음달이기)하면 약 180근(67.5kg)을 정제할 수 있고,
이를 다시 정련(正煉; 중탕하기)하면 약 95근(35.6kg)의 염초를 얻는다.
한달이면 약 1,000근(375kg)을 달일 수 있다. * 1근(斤)=375그램으로 계산함.
⑥ 작업하다 남은 본수(本水; 흙에다 물을 내려서 받은 것)와 흙 등의 원료들은
몇 년간 땅에 묻어두었다가 다시 사용해도 좋다. 재와 흙이 섞인 함토(鹹土)에서 필요한 성분을 추출하고
남은 찌꺼기 흙은 다시 오줌과 말똥과 잡회와 섞어서 새로운 찰흙(赤粘)과 함께 버무리고 짓이겨
벽돌이나 담으로 쌓아서 비를 피하면, 3년을 기다려 다시 정제해도 새로 캔 흙보다 품질이 더 좋다.
이런 방법으로
염초를 얻는 데에는 3일간 초련에 필요한 인력이 장인(匠人) 3명과 잡역군(雜役軍) 7명이면 충분하다.
성근은 “최악의 경우라 할지라도 가마솥 하나와 나무통만 있으면 염초를 달일 수 있다”고 부연 설명했다.
또 1698년(숙종임금24)에
역관 김지남(金指南,1654-?)이 중국북경에서 배워온 염초제조법을 저술한
‘신전자초방’(新典煮硝方)에서는 염초추출의 10가지 단계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다.
① 흙을 모으고(取土)
② 재를 받아서(取灰)
③ 같은 부피의 비율로 섞는다(交合)
④ 섞은 원료를 항아리 안에 골고루 펴 넣고,
그 위에 물을 부어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篩水)
⑤ 가마에 넣고 달인다(熬水)
⑥ 이 물을 식혀서 모초(毛硝; 초석원재료)를 얻고
⑦ 이 모초를 물에 녹이고 다시 달여서(再煉) 정제시킨다.
⑧ 재련 후에도 완전히 정제되지 않으면 또 한 번 달인다(三煉)
⑨ 이렇게 얻은 정초(精硝: 정제염초)를 버드나무태운 재(柳灰)와 유황(硫黃)가루와 섞는다.
⑩ 잘 섞인 원료는 맑은 쌀뜨물로 반죽하여 방아에 넣고 찧는다(合製)
그밖에도
물 달이고 재를 만들 때 쓰는 풀매는 작업(刈草)과 재련 때 쓰는 아교물(膠水)에 대한 항목도 설명이 돼있다.
이런 모든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정초(精硝) 1근(375g)에는 버드나무를 태워서 만든 재 3냥(70.3g)과
유황가루 1냥3전(34.7g)을 섞어서 화약으로 만든다.
이 합제(合製)비율은 흑색화약을 제조하는 방법과 대동소이하며,
원료들의 비율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질산칼륨(KNO3) 40-80 : 황(S) 3-30 : 목탄(C) 10-40의
배합범위에 들어있다.
참고로 현재까지 실험된 결과에 따르면, 흑색화약의 이상적인 배합비율은
질산칼륨(KNO3) : 황(S) : 목탄(C) = 75:10:15 이다.
* 참고; 염초제조과정을 묘사한 그림 몇 장
▲ 초석성분이 함유된 부뚜막이나 처마밑 흙들을
조심스레 채취, 나무통에 담는 과정.
▲ 나무통에 잘 담은 흙 원료 위에다 물을 부어, 흙 속의
초석성분을 함유한 본수(本水)를 걸러내는 과정.
▲ 본수를 가마솥에 넣고 끓여서
염초를 정제하는 과정.
* 한국내에는 염초제조와 관련된 설명그림 자료가 거의 없는 관계로,
일본의 한 사이트에서 퍼왔습니다. 일본도 16세기 염초제작과정은
우리나라와 같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 퍼온 곳 : 火縄銃と焔硝 사이트 http://www.geocities.jp/shimizuke1955/370hinawajuu.html
19세기들어 남미에서
염초 즉, 질산칼륨을 대체할 수 있는 초석(硝石)이 광산에서 대량생산 됐는데,
특히 칠레가 이 광산을 독점하면서 "칠레초석"이란 명성을 얻었다.
이때부터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염초추출 제조방식은 차츰 사라져갔다.
무연화약(無煙火藥, smokeless powder)은
1884년 유럽에서 발명됐다. 목화 솜에서 추출한 나이트로셀룰로스(nitrocellulose; 질산섬유소)를
흑색화약에 추가하여 폭발시 연기가 훨씬 적게(완전연소는 아님) 발생하는 화약을 만든 것이다.
폭발력까지 흑색화약에 비해 강력해진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으나,
실험에 따라서는 2-4배 폭발력이 증강된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12세기 중국에서 발명되고 표준공정으로 자리잡은 염초제조법.
그로 말미암아 생산을 개시한 흑색화약은 무연화약이 발명된 19세기 말까지,
무려 700년 간이나 전 세계의 전쟁터를 누빈 각종 포화의 '표준화약' 노릇을 했다.
'흑색화약의 시대'는 그렇게 종말을 고했다.
* 이 내용의 무단전재, 복사를 엄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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