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그 밖의 나라 1]아시아 지역
(1)스리랑카 스리랑카는 '찬란하게 빛나는 섬' 뜻이며, 처음 정착한 이는 아시아 남부지역서 이주해온 원시 오스트랄로이드종족에 속한 원주민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BC 5세기 무렵 인도 북부 지역에서 신할라족이 들어왔다. 원주민은 발전한 인도유럽어족인 신할라족에 흡수되었으며, 타밀족은 기원 초기부터 1200년경 이르는 기간에 드라비다족이 지배적이던 인도에서 이주해온 이주민인 것으로 보인다. BC 200경-AD 1000경 불교가 들어와 퍼져지면서 아누라다푸라 왕국이 실론(스리랑카의 옛 이름)을 지배하게 되었고, 993-1070년 신할라족은 촐라족(침략자들)에게 실론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겼으나 폴론나루바 시대 (1070-1200경)에 다시 지배권을 확립해 1200-1505년 스리랑카 남서부지역까지 지배가 확대되었다. 한편 인도 남부지역의 한 왕조가 실론 북부지역을 지배하면서 14세기에 타밀 왕국을 세웠고, 1505년 포르투갈 함대가 실론에 도착해 1518년 요새를 세워 교역허가권을 얻어내 1619년 이 섬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캔디안 왕국은 포르투갈인들을 내쫓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을 끌어들인 것이 동인도회사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1802년 영국 직할식민지가 되었으며, 커피 산업의 눈부신 성장으로 경제가 발전하였다. 1830년부터는 잎마름병으로 커피 농장이 황폐하여졌으며, 1880년대 차 재배실험에 성공한 후 커피 대신 차가 세계적인 농장재배작물이 되어 중국의 차 산업이 망하게 되었다. 1919년 실론 국민의회를 통해 신할라족과 타밀족이 연합하였고, 1948년 영국에서 독립했으며, 1972년 헌법을 통해 실론을 스리랑카 공화국으로 선포하였다. 1981년 신할라족과 타밀족의 민족 긴장이 폭발해 폭동이 일어났고, 타밀족 지도자들은 타밀족 영토의 분리를 주장하며, 자치국가를 세우기 위해 게릴라전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10C200C4C846EBA8A) <차를 수확하는 스리랑카 여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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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도네시아
BC 1000년경까지 신석기시대에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원시 말레이족이 아시아 본토에서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으로 이주하여 조상이 되었고, 기원 후에 중국과의 상거래가 시작되었다. 인도로부터 힌두교와 불교가 여러 섬들에 문화를 이룩하였고, 9-13세기 말레이인이 세운 슈리비자야 왕국이 말레이 반도와 자바 섬 서부와 수마트라 섬 등지에서 번영을 누렸으나 왕국이 쇠퇴하였다. 여러 소 왕국으로 전락한 12세기말에 자바의 마자파히트 왕국이 인도네시아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자바섬은 현재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 되었으며, 13세기 인도에서 온 회교도 상인들을 통해 회교가 수마트라 북부에 전래되었고, 2세기 동안 힌두교와 고유문화는 발리 섬을 제외한 여러 섬들로 전파되었다. 15세기 후반 이후 마자파히트 왕조가 쇠퇴하면서 16세기 신생 이슬람 무역국들이 여러 섬의 지배권을 놓고 자기들끼리 경쟁하게 되었고, 1511년 포르투갈인들이 몰루카 제도(향료제도)에 상륙했다. 이어 스페인인, 네덜란드인, 영국인이 도착하여 통치자들이 서로 적대하도록 해 쉽게 지배권을 장악하였으며, 무역에 전념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결국 자바, 수마트라, 몰루카 제도에 식민지 지배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바타비아에 회사를 설립하였고, 바타비아는 네덜란드 바타비아 공화국의 이름에서 유래하며, 지금의 자카르타인데 자카르타의 발음은 자카르~타 즉 '르~'는 길고 떨리게 발음 한다. 현재 인도네시아는 인도의 부속 섬이라는 뜻으로 네덜란드인 붙인 이름이며, 17세기말 네덜란드가 거의 모든 섬에 대해 경제와 정치적 지배권을 확립하였고, 1927년 수카르노를 총재로 한 인도네시아 국민당이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으나 1929년 수카르노와 지도자급 인사들이 검거되어 실패로 끝났다. 1942년 일본이 네덜란드 식민통치의 반감을 이용하여 인도네시아를 침략하였고, 1945년 일본이 항복한 후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포하여 1949년 독립하였다. 수카르노 대통령은 이리안자야의 문제로 네덜란드와 불편한 관계로 일시적으로 국제연합(UN)에 양도했다가 1969년 인도네시아에 합병시켰고, 1965년 쿠데타를 진압한 수하르토 장군이 정권을 장악했다. 1968년 대통령이 되었고, 1975-76년 수하르토 정부는 포르투갈령이었던 동티모르를 합병했으나 독립운동에 대해 무자비하게 탄압하였으며, 1999년 10월 유엔은 동티모르에 평화유지군 주둔을 승인하였다. 10월 21일 우리나라 상록수부대가 로스팔로스 도착해 평화 정착에 활동 중이며, 1998년 불어닥친 아시아의 경제위기는 수하르토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으로 터져 나왔다. 1998년 5월 21일 수하르토는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하비비에에게 정권을 이양했는데 2000년 6월 총선거에서 71년이래 '만년 여당'으로 집권해 온 골카르당을 누르고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의 맏딸 메가와티가 이끄는 인도네시아 민주당(PDI)이 제1당으로 부상하여 파란을 일으켰다. 국민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여성대통령은 안 된다'는 보수 회교세력의 반대로 대통령에 오르지 못했고, 700명 정원의 국민협의회(MPR)가 대통령을 뽑는 간접선거에 와히드는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메가와티를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2001년 7월24일 와히드는 탄핵되어 메가와티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섬이 가장 많은 나라로 약 1만 3,670개의 섬들로 이루져 교통은 항공이 발달하였으며, 동서 길이는 약 5,100km로 미국의 동서 길이 보다 조금 더 길고 지구 둘레의 1/8이다. 가장 먼 곳의 섬의 거리는 파리에서 뉴욕까지 가는 거리라고 하며, 열대 우림이 전 국토의 65% 넘고, 섬 중에 '남태평양' 영화의 배경인 발리 섬은 중요한 관광지로 주로 타악기와 플루트 하나로 구성되는 발리 특유의 오케스트라인 가믈란(gamelan)이 유명하며, 주민들은 음악, 시, 춤, 축제를 즐긴다. 그리고 예술과 공예에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으며, 서부는 말레이 인종으로 갈색이나 동부 섬에 사는 주민은 멜라네시아 인종으로 니그로로이드에 가깝고 뉴기니의 이리안자야라족은 얼마 전까지도 식인 족으로 지금도 원시 생활을 하는데 보르네오나 뉴기니에는 수많은 종족이 아직도 미개한 생활을 하고 있다. 아마존과 함께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원시인이다. <영화 '남태평양'의 배경인 아름다운 발리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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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몽고(몽골) 신석기시대 사냥꾼과 순록 사육자 및 유목민들이 작은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고, BC 3세기 흉노족이 세운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4-10세기까지 오르혼 돌궐족이 몽골에서 가장 중요한 민족이었다. 745-840년 동투르키스탄의 위구르족이 몽골 북부지역에 제국을 세웠지만 이 제국은 키르기스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13세기 칭기즈칸(테무친)이 몽골 부족을 통일하여 타타르족을 무찌렸다. 그리고 중앙 아시아와 페르시아 만 연안 지역 및 카프카스 남부를 차례로 정복하였고, 이 지역들은 모두 몽골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1234년 칭기즈칸 후계자인 오고타이(1229-41)는 중국 금 나라를 정복하였다. 중국에 원 제국(1279-1368)을 수립한 사람은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1259-94)이었으며, 원이 멸망한 1368년부터 수백 년 동안 몽골족은 원래의 고향인 초원지대를 떠나지 않았다. <몽골이 세운 나라[킵챠크-키예프, 모스크바, 차카타이-사마르칸트, 일-바그다드, 홀르머즈, 원- 위구르, 고려, 오고타이]> ![](https://t1.daumcdn.net/cfile/cafe/18760B0D4CC2AC7119)
몽골족 최후의 위대한 지도자 리단 칸(1604-34)은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 만주족에 대항하여 그들의 본거지를 지키기 위해 많은 몽골부족을 통일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 만주족에 정복되어 청나라 일부가 되었다. 1912년 청나라가 몰락한 뒤 몽골 군주들은 러시아 지원을 받아 중국에 대한 몽골 독립을 선언했으며, 1917년 러시아 제정이 무너지자 몽골은 다시 중국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21년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러시아 적군(赤軍)의 도움을 얻어 중국인들을 몰아냈고, 1924년 11월 26일 몽골 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이때부터 소련과 몽골은 정치, 경제, 문화, 이념(공산주의)적으로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었고, 1980년 중국과 소련의 긴장이 완화돼 1986년 몽골과 중국 사이에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1990-91년 몽골은 동유럽과 소련의 민주화 혁명에 동참해 정치와 경제 개혁을 단행하였고, 1997년 5월 18일 선거에 1대 대통령 오치르바트(민주 연합당)가 패하여 2번째 대통령 바가반디(인민혁명당)가 당선이 됐다. 몽골은 용맹스러움을 뜻하는 말이라고 하나, 옛 중국인들이 무지몽매함을 뜻하는 '몽-蒙'를 사용하여 그들은 낮춰 부른 말이기에 그들은 '몽고'로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 <해발 1,300m에 위치한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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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필리핀 1000년경부터 중국 상인들이 필리핀의 여러 섬을 방문하고 거주했다고 전해지지만 중국과 인도 양국이 끼친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고, 15세기초 필리핀 사람 대부분 원시생활을 하며 살았다. 그들은 정령숭배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1521년 페르난두 마젤란에 의해 유럽인들이 필리핀을 발견하였으며, 1565년 펠리페(필립) 2세 때 무력으로 식민지화하였고, 필립 황제 이름이 국명이 되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5C4C465E3A849A37) 16세기 민다나오 섬을 중심으로 회교가 소개되었고, 이 무렵 필리핀 북부와 중부 전지역이 스페인 식민지가
되면서 모든 주민들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민다나오 섬과 술루 제도에 살고 있는 회교인 모로족은 스페인에게 완전히 정복되지 않았다. 1830년 마닐라는 외국 시장에 문호를 개방하였고, 설탕과 마닐라 삼에 대한 유럽의 수요를 충당하는 과정에서 상업적 농업이 크게 성장했으며, 19세기말 유럽 유학 중 민족주의 사상에 고무된 필리핀의 부유한 지주층의 자녀들이 귀국하여 1896년 폭동사건을 일으켰으나 스페인 군대에 진압되었다. 1898년 미국과 스페인 전쟁 뒤 필리핀은 미국에 인양되었으나 필리핀 내 독립운동은 1906년까지 수그러들지 않았고, 미국은 처음부터 필리핀의 자치와 독립을 위해 필리핀 국민을 훈련시킨다는 명목으로 미국의 패권주의를 합리화하였으며, 1935년 정치와 경제적 독립을 위하여 연방이 수립되었다. 독립은 제2차 대전과 일본의 침략으로 지연되었고, 1944-45년 미군에 의해 해방을 맞이한 후 1946년 7월 4일 미국 정부를 본뜬 정부를 세워 필리핀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1965년 페르디난드 E. 마르코스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1969년 최초로 재선 되었으며, 1972년 마르코스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속 집권하다가 계엄령을 해제한 1981년부터는 대통령령으로 통치하였다. 1983년 야당 지도자 베니그노 S. 아키노 2세가 귀국 길에 마닐라 공항에서 피살되자 마르코스의 부패한 장기 집권에 대한 저항이 더욱 격렬해졌고, 이런 난국을 모면하려 1986년 2월 앞당겨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다. 야당후보이자 베니그노의 미망인인 코라손 아키노에게 부정선거로 마르코스를 승자로 선포했으나 폭동으로 이어져 그는 권좌에서 물러났고, 1986년 2월 25일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아키노 정부는 기대만큼 정국안정과 개혁에 성공하지 못했고, 1991년 마르코스의 부인 이멜다 여사가 6년간 망명생활 끝에 귀국하여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하기도 하였으나 마르코스 정부 전복에 동조하였던 피델 라모스 국방장관이 아키노 지지에 힘입어 1992년 5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8년 6월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2000년 12월 25일 뇌물스캔들에 휩싸여 글로리아 아로요 부통령이 사임을 요구하고 나섰고, 2001년 1월 20일 부패 혐의로 사임했으며, 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필리핀 차의 상징인 '지프니'는 교통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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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익과 신동파씨에 대한 이야기※홍사익: 일제 때 일본군 장군으로 중장까지 오른 사람은 영친왕과 홍사익 두 사람이 있고, 홍사익은 1887년 2월 2일 경기도 안성군 소촌면 내손촌애서 태어나 1905~09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다녔다. 대한제국 육군 참위로 임관되었으나 육군무관학교가 폐지되 일본으로 유학갔고, 1921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입학해 1914년 5월 28일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1944년 3월 당시 남방군 총사령부 병참총감에 임명되었으며, 연합군 포로취급이 병참소관이라 포로수용소장을 겸했는데 그 미군포로 수용소가 바로 세부에 있었고, 그는 10월 중장으로 진급했다. 1945년 12월 19일 체포되어 2차 대전 전범으로 포로 학대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필리핀에서 열린 전범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언도 받아 1946년 9월 26일 교수형에 처형됐는데 그는 재판 중 자신을 변호와 변명도 하지 않았다. 또 어떤 발언과 질문에도 응답하지 않았고, 최후 진술마저도 거절했으며, 갇혀있던 165일 동안 목사가 넣어준 신약성서와 구약의 시편만 열심히 읽었고, 처형장에서 시편 51편을 읽어 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그의 죄목 중에 하나로 검은 종이를 포로에게 먹여 학대를 했다는 것인데 검은 종이가 우리가 먹는 김이 였으며, 남방에는 포로수용소가 많았고, 패전 3,4년 전부터 징용으로 쓸여온 많은 조선인들이 배속되어 있었다.. 이 중에 필리핀 포로를 담당했던 조선인들은 일본의 학대를 받다가 학개할 포로가 생겨 그들에게 행한 학대는 대단했지만 우리 이야기라 기록하지 않으나 우리 어릴 때 울면 일본 순사가 온다고 하면 울음을 그쳤다. 유럽에서 애들이 울면 '타타르(몽골)가 온다.'라고 한 것처럼 필리핀은 '조선 사람이 온다.'라고 했는데 그들이 조인인에 대한 나쁜 감정을 일시에 해소 시켜 준 사람을 소개하려고 홍사익 이야기를 먼저 했다. 그 사람이 아래에 소개한 신동파로 그 이야기를 하기 전 2018년 4월 24일 중국 태향산 여행 때 천계산에 오르는 중에 옆에 앉은 중국 사람이 2차 세계 대전 때 이 산에서 일본군과 전투가 있었다고 했다. 그 일본군을 지휘한 사람이 홍사익이었다는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그는 1941년 3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면서 보병 제108여단장이 되어 중국 팔로군 제18전방총사령부를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팔로군에 소속된 우리 독립군도 4명이 전사했고, 2명이 포로가 되었는데 화북지구사령관으로 있을 때 화북지구 조선인들은 그의 덕에 일본인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신동파: 지금도 농구가 국기인 필리핀은 나이가 많으면 다 기억할 정도이지만 동남아시아 국가에서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70년대 아시아에서 이름을 떨쳤던 슛의 신이었다. . 휘문고 재학시절 19세 때 국가대표에 선발되었고, 69년 방콕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농구선수권대회에서 필리핀과 결승에서 무려 50점을 혼자 넣어 한국에 우승을 안겼으며, 아시아의 영웅으로 군림했다. 이분과 더불어 김영기, 김영일은 필리핀이나 대만에서 한국 대통령보다 더 유명했으며, 무엇보다도 그를 좋아하는 필리핀은 한국 사람에 대한 감정을 혁신시킨 것은 그의 공로이다. 필리핀은 농구를 광적일 정도로 좋아해 좁은 공터나 야자나무에 달린 농구보드를 본면 알 수 있다. <전범재판을 받는 홍사익(우측)> (5)네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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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세기 리차비 왕조가 다스리는 동안 무역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문화적 중심지로 변모하였고, 7세기 중엽에 중국과 사절을 교환하였으며, 10-18세기 말라 왕조가 지배하였고, 왕국은 독립된 공국 3개로 나누어져 16세기까지 각기 독립 왕조로 통치를 하였다. 1769년 *구르카인(人)들이 네팔을 정복하고 수도를 카트만두로 옮기어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고, 1775-1951년 정치는 왕족과 몇몇 귀족가문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으로 점철되었다. 19세기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자 네팔은 심각한 위협을 느껴 1846년 네팔을 지배하고 있던 '라나' 가문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영국과 타협한 내용은 1860년 네팔은 용감한 구르카 부대를 영국령 인도군대에 편입한다. 네팔 외교권을 가지는 대신 영국은 국내와 국외의 적으로부터 '라나' 체제 보호하고 국내는 실질적 자치를 보장 받는 협정을 맺었고, 네팔 구르카 부대는 지금도 영국군에서 용맹을 떨치고 있다. 구르카 용병은 영국의 영주권을 얻어 수 있어 지원자가 많으며, 1947년 영국이 물러나자 외세를 상실한 라나 체제는 인도를 통해 훈련을 받은 인도 거주 네팔인들을 중심으로 한 혁명군이 트리부반 왕(1911-55)과 동맹을 맺고 1950년 11월 혁명을 일으키자 인도가 혁명군을 지원하여 1951년 무너졌다. 이로써 네팔은 왕정으로 복귀하였고, 1970년대 비렌드라 왕은 경제개발 정책을 추진하고 정당을 견제하였으나 두 가지 정책에서 실패하여 1979년 체제 위기에 직면하였다. 1990년 2월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역사적인 민주화운동은 시위와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유혈 무력진압에 나섰으나 비렌드라 왕은 굴복해 입헌군주제와 양원제, 복수 정당제를 골자로 하는 새로운 헌법을 공포했다. 1991년 5월 실시된 총선거에서 네팔의회당(NCP)이 하원의석 205석 가운데 과반수를 넘는 110석을 차지하여 새 총리에 오른 NCP의 G. P. 코이랄라는 경제개혁 강력히 밀고 나갔다. 당내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여 의회의 불신임으로 1994년 7월 그도 사임해야 하였고, 그후 과반수 의석을 넘는 다수당이 없어 단명의 연립내각이 줄을 잇는 극심한 정국 혼란에 휩싸였다. 1999년 5월 실시된 총선거에서 집권 여당인 NCP에 과반수를 넘는 110석을 차지해 정치적 불안에 일대 전기를 맞았으며, 이는 9년만에 9번째 들어서는 정부였다. 네팔은 정치불안과 경제난, 힌두교 신자인 대다수 국민이 수용하기 어려운 지역과 종족의 대립, 종교와 정파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지 못하여 숱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2001년 6월 보수파 아이스와랴 왕비인 어머니와 개혁파 디펜드라 왕세자 사이의 갈등은 결혼 문제로 왕세자가 아버지 비렌드라 왕과 어머니 등 가족 8명을 총으로 사살하는 사건이 터지고 왕세자는 자살하였다. 갸넨드라 삼촌이 국왕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2001년 즉위한 갸넨드라는 총리를 공석으로 간주해 네팔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으며, 2006년 4월 대국민 TV 사과문을 발표하였고, 내전은 11월 끝났다. 2007년 네팔 사람들은 239년이나 지속된 군주제를 원망해 2007년 12월 23일 네팔은 국민 투표로 군주제 폐지를 결정했으며, 2008년 4월 제헌의회 총선에서는 네팔공산당이 전체 의석의 1/3 이상을 차지했다. 공산당은 제1당으로 되었고, 2008년 5월 28일 네팔 제헌의회가 첫 회의를 열고 압도적인 찬성 속에 왕정 폐지와 공화정 도입을 골자로 한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왕정체제가 끝나고 공화제로 변경되었다. 궁을 비우라는 의회의 통첩을 받았던 네팔의 왕과 왕비는 2008년 6월 11일 카트만두의 궁을 떠났고, 2008년 7월 선거에서 제헌의회는 국민회의당의 람바란 야다브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2008년 8월 15일 제헌의회 투표에서는 네팔공산당의 프라찬다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타멜 광장과 시장이 있는 곳이고, 오른편 건물이 왕궁> ![](https://t1.daumcdn.net/cfile/cafe/171BED154CA979294F)
*구르카(Gorkha) 부대 영국의 외인부대는 프랑스와 달리 다국적 아닌 네팔의 산악 부족인 구르카족으로만 구성되었고, 영국이 구르카족을 용병으로 쓰게 된 이유는 1814년 네팔을 침공하였다. 이 때 우수한 근대적인 장비와 전술이 구르카족의 용맹 앞에 번번이 후퇴하는 수모를 당하였고, 이러한 구르카 족의 용맹함에 탄복한 영국은 그들과 타협하여 용병으로 편성한 것이 오늘날의 구르카 용병부대이다. 제1-2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의 일원으로 용맹을 떨쳤는데 그들은 항복하거나 부상당한 적병까지 사살해버리는 무차별적인 잔인함으로 악명을 떨쳤고,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와 포클랜드 전쟁에도 참가했다. 구르카 용병들의 악명을 알고 있는 아르헨티나 군은 그들의 상륙 소문에 상당수 병사들이 도망쳤다고 하는데 그들이 전투에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이유는 같은 민족이라는 일체감의 단결력 때문일 것이다. 기본 군사 훈련만 9개월이 소요되는 혹독한 훈련을 받는 것으로 유명하며, 그들의 위용이 전세계로 알려져 현재 세계적인 부호 브루나이 국왕은 자국 방어를 위해 비싼 대가임에도 구르카 외인부대에 눈독들이고 있다. 인도 정부도 파키스탄과의 전투에 투입시킬 목적으로 구르카 외인부대의 창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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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브루나이(State of Brunei Darussalam) 면적 5,765㎢, 인구 308,000(1997) 정식명칭은 브루나이 술탄왕국으로 '평화가 긷든 술탄왕국'이라는 뜻이라 하며, 면적은 경기도의 1/2 정도라고
하는데 수도는 반다르세리베기완이고, 공용어로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있다. 13-15세기 자바의 마자파히트 왕국에 속하여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15세기초 마자파히트 쇠퇴로 주민이 회교로 개종하여 독립 이슬람 왕국이 되었고, 1521년 마젤란이 도착하였다. 그때는 제5대 술탄 볼키아가 보르네오 섬 전역과 인근 섬들을 다스리고 있었으며, 16세기말경 포르투갈인과 네덜란드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술루족에게 정복당해 쇠퇴하였다. 17세기초-말기 네덜란드인들은 말레이 제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19세기 이슬람 왕국 브루나이 영토는 현재의 브루나이와 사바 일부로 줄어들었으며, 1847년 술탄은 통상관계 증진과 해적행위의 상호 억제를 위한 영국과 조약을 맺었고, 1888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어 대외관계를 영국 정부가 하도록 동의하였다. 1941년에 일본에 점령당하였다가 1945년 오스트레일리아에 의해 해방되었고, 1979년 술탄은 영국과 새로운 조약으로 1984년 1월 1일 완전한 주권과 독립을 획득하였으며, 1929년 석유 발견되었다. 그리고 1965년 천연 가스발견 등으로 풍부한 자원 덕분에 1인당 소득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고, 현재 하사날 볼키아 국왕은 자산 370억 달러로 추정하는 세계 갑부이다. 연평균 25억 달러의 석유를 일본에 팔아 증권에 투자하여 엔화의 절상과 주가 상승을 통한 부의 증식을 하였고, 각국에 부동산을 구입하여 부를 증식하기도 하였는데 영국의 고성과 유명한 호텔을 소유하였다. 미국에도 그의 소유의 호텔이 있으며, 돈 씀씀이는 상상을 초월하여 해외 토픽에 속하기도 했는데 그는 궁전을 4억 달러 들어 지은 궁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헐어 버리고 다시 4억 달러를 들어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이 세계 최대의 궁전으로 수도 반다르세리베가완의 대지 20㏊에 1,788개의 방이 있고, 개인에게 소득세를 부과하지 않으며, 국가세입 대부분이 간접세로 이루어지고, 복지국가로 사회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국민을 위한 연금이 마련되어 있으며, 의료는 병원과 원외 진료소에서 또는 이동진료소에서 치료 받고, 오지는 비행기로 왕진하는 의료 팀들을 통하여 광범위한 의료 서비스가 이루어진다. 초등교육은 모든 국민들에게 무상으로 실시되며, 먼 지역의 학생들을 위한 무료 숙박시설과 무료 수송기관이 갖추어져 있다. <브루나이 왕궁의 접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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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1) 오스트레일리아 남반부의 땅 ‘Terra Australis'는 4만-2만 5,000년 전 동남아시아로부터 이곳의 대륙으로 건너와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며, 고(古) 코카소이드의 신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고, 일본 아이누족과 같은 어두운 피부를 갖고 있다. 18세기 유럽인들이 도착할 당시 원주민의 수는 약 30만 명에 이르렀고, 1616년 네덜란드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도착한 후 1644년 이 대륙이 뉴홀랜드로 알려진 것은 아벨 타스만의 탐험 때문이다. 대규모 탐험은 1770년 제임스 쿡의 역사적 항해로 이루어졌고, 동행한 탐험가이자 박물학자인 조지프 뱅크스는 이 토지가 식민지에 적합하다고 건설을 최초로 제안하였다. 쿡 탐험대는 힘겨운 항해 끝에 퀸즐랜드 북단에 도달하여 영유권을 선포했고, 이곳을 뉴사우스웨일스라고 이름 지었으며, 영국은 범법자는 해외로 추방하는 법률이 있었는데 이것이 폐지되지 않았다. 미국 독립으로 더 이상 범죄자를 미국에 송출할 수 없었고, 산업혁명과 같은 사회적 격변에 의해 범죄가 현저히 증가하여 새로운 유형지가 필요하게 되어 1786년 뉴사우스웨일스가 유형지로 지정되었다. 1788년 1월 11척의 '아서 필립' 해군대위가 이끄는 영국선단(船團)은 1030명(죄수 726명)을 태우고 보터니 만 (灣)에 도착했으며, 개발 근거지로서 시드니가 건설되었고, '아서 필립'이 초대 총독으로 임명받았다. 그는 식민지 개척에 주력하여 1792년 기초가 다져졌으며, 1793년 최초의 자유이민 11명이 도착했으나 대부분의 지역이 사람살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금세기 와 광물자원에 대하여 새롭게 주목을 받으면서 중요시 되었다. 1830년대 후반 영국정부는 권력을 식민지로 양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1842년 영국 의회는 이들 요구에 따라 신평의회를 설치하는 법안을 가결하였고, 신평의회는 36명으로 구성하였다. 그중 12명은 빅토리아여왕이 임명했고, 나머지 24명은 재산 제한 선거로 선출하게 되었는데 이 평의회는 모든 세입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받았지만 토지매각 및 그 수입에 관한 권한은 여전히 영국측에 있었다. 빅토리아와 퀸즐랜드는 뉴사우스웨일스의 일부로서 이 신평의회에 대표를 파견했고, 뉴사우스웨일스로의 죄수 수송은 1849년을 기점으로 완전히 중단되었으며, 태즈메이니아는 1853년까지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는 1868년까지 죄수수송식민지로 역할을 하였고, 1850년 식민지정부법이 영국 의회를 통과했다. 평의회를 완전한 대의제 의회로 전환시켰고, 헌법제정권도 부여했는데 이듬해 금이 발견되어 식민지 경제력이 증가하였으며, 1852년 토지 지배권이 영국에서 식민지로 완전히 넘어갔다. 이제 식민지는 자주적인 책임정부제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1901년 1월 1일 뉴사우스웨일스, 빅토리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 등의 6개주(州)가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으로 정식 통일되었고, 중앙 정부가 어느 정도의 권한을 갖고 나머지 권한은 각 주에서 보유하기로 했다. 최초 연방의회는 멜버른에서 개최되었고, 1908년 연방 수도로 멜버른과 시드니가 경쟁해 서로 양보하지 않아 캔버라에 신도시를 건설하자는 안이 가결되었으며, 1927년 5월 캔버라에서 최초 의회가 개최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최대한의 원조를 연합국측에 하겠다는 데에 동의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제조공업국으로 성장하였으며, 정부가 국민경제에 상당부분 개입하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시장경제가 유지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1939년 영국이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같이 참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고도의 공업국으로 변모하였고, 전쟁을 통해 국제 정치에서 독립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국제관계에서 역할도 변화했고, 2차 대전은 군사뿐만 아니라 경제면에서도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6·25전쟁에 참가하였으며, 남베트남에도 원조와 파병을 하였고, 말레이시아에도 군대를 파견 하였으며, 현재 국민의 대부분은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주민은 전체인구의 1.5%가량 되며, 1973년 백호주의가 폐지되어 이민이 자유로워 인구는 급증하게 되었고, 1992년 현재 인구는 1,756만 명인데 이는 1945년 인구와 비교해볼 때 2배 이상 증가한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상징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 ![](https://t1.daumcdn.net/cfile/cafe/1578DB224CA6B2E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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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뉴질랜드 폴리네시아인들이 뉴질랜드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늦어도 AD 700-1000년경이었고, 18세기 약 10-20만 명의
마오리족들이 사우스 섬과 노스 섬에서 살았는데 네덜란드 항해가 아벨 타스만이 이끄는 탐험대가 1642년 12월 웨스틀랜드 해안을 발견하여 사우스 섬에 상륙하려고 햇으나 마오리족과 충돌로 실패하였다. 1769-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사우스 섬과 노스 섬 주위를 항해한 후 지도를 만들었고, 오스트레일리아 회사들이 사우스, 노스 섬 해안 주위에 고래잡이 기지로 작은 부락들을 건설했다. 1839-41년 뉴질랜드는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에 속해 있었으며, 1840년 2월 6일 영국정부와 마오리족 추장이 북 섬 맨 아래에 있는 '와이탕기‘에서 조약을 맺으어 입법권과 통치권을 영국정부에게 넘기는 대신 자신들을 보호하고, 토지와 어업 등에 대해 독점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847년 마오리족과의 전투는 식민주의자들이의 승리로 끝났으며, 1852년 뉴질랜드 헌법에 따라 식민지는 6개 주로 나뉘고 뉴질랜드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는데 마오리족이 중요한 땅을 팔지 않으려 했다. 이에 정착민들과 마오리족의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하여 1860년 백인들이 마오리족을 쫓아내기 위하여 10년간 전쟁은 계속되었고, 영국 군대와 민병대 그리고 정부편에 선 마오리족이 연합했다. 그들은 토지매각에 반대하던 부족들을 쫓아냈고, 1689~1870년 남 섬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골드러시를 이루어 식민지에 번영을 가져왔으며, 더 많은 유럽인이 들어오게 되었고, 또 중국인 노동자가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노스 섬의 경제성장은 마오리 전쟁으로 지장을 받았는데 1880년대 초 냉동선 개발로 농부들이 영국으로 버터, 치즈, 육류를 출하할 수 있게 되자 농업을 기반으로 한 경제가 정착하게 되었다. 1881년 '동양인입국 제한법'을 발효시킨 뒤 마오리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으며, 제1, 2차 세계대전 동안 군대, 양모, 식량을 제공해 영국을 지원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은 수출무역을 크게 신장시켰다. 그러나 막대한 인명손실도 가져왔고, 뉴질랜드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유럽 전쟁터로 군대를 파견했하였며, 1907년 뉴질랜드는 대영제국 내 자치령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1931년 웨스트민스터법에 따라 자치정부의 수립이 허용되었으나 자치국으로서의 정식 인정은 1947년 이루어 졌고, 1938년 사회보장 제도의 법안이 선포되 복지국가가 되었으며, 1970-80년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1970년대 초 에너지 비용의 상승과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은 인플레이션의 급등과 실업의 증가로 나타났고,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1990년 총선에서 짐 볼저가 이끄는 국민당은 사회복지 예산의 삭감과 의무적 노동조합 가입 등의 노동 관행의 폐지를 공약으로 제시하는 한편 핵무기 확산 문제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견지하였다. ㄱ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국민당은 1996년 총선에서도 재집권에 성공하였고, 대외정책에 있어 영국과 미국의 영향력이 축소되어 독자적 입장이 강화되었으며, 주변국들과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1999년 총선서 국민당이 승리해 헬렌 클라크가 총리로 취임한 후 근로자 복지와 근로 조건 개선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근로자 가구의 육아 비용 지원, 최저 임금 인상 등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대외적으로 중립정책을 표방해 국제연합(UN)의 이라크 파병 요청을 거부했고, 2002년 7월 총선에서 노동당이 총 120석 중 52석, 2005년 9월 총선에서는 총 121석 중 50석을 차지했다. 노동당이 원내 제1당이 되어 계속 헬렌 클라크 총리가 재임하고 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장미공원에 있는 거대하고, 기이하게 생긴 나무> ![](https://t1.daumcdn.net/cfile/cafe/154A771B4CA42BFC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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