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인천 남동구 도림동에 살면서 <집의공(사헌부 감찰사) 윤 상전(商銓)>우리 조상님께서
도림동에 언제? 왜? 오셨는지에 대하여 많이 궁금했습니다.
뚜렷하게 기록으로 보존된것도 없었으며
또한 비석 마저 너무 오래되어 비문이 지워져 겨우 口傳으로 전해져 내려오는것으로
명맥을 이어 오고 있었습니다.
사헌부 감찰사로 오셔서 주변지역 탐관오리(貪官汚吏)를 붙들어다 벌을 내렸기에 지금까지
이 지역 본토인들은 중죄를 지어본일이 없다 합니다. 구전으로 의존하기보다는 실지로 지금부터라도 자료근거를
발췌하여 후손에게 전하려고 족보와 구전과 인천시 역사관자료실의 학자에게 문의등을 하며
도림동지역문화보존위원회를 주민을 설득하여 창립하였습니다, 당제의 유래와 연혁의 자료를 수집하여 마을의
전통문화행사 자리를 잡고 지금은 구청 문화 공보부에 예산을 받아 약 300명이 모여 행사를 치루다보니 하나 둘 역사의 베일이
볏겨지는듯 하더군요,
올해 중반 9월부터 옛날부터 있던 연고자 혹은 무연고자의 공동묘지가 있는곳에 상여를 보관하는 곳이있는데 그곳을 발굴하여
잊혀져 가는 상여놀이 전통문화 행사를 재현하여 주변지역인들 혹은 인천 아시안게임 때
세계인에게 볼거리를 제공해보려고 계획을 하고있습니다.
또한 천안공파 종중회에(35세부터 38세까지* 35세는 거의 작고하여 몇 분없음)) 부회장을 맡아 젊은 회원에게 촌수와 항렬을 알고
서로 호칭하기와 계보를 알기쉽게 새롭게 만들어 나누어 주니 본 회가 젊은피로 수혈이 되어 건강한 종중회로 되어가고 있음을 볼땐
많은 시간과 경비는 들었으나 얼마나 보람있는지 몰랐어요.
*.제가 하고있는 일을 혹 못나게 자랑하는 것으로 뵈일까 우려를 합니다,
혹여 문중 중에 저의 입장과 비슷한 일이 있을 법하여 공감을 갖는 분들을 찾아보려고 한것임을 알려드립니다. ^*^ ^*^
堂 告祀의 沿革
남촌 도림 수산마을 형성된 연대를 보면 350년~400년 전쯤부터 坡平 尹氏 윤 상전(商銓)은
1592~1661년(묘역은 도림동 526-5호)도림동 덕골에 정착, 林川 趙氏 조 정만(正萬)은
1656~1739년(묘역 도림동 산46-3번지), 恩津 宋씨 송 태필(泰弼)은
1663년~1725년 (묘역수산동)파주에서 태어나 지금의 수산동에 정착했고,
또한 남촌동 곡부(曲阜)孔씨 공 봉흥(鳳興)은부천 에서 남촌동으로
1797녀~1857년에 뒤늦게 정착을 했으며, 도림동 영양(穎陽)千씨,
해주(海州)崔氏. 전주(全州)李氏 등 여러 성씨가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마을을 형성하며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마을이 점점 형성이 크게 이루어지면서 3개 주민들을 유일한토속신앙의
바탕인 당제행사로 단합을 유도하였고 마을 수호신으로 모셔진
당 나무(당 할머니)였음을 볼 수 있다.
각 마을의 연장자로부터 전해들은 내용으로 보면 남촌동입구(高架橋)와,
수산동입구(장승백이), 논현동입구(서낭당고개), 오봉산 4~5봉우리 사이 절터고개 어귀에,
장승(天下 大將軍 地下 女將軍)이 이렇게 4개소가 세워져 3개 마을 길목을 지켰으며,
안으로는 3개동 수호신 남촌동 당 할아버지, 도림동 당 할머니를 중심으로, 마을의 주민들이
단합하여, 安寧과 武運과 豊年을 堂 祭로써 기원했던 것을 보아도, 3개 마을은 한시기에 거의
비슷하게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대의 변천과
농경사회가 산업 사회로 변화되고 무분별한 개발로 풍습과 언행과 (방언)이 같았던 3개 동이
분리되어,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던 토속문화의 지방특색이 역사가 사라지고 있었다.
더욱 아쉬운 것은 남촌동의 소재한 은행나무 2그루 중(수령 약 600년)
당 할아버지로 당제를 지냈던, 당 나무는 무리한 남촌동 개발로 사라졌다.
지금은 역사에 대한 추억을 口傳으로써 면면이 후세들한테 전하고 있으며,
원주민들은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중 다행스럽게 숱한 외세의 침입과 역사변천에도 불구하고 도림동에
소재한 7가지로 나누어진 엄나무만이 (키:15m 둘레:5m 가지 폭:20m) 마을주민들의 극진한
보호아래(약 수령450년) 당 할머니로 명명된, 약350 년 전부터 매년 (陰)
7월 초승에 당제 날을 정하여 마을에 연장자를 제관으로 지정하였으며.
의관은 깨끗한 의복(두루마기)을 입고 제를 지냈고,
여자들은 不貞탄다하여 접근을 하지 못하게 했다. 堂 祭主역할을 주로 했던
尹 始容씨의 큰아들의 창운씨(78세)기억으로는
황소를 堂祭 7日前 牛시장에서 구입 하여 본인 집에서 정성으로 길러 당제를 지내는
날에 제물로 받쳤다한다, 또한 당 우물을 깨끗하게 청소한 후,
(지금 주공아파트 207동 부근인 옛날 논 가운데 샘물이 있었다한다.)
맑은 샘물로 술과 음식을 만들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이렇게 숱한 세월이 기억 속에서
사라지려 할 때 마을 주민들이 단합하여 재현을 시도했으나 여건이 뒷받침이 안 되어
결국 중도에서 중단되었다. 그러나 마을젊은이들은 옛 문화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소규모적으로 재현을 시도했다가 2007년부터
도림동 지역문화보존위원회를 발족하여,市와 區와 인근 지역 인에게 대대적으로 홍보와,
口傳으로 전해지는 발췌된 자료를 토대로 하여, 지금의 도림동 민속전통문화를 일구어냈다.
그러나 이미 발생된 관리 소홀의 흔적으로 도림동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온 堂 나무 앞쪽으로
콘크리트로 매설한 배수로 공사가 완료되었고, 이로 인한 일부 나무 가지는 이미 고사하였다,
나머지 몇 줄기에서 해마다 싹이 트며, 당 할머니의 엄나무는 해마다 봄이 올 때 되면
지역 인을 가슴을 조여들게도 하며, 환호를 하기도 한다. 巫俗 人들은 堂 할머니로 모셔지는
나무의 神은 안간힘을 쓰며 生命을 버티고 있으며, 떠나야할지 머물러야 할지 많이 망설이고
있다한다.
자료수집인: 지역문화보존회 기획부획장
윤 양 진 c/p 011-201-9233 (y2y3595@hanmail.net)
1. 아래 사진은 도림동에 처음으로 오신 할아버지 묘역입니다.
2. 그 아래는 매년 음력7월 초하루에 당제를 전통문화행사로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하는것입니다.
3. 마이크를 들고 당제의 유래와 경과보고를 하는사람이 저입니다.
1.집의공 24世 商字銓字님과 장남 25世 鳴字 世字묘소
2.매년 음력7월 초하루에 당제를 전통문화행사로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하는것입니다.
매년 황소(한우)를 잡아서 제물로바치고 남은 괴는 참여한 사람한테 산지가격으로 판매하여 기금으로쓴다.
3.마이크를 들고 당제의 유래와 경과보고를 하는사람이 저입니다.
첫댓글 대단하십니다..... 하시려는 계획 200%이상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조상님들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많은 젊은 분들이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 ^*^
아 ~ . 대단하십니다. 21세 贈左承旨 諱 繪 어른의 후손이시군요. 좋은 일 많이 하세요. 파평윤씨 판도공파의 명예를 드높여 주세요. 자료 잘 보았습니다.
네? 지송합니다. 그런데 저희 천안군수를 역임하신 諱 繪님을 잘 알고계시니 정말 반갑습니다. 혹여 존함이라도~~
저는 소정공후 한성공의 후손입니다.
부럽습니다. 저는 판도공파 36세손 윤치선이라고 합니다. 1946년경 황해도 서흥에서 조부께서 월남하시어 이남에는 선조분들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네요.
빨리 남북 통일이 되어 조상님들의 벌초라도 해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안타깝습니다. 틀림없이 남북통일이되어 치선님의 소원이 이루어질것이라 믿습니다. 더 좋은 대화를 저의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