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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 강 재 (鳳岡齋) <시조산소> |
봉강재는 경상북도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운주산 구봉하에 있는데 시조 태사공의 묘소와 별묘(別廟)를 모신 영역(瑩域)이다. 이 묘소는 일시 실전되어 그 지방의 토호 이하지(李厦榰)가 석물을 없애고 투장한 것을 후손들의 지성으로 다시 찾아 수호하게 되었다. 묘소를 심호(尋護)하게 된 것은 고전문헌과 그 지방 고노(古老)들의 구전으로 묘소의 위치를 알게 되어 당시 24세손 이공(理公)이 경주 부윤(府尹) 재임시에 심묘(尋墓)에 힘썼으나 단서를 잡지 못하였다가 영조13년(1737년)에 25세손 봉정공(鳳廷公)이 경주 영장(營將)으로 부임하여 묘소 부근을 파헤쳐 <대부윤(大夫尹)>이라고 크게 새긴 쇄비일편(碎碑一片)을 발견하여 모든 종인이 크게 기뻐하였으나 그것만으로 입증하기는 미흡하였다. 그 후 2년이 지난 1739년에 이공(理公)의 자 양래공(陽來公)(판서<判書>)이 경상감사로 부임한 후 7일간에 걸쳐 그 주위를 파헤쳐 <선지 ․ 금강<先之 ․ 金剛)>(2세 공신공<功臣公>, 3세 복야공<僕射公>의 휘자<諱字>임)이라고 새긴 쇄비일편(碎碑一片)을 발견하여 태사공의 묘소에 틀림없음을 확인하고 이가(李家)가 투장하였던 분묘 6기를 전부 파서 이장시켰었다. 그 다음해 판서 헤교공(惠敎公), 감사 양래공(陽來公), 부사 동설공(東卨公), 승지 휘정공(彙貞公), 현령 사도공(師道公), 참판 용공(容公) 제위(諸位)가 상의하여 널리 종문에 통고하고 태사공의 묘역을 다시 봉축하는 동시에 묘비(25세손 판서 혜교 찬<惠敎 撰>, 24세손 부윤 휘정 서<彙貞 書>) 석물을 갖추고 제전 일석(一石)지기를 마련하여 매년 10월10일에 시제를 봉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후 10여년이 지난 서기1751년 신미(辛未)에 27대손 광소공(光紹公)(지돈령<知敦寧>)이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분암(墳庵)(봉서암<鳳捿庵>)과 재사(齋舍)를 창건하고 승도(僧徒)로 하여금 묘역을 수직(守直)케 하며 제기의물을 완비하였다. 그 때에 광소공(光紹公)은 전문(錢文) 50냥, 재목 15간, 제사용 기물 일절을 자담(自擔)하였고, 경상감사로 부임한 26대손 동도공(東度公)(영의정<領議政>)이 전문(錢文) 80냥, 위토 일석(一石)지기(240냥), 정조(正租) 180석 등을 헌납하였으며 그 외에 후손들의 성금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경상도 지방에 수령으로 부임하는 후손들은 반드시 위토를 헌납하게 되어 많은 위토가 마련되었다. 그 후 1833년에 재사(齋舍)뒤에 봉강서원을 창건하여 태사공의 위비(位牌)를 봉안하고 춘추로 제사를 드리다가 대지가 협착하여 1846년에 치동(治洞)으로 이축하였던 것인데 1857년에 증축하고 민진원(閔鎭遠), 김창집(金昌集) 2公을 추배하였다. 그러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서원은 철폐되고 그 자리에는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그 때 제사(齋舍)뒤에 별묘(別廟)를 새로 짓고 태사공의 위패를 이안(移安)하여 모시고 현재까지 춘추로 제사를 드리고 있다. 봉첩암(鳳捷庵)은 서원을 창건할 당시에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자세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심묘후(尋墓後) 3백여년에 누차 재사(齋舍)의 중수가 있었으며 그 기록이 봉강재에 보관되어 있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서기1935년에 재사(齋舍)가 심히 퇴락되어 당시의 봉강재 도유사인 31세손 석훈씨(奭勳氏)의 노력으로 대구(大邱) 경보(經普), 청송(靑松) 용구(鎔求), 부산(釜山) 소득(小得), 영해(盈海) 경모(敬穆) 등 제공(諸公)의 거액 성금과 기타 전국 각 종문의 성금으로 크게 개 ․ 증축하였다. 그 다음은 서기1973년에 봉강재 종회장에 취임한 두상씨(斗相)가 주관하여 대구 종문의 거액 헌금 및 전국 종문의 성금으로 봉강재 입구의 차도를 확장하는 동시에 재사(齋舍) 일부를 보수하였다. 태사공 묘하에는 근래까지 신도비가 건립되어 있지 않았던 것인데 1971년에 32세손 구보(龜普)씨의 성금으로 비로소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또한 1979년에는 대종회와 거경종친(居慶宗親)의 성금으로 향사 때에 제관유숙실(祭官留宿室)로 사용할 수 있고 회의실로도 겸용할 수 있는 회관이 신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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