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길에 보는 해
퇴근길, 마주 보이는 겨울 산에 해가 넘어 가고 있다. 날마다 넘어 가는 해이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 본 것도 흔하지 않으며 더구나 해가 나를 보고 벙글거리며 웃음을 주는 때는 더욱 흔하지 않았다. 겨울 해가 노을을 만들기 전에 저토록 흥분의 붉은 색을 만드는구나하며 마치 해를 잡으려는 듯이 핸들을 잡고 꼬불 산길을 달렸다. 해가 산봉우리 뒤로 숨었다 나왔다를 반복하는 사이 내 머리도 옛날을 향해 왔다 갔다 했다.
정월 초하루였다. 해도 뜨기 전에 아버지를 따라 큰댁에 세배 드리러 간다고 길을 나섰다. 전 날 닫은 가게는 아직 그대로 닫혀있었고 오가는 사람 없이 넓은 길은 텅 비어 있었다. 잎 떨어진 앙상한 가로수를 울리는 바람소리만이 유난했다. 추운 마음에 걷고 또 걸어도 큰집은 나오지 않고 손발은 꽁꽁 얼어만 갔다. 가마솥전에 올려놓아 따뜻하게 데워 신고 나온 운동화지만 정월의 추위에 얼마가지 않아 데운 둥 만둥 했다.
중간 쯤 왔을까? 한 할아버지가 화덕에 화롯불을 피우고 계셨다. 설탕을 녹여 노란 물을 만들어 검은 철판 위에 부어서 금붕어, 독수리, 등을 만들어 파는 할아버지다. 얼마나 그 불이 반가웠던지 할아버지가 부르는 것처럼 화덕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손을 부비며 화덕 위에 손을 폈다. 손가락 사이로 막 달아오른 동그란 화덕이 숯과 하나되어 조용히 일렁거리는 버얼건 해가되어 보이고 있었다. 초하룻날 금방 피운 불에 계집애가 달려들었는데도 아무 말 없이 불을 허락한 할아버지의 넓은 마음도 그 불 속에 녹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 먼저 갈 테니 금방 오너라."
큰집까지는 아직 멀고 온통 얼어버린 길 위에서 어린 아이들은 잠시 그렇게 나마 몸을 녹여야 한다고 생각하신 아버지는 먼저 가셨다.
손끝에서 전해오는 따스함을 온 몸으로 느끼고 싶었을 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신발을 벗고는 한 다리로 비틀거리며 서서 눈으로 멀어져 가는 아버지를 잡으면서 바쁜 마음으로 발을 쬐었다. 큰집까지 가려면 넉넉히 쬐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왼 발 오른 발을 번갈아 가며 쬐었다. 뼛속까지 따뜻해오는 그 때 그 느낌......
멀리 보이는 아버지를 쫓아가려고 급히 신을 신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그러나 나는 달렸다. 발바닥은 뜨거운가 했는데 따갑기도 했고 까끄럽기도 하면서 나중에는 동그랗게 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덕의 불 을 쬐는 그 시간에 나일론 양말이 소리 없이 구멍을 넓혀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큰집까지 가는 남은 길은 발이 더욱시렸으리라.
마주 보이던 해는 내 어리숙한 과거를 듣고 더욱 벙글거리더니 그 때 그 화덕같이 생긴 얼굴로 너울거리며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더니 산 아래로 빠질 듯이 숨어버렸다. 차는 산길을 끝내고 주택가로 들어섰다. 잠시 설빔으로 새로 사 신은 나일론 양말을 빵구 낸 정다운 화덕이 있던 어린시절을 넘나들었다. 해는 졌지만 산 위에는 아직도 바알간 하늘이 앙상한 나무들을 안고 있으며 내 가슴에는 화덕의 따스함이 남아있다.
첫댓글 님의 추억 한자락이!... 사람들의 살아가는 훈훈한 인정과 함께 어울려 따뜻한 겨울의 신호탄이 되여 가슴에 저며 드네요!!!
당시는 어렵고 힘들어도... 사람은 세월후에 아름다운 무지개 색으로 채색하여 추억으로 간직 한다더군요! 당시의 추웠던 기억,화덕의 반가움,... 즐감하였슴니다!!! 건필 하십시오!!!
야 ! 멋진 한편의 추억 속으로의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 정도로 글도 짜임새 있게 잘 쓰셨는데요? 익명이 아니래도 좋을듯한걸요! 지난날의 추억은 정말 아름다워요. 그쵸? 때론 슬픔 같은게 밀려 올지라도...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언닌, 여전히 흘러간 '그때'를 몹시도 그리워하면서 기억들을 고이 간직하고 사시는군요. 그리고 그 기억들이 이제 언니의 펜대에 잉크를 묻히면서 더할 수 없는 귀중한 개인의 역사적 장을 장식하고 있네요. 무언가를 남기는 작업을 하는 언니에게 축복의 마음을 실어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