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을 구하지 못해 지리산 둘레길을 혼자서 걸었다. 혼자여서 심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기우였다. 둘레길은
애니메이션 영화에서처럼 불쑥 튀어나와 말을 걸어왔다. 다람쥐, 까치, 꿩이 순서대로 나타나 개인기를 펼치고는 무대 뒤로 들어갔다.
애기똥풀, 피나물, 골무꽃, 참꽃마리 같은 야생화는 소녀처럼 깔깔거렸다. 키가 큰
대나무는 팔짱을 낀 채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는 씨익 하고 웃었다. 이런 장면을 혼자만 보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어쩌다 만난 사람도 길에서는 금세 친구가 되니 실은 더 좋았다. 가장 소중한 친구, 오래 잊었던 나를 만나 제일 좋았다.
지난 13일 140㎞가 추가 개통되며 일부 미개통 구간을 제외하고 총 210㎞의 지리산 둘레길이 거의 완성됐다. 새로 난 길이 궁금해 지리산 길
홈페이지(www.trail.or.kr)를 뒤졌다. 지리산 둘레길에는 몇 코스, 몇 구간 같은 순서 개념이 없어서 신기했다. 단지 마을
이름으로 구간 표시를 한다. 지역을 더 많이 알고가라는 마음을 담았단다. 이번에 새로 난 길 가운데 '위태∼하동호' 구간(11.8㎞, 5시간)이 비교적 만만해 보였다. 이 구간의 지도를 다운받고 구간정보를 챙겨 두었다. 그래도 명색이 '
국립공원 1호' 지리산인데 길을 잃는 것은 아닐까. 기대와 걱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혼자서 정한 출발 예정지인
경남 산청군 옥종면 위태마을에 도착하니 나무로 만든 이정표가 하품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정표만 쭉 따라가면 길 잃을 염려는 없단다. 이정표는 검은색과 빨간색 화살표로 방향이 구분되었다. 순간 망설였지만 산 쪽으로 향한 검은색 화살표를 택했다(빨간색이 산청쪽, 검은색이 구례쪽이다).
지리산 둘레길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이웃과 소통하며 대처로 가는 길이었다. 자기들만 알던 이 길을 공개하면 성가신 일도 덩달아 늘 것인데…. 마을이 참여하지 않는 지리산 둘레길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좋은 것은 나누는 법이라며 이방인들에게 선뜻 길을 허락한 마을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이 고맙기만 하다.
그림 같은
저수지를 지나니 대나무가 길 양 옆으로 사열을 하듯이 늘어서있다. 쭉쭉 뻗어 하늘을 찌르는 푸른 대나무를 보니 머릿속까지 시원해진다. 알고 보니 위태 대나무길이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자기를 따라오라며 길 안내를 자청한다. 날쌘 다람쥐를 따라가기는 아무래도 벅차다. 그래도 그렇지, 분명 난이도가 낮은 코스라고 했는데 시작부터 길이 너무 가파르다. 힘들게 고갯마루를 올라오니 '갈치재(중태재)'라는
표지판이 나와 숨을 좀 돌리고 가기로 했다. 뭔가 이상하다. 미리 적어온 코스대로라면 분명 '지네재'가 나타나야 했다. 지네 대신 갈치라니, 불길한 마음이 지네를 처음 만난 것 같다.
길 옆에 인가가 나타나고 처음으로 사람을 만났다. 중산리 쪽에서 일하러 왔다는 부부가 길 위에서 느긋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 동네 사람이 아니라 길은 물론 둘레길이란 말 자체를 모른다. 외지 사람에게나 둘레길이지 지리산 사람에게는 원래부터 있던 길이 아닌가.
월요일이라 길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시냇물 소리는 시끄러웠고, 밭에서는 꿩이 마치 지주라도 되는 것처럼 여유롭게 거닐었다. 이름 모를 야생화는 하늘에 뿌려놓은 별처럼 반짝거렸다. 사랑의 길잇기 표지판이 나타났다. '우리가 놓은 이 길 위에서 다른 이들이 그리던 꿈이 한걸음 다가가길 바란다'고 쓰여 있다.
아무래도 다른 길로 접어든 것 같지만 이 길이 마음에 들었다. 이 길을 따라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뒤에서 다가온 차가 아는 척을 하는데 좀 전에 만난 부부다. 태워주겠다지만 '노땡큐'이다.
중태마을이 나타날 무렵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둘레꾼을 만났다. 국립공원 자원활동가이자 숲길 중태안내소 직원인 최문옥 씨이다. 최 씨는 월요일 쉬는 날을 맞아 새로 개장한 둘레길을 둘러보는 중이었단다. 최 씨는 기자가 '위태∼하동호' 구간이 아니라 그 반대쪽인 '덕산∼위태' 구간을 거슬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이렇게 걸으나 저렇게 걸으나 상관이 없다. 길의 시작과 끝은 순전히 걷는 사람 마음이 아닌가. 자신이 걷는 길이 중요할 따름이다. 마이웨이!
유점마을에 우리밀로 만든 통밀빵을 사러가는 최 씨를 따라갔다. 유점마을 지정숙 할머니(010-3117-7555)는 우리밀로 맛난 통밀 식빵(4천 원)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 빵이 거칠지만 아주 고소하다. 가족들이 먹으려고 만드는 정도라 아직
상호도 없단다. 빵 만드는 기계 앞에 선 할머니의 미소가 새색시처럼 수줍다.
덕산까지 동행해준 최 씨로부터 참 여러가지를 배웠다. 애기똥풀, 피나물, 골무꽃, 참꽃마리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게됐다. 산초와 초피를 구별하는 방법도 처음 들었다. 가시가 서로 마주나면 초피, 서로 어긋나면 산초란다.
둘레길 정비는 아직도 할 일이 많아 보였다.
벤치도 만들고, 샘터도 정비하고, 다리 교각에
페인트로 보기 흉하게 칠해진 것도 지울 계획이란다. 최 씨 같은 분들을 '길
디자이너'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길을 여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우여곡절 끝에 덕산에 도착했다. 산청군의 삼장면과 시천면을 동틀어 덕산이라고 부른다. 덕산은 곶감이 유명해 예부터 곶감장이 섰다. 덕산에는 지금도 매 4일과 9일에 덕산 5일장이 선다. 남명 조식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덕천서원에서 조식 선생이 이제 왔느냐며 껄껄 웃는 것 같다. 서원 앞에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다. 은행나무 안에는 신기하게도 벚나무가 날아와 자리를 잡았고 올해 첫 꽃을 피웠단다.
지리산 둘레길은 길을 걸으려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보이는 것도 다르고, 느끼는 것도 다르단다. 둘레길 가운데 한 길을 걷고 나니 나머지 길이 궁금해진다. 또 다른 길을 걷고 싶다. 참, 중태마을 안내소에는 여행자 스스로가 자신의 이력을 적게 되어 있다. 농작물 피해를 줄이기 위한 '책임여행'의 의미를 담았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 덕산∼위태 구간(10.3㎞, 4시간, 남녀노소 누구나): 덕산∼시천면사무소(1.7㎞)∼천평교(0.6㎞)∼중태(2.6㎞)∼유점마을(2.1㎞)∼갈치재(중태재)(2.3㎞)∼위태(상촌)(1㎞)
찾아가는 길
지리산 둘레길은 일반 산행과는 달리 보통 원점 회귀를 하지 않는다. 자가운전을 하면 다시 차량을 가지러 출발점으로 가야하는 불편이 생겨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쪽이 오히려 편리하다. 경남 산청군 덕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진주시외버스터미널(1688-0841)에서 대원사나 중산리 방향의 버스를 타고 덕산에서 내린다. 진주에서 첫 차가 오전 6시 30분부터 30분 간격으로 오후 9시 30분까지 있다. 소요시간은 50여 분.
위태로 가기 위해서는 진주터미널에서 옥종 행 버스(오전 6시 50분, 낮 12시 40분, 오후 4시 20분)를 타고 옥종을 경유해 위태(상촌) 정류소에서 내리면 된다. 위태에서 돌아오려면 위태 정류소에서 옥종∼진주 행 버스(오전 8시 20분, 오후 2시 10분, 오후 5시 50분)를 타고 진주터미널에서 내리면 된다. 문의 산청군
문화관광과 055-970-6421, 숲길 사무소 055-884-0850, 중태 안내소 055-973-9850. 박종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