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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재(載) |
현(鉉) |
구(求) 영(永) |
근(根) |
환(煥) |
배(培) |
선(善)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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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泰) |
수(秀) |
열(烈) |
균(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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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발행]
-신유보 : 광해군 13년(1621년)에 간행
-갑자보 : 영조 20년(1744년)에 간행
-기축보 : 영조 45년(1769년)에 간행
-계축보 : 철종 4년(1863년)에 간행
-을사보 : 광무 9년(1905년)에 간행
-정묘보 : 일제시대 (1927년)에 간행
-갑오보 : 해방이후 (1954년)에 간행
-기유보 : 근대이후 (1969년)에 간행
-경오보 : 현대이후 (1990년)에 간행
-합동보 : 현대이후 (1995년)에 간행
[재실과 선조 제향일]
◎재실
-병천사 : 충주지문출신 충신, 선조 영정 봉안 - 음력 3월 13일
-의충사 : 음력 9월 13일
-저존재 : 시조 선의공, 귀명 등 29위 내외분 봉안 - 10월 셋째 일요일
-영언제 : 참의공계 하동, 노량종중 재실 - 음력 10월 20일
-경모재 : 음력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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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제향일
-16세 지복룡 : (관직)문하찬성사 - 음력 10월 7일
-16세 지용도 : 충의공 고려상원수 - 음력 10월 8일
-17세 지용기 : 충원부원군 문하평장사 - 음 10월 7일
-18세 지유용 : 의주 목사공 - 음력 10월 4일
-19세 지 개 : 선공감직장 - 음력 10월 4일
-19세 지 호 : 한성부소윤 - 음력 10월 4일
-21세 봉 원 : 충청절세사 우송공 - 음 11월 9일
-시조 지 경 (지 경) 公 (서기 903-1003) 께서는 중국 당나라 때인 서기 903년 10월 15일에 태어나셨다고 하며, 중원홍농(中原弘農) 사람으로 字는 자운(自雲)이요, 호(號)는 암곡(巖谷)이니, 송(宋)의 태조(太組)가 천하를 통일하여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던 시절에 宋나라의 태학사(太學士)란 벼슬에 계시면서, 새 나라의 문물제도를 구비하는데 노력하시다가 사신으로서 고려에 오시게 되었다.
그때가 고려의 제4대왕 광종 2년(서기951년)인데, 고려가 개국된지 40년 밖에 되지 않아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정비하고 있던 때이라, 고려 조정에서는 송나라에서 오신 시조할아버지의 식견과 경험이 긴요하던 때였다. 그래서 시조할아버지께 고려에 그냥 눌러 계실 것을 간청하였고, 고려인들이 새로운 학문과 제도를 받아들이려는 진지한 자세에 감동하시어 본국의 승인을 얻어 이를 쾌히 승낙하시었다.
이때가 광종 11년(서기960년)이었으며 여기서부터 忠州 池氏가 시작됩니다.
고려초기의 미비한 문물제도를 정립하시어 많은 공을 이루시니 조정에서는 위에서 세 번째 차례인 "금자광녹대부(金紫光綠大夫)"라는 높은 벼슬을 내리고, "태보평장사(太保平章事)"라는 직위를 내리셨다. 태보(太保)란 삼사의 하나로 임금의 고문으로 국가 최고의 명예직이며, 평장사(平章事)는 내사시낭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를 이름인데 오늘날 수상 급에 해당되는 최고 벼슬로 고려의 문하부(門下部)에 속하였다.
고려 목종 6년 서기 1003년 9월 9일에 향년 101세로 서거하시니, 시호 (諡號 ; 功이 많은 신하가 죽은 뒤에 왕이 내려주는 호)는 선의공(宣懿公)이요, 묘소는 당악 화산정(唐岳華山亭), 지금의 평안남도 중화군 간동면 부원리 화문동 화산정입니다. 고려 때는 평장사(수상급) 36명을 배출한 명문 거족으로 융성하였습니다.
-2世祖(세조) 지 해 관 公 께서는
서기 939년 생으로 그 직함이 문하대아찬성사 평장사(門下大雅贊成事 平章事)요, 묘소는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사목리 황희 황 정승 정간 뒷산에. 묘제(墓祭)는 매년 음력 10月 3日에 전국 소문중(小門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 종친회 주관으로 성대히 봉행되고 있습니다. (南韓)
-6世祖 지 종 해 公 께서는
문종 임진년(서기1052년) 생으로 자는 문숙이요, 호는 운암이요. 문하시낭 평장사(門下侍郞 平章事)를 하고 충원백(忠原伯)을 봉하니 지씨(池氏)의 본관(本貫)을 충주(忠州)로 하였다.
-6世祖 지 중 해 公 께서는
평장사(平章事)이니 양쪽 겨드랑이 밑에 고기비늘이 세 개씩 있어 문종대왕이 신기히 여기어 성을 어씨로 하사하셨다. (魚氏와 池氏는 일족으로 혼인을 하지 않습니다.)
-17世祖 지 용 기 公 (서기 1330년-1392년) 께서는
서기 1380년(신우 6년)에 전라도 도순문사 겸 상원수로 남해에 침입한 왜적을 섬멸하고, 잡혀간 우리장수 백 여명을 탈환했으며, 다음해에는 밀직사(密直使)로 전라도 경상도에 조전 상원수(助戰 上元帥)가 되셨고, 서기 1389년에는 문하대아찬성사 겸 평장사(文下大雅贊成事 겸 平章事)가 되셨다.
팔장상(八將相 - 지용기, 심덕부,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박위, 조준, 정도전)과 더불어 대의를 주장하시고 길상사에서 집회하시어, "신우,신창" 부자의 왕위를 폐위하시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한충분의개국일등공신정일품(翰忠奮義開國一等功臣正一品)"의 작위가 수훈되시고, "벽상삼한삼중대광판삼사사 충원부원군(壁上三韓三重大匡判三司事 忠院府院君)"이 되셨다.
公의 저서로는 효경광의,인의부강,삼교정화,개척경제,불외역리, 십대장부,유악지남,후손무자,관방이벽,오도선례,해륙주리,사민요무, 성리연원, 춘추혈맥,`````, 휘위오권을 합쳐서 박지범부집이라 불렀다. 이조혁명으로 가산을 적몰당하고, 公의 저서를 전부 불태워버리니 제 아무리 귀중한 서적이라 할지라도 남아 있을리가 없게 되었다.
공은 고려왕조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지도자요, 애국 애족하는 위대한 영도력을 지닌 분이셨다. 이성계와 지극히 가까운 사이 시면서도, 지조와 절개를 지키시다가 밀려나게 된 것이며, 포은 정몽주 선생이 참살됨을 통분하게 생각하시고, 말도 않고, 먹지도 않고, 눕지도 않고, 잠자지 않으시고, 13일 만에 앉아서 절명하셨습니다. 不言不食不臥不寢十三日而卒(불언불식불와불침십삼일이졸)
-27世祖 지 계 公 (서기 1624년-1637년) 께서는
자는 언숙(彦叔), 호는 표곡(豹谷), 인조 갑자 년에 이괄의 난을 평정하시어 진무삼등공신(振武三等功臣)에 오르고 소모별장으로 서흥부사(瑞興府使)에 임명되셨다. 난을 평정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다 가족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인조대왕이 알고서 재혼을 권했지만 극구 사양하고, 이런 모든 사실을 왕의 동생인 공주가 알고서 그 충정과 겸양에 매료되어 왕에게 장군께 시집갈 것을 청하여 혼례를 올리시니 인조대왕의 제매(弟妹)가 된 것입니다.
이듬해 의주판관(義州判官)의 요직을 맡아 국경을 지키니 오랑캐 청군들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해 쪽의 왜구들이 수시로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으니 장군은 남해수사(南海守使)로 임명되어 왜구를 토벌하여 남해지방의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병자호란 때에 인조대왕은 서도(西道)가 이미 적에게 점령당한 뒤라 허겁지겁 남한 산성으로 피신하여, 지여해(池汝海) 장군을 불러 적을 막으려 하였으나, 지여해 장군은 남한산성을 에워싼 적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셨다.
남해에서 이 소식을 들은 장군께서는 급히 기병 500기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달려오시던 중 서흥에서 적과의 처절한 싸움에서 말이 고꾸라지면서 팔이 부러져 더 이상 싸울 수가 없게 되었지만 부장 두어 명만 데리고 진을 빠져 나와 남한산성으로 달려 신계에 당도하셨을 때, 적의 기병이 끝까지 쫓아오면서 활을 쏘아 온몸에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히셨는데, 그럼에도 남한산성을 향해 네 번 절하시고 피를 토하고 울부짖으며 눈을 부릅뜨고 칼을 손에 움켜쥐신 채 숨이 끊어 졌는데, 장군의 이 장렬한 죽음은 인조 15년 정축년(1637) 1월 4일의 일이니 당시 장군의 춘추 45세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대왕은 슬프게 애도하며 장군을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추증하는 한편 충성군(忠城君)에 봉하고 논밭60결과 은20냥을 하사하시고 정여를 세워 그 충절을 영원히 기리도록 하셨습니다. 묘소는 경기도 평택군 진위면 향교리 성황터에 있으며, 광주시 금호동 소재 2만 여 평 임야 전답에 병천사(秉天祠)를 짓고 그곳에 충원부원군 용기公(忠院府院君 湧奇公), 철산부사 여해장군(鐵山府使 汝海長軍), 충성군 계 公(忠誠君 繼)등 삼대조상의 위패와 존영을 모셔놓고, 매년 영호남 일대의 유림들이 운집한 가운데 큰 제사를 봉행합니다.
서기 1979년에는 지방문화재 75호로 지정되어 국가에서 보호하고 있으며, 충신각(忠臣閣)은 충남 서천군 판교면 후동리에 있습니다. 삼랑진 池氏는 여기서부터 그 뿌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繼 公은 7男을 두었는데 수연(水漣), 수적(水滴), 수난(水瀾), 수경(水鏡), 수현(水賢), 경징(鏡澄),경명(鏡明)이요. 삼랑진 池氏가 충성군 수연파라 함은 이분의 직계 후손이라는 뜻입니다. 전국 지씨(池氏)중에서 충성군(忠城君)의 후손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34世祖 지 준 公 께서는
삼랑진 지씨의 始祖이십니다. 해마다 도선산에서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시제를 봉행하고 있는 분이 충성군(忠城君)의 7世祖 후손인 33대 준공(浚公)의 묘소입니다. 배위는 파평 윤씨(尹氏)입니다.
-38世祖 지 창 규 公 께서는
삼랑진 율동리에 池氏 종친들의 제실(祭室)을 건립하셨으며, 삼랑진 지씨(池氏)의 뿌리를 튼튼히 하셨습니다.
-충주 지씨 대동보(忠州 池氏 大同譜)를 보시면
참의공 위 윤원(충성군)계로 표시되어 있는데 21世祖에 와서 참의공파, 학생공파, 부사공파 등으로 세분하였고, 충성군(忠城君)의 후손들이 전국 (완도,영월,서울,여천,김제,부여,공주,화성, 예산,장승포,고성,홍천,의창,삼랑진등) 곳곳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의공 계해는 21世祖. 윤원은 22世祖 임)
먼저 천민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천민은 실제로 성씨 자체가 없었으며 과거(문과)에 응시마저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충주지씨(忠州池氏)는 두말할 것 없이 고려 시대에는 平章事(수상급 최고벼슬)을 11대에 걸쳐 36명이나 배출한 명문 거족으로 융성하였으며 조선시대에서도 10명 이상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고 왕과 제매(弟妹)관계도 되었으며 무과에서도 공신들을 대거 배출한 명문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런데 왜 그런 이상한 통설이 생겨났을까?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로는 그간 일제하에서 일제 고등경찰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근거없이 지어내 주민들에게 퍼트린 말들이 그럴듯하게 들리자 유식한듯한 일부 몰지각한 식자층에서 인용한 말이 천방지축 마골피 등등이다. 다시말해 이런 말은 듣고 말할 가치조차 없으며 일본인들이 한민족 이간책으로 지어낸 말임을 다시한번 되새기면서 민족의 단결을 해치려는 술책에 현대에 와서까지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서울(32184명, 7780가구), 부산(8312명, 1190가구), 대구(4170명, 1022가구), 인천(4883명, 1190가구), 경기(18207명, 4470가구), 강원(8561명, 2025가구), 충북(8767명, 2055가구), 충남(11369명, 2476가구), 전북(3661명, 810가구), 전남(8099명, 1795가구), 경북(8350명, 2060가구), 경남(8189명, 1937가구), 제주(917명, 233가구), 계<125624명, 29780가구> ※1985년 인구센서스 통계 조사이므로 1998년 당시 150,000명으로 추산됨.
언(言)과 애(愛)로 단합(團合)하자
봉선(奉先)하고 개후(啓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