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유래
(탄식의 강이 아닌 큰 여울의 강)
0.용암대지 위를 35만년 동안 흘러온 한탄강은 철원과 포천, 연천 지역 주민들의 삶의 젖줄이며 생활무대였음에도 그동안 한(恨)스러운 사연을 간직한 강으로 오인되어 왔으며 잘못된 이 사실이 계속하여 퍼져가고있다.
"큰여울의 강" 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언제부터 그런 한탄스러운 통곡의 강이라는 이미지로 바뀌게 되었을까? 이는 아마도 한탄강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태봉국(太奉國) 궁예(弓裔)의 비운의 패망과 6.25 전쟁등 비극적인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길고 구불구불한 강 만큼이나 민족의 비원과 탄식의 역사를 딛고 유유히 흐르는 한탄강은 이름과 관련된 여러 전설같은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다. 철원의 넓은 들판에 수도를 세우고 대동방국을 건설하려했던 후삼국 시대의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 명성산으로 도망칠때 이 강을 건너며 한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남쪽의 후백제와 싸우고 서울인 철원으로 돌아오던 어느날 강가의 돌들이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곰보돌인 것을 보고 나의 운이 다 했구나 라고 한탄했기에 한탄강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탄강 유역은 용암 분출 지역으로 구멍 뚫린 검은색 현무암이 많이 널려 있는데 이를 보고 궁예가 회한에 찬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사진은 송대소 주상절리의 모습이다.)
또 다른 설은 6.25전쟁 당시 중부지역 최대의 곡창지대요 수도 서울의 중요 접근로인 철원을 차지하기 위해 생사를건 치열한 전투로 수많은 병사들의 붉은 피가 한탄강을 피로 물들였다는데서도 유래한다. 한탄강이 Y자형으로 흐르는 김화, 평강, 철원을 잇는 철의 삼가지대에서는 백마고지전투, 수도고지전투, 저격능선전투 등 전사의 한 폐이지를 장식하는 큰 전투가 많았다.
또 임진강과 합류하는 근처 연천 전곡읍은 38도선이 지나는 곳으로 광복 후 분단의 선이 그어지며 처음에는 제한적으로나마 남, 북 왕래가 가능하다 어느 순간 완전히 차단되자 자유를 그리는 많은 북녘 동포들이 이곳 한여울을 건너 남으로 넘어왔고 일부는 강을 건너다 목숨을 잃기도 하고 일부는 영원히 이산 가족이 되는 비운을 겪었다 해서 한 많은 강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한편 평평한 용암대지인 철원평야에서는 한탄강이 전혀 안보여서 6.25 전쟁중 평지를 따라 탱크를 몰고 돌진한 인민군이 수직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거나 인민군이 후퇴할 당시 한탄강의 도강이 어려워 한탄하며 건넜다는 설도 전해오지만 그런 가정은 남, 북의 군인이 동일하게 겪었을 것이고 6.25전에는 한탄강의 거의 전부가 북의 지배하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일부러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으며 6.25전쟁시 유행성 출혈열 바이러스를 발견하여 세계 의학계에 유일하게 한글식 이름으로 올라있는 한국인이 최초로 발견한 바이러스 이름이 "한탄바이러스"인 점을 감안하면 전쟁전에 이미 한탄강이라는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탄강 주변에 드넓은 평야가 자리하고 있지만 강이 수직절벽 아래로 흐르기 때문에 관개수로나 기계가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풍부한 한탄강 물을 바라보며 농사를 제대로 짓지못하는 심정에서 농부들이 한탄했다는데서 유래했다고도 전해지지만 철원지역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한반도 지형에서 년중 가장 비가 많이 오는 3다우(多雨)지역에(년중 평균 강수량 - 1350~1400미리) 속하여 한탄강 물이 아니어도 농사에 큰 지장을 받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이 설 역시 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남, 북으로 분단되기전인 일제시대부터 철원평야의 농업용수는 북쪽의 봉래호 저수지가 맡아오고 있었는데 6.25후 북이 철원평야를 빼앗기자 이 봉래호 저수지의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려서 한동안 농사에 애로가 많았으며 이에 남쪽에서 지금의 양지리에 있는 토교저수지를 비롯한 동송저수지를 축조하여 해결하였다.
아무튼 지역에서 전해오는 한탄강의 유래는 모두 한이 서려 있는 강 일색인 것은 그만큼 한탄강이 소용돌이 치던 우리 역사의 중심에서 항상 비극을 함께 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은 말흘천에 해당하는 김화 민들래 벌판을 흐르는 민통선안이다.)
그러나 한탄강의 어원과 유래는 이런 전설과 관련이 없다.
"한"은 순수한 우리말로 "크다, 넓다, 높다"라는 뜻으로 훈차하여 "大, 廣, 高"로 쓰이며 음차하여 "漢, 韓, 汗"으로 쓰인다. 탄(灘)은 순수한 우리말로 "여울, 개천" 등의 뜻이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 산지로 들어가면 주위의 곡벽이 높아지며 산곡이 나타난다. 여울은 하천 가운데 물의 흐름이 빠르고 많아 급류를 이루는 곳으로 비말이 튈 정도는 아니나 물소리를 내며 흐른다. 즉 강물의 흐름이 비교적 빠른 곳을 여울이라 하며 湍(여울단), 灘(여울탄)을 쓴다. 이와 반대로 물이 멈춰있는 곳은 연(淵-여못연)이라 한다. 한탄강에 있는 유명한 직탕(直湯) 폭포는 옛 기록에 곧은 여울, 즉 직탄(直灘)이라고 쓰여 있는데 후세에 잘못 전해져 온 것이다.
옛날에는 '한탄'을 대탄(大灘)으로 표기했다. 大를 훈차하여 뜻을 따라 '한'으로 灘은 음차하여 '탄' 한탄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후에 변용되어 모두 음차해 한탄(漢灘)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철원도호부 편에 "체천의 근원이 철령인데 남쪽으로 흘러가서 경기 양주의 북쪽으로 들어가 대탄大灘이 된다."라는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같은 책 양주목 편에도 "대탄大灘은 양주 북쪽 74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영평현 백운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강원도 철원부 체천에서 나와서 합류한다. 연천과 영평을 지나 서남쪽 임진으로 들어간다."고 나와있다.
현재도 대탄, 즉 한여울이 옛 양주목 관할이었던 현 연천군 청산면 대전리와 전곡읍 전곡리 사이에 존재하고 있다. 한탄강의 원래 이름은 한여울, 즉 대탄大灘에서 유래해 대탄강大灘江이라고 불렀다.
지금까지는 한탄강의 유래에 대해서 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전국의 하천을 조사하면서 "한탄漢灘에 강江을 붙여서 한탄강이라고 하였다." 라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고 원래 고문헌에 대탄강大彈江으로 고유 지명이 나와 있다. 이 대탄강의 대大자가 크다는 순수한 우리말의 '한'으로, 한탄강이 된 것이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 김화金化 편에 보면 아래와 같은 기록이 나온다.
"末訖川西北二十七里祥楊州大灘江"
말흘천서북이십칠리상양주대탄강
또 같은 책 양주楊州편에도 아래와 같은 기록이 나온다.
"大灘江北六十里右二定祥水經:大灘津在大灘江通連川冬則設橋"
대탄강북육십리우이정상수경:대탄진재대탄강통연천동즉설교
위 두 문장을 해석하면 "말흘천은 김화 서북 이십칠리에 있는데 양주 대탄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대탄강은 양주 북쪽 육십리에 위치하는데 오른쪽으로 두개의 물줄기가 흘러든다. 대탄진(한여울나루터)은 대탄강에 있는데 연천가는 길목으로 겨울에는 다리를 가설해 왕래하였다." 라는 뜻이다.
이것으로 보아 한여울, 한여울나루, 한여울강, 즉 대탄大灘, 대탄진大灘津, 대탄강大灘江은 한탄강의 고유 지명이다.
[신동국여지승람], [대동여지도] 등 옛 기록이나 옛 지도를 통해 한탄강의 전 유로를 살펴보면 , 한탄강漢灘江이란 이름은 찾아볼 수 없고 구간별로 지역에 따라서 상류에서 하류까지 전천箭川(화살처럼 빠른 강), 말흘천末訖川(들의 끝에 있는 강), 체천(섬돌체.川-강의 절벽이 섬돌로 이루어진 강 즉 지금의 주상절리를 말함), 마흘천磨訖川(깍아지른 들에 있는강), 대탄강大灘江(큰 여울의 강) 등 전혀 다른 하천명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한탄강은 구간마다의 고유한 지명이 있었으나 언제부터인지 한탄강이 아른 단일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첫댓글 아, 그렇군요.
상기 글은 저작권이 있는 글입니다. 따라서 퍼가기를 허용치 않은 것이오니 양해 바랍니다.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여러가지 설이 많군요..잘 배웠습니다.
저도 한탄이라는 뜻이 한이맺힌 탄식을 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오늘에야 잘못된 뜻을 잘 알수 있엇네요.
꼭 한번 가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