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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자료실 스크랩 한국 야구의 역사-펌
이동규(26) 추천 0 조회 23 11.10.06 19:1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야구대백과]                         

야구 역사                        

한국 야구의 역사              

                           한국에 파송된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는 YMCA 청년회 회원들에게

                                                    서양식 공놀이인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약 100여 년 뒤 우리나라는 베이징 올림픽에서 아시아 최초의 야구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01년 YMCA 개척 간사로 한국에 파송된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는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

(YMCA)를 설립했고 1905년에는 청년회 회원들에게 서양식 공놀이인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대한체육사에 기록되어 있는 한국 야구의 효시다. 한국에 야구가 보급된 것은 1905년 이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1873년에 야구를 도입한 일본이 조선 침략을 본격화하며 전국에 일본인 야구팀을 만들어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의 야구일 뿐 한국 야구는 아니다.

그래서 한국 야구의 도입을 1905년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 야구 역사의 시작


일제 강점기 한국 야구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전반적인 수준은 일본에 뒤졌지만 주력 선수의 능력은

일본 야구 선수에 뒤지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이들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본 최초의

직업야구팀으로 세미 프로 격인 지바우라협회가 창단한 것은 1920년이다. 지바우라협회는 1924년 2월

다카라즈카로 옮겼고 1925년 2차 대륙 원정 때는 손효준, 백효득, 김정식, 정인규, 한기준, 함용화 등이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또한 1924년 메이저리그 올스타와 경기를 펼친 대일본동경구락부에는 이영민이

참가했다. 1938년 10월에는 박현명이 오사카 타이거스(현 한신)와 계약을 맺으며 최초의 한국인 프로야구

선수가 됐다. 이후 일본 프로야구 최초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이팔룡과 유완식, 김영조, 이규백 등이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한국에 야구가 도입된 지 100년이 훌쩍 지났다. 1920년에 열린 전조선야구대회가 전국체육대회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한국 스포츠에서 차지하는 야구의 위상을 쉽게 알 수 있다. 광복 후 수많은 야구인의 노력으로 한국

야구는 발전을 거듭해 미국, 일본과 세계 정상을 다투게 됐다. 이 글에서는 한국 야구의 발자취를 살펴보려고

한다. 무엇하나 소중하지 않은 역사가 없지만 아마추어 야구와 세계대회 등에서 이정표가 될 몇몇을 추렸다.

 

 

광복 후 한국야구의 에이스 김양중(좌측)과 명포수 김영조. 1958년 메이저리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친선경기에서 애초 참패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0:3으로 선전한 것은 두 이가 있었기 때문. 1회 초 무사 2, 3루에서 구원 등판한 김양중은 9이닝을 2실점으로 틀어막는 호투를 펼쳤고 김영조는 빼어난 리드로 뒷받침했다. 특히 대타자 스탠 뮤지얼을 삼진으로 돌려세운 것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한다.
<사진: 김양중 제공>

 

 

질레트에서 일본 진출까지

1905년 -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가 YMCA 회원인 현동순, 허성, 김연호 등으로 팀을 만들어서 야구를 하기

시작한 것이 한국 야구의 효시다. 이것이 덕어학교, 영어학교 등 외국어학교로 번져 나가며 이 땅에 야구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906년 3월 15일에는 훈련원에서 최초의 야구 경기가 벌어졌다. 덕어학교가

YMCA에 3점 차 승리를 거뒀다.

 

1946년 -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을 맞이한 야구인들은 이듬해 3월 18일 조선야구협회를 결성하며

야구 재건에 나섰다. 5월 17일부터 19일까지 서울운동장에서는 광복 후 첫 야구대회인 4도시대항

야구대회가 열렸다.

 

9월 11일부터 18일까지 서울운동장에서 전국 24개교가 참가한 전국중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청룡기)가

개최됐다. 이 대회는 한국전쟁으로 6, 7회(1951, 1952년)가 중단되었지만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부산상업(현 개성고)이 처음으로 청룡기를 품에 안았고 에이스 김상대는 대전공업과 치른 2회전에서 대회

최초이자 이 대회의 유일한 홈런을 기록했다. 또한 광주서중(현 광주일고) 김성중은 인천상업을 맞아

볼넷 4개, 몸맞은공 1개만을 내주며 광복 후 첫 노히트노런의 대기록을 세웠다.

 

1947년 -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서울운동장에서 예선을 거친 8개교가 참가한 가운데 전국지구대표

중등야구쟁패전(황금사자기)이 열렸다. 동아일보가 주최한 이 대회 첫 패권은 경기중학(현 경기고)을

9-3으로 꺾은 경남중학(현 경남고)이 차지했다.

 

1954년 - 5월 17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한국, 일본, 대만, 필리핀이 회원국으로 참가한 아시아 야구연맹이

결성됐다. 아시아야구연맹은 아시아 지역에 야구 기술을 보급하기 위해 12월 18일부터 23일까지

마닐라에서 제1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광복 후 첫 국제대회에 나선 한국은

일본과 필리핀에 잇달아 졌지만 대만을 4-2로 꺾고 3위에 올랐다.

 

 

재일교포 학생야구단은 1972년부터 1997년까지 매년 봉황대기에 참가해서 우승 없이 준우승만 3번 했다. 급조된 팀이라서 가진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 면도 있겠지만 상당수 야구인은 판정의 희생양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재일교포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매년 여름에는 한국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재우 전 감독은 “모국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사진: 스포츠춘추>

 

 

1956년 - 한국일보와 대한야구협회가 공동으로 재일동포학생야구단 모국방문경기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1968년 제11회 대회까지 이어졌으며 1972년부터는 한국일보가 주최한 봉황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참가하는 것으로 계속됐다. 그러나 1997년을 끝으로 출전 경비 등의 문제로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의 모국 방문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대회를 통해 재일동포 2, 3세들이 조국을

이해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계기가 됐다.

 

1957년 - 동산고가 동향의 라이벌 인천고를 3-1로 꺾고 유일하게 청룡기대회 3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3연속 우승의 중심에는 괴물 투수 신인식이 있었다. 1학년이던 1955년 제10회 결승에서 대회 3연속 우승을

노리던 인천고를 맞아 연장 12회까지 1실점으로 완투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2학년이던 제11회 대회에서는

한술 더 떴다. 중앙고와 벌인 결승전에서 1회 초 유격수 실책으로 1번 타자를 출루시킨 것을 제외하고

단 한 명의 타자도 누상에 내보내지 않았다. 11탈삼진을 곁들이며 결승전 사상 최초의 노히트노런을

달성한 것이다. 1992년 청룡기대회 결승에서 공주고 노장진이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를 상대로

두 번째 결승전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다.

 

 

동산고는 괴물 투수 신인식을 앞세워 청룡기 대회 3연패를 이룩했다. 청룡기를 모교 교장실에 영구보존하는 유일한 학교다. <사진: 황승식>

 

 

1958년 - 한국 야구 불후의 명선수이며 광복 후에는 야구 행정에 힘쓴 고 이영민을 기념하는

이영민 타격상이 제정됐다. 고교 선수 가운데 우수한 타격 성적을 거둔 이를 선정해 이 상을 준다.

제1회 수상자로는 경남고 3루수 김동주가 선정됐으며 백인천(1959년), 이광환(1965년), 정현발(1971년),

김일권(1973년), 이만수(1976년), 김건우(1980년), 강혁(1991년), 김현수(2005년) 등 한국 야구를 빛낸

수많은 스타가 이 상을 받았다. 경남고 신민기는 1997년과 1998년 최초이자 유일하게 2년 연속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1962년 - 1월 농협의 백인천이 일본 프로야구 도에이와 계약하며 대타자 장훈과 한솥밥을 먹게 됐다.

광복 후 첫 프로야구 선수가 된 백인천은 1975년 수위타자에 오르는 등 타율 2할7푼8리, 209홈런, 212도루,

776타점 등의 통산 성적을 남겼다. 국내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에는 MBC 청룡 감독 겸 선수로 활약하며

2010년 현재 유일한 시즌 4할 타율(.412)을 기록했다. 1990년에는 감독으로 LG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1963년 - 9월 21일부터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마침내 일본에

처음으로 승리를 거두며 첫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25일 1차 리그에서 재일동포 신용균의 호투와

포수 서정리의 공수에 걸친 활약으로 일본을 5-2로 꺾었다. 대회 우승이 걸린 29일 2차 리그 일본 전에서도

신용균의 쾌투와 김응룡의 2점 홈런에 힘입어 3-0으로 완승했다. 신용균 KIA 3군 코치는 “1차 리그 때는

커브와 싱커를 주로 던졌다. 2차 리그에서는 빠른 공을 중심으로 던지며 싱커를 섞은 게 주효했다.

일본 타자들이 조급하게 덤벼  완봉승을 거둘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1966년 - 6월 중앙고의 강속구 투수인 이원국이 도쿄 오리온즈에 입단해 백인천에 이어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제2호 선수가 됐다. 하지만 외국인 선수 제한 등으로 백인천과 달리 1군 무대에서 활약하지는 못했다.

이후 야구 연수를 간 미국에 정착한 그는 마이너리그와 독립리그를 거쳐 1972년부터 멕시칸리그에서 통산

149승(한국야구사에는 150승)을 거두는 등 미국 프로야구와 멕시칸리그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인 선수가 됐다.

 

 

한국야구, 세계 정상을 향해 비상하다

1975년 - 8월 14일부터 31일까지 캐나다에서 열린 제2회 대륙간컵쟁탈 세계야구대회에 출전하며 처음으로

세계무대의 문을 두드렸다. 콜롬비아, 이탈리아, 니카라과에 승리했지만 캐나다, 푸에르토리코, 일본,

미국에 져 3승 4패로 A조 3위에 머물며 예선 탈락했다.

 

1976년 - 12월 콜롬비아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했지만 5승 5패로 공동 5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9일 일본과 경기에서는 6-4로 승리하며 국외에서 열린 대회에서 처음으로 일본을 꺾었다. 김호중에

이어 구원 등판해 빼어난 투구 내용을 보인 유남호 KBO 운영위원은 “나는 그저 멍했는데 당시 김계현 대표팀

감독님이 ‘자신이 대표팀 감독을 하면서 일본을 한번 시원하게 이겨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그것을

오늘 풀었다’면서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회고했다.

 

1977년 - 마침내 한국 야구가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 11월 11일부터 26일까지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월드컵대회에서 미국과 일본 등을 꺾고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앞선 2번의 경기에서 미국에 연패했던

한국은 우승 결정전에서 김봉연의 홈런과 이해창의 결승타 등에

김시진-최동원-유남호가 이어 던지며 5대4로 승리했다.

 

1980년 - 1월 28일 연세대 박철순이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루어스와 계약금 1만 달러에 입단 계약을 맺었다.

1981년까지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한 그는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OB(현 두산)에 입단해 22연승을 포함해

24승을 올리며 팀을 원년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후 연이은 부상에도 오뚝이처럼 재기하며 1996년까지

통산 76승을 기록했다.

 

1981년 - 7월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열린 제1회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김건우,

조계현, 이효봉, 김동기, 강기웅, 조양근 등 고교 선수에 나이 제한(18세 이하)에 걸리지 않은

선동열(당시 고려대)과 구천서(당시 상업은행)가 포함된 청소년대표팀은 3전 2승제로 열린 미국과

결승전에서 3-1, 3-2로 연승하며 정상에 올랐다.

 

1982년 - “쳤습니다. 좌측. 홈런이냐! 홈런이냐! 홈런입니다. 홈런. 홈런. 홈런. 스리런 홈런.” 김용 MBC

아나운서의 터질 듯한 목소리와 함께 잠실구장은 흥분의 도가니가 됐다. 9월 서울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 전에서 2-2 동점을 깨는 한대화의 3점 홈런이 나온 것이다. 프로야구가

출범하며 우수 선수들이 이탈해 전력 열세가 예상됐지만 선동열, 임호균 등의 마운드와 탄탄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한 지키는 야구가 빛을 발하며 우승 목표를 달성했다.

 

 

어우홍 감독을 비롯한 한국 대표팀은 죽을 각오로 일본과 결승전에 나섰다. 최하위에 머물더라도 일본만 이기면 모든 것이 용서되던 시대였기에 일본 전의 압박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사진: 어우홍 제공>

 

 

“솔직히 0-2로 뒤지던 7회까지는 이기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 사건 등으로 시끄러울

때였다. 압박감이 아주 컸다. 지면 운동장에 앉아서 (관중이)던지는 소주병에 맞아 죽자고 (선수들에게)

말했을 정도였다. 패전의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나! 머리로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도 마음으로는 어떻게든

이기려고 했고, 그게 하늘에 닿은 모양이다.” 어우홍 당시 감독의 설명이다.

 

1994년 - 1월 12일 한양대 박찬호가 계약금 120만 달러에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와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메이저리그에 신인드래프트가 도입된 이래 17번째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했지만 17일 만인 4월 21일 경험

부족 등으로 마이너리그로 내려갔다. 1995년 9월 메이저리그에 복귀해 지난해까지 동양인 최다인 통산

124승을 기록했다. 박찬호 이후 많은 선수가 메이저리그의 문을 두드렸지만 봉중근, 서재응, 김병현, 최희섭,

조진호, 류제국, 추신수에 한·일 프로야구를 거친 구대성과 이상훈 등만이 메이저리그 무대에 섰다.

 

1998년 - 박찬호, 서재응, 임창용, 김동주, 이병규, 박재홍 등 국내외 프로야구 스타와 김병현, 홍성흔,

신명철, 강혁 등 아마추어 선수들로 꾸린 대표팀이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

첫 우승이었다. 사회인 야구 중심으로 선수를 선발한 일본과 결승전에서는 장단 14안타에 박찬호의 호투를

앞세워 13-1 7회 콜드게임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9년 - 1월 대한야구협회는 아마추어 야구 최고 지도자에게 주는 김일배 지도자상을 제정했다.

한국야구사에서 명장으로 이름 높은 김일배는 1947년 조선운수 감독을 시작으로 육군, 경동고, 연세대,

교통부, 해운공사, 제일은행, 장충고 등에서 수많은 우승을 일구어 내며 한국 야구를 빛낸 스타들을

길러 냈다. 야구인의 업적을 기념해 제정된 국내 야구상은 이영민 타격상과 김일배 지도자상 뿐이다.

 

2000년 - 프로 선수에게 문호를 개방한 9월 시드니 올림픽에서 한국은 경희대 정대현을 제외한 전원을

프로야구 선수로 대표팀을 구성했다. 예선에서 호주, 쿠바, 미국에 패하며 4승 3패로 일본과 공동 3위로

준결승에 진출했다. 미국과 치른 준결승전에서 더그 민케이비치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아 2-3으로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일본과 벌인 3위 결정전에서 8회 말 이승엽의 2타점 2루타 등으로 3-1로 이겨

동메달을 획득했다.

 

2007년 - 12월 18일 한국 야구의 성지인 동대문야구장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대문야구장은 1925년

개장했으며 1966년 9월 국내 최초로 조명탑이 설치됐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 개막전도 함께하는 등

동대문야구장은 한국 야구 역사 그 자체였다. 첫 홈런은 1928년 6월 8일 이영민이 기록했다.

 

 

2007년 11월 13일 동대문야구장에서 마지막 공식경기가 끝나고 나서 둘러보던 김양중 백구회 명예회장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이에게 동대문야구장은 삶의 터전이었고 인생의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사진: 구경백 제공>

 

 

2008년 - 한국은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우승 이후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지역 예선 탈락에 이어

2006년 도하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대만과 일본에 져 동메달에 머무는 수모를 겪었다. 명예 회복에 나선

한국은 대표팀 전원을 프로 선수로 구성해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했다. 김경문 감독의 용병술이 적중하며

한국은 9전 전승을 기록하며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야구 종목의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전승 우승은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와 1996년 애틀랜타 대회의 쿠바에 이어 3번째로 올림픽에

프로 선수가 참가한 후로는 처음이다.

 

김경문 감독의 용병술이 적중하며 한국은 9전 전승을 기록하며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야구 종목의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전승 우승은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와 1996년 애틀랜타 대회의 쿠바에 이어 3번째로 올림픽에 프로 선수가 참가한 후로는 처음이다.

 

 

 

손윤
야구전문블로그 <야구라>의 일원. 네이트 등에 야구 글을 기고하고 있다.


발행일 
2011.03.31

이미지 gettyimages/멀티비츠


감수 신명철 (前 스포츠 2.0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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