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카니니는 전형적인 이탈리아의 열혈남아였다. 사람들은 그가 80의 나이에도 계단을 두 칸씩 밟고 올라가지 않으면 안되는 성미였다. 잠도 서너 시간 밖에는 자지 않았고 한 번도 큰 병에 걸린 적이 없었다. 그래도 정 아플 때에는 혼자 몰래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토스카니니는 죽을 때까지 무엇인가에 몰입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80세의 토스카니니는 이렇게 썼다. “나는 분명 노인이다. 그런데 어째서 신께서는 17세 소년의 피로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일생동안 토스카니니가 다룬 레퍼토리는 53명 이상의 작곡가가 남긴 117곡 이상의 오페라와 175명 이상의 작곡가가 남긴 480곡 이상의 관현악곡으로 집계된다. 1954년 4월 4일, 87세의 생일을 막 넘긴 날 그의 마지막 공연이 열렸다.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지휘하던 그가 지휘대 위에서 처음으로 지휘봉이 멈췄다. 갑작스런 의식 장애였다. 제자인 지휘자 귀도 칸텔리는 브람스의 음악을 틀라고 긴급 지시를 내렸다. 30초 후에 기력을 찾아서 다시 곡을 이어갔지만 그는 두 번 다시 청중 앞에 서지 않았다.
1954년 6월, 토스카니니는 베르디 오페라 두 편의 발매를 위한 최후의 마무리 레코딩 작업에 돌입했다. 그가 87세로 은퇴하자 NBC 심포니는 일단 해산했다가 ‘심포니 오브 디 에어(Symphony of the Air)’로 재결성돼 공연과 음반 녹음을 하다가 1963년 완전히 해체했다. 후대 지휘자에게 남긴 토스카니니의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특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초창기에 토스카니니와 유사한 제스처로 ‘토스카라얀’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대표음반
토스카니니가 남긴 방대한 녹음 가운데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이 베토벤 교향곡 전집이고, 브람스 교향곡 전집 역시 귀중한 자료이다. 오페라는 베르디와 바그너가 장기였다. 전곡으로 남아있는 베르디 [오텔로]와 [팔스타프]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도 엄숙하면서도 아름다운 인간의 드라마를 그리고 있다. 그의 유산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레스피기의 교향시 [로마 3부작](로마의 소나무, 로마의 분수 로마의 축제)이다. 이탈리아인의 피가 끓어 넘치는 최고의 연주로 색채감과 조형미를 한껏 느낄 수 있는 동곡 최고 명연의 자리에서 여전히 내려오지 않고 있다. 협주곡 중에서는 사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의 역사적인 연주실황이 필수반이다. 1943년 4월 25일 카네기홀 실황인데, 77세의 토스카니니와 호로비츠의 불꽃 튀는 협연은 전설의 반열에 올려도 좋을 정도다(이상 모두 NBC 심포니). 이 외에도 로시니, 베르디 등 각종 서곡집과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 슈베르트 [교향곡 9번]도 추천하고 싶다. 토스카니니의 음반들의 음질은 동시대 다른 연주와 비교해도 건조한 편이다(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리마스터링 이전의 토스카니니 컬렉션 음반을 더 좋아해 자주 듣는다). 그러나 그 꼿꼿하고 팽팽한 열기와 군기에 비견되는 단원들의 긴장감은 50년이 지났어도 여전하게 다가온다.
약력 1886 베르디 [아이다] 지휘하며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데뷔
1896 푸치니 [라 보엠] 초연 지휘
1898 라 스칼라 오페라 음악감독 (~1908)
1908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지휘(~1915) 1921 라 스칼라 오페라 음악감독 (~1929) 1926 뉴욕 필 상임지휘자 취임(~1930) 1930 바이로이트 음악제 지휘 (~1931) 1931 잘츠부르크 음악제 지휘(~1937) 1937 NBC 교향악단 상임지휘자(~19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