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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논쟁문화의 장의 원고 ㅡ
비평의 윤리학
반 경 환
1,
우리 인간들은 누구나 다같이 정치적 동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치인이 따로 있고, 비정치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란 국가를 경영하는 분야이며, 정당의 구성원들은 그 국가를 경영하는 책임을 맡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사상과 이념에 따라서 진보정당과 보수정당, 녹색정당과 노동자정당 등을 만들고, 그들이 국가를 경영할 수 있는 사상과 이념을 쫓아서 국가의 목표를 설정하게 된다. 분배의 정의에 기초를 두면 사회주의 정당이 탄생하고, 부의 창출, 즉, 자본의 증식에 기초를 두면 자본주의 정당이 탄생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사상과 이념 아래 한 국가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추구할 수 있는 다종다양한 정책들을 쏟아내게 된다. 녹색성장에 관한 정책, 교육개혁에 관한 정책, 사법부와 입법부와 행정부 등과도 같은 정부 조직에 관한 정책, 영화, 연극, 문학, 예술에 대한 정책, 수많은 중소기업과 대기업에 관한 정책, 군사조직에 관한 정책, 국토건설과 해양수산업에 관한 정책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다종다양한 정책들은 수많은 이익집단들의 대립과 갈등을 수반하게 되며, 심지어는 대규모적인 실력행사와 국론분열의 양상마저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따라서 한 국가를 대표하는 정치의 지도자, 즉, 대령통(수상)은 어느 정도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그 분쟁들을 조정하며, 그 국가의 운명을 이끌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손은 늘, 항상, 양날의 칼을 움켜잡고 있다. 하나의 칼날은 국가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지도자로서의 미래 개척의 상징이 되고, 다른 하나의 칼날은 가치(재화)의 배분에 따른 수많은 분쟁들을 해결해내야 할 공권력의 상징으로서의 칼날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진정한 영웅이 되느냐/ 아니냐?’의 갈림길에 서서 그의 친위대장들인 수많은 정치인들과 수많은 장교들과도 같은 공무원들과 그리고 또한, 수많은 병사들과도 같은 국민들을 이끌고 나가게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서 대통령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모든 국민들도 누구가 다같이 국가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정치인들이기도 한 것이다. 정치는 보통 더러운 말로 간주되고, 정치인들은 통상 사기꾼, 권력의 노예, 정신병자, 조직폭력배, 모리배, 거짓말쟁이, 이중인격자와도 같은 말로 수식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정치의 역사가 온갖 중상모략과 사생결단식의 암투와 혁명과 내란, 심지어는 온갖 부정부패와 피 비린내 나는 전쟁 등으로 얼룩져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나, 우리 정치인들도 다같은 국민들이고, 그들이 이중인격자이고 부정부패의 인사들이라면, 우리 국민들 역시도 그들과도 똑같은 부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 역시도 이중인격자들이며 부정부패의 장본인들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자기 자신을 비정치인----, 즉, ‘착하고 선량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던져버리고, 하루바삐 자기 자신이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의 가면을 벗어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나의 이익을 버리고 사심없이 행동을 하고 있으며, 이웃 사촌이 출세를 하면 진정으로 내 일처럼 기뻐해주었는가? 진정으로 정의를 위해서 타인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의 미래를 위하여 언제, 어느 때나 순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진정으로 민족의 영웅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고, 내 아들, 내 딸이 아니더라도 진정한 민족의 영웅을 육성해내기 위하여 두 발 벗고 그를 가르치고 도와주고 후원해줄 수 있는 용의가 있었던가? 이러한 화두들과 싸운다면 그는 훌륭한 국가의 훌륭한 정치인이 되는 것이며, 그의 삶의 터전인 국가가 더욱 더 훌륭한 정치지도자들을 배출해내게 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진다. 하지만, 그러나, 아랫물이 맑으면 어떠한 윗물도 맑아지지 않을 수가 없다. 거울과도 같은 깨끗한 호수를 몇몇의 상류지역의 사람들이 오폐수와 독극물들로 오염시켜 놓았다면 그 호숫가의 주민들이 그 상류사회의 불량한 정치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아름다운 청정지역에서 모든 주민들이 모두가 다같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데, 몇몇의 사기꾼들이 그 바다를 오염시켰다면 그것을 간과할 수 있는 주민들은 없을 것이다. 국민들은 호수이고, 바다이며, 정치지도자들은 우리 국민들의 상수원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상수원을 보호하고 감시할 책임은 우리 국민들에게 있다. 우리 국민들 모두가 정치인이 되고, 그 정치문화를 그 어떠한 선진국보다도 더 맑고 깨끗하게 이끌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정치지도자들의 부정부패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기는 하지만, 우리 정치인들, 즉, 우리 국민들의 책임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정치학이란 권력을 비판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정치학자는 언제, 어느 때나 국민의 편이라는 말이 맞는다면, 우리 시인들과 우리 비평가들 역시도 언제, 어느 때나 국민의 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시인들과 모든 비평가들, 그리고, 우리 학자들의 제일의 임무는 권력에 대한 비판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모든 권력자는 언제, 어느 때나 부정부패라는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 부정부패는 상수원의 오염이기도 하며, 한 국가의 삶의 터전의 오염이기도 한 것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진다. 하지만, 그러나, 우리 국민들이 살아 있는 한, 반드시 아랫물이 맑아져야만 윗물이 맑아진다. 아랫물이 맑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대한민국이 부정부패의 천국이 되어버린 것이고, 따라서 그 어떠한 고급문화도 연출해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내가 생각해 보건대, 인류의 역사상, 돈과 명예와 권력을 다 가진 자들이 자기들 스스로 독야청정해지고 그들의 살고 있는 국가를 고귀하고 위대하게 이끌어 나간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사적인 것은 좋은 것이고, 공적인 것은 나쁜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초기의 부르조아지들이 국가를 ‘필요악’이라고 생각하고, 국가의 역할을 ‘경찰’의 역할로 축소시켜버린 데서 비롯된 말인 것이다. 자본가들은 그 무엇보다도 국가의 간섭을 싫어하고, 그 무엇보다도 탈규제와 자유화와 민영화를 선호하게 된다. 오늘날의 WTO 체제와 셰계화를 연출해낸 것도 바로 이 자본가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자본가들은 그들의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그 어떠한 전쟁마저도 불사를 하게 되는 데, 왜냐하면 오직 자기 자신들의 이익만이 최고의 선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유와 사유재산은 어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성역이며, 이러한 생각은 영국의 철학자인 존 로크에게서도 증명이 된다. 존 로크는 ‘법이 없는 곳에는 자유도 없다’라고 한 국가의 중요성과 그 법치질서를 강조한 바가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국가의 역할을 자연권----신이 준 개인적 권리, 예컨대, 생명, 자유, 재산 등----을 보호하는 데에만 한정해야 하다고 역설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투표할 수 있는 권리는 자연권, 특히 사유재산을 소유한 부자들에게만 있다고 역설하기도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조세제도 등을 통해서 사유재산권을 침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반대급부로써 정치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선거권의 독점이 필요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늘날 존 로크의 생각대로 부자들에게 선거권의 독점이 주어지지 않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 반대방향에서, 오늘날의 자본가들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이 거의 그대로 관철된 바도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 즉, 우리 자본가들도 존 로크의 생각과도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어떠한 반대정책도 물리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고, 오직 그들은 대한민국의 사유재산제도만을 신성시하며, 그 어떠한 애국심도 싫어하고 있는 것처럼만 보인다. 이제 열흘을 굶어서 도둑질을 하는 사람도 거의 없고, 자기 자신이 부단히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면적으로 노동해방의 투사가 될 수 있는 노동자도 거의 없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한 철학자의 말대로, 우리 자본주의 사회가 얼마나 철두철미하게 그들의 도덕철학으로 우리 인간들을 순치시켰는가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탈세, 외화도피, 원정출산, 이중국적취득, 해외유학, 부정부패의 확산, 기초생활질서의 파괴, 정경유착, 금산분리완화, 출자총액제도 폐지, 상속세와 양도세와 종합소득세의 전면적, 혹은, 부분적인 폐지, 온갖 탈법 사유재산의 사회적 환원의 전면적인 거부, 날이면 날마다 재벌들의 앵무새가 되어가고 있는 조중동과 모든 방송사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녹색운동은 생태환경을 복원시키고 우리 인간들의 삶의 터전인 이 지구를 살리자는 환경운동일 것이다. 20세기 초에는 세계 인구가 20억 명에 불과했지만, 이 21세기 초에는 세계 인구가 65억 명이라고 한다. 이 생태환경의 최고의 파괴자는 어느 누구이란 말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사유하는 인간,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 즉, 우리 인간들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만일, 오늘날 멸종위기에 처한 호랑이와 곰들이 총을 갖게 된다면, 그들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인간들에게 제일 먼저 총을 쏘아댐으로써 개체수를 조절하고자 할 것이다. 모든 자연과학자와 의사와 자본가들과 우리 인간들은 다만, 저승사자와도 같은 생태환경의 파괴자일 뿐인데,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두가 다같이 자연을 정복하고 우리 인간들의 수명만을 늘릴 궁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단, 한 사람의 철학예술가로서 좀 더 과감하게 말한다면, 오늘날 핵무기를 사용하여 20억 명쯤의 인간을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살인마가 최고의 녹생운동의 대가이자 휴머니스트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단 하나 뿐인 지구, 단 하나 뿐인 우주를 살리기 위해서는 이산화탄소의 배출구이자, 모든 천연자원의 블랙홀인 우리 인간들의 개체수를 조정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4,
나는 너무나도 공부가 하고 싶어서 나의 출신성분---초등학교졸업이라는 출신성분----을 망각한 채 문학공부를 했고, 그 지긋지긋했던 가난과 씨름을 하며 7여년 만에 문학비평가로 간신히 등단을 할 수가 있었다. 이 고통의 지옥훈련과정은 내 인생 전체와 내 생명 전체를 건 피 비린내 나는 전쟁과도 같았으며, 어쨌든 나는 이 사생결단의 싸움에서 승리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내가 그토록 존경하고 흠모해마지 않았던 우리 학자들(우리 선생님들)이 모두가 한결같이 표절의 대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그 쓰디 쓴 좌절감과 실망감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을 정도였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김현의 ‘감싸기 이론’이나 ‘이론적 실천과 실천적 이론’, ‘공감의 비평’, ‘문학의 쓸모없음’, ‘문학은 꿈이다’라는 용어와 그 이론들이 바로 그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불세출의 대형비평가(?)인 김현의 개념과 그 이론들은 바슐라르와 골드만,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 사르트르 등에 대한 도용盜用과 표절에 불과했던 것이고, 그야말로 그것은 서울대학교 교수였던 그의 얼치기 앎의 소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이 좌절감과 실망감 속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독창적인 철학예술가(사상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고, 그 결과, 이 짝퉁학자들을 하루바삐 영구추방해버리는 것을 나의 목표로 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표절이란 타인의 사상과 이론을 훔쳐가는 너무나도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범죄행위이며, 이 표절 행위가 만연을 하게 되면, 모든 독창적인 사상가들이 그 종적을 감춰버리게 된다. 표절이란 지식인 사회의 암적인 종양이며, 문화선진국에서는 영구추방의 죄로 단죄를 하게 된다. 문화선진국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입시지옥을 연출해내며, 우리 대한민국의 학생들을 모두가 한결같이 지적 사기꾼으로 몰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교육제도와 우리 학자들의 행태를 다시 한 번 살펴보기를 바란다. 특수목적고등학교와 외국어고등학교의 출신들,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의 출신들, 즉, 우리 대한민국의 제일급의 천재들이 문화선진국으로 유학을 가서, 어떠한 논문 하나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제3세계에 대한 ‘배려케이스’로 따오는 그 알량한 박사학위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왜, 그들은 그들이 유학을 갔던 하버드대학교의 교수법과 문화선진국의 교육제도에 대해서는 모두가 한결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며, 왜, 또한, 그들은 그들의 그토록 자랑스러운 박사학위논문의 출간을 기피하고, 그 박사학위의 논문을 쓰기까지의 그 어렵고 힘들었던 과정에 대해서는 모두가 한결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박사학위가 제3세계의 배려케이스에 의한 쓰레기더미에 불과하며, 문화선진국에서는 그 박사학위가 아닌, 대학교수자격논문의 취득자만이 대학교수가 된다는 사실들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하버드대학교의 교수법과 문화선진국의 교육제도를 말한다는 것은 자승자박의 함정에 빠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곧바로 그들이 대학교수로는 부적격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미래의 백만 두뇌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제도에 대해서는 눈 뜬 봉사에 지나지 않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 등도 대한민국의 입시제도(입시지옥)의 희생양들이며, 또한 우리 학자들과 우리 한국인들 역시도 모조리 대한민국의 입시제도(입시지옥)의 희생양들이다. 나의 김현, 유종호, 백낙청, 김윤식, 정과리, 김우창, 고은, 신경림, 정현종, 황동규, 이성복, 이문열, 황석영, 박노해, 김용택 등에 대한 비판은 이 범죄와의 전쟁의 차원에서 행해진 비판이며, 우리 한국인들을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 즉, ‘고급문화인’으로 인도해가기 위한 차원에서 행해진 비판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론이란 무엇이고, 사상이란 무엇인가? 칸트는 감성이 대상을 인식하고, 오성이 대상을 사유하고, 이성은 실천에 관여한다고 말한 바가 있지만, 그러나 나는 거의 사멸된 언어에 가까운 오성이라는 말에는 생리적인 거부감만을 느끼고 있을 뿐인 것이다. 감성은 대상을 인식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이성은 대상을 사유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돌과 나무와 고양이와 해일과 지진이라는 사물과 사건들은 이 감성이 인식하게 되고, 또한, 그것을 대리석과 소나무와 고양이와 쓰나미와 지진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의 이성이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모든 개념(이름)이란 그 대상에 대한 최초의 이해를 담고 있는 것이고, 이론이란 그 개념들의 바다에서 어떠한 진리(법칙)를 담고 있는 것을 말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는 ‘지구는 돈다’라는 이론이 담겨 있는 것이고,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에는
1, 모든 물체는 그 상태를 변화시키도록 작용하는 힘에 의해 강제되지 않는 한, 정지 혹은 등속 직선 운동의 상태를 계속한다.
2, 운동량의 변화는 힘의 작용에 비례하고, 이 힘이 작용하는 것과 같은 직선 방향으로 이루어 진다.
3, 작용은 항상 반작용과 같다. 즉, 두 물체의 작용은 항상 그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이다(손가락으로 돌을 누르면 돌의 방향으로부터 힘을 받아 손가락이 눌려진다). 바로 이곳에 ‘만유인력의 법칙’이 있다.
와도 같은 이론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들을 더욱 더 정교하게, 더욱 더 많이 생산해내고 그 이론들을 하나의 사상으로 정리하게 되면 그는 사상가가 되는 것이고, 그의 사상 속에는 우리 인간들의 지상낙원이 담겨 있게 되는 것이다. 유물론과 역사의 발전법칙, 부의 공정한 분배와 만인평등사상을 창출해냈던 마르크스가 그렇고, “나는 신성모독을 범한다, 고로 존재한다”와 “세계는 나의 범죄의 표상이다, 고로 행복하다”라는 명제를 통하여 우리 인간들의 ‘삶의 양식’과 ‘의지’와 그리고 ‘나의 행복한 삶의 세목들’과 ‘사색인의 십계명’으로 우리 인간들의 ‘행복론’을 연출해낸 반경환도 그렇다.
타인의 생각 1만톤보다는 자기 자신의 생각 1그램이 더 가치가 있다는 말도 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의 사상과 이론만이 그의 정신과 육체를 살찌우고, 그의 인생을 즐거움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할 수 있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세계적인 사상가들과 세계적인 예술가들은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일어선 사람들이고, 그들의 그토록 달콤하고 맛 있는 영양만점의 사상과 이론들은 모든 인류의 지적 재산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참다운 스승의 길은 진리(사상과 이론)를 생산해내고, 그 진리들을 우리 인간들에게 분양해주는 데 있는 것이며, 그 진리의 힘으로 새로운 진리들을 생산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인도해주는 데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진리, 플라톤의 진리,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 데카르트의 진리, 스피노자의 진리, 칸트의 진리, 헤겔의 진리, 마르크스의 진리, 쇼펜하우어의 진리, 니체의 진리, 호머의 진리, 셰익스피어의 진리, 괴테의 진리 등이 바로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고, 또한, 공자의 진리, 맹자의 진리, 노자의 진리, 장자의 진리, 부처의 진리, 예수의 진리 등이 바로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인간들은 바로 이 진리의 힘으로 이처럼 아름답고 풍요로운 삶을 향유하고 있는 것이며, 이제는 이 지구를 초월해서 머나 먼 우주로의 여행마저도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독창적인 명명의 힘과 독창적인 사상과 이론이 없는 우리 학자들은 영원히 두 발로 설 수 없는 정신적인 불구자와도 같다고 하지 않을 없다. 그들의 두뇌는 텅텅 비어 있고, 그들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설 수가 없기 때문에, 세계적인 대사상가와 대작가들이 인도해주는 대로 걸어가는 눈 뜬 봉사와도 같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헤겔, 마르크스, 쇼펜하우어, 니체 등이 없으면 혼자서 살아갈 수가 없는 우리 학자들, 또한, 호머, 셰익스피어, 괴테, 들뢰즈, 데리다, 미셸 푸코, 모차르트, 베토벤 등이 없으면 혼자서 살아갈 수가 없는 우리 학자들-----. 그들은 영원히 타인의 말과 타인의 사유에 의지해 살아가는 노예들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이 정신적인 불구자들이 문화권력을 틀어쥐게 된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마치, 그들이 세계적인 대사상가와 대작가들처럼 행세를 하게 된다.
표절이란 무엇이고, 인용이란 무엇인가? 표절이란 타인의 말과 사유들을 훔쳐가는 글도둑질이며, 지식인 사회에서는 영원히 근절시켜야만 하는 암적인 종양에 지나지 않는다. 인용이란 자기 자신의 생각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사유를 빌려다가 쓰는 채무와도 같지만, 그러나 이 인용은 반드시 필요한 ‘악’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용은 ‘필요악’이면서도, 반드시 유용한 어떤 것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타인들의 사유에 의지해서 살아가야만 하는 사회적인 동물들이기 때문이다. 이 인용 행위에도 그 인용자의 품격과 위치에 따라서 다음과도 같은 세 가지의 부류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첫 번째의 부류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와 니체와 칸트와도 같은 대사상가들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나도 즐겁고 기쁘게 인용하는 학자들이고, 두 번째의 부류는 지적 경쟁자라는 자존심의 상처를 입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인용하는----상대방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학자들이고, 나머지 세 번째는 자기 자신이 학자라는 양심의 가책도 없이 아무 글이나 마구 마구 빌려다가 쓰는 학자들이다. 나는 첫 번째 부류의 학자이고, 나는 가능하면 타인의 말을 한사코 인용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나의 글에는 최소한도의 인용문만이 있을 뿐이고, 나는 타인의 글을 인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리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다. 우리 학자들은 첫 번째의 부류와 두 번째의 부류가 거의 없는 데, 왜냐하면 그들의 글에는 타인의 사유만이 있을 뿐이지, 자기 자신의 생각이라고는 단 한 줄도 없기 때문이다. 본문보다도 인용문이 더 많은 석, 박사 학위의 논문들과 우리 학자들의 글을 살펴보면, 참으로 대한민국의 미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본문보다도 인용문이 더 많다는 것은 ‘나는 아무 것도 사유하지 않았소’라는 사상적인 불임의 동물들이 자기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어떤 젊은 비평가도 그가 속칭 일류대학교 출신이라는 출신성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얼치기 학자들의 촌티를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2000년 봄, 계간시전문지 {愛知}를 창간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우리 {애지}의 창간 이념을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애지란 지혜사랑이며, 나는 이 ‘지혜사랑’을 통하여 우리 한국인들을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 즉, ‘고급문화인’으로 인도해가고자 하는 고귀하고 위대한 꿈을 꾸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상이란, 이념이란 지혜사랑의 산물이며, 따라서 모든 사상가들은 분명한 목표를 갖고 출발을 하게 된다. 공산주의가 가리키는 곳도 지상낙원이고, 자본주의가 가리키는 곳도 지상낙원이다. 염세주의가 가리키는 곳도 이상적인 낙원----삶의 해방이라는 점에서----이고, 낙천주의가 가리키는 곳도 이상적인 낙원이다. 사상과 이념이란---- 그것이 공산주의이든지, 자본주의이든지, 염세주의이든지, 낙천주의이든지 간에----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운 지상낙원을 가리키게 되고, 우리 인간들은 그 목표를 향하여, 마치, 부처처럼, 예수처럼, 초인처럼, 그 어떠한 장애물들과 수많은 적대자들마저도 단숨에 물리칠 수 있는 용기로 무장을 하게 된다. 사상과 이념은 한 민족의 영혼이며, 고급문화는 이 사상과 이념의 꽃에 지나지 않는다. 사상이란 모든 지식인들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사상만이 우리 인간들을 미래의 지상낙원으로 인도해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상가란 무목표, 무의지, 무책임의 대명사인 우리 학자들과는 정반대방향에서, 너무나도 분명한 목표와 의지와 책임감으로 무장되어 있는 인간이며, 우리 인간들의 궁극적인 미래의 이상형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상가는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이며, 그의 앎과 행동의 일치는 모든 인간들의 찬양과 찬송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사상이란 최고의 목적이며, 그 모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고 이 세계의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사상만은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지식인들의 한결같은 꿈이다. 사상은 그 어떤 것보다도 고귀한 명예이며, 삶의 완성이며, 보다 완전한 인간의 표지이다. 우리는 그 사상가의 신전 앞에서 언제, 어느 때나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며, 찬양과 찬송을 하게 된다. 또한 우리는 그 신전 앞에서 우리 인간들의 존엄성을 바치고, 가장 좋은 예물을 바치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항상 자기 자신을 갈고 닦으면서, 그 사상의 위업을 이어 나갈 것을 맹세를 하게 된다.
----반경환, {행복의 깊이} 제1권 5장에서
우리 {愛知}의 창간 이념과 목표는 이렇다. 첫째, ‘한국교유개혁’을 통하여 우리 한국인들의 백만 두뇌를 양성하는 것이고, 둘째, ‘논쟁의 문화’를 통하여 우리 한국인들을 ‘사상가와 예술가의 민족’(고급문화인)으로 육성하는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중앙문화/ 지방문화의 이분법’을 반드시 극복하고, 우리 충청도를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의 중심지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 {애지}의 창간 이념과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도덕적, 윤리적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문화선진국의 수준을 넘어 서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기초생활질서’가 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두 번째, 만악의 근원인 부정부패의 장본인들을 한국 사회에서 영구추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 번째, 초, 중, 고등학교에서부터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을 가르치되, 어떠한 일이 있어도 논문의 조작과 표절의 당사자는 대학사회로부터 영구추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낙천주의 사상을 내 나름대로 가장 독특하고 새롭게 재창조해낸 낙천주의 사상의 창시자이다. 낙천주의란 아름답고 풍요로운 세계를 지시하고 있는 사상이며, 우리 인간들의 행복한 삶을 지시하고 있는 사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 {애지}는 대한민국의 역사상, 가장 분명한 사상과 이념의 토대 위에서 창간된 잡지이고, 창간호부터 통권 제38호까지, 우리 한국인들 중, 수많은 짝퉁 학자들과 수많은 짝퉁 작가들이 나의 비판의 칼날을 맞고 모조리 대한민국의 비평의 무대에서 사라져 가게 되었던 것이다. 김현도 표절을 했고, 유종호도 표절을 했다. 김윤식도 표절을 했고, 김우창도 표절을 했다. 이문열과 황석영도 표절을 했고, 신경숙과 장정일도 표절을 했다. 이인화도 표절을 했고, 구효서도 표절을 했다. 송자 전 연세대학교 총장도 표절을 했고, 이필상 전 고려대학교 총장도 표절을 했다. 정과리도 표절 앞에서는 말 못하는 명품학자이고, 최동호도 표절 앞에서는 말 못하는 명품학자이다. 조정래도 표절 앞에서는 말 못하는 명품작가이고, 김지하도 표절 앞에서는 말 못하는 명품작가이다. 이 명품학자와 짝퉁작가들이 손을 맞잡고 합창을 부르게 되면, 나의 낙천주의 사상은 그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우리 한국인들은 독창적인 명명의 힘----세계적인 대사상가와 대작가가 없는----이 없는 이민족의 노예들로 전락을 하게 된다.
당나라의 노예, 원나라의 노예, 명나라의 노예, 청나라의 노예, 대일본제국의 노예, 아메리카 합중국의 노예 등, 세자책봉과 왕위승계권의 권한마저도 없었던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로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고, 또한, 공자의 노예, 맹자의 노예, 노자의 노예, 장자의 노예, 기독교의 노예, 불교의 노예, 마르크스의 노예, 프로이트의 노예, 니체의 노예, 칸트의 노예, 아담 스미스의 노예, 들뢰즈의 노예, 셰익스피어의 노예, 괴테의 노예들이 바로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 노예들, 이 표절의 대가들, 이 짝퉁학자들의 특징은 학문에 대한 열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고, 오직, 자나깨나 특정 학교 출신이라는 패거리만을 짓게 되고, 그토록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입시지옥만을 연출해내고 있을 뿐이라는 점일 것이다. 독창적인 사상가와 이론가가 탄생하지 않는 것도 그들의 업적이고, '스승은 진리이고 진리는 신성하다'라는 ‘제자 살해의 법칙’ 위에 군림하면서, 제일급의 비평가, 즉, 아버지(스승) 살해자가 나오기는 커녕, 모두가 다 한결같이 찬양자들만이 나오고 있는 것도 그들의 업적이다. 외환위기가 닥쳐와도 전혀 걱정이 없고, 노벨상을 타지 못해도 전혀 부끄럽지가 않고, 교육시장을 개방하지 않아서 더욱 더 행복하다. 우리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우리 정치인들이 문화선진국의 교육제도와 천재생산의 교수법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도 행복한 일이고, 또한, 우리 학부모들과 우리 학생들이 세속적인 출세에 두 눈이 어두워져서, 오직, 달달달, 외우는 입시지옥의 희생양으로 자청하여 비명횡사해주고 있는 것도 무척이나 즐겁고 기쁜 일이다.
모든 사상과 이론을 정립할 수 있는 것은 학문이고, 이 모든 학문의 예비학이 비판인 것이다. 비판은 윤리의 채찍이며, 이 윤리의 토대 위에서만이 모든 학문이 꽃 피어난다. 당신의 그릇된 편견과 오류를 잡아줄 수 있는 것도 비판(정화기능)이고, 당신을 더욱 더 건강하게 강화시켜주는 것도 비판(강화기능)이고, 당신을 세계적인 대작가, 즉 인신人神의 경지로 성화시켜주는 것도 비판(성화기능)이다. 모든 학문은 하나의 행복론에 지나지 않으며, 이 행복론은 만인들을 위한 것이지, 어떠한 사적인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비판만이 위대하고, 또, 위대하다. 비판은 당신의 존재 증명이다.
대한민국의 신예비평가인 김석준은 누구를, 그 무엇을 비판할 수가 있는가? 명품학자는 짝퉁학자들을 형무소로 보내고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그들을 마치, 하나님보다도 더욱 더 너그럽게 용서하고, 그들과 함께, 대학제도라는 윤리학의 교실에서 놀아나지는 않는다. 모든 학교는 게임의 규칙----학문연구의 규칙, 삶의 규칙, 사회생활의 규칙----을 가르치는 윤리학 교실이며, 따라서, 그 규칙을 통해서 다양한 학문들, 예컨대, 정치, 경제, 역사, 철학, 문학, 과학 등의 그 진리 탐구 수준을 진척시켜 나가게 된다. 참다운 스승은 진리를 생산해내고 그 진리를 분양해주는 스승이지, 온갖 거짓과 사기를 분양해주는 가짜 스승이 아니다.
까마귀 노는 데 백로야 가지 마라!
서울대학교 총장님, 연세대학교 총장님, 고려대학교 총장님, 왜, 그대들의 학교에는 백로는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온통 까마귀들만이 득시글거리고 있는 것일까요? 이제부터는 제발 그대들의 대학교에다가 ‘표절추방운동본부’를 설치하고, 표절의 대가들은 가차없이 대학사회로부터 추방을 해버리는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5,
지난 20세기 초 신문학의 등장 이후, 1990년대 초까지 대한민국의 시인들은 미숙하면 미숙한 대로 그들의 역사 철학적인 지식을 토대로 하여 자기 자신의 반성과 성찰을 끝내고, 그 결과, 문명비판과 사회 역사에 대한 비판의 시들을 써왔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러나, 1990년대의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이 비판의식이 거의 대부분이 사라져가 버리고 말았는데, 거기에는 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첫 번째는 동서의 냉전이 종식되고 자본주의의 일방적인 승리와 함께,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실현된 점에도 있을 것이고, 두 번째는 영상매체의 등장 이후, 문자매체의 쇠퇴와 함께, 우리 대한민국 시인들이 전면적인 실존의 위기에 내몰린 점에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대한민국의 시인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순치되어서 이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할 능력을 상실했던 것인지도 모르고, 또한, 자기 자신이 실존의 위기 앞에서 그토록 어렵고 힘든 역사 철학적인 공부를 하기보다는 사적인 내면의 세계로 침잠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 결과, 도대체가 정체불명의 이상야릇한 언어들을 사용하는 일군의 젊은 시인들이 등장을 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 자기 성찰과 자기 초월에만 집착하는 일군의 서정시인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전자의 언어는 광기의 언어이고, 이 광기의 언어는 자기 자신과 타인들, 또, 그리고, 모든 인간들의 역사 전체를 부정하는 반문학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T. S 엘리어트의 말대로, 외국어로 사유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외국어로 그 언어의 숨결과 향기를 맡는 것은 가능하지가 않다. 시인은 모국어 속에서만이 시인일 수가 있으며, 따라서, 자기 자신의 모국어를 더욱 더 아름답고 훌륭하게 가꾸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언어 영역의 확대는 세계 영역의 확대이고, 세계 영역의 확대는 언어 영역의 확대이다. 희랍어와 라틴어의 제국주의, 오늘날의 중국어와 영어의 제국주의 등을 생각해본다면 나의 이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모국어는 그 주체자의 영혼이며, 육체이며, 생명, 그 자체인 것이다. 우리 한국어를 더욱 더 아름답고 훌륭하게 가꾸고 이 한국어의 우수성을 통해서 우리 대한민국의 고급문화를 전파해나가도 시원찮은 일이지만, 자칭, 우리 젊은 시인들이 그토록 우리 한국어를 천대하고, 짓밟아버리고, 더욱 더 무자비하게 살육까지도 자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의 운명이 참으로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다. 요즈음 젊은 시인들의 광기의 언어는 이상야릇한 외계어로 되어 있으며, 도대체가 그 어느 누구와도 소통이 불가능한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후자의 언어는 사적인 언어이고, 따라서, 모든 공동체 의식과 비판의식이 사라진 채, 그 어떠한 위기가 닥쳐오더라도 나 하나만은 살아 남겠다는 개인주의가 그 주조를 띠게 된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이고, 비록, 그들이 기독교와 불교, 노자와 장자, 또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으로 무장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이타성은 불면수심佛面獸心의 가면일 뿐, 그들의 사적인 이기주의를 아주 은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광기의 언어의 전면적인 부상은 건강한 비판의식의 소산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너 죽고 나 죽자’라는 식의 염세주의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 초월을 꿈꾸는 서정시인들의 언어도 건강한 비판의식의 소산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들 역시도 현대문명과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지난 20세기 말의 구소련의 붕괴와 동구권의 몰락은 자본주의의 최종적인 승리로 이어진 것도 같았지만, 그러나 이제는 미국발 금융재앙과 함께, 자본주의의 최종적인 패배가 두 눈 앞에 닥쳐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생명공학을 통한 줄기세포의 배양과 이종교배의 허용, 더 많이, 더 빨리, 더욱 더 과소비를 부추기고 끊임없이 생태환경을 파괴시키는 다종다양한 산업정책들, 세계화와 자유화와 민영화라는 허울좋은 이름으로 지구촌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투기자본들, 문화자본과 경제자본을 소유한 자들의 첨예한 대립과 적대감들, 더욱 더 심화되고 깊어만 가고 있는 빈부 격차와 수많은 질병들, 천연자원의 고갈과 핵무기의 확산과 수많은 기상이변의 재앙들----. 오오, 우리 시인들이여, 그대들은 이 자본의 거대한 문명 앞에서 그 어떠한 몰락의 징후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오오, 우리 시인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이 몰락의 징후를 느끼고 있다면 그대들의 이성은 재빨리 그 명료함을 되찾고,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비판의식으로 무장을 하게 될 것이다. 비평이란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이고, 우리 시인들은 모두가 다같이 자기 자신이 입법자가 되고, 최고급의 재판관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비판이 없는 사회는 더럽고 추한 사회이며, 어떠한 미래의 희망조차도 없는 사회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주의 사회는 그 어떠한 비판도 가능한 사회이며, 비평의 윤리학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러나, 지극히 불행하게도 우리 한국사회에는 그토록 어리석고 시대착오적인 수많은 마피아 집단들이 득시글거리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마피아 집단은 일당 독재와도 같은 범죄자 집단에 불과하며, 그들은 그들의 문화권력을 통해서 그 어떠한 반대의견도 허용하지를 않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다같이 천사의 얼굴과 악마의 얼굴을 지닌 야누스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대부분의 훌륭한 문화적 영웅들이란 이 천사의 얼굴로 그 악마의 얼굴들을 몰아낸 사람들이지만----자기 반성과 자기 성찰을 통해서 타자들의 이타성을 인정한 사람들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피아 집단들이란 무조건적인 문화권력만을 장악한 채, 그 어떠한 자기 반성도 하지 않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서울대 마피아, 고려대 마피아, 연세대 마피아, 조선일보 마피아, 중앙일보 마피아, 동아일보 마피아, 문지의 마피아, 창비의 마피아들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이 모든 마피아 집단들이 우리 학자들의 그토록 야만적인 표절행위를 은폐하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한국인들을 입시지옥의 희생양으로 몰아넣은 죄는 그 어떠한 사죄 행위로도 용서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권력은 타락하기 마련이고, 절대권력은 더욱 더 절대적으로 타락하기 마련이다.
비판만이 위대하고, 또, 위대하다. 비판은 당신의 존재증명이다.
우리 시인들은 서울대를, 연세대를, 고려대를, 조선일보를, 중앙일보를, 동아일보를, 문지를, 창비를, 또는 그대들의 스승과 동료들을 너무나도 의연하고 당당하게 비판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6,
멋진 새 이야기 한 토막 허겄는디 시방 내 심정이 외악 사내키로 금줄 친 장독 속 짠장거튼지라 두서없이 따댁이드라도 맘을 허뿍 열고 눈구녕 똑바로 뜨고 들으럈다
새가 나온다 새가 끼대나온다
두루미도 오리도 아닌 놈 나온다
눈은 껌헌 안경테 두른 벌건 유리알이요
주댕이는 밥숟가락이라.
따복따복 챙겨 묵기 힘든 세상
아예 놋숟구락 두 개를 우알로 처억 포개서
조댕이 끝에 떠억 매달았으니 희귀허고 말고.
이름허여 저어 묵는 새요 자칭,
별호는 東西合一에 字는 左右당간이라.
고개를 요리 홰딱 저리 홰딱
홰딱 홰딱 홰딱홰딱
갯꼬랑 한 줄기 겉물 속물을 다 헝클고
재앙시롭게 끼대나오는 꼴 가관이로다
온통 숭게투성이 저 조동아리 보아라
딱 조중동이로고.
못된 심보 좀 보아라
역대 간 큰 도독놈들이로고.
과연 천연기념물이로다
----양해열, [저어새타령]({현대시학}, 2009년 1월호) 부분
양해열 시인은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고, 2006년 계간시전문지 {애지}로 등단했다. 양해열 시인의 [저어새타령]은 그의 역사의식의 승리이며, 한국현대시의 승리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역사의식이란 그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뜻하고, 그 앎을 토대로 하여 우리 인간들의 미래의 희망을 길어내려는 어떤 것을 말한다. ‘저어새’란 무엇이고, ‘타령’이란 무엇인가? 저어새는 황새목 저어새과의 새이며, 바닷가의 얕은 곳이나 수많은 늪지와 갈대밭에서 살아가는 새를 말한다. 저어새의 이마와 눈가장자리 등은 검정색을 띠고 있으며, 그 겨울깃은 흰색이고, 매우 희귀하여 1968년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새이기도 하다. 타령이란 조선 시대에 탄생한 민속음악(판소리)이며,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가루지기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장끼타령] 등이 그 대표적인 예에 해당된다고 할 수가 있다.
저어새는 전라남도 순천만에 사는 저어새이며, 그 저어새는 이 땅의 민중들을 상징하는 새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어새의 “별호는 東西合一”이고, 또한, 그 저어새의 “字는 左右당간”이다. 그러니까 이 저어새는 영호남의 화합(동서화합)과 좌익과 우익의 화합(평화공존)을 꿈꾸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나, 이 저어새의 동서화합과 그 평화공존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역사는 “보수우익교향曲”에 의해서 국론과 민심이 분열되고, 그토록 엄청난 피 비린내의 역사를 기록하게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양해열 시인의 [저어새타령]에는 ‘여순사건’도 나오고, 제주도의 ‘4.3사건’도 나오고, ‘광주항쟁사건’(5.18 민주화운동 사건)도 나온다. 여순사건이란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의 좌익계열의 군인들----박정희 대통령도 여순반란사건의 가담자였지만, 나중에 그의 동료들을 모조리 밀고하고 자기 자신만이 살아 남았다고 한다. 그는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자기 변신술의 대가이자, 기회주의의 화신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이 제주도의 ‘4.3사건’의 진압출동을 거부하고 일으킨 반란사건을 말하고, 제주도의 ‘4.3사건’이란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지하조직을 구축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반대와 반미주의를 내세우며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일으켰던 무장봉기사건을 말하며, 마지막으로 광주항쟁사건이란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이후, 1980년 5월 18일,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전두환----12.12군사쿠테타의 주역이자 신군부의 상징인 전두환 장군----의 퇴진과 비상계엄령의 철폐와 김대중의 석방 등을 요구하며 일어났던 민주화운동을 말한다. 여순사건 때에도 수많은 민중들이 희생되었고, 제주도 4.3사건 때에도 수많은 민중들이 희생되었으며, 광주항쟁 때에도 수많은 민중들이 희생되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수난의 역사이며, 수많은 민중들의 희생의 역사이다. 그 첫 번째 이유로는 대한민국의 국력과 민심을 결집시킬 수 있는 세계적인 대사상가(대정치가)를 배출해내지 못했다는 점에 있는 것이고(우리 한국인들의 백만 두뇌의 양성의 실패), 그 두 번째 이유로는 저마다의 눈앞의 사소한 이익을 위하여 전체의 이익을 훼손시켜버린 점에 있는 것이다. 사상가의 부재는 동서화합형의 정치인들을 낳지 못하고, 사색당쟁의 어릿광대들만을 양산해내게 된다. 또한 사상가의 부재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변증법적으로 종합하여 새로운 국가의 이념을 창출해내지 못하고,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남북분단만을 더욱 더 고착시키게 된다. 사상가의 부재는 우리 한국인들의 주체성의 상실로 이어지고, 따라서 우리 한국인들은 단 한 번의 전쟁도 해보지를 못한 채, 대한민국 전체를 이민족의 아가리에다가 통째로 가져다가 바치게 된다. 여수와 순천 사람들이, 즉 우리 한국인들이,
“쩌기 저 제주도 선상님은 뭐 좀 알란가 모르겄소마는, 제주도 비는 요새도 사삼사삼 내린담서요 어허, 거 전라도 영암이라 월출산 출신 이쁜 아낙 시인이 그럽디다 헌디, 광주 비는 시방도 오씹팔오씹팔 내리고 여수순천 비는 씹씹구씹씹구 내리요”
라고, 그 한을 품게 된 것도 이 사상가의 부재탓이고,
“또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끝도 갓도 없이 죽어간다/ 빨치산 아지트로 등짐 져다주고 아이고 나 살았다! 부리나케 내려온 놈/ 내려온 놈의 아부지 엄마 각시 동생 사돈네 팔촌/ 산 손님에게 쇠양치 빼앗긴 놈. 쌀 고구마 보리 꿔준 놈/ 그걸 보고도 신고 안헌 놈. 신고했어도 접수 안 된 놈/ 흰 지까다비 신은 놈. 군용 빤스 입는 놈/ 대가리 빼코 민 놈. 손바닥 맨들헌 놈/ 평소에 보기 싫은 놈. 글줄이나 읽어 본 놈/ 못생기고 힘없는 놈. 금이빨 박은 놈/ 은장도 품은 놈. 뒈져도 찍소리 안헐 놈/ 찍소리 허드라도 바로 뒈질 놈. 무슨 죄가 있건 말건/ 저놈이요! 손가락질당헌 놈”
이라고, 밑도 끝도 없이 죽어나간 것도 이 사상가의 부재탓이다. 또한,
“허, 똥 묻은 놈이 재 묻은 놈 나무랜다고 아 누군 되똥거리고 싶었겄소? 쬐끔 쉬었다 갑시다 얘 고수야 이놈아 물 좀 다오 아, 싸게싸게 안 주고 뭣허고 자빠졌냐!/ 우리도 얼마 전에 그랬던 적이 있었지라, 햇볕정책,에 히읗 字만 나오면 뭘 몽땅 퍼준다고 눈깔을 까제끼고 우리부터 배부르고 보자, 보수 보수, 악을 쓴께 잠시 쩔뚝거렸을 때가 있었지라/ 그래도 그때가 봄날이었소 일장춘몽에 과거지사가 되지 않도록 모도덜 정신들 차리고 마음의 창을 다시 열어야 안 쓰겄소? 그건 그렇고 또 갑시다”
라고, 또다시, 보수우익들이 남북분단의 장벽을 더욱 더 걸어 잠그게 된 것도 이 사상가들의 부재탓이고,
“아닌 게 아니라 뒤져묵어도 엔간히 뒤져묵어야제 몇 천억씩 포대기로 망태기로 포크레인으로 다발다발 몽땅몽땅 싸그리 꿀떡, 요러다가 몇 놈은 골로 안 갑디여”
라고 온갖 부정부패를 연출해낸 것도 이 사상가의 부재탓이다.
양해열 시인의 [저어새타령]은 그의 비평의 윤리학의 토대 위에서 꽃 피어난 시이며, 모든 비평의식이 마비된 이 시대에 가장 아름답게 꽃 피어난 장시 長詩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라도의 한과 판소리 타령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전라도의 사투리와 모국어의 자유자재로운 구사능력, 또, 그리고,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대한 역사 철학적인 지식과 그 풍자와 해학의 정신 등, 그 어느 것 하나 제일급의 덕목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21세기는 양해열의 시대가 되고, 우리 대한민국은 양해열을 배출해내기 위하여 그토록 어렵고 힘든 세월을 견뎌 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상가란 천재의 다른 이름이고, 천재란 모든 인류의 스승이자 문화적 영웅을 말한다. 우리 대한민국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와도 같은 천재들을 배출해냈더라면 세계제일의 민족이 되었을 것이고, 또한, 부처와 예수와도 같은 종교창시자들을 배출해냈더라면 세계제일의 민족이 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 보다는 더욱 더 작은 인물들, 요컨대 넬슨 만델라와 이광요 수상과도 같은 천재들만을 배출해내었다고 하더라도 우리 대한민국은 남북통일을 이룩하고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의 문화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물 위를 걸어다니고, 홍해바다가 쩌억 갈라지는 기적을 연출해내지 못한 채, 어떠한 세계적인 사상가도 배출해내지 못한 우리 한국들의 무지의 댓가는 [저어새타렁]의 그것처럼, 민족소멸이라는 혹독한 댓가를 치루게 될는지도 모른다. 철학을 가르치지 않고 있는 죄,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을 가르치지 않고 있는 죄, 대한민국의 어린 학생들을 입시지옥으로부터 해방시켜주지 못하고 있는 죄는 우리 대한민국을 이민족에게 팔아먹은 매국노들의 죄보다도 더 크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상가란 비평의 윤리학으로 무장된 천재이며, 이 세상의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논쟁의 무대)에서 천하무적의 상승장군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의 눈은 비평의 눈이고, 나의 입도 비평의 입이다. 나의 코도 비평의 코이고, 나의 귀도 비평의 귀이다. 나의 두뇌는 비평의 이성으로 명료해지고, 나의 심장은 비평의 열정으로 뜨거워진다. 나의 꿈은 비평의 힘으로 머나 먼 미래을 향하여 시간여행을 떠나고, 나의 용기는 비평의 힘으로 천하무적의 용기로 타오른다. 비평이란 싸움의 수단이며, 이 싸움이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라는 종이 건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비평(싸움)이 없다면 바보와도 같은 인간들만이 모여서 종이 쇠퇴하거나 끝끝내는 이민족의 공격을 받아서 소멸되어가고 말 것이다. 비평이란 살아 있음의 구체적인 증거이며, 나와 모든 유기체들의 존재증명이다. 비평의 윤리학은 투쟁속의 윤리학이며, 이 윤리학이 있기 때문에 투쟁 속의 조화를 이룩하게 된다. 전쟁과 평화, 윤리와 반윤리, 천사와 악마, 적과 동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남과 여, 진실과 허위, 너와 나, 백인종과 황인종, 일본인과 한국인, 기독교와 불교, 한나라당과 민주당, 보수와 진보 등----, 만일, 이 상호경쟁과 이 상호경쟁의 균형이 무너지게 된다면 어떠한 종도 그 건강을 유지해나갈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내가 비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직무유기이며, 궁극적으로는 종족의 명령을 거역하는 반인륜적인 역도와도 같은 짓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건강은 적의 건강이고, 적의 건강은 나의 건강이다. 내가 ‘비판하고 비판할 때마다’ 나의 적은 더욱 더 건강해지고, 또한, 내가 ‘비판을 받고 비판을 받을 때마다’ 나는 더욱 더 건강해진다. 모든 문명, 역사, 사회, 단체, 직장, 정당, 국가 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은 모두가 비평의 검투사들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칼날로 우리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베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대들의 미덕과 가치관들은 이제 그 존재론적 기반을 상실해버렸고, 새로운 비평의 윤리학이 동시대의 미덕과 가치관으로 자리를 잡아 나가게 될 것이다. 나는 위험스러운 검투사, 나는 잔인무도한 신성모독자, 나는 동시대의 미풍양속의 살해범이 되어감으로써, 나와 나의 부모형제들과 스승들과 제자들과 사제들과 친구들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모든 악마들마저도 나의 낙천주의 사상의 신전으로 인도해가려는 천사가 되고 싶은 것이다. 당신도, 당신도, 수많은 당신들도 위험스러운 검투사, 잔인무도한 신성모독자, 동시대의 미풍양속의 살해범이 되어감으로써 인류의 역사상, 가장 고귀하고 훌륭한 문화적 영웅이 되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비평이란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이란 수많은 재화와 가치들을 획득하고 배분해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천하무적의 상승장군만이 그 권리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당신도, 당신도, 부처를, 예수를, 마르크스를, 칸트를, 호머를, 셰익스피어를 단 칼에 살해해버릴 수가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가 못하다면 당신은 아직도 젖 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어린 아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한국인들은 아직도 유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민족이고, 결단코 비평의 칼날을 잡을 줄도 모르는 어리석은 민족에 불과하다.
나의 비판의 칼날은 더없이 날카롭고 예리하다. 이 모든 것들, 즉, 사상, 이론, 도덕, 관습, 미덕 등은 나의 비판의 칼날을 받아야만 한다.
그대는 나의 칼날을 더욱 더 잘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되고, 요컨대, 나의 기고만장함을 저승사자의 그것처럼 단 칼에 베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ㅡ 2009년『애지』여름호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