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도정(傅興都正)의 집성촌
역사란 무엇인가?
이어령 은 “역사란 흘러가버린 시간이 아니라, 괴어 있는 시간, 미래를 향해 도리어 흘러내려오는 그런 시간” 이라고 말한다.
그 역사를 통하여 눈과 귀가 열린 자에게 진리와 지혜, 용기를 전수하는 학습공간이자 체험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현재 4차 혁명이 시작되고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변화 되어 가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지만, 역사는 영원히 계속 되어간다.
성종 대왕의 3남 왕자 완원군(完原君) 의 7명의 증손자들은 선조 때의 국난(1592년 임진왜란, 1596년 이몽학 의 난, 1597년 정유재란)과 광해군 때의 국운이 혼탁한 시대를 전후하여 한양을 떠났다. 우리 지파조이신 부흥도정(傅興都正)께서는 충청도 보령현 향장에 터전을 마련하여 정착하게 된다. 이때부터 보령현리는 부흥도정(傅興都正) 후손들의 집성촌이 되었다.
보령 현리 중 에서 우리 조상들의 삶의 근거지가 되었던 청라는 어떤 곳인가? 백제 때는 신촌현, 통일신라 때는 신읍, 고려 때는 보령현 이조 때는 보령군 이었다. 조상님들이 터를 잡고 살아온 이곳 청라는 금북정맥(錦北正脈: 산경표에서 산줄기의 옛이름)이 바다와 만나기전 커다란 분지를 만들었다. 백월산, 성주산,오서산, 진당산으로 둘러 쌓여있다. 신라고승 도선국사(道詵國師)는 이곳을 둘러본 후 “오성지간(烏聖 之間)에 만세영화지지(萬世榮華之地)가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오서산(791m) 과 성주산(680m) 사이에 만대에 걸쳐 재난없이 풍요롭게 , 번영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곳 이라는 말이다.
만세 영화지지(萬世榮華之地) 가 있는 땅 이곳에 (청라) 부흥도정(傅興都正)께서 낙향 해 사시던 때부터 지금 40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 가문의 역사는 현재의 우리들 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시간이어야 할까, 괴어 있는 시간, 미래를 향해 흘러 내려오는 그런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제발 우리는 눈과 귀가 열려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