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자 : 아난드Anand (mjbuda) · 날짜 : 2003/06/14 오후 4:05
· 꼬리 : 26 / 조회 : 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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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여기 내 눈 앞에 서 있는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유서를 써 보신 적이 있으세요? 그것이 자의였건, 타의였건, 정말 죽음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었건, 아니면 가벼운 기분으로 쓴 것이었건, 유서라는 종류의 글을 써 보신 적이 있으세요?
똑같은 질문을 던지시는군요. 그러는 너는, 유서를 써 보았느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에, 써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딱 세 번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유서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 이끌려 쓴 것은 그 세 번 중 한번도 없었습니다. 제가 다니는 선원에서 방학마다 여는 학생회 수련회에서 빠지지 않고 들어갔던 과제였기에 그저 썼을 뿐입니다. 처음 그리고 두번째까지의 유서는... [제가 죽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특히나 지금까지 부모님께 불효한 것 같아서 더 죄송합니다. 엄마 아빠 다시 태어나면 효도할게요. 사랑합니다. 잘못했어요. 그리고 매일 매일 다투기만 했던 동생에게도 너무너무 미안합니다. 살아난다면 더 잘해주고 많이 양보할겁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에게도...] 운운.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태어나면 더 잘 하겠습니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끊임없는 반성의 말들. 이런 단어들로 빼곡히 A4 종이의 단면을 채워나간 내 유서에 약간의 안타까움 말고도 무슨 의미나 감정이 실려있었는지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자정이 가까운 밤, 시커먼 어둠이 장악하고 있던 삼층 법당 연좌에 앉은 금부처님이 변하지 않을 미소로 지켜보는 앞에서도, 겁없이 배를 깔고 엎드려 유서라는 것을 끼적인 또래 친구들의 유서에도 예외는 없었을 거라 장담합니다.
왜냐하면 어렸고 아직도 어린 우리 모두는 아직 죽음이란 개념을 실감치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솔직히 지금도 죽음의 공포를 맛봤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의 죽음은 물론이고, 친족들이 장수하는 덕분에 가까운 이의 죽음조차도 겪어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렇다고 심한 병을 앓아본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도 나는 죽음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무서운 것, 자신이 알던 세계와 단절되는 것, 막연한 공포. 죽음에 대한 나의 간단한 단상들입니다. 그 이상으로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얼마전, 세 번째 유서를 쓰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간접적으로 경험해 본 죽음은 지금까지 두 번이었습니다. 그것도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던 사람의...
얼마전까지만 해도 무려 6년을 아랫집 윗집으로 지내온 이웃이었던 같은 반 급우는 작년 가을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면 명지 키 많이 컸네, 우리 지은이하고 친하게 지내라, 하고 씨익 웃어주던 아저씨였습니다. 건축회사 사장으로, 지방대의 건축과 교수인 우리 아버지만 보면 술 한잔 하자고 조르던 아저씨였습니다. 똑똑하고 호기심 많은 네 살짜리 늦둥이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하였던 아저씨였습니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내게는 그렇고 그런 이웃집 아저씨들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수업시간 도중 그 친구가 불려가지 않았더라면 작년 가을의 그날도 그저 평범한 하루로 넘어갔을 겁니다. 학교 선생님들이야 쉬쉬하고 있었지만, 바로 아랫집에 사는 친구이다 보니 우리 엄마 귀에 '아랫집 아저씨가 심장마비로 쓰러져서 위독하다더라'라는 소리가 안 들어올 리가 없지요. 그 얘기를 듣고나서도 '에이, 그렇게 건강하셨는데 괜찮으실거야'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음날 부음이 날아들었습니다. 지나친 스트레스 때문에 일어난 심장마비로 인하여, 의식불명상태에서 유언조차도 남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고 하더군요. 깜짝 놀란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게 허망하게 갈 수가 있나? 아직 건강하고 젊었는데도?
...그런 의문과 회의, 걱정, 친구에 대한 동정 따위는 이곳에선 접어두기로 합시다. 내가 최초로 알아차렸다 뿐이지 그런 죽음은 수많은 비극적인 죽음들의 일부일 뿐일테니까요. 그런 죽음은...
또 한가지가 더 남아있습니다. 지금은 초등학교 6학년인 내 남동생 녀석의 4학년 담임 선생님의 죽음입니다. 그분 역시도 나와는 그렇게 잘 알거나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지만, 전교조 교사에 완벽, 원칙주의자여서 아이들 하나하나에 일일이 신경을 쓰셨다는 것쯤은 동생의 입으로 들어 알고있었습니다. 딱 한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내 남동생 녀석과 동갑인 그 선생님의 철부지 아들녀석이었죠. 같이 기타를 배웠는데 어찌나 철없이 구는지 어이가 없었을 정도로 엄마에게 의존하는 철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까불이 녀석을 남겨두고, 올 겨울 그 선생님께선 회식자리에서 쓰러진 그대로 세상을 버리셨습니다. 사인은 과로. 무엇이든 완벽하게 꾸려가려고 애쓴 나머지 그렇게 일찍 가버린 거라고 주위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더군요. 그리고 그 철부지 녀석도...
내가 본 두 죽음은, 모두 가족들을 비롯한 소중한 사람들에게 인사조차도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간 죽음이었습니다. 유서는커녕 유언조차도 남기지 못한 죽음. 그게 뭐였을까요.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그닥 중요하거나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죽음은 아니었겠지만, 아니 오히려 내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죽음이었지만, 왠지... 어쨌거나 나는 서서히 그렇게 두 죽음을 잊어갔고, 그러다 며칠 전 참여했던 수련회에서 다시 한번 유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어두운 삼층 법당, 저번과 마찬가지로 인자하게 미소짓는 석가모니 부처 앞에서, 시체들이 그렇듯 하얀 수건을 뒤집어쓰고 누웠을 때, 뭐랄까, 앞의 두 번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고 없이 사라진 두 사람을 보아서 더 그랬던건지, '나도 어느순간 예고없이 죽게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전해졌습니다. 섬뜩, 짜릿, 찌릿.
신들린 듯이 썼습니다. 가슴에서부터 어깨, 팔, 손목, 손가락, 펜을 쥔 손끝으로 전해지는 짜릿함이 이끄는대로.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두운 촛불 아래서 나는 세 번째 유서를 씁니다. 건방진 문구건, 내가 아는 사실이든 모르는 사실이든 그저 쓸 뿐입니다.
[종점=새로운 시작 죽음=새로운 삶의 잉태라고 한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위의 공식대로라면 내가 지금 맞이하고자 하는 죽음은 하나의 새로운 시작을 품고 있는 것이겠지. 확신은 없지만, 내게 아직 풀어야 할 업식과 인연이 남아있고 윤회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분명 그러할 것이라 믿는다.
지금 많이 답답하다. 가슴이 콱 막힌 것 같다. 죽음이라는 뜻밖의 상황이 나를 공황상태로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정신을 뚜렷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그게 더 두렵다. 멀쩡한 시점으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주시해야한다는 게. 나의 죽음은 어떤 형상으로 다가올까. 무섭다.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여섯 살, 제일 처음 '여기에 내가 있다'는 것을 인식했을 무렵의 질문이 다시 다가온다.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내 최초의 기억이다.
지금 나는 누군가에게 질문하고 싶다. 인제 나는 어디로 가지? 내가 있기는 있었던 것일까?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죽음이란 상황 앞에서 내가 들이댈 수 있는 것,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없다. 나를 사랑해주고 아껴주었던 부모님, 친구들, 은사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내가 사랑하고 애착을 가졌던 모든 것들은 전부 어디로 사라졌나. 나를 나로 남아있게 해주었던 내 이름, 내 기억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나를 끌고다녔던 그것들은 그저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것'들을 소중히 여긴다. 왜? 모르겠어... 알고싶어. 그것들이 나의 무엇이었는지. 나는 그들의 무엇이었는지.
나라는 틀에 매여 있는 건 여전히 변함이 없다. 어디를 가서도 아집에 매여있다면 끊임없이 괴로운 상황이 발생하겠지.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은... 죽고 나서는 자의식이 사라질까? 그럼 조금도 슬프지도 않을테고, 조금도 아쉽지 않을텐데.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을텐데.
나는 나라는 껍데기를 사랑했었다. 내게 주어진 것들 또한 사랑했었고, 가끔씩은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해야지. 사랑도 하고. 무척 힘들고 괴로운 상황을 극복하고 나서는 늘 감사했다. 다행이야. 감사해. 나를 있게 해준 그 자리에...
죽는 게 안타까워. 내가 지금까지 배우고 믿어온 대로라면, 몸뚱이의 죽음은 껍데기가 바스러지는 것에 불과한데. 그런데도 안타까워. 이렇게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마음조차도 놓아버려야겠지?
하지만 상기하자. 오늘의 죽음은 내일의 태어남. 내 업식이 다 풀리지 않은 이상 몸을 바꿔가며 다시 태어나고, 내게 남은 인연들을 하나하나 헤쳐나가겠지. 언젠가는 지금 소중한 사람들과도 다른 모습으로 만나게 될 거야. 그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언젠가는.
어쩌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은 이 생에서 내가 넘지 못했던 많은 산들에 재도전해볼 기회가 주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반드시 슬퍼할 일만은 아니다. 지금의 몸을 벗고 새 몸을 입는다. 새로운 옷을 입는다고 해서 내 몸이 변하는 건 아니잖아? 보이는 게 그렇다 뿐이지. 그러니까 슬퍼할 것도 없어...
그렇게 마음을 추스러본다.
새로운 옷을 갈아입었을 때, 그 자리의 모습이 어떨지 궁금하다. 평온한 마음으로 상황을 받아들여, 매순간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다시한번 아름다운 세계에 경탄과 환희, 살아있음에 대한, [희열]을 느끼고 싶다.]
너무 횡설수설해서 유서라고 하기에도 뭣하지만 나는 그래도 감사합니다. 삶이 내게 유서를 써 볼 기회를 주었으니까요. 언제 어떻게 튀어나올지 모르는 죽음, 새로운 시작에 대하여 만반은 아니지만 약간이나마 준비를 갖추게 해 주었으니까요. 아름다운 우리의 세계에 대해 감사할 기회를 주었으니까요...
삶에게, 그리고 소중한 이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기회가 주어졌기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아난드Anand_.
안녕하세요. 아난드Anand입니다. 스톤님 덕분에 글을 써 보기는 하는데 괜찮을지 모르겠군요..^^;
아직 저는 미완성인 세계에서 살고 있으니, 지금의 생각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자신은 없지만, 이곳을 찾아주시는 분들께 잠시 생각할 시간을 드릴수만 있다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부족한 점이 많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XXX (8/06, 16:01) : 유성보다 밝은 별하나가 떠오르고 있네요....우리 아이들한테도 꼭 읽혀봐야 겠군요...
XXX (8/06, 17:36) : 유서를 쓰는 경험을 통해 삶의 깊은 정수리로 걸어가게 할려는 의도엿다고 여깁니다....앞으로 팬이 될께요~
XXX (8/07, 18:32) : 대단한 사고력을 가진 친구군요~~~평소 죽음에 대해 두려움이 없다 자신하면서 살았는데...허허허 죽음 깊이 생각해볼 화두입니다.... 건필하소서 새싹이 싱그러워 보입니다 ㅎㅎ
XXX (8/08, 08:57) : 아름답습니다. 아난드님 ^^* 사랑합니다.
XXX (8/08, 13:48) : 처음부터 아주 어렵고 무거운 주제를 너무 훌륭히 잘 소화해 냈군요....감탄을 억누르고 있습니다....팟팅!.
XXX (8/09, 00:27) : ^^아주 잘 읽었습니다...사진을 먼저 보았는데..참..기대가 되네요..스톤님..앞으로 더 바빠지시겟어요...
XXX (8/11, 18:26) : 언제 태어남이 있는 가-언제 사라짐이 있는 가! 태어남이란 생각이 일어남이요 사라짐이란 한낱 생각이 사라짐이네! 생겨남과 사라짐이 본래 없는 줄안다면 즐거운 낙이라네!
XXX (8/13, 03:42) : ㅎㅎ............인도의 詩聖, 타고올이 기탄잘리에서 명상하여 얻은 바는 죽음이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라 했는데 우리의 아난다가 벌써 그러한 경계에 와 있음은 청출어람이고 후생가외 라........
XXX (8/17, 16:50) : 온몸을 타고 기어 오르는 소름을 느낍니다...아난드님의 감성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네요. 난 열다섯에 어떤 세계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무릇 아난다님의 정신세계가 몹시도 궁금합니다. 그 안으로 몰래 들어가 훔쳐 보고 싶군요. 건필하세요 아난다님 반갑습니다^^
XXX (8/30, 22:01) : 흠.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면 살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여튼 잘 읽었습니다^^*
XXX (9/04, 10:38) : 놀라움~~~~!!그시절의 나는 무얼햇던가.......ㅡㅡ;;;;;;;;
XXX (9/08, 22:09) : 부모님이 편찮으세요. 많이 불효했지요. 당장 무엇을 돌이킬 수는 없겠지만 나이 많으신 부모님께 성급함으로 무언가 만회하려고 발버둥치는 요즘입니다. 모든 것이 너무 늦지 않은 것이었으면 하며 아직 내 곁에서 자리하시는 부모님께 감사함으로 하루하루를 지킵니다. 이젠 무언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뼈에 저리도록, 젊은 고통과 고뇌가 달게 느껴집니다. 언제나 그렇게 아름다우세요.
XXX (9/11, 09:36) : 생각은 할 수 있다해도 글로 표현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정말 깊은 사고를 하는 학생이군요. 너무 일찍 깊은 사고를 하다보면 ....하여간 대단합니다. 앞으로 큰 재목으로 보여집니다. 놀랍습니다.
XXX (9/13, 11:41) : 나에게 글쓸 시간을 주세요~~^^
XXX (9/17, 19:04) : 친구야~역시 너라는 생각밖에 안드는구나~ 내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봤던게 언제였는지..^^ 유언이라~ 써봤지~마음속으로도 많이 써보고 글로도 써보고 많이 울기도 했었다...역시 니글이라 그럴까? 많이 편안함을 느낀다. 생각을 글로 잘 표현도 해놨고^^하지만..죽음은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라...그부분은 나랑 생각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역시 너다^^
XXX (11/16, 19:08) : 나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걸 실천할 용기는 내게 없었지.. 아니, 그것보다도 삶에대한 미련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것 같다. 네 생각에 많은 공감대를 느끼는구나, 표현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를 느끼고 간다. 그리고 솔직히 유서는 써본 적 없다.
XXX (11/21, 10:02) : 유서...저도 한번 써 볼라요... 아직 한번도 써보지 못했는데......
XXX (2/23, 21:19) : 사십대 사망율이 높아 건강 조심하라는 주위의 말을 지금죽어도 후회가없다는 식으로 얼머부린 내가 유서란 단어에 오히려 생각을 지우려는것은 위선인것 같군요 . 하지만 열심히 사는것이 곧 유서가 되고픈 마음입니다.
XXX (2/27, 23:50) : 한창 사춘기 때는 오히려 감성에 젖어 죽고 싶다는생각과 자살시늉 비슷한것도 해 보았죠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사후세계를 생각하게되고 주위사람들의 반응도 생각하게되니 죽음이란것이 두렵게만 느껴져서 오래오래 살고싶은 생각뿐입니다.
첫댓글이 글은 Saycllub 하루비사랑모임의 중3 여중생인 아난드님의 글입니다.아난드님은 작가하루비에도 가입이 되어 계시며 중3이라는 특수한 사정으로 자주 뵐수 없답니다.저는 이 글을 읽고 벌어진 입을 다물수가 없었답니다.^^자주뵐수 없다는 핑계로 작자의 사전허락없이 옮겼습니다.죄송해요 아난드님.....ㅎㅎ
첫댓글 이 글은 Saycllub 하루비사랑모임의 중3 여중생인 아난드님의 글입니다.아난드님은 작가하루비에도 가입이 되어 계시며 중3이라는 특수한 사정으로 자주 뵐수 없답니다.저는 이 글을 읽고 벌어진 입을 다물수가 없었답니다.^^자주뵐수 없다는 핑계로 작자의 사전허락없이 옮겼습니다.죄송해요 아난드님.....ㅎㅎ
이 글의 작성일이 2003/06/14 오후 4:05 인데 작년 여름쯤에 쓰여진 글을 Sayclub 하루비사랑모임의 [게시글추천]이라는 게시판으로 옮겨지면서 날짜가 바뀐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러니까 이글은 작자가 작가하루비에 가입하기전인 中2때쓰여진것입니다. 그땐 작가하루비 카페는 생겨나지도 않았을때군요^^
작년 여름 올렸던 제 첫 글이로군요. 벌써 일년인가봅니다. 이런 게시판에 첫글로 올라오다니 부끄러울 따름이네요... 감사합니다.
정말 이 글을 중학생이 썼어요? 아난드님이 누구신지 참 대단한분이시군요.제 딸이 중1인데 비교되는데요? 하하 제 딸아이에게 이 글을 읽어보라고 해야겠어요. 말썽만 부리지 말고 이렇게 글 적는것도 좀 배우라고요 하하하 이곳이 점점 마음에 드는데요?
오는길은 순서가 있다고 합니다. 가는길은 순서가 없지요. 누구나 한번뿐인 생의 마지막 날이 온다는 거죠. 좀더 아름답게 사는법을 배워야겠습니다.
전 병원에서 써 본적이 있습니다만 .남에게 신세지고 값지 못하고 가는것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매일 정리 하다싶이 합니다 ..
오늘에서야 일었는데 중학생이 쓴거라니 대단하네요